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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단군조선, 하멸망, 상건국에 깊이 간여

고대 문명/고조선

by Chung Park 2020. 9. 18.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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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 : 13세 흘달단군이 하나라,은나라 교체기에 관여


是歲冬에 殷人이 伐夏한대 其主桀이 請援이어늘 帝以邑借末良으로 率九桓之師하사  以助戰事하신대  湯이 遣使謝罪어늘 乃命引還이러시니 桀이 違之하고 遣兵遮路하야 欲敗禁盟일새 遂與殷人으로 伐桀하시고 密遣臣智于亮하사 率畎軍하시고 合與樂浪하사 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하시고 設官制하시니라.  [단군세기].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1767)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단군세기].

**夷에는 구이가 있다.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이다. 견이를 견군이라고 한 것이다. 

견이의 군대 (견군) : 정인보 「朝鮮史硏究」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는 역사서로 원래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가 정간될 때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서울신문사에서 상(1946.9)·하(1947.7) 두 권으로 간행하였다.

주대(周代)의 淮夷니 서이(徐夷)니 하는 동이종족이 모두 절대한 세력을 가져서 어느 때는 전중국을 진동하였었으니……가장 어귀찬 일부의 진취파의 행적을 들어 보건대 견이(畎夷)라 하는 조선인들이 하걸말년(夏桀末年)에 한토(漢土)를 횡단하야 지금 陜西省 속 빈기(邠岐) 근방에 屯據한 일이 있었으니 ……고조선의 세력권은 고유한 판도이외에 훨씬 넘어 돌았을 줄 안다. 정인보 「朝鮮史硏究」 上 p.55.

 

유향의 <설원권모> : 구이(九夷)가 하은 교체기에 관여

한나라 학자 유향이 쓴 <설원設苑>에 <권모權謀)>편이 있다.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은 동중서와 사마천의 뒤를 잇는 서한 말엽의 대학자이자, 저명한 금문경학(今文經學)가이며, 문학가이자 목록(目錄)학자였다. 자는 자정(子政)이다. 본래 이름은 유갱생(劉更生)이었으며, 고제의 아우 초원왕의 현손이자 종정 유덕의 차남이다. 《신서》(新序),《설원》(說苑),《열녀전》(列女傳),《전국책》(戰國策) 등이 있다. 

≪설원≫은 유향(劉向)이 황실과 민간 장서들 가운데 관련 자료들을 집록한 다음, 선별하고 정리해서 엮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대체로 기원전 17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된 내용은 춘추전국시기 진(秦)나라와 한나라 초기 제자(諸子)들의 언행과 국가 흥망성쇠의 이치, 철리(哲理)와 격언 등을 배합하여 엮은 이야기들이다.

‘설원(設苑)’에 의하면 ‘같은 권모(權謀)에도 정(正)이 있고 사(邪)가 있다. 군자의 권모는 옳고 범인의 권모는 나쁘다’라고 했다. 권모술수라는 익히 들어본 말이 여기서 나왔다.

 

<설원設苑 권모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湯欲伐桀。伊尹曰:「請阻乏貢職以觀其動。」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伊尹曰:「未可。彼尚猶能起九夷之師,是罪在我也。」湯乃謝罪請服,復入貢職。明年,又不供貢職。桀怒,起九夷之師,九夷之師不起。伊尹曰:「可矣。」湯乃興師,伐而殘之。遷桀南巢氏焉。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의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대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

 

중국 하은교체기에 깊이 관여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13세 흘달단군 (김산호 화백 그림)과 하나라 걸왕

단군세기 : 13세 흘달단군이 하나라,은나라 교체기에 관여
是歲冬에 殷人이 伐夏한대 其主桀이 請援이어늘 帝以邑借末良으로 率九桓之師하사  以助戰事하신대  湯이 遣使謝罪어늘 乃命引還이러시니 桀이 違之하고 遣兵遮路하야 欲敗禁盟일새 遂與殷人으로 伐桀하시고 密遣臣智于亮하사 率畎軍하시고 合與樂浪하사 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하시고 設官制하시니라.  [단군세기].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1767)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단군세기].

**夷에는 구이가 있다.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이다. 견이를 견군이라고 한 것이다. 

견이의 군대 (견군) : 정인보 「朝鮮史硏究」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는 역사서로 원래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가 정간될 때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서울신문사에서 상(1946.9)·하(1947.7) 두 권으로 간행하였다.

주대(周代)의 淮夷니 서이(徐夷)니 하는 동이종족이 모두 절대한 세력을 가져서 어느 때는 전중국을 진동하였었으니……가장 어귀찬 일부의 진취파의 행적을 들어 보건대 견이(畎夷)라 하는 조선인들이 하걸말년(夏桀末年)에 한토(漢土)를 횡단하야 지금 陜西省 속 빈기(邠岐) 근방에 屯據한 일이 있었으니 ……고조선의 세력권은 고유한 판도이외에 훨씬 넘어 돌았을 줄 안다. 정인보 「朝鮮史硏究」 上 p.55.

 
출처 : blog.naver.com/gnbone

요약하자면 

①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려하다 (殷人伐夏)  -> ②하 걸왕의 구원요청, 흘달단군이 전쟁지원 ->  ③탕왕(성탕) 사죄 -> ④하 걸왕의 조약위반,약속파기 ->  ⑤단군조선이 이번엔 은나라를 도와 하나라를 치다. ->  ⑥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

 
출처 : 상생출판

유향의 <설원권모> : 구이(九夷)가 하은 교체기에 관여

한나라 학자 유향이 쓴 <설원設苑>에 <권모權謀)>편이 있다.

유향(劉向, 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은 동중서와 사마천의 뒤를 잇는 서한 말엽의 대학자이자, 저명한 금문경학(今文經學)가이며, 문학가이자 목록(目錄)학자였다. 자는 자정(子政)이다. 본래 이름은 유갱생(劉更生)이었으며, 고제의 아우 초원왕의 현손이자 종정 유덕의 차남이다. 《신서》(新序),《설원》(說苑),《열녀전》(列女傳),《전국책》(戰國策) 등이 있다. 

≪설원≫은 유향(劉向)이 황실과 민간 장서들 가운데 관련 자료들을 집록한 다음, 선별하고 정리해서 엮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대체로 기원전 17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된 내용은 춘추전국시기 진(秦)나라와 한나라 초기 제자(諸子)들의 언행과 국가 흥망성쇠의 이치, 철리(哲理)와 격언 등을 배합하여 엮은 이야기들이다.

‘설원(設苑)’에 의하면 ‘같은 권모(權謀)에도 정(正)이 있고 사(邪)가 있다. 군자의 권모는 옳고 범인의 권모는 나쁘다’라고 했다. 권모술수라는 익히 들어본 말이 여기서 나왔다.

 
이윤

<설원設苑 권모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湯欲伐桀。伊尹曰:「請阻乏貢職以觀其動。」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伊尹曰:「未可。彼尚猶能起九夷之師,是罪在我也。」湯乃謝罪請服,復入貢職。明年,又不供貢職。桀怒,起九夷之師,九夷之師不起。伊尹曰:「可矣。」湯乃興師,伐而殘之。遷桀南巢氏焉。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의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대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

요약하자면

①성탕 걸왕에게 시비걸다 -> ②걸왕이 구이의 군사와 함께 쳐들어오다-> ③성탕 사죄 -> ④이듬해 다시 시비걸다 -> ⑤구이의 군사 움직이지 않다. -> ⑥탕왕 군사를 일으켜 걸왕과 전쟁 승리 

 

여기서 처음에 하나라 걸왕을 도운 구이(九夷)의 군사가 나중에는 은나라 탕왕을 돕는다. 바로 단군세기에 나와 있는 기록이다. 

렇듯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은 고조선과 중원나라의 사건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라에서 은나라로 나라가 바뀌는 데도 단군조선의 영향이 지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위 기록에서 우리는 단군조선의 의중에 따라 하나라와 은나라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고대 사서인 한나라 사람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신빙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설원의 기록은 하은 교체기에 성탕이 포악무도한 걸왕을 내쫓고 은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두나라 간의 패권 싸움에서 성패의 관건을 쥐고 있던 구이 곧 단군조선의 강한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해준다. 


북경대 교수 푸쓰넨傅斯年도 “탕이 걸을 내쫓은 것은 동이가 하를 멸망시킨 것과 같다. 상나라 사람들이 비록 동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방의 사람들을 다스린 적이 있고 아울러 그들의 문화를 사용하였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백성들이 하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실제로는 동이인이 하를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상나라 사람이 주나라 사람에게 이라고 불린 것은 경전에서도 증명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後漢書 > 東夷列傳  

桀爲暴虐, 諸夷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걸(桀)이 포악해지니 모든이(諸夷)가 내지(內地)에 침입(侵入)하여 왔는데, 은의 탕왕(湯王)이 혁명하고 난 뒤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後漢書 > 東夷列傳  

여기서 제이(諸夷)는 구이(九夷)이고 구환(九桓)이다

 


하은교체기 연대를 밝혀주는 『단군세기』 와 『태백일사』

『단군세기』는 성탕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치는 연대가 갑오년(BCE1767)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태백일사』에도 역시 갑오(BCE1767),을미년 (BCE1766)의 하은 교체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甲午 遣將 蚩雲出 助湯 伐桀 
갑오년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정벌하였다.

乙未 遣 墨胎 賀湯 卽位 
을미년에 '묵태'를 파견하여 탕왕의 즉위를 축하해 주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

상나라 개국시기를 맞춘 대만 역사학자 백양

21세기 사마천이라는 별명을 가진 역사학자 백양柏楊의 본명은 곽의동郭衣洞으로, 1920년 하남성 개봉에서 태어났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19세의 나이로 종군했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하면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1968년 장제스 정권의 독재와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체포돼 처음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을 거쳐 1977년 풀려났다. 감옥에서는 ‘백양 중국사’ 를 집필했다. 중국 역사서 25사와 자치통감에 의지해 썼다는 "맨얼굴의 중국사" 시리즈가 유명하다 

그는 중국 역사 연표에서 "기원전 1767년(갑오) 이윤이 성탕을 도와 걸왕을 치다" "기원전 1766년(을미)~1754년(정미) 상나라 1대 임금 탕(湯) 임금 자천을(子天乙)"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일부 인용 출처 : 단군조선, 하나라 멸망, 은나라 건국에 깊이 간여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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