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 위만조선과 한(漢)나라와의 전쟁 |
[김탁의 우리역사의 비밀] 한무제의 번조선 침공과 위만정권의 몰락
고조선의 분열과 열국시대의 개막 ③ 조한전쟁의 경과
무제는 예맥조선을 탈취하고 동북방의 고조선 세력인 위만조선을 수중에 넣기 위하여 교섭을 진행한다.
BC 109년에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에게 복속하기를 달랬으나 듣지 않았다. 당시 우거는 인근의 군소국을 병합하고 무역으로서 부를 축적하여 수천리에 달하는 영토를 가지고 강성함을 자랑했다.
교섭에 실패한 사신 섭하가 돌아가는 길에 우거는 조선의 부왕 장長을 송별사로 보냈으나 교섭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섭하는 장을 살해하고 '조선의 장수를 참하였다고 거짓 보고하고 그 공으로 요동 동부도위에 봉해졌다.
격노한 우거는 군사를 보내서 동부 도위부를 습격하고 섭하를 죽여 버렸다.
무제 또한 군사를 보내서 조선을 치니 누선장군 양복에게 수군 5만을 주어서 제나라를 출발하여 발해를 건너 왕험성을 치게 하고 좌장군 순체는 육군을 인솔하고 요동에서 출발하게 하였다.
육군과 수군은 각기 공다툼을 하여 육군 순체의 부장이 수군에 앞서서 진격하였으니 우거군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오니 순체는 부장을 참하였다. 우거군은 국경선인 패수를 건너와 패수 서안에 진을 쳤다.
양복은 수군을 이끌고 공을 급히 세우고자 하여 제나라 군사 7,000을 인솔하고 왕험성을 쳤으나 병력이 작음을 보고 우거군이 성밖으로 나와서 공격하니 한군이 대패하여 양복은 산중으로 달아나서 10여일을 도망 다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육군을 거느린 좌장군 순체 역시 패수 서안에 진을 친 우거군에게 곤경을 당하니 무제는 우거에게 사자를 보내서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우거는 항복할 것을 수락하고 태자를 보내서 사과하기로 하고 10,000명의 군병과 함께 패수를 건너게 했다. 무제의 사자 위산衛山과 좌장군 순체는 조선군이 많음을 의심하고 군마를 두고 패수를 건널것을 종용하니 태자는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여 강을 건너지 않고 돌아왔다.
무제는 교섭실패의 책임을 물어 사자 위산을 벌하고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다시 우거군을 치게하니 우거는 패수를 다시 건너서 왕험성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에 양복이 거느린 수군은 왕험성을 공격하여 그 남방을 에워쌓다.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고 수개월째 농성하자 한나라의 육군과 수군 사이에 시기심으로 인한 균열이 발생하고 우거는 수군과 화의를 성립시키니 육군 역시 우거에게 화의를 청하게 되었다.
무제는 수륙양군이 수개월째 왕험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의를 성립시키는 것을 보고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서 독전하니 그는 왕험성에 도착하여 순체의 말만 듣고서 수군장수 양복을 체포하고 수군을 좌장군 순체의 육군에 배치하니 무제는 격노하여 공손수를 참해 버렸다.
수륙 양군을 지휘하게 된 순체가 왕험성을 급히 치니 우거에게 불만을 가진 조선 귀족층과 장군들은 한군에게 항복하기로 하고 음陰과 장군 왕협王협은 한군에 투항해 버렸다. 이듬해 BC 108년에 조선인 참參이 사람을 시켜 우거의 목을 베어 한군에 투항 하였다. 우거의 뒤를 이어서 대신인 성기成己가 항전을 계속하면서 한군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 이 때 좌장군 양복이 투항한 우거의 아들 장로張路와 한군에게 항복하려다가 피살된 로인路人의 아들 최最를 앞세워 선무공작을 하니 결국 성기를 참하고 위만조선은 기준왕으로부터 왕권을 탈취한지 86년만에 망하게 된다.
위만조선의 멸망은 곧 고조선의 멸망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중요한 사실은 위만조선은 한나라 군대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위만정권에 저항하는 토착조선인들인 최, 참, 음등의 손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한나라의 끈질긴 공격에도 위만조선이 끝까지 저항할수 있었다는 것은 번조선(위만조선)이 그만큼 강성했다는 반증이다.
이후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강역을 두고 북부여의 끊임없는 저항을 받게된다. 기존 사학에서는 위만조선으로 알려진 번조선 위만정권이 몰락함으로서 고조선 자체가 멸망한 것으로 인식이 되어왔다. 다시말해서 고조선(단군조선) ㅡ 기자조선 ㅡ 위만조선이라는 일제가 조작한 역사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거가 멸망한 것은 연나라 장수 위만이 탈취한 번조선이 멸망한 것일 뿐이다. 고조선은 진한, 마한, 번한이라는 삼한관경제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록 번조선이 멸망해서 삼한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고 할지라도 고조선 자체가 멸망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단군왕검계의 직할지인 진조선은 해모수가 일어나서 승계하여 북부여로 이어졌고 고두막한이라는 의병장이 일어나서 한나라 유철 군대에 저항하고 드디어 북부여의 왕권을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고조선(진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 고두막한의 북부여,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로 국통맥이 이어져 내려갔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나라 침략세력에 대한 북부여의 항전
이후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강역을 두고 북부여의 끊임없는 저항을 받게된다. 중국측 기록에는 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하나 무제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던 한사군의 이름이 후한대에 내려와서 낙랑, 진번, 임둔, 현토라는 구체적인 이름이 등장한다. 한사군의 진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해 보기로 한다.
"계유 15년(BC 108) 한漢의 유철劉徹(한무제)이 평나平那를 노략질하려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 하였다. 이에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서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
본문에서 "평나 平那를 노략질하여"라고 했는데 나那는 우리말로 '물가' 나 '곳'을 나타내는데 '평양'을 평나라고 했을 수도 있다. 평양은 곧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 혹은 험독성을 말한다. 왕험성은 오늘날 하북성 산해관의 남쪽 창려현 지방이다.
기존 사학에서 평양이라고 하면 북한 대동강 평양만을 주장하나 이것은 일제 식민사학의 망발이다. 참고로 고대에 평양은 북한 대동강 평양, 만주 요양, 하북성 창려현 왕험성, 북경, 심지어 요임금이 도읍을 한것으로 알려진 산서성 임분시 역시 평양이었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계유 원년 이해는 (북부여)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帝(고두막한을 말함)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 東明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필자 주, 47세 마지막 단군)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 106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 한단고기 북부여기 하, 임승국 주해>
*구려하는 오늘날 남만주 요하를 지칭, 요하의 옛 이름은 구려하, 압록하라고 불렀음
"갑오 22년(BC 87년)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시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 을미 23년(BC 86년) 가을 8월에 서압록하(필자 주, 오늘날 서요하)의 상류에서 한구 漢寇와 여러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 한단고기 북부여기 하>
참고로 한나라에 대한 북부여의 항전은 고무서 단군 재위 계해2년(BC 58년) 북부여 고무서 단군의 계통을 주몽이 잇게 됨에 따라서 자연히 고구려가 이어받게 되었다. 고구려의 다물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한나라의 침공으로 잃어버린 옛 고토을 회복하는 것임을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살펴봄으로서 확실하게 인식할수 있다.
"계유년(BC 108년) 한나라의 무제(BC 141 ㅡ 87) 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계해년(BC 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 高鄒牟(나라이름 추, 소우는 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 多勿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성기전 상>
토착조선인의 반란으로 멸망한 위만정권
위만조선은 한나라 군대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위만정권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인 최, 참, 음등의 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위만정권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인 5명
참參은 삼 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장관격인 니계상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서 위만왕 우거를 죽인 공이 있다. 무제에 의해서 획청후로 봉해졌다.
음陰은 한음이라고도 한다. 역시 장관격인 조선상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 왕겹과함께 한군에게 투항했다.무제에 의해서 적저후로 봉해진 인물이다.
겹은 왕겹 이라고도 한다. 조선인 장군 이다. 조선상 로인, 음과 함께 한군에게 투항 했다. 무제에 의해서 평주후로 봉해진다. 최崔는 조선상 로인의 아들이다. 로인은 왕검성을 나와서 한군에게 항복하러 가는길에 죽었다. 우거의 뒤를 이어서 한군에게 저항한 성기를 살해한 인물 이다. 무제에 의해서 온양후로 봉해졌다.
장長은 우거왕의 아들로서 좌장군 순체의 사주를 받고 최崔와 더불어서 성기를 살해했다. 무제에 의해서 온양후로 봉해졌다.
무제에 의해서 후로 봉해진 인물은 5명 이었지만 실제로 위만조선을 분립해서 조선4군을 지배한 인물은 우거의 아들인 장을 제외하고 조선상을 지낸 참, 음, 겹, 최로 보고 있다.
조선4군은 참(획청후)의 홰청, 음(적저후)의 추저, 겹(평주후)의 평주, 최(온양후)의 날양으로 보고있다 <임승국, 박시인 교수>
다음 편에서는 중국 사서에 기록된 소위 한사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굿모닝충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굿모닝충청(http://www.goodmorningcc.com)
'고대 문명 > 고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구이(九夷) (0) | 2020.07.06 |
---|---|
<펌> 신용하의 고조선의 축제 문화 (0) | 2020.06.30 |
<펌> 위만조선-국사편찬위원회 (0) | 2020.06.21 |
<펌> 기자조선-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뉴스프레스 (0) | 2020.06.21 |
<펌> Tengri (0) | 2020.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