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명/고조선

<펌> 신용하의 고조선의 축제 문화

Chung Park 2020. 6. 30. 15:14
▲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 벽화.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7) 고조선의 축제문화

건국 10월·단군 서거 3월 기념 대축제서 검술 등 9종목 ‘올림픽’… 씨름은 중국 보급 뒤 일본까지 퍼져

전국서 선발된 가수·무용수들 축하공연에 詩歌 낭송도 즐겨… 세계가 인정한 ‘한류’의 원천


 

고조선 문명에서는 공동의 축제문화가 매우 발달했다. 해마다 고조선 고대연방제국의 본국인 밝달조선과 후국들에서 대축제가 전국대회 형식으로 열렸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에는 매해 10월, 3월, 5월에 대회가 열리고 이것이 후국 민족들에게 풍속 관습의 통일을 수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조선의 10월 대회는 고조선의 건국일을 10월 3일(통칭 단군 탄신일)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3월의 대회는 초대 단군이 서거한 달을 3월로 생각해 제례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5월 대회에 대한 설명은 없다. 고조선 고대연방제국 가운데 농경민족들은 두레 등 공동노동을 발전시키고, 5월에는 공동노동의 대축제를 열었는데, 이 대회가 바로 후에 ‘호미씻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된 축제로 추정된다.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 시대에 그에 속한 5부 9족(후국들)의 대표들이 대축제의 경기에 참가해 장엄한 예식을 했고, 수십 일 동안 치러지는 경기에서 승리를 얻고 명예의 상을 받아 돌아가는 자는 후국족의 광영이 됐다고 기술했다. 고조선 문명권의 올림픽인 셈이었다.

신채호 선생은 이러한 축제를 계승, 공유한 나라로 조선, 요(遼), 금(金), 흉노, 몽골을 들었다. 즉 조선족, 거란족, 만주족, 흉노족, 몽골족을 고조선 문명의 축제문화를 계승·공유한 민족으로 본 것이다. 중국 고문헌 기록인 ‘후한서’ 부여국 전에는 “12월 제천(祭天)행사에는 연일 크게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한다”고 했다. 또 후한서 ‘예’전에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이름하여 동맹(東盟)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영고와 예의 무천은 고조선 문명권 축제 문화의 일부이고, 고구려의 동맹은 고조선 문명권 축제문화가 계승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신채호 선생은 대회 때마다 다양한 경기를 벌였다며 한맹, 수박, 검술, 궁시, 격구, 금환, 주마, 회렵 등 8경기를 들면서 이 8가지 이외에도 다수의 경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朝鮮上古文化史). 여기에 필자가 ‘씨름’ 한 가지를 더하면, 고조선 문명에서 축제문화의 경기는 적어도 9종 이상 시행됐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추가한 씨름은 고조선 문명 계열 기록과 유물·유적들에 그 증거가 남아 있다. 필자는 씨름이 매우 일찍이 고조선에서 확립돼 고조선 문명권 전체에 전파되고 그 후예들에게 전승된 힘 기술 겨루기 경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5월 단옷날 씨름을 하는데 중국인이 이를 본받아 경기하면서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료교)’라 한다고 기록했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중국인이 씨름을 본받아 경기하면서 ‘고려기’ 또는 ‘요교’라 부른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국 기원의 것을 모두 고려의 것으로 이름하는 관행이 있으므로 중국인들이 고래로 씨름을 ‘고려기’라고 이름한 것은 씨름을 한국에서 기원한 경기로 매우 일찍부터 인지해 왔음을 알려 준다.

▲  흉노족의 씨름 조각. 고조선족(한국)의 씨름과 완전히 동일하다. (자료 : 山東大學東方考古硏究中心, 東方考古 제1집, 2004, p.286)


씨름은 언제 중국에 전파돼 고려(한국 기원)의 경기로 인식되게 됐을까?

중국 육조시대 제(齊)나라에서 태학박사(太學博士)를 지낸 임방(任昉)은 ‘술이기(述異記)’에서, 치우(蚩尤) 씨는 머리에 뿔 달린 투구를 쓰고 헌원(軒轅)과 싸웠는데, 그의 병사들이 씨름꾼 장사들(각저인(角저人))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맞설 수 없었다고 전해오는 말을 기록하고, 지금 기주(冀州)에는 ‘치우희(蚩尤戱)’라는 오락(음악 포함)이 있는데, 백성들이 2, 3인씩 머리에 소뿔을 쓰고 서로 씨름하는 놀이라고 썼다.

치우는 고조선 이주민(중국인의 속칭 ‘동이’)의 군사영수로서 BC 21세기경 고중국의 헌원과 탁록벌에서 대전을 벌인 고조선 장수였다. 치우가 씨름을 매우 애호했으며, 헌원과 싸움에서도 씨름꾼 장사를 중용했다는 ‘술이기’ 기록은 씨름이 이미 고조선에서 나라의 경기로 애호됐고, 치우의 고조선 이주민 군대에서 군사들의 체육경기로 널리 행해졌으며, 고조선 이주민에 의해 고중국에 도입됐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임방이 ‘술이기’에서 한(漢)조 이후 모든 고중국 씨름(角저戱)은 치우희의 유제라고 기록한 것은, 고조선의 씨름(중국 측에서 본 치우희)을 도입해 본받아 고중국 씨름으로 전승된 것임을 기록으로 명료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후한서’ 부여국 전에는 영화(永和) 원년에 부여왕이 후한의 서울을 방문하자 순제(順帝)가 황문고취(黃門鼓吹)라는 음악과 각저희를 관람케 해서 환영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때 이 각저희가 씨름경기로서 이것이 고조선·부여의 경기이므로 부여왕 환영 관람에 쓴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문명 씨름의 대체적 모습은 고조선을 직접 계승한 고구려의 벽화에 남아 있다. 각저총을 비롯한 고구려 벽화의 경기 모습은 고조선 축제 대회의 경기를 직접 계승한 고구려의 동맹 축제의 경기 종류 일부를 그린 것이라고 본다. 고조선 후국의 하나에 ‘구려’가 있었고, ‘북부여’와 ‘구려’에서 발전한 나라가 ‘고구려’였으므로 고구려는 고조선의 직계 후예 국가였다.

고구려 각저총의 씨름 벽화에서도 허리띠뿐만 아니라 씨름꾼과 심판 모두 끝에 뭉툭한 귀(뿔) 달린 두건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맨 위 사진). 고조선 후국의 하나인 ‘산융’을 계승한 ‘흉노’에서도 씨름하는 모습의 조각 유물이 나오는데 고조선·고구려의 씨름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세 번째 사진).

필자의 견해로는 씨름은 이미 고조선에서는 국기(國技)로서 확립되고 고조선의 3·10월 대축제에서 중요 경기로 채택 실행되고 전체 고조선 문명권에 전파·보급됐을 것이라고 본다. 고조선 문명권의 씨름은 일찍이 고조선 이주민에 의해 고중국에도 보급됐고, 고조선 문명권 해체 이후에는 그 후예들이 서방·동북방·동남방 등으로 민족이동을 감행함에 따라 중앙아시아와 아나톨리아반도, 발칸반도 등과 일본에도 전파됐다고 해석된다. 씨름은 몽골, 흉노, 튀르크족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 종목의 하나였다. 오늘날에도 고조선 문명권의 씨름은 약간 변형되고 발전된 형태로 한국뿐만 아니라 몽골, 중앙아시아 각국,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 일본 등지에서 민속놀이 경기로서 시행되고 있다.

▲  고구려 무용도(고구려 고분벽화).


한편 고조선 문명의 축제에서 빠뜨리면 안 되는 것이 가무(歌舞)다. 고조선을 직접 계승한 고구려 ‘무용총’을 비롯한 고구려의 여러 벽화자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축제에서 노래와 춤은 불가결한 필수적 예능이었다. 무용과 음악이 분리되지 않았음은, 5명의 여자 무용수가 공연하는 앞에 7명의 합창단이 노래하고 있는 이 무용총의 벽화 모습에서도 확인된다(맨 아래 사진).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국 전에는 “은력(殷曆) 정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라고 했다. 이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줬다”고 기록돼 있다. ‘후한서’에서 ‘예’족이 10월 대축제를 ‘무천’이라 이름했다고 기록한 것은 춤과 무용이 고조선 문명에서 얼마나 중시되고 사랑받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몽골과 튀르크 민족들의 전국축제에서 볼 수 있듯 경기에서 승자가 결정될 때마다 축하경연처럼 집단가무단이 나와 집단무용을 하고, 합창 또는 독창을 하는 것은 고조선 문명의 의전절차이면서 관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해마다 두 번 이상 열리는 전국대회 축제에서, 전국에서 선발된 가수와 무용수가 집단 또는 개인으로 경연을 벌이는 까닭에 춤과 노래는 모든 고조선 문명권의 민족들이 중시하고 능숙하게 잘하는 예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 문명의 음악과 무용은 고중국에도 수출됐다. 고중국 문헌 ‘예기(禮記)’는 “매악(樂)은 동이(東夷)의 음악”이라고 기록하고 이의 담당관으로 매사(師)라는 관직을 두었다고 했는데 ‘주례(周禮)’ 매사서조에서는 ‘매악’을 16명의 무용수와 40명의 인원이 긴 창을 휘두르며 추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춤과 함께 그에 맞춘 음악이 연주됐음은 물론이다. ‘매악’(맥 음악)이라는, 긴 창을 휘두르며 56명이 한 가무 집단이 돼 보여주는 매우 씩씩한 고조선의 집단무용과 합창음악이 주나라 시대부터 고중국 국가 행사 가무의 하나로 채용돼 연주·연행된 것이었다.

고조선 문명권의 음악과 무용은, 고조선 문명권이 해체된 뒤에 서방으로 이동한 마자르족의 헝가리 민속음악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3박자와 6박자 음악이 2·4·8박자 음악과 병행 발전해 율동적이고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미끄러질 듯 흥겨운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여기서 반드시 기술해 두어야 할 것이 시가(詩歌) 낭송이다. 중세와 현재의 몽골 축제와 튀르크 축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가무와 함께 운율이 있는 시가가 축제 사이사이에 낭송됐을 것임이 이들 축제에서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단지 이 시가는 기록되거나 구전되지 못해 존재했다는 사실 이외의 더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을 뿐이다. 현재 전하는 고조선 시가는 다음과 같은 서정시가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뿐이다.


님아 강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님이 그예 건너시네(公竟渡河)

물에 빠져 죽사오니(墮河而死)

장차 님을 어이하리(將奈公何)


이 서정시가는 마치 오늘날의 ‘아리랑’처럼 당시 인기가 매우 높은 시가여서 애절한 곡조와 함께 고중국에도 유행돼 널리 애창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진(晉)의 최표(崔豹)가 채록, ‘고금주(古今注)’에 한문으로 번역해 전해지는 창작 동기와 함께 수록해 놓았다. 이것을 조선시대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와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에서 옮겨 기록해 놓았으므로, 국제적으로 불리던 곡조는 잃어버리고 가사만 남아 알려진 것이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던 고조선 사람들이 전국축제에서 운동경기를 즐기며 가무도 경연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가무가 성행했고, 가무를 매우 좋아한 고조선 사람들의 문화유형 성립도 고조선 축제문화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본다. 고조선 문명 축제문화의 이 ‘노래와 춤’에 대한 사랑이란 매우 오래된 전통이, 민족 문화 속에 깊고 깊게 침전돼 한국민족은 21세기에도 노래와 춤, 예능에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 정상에 오를 것이고 이에 전 인류에 예술과 가무의 즐거움을 줄 것이다. (문화일보 5월 20일자 14면 16회 참조)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고조선의 9경기

① 한맹(寒盟)- 얼음물 속에 들어가 좌우 양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로 행하는 경기.

② 수박(手搏)- 무기를 갖지 않고 맨손·맨몸으로 박격(搏擊)하는 경기. 이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이 ‘유술(柔術)’이고, 지나에 전해진 것이 ‘턱견’이라고 했다.

③ 검술(劍術)- 후에 부여의 무사나 고구려의 선인(先人), 신라의 화랑이 가장 중시한 칼싸움 경기.

④ 궁시(弓矢)- 상고시대 지나인들도 고조선의 특징이라고 주목한 활쏘기 경기.

⑤ 격구(擊球)- 대회에 구장을 설치해 남녀노소가 국풍을 이룰 만큼 즐기던 공차기 경기.

⑥ 금환(金丸)- 금환으로 사람을 치는 경기. 최치원의 금환시(金丸詩)가 이 경기를 두고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⑦ 주마(走馬)- 말달리기 경기.

⑧ 회렵(會獵)- 사냥 경기.

⑨ 씨름(角저)- 두 사람이 서로 잡고 다리·손·허리 등의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