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 대한 역사 자료는 매우 부실하다.
삼국사기 자료를 보면 어떤 때는 헛웃음이 나온다.
이는 우선 삼국사기의 편자 김부식의 과오가 크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서 신라를 더 미화하기 위해 신라에게 부끄러운 역사는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장수왕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이다.
고려 후기에는 몽고에 밀려 동아시아로 밀려 가 있어 그 전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신당서 후당서가 전부인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물론 일차적인 왜곡은 중국 사가들이 했을 것이고, 여기에 이차적으로 김부식이 더 왜곡했을 것이다.
삼차적으로는 일제때 삼국사기를 왜곡한 자들이 한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더 왜곡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광개토태왕의 비문이 남아 있어 일련의 편린을 우리가 알 수 있다.
필자는 신라는 페르시아, 백제는 로마라 했다. 지난 세개의 글에서 이를 어느 정도 설득할 수 있는 자료를 보였다 생각한다.
신라는 페르시아의 역사자료가 풍부히 남아 있어 오히려 삼국사기를 능가하는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백제 또한 국내자료는 부실하지만, 풍부한 로마 자료를 바탕으로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고구려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로마와 관련된 자료, 페르시아와 관련된 자료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백제, 신라의 역사 시점을 찾아 이를 로마사나 페르시아사에서 찾아 보는 방법을 택했다.
신라에서는 245년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고 한 기록이 고구려와 관련된 첫번째 기록이다.
백제에서는, 246년 고구려가 낙랑 대방과 싸울 때, 낙랑의 변경을 공격하여 일부 주민을 잡아왔다고 한 기록이 처음 고구려를 언급한 기록이다. 실제 군사적 충돌은 286년 대방의 구원 요청을 받고 고구려와 싸운 것이 백제가 처음 고구려와 싸운 기록이다.
따라서 신라 백제에서는 245년 즈음에 고구려와 접한 기록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서양 역사에서는 이때 쯤 고트족의 Kniva왕 ( 250? - 270?)이 고트족 역사로 처음 나타된다.
그리하여 서고트족의 스페인지역 왕국까지 509년까지의 역사가 고트족 역사이다.
훈족에 관한 자료는 광개토태왕이 등장하는 395년부터 아틸라 사후 469년까지의 자료 뿐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집중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이번 글에서는 250년 즈음에서 382년까지의 시기의 고트족 역사를 살펴 보며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백제 고이왕 (234-286)시기의 로마는 무려 22명의 황제를 거친다.
(참조 : http://blog.naver.com/lainfos, 로마제국 (BC 27-AD475) )
대개 오랜기간 치세를 나타내는 기록은 뭔가를 감추는 것을 보여 준다.
정변이라든지 전사하는 기록 등을 감추기 위해 삼국사기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로마는 3세기에 장수들이 황제를 차지하는 혼란의 시기 (Military Anarchy)였다. 그러나 그만큼 전쟁이 많았다. 무인 출신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지역이름을 따서 Maximus XX 칭호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이미 신라 연구에서 알아 본 바, 고구려와 연관이 있을 수 있는, Germanian war 중에서 서쪽 - Hispania, Britain, Gallia(Alemanni, 거란족?) - 지역을 제외하고, 그 동쪽지역 - 중부 유럽 보헤미아 지역, 동부유럽 - Pannonia지역, 발칸지역(Dacia, Moesia). 흑해 북부지역 - 즉 Goths 족, Sarmatians 족 지역에 대해 주로 살펴 보고자 한다.
The Roman Empire in AD 120 and Germania (source : Wikipedia)
아래 그 리스트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235-236 : War against Dacians and Sarmatians by Maximus Thrax (r 235-238)
Maximinus' first campaign was against the Alemanni, whom he defeated despite heavy Roman casualties in a swamp in the Agri Decumates.[22] After the victory, Maximinus took the title Germanicus Maximus,
Maximinus may have launched a second campaign deep into Germania, defeating a Germanic tribe beyond the Weser in the Battle at the Harzhorn.
Maximinus then set up a winter encampment at Sirmium in Pannonia,[12] and from that supply base fought the Dacians and the Sarmatians during the winter of 235–236
(source : Maximus Thrax, Wikipedia)
이 시기의 고구려 동천왕(227-248) 자료에는 이에 관한 자료가 없다. 소설 속의 오나라 위나라 자료만 나열하고 있다. 위의 235-236 전쟁 기간의 Dacians과 Sarmatians은 고구려의 세력으로 보인다.
2) 245-246 : Invasion of Carpi to Dacia and Moesia in Philip the Arab (r 244-249)
In 245, Philip was forced to leave Rome as the stability established by Timesitheus was undone by a combination of his death, Gordian's defeat in the east and Philip's decision to cease paying the subsidies.[34] The Carpi moved through Dacia, crossed the Danube and emerged in Moesia where they threatened the Balkans.[35] Establishing his headquarters in Philippopolis in Thrace, he pushed the Carpi across the Danube and chased them back into Dacia, so that by the summer of 246, he claimed victory against them, along with the title "Carpicus Maximus"
(source : Philip the Arab, Wikipedia)
백제 기록에서는 고이왕 시기 246년 낙랑의 변경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 왔다고 하였다.
상기 Carpi는 낙랑으로 판단된다. Carpi는 초가집과 좌식 생활, 편두를 한 것으로 위키피디아는 말하고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lainfos, Dacia-Carpi 카테고리, Carpi(people) 자료 참조). 낙랑은 원래 고조선의 지역이였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의 변방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잡아오다 (246) (백제, 고이왕, 삼국사기)
이 시기의 고구려 동천왕 (227-248) 자료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아래의 두 자료이다.
十六年 서안평을 공격하다 (242) (고구려, 동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春二月 평양성을 쌓고 천도하다 (247) (고구려, 동천왕, 삼국사기)
동천왕 시기의 위 자료는, 이 시기의 고트족 활동으로 참조한다면, 서안평은 중부 유럽 지역으로 판단되며, 평양성 천도는 중부 유럽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해 드네프로강 주위의 환도성에서 항가리 부다페스트(평양성)로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추정은 아래의 378-382 고트족과의 로마 전쟁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Carpatian mountains으로 후퇴한 고트족의 역사를 참조한 것이기도 하다.
"그 뒤 244∼245년 2년에 걸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해 왕이 남옥저(南沃沮)를 거쳐 북옥저(北沃沮) 방면으로까지 패주하였다. 그러나 밀우(密友)·유유(紐由) 등의 활약으로 겨우 이를 몰아냈다. 관구검의 군사 행동은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거느리고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예속된 동예(東濊)를 정벌케 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帶方郡)의 군대는 동예의 항복을 받아 낙랑군에 종속시켰다. 고구려는 이 전쟁으로 인해 환도성이 파괴되어 247년 평양성(平壤城)으로 일시 천도하기까지 했다." (고구려 동천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상기 고구려 자료와 상당히 다른 내용을 로마 자료는 보여 준다. 로마 자료(246년)는 단순히 Carpi 즉 낙랑과의 전쟁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와 관련된 전쟁은 아래 고트족 왕 Cniva의 전쟁 (249-251)에서 오히려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고트족과의 전쟁에서도 고트족과 Carpi가 연합하여 로마를 침입한 것 같은 뉴앙스를 풍긴다. 이들이 침입한 지역은 발칸의 Dacia와 Moesia 지역으로 다뉴브강의 주변 지역이다. 따라서 고구려보다는 백제 지역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위의 고구려 자료는 로마자료에 비해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위나라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위의 위나라는 삼국지연의 소설 속에 나오는 나라이다. 삼국지연의는 명나라때 지어진 소설로서, 당시 조선 정부는 혹세무민하는 가상소설이라고 하여 금서 조치하였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미 망한 한나라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설로 보인다.
필자는 한나라가 왕망에 의해 망했고 이후는 박혁거세의 신라가 이어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소설은 페르시아 신라를 유비의 촉한으로, 고트족, 훈족의 고구려를 조조의 위나라로, 그리고 다뉴브강 (장강) 아래 로마 (백제)를 오나라로 상정한 것 같다. 이 삼국지연의 소설 배경기간이 234-246 기간이라 추론되는데, 위나라가 오나라와 촉한을 멸망 시키고 일시적으로 통일하는 내용인데, 위나라 즉 당시의 고구려 세력의 강성함을 말하는 듯 하다. 여하튼 이러한 소설속의 이야기를 역사에 끼워 넣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이며, 중국 사가들의 농단에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삼국사기가 고려 후기 중국 사서들의 자료를 바탕삼아 편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중국 사가들의 농간에 그대로 놀아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장수왕 자료에 북위에 사신을 보낸 것만 나열하는 자료를 보인다.
중국 사가들의 농간은 흉노의 자료에서도 여실히 드러 난다. 고구려 자료가 없어 흉노 자료를 참조하려 했더니 한서에 의한 자료라며 위키백과에 실린 자료를 보면 왕권다툼과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내용만 나온다. 역사적으로 한나라가 흉노에 많이 시달렸는데, 그들과의 전쟁 내용 등은 거의 없다. 결국 쓰레기 같은 자료만 남은 것이 되었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lainfos, 흉노 편 자료 참조)
우리는 중국 역사서를 참조하는데 주의를 요하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의 참역사를 알려면 서구의 많은 자료를 연구해야 함을 말해 준다. 한자나 우리말만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국사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유럽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지역의 언어도 공부하는 폭넓은 공부가 필요하다. 한자와 우리말만 알고서 국사를 연구하는 우물안 개구리식 연구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3) 249-251 : invasion by Goths King Cniva and by Carpi to Dacia & Moesia
In 249 the Goths, led by King Cniva, invaded the Danubian provinces of the Roman Empire with a huge force. They split into two columns; one column launched an assault on Dacia, and the other force, made up of 70,000 men, and personally led by Cniva, invaded Moesia.
Herennius Etruscus was sent forward with a vanguard, followed by the main body of Roman forces, led by Decius.[6] Decius and Herennius Etruscus took the Gothic forces by surprise in the Battle of Nicopolis, and beat them decisively. Following the crushing defeat, Cniva retreated over the Haemus Mons (Balkan Mountains), and met up with his other forces at Philippopolis. Cniva then ambushed the forces of Decius and Herennius Etruscus at the Battle of Beroe, near the small town of Beroca at the base of the Haemus Mons. The Roman forces were beaten decisively in this engagement and fled in disarray to Moesia where Decius and Herennius Etruscus worked to reorganize them.
Decius and Herennius Etruscus launched a counterattack in spring 251 and were initially successful in pushing back the Goths. However, Cniva set an ambush for them, in June 251, near Abritus (modern-day Razgrad, Bulgaria).[4][7] In this battle, both Decius and Herennius Etruscus were killed.
(source : Herennius Etruscus, wikipedia)
Map of the Gothic Invasion led by Cniva
Whether these were consisted only of Goths is rather unlikely so the name "Scythians" by which the Greek sources called them (a geographical definition) seems more appropriate.[11] It is quite possible that other people of Germanic and Sarmatian origin (like Bastarnae, Taifals, and Hasdingian Vandals), perhaps Roman deserters as well, had joined the invaders.[12] However, the name of the king is indeed Gothic and probably genuine.[13] Meanwhile the Carpi invaded Dacia, eastern Moesia Superior, and western Moesia Inferior.[14]
(source : Battle of Abritus, wikipedia)
Cniva (fl. mid-3rd century AD) was a Gothic king who invaded the Roman Empire. He successfully captured the city of Philippopolis (Plovdiv in Bulgaria) in 250 and killed Emperor Decius and his son Herennius Etruscus at the Battle of Abritus as he was attempting to leave the Empire in 251. This was the first time a Roman Emperor had been killed in combat against barbarians.
....
After the battle, the new emperor, Trebonianus Gallus, let Cniva leave with his spoils, and aided the Goths' departure. He even promised to pay a tribute to Cniva in order to keep him from invading the empire again....
In 271, the Emperor Aurelian conclusively defeated the Goths and killed their king Cannobaudes in battle. Based on the similarity of the names, that king might coincide with Cniva.[13]
(source : Cniva, wikipedia)
위에서 언급한 동천왕(227-248) 시기의 위, 낙랑, 대방 전쟁과 유사한 내용을 보여 준다. 시기적으로는 249-251 기간은 중천왕 (248-270) 시기에 해당한다. 중천왕 재위시기가 고트족의 Cniva (r 250? - 270?) 재위시기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시기 삼국사기 중천왕 기록에는 동생의 모반(248)과 관나부인으로 인한 혼란상(251)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관나부인을 서해바다에 수장했다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서해바다가 어디인지 궁금하다.
251년 왕비 연씨와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투던 관나부인(貫那夫人)의 투기가 심해 서해바다에 수장하였다 (고구려, 중천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편 259년 위의 침입을 막아내고 오히려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중천왕 시기의 고구려 군사력이 매우 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트족의 Cniva 왕은 Sarmatian origin or Germanic origin 여러 부족과 함께 공격했음을 위에서 언급하고 있다. 즉 Bastarnae, Taifals, Vandals 등과 함께 그리고 아마도 Carpi와 함께 공격했다. 로마는 공물을 주기로 하고 협상을 한 듯 하나, 이를 지키지 않아 아래 253년에 다시 쳐들어와 소아시아 깊숙히 카파도키아까지 쳐들어갔다. 이후 270년 전사할 때까지 계속 로마와 충돌한 것을 감안하면, 그리고 정복군주 로마의 Aurelian 황제시 Dacia 지역을 포기한 것을 보면 (아래 글 참조), Cniva왕시 고트족이 차지한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중부유럽에 있는 Vandals족도 속국으로 두고, 중부유럽에서 발칸반도 위의 다뉴브강 북쪽지역 모두 (Taifals, Bastarnae, Carpi)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복군주의 한 나라나 가능하지 일개 부족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 지역에 있을 수 있는 나라는 고구려이다. 이 시기가 고구려의 중천왕 시기라면 중천왕은 대단한 군주로서 이후 호칭되는 호태왕의 칭호를 가질 만하다.
고트족의 최대 정복군주 Ermanaric (296-376)시기에 아랄산맥에서 흑해, 발트해까지 정복했다 하는데 (블로그 글, http://blog.daum.net/lainfos, category Goths, 'Ermanaric' 글 참조), 이 시기가 고구려의 미천왕과 고국원왕 시기이며, 이때 호태왕의 호칭이 있었다 했다 (나무위키, 미천왕 (시호 호양왕) 자료 참조). 발트해의 스웨덴은 Suebi족이며, 광개토태왕시 로마정벌시 동참하였는데, 이들은 'Suebian Knot' 라 하여 우리 상투(=Top Knot)와 조금 다르지만 머리 뒤에 머리를 틀어 올려 묶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인신공양의 풍습이 있는 민족이다. (블로그글 http://blog.daum.net/lainfos, Category Suebi 글 참조) 이들은 훈족과 half-brother이라며 (http://blog.daum.net/lainfos, Category Goths, 'Arheimer' 참조) 훈족과 함께 정복활동 했으며, Ostrogoths(동고트족)라 불리는 민족이다. 어느 재야사학가가 연구한 글에서 돌궐인 고구려가 발트해까지 진출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즉 발트해까지 진출한 고트족이 고구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스웨덴 Carl Mines Museum (Lidingo)의 고구려식 치의 성곽과 우물 (source : Wikipedia)
4) 253 : Invasion of Goths led by Cniva to Cappadocia, Pessinus and Ephesus
In 253, the Goths, led by king Cniva, claimed they had not received the tribute due from the Romans according to the treaty of 251. They crossed the border and attacked Cappadocia, Pessinus, and Ephesus. Modern historians believe that this missing payment was not a change in Roman policy, and the Goths were more likely trying to capitalize on their military prowess.[9]
Aemilian had command of the army assigned to defend the area, but the recent defeat at the Battle of Abrittus put his troops on edge. Aemilian exhorted them, reminding them of Roman honor (according to Zosimus) and promising tribute from the Goths (according to Zonaras). The Romans took the Goths by surprise, killing most of them, followed by an invasion of Goth territory resulting in booty and the liberation of prisoners. The Roman soldiers, gathered by Aemilian, acclaimed him Emperor.[5][12] Jordanes claims, however, that Aemilian's troops plundered Roman territory, rather than keep the tribute of the Goths.[13]
(source : Aemilianus, Wikipedia)
253년 로마는 고트족의 침입을 급습하여 대부분 살해하고 전리품을 많이 챙기고 Aemilian 군대가 고트족으로부터 공물을 받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Jordnaes는 Aemilian troops(아마도 용병)이 고트족의 공물을 받는 대신 로마 지역을 약탈했다고 주장했다. Jordanes는 고트족 Christian으로서 'The origin and Deeds of the Goths' 라는 역사서를 6세기에 썼다. 필자가 읽어 보니 다소 신빙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도 많이 보인다. (http://blog.daum.net/lainfos, Category Goths, 영문글 참조)
이러한 로마의 승리 주장은, 다음 해부터 고트족의 침입이 계속되고 267-269에 해로를 통한 고트족과 그외 다른 종족들이 연합한 대규모 공격이 있는 것을 보면 (아래 글 참조), 그렇게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로마사를 공부해 보면 알겠지만, 페르시아(신라)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한 후에는 꼭 전염병이 돌아 패배했다느니, 황제가 전염병으로 죽었다느니 하는 핑계를 댄다. 꼭 김부식이 신라사를 미화하기 위해 감추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짓을 한다.
5) 258 : Invasion of Goths to Asia Minor
In 254, 255, and 257, Valerian again became Consul Ordinarius. By 257, he had recovered Antioch and returned the province of Syria to Roman control. The following year (258), the Goths ravaged Asia Minor.
(source : Valerian, Wikipedia)
258년에는 고트족이 소아시아를 유린했다 하는데, 로마의 반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피해만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굴욕적인 협상을 했기 때문일까?
아래 백제 고이왕 자료에는 말갈과 강화한 은유적인 표현만 보인다. 백제사에서는 3세기 중반 처음 고구려가 언급되기 전에는 모두 말갈의 침입으로 언급된다. 온조왕때부터이다. 로마사에서는 이때에 서부 유럽의 Gallia, Britannia, Hispania, 중서부의 Upper Germania, 또는 중부유럽의 Goths, 동부유럽의 Sarmatians 등 모두에 해당한다. 말갈도 8부족이 있다 하는데, 향후 백제 초기를 연구할 때 분석해 볼 예정이다.
고구려 자료에는 259년 구체적인 승리가 서술되는데, 상대가 위나라이다. 앞에서 필자는 위나라의 존재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단지 양맥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한 것에 의미를 주고자 한다. 양맥의 위치에 대해서는 유리왕 등 다른 시기에도 나오니 앞으로 보다 연구가 있을 것이다.
二十五年 말갈의 추장 나갈이 말을 헌상하다 (258) (백제, 고이왕 (234-286))
259년 위나라 장수 울지해(尉遲楷)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임금 본인이 친히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추정되는 양맥(梁貊)에서 친정해 이들을 격파허고 8천여 명의 수급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 중천왕 (248-270))
6) 267-269 : Naval invasion of Goths & other barbarians to Greece (Athens, Sparta)
and to Thrace and to Illyrium and Pannonia
In the years 267–269, Goths and other barbarians invaded the empire in great numbers. Sources are extremely confused on the dating of these invasions, the participants, and their targets. Modern historians are not even able to discern with certainty whether there were two or more of these invasions or a single prolonged one. It seems that, at first, a major naval expedition was led by the Heruli starting from north of the Black Sea and leading to the ravaging of many cities of Greece (among them, Athens and Sparta). Then another, even more numerous army of invaders started a second naval invasion of the empire. The Romans defeated the barbarians on sea first. Gallienus' army then won a battle in Thrace, and the Emperor pursued the invaders.
(source : Gallienus, Wikipedia)
At the time of Claudius' accession, the Roman Empire was in serious danger from several incursions, both within and outside its borders. The most pressing of these was an invasion of Illyricum and Pannonia by the Goths.[15] Although Gallienus had already inflicted some damage on them at the Battle of Nestus,[22] Claudius, not long after being named Emperor, followed this up by winning his greatest victory, and one of the greatest in the history of Roman arms.[20]
The Roman Empire in 268 A.D.
At the Battle of Naissus, Claudius and his legions routed a huge Gothic army.[2] Together with his cavalry commander, the future Emperor Aurelian, the Romans took thousands of prisoners, destroyed the Gothic cavalry as a force, and stormed their laager (a circular alignment of wagons long favored by the Goths).[dubious – discuss] The victory earned Claudius his surname of "Gothicus" (conqueror of the Goths), and that is how he is known to this day. More importantly, the Goths were soon driven back across the Danube River by Aurelian, and nearly a century passed before they again posed a serious threat to the empire.[20]
(source : Claudius Gothicus, Wikipedia)
Map of naval invasion of Goths in 267-269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269) (백제, 고이왕, 삼국사기)
삼국사기의 백제 고이왕때 이 시기의 기록은 위의 알 수 없는 뜻의 상기 기록뿐이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기록에서도 같은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혜성은 삼국사기에서 정변이나 매우 안 좋은 큰 일이 일어 났을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자미궁 성좌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인터넷에 찾아 보니 임금이 계신 대궐을 비유한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수도에 외세의 적이 침입했다는 것이다.
"자미원(紫微垣): 북극성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별들의 구역으로
자궁(紫宮), 자미궁(紫微宮), 자궐(紫闕), 중궁(中宮)이라는 명칭
이 있고, 진극(辰極: 별들이 있는 공간의 끝)이라고도 하며, 하늘
의 중심 되는 별자리이다. 임금이 계신 대궐에 비유하며 중궁의
별들은 모두 인간 세상의 일을 상징한다."
(출처 : 블로그, 위기에 처한 지구, 동양천문도, 라온제나 글)
十五年秋七月 왕이 흰 노루를 잡다 (262)
十五年冬十一月 겨울에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다 (262)
(263-270) : 7년 공백
二十三年冬十月 중천왕이 죽다 (270) (고구려, 중천왕)
중천왕 기록이 263-270년 기간동안 없다. 267-269 기간에 고트족은 흑해에서 에게해까지 대대적인 해로 공격을 한다. 이런 기록을 삭제한 것도 일제의 장난이 아닌가 한다.
반면 기간은 다소 차이가 나지만 대방의 기리영전투 기록이 백제 고이왕 시기에 전해진다. 즉 고트족 고구려의 에게해까지의 공격 내용을 위나라의 공격으로 왜곡한 것이다. 에게해 지역의 아테네, 코린트, 스파르타, 크레타섬, 로더스섬 공격은 이 지역이 미케네문명지로서 미케네문명은 상나라의 문명으로 필자는 판단하는데 (블로그 http://blog.naver.com/lainfos, category 그리스, 'Mycenaean Greece' 글 참조), 결국 이들 지역이 고조선 문명지역으로 한(韓) 지역이 되는 것이다. 또한 고트족의 공격이 Thrace, Illyrium, Pannonia 지역에도 이르렀는데, 이는 낙랑, 대방지역의 전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백제의 고이왕, 즉 로마의 왕이 낙랑의 보복이 두려워서 잡아온 주민들을 돌려 보냈다고 한 것은 한족 사가들이 흔히 하는 허풍의 왜곡으로 판단한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본래 낙랑이 한국을 통치해왔다며, 진한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고 했는데, 통역사가 말을 다르게 전하자,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벌하였는데,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하였다.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위 기록들을 정리하면 전개는 다음과 같다. 중국이 한사군에 미치는 통제력이 약해지자 237~239년 위나라 명제는 태수들을 파견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하고 주변 한(韓) 세력에 회유책을 펼쳤다. 246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선 사이에 낙랑군의 관리였던 부종사 오림은 진한의 8국을 자기 쪽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통역에 차질이 생겨서 한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마침 태수들이 고구려 원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틈을 노려서 어떤 한(韓)의 신지(臣智)는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고, 백제의 고이왕은 낙랑군을 습격했다. 고구려를 공격하러 갔던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은 다시 돌아와서는 복수하겠다며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한(韓)을 정벌하게 되었다. 전투 도중에 궁준이 전사하고 말았지만 결국 낙랑군과 대방군이 승리해서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했던 그 신지(臣智)의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 한(韓)의 신지(臣智)의 세력은 망해버린 반면, 백제의 고이왕은 침공을 두려워해서 낙랑군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내 낙랑군과 화친을 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 "
(자료 : 백제, 고이왕, 나무위키)
중천왕이 270년 죽었다 기록되는데, 아래 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전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중천왕이 Cniva 고트족 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71년 고구려에서는 국상 음우가 죽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된다. 국상은 군권까지 통제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아래 기록은 국상 음우의 죽음일 수 있다. 그래서 전사한 국상 음우를 평가하며 그 아들을 다시 국상에 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In 271, the Emperor Aurelian conclusively defeated the Goths and killed their king Cannobaudes in battle. Based on the similarity of the names, that king might coincide with Cniva.[13]
(source : Cniva, wikipedia)
7) 270-273 : War against Goths, Vandals, Juthungi, Sarmatians and Carpi and Alamanni
Aurelian (Latin: Lucius Domitius Aurelianus; 9 September 214 – c. October 275) was Roman emperor from 270 to 275. His reign featured an unprecedented series of military victories which reunited the Roman Empire after it had practically disintegrated under the pressure of barbarian invasions and internal revolts. His successes were instrumental in ending the Crisis of the Third Century, earning him the title Restitutor Orbis – "Restorer of the World".
Born in humble circumstances, he rose through the military ranks to become emperor. During his reign, he defeated the Alamanni after a devastating war. He also defeated the Goths, Vandals, Juthungi, Sarmatians, and Carpi. Aurelian restored the Empire's eastern provinces after his conquest of the Palmyrene Empire in 273. The following year he conquered the Gallic Empire in the west, reuniting the Empire in its entirety. He was also responsible for the construction of the Aurelian Walls in Rome, the abandonment of the province of Dacia, and monetary reform. Although Domitian, two centuries previous, was the first emperor who had demanded to be officially hailed as dominus et deus (master and god), these titles never occurred in written form on official documents until the reign of Aurelian.[6]
Defeat of the Goths and abandonment of Dacia
The emperor led his legions to the Balkans, where he defeated and routed the Goths beyond the Danube, killing the Gothic leader Cannabaudes, and assuming the title of Gothicus Maximus. However, he decided to abandon the province of Dacia, on the exposed north bank of the Danube, as too difficult and expensive to defend. He reorganized a new province of Dacia south of the Danube, inside the former Moesia, called Dacia Aureliana, with Serdica as the capital.[37]
(source : Aurelian, Wikipedia)
Map of Roman Empire AD 125
로마 황제 Aurelian (재위 270-275)은 정복군주로서 화려한 군사적 성과를 자랑한다. 서부유럽, 중부유럽, 중동부유럽을 모두 제압한 군주로 서술된다. 그러나 Dacia지방은 포기한 것으로 또한 서술된다. 그만큼 Dacia지역의 군사력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또한 로마에 Aurelian Walls을 쌓았다고 한다. 그만큼 로마에 대한 북쪽지역 위협이 컸다는 방증이다. Aurelian 황제는 Alamanni, Goths, Vandals, Juthungi, Sarmatians, and Carpi 를 모두 격파했다고 서술된다.
이 시기의 백제 고이왕 자료는 백지이다. 269-272(3년), 272-278 (6년), 278-283(5년), 283-286 (3년) 기간이 모두 비어 있다. 모두 무려 17년동안의 기록이 없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기록을 삭제한 일제의 농간이 아닌가 한다.
三十六年秋九月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나다 (269)
269-272 : 3년 공백
三十九年冬十一月 신라를 공격하다 (272)
272-278: 6년 공백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278)
278-283 : 5년 공백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283)
283-286 : 3년 공백
五十三年春一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286)
五十三年冬十一月 고이왕이 죽다 (286)
(자료 : 백제 고이왕, 삼국사기)
이 시기의 고구려는 서천왕 시기이다. 가믐과 서리로 농사가 잘 안되어 백성이 굶주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와중에 273년에는 일식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 일식현상은 보통 정변을 의미하고 있다. 다소 혼란한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전쟁이 있었다면 패배할 상황을 보여 준다.
一年冬十月 서천왕이 즉위하다 (270)
二年春一月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다 (271)
二年秋七月 국상 음우가 죽다 (271)
二年秋九月 음우의 아들 상루를 국상으로 삼다 (271)
二年冬十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271)
三年夏四月 여름에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다 (272)
三年夏六月 가뭄이 들다 (272)
四年秋七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273)
四年秋七月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273)
(자료: 고구려, 서천왕, 삼국사기)
8) 275-276 : War against Goths and Heruli
Marcus Claudius Tacitus (/ˈtæsɪtəs/; c. 200 – June 276) was Roman emperor from 275 to 276. During his short reign he campaigned against the Goths and the Heruli, for which he received the title Gothicus Maximus.
七年夏四月 신성에서 흰 사슴을 잡다 (276)
七年秋八月 신성에서 돌아오다 (276) (고구려, 서천왕 (270-292))
로마 황제 Marcus Claudis Tacitus의 재위기간은 275-276 으로 단 2년인데, 고트족과 발트해 연안의 Heruli족과 싸웠다 했는데, 간단한 설명만 있고 암살되었다는 정보도 없다. 그런데 고구려 자료에 276년 신성에서 흰 사슴을 잡았다고 서술된다. 로마 황제 Marcus Claudis Tacitus을 전장에서 생포 또는 살해했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고트족과 Heruli가 모두 고구려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흰 사슴(276, 288년)을 잡았다, 흰 노루(262년)를 잡았다 등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전장에서 백인 왕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표현은 신라사에서도 자주 나오는데, 김부식의 왜곡이라기 보다는 일제의 일본놈들이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한 짓으로 판단된다. 또한 서천왕은 서양왕이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더욱 서쪽으로 진출한 역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9) 282-283 : War against Quadi and Sarmatians on the Danube
280년 숙신(肅愼)이 침입하여 오자 동생인 달가(達賈)로 하여금 반격하게 하여 단로성(檀盧城)을 함락시키고 추장을 죽였으며, 나아가서 숙신인 600여가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에 집단이주시켰고 항복한 부락 6, 7개소를 부용(附庸)주 01)하게 하였다. 이 전과로 인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군사관계 일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또한 양맥(梁貊) 및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고구려, 서천왕 (270-282))
Having inflicted a severe defeat on the Quadi and Sarmatians on the Danube,[22] for which he was given the title Germanicus Maximus,[23] Carus proceeded through Thrace and Asia Minor, annexed Mesopotamia, pressed on to Seleucia and Ctesiphon, and marched his soldiers beyond the Tigris.
(source : Carus (282-283), Wikipedia)
숙신은 음운으로 볼 때 Saxons이 될 수 있다. 이 당시 Saxons은 대서양가에 있었다. 즉 고구려가 대서양까지 진출했다는 것이 된다. 상기 달가의 이야기가 서천왕 시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12세기에 Transylvania에 이동 정착한 사람들도 Saxons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 불로그 http://blog.naver.com/lainfos, category 게르만, 'Saxons'글 참조). 위의 숙신 이야기에서 일부를 부여 남쪽의 오천으로 집단이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과로 인하여 달가를 안국군으로 봉했다 했다. 안국의 안 지역이 중부유럽이 아닌가 생각이 들게 한다.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안'이라 했다. 광개토태왕으로 짐작되는 훈족의 Uldin (r 395-410)은 항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고 항가리인이 주장한다. 부다페스트는 평양성이 있는 곳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안국의 위치가 이 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달가가 양맥과 숙신 여러 부락을 통솔하도록 했다고 한다. 따라서 양맥은 중부유럽의 서쪽이 될 수 있다. 고구려 유리왕이 양맥 등 28개국을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미 이 지역에 온 것일 수 있다.
앞에서 동천왕시 관나부인을 서해 바다에 수장했다(251)는 기록을 보았다. 이러한 사정을 보면 서해는 대서양이 된다.
로마가 282-283년에 Quadi와 Sarmatians과 다뉴브강가에서 싸워 이겼다 했는데, Quadi는 중부유럽에 있었다. 즉 필자의 280년 숙신에 관한 추리가 매우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Having inflicted a severe defeat on the Quadi and Sarmatians on the Danube,[22] for which he was given the title Germanicus Maximus,[23] Carus proceeded through Thrace and Asia Minor, annexed Mesopotamia, pressed on to Seleucia and Ctesiphon, and marched his soldiers beyond the Tigris.
(source : Carus (282-283), Wikipedia)
이 기간동안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구려 모두 기록이 없다. 일제에 의한 의도적인 기록 제거가 있을 수 있다. 단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283)는 기록은 로마 황제 Carus의 페르시아 공격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十一年冬十月 왕의 동생 달가를 보내 숙신의 단로성을 빼앗다 (280)
280-286 : 6년 공백
十七年春二月 왕의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역을 도모하다 (286)
(고구려, 서천왕 (270-292), 삼국사기)
四十五年冬十月 신라의 괴곡성을 포위하다 (278)
278-283 : 5년 공백
五十年秋九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283)
(백제 고이왕, 삼국사기)
10) 286-287 : War against Rhenish tribes and Alemanni tribes
- Campaigns in 286 and 287 against Rhenish tribes
Maximian believed the Burgundian and Alemanni tribes of the Moselle-Vosges region to be the greatest threat, so he targeted them first. He campaigned using scorched earth tactics, laying waste to their land and reducing their numbers through famine and disease. After the Burgundians and Alemanni, Maximian moved against the weaker Heruli and Chaibones. He cornered and defeated them in a single battle. He fought in person, riding along the battle line until the Germanic forces broke. Roman forces pursued the fleeing tribal armies and routed them. With his enemies weakened from starvation,[77] Maximian launched a great invasion across the Rhine.[80] He moved deep into Germanic territory, bringing destruction to his enemies' homelands[77] and demonstrating the superiority of Roman arms.[81] By the end of 287, he had the advantage and the Rhenish lands were free of Germanic tribesmen.[77] Maximian's panegyrist declared: "All that I see beyond the Rhine is Roman."[82]
- Joint campaign against the Alamanni
Early the next year, as Maximian made preparations for dealing with Carausius, Diocletian returned from the East.[83] The emperors met that year, but neither date nor place is known with certainty.[84] They probably agreed on a joint campaign against the Alamanni and a naval expedition against Carausius.[85]
Later in the year, Maximian led a surprise invasion of the Agri Decumates – a region between the upper Rhine and upper Danube deep within Alamanni territory – while Diocletian invaded Germany via Raetia. Both emperors burned crops and food supplies as they went, destroying the Germans' means of sustenance.[86] They added large swathes of territory to the Empire and allowed Maximian's build-up to proceed without further disturbance.[87] In the aftermath of the war, towns along the Rhine were rebuilt, bridgeheads created on the eastern banks at such places as Mainz and Cologne, and a military frontier was established, comprising forts, roads, and fortified towns. A military highway through Tornacum (Tournai, Belgium), Bavacum (Bavay, France), Atuatuca Tungrorum (Tongeren, Belgium), Mosae Trajectum (Maastricht, Netherlands), and Cologne connected points along the frontier.[88]
-----------
By 289, Maximian was prepared to invade Carausius' Britain, but for some reason the plan failed. Maximian's panegyrist of 289 was optimistic about the campaign's prospects, but the panegyrist of 291 made no mention of it.[90] Constantius' panegyrist suggested that his fleet was lost to a storm,[91] but this might simply have been to diminish the embarrassment of defeat.[92] Diocletian curtailed his Eastern province tour soon after, perhaps on learning of Maximian's failure.[93] Diocletian returned in haste to the West, reaching Emesa by May 10, 290,[94] and Sirmium on the Danube by July 1, 290.[95]
(source : Maximian (286-305), Wikipidia)
288년 신성 에서의 고구려 승리를 암시하고 있다. 신성이 어디인지 관심을 두고 살펴 보아야 하겠다. 위의 로마 상황을 고려하면 중부유럽으로 짐작되는데, 보다 더 확인이 필요하다. 276년 서천왕 시기에도 신성에서 흰 노루를 잡았다 했다. 당시에도 로마는 고트족과 Heruli (발틱해 근처 스칸디나비아, 스웨비족)와 전쟁했었다. 즉 신성이 중부유럽에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거듭 말해 준다.
이 시기(288)의 백제 자료는 또다시 공백으로 남는다. 김부식이 했건 일제놈들이 했건 의도적인 지우기로 판단된다.
十九年夏四月 신성에 행차하다 (288)
十九年秋八月 흰 사슴을 잡다 (288)
(자료 : 고구려, 서천왕(270-292), 삼국사기)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286)
一年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286)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287)
287-298 : 11년 공백
十三年秋九月 책계왕이 죽다(298)
(자료 : 백제, 책계왕(286-298), 삼국사기)
11) 294-296 : War against Sarmatians and Carpi
In the Balkans during the autumn of 285, he encountered a tribe of Sarmatians who demanded assistance. The Sarmatians requested that Diocletian either help them recover their lost lands or grant them pasturage rights within the empire. Diocletian refused and fought a battle with them, but was unable to secure a complete victory. The nomadic pressures of the European Plain remained and could not be solved by a single war; soon the Sarmatians would have to be fought again.[68]
Diocletian spent the spring of 293 travelling with Galerius from Sirmium (Sremska Mitrovica, Serbia) to Byzantium (Istanbul, Turkey). Diocletian then returned to Sirmium, where he would remain for the following winter and spring. He campaigned against the Sarmatians again in 294, probably in the autumn,[122] and won a victory against them. The Sarmatians' defeat kept them from the Danube provinces for a long time. Meanwhile, Diocletian built forts north of the Danube,[123] at Aquincum (Budapest, Hungary), Bononia (Vidin, Bulgaria), Ulcisia Vetera, Castra Florentium, Intercisa (Dunaújváros, Hungary), and Onagrinum (Begeč, Serbia). The new forts became part of a new defensive line called the Ripa Sarmatica.[124] In 295 and 296 Diocletian campaigned in the region again, and won a victory over the Carpi in the summer of 296.
(source : Diocletian (284-305), wikipedia)
상기의 백제와 고구려 싸움(294-296)을 삼국사기에서는 연나라와 고구려 전쟁 (293, 296)으로 왜곡하고 있다. 중국 사가들의 왜곡을 김부식이 그대로 받아 들인 결과라 생각한다.
二年秋八月 모용외의 침략을 신성재 고노자가 물리치다 (293)
三年秋九月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다 (294)
五年秋八月 모용외가 침략해오다 (296)
(자료 : 고구려 봉상왕 (292-300),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의 기록 11년 (287-298)의 의도적 지우기 가능성은 위에서 언급했다. 모두 백제의 승리에 관한 내용으로서 시기심에서 또는 한민족 역사 지우기 왜곡의 결과로 보인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287)
287-298 : 11년 공백
十三年秋九月 책계왕이 죽다(298)
(자료 : 백제, 책계왕(286-298), 삼국사기)
그러나 아래의 298년 낙랑 (Carpi)과 고구려(맥인)(Sarmatians)의 침입과 책계왕의 전사 (298) 내용은 위의 로마 자료에서 296년 로마가 Carpi에 승리했다는 기록과 연결되고 있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爲敵兵所害薨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그러나 298년 한군(漢軍 :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책계왕 본인이 친히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당했다. (자료 : 백제, 책계왕 (286-298), 나무위키)
12) 297-300 : War against the Carpi
He also campaigned across the Danube against the Carpi, defeating them in 297 and 300.
(source : Galerius (305-311), Wikipedia)
연대가 다소 차이가 나지만 로마의 Carpi 공격과 백제의 낙랑 기습 점령이 같은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Carpi가 낙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다.
七年春二月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점령하다 (304)
七年冬十月 분서왕이 살해되다 (304)
(자료 : 백제, 분서왕 (298-304), 삼국사기)
304년 2월 낙랑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는지 같은 해 10월,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황창랑이 바로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낙랑에서 보낸' 분서왕을 죽인 자객이라고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자료 : 백제, 분서왕, 나무위키)
13) 352, 357 : War against Sarmatian and Quadi
Constantius turned his attention to securing the Danubian border, where he spent the early months of 352 campaigning against the Sarmatians along the middle Danube.
Constantius spent much of the rest of 353 and early 354 on campaign against the Alamanni on the Danube frontier. The campaign was successful and raiding by the Alamanni ceased temporarily.
The same year(357), he forced Sarmatian and Quadi invaders out of Pannonia and Moesia Inferior, then led a successful counter-attack across the Danube.
(source : Constiuns II (337-361, Wikipedia)
백제 근초고왕 시기 347-366 20년 기간을 의도적인 자료 지우기로 보인다.
고구려의 고국원왕 시기에서도 349-355 (7년), 355-369 (14년) 공백이 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관련 자료를 의도적으로 지우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일제의 농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一年 근초고왕이 즉위하다. (346)
二年一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347)
(347-366) ; 20년 공백
二十一年 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366)
(자료 : 백제, 근초고왕 (346-375), 삼국사기)
十九年 송황을 전연으로 돌려보내다 (349)
349-355 (7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355)
二十五年冬十二月 전연이 왕모 주씨를 돌려보내다 (355)
355-369 (14년) 공백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369)
(자료 : 고구려, 고국원왕 (331-371), 삼국사기)
14) 367-370 : War with Goths (Athanaric) on Noviodunum Castle
369년 고구려는 치양성 싸움에서 백제에 패한다. 그리고 연이어 고구려는 371년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비극을 맞는다. 그런데 고트족 역사에서 369년 고트족 태왕 Ermanaric (296-376)휘하의 Athanaric 왕이 Noviodunum 성 싸움(현 루마니아 동쪽 흑해연안 근처)에서 패한다. 로마의 Valens 황제는 고트족 땅을 초토화 시키고 370년 Athanaric 왕 (r 369-381)과 강화조약을 맺는다. 여기서 동로마를 맡고 있던 Valens황제가 근초고왕으로 판단되고, 고트족 태왕 Ermanaric 은 미천왕과 고국원왕 시기의 왕인데, 뜬금없이 훈족의 침입으로 자살했다고 서술된다. 고국원왕과 사망원인이 다르지만 패장의 운명 모습은 동일하게 보인다.
During Procopius's insurrection, the Gothic king Ermanaric, who ruled a powerful kingdom north of the Danube from the Euxine to the Baltic Sea,[16] had engaged to supply him with troops for the struggle against Valens. The Gothic army, reportedly numbering 30,000 men, arrived too late to help Procopius, but nevertheless invaded Thrace and began plundering the farms and vineyards of the province.[17] Valens, marching north after defeating Procopius, surrounded them with a superior force and forced them to surrender. Ermanaric protested, and when Valens, encouraged by Valentinian, refused to make atonement to the Goths for his conduct, war was declared.
In the spring of 367, Valens crossed the Danube and attacked the Visigoths under Athanaric, Ermanaric's tributary. The Goths fled into the Carpathian Mountains, and the campaign ended with no decisive conclusion.
In 369, Valens crossed again, from Noviodunum, and by devastating the country forced Athanaric into giving battle. Valens was victorious, Athanaric and his forces were able to withdraw in good order and pleaded for peace.
Location of Noviodunum castra within Romania -- 치양성
In early 370 Valens and Athanaric met in the middle of the Danube and agreed to a treaty that ended the war.[20] The treaty seems to have largely cut off relations between Goths and Romans, confining trade and the exchange of troops for tribute.
(source : Valens, wikipedia)
치양성으로 보이는 Ruins of Noviodunum Castle in Romania (source : Wikipedia)
The Battle of Noviodunum was fought in 369 between the Roman Empire and the Thervingi at Noviodunum, Moesia, modern-day Romania. At this time, the leader of the Thervingi, Athanaric was threatening northern Greece. Having repulsed the invaders at Daphne, Emperor Valens secured a decisive victory against Athanaric at Noviodunum. In September 369, Athanaric accepted an advantageous treaty with Valens, but peace between the Goths and the Romans would turn short-lived.
(source : Battle of Noviodunum, wikipedia)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369) (고구려 고국원왕)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69) (백제, 근초고왕)
二十六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71)
二十六年冬十月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다. (371)
(백제, 근초고왕(346-375), 삼국사기)
백제의 공격이 371년 패하에 이르고 평양성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살해했다고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다. 로마 자료보다 삼국사기 자료가 더 상세한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수림왕시 375년 크리미아에 있는 수곡성을 점령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근초고왕시 패하인 드네프로강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패수는 드네프로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고트족은 이전부터 드네프로강에 있는 Arheimer가 수도라고 하였다. (http://blog.daum.net/lainfos, category Goths, 'Arheimer' 글 참조). Arheimer는 예전부터 있던 수도 환도성으로 보이고, 평양성은 Carpathian mountains가까이 있는 항가리 부다페스트가 아닐까 한다. 근초고왕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른 것과 평영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서술이 별도로 언급되며, 동일년도이지만 시간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패하전쟁에서 고국원왕이 죽은 것이 아니며, 별도의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죽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Jordanes는 고트왕 Ermanaric(Hermanaric)이 전장에서의 부상으로 죽었다 묘사했다. 따라서 평양성은 동천왕 시기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항가리 부다페스트로 판단된다.
15) 375 : 백제와 고구려의 수곡성 싸움
필자는 본 블로그 글 '광개토태왕이 정복한 백제의 관미성은 흑해의 크리미아에 있었다'에서 수곡성도 크리미아 반도에 있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실제 Sudak castle이 아직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375년 백제의 수곡성을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五年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5년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五年秋七月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다 (375)
(고구려, 소수림왕 (371-384), 삼국사기)
三十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해 수곡성을 빼앗다. (375)
(백제, 근초고왕(346-375), 삼국사기)
그런데 이러한 고구려의 수곡성의 탈취와 같은 해 375년에, 아래 서양 사가들의 지도에서는 훈족이 크리미아 반도를 공격한 루트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수곡성이 크리미아반도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래 지도의 이동 경로는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만하나 375년이후 연대는 필자가 아는 바와 다소 차이가 있다.)
근초고왕이 375년 죽는데, 이 수곡성 전투와 관련되어 전사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근초고왕으로 보이는 로마의 Valens황제는 이후 고트전쟁 (376-382)에서 피신하다가 졸지에 죽는 것(378)으로 묘사되는데 (Jordanes, The Origin and Deeds of The Goths, 본 블로그 http://blog.daum.net/lainfos,category Goths 참조), 정확한 상황은 아무도 모른다 했다.
A suggested path of Hun's movement to westward (source : Wikipedia)
Sudak fortress in Crimea(source : Wikipedia)
16) 376-382 : Gothic War and death of Valens
그동안 로마는 고트족과의 전쟁, Alemanni (거란?)과의 전쟁만을 언급했었는데, 376-382 고트족과의 전쟁은 훈족과 Alans (흑수말갈)과 고트족의 연합으로 로마에 침입했다고 처음 언급하고 있다. 어떤 서양 사가는 당시 이민족의 침입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고 대개 고트족의 침입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아온 내용을 보면 고트족도 고구려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설명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The Goths, joined by their new allies the Huns and Alans, travelled south in search of plunder and close to the city of Deultum won the Battle of Deultum destroying most of the Eastern Roman army and the city. Barzimeres, tribunum scutariorum (Commander of the Guards), was killed and Equitius, cura palatii (Marshal of the Court), was captured.[49] The Goths marched on Augusta Trajana to attack the general Frigiderus but his scouts detected the invaders and he promptly withdrew to Illyria[50] but the city was also destroyed. Equitius later managed to escape from captivity.
Archaeological finds in this region and dated to this period reveal Roman villas with signs of abandonment and deliberate destruction.[51] The devastation forced Valens to officially reduce taxes on the populations of Mœsia and Scythia.[52]
Location of Debelt (=Deultum) in Bulgaria
........
The Eastern Roman army withered under the hot summer sun and the Goths lit fires to blow smoke and ash into the Roman formations. Valens reconsidered the peace offer and was preparing to send Richomeres to meet with Fritigern when two Roman elite Scholae Palatinae units, the Scutarii under Cassio and the Sagittarii under Bacurius, engaged the Goths without orders. This forced the Battle of Adrianople to begin. As the armies engaged, the Greuthungi and Alan cavalry arrived and swung the battle in favor of the Goths. The Roman left flank was surrounded and destroyed and a rout began all along the lines which became a bloodbath for the Roman forces. They were so tightly packed they could not maneuver and some could not lift their arms at all. Few managed to run.[70][71][72]
.........
Sebastianus, Traian, tribune Aequitius and thirty-five senior officers had been slain, while Richomeres, Victor and Saturninus had escaped. Two-thirds of the Eastern Roman army lay dead upon the field.[74]
There are conflicting stories as to what happened to the Emperor himself. One claims that he was wounded and dragged off the field by some of his men to a farmhouse. The Goths approached it and were shot at with arrows, which caused the Goths to burn it down with the Emperor inside. The other report states Valens was slain in combat on the field with his army. Whatever happened, his body was never found.[75]
The Goths, invigorated by their incredible victory, besieged Adrianople but the city resisted......
The Goths launched another assault but it too failed. With this final defeat, the Goths gave up and marched away.[76] They together with some Huns and Alans went first to Perinthus and then to Constantinople. There they were fended off in the small battle of Constantinople with the help of the city's Arab garrison............
In 380, the Goths split.[e] The Greuthungi went to Illyricum and invaded the Western province of Pannonia. What happened is again disputed; they were either defeated by Gratian's forces, or they peaceably signed a deal that settled them in Pannonia. The Thervings went south into Macedonia and Thessaly. Theodosius with his new army marched to meet them but, filled with unreliable barbarians and raw recruits, it melted away. The barbarian soldiers joined Fritigern, and many Romans deserted. With victory the Thervings were free to force the local Roman cities in this new region to pay them tribute. It was then that the Western Roman Empire finally offered some help. Having ended the Gothic invasion of Pannonia, Gratian met Theodosius at Sirmium and directed his generals Arbogast and Bauto to help drive the Goths back into Thrace, which they successfully accomplished by the summer of 381. Theodosius meanwhile left for Constantinople, where he stayed. After years of war, the defeat of two Roman armies and continued stalemate, peace negotiations were opened.[88][89][90]
.........
Goths were given lands inside the Roman Empire itself, in the provinces of Scythia, Mœsia and possibly Macedonia, under their own authority and were not dispersed. This allowed them to stay together as a unified people with their own internal laws and cultural traditions. To seal the agreement, Theodosius threw the Goths a large feast.[94][95]
(source : Gothic War (376-382), wikipedia)
376-382 기간동안 고트족(훈족, 말갈 포함)은 처음에는 불가리아 흑해 가까운 지역(Deultum)으로 공격하다가, 이후 두 방향으로 공격했다. 하나는 일리리움, 판노니아 서쪽, 즉 지금 크로아티아 방면(Adrianople)이다. 다른 팀은 남쪽으로 마케도니아와 테살로니카로 공격했다. 이 전쟁은 로마의 처절한 패배로 끝난다. 이 와중에 로마 황제 Valens는 전사한다(378).
아래 백제, 고구려 자료를 보면 고구려의 이니셔티브로 공격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376-377 기간의 전쟁으로 로마의 376-382 전쟁기간보다 짧다. 고구려 자료는 377년 백제를 정벌하고...의 표현을 보면 고구려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 같다. 로마사와 같은 결과이다. 즉 고트족도 역시 고구려이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376)
三年冬十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三年冬十一月 고구려가 침입하다 (377)
五年春三月 사절을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379)
五年夏四月 흙비가 종일 내리다 (379)
六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380)
六年夏五月 땅이 갈라졌다가 다시 붙다 (380)
八年 비가 내리지 않아 굶주린 사람이 많이 발생하다 (382)
十年春二月 대궐 뜰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히다 (384)
十年夏四月 근구수왕이 죽다 (384)
(자료 : 백제, 근구수왕 (375-384), 삼국사기)
五年秋七月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다 (375)
六年冬十一月 백제를 침범하다 (376)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七年冬十一月 백제를 정벌하고... (377)
八年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다 (378)
八年秋九月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다 (378)
(378 - 383) : 5년 공백
十三年秋九月 혜성이 나타나다 (383)
十四年冬十一月 소수림왕이 죽다 (384)
(자료 : 고구려, 소수림왕(371-384), 삼국사기)
17) Athanaric(Goths King)'s persecution of Christians and 소수림왕 불교 전파
Athanaric made his first appearance in recorded history in 369, when he engaged in battle with the Roman Emperor Valens and ultimately negotiated a favorable peace for his people. During his reign, many Thervings had converted to Arian Christianity, which Athanaric vehemently opposed, fearing that Christianity would destroy Gothic culture. According to the report of Sozomenos, more than 300 Christians were killed in Athanaric's persecution during the 370s.
(source : Athanaric (369-381), wikipedia)
四年 僧阿道來
4년에 중 아도(阿道)가 왔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5년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그곳에)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그곳에)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다만 여러 기록들을 통해 불교는 이미 고구려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수림왕은 이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것으로 보인다.
一年冬十月 소수림왕이 즉위하다 (371)
二年夏六月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 (372)
二年夏六月 태학을 세우다 (372)
三年 율령을 반포하다 (373)
四年 승려 아도가 오다 (374)
五年春二月 초문사와 이불란사 두 사찰을 창건하다 (375)
(자료 : 고구려, 소수림왕 (371-384), 나무위키)
고트족의 Athanaric왕(369-381)은 고구려의 소수림왕(371-384)과 유사한 재위시기의 왕이다. Athanaric왕은 고트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박해한 왕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소수림왕은 불교를 장려한 고구려 왕이다.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일치한다.
고트족에 대한 역사서를 쓴 Jordanes는 Goths족의 아리안 종교를 용인한 로마 황제 Valens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그 결과 벌로 죽었다는 듯이 서술한다. Jordanes는 철저한 기독교 신봉자였다.
비록 전쟁역사는 아니지만, 이것도 고트족이 고구려라는 것을 말하는 요소가 되기에 추가하였다.
18) 편두의 풍습
최근 '상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인데, 게르만족에도 편두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래 글에서 보듯이 말갈로 불리는 Alans을 비롯하여, 게르만족중 중(북)부 유럽쪽에 해당하는 Gepids, Ostrogoths, Heruli, Rugii, Burgundians, Thuringians 민족들이 편두를 하였다고 서술된다. 이들이 대부분 고트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즉 고트족도 고구려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하겠다. 반면 서부쪽 게르만은 편두를 하지 않았다고 서술된다.
"In the Old World, Huns also are known to have practised similar cranial deformation,[6] as were the people known as the Alans.[7] In Late Antiquity (AD 300–600), the East Germanic tribes who were ruled by the Huns, the Gepids, Ostrogoths, Heruli, Rugii, and Burgundians adopted this custom. Among the Lombards, the Burgundians and the Thuringians,[8] this custom seems to have comprised women only.[9] In western Germanic tribes, artificial skull deformations rarely have been found.[10]"
(source : 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 Wikipedia)
'한국의 역사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로마제국을 정벌했는가? (1) | 2021.01.12 |
---|---|
고구려 광개토태왕은 로마를 정벌한 훈족과 고트족의 일원인가? (0) | 2021.01.01 |
광개토태왕의 흔적으로 출발하기 전에 (프롤로그) (0) | 2020.02.16 |
런던에도 고구려 성(城)의 "치"? (0) | 2013.07.28 |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 성곽의 모습 "치" (0) | 201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