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전국 771-221BC

<펌> 진(晉)(춘추시대) (BC 11c - BC 349)-나무위키

Chung Park 2020. 10. 24. 15:04


[1]

존속기간

서기전 11세기 ~ 서기전 349년

이칭

당(唐)

위치

중국 산서성

수도

당, 곡옥, 신강

국성

(姬)

국가원수

후작

주요 군주

문공 희중이

언어

상고 중국어

문자

금문전서 (대전체)

종교

중국 토속 종교[2]

종족

화하족

통화

포폐

성립 전

주나라

멸망 후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3. 역대 군주

3.1. 진3.2. 익3.3. 곡옥3.4. 통일 이후

1. 개요

중국주나라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 춘추오패의 하나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11세기 ~ 서기전 349년. 삼진의 분열(서기전 403년) 전까지로 따지면 35대 598년. 현대 중국어 발음은 Jìn.[3]

흔히 말하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진(秦)나라와는 다른 나라로,[4] 비슷한 시기에 공존했던 국가지만 보다 일찍 멸망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 춘추시대에는 강국이었으나, 말기에 조(趙), 위(魏), 한(韓) 삼국으로 분할된 나라다. 이는 춘추 시대의 막을 내리는 사건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이후 전국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삼국이 독립한 이후로도 진나라는 명맥 자체는 남았었지만, 극도로 작아져 곧 멸망하였다.

2. 역사

주나라(周) 왕실과 동성인 희(姬)성 제후로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동천 이전 분봉 초기부터 이미 노나라(魯), 송(宋)나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원의 대제후 중 하나였다.

시조는 당숙 우(唐叔 虞)로 아주 어릴 적에 성왕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동생 희우에게 흙과 풀로 작위를 내린 걸 사관이 보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장성한 후에 빼도 박도 못 하고 영지를 수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희우는 진의 시조로서 당숙우라고 부른다.

서주 시대의 기록은 많이 산일했으나, 유물에 남은 명문들을 분석해 보면 서주 중후기 주나라의 힘이 점차 쇠해가고 노나라, 제나라 등 초기 주의 주요 제후들이 이탈하는 경향을 보일 적에도 진나라는 주나라 편에 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목후가 죽자 원래는 아들 구[5]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그의 숙부 상숙이 찬탈해 버렸다. 하지만 4년 후에 상숙을 몰아내고 군주에 오른 구, 즉 문후는 자리를 찾게 된다. 문후는 서주가 망하고 동주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주 평왕을 도와 왕실을 다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진나라의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문후가 죽은 후 진나라는 본격적인 내홍을 겪고 만다. 문후의 뒤를 이은 아들 소후는 문후의 동생인 숙부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해 환숙이라고 일컫는다. 이때의 진나라는 수도를 익(翼) 땅에 두었으므로 익나라라고 하기도 하며[6] 점점 익나라보다 곡옥에 봉해진 환숙이 강성해진다.

이렇게 진나라는 익과 곡옥으로 결국 분열된다. 환숙과 장백은 여러 번 익나라를 쳐 군주를 죽이기도 하고 익에 입성하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반항과 주나라의 정벌로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다 환숙의 손자이자 장백의 아들인 칭, 즉 무공 때까지 오게 된다. 곡옥이 훨씬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익을 접수 못한 원인은 주나라의 견제[7]와 백성들의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철저히 익을 공격한다. 결국 익을 점령하고 익에 있던 진나라의 보물을 모두 당시 주나라 희왕(=이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정식으로 진나라 군주로 인증받았다. 결국 지차가 본가를 몰아냄으로써 혼란은 종식된다.[8] 춘추 오패 중 한 명인 진문공(文公)의 할아버지인 진무공(晉武公) 시절 내전을 마무리짓고 춘추 시대의 초강국으로 성장할 기반을 닦았다. 이 사건을 곡옥대진이라고 한다. 진무공 이후로는 시호를 '후'에서 '공'으로 바꿨다. 작위는 계속 후국. 춘추에서 보면 진나라 영주를 생전에는 '진후'로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뀐 위나라에 대한 사마정의 《사기색은》의 논리를 — 대개는 《사기》 위강숙세가의 주석으로 찾아볼 수 있다. — 그대로 적용하면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뀌는 것은 오히려 대우가 떨어진 것에 해당한다.

무공의 아들 헌공 때 국운이 크게 흥성하여 인접 제후국인 우와 괵을 멸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9] 후계자를 둘러싸고 공실과 조정이 사분오열하는 내란이 다시 발발, 둘째 공자 중이[10]와 셋째 공자 이오[11] 두 명은 지지 세력을 이끌고 국외로 망명하고, 적통의 세자 신생은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가 하면, 측실 소생의 어린 아들 혜제와 탁자가 연이어 후위를 계승하지만 두 명이 연달아 반대파 대신의 손에 암살당하는 등 그야말로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였다.

이 혼란상은 결국 이웃한 진(秦)의 두 차례에 걸친 개입으로 간신히 수습되고, 훗날의 패자가 되는 문공, 공자 중이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후작위에 오른다. 두 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진의 공실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으나, 문공은 자신의 즉위에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봉토와 군권을 나눠주어 그 공백을 메꾸었다. 이에 내정이 안정된 진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중원의 제후국을 위협하던 초나라를 물리치고, 제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문공 이후로도 진은 중원의 최강국으로서 사실상의 패권을 행사했으나[12], 그 위세는 문공 시절만 못했다. 서쪽의 이웃 진(秦)나라의 진출을 경계하느라 중원의 정세에 소홀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로 봉토와 군권을 나눠받은 공신 일족들이 자신들끼리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신들의 막장 행각은 초 장왕과 중화의 패권을 두고 싸웠던 필 전투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공신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지휘 체계가 전혀 통하지 않아 각개 전투를 벌인 끝에 개박살이 나고 말았다.[13]

진의 불행은 이렇듯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낼 공신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만한 군주가 없었다는 점에 있다. 문공은 비록 자신을 수십 년간 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지위를 박탈하거나 목을 베어버릴 정도의 권력이 있었고,[14] 불타죽은 개자추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성깔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깐깐한 노인네였다. 이런 진 문공 밑에서 굴러왔던 공신 1, 2세대들을 제어하는것은 애초의 불가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군 통수권자이자 초를 패배시킨 성복 전투의 제1 대공을 세웠던 중군 원수 선진이 진 문공의 친아들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을 정도였으니. 문공 사후 100년 동안 8명의 군주가 즉위했고, 암군이라 공신들에게 제거당하거나[15], 너무 어린 나이에 권좌에 앉아 권위는커녕 공신들이 설칠 판을 깔아주었고 그나마 뭘 좀 해볼만한 명군이었던 진 도공은 젊어서 죽고 말았다. 어딘가 하자있는 군주가 계속 권좌에 오르고, 바지 사장 격으로 앉아있는 동안 공신들은 아귀 다툼을 벌여댔다. 그래도 강국의 기본 가락은 남아있었던지 필 전투 이후로 이를 갈고 있다가 언릉 전투[16]에서는 초왕을 애꾸눈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 대 굴욕을 안겨주며 마지막으로 패권을 지켜내는 듯했으나...

경쟁자가 많은 권력 투쟁이 늘상 그렇듯이 유력 씨족들은 자신들 중에서 제일 센 놈을 조지고 보는 식으로 무력 항쟁을 거듭했고, 이 와중에서 공신 출신인 호씨(狐氏)[17], 선씨(先氏)[18], 극씨(郤氏)[19], 난씨(欒氏)[20], 순씨(荀氏)[21], 서씨(胥氏)[22], 범씨(范氏)[23] 등의 유력한 일족들이 몰살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특히 이 권력 투쟁 초기에 망한 씨족 중 많은 수, 예를 들면 호씨, 속씨, 극씨, 난씨 등은 진 공실과 혈연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집안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공실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좌전에 보면 숙향이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들이 대부분 다 끝장났다고 말한다. 양설씨(羊舌氏)[24] 역시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이고, 마지막에는 진나라 공실들이 다 망해가는데 양설씨만 살아남을 도리는 없고 결국은 양설씨마저도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양설씨는 지씨의 모함으로 멸족됐다. 춘추시대 말기의 협객인 예양이 지씨를 섬기기 전 범씨와 순씨도 섬겼다는걸 그리고 그들 역시도 지씨처럼 망했다는걸 보면 말기로 갈수록 권력투쟁이 심화된듯 하다.

결국 춘추 시대 말 즈음엔 지씨(智氏)[25], 조씨(趙氏)[26], 위씨(魏氏)[27], 한씨(韓氏)[28]의 네 집안이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중에 No.2였던 조씨가 위씨와 한씨를 끌어들여 No.1인 지씨를 무너트리면서 이 기나긴 권력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29] 셋만 남은 이들 삼가(三家)는, 결국 진나라를 셋이 사이좋게 나눠갖기로 합의하고, 각자 조(趙), 위(魏), 한(韓) 삼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진나라의 삼분을 역사가들은 춘추시대전국시대의 경계가 되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왜냐면 원래는 명목상으로나마 종주국인 주의 천자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진의 편을 들어주면서, 다른 제후국을 동원해 세 가문을 멸문시키고 진나라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질서 유지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나라의 천자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기전 403년 패도로써 이루어진 진의 삼분을 승인해 버리면서 이 사건은 주나라의 권위가 이미 땅으로 추락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분도 필요없고 패도가 짱이다'. 이것이 바로 전국시대인 것이다. 사마광자치통감에서 이 사건을 시작으로 중국사를 서술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진의 삼분 이후로도 사실 진나라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영토가 익과 곡옥의 두 도시를 다스리는 게 고작인 성읍 국가가 되어버렸다. 후대 사람들이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고 취급해버릴 정도로 망했어요. 진나라의 공은 한때는 신하였던 조, 위, 한나라의 군주들에게 문안 인사나 올리고, 성 밖으로 계집질을 하러 다니다 자객에게 암살 당하는 등 끝없는 굴욕의 연속. 그렇게 100년을 더 버티다 나중에는 그 두 마을조차도 털리고 멸망.

3. 역대 군주

진(晉) 국군

 

 

3.1.[30]

  • 당숙 우(唐叔 虞) - 서기전 1042년, 무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동생

  • 진후 섭(晉侯 燮) - 당숙의 아들

  • 무후 영족(武侯 寧族) - 진후의 아들

  • 성후 복인(成侯 服人) - 무후의 아들

  • 여후 복(厲侯 福) - ? ~ 서기전 859년, 성후의 아들

  • 정후 의구(靖侯 宜臼) - 서기전 858년 ~ 서기전 841년, 여후의 아들

  • 희후 사도(釐侯, 僖侯 司徒)[31] - 서기전 840년 ~ 서기전 823년, 정후의 아들

  • 헌후 소(獻侯 蘇[32]=穌[33])[34] - 서기전 822년 ~ 서기전 812년, 희후의 아들

  • 목후 비왕(穆侯 費王) - 서기전 811년 ~ 서기전 785년, 헌후의 아들

  • 상숙(殤叔) - 서기전 784년 ~ 서기전 781년, 목후의 동생. 찬탈 했음.

  • 문후 구(文侯 仇) -서기전 780년 ~ 서기전 746년, 목후의 아들. 상으로 몰아냄. [35]

3.2.[36]

  • 소후 백(昭侯 伯) - 서기전 745년 ~ 서기전 740년, 문후의 아들, 환숙이 침공해오자 대신 반부에게 시해됨, 반부는 환숙을 군주로 삼으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백성들은 그의 아들 평을 군주로 세움

  • 효후 평(孝侯 平) - 서기전 739년 ~ 서기전 724년, 소후의 아들, 역적 반부를 죽였지만 나중에 다시 침공해온 장백에게 죽음을 당함, 그러나 이번에도 익나라 백성들은 저항했고 그의 아들을 세웠다.

  • 악후 극(鄂侯 卻) - 서기전 723년 ~ 서기전 718년, 효후의 아들

  • 애후 광(哀侯 光) - 서기전 717년 ~ 서기전 709년, 악후의 아들, 장백이 다시 공격했지만 주나라 평왕의 정벌로 실패로 끝남, 그러나 다음에 또 쳐들어온 무공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이번에도(또!) 백성들의 저항으로 실패함, 나중에 아들 소자후가 즉위하자 곡옥에서 죽음을 당함

  • 소자후(小子侯)[37] - 서기전 708년 ~ 서기전 705년, 애후의 아들, 평화 협상을 하자는 무공의 말에 속아 곡옥에 갔다가 죽음을 당함, 이 때 주나라 환왕은 곡옥을 쳤지만 실패함

  • 진후 민(晉侯 緡)[38] - 서기전 704년 ~ 서기전 678년, 애후의 동생으로 소자후의 숙부, 무공에 의해 익이 점령되고 살해됨.


3.3. 곡옥[39]

  • 환숙 성사(桓叔 成師) - 서기전 744년 ~ 서기전 731년, 문후의 동생으로 소후의 숙부

  • 장백 선(荘伯 鱓) - 서기전 730년 ~ 서기전 716년, 환숙의 아들

  • 무공 칭(武公 稱)[40] - 서기전 715년 ~ 서기전 677년, 장백의 아들, 익을 멸하고 익으로 천도, 주나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고 공작으로 승진함

3.4. 통일 이후[41]

  • 무공 칭(武公 稱) - 위와 동일

  • 헌공 궤제(獻公 詭諸) - 서기전 676년 ~ 서기전 651년, 무공의 아들

  • 해제(奚薺)[42] - 서기전 651, 헌공과 여희의 아들, 이극에게 암살

  • 도자(悼子) - 위와 동일, 헌공과 여희의 동생의 아들, 이극에게 암살

  • 혜공 이오(恵公 夷吾) - 서기전 650년 ~ 서기전 637년, 헌공의 아들이자 해제와 도자의 이복형

  • 회공 어(懷公 圉) - 서기전 637년, 혜공의 아들[43]

  • 문공 중이(文公 重耳) - 서기전 636년 ~ 서기전 628년, 헌공의 아들로 혜공의 동복 형이자 회공의 백부, 춘추오패 중 한 명이자 진을 사실상 춘추 시대 패자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 양공 환(襄公 歡) - 서기전 627년 ~ 서기전 621년, 문공의 아들. 진 헌공 때 이미 태어나 있었다. 진 문공이 망명을 할 때 그의 재산을 빼돌려 달아났던 이두수가 아버지를 잃은 진 양공과 그의 여동생 백희를 키웠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 영공 이고(靈公 夷皋) - 서기전 620년 ~ 서기전 607년, 양공의 아들, 10살도 안되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다가 20살이 넘자 포악한 정치를 하다가 재상 조돈의 사촌 동생 조천에게 암살 당함[44]

  • 성공 흑둔 (成公 黑臀) - 서기전 606년 ~ 서기전 600년, 양공의 아우이자 영공의 숙부

  • 경공 거(景公 據) - 서기전 599년 ~ 서기전 581년, 성공의 아들. 변소에 빠져 죽었다 [45]

  • 여공 수만(厲公 壽曼) - 서기전 580년 ~ 서기전 573년, 경공의 아들, 난서와 순언에게 피살.

  • 도공 주(悼公 周) - 서기전 572년 ~ 서기전 558년, 양공의 손자[46]로 여공의 당숙, 여전히 강국이었으나 이때부터 군주보다 육경의 세력이 강해짐. 그래도 진 도공은 총명하였기 때문에 나름 군주로써의 세력을 휘두름.

  • 평공 표(平公 彪) - 서기전 557년 ~ 서기전 532년, 도공의 아들,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으나, 점점 유흥에 빠져 누각과 연못을 만드는 때 예산을 낭비했다. 귀신을 부르는 짓까지 하다가 귀신이 보인다며 앓다가 죽음.

  • 소공 이(昭公 夷) - 서기전 531년 ~ 서기전 526년, 평공의 아들. 실질적으로 실권을 가진 마지막 군주.

  • 경공 기질(頃公 棄疾) - 서기전 525년 ~ 서기전 512년, 소공의 아들. 진 평공이 죽을 때 나이가 40살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아들 진 소공이 재위 6년 만에 죽었으므로 진 경공의 재위 당시 나이는 10살 미만으로 추정. 실제로 이 군주 때부터 진나라 군주의 실권이 왼전히 소멸되었다.

  • 정공 오(定公 午) - 서기전 511년 ~ 서기전 475년, 경공의 아들, 서기전 497년이 되자 지씨의 가주인 지백 요의 주도로 한나라(韓), 위나라(魏), 조나라(趙)의 가주들과 함께 범씨와 중항(순)씨의 영토를 분할해 차지해 버리고 육경 중에 네 가문이 남음

  • 출공 착(出公 鑿) - 서기전 474년 ~ 서기전 452년, 정공의 아들, 서기전 457년 지백 요는 한(韓), 위(魏), 조(趙)의 가주에게 영토를 나누어 달라는 제의를 했는데 조의 가주였던 조양자가 거절함, 결국 지백은 그를 치기 위해 한의 가주 한강자(한호)와 위의 가주 위환자(위구)와 함께 조양자(조무휼)를 쳤으나, 한과 위의 배반으로 사로잡혀 죽음을 당함, 이렇게 육경은 조, 위, 한 세 가문만 남고 지백의 영토를 삼분화 함, 출공은 이들 세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노나라 권신들이었던 삼환 가문의 가주들과 제나라 권신 전씨 가주에게 밀서를 보냈지만 오히려 그것을 육경에게 알리는 바람에 쫒겨남. [47][48] 생각해보면 군주(공)를 위협하는 유력 가문들을 잡기 위해 다른 나라의 군주를 위협하는 유력 가문들을 끌어들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 애공 교(哀公 驕)[49] - 서기전 451년 ~ 서기전 434년, 소공의 증손[50]으로 출공의 먼 친척 동생, 출공을 몰아낸 육경이 옹립함.

  • 유공 유(幽公 柳) - 서기전 433년 ~ 서기전 416년, 애공의 아들, 세 가문에게 수도 강[51]과 곡옥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당하고 세 가문은 영토를 삼분화 함, 밤마다 부녀자들과 놀아나다가 위 문후가 고용한 자객에게 암살 당하는 등 이미 사실상 진은 멸망한 상태였음

  • 열공 지(烈公 止) - 서기전 415년 ~ 서기전 389년, 유공의 아들, 기원전 403년에 조, 위, 한 세 가문이 주나라 위열왕에 의해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음, 군주인 열공이 한때 신하였던 이들에게 문안을 드릴 정도였음

  • 효공 기(孝公 頎)[52] - 서기전 388년 ~ 서기전 357년, 열공의 아들, 곡옥을 잃음으로써 거의 진나라의 멸망이 기정사실화 됨

  • 정공 구주(靜公 俱酒) - 서기전 356년 ~ 서기전 349년, 남은 강 땅마저 회수당하고 조, 위, 한에 의해 순(純) 땅으로 폐출된다, 진나라 멸망

[1] 晋으로 표기하기도 하며, 원래 한자는 㬜이다.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tsin-s. 현대 발음은 Jìn.[2]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3] 여진족의 금나라도 Jin으로 쓰지만, 晉은 4성, 金은 1성으로 성조가 다르다.[4] 통일왕조 진나라는 Qin이라고 쓴다.[5]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목후가 크게 될 이름을 둘째에게 주고, 평범한 이름을 큰아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둘째가 첫째를 몰아내려 할 것이라고 예언할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후에 구의 후손인 민후는 성사의 후손인 무공에게 죽음을 당하고 왕위도 뺏긴다.[6] 원래 당숙이 봉해진 곳은 임금의 후손을 봉한 당나라를 멸한 곳이므로 당이라고 하기도 한다.[7] 천하의 질서를 위해서 천자가 존재하니...[8] 나중에 무공의 아들 헌공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다시 내전을 일으키게 된 것은 업보라고 한다.[9] 순망치한의 고사가 우와 괵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10] 후일 진 문공[11] 후일 진 혜공[12] 진에서 쪼개진 세 나라가 각자 전국칠웅의 한 자리씩 차지했던 것을 보면, 국력을 기준으로 진이 사실상 춘추시대 최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조, 위, 한이 넓어진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중원의 노른자위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 명심하자.[13] 문공 시기 초나라의 북진을 저지했던 성복 전투와 대조되는 모습인데, 성복 전투에서는 문공을 따라다닌 공신이든 진나라에 계속 남았던 신하든 문공이 임명한 총대장인 선진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초군을 대파했었다.[14] 대표적으로 위주와 전힐. 이 두 사람은 진 문공을 따라 19년간 방랑한 신하들인데, 진문공이 즉위한 이후 방랑 시절 자신을 도와주었던 조나라의 대신 희부기를 우대해주는 것을 보고 배알이 꼴려 희부기의 집에 불을 질러서 희부기를 죽여버렸다. 진문공은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위주는 벼슬에서 내쫓아버렸고, 먼저 말을 꺼낸 전힐은 사형에 처했다. 다만 위주는 성복 전투에서 공을 세워 다시 복귀한다.[15] 혹은 공신들과의 싸움에 밀려 죽은 뒤 기록이 조작되었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암군을 죽인 조씨 일가를 반역 행위라 기록한 사관의 경우가 있을수 있겠다.[16] 다만 이 전투에서는 초나라의 막장성이 부각되는데, 3군 중 핵심인 중군 원수인 초 공자 측(側)이 술에 취해 잠들어 전장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패배하게 된다.[17] 적족 혼혈인 호언, 호모의 자손. 호언의 아들 호역고와 속국거가 조최의 아들 조돈과 권력 투쟁을 하다 살인을 저지른 속국거의 사형으로 나머지 일족들은 모두 적족으로 망명하였다.[18] 선진의 후손. 선진의 손자 선곡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이와중에 위에서 언급한 필 싸움의 책임을 독박쓰고 사형당하여 몰락하였다.[19] 극곡의 후손. 진 여공 때 극주, 극기, 극지가 3극이라 불리며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관료들에 의하여 3극은 사형당하고 나머지는 세력을 잃음. 이때 극씨 멸족을 주도한 서동은 또다른 공신의 후손이었다.[20] 난지의 후손. 난염이 포악하여 가문을 멸문 직전까지 보냈다. 그 아들 난영은 덕이 높아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귀족들 사이의 민심은 그들을 떠나서 제나라로 망명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난씨를 유일하게 도와주던 위씨가 조씨의 협박에 의하여 그들 반대편에 서서 패하고 송나라로 망명한 난방을 제외하고 모두 사형. 훗날 제나라의 내분에 개입한 걸 보면 일족이 몇 명 더 살아남아서 망명한 듯하다.[21] 순임보의 후손. 순임보가 중항 대부를 지내서 중항씨와 순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가주 순인이 욕심 부리다 다른 귀족 가문의 반발을 사서 제나라로 망명[22] 서신의 후손. 마지막 가주 서동은 아버지가 극씨 일가에 의하여 재상에서 쫓겨나자 진 여공에게 아첨하는 간신이 되어 3극을 모두 죽임으로써 극씨에게 복수하였으나, 난씨와 순씨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가문도 몰락하였다.[23] 사회의 후손. 사회가 범 땅을 받아서 범씨와 사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가주 범길사가 순인과 같이 귀족들의 투쟁에 밀려 제나라로 망명[24] 숙향의 씨가 양설씨[25] 순임보의 동생 순수의 후손. 순수가 지 땅을 받아 지씨와 순씨를 병용했다.[26] 조최의 후손. 멸문의 위기에 몰렸다가 간신히 부활했다. 조씨 고아 참고.[27] 위주의 후손. 위에서 언급한 언릉 전투에서 당주가 전사하나 그 세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28] 한간의 후손.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한간의 손자 한궐의 후손으로 더 유명하다.[29] 여기서 예양의 이야기가 나왔다.[30] 당나라, 즉 진나라 초기. 서기전 1042년 ~ 서기전 746년 (11대 296년)[31] 釐(리)가 시호로 쓰일 때는 僖와 같은 글자로서 사용되기에 僖와 같은 '희'로 읽는다.[32] 세본.[33] 북조 진후묘 유적.[34] 사기 본문에 남아 널리 알려진 적(籍)은 蘇와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35] 목후는 뒤를 이을 태자였던 문후의 이름보다 그의 동생인 환숙을 더 후하게 지었다. 신하 중에서 이를 보고 한탄하기도 했는데 구는 원수를 뜻하고 성사는 일이 잘될 것을 뜻하니 성사의 후손이 장차 구의 후손을 대신해 진나라를 다스릴 거라고 예언했다. 결과는 적중했다.[36] 내전기. 문후의 아들 소후를 시조로 하는 진나라 적통 자손. 서기전 745년 ~ 서기전 678년 (6대 67년)[37] 이름은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38] 시호가 없다.[39] 내전기. 문후의 동생 환숙을 시조로 하는 진나라 지차 자손. 서기전 744년 ~서기전 678년. (3대 66년)[40] 아래의 무공과 동일 인물[41] 서기전 677년 ~ 서기전 349년. 20대 328년. 삼진이 제후로 인정받은 서기전 403년까지로 치면 18대 274년. 출공이 죽은 452년으로 치면 225년.[42] 해제, 도자 모두 시호가 없다.[43] 회공의 이름 어는 마굿간지기라는 뜻인데 원래 혜공이 망명 시절에 양나라에서 회공을 낳았다. 이때 그의 장인인 양나라 군주 양백이 외손자의 운명이 남의 신하가 될 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44] 사실 조돈은 이것을 걱정하여 진 양공의 동생을 왕으로 모시려 했으나 진 양공의 부인 목영의 1인 시위로 인하여 민심이 진 영공에게 몰려 어쩔수 없이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45] 진짜다! 심지어 고사성어 병입고황의 유래가 되었다. 안습[46] 정확히는 양공의 아들인 혜백 담의 아들[47] 애초에 제나라 전씨는 제나라를 찬탈하려고 했기에 명분을 위해서 육경에게 말한 것 같다. 전씨는 후에 결국 찬탈한다.[48] 살해당했다는 말도 있다.[49] 또는 의공(懿公), 경공(敬公)[50] 할아버지는 소공의 아들 대자 옹, 아버지는 공손 기[51] 과거의 익[52] 또는 환공(桓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