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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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Park 2020. 12. 4. 08:41

후백제(後百濟)

고대사지명

 후삼국시대의 왕조국가.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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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전 견훤 묘 정면

분야고대사유형지명성격국가, 고대국가시대고대-남북국성격국가, 고대국가

정의

후삼국시대의 왕조국가.

내용

892년(견훤 1) 견훤(甄萱)에 의해 건국되어 936년(신검 1) 9월 고려태조 왕건(王建)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2대 45년간 존속하면서 신라·태봉·고려 등과 정립하였다.

신라는 하대에 이르러 귀족들의 사치와 부패 그리고 왕위계승전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진성여왕의 실정과 계속되는 흉년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중앙정부에서 조세를 독촉하자, 이에 대항해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견훤은 무리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하고, 백성들에게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고 선언해 민심을 모은 뒤, 892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이 후 궁예(弓裔)가 세운 후고구려, 그리고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형성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특히 927년에는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다. 또 고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백제는 그 세력이 강성해 갔다. 그러나 930년 고려와의 고창(古昌)전투에서 대패하고, 이어서 934년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기면서부터 대세는 고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한편 후백제 왕실 내부에서 불화가 생겨 935년에 아들 신검(神劍) 등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견훤은 탈출해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하였다.

이 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936년에 고려 태조가 견훤과 함께 10만 대군으로 총공격해 오자 신검은 일리천(一利川)전투에서 대패하고 마침내 항복해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신라는 하대가 시작되면서 안으로는 중앙귀족들의 왕위쟁탈전이 격심하였다. 768년(혜공왕 4)부터 887년(진성여왕 1)까지 1백여 년 동안 무려 20여 차례의 정치변란이 일어났다.

밖으로는 김헌창(金憲昌)·범문(梵文) 등 불평귀족과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군진세력가(軍鎭勢力家)의 반란이 속출하는 등 지배계급의 분열대립이 격화되어 점차 신라정부의 통치력은 약화되어갔다.

한편, 지방에서는 중앙정권에서 도태한 귀족과 지방의 세력가 중에서 불교사원·해외무역·군진세력 등을 배경으로 호족(豪族)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이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의 붕괴를 초래하고 지방분권적인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급속히 악화되어 신라는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되었다.

진성여왕의 거듭되는 실정으로 정치가 극도로 어지러워진데다가, 흉년으로 기근까지 들게 되어 백성들은 유이(流移)하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민심이 동요되고, 지방의 여러 주군(州郡)에서는 조세를 내지 않아 국가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해 조세의 납부를 독촉했으나 이미 중앙정부의 명령은 지방에서 시행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889년에 이르러 신라는 전면적인 내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 중 사벌주(沙伐州)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죽주(竹州)의 기훤(箕萱), 북원(北原)의 양길(梁吉), 철원(鐵圓)의 궁예가 반란세력의 중심을 형성할 때, 견훤도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해서 일어나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성해 군대에 입대한 뒤, 싸울 때마다 항상 선두에 나섰으므로,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정세를 포착하고, 무리를 모아 서남지방의 주현(州縣)을 쳐서 이 지역의 중심적인 반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마침내 900년 완산주를 근거로 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신라 말기에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난 원인은 농민들의 불만과 관계있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고구려·백제 유민의 불만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지금의 강원도·경기도·황해도 지방에는 옛 고구려유민이 주로 살았고, 충청남도·전라남도·전라북도 지방에는 옛 백제의 유민이 주로 살고 있었다.

신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아온 이들은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그들의 옛 조국인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향수를 한층 더 느끼게 되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반란세력을 결집시켰던 인물이 바로 견훤과 궁예였다.

반란의 중심세력들은 대부분 신라의 외곽지대인 경기·강원·충청·전라도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들 지역이 이미 신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반면, 원래 신라의 영토였던 경상도지방에는 약간이나마 신라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원인은 이들 경기·강원·충청·전라도 지방이 옛 고구려·백제의 영토였다는 점이다.

즉, 과거 고구려·백제의 판도였던 이 외곽지대의 주민구성은 당연히 고구려·백제의 유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에는 고구려·백제의 전통이 농후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 말기에 혼란이 계속되자 경기도·강원도 이북지방에서는 고구려부흥의 기운이, 전라도·충청도 지방에서는 백제부흥의 기운이 유행하고 있어 누군가 그 기운에 부응하는 목표를 제시한다면 그 지역의 민심을 결집해 장차 큰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견훤이나 궁예 모두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또는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신라를 미워하고 백성들의 향수에 부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이에 견훤은 상주출신의 신라사람이면서도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를 내세우고 후백제를 건국했으며, 신라를 적대시하였다. 결국, 후백제는 옛날 백제의 부흥이라는 성격을 띠고 성립된 것이다.

(1) 중앙체제

견훤은 신라에 반기를 들어, 처음에는 ‘신라서면도통(新羅西面都統)’이라 자서(自署)하다가, 그 뒤 점차 북상하면서 지배영역을 확대해 전주로 천도한 다음에는 도읍(都邑)의 설비, 국호의 제정과 칭왕(稱王), 연호의 제정, 설관분직(設官分職) 등 정치조직을 정비해 본격적인 국가체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만 해도 견훤은 한낱 신라의 지방관을 자처했지만 전주천도 후에 정식으로 백제왕을 칭함으로써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정비한 관부·관직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독자적인 행정체계가 수립되었다기보다는 신라의 것을 그대로 답습, 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궁예가 세운 태봉이 독자적인 관부·관직 체계를 갖추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2) 지방통치

견훤은 900년 전주 천도 후 국가체제의 정비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게 되자 지방지배를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견훤의 지방지배는 지역적으로 크게 셋으로 구분되고, 그 양상도 각각 달랐다.

먼저 견훤 자신의 초기세력기반이자 대중국 해상통로인 서남해안일대는 일찍부터 그 지방의 해상세력들이 견훤정권의 지배에서 이탈해 궁예정권의 왕건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918년 고려가 건국되기까지는 주로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일대의 공략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중부일대는 비교적 지방호족세력의 독자적인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정복활동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이들과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갖고 이들을 포섭함으로써 간접적이나마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동부지역, 즉 낙동강일대에서의 지방지배는 신라와 직접적으로 대립하였다. 아울러 고려와 신라와의 연결을 막기 위해 소백산 이남의 교통·군사상 요충지는 장악하고자 노력하였다.

930년 이전까지는 후백제의 군사력이 고려와 신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일대의 호족세력도 대부분 견훤에게 귀부, 내속(來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와의 고창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대세는 뒤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방식도 각각 달랐다. 주로 수도인전주를 비롯한익산·김제 등 전라도 북부일대는 중앙정부가 직접 지배하였다. 그리고 무주(武州)와 강주(康州)를 비롯해 북으로는 금강 이남의 지역, 남으로는 영산강 상류 이북, 동으로는 낙동강 이서지역의 군사요충지에는 지방관을 파견해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인근의 지역을 점령, 통치하였다.

한편, 귀부, 내속한 호족들을 통한 간접지배도 하였다. 그리고 접경지역은 직접 군대를 동원해 공략한 뒤, 주민이나 식량 등을 수취하거나 주변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기 위해 군사적인 무력지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통혼정책 등을 통해 지방호족세력과 결합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대신라정책에 있어 처음에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고 선포했듯이 적대적인 입장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칭호에서 보듯이, 견훤은 스스로 신라왕실과 군신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서도 신라왕조를 멸망시키지 않고 경순왕을 세워주고 있음으로 보아 신라왕실을 존속시켜주면서 단지 그에 대한 영향력만을 행사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고려정책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궁예의 태봉시대에는 나주지방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서남해안에서 직접 대결하였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에는 고려와 화친관계를 맺고자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시도해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 등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가 동맹을 맺고 적대적인 정책을 추진하자 후백제에서 고려에 보냈던 인질 진호(眞虎)의 사망사건을 계기로 적대관계로 전환, 920년대 후반부터 침략전쟁을 시도하였다. 처음에는 후백제가 크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고창전투의 패배와 내분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겹쳐 전세는 도리어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중국·일본과도 매우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중국에 대해서는 오월(吳越)에 사신을 파견해 그로부터 공식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국내에서의 지배적 권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또 오월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의 힘을 빌려, 신라침공에 대해 불만을 가진 고려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후당(後唐)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사신을 보내어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추진한 바 있다.

918년 왕건이 중심이 되어 인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은 왕건의 건국을 축하하고 외교적으로 유대를 가지려 하였다.

그러나 920년에 견훤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고 진례성(進禮城)으로 진격할 때, 신라는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청해 도움을 받았다. 이로 인해 후백제와 고려와의 사이는 좋지 않게 되었고, 본격적인 패권다툼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는 신라의 영향권이라 할 수 있는 경상도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었다. 견훤은 920년에 고려가 신라를 도와준 것을 계기로 신라와 고려의 관계가 친밀하게 되어 자주 군사행동을 가해 오자, 견훤은 먼저 신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워 마침내 927년 대병을 거느리고 경주에 침입해 경애왕을 죽이고 많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듣고 왕건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도전해 왔으나 오히려 공산(公山)주 01)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에 대비되는 무력주의 노선때문에 장기적으로 크게 손해를 입어 마침내 신라왕실을 비롯한 각지의 세력이 고려로 기울어지게 됨으로써 고려와 후백제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견훤은 작전면에서도 왕건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왕건이 후백제를 포위하기 위해 보낸 해군에게 남해안지방을 점령당함으로써, 후백제는 배후가 교란, 견제되고 일본과의 내왕도 차단되었다.

또한, 서해안지역도 왕건의 강력한 해군에 의해 중국과 교통이 저지되었다. 특히, 소백산맥을 따라, 상주에서부터 성주·합천을 거쳐 진주에 이르는 전략선을 확보한 왕건의 남진정책에 의해 후백제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한편, 견훤은 고려의 남진정책에 대항해 동진정책(東進政策)을 구상하였다. 즉, 상주에서부터 안동 쪽으로 연결되는 전략선을 확보함으로써 고려의 후백제 포위정책을 타파하고 신라일대를 후백제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에 두 나라는 경상도의 서북부지역인 상주를 비롯해 안동·합천·진주 등지에서 자주 큰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후백제가 공산전투에서 승리해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930년 안동에서 고려군에게 대패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934년에는 웅진 이북의 30여 성을 점령당해 대세는 결정나게 되었다.

한편, 내부의 정세도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편애해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맏아들 신검이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과 모의해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은 당시의 대세가 기울어져 견훤은 고려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지만, 신검 등은 강경책을 견지하려 한 데서 나온 내분이었다.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뒤에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에 귀순해 버렸다. 그러자 후백제 내부에서도 견훤의 사위 박영규(朴英規)가 견훤의 편을 들어 신검을 배반하고 고려에 내통하는 등 정세가 급변하였다.

한편, 견훤은 왕건의 힘을 빌려 신검 등에 대한 복수를 꾀하였다. 그리하여 936년 후백제는 왕건과 견훤이 거느린 10만 대군의 침공을 받아 일리천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신검은 패주하다가 황산(黃山)에서 왕건에게 항복하니, 결국 후백제는 건국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고려시대의 연구』(이병도,을유문화사,1948)

  • 『고려태조의 후삼국통일연구』(문경현,형설출판사,1987)

  • 『한국중세사연구』(하현강,일조각,1988)

  •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의 성격」(김철준,『이상백박사회갑기념논총』,1964)

  • 「후백제 금강에 대하여」(박한설,『대구사학』 7·8합집,1973)

  • 「후삼국의 성립」(박한설,『한국사』 3,국사편찬위원회,1978)

  • 「고려 초기 오대와의 관계」(이기백,『고려광종연구』,일조각,1981)

  • 「견훤의 세력과 대왕건관계」(박경자,『숙대사론』 11·12합집,1982)

  • 「후백제 견훤연구」(신호철,『백제논총』 1,1985)

  • 「후백제의 지배세력에 대한 분석」(신호철,『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1987)

  • 「견훤의 출신과 사회적 진출」(신호철,『동아연구』 17,1989)

  • 「신라의 멸망과 견훤」(신호철,『충북사학』 2,1989)

  • 「後百濟疆域考」(津田左右吉,『朝鮮歷史地理』 1,1913)

  • 「羅末三國の鼎立と對大陸海上交通貿易」(日野開三?,『朝鮮學報』 16·17·19·20,1960·1961)

  • 「後百濟王および高麗太祖の日本通交」(中村榮孝,『日鮮關係史の硏究』 上,1965)

주석

주01지금의 팔공산

집필자

집필 (1995년)박한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후백제(後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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