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만주의 두막루와 실위는 북유럽에 있었다

2021. 2. 16. 01:52한민족 역사/부여

부여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부터 있었다 한다. 그러나 역사속에 나타나는 부여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북만주 탁리국(또는 색리국)에서 탈출한 동명이 예맥의 땅에 망명하여 부여를 기원전 3세기경 건국한 것으로 전해지는 설화가 3세기 서적인 <위략>에 언급되었다 한다. 즉 북만주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3세기 서적인 <위략>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부여는 북만주 탁리국(다른 책에는 고리, 색리 등으로 기록)에서 탈출한 동명이 예맥의 땅에 망명하여 건국했다고 한다. 대체로 부여가 건국된 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본다."(자료: 부여, 나무위키)

 

우리가 알다시피 부여는 북부여의 해모수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의 전신인 고주몽의 졸본부여, 해부루, 금와, 대소의 동부여, 동부여 일부 유민에 세운 갈사부여, 그리고 5세기경 다시 북만주로 돌아간 두막루 등 그 역사가 매우 길고, 고구려, 백제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여의 역사에 관해서는 동부여에 관한 분석에서 더 언급하기로 하고, 오늘은 494년 동부여 멸망후 북만주로 돌아간 두막루와 그 좌측에 있던 실위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원래 시기적으로 동부여를 먼저 분석해야 하나, 동부여의 위치를 가늠하기 앞서, 고두막과 실위의 위치 추정이 보다 용이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만주라 하면 한반도 북쪽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만주가 중앙아시아 어디쯤 아닌가 하고 생각해 왔다. 압록수가 우랄강으로 생각하고 두만강은 시르다리야강이나 아무다리야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나라도 이 근처에 있던 것으로 추정했었다. 그러나 이 모두 틀렸다는 판단이다. 요수가 론강으로 판단되기 때뮨이다. 

 

요수가 론강이 되면 이 주위가 만주가 된다. 따라서 북만주는 론강의 북쪽이 되어야 한다. 이미 숙신, 물길 등과 발음이 비슷한 Saxons, Marcomanni 등의 지역이 만주일 가능성이 많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구체적 역사적 내용과 이 지역의 역사가 동일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 나타나야, 론강이 요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북만주의 고두막과 실위의 위치를 먼저 추정한다.  

 

부여의 역사는 3-4세기 선비족 모용부의 공격으로 크게 쇠락해진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에서 보듯이 선비족의 침략으로 유민의 상당수가 요서로 이주되어 일부 지배층은 전연, 후연에서 벼슬을 했다고 했다. 선비족의 부여 침입은 향후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북옥저에 일부 무리가 남아 동부여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한다. 

 

그러다가 410년 광개토태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494년 강력한 물길국에 의해 동부여가 멸망하면서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게 투항했다. 그중 일부 세력이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북만주로 이동한 두막루의 흔적이, 요수인 론강의 북쪽에 있는지가 관심사이다. 고구려의 북쪽이었던 과거 숙신국의 지역이었던 물길국에 의해 동부여가 멸망한 후 (494년), 그중 일부 세력이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으니, 두막루는 덴마크나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아래 위서 두막루전에서 기록되기를,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1천 리에 있고 낙양으로부터 6천 리 떨어져 있다. 옛날의 북부여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2천 리이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크고....풍속은 음란하고 투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서 죽여서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 시신을 거두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본래 예맥의 땅이라고 한다." 라고 한다. 

 

즉 두막루는 물길국 북쪽 1천리에 있고, 실위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은 바다와 닿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본래 예맥의 땅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실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게 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실위는 6c-10c에 중국동북부(북만주)지역에 동호족의 일파로서, 인도유럽인들의 지배에 오랜기간 있었다 한다. 타타르 등으로 불렸다 한다. 인도유럽인의 지배를 오래 받았다는 실위가 아시아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실위의 일파인 황두실위는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랗다 했다. 이는 영락없이 서구인 중에서도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북유럽인의 형상이다. 거란국지에 나오는 금발의 여진족 언급도 금발의 게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흉노의 묵특선우의 북방 정벌 지역의 하나인 '정령'의 후예였다고 한다. 

 

이러한 실위는 노르웨이나 스웨덴 또는 덴마크 등의 지역으로 판단되며, 실위의 동쪽에 있는 두막루는 스웨덴 등으로 추정된다. 두막루의 동쪽에 있는 바다는 스웨덴의 동쪽 바다 발트해로 추정된다.  즉 두막루가 있던 북만주가 요수인 론강의 북쪽에 있는 지역이 되는 셈이다. 

 

"실위(室韋, 병음:Shìwéi)는 6세기에서 10세기까지 중국 동북부 유역에 존재했던 동호족의 일파 부족으로... 실위는 인도유럽인들의 지배에 오랜 기간 있었으며...실위는 타타르(達靼)나 조복(阻卜) 등으로 불렸으며..." 

(자료 : 실위, 위키백과)

 

 

"《위서》와 《구당서》는 동호, 《신당서》는 따르면 동호(東胡)의 북변에 있으며 대개 정령(丁零)의 후예였다고 기록한다.

 

한편, 실위의 일파인 황두실위는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랗다고 하여 아리안의 일파로 보기도 하며, 실위가 해체된 후 여진으로 편입되었는지 이후 송막기문과 거란국지에 금발을 한 여진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

(자료 : 실위, 나무위키)

 

 

 

그리고 두막루의 풍속은 투기하는 것을 싫어 하여 투기하는 여자를 죽여서 시체를 썩힌다고 했다. 고구려의 중천왕시절, 관나부인이 투기가 심해 서해 바다에 수장했다는 기록이 떠오른다. (아래 자료 참조) 필자는 이때 서해가 대서양으로 추정했다. 

 

"장발(長髮)의 미인으로, 왕후 연씨(椽氏)가 질투 끝에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을 알고 중천왕에게 왕후를 모함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왕이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자 가죽주머니를 내어보이고 울면서 왕후가 가죽주머니에 자기를 넣어 바다에 던지려고 하니 집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안 중천왕에 의하여 251년 4월 가죽주머니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관나부인(貫那夫人))]

 

 

두막루의 언어는 실위와 거란과 같다고 하였다. 중국 사서에서는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거란두막루와 유사하였다.  『신당서』에는 실위의 언어가 말갈과 같다고 하였다. 

 

즉 두막루, 실위, 거란, 말갈 등이 서로 이웃한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전의 글에서 거란이 요수의 서쪽 즉 론강의 서쪽 프랑스 Gaul 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스칸디나비아제국의 위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막루와 실위에 관련 기록이 이들 국가의 역사에서 나타나는가 살펴 보자.

 

먼저 두막루가 494년 동부여가 망한 후 북만주로 이동했으니, 이 시기의 이동 역사를 보자.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고트족에 대한 역사서를 쓴 Jordanes는 Dani라고 하는 집단이 AD 500년경 현재의 덴마크 지역에 있는 Heruli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 Danes 족은 Suetidi (Swedes)와 같으며, 500년경 이들의 이동으로 이 지역에서 그동안 숭배 되었던 신들의 형상이 사라졌다고 기록된다. 

 

이들 Danes는 현재의 덴마크, Scania지역을 포함한 스웨덴 남쪽, 그리고 현재 독일의 북쪽인 Schleswig지역에 기반을 두었으며, 남쪽 경계를 지키기 위해 Schleswig지역에 커다란 요새를 쌓았다고 한다. 

 

즉 두막루의 이동에 대한 역사가  덴마크, 남부 스웨덴, 노르웨이 지역에 나타나고 있다. 

 

Northern Europe in 814 (source : Wikipedia)

 

"The history of Denmark as a unified kingdom began in the 8th century, but historic documents describe the geographic area and the people living there—the Danes—as early as 500 AD. These early documents include the writings of Jordanes and Procopius....

 

In his description of Scandza (from the 6th-century work, Getica), the ancient writer Jordanes says that the Dani were of the same stock as the Suetidi (Swedes, Suithiod?) and expelled the Heruli and took their lands."

(source : History of Denmark, Wikipedia)

 

"The Danes were a North Germanic tribe inhabiting southern Scandinavia, including the area now comprising Denmark proper, and the Scanian provinces of modern-day southern Sweden, during the Nordic Iron Age and the Viking Age. They founded what became the Kingdom of Denmark. The name of their realm is believed to mean "Danish March", viz. "the march of the Danes", in Old Norse, referring to their southern border zone between the Eider and Schlei rivers, known as the Danevirke.

....

The Danes first appear in written history in the 6th century with references in Jordanes' Getica (551 AD), by Procopius, and by Gregory of Tours. They spoke Old Norse (dǫnsk tunga), which the Danes shared with the people in Norway and Sweden and later in Iceland.[1] In his description of ScandzaJordanes says that the Dani were of the same stock as the Suetidi ("Swedes") and expelled the Heruli and took their lands.

...

As previous and contemporary peoples of Scandinavia, the tribal Danes were practitioners of the Norse religion. Around 500 AD, many of the Gods of the Norse pantheon had lost their previous significance, except a few such as ThorOdin and Frey who were increasingly worshipped.

...

In the Nordic Iron Age, the Danes were based in present-day Denmark, the southern part of present-day Sweden, including Scania, and in Schleswig, now Northern Germany. In Schleswig, they initiated the large fortification of Danevirke to mark the southern border of their realm. It was extended several times, also in the centuries after the Iron Age. Up until around the 6th century, Jutland is described as being the homeland of the Jutes, a Germanic tribe."

(source : Danes (Germanic tribe), Wikipedia)

 

"According to popular legend, however, the name Denmark, refers to the mythological King Dan. There are also a number of references to various Dani people in Scandinavia or other places in Europe in Ancient Greece and Roman accounts (like PtolemyJordanes, and Gregory of Tours), as well as some medieval literature (like Adam of BremenBeowulfWidsith and Poetic Edda)..."

(source : Etymology of Denmark, Wikipedia)

 

 

"The chieftains' power increased during the Migration Period between 400 and 550 as other Germanic tribes migrated northwards and local farmers wanted protection. This also resulted in the construction of simple fortifications."

(source : History of Norway, Wikipedia)

 

따라서 우리는 북부여계인 두막루가 북만주인 덴마크, 남부스웨덴 지역에 있었으며, 두막루의 서쪽에 있는 실위가 노르웨이, 일부 스웨덴 지역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울러 두박루의 동쪽에 있는 바다는 발트해가 됨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북부여가 있던 북만주지역이 덴마크, 스웨덴 지역이라는 것은, 요수인 압록수가 프랑스의 론강(Rhone River)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고 본다. 

 

 

 

*** 부여에 관한 자료 (나무위키에서 발췌)

 

"부여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는 그들의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부여의 지배층들은 전연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말갈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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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서적인 <위략>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부여는 북만주 탁리국(다른 책에는 고리, 색리 등으로 기록)에서 탈출한 동명이 예맥의 땅에 망명하여 건국했다고 한다. 대체로 부여가 건국된 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본다. 위만조선이 건국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 



고구려 대무신왕의 원정으로 대소왕이 사망하면서 부여와 고구려 간에 관계에 약간의 흠이 생겼으나, 어찌되었든 국력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부여가 우위에 있었다. 고구려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만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만 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다.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 사회로써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 실제 부여는 선제 이래 한 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국이었다.[11]

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초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다. 게다가 부여는 최대 영토가 2천 리에 이르렀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동명성왕 ~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을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 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3~4세기에 선비족 모용부에게 대대적으로 털리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하였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수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 한편 선비족의 부여 침입은 향후 동북아의 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북옥저에 일부 무리가 남아 동부여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살았는데 백제의 침입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지매 서쪽으로 과 가까운 곳으로 도망쳤으나 대비하지 않았다. 연왕 이 세자 을 보내어 모용군(慕容軍), 모용각(慕容恪), 모여근(慕輿根) 세 장군과 1만 7천 기를 이끌고 부여를 습격했다. 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 마침내 부여를 빼앗아[拔] 그 왕 현(玄)과 부락 5만여 구를 사로잡고서 돌아왔다. 황은 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딸을 시집보냈다.

(春,正月, …(중략)… 己卯[12], …(중략)…)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자치통감 권97 진기 19 효종 목황제 하 영화 2년(병오, 364)

 


모용외의 침공에 부여는 국가 중심지를 기존의 지린성 일대에서 농안 지역으로 옮기나, 346년 결국 전연 모용황의 대공격에 부여왕 현을 포함해 무려 5만여 명이 끌려가면서 사실상 부여는 붕괴하게 된다. 이때 끌려간 인구가 5만 명이 아니라 5만 호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구당서를 신당서를 옮겨 적을 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던 것이 대표적인 예.

부여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이것마저 맥이 끊겼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 지역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부여 세력은 494년에 물길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여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 투항했다. 일부 세력은 북방으로 이주해 두막루를 형성한다."

(자료 : 부여, 나무위키)

 

 

*** 두막루 에 관한 자료 (나무위키에서 발췌)

 

"두막루(豆莫婁)는 과거 만주 북단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달말루(達末婁),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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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막루가 몽골계 민족인 실위거란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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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읍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 만이 다르다. 두막루(豆莫婁)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勿吉國, 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其人勁悍, 於東夷最强. 言語獨異. 常輕豆莫婁註 等國, 諸國亦患之. 去洛五千里. 自和龍北二百餘里有善玉山, 山北行十三日至祁黎山, 又北行七日至如洛瓌水, 水廣里餘, 又北行十五日至太魯水校勘, 又東北行十八日到其國. 國有大水, 闊校勘三里餘, 名速末水.
위서 물길전

 

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 衣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淫,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두막루국은 물길국 북쪽 1천 리에 있고 낙양으로부터 6천 리 떨어져 있다. 옛날의 북부여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2천 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구릉, 넓은 연못이 많아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높다랗게 트여있다. 땅은 오곡에 알맞고 오과가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신충하고 중후하니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음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을 마름질하는 것은 고려와 비슷하나 폭이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엄하고 급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은 음란하고 투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서 죽여서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 시신을 거두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본래 예맥의 땅이라고 한다.

위서 두막루전"

 

(자료 : 두막루, 나무위키)

 

 

*** '실위'에 관한 자료 (위키백과, 나무위키에서 발췌)

 

"실위(室韋, 병음:Shìwéi)는 6세기에서 10세기까지 중국 동북부의 넌장 강아르군 강흑룡강 유역에 존재했던 동호족의 일파 부족으로 오늘날 몽골족의 전신이다. 실위는 인도유럽인들의 지배에 오랜 기간 있었으며 돌궐이 철륵을 격파했을 때부터 몽골계통인 실위는 튀르크화가 진행되었다.

 

실위는 타타르(達靼)나 조복(阻卜) 등으로 불렸으며, 돌궐의 퀼테긴 비문에서는 한문 사료의 실위를 30성 타타르(?????? Otuz Tatar)라고 부르고 있고, 빌게 카간 비문에서도 9성 타타르(Toquz Tatar)로 부르고 있다.

 

...

남실위는 조, 보리, 피가 풍부하고, 겨울은 목축을 한다. 담비의 가죽을 잘 얻었다. 철광이 없어 고구려에서 철광을 얻고 있었다. 북실위는 사슴을 노획하여 얻은 고기를 주식으로 하였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고, 잡은 담비를 식생으로 하고 있었다.

 

중국 사서에서는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거란두막루와 유사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에 정복되어 튀르크화도 진행되었다. 후에 맹고국(萌古国)이 대두한 후로부터 몽골계로 추정한다. 『신당서』에는 실위의 언어가 말갈과 같다고 하였다."

(자료 : 실위, 위키백과)

 

 

 

 

"실위는 5~6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낸다. 5세기 오락후라는 명칭으로 북위에 조공을 시작하며, 수나라 때 남실위, 북실위, 발실위, 심말달실위, 대실위 등으로 나뉘었으며, 나라 때 오소고, 아례, 새갈지, 동실위, 대실위, 남실위, 몽올실위 등 22부로 나뉘었다.
 

 

 

실위는 자바이칼의 아르군 강 유역 서부에서 활동하던 초기 선비계 집단과 언어적으로 친연성을 가지는 종족들로도 구성되어 있는데, 러시아 학계에 의하면 이들은 고고학적으로 부르호토이 문화와 미하일로프카-글라드콥스키 문화로 양분된다.[1]

남북조-수대 실위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있다. 대략적으로 본다면 남실위는 눈강 중하류 및 서쪽 각 지류, 북실위는 남실위의 북쪽, 발실위는 북실위의 서북쪽, 심말달실위는 발실위의 서남쪽, 대실위는 심말달실위의 서북쪽 수천 리에 분포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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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와 《구당서》는 동호, 《신당서》는 따르면 동호(東胡)의 북변에 있으며 대개 정령(丁零)의 후예였다고 기록한다.

 

 

한편, 실위의 일파인 황두실위는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랗다고 하여 아리안의 일파로 보기도 하며, 실위가 해체된 후 여진으로 편입되었는지 이후 송막기문과 거란국지에 금발을 한 여진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

 

(자료 : 실위, 나무위키)

 

 

 

*** 흉노 묵특선우시의 동호, 월지 및 정령, 격곤

 

"드디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하였다. 동호는 묵특을 경시하여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동호왕은 전사하고 흉노는 그 백성과 가축을 걷어드렸다.

다시 서쪽으로 월지를 쳐서 달아나게 하고 남쪽으로 누번과 하남(河南)의 백양왕(白羊王)울 병합하였다.

북쪽으로 흔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치고 남쪽으로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되찾은 후 연나라와 대(代)나라로 쳐들어갔다. "

 

(자료 : 김은한, 묵특선우의 흉노 전성기) 

 

 

*** 고구려 유리왕시의 선비, 부여, 양맥 정벌

 

“유리왕은 재위 기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고구려왕국의 초석을 다졌다.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3년에 부여(夫餘)가 침범했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 

(자료 : 유리왕, 나무위키)

 

*** 선비족의 정의

 

“선비라는 이름은 동호가 흉노에게 멸망당한 뒤에 살아남은 동호의 일파 중 선비산으로 들어간 무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료: 나무위키, ‘선비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