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부여

연나부 부여는 프랑스에 있었던 Kingdom of the Burgundians이다

Chung Park 2021. 12. 10. 12:49

성현식님의 글 중에 '위대한 역사 고조선, 신화로 꾸민 ‘부여’의 진실'이란 글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에서 7개 부여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그중에서 우리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연나부 부여(椽那部 夫餘)가 언급된다.

 

 

"(5) 연나부부여(椽那部 夫餘) : 대소 왕의 6촌 동생이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하자 고구리는 그를 왕(제후)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편입시켰다. 뒤에 자립해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니 연(燕)나라 땅과 가까웠다고 한다. 문자명제 때인 494년 나라를 들어 바치고는 아예 고구리의 연나부에 편입되는데, 이를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라 한다."

 

(자료 : 성현식, '위대한 역사 고조선, 신화로 꾸민 부여의 진실', 스카이데일리,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 펌글 참조)

 

 

필자는 이미 동부여가 410년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정복당할 때, 독일 남부 Worms시에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 지역에서의 동부여는 411년까지 있었고 이후, 결국 Savoy지역으로 이동하여 있다가, 프랑크의 Clovis I에게 침략을 당해, 493년 고구려 문자왕에게 항복한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아래 글에서는, 동부여로 보이는 Burgundians의 Gundahar는 훈족의 압박에 의해 435년 Belgica Prima (지금 Trier근방) 지역을 공격했다고 기술된다. 이들은 로마의 장군 Flavius Aetius에 의해 패배되었으나, Aetius는 Gundahar와 그 주민들의 권리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다음해 (436년), Aetius는 훈족 용병들과 함께 Burgundian Kingdom을 공격해 파괴하고 부족의 대부분을 죽였다고 한다.  Aetius는 이 파괴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프랑스 사보이(Savoy)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했다 한다. 이는 생존자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이야기, 그리고 주위 게르만민족들이 관찰한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래 내용 참조)

 

"In the 430s, the Burgundians came under increasing pressure from the Huns; likely as a reaction to this Gundahar attacked the Roman province Belgica Prima (based around Trier) in 435.[7] The Burgundians were defeated by the Roman general Flavius Aetius, who nevertheless confirmed Gundahar and his people's rights to their kingdom.[7] However, the next year (436) Aetius, accompanied by Hunnish mercenaries, attacked and destroyed the Burgundian kingdom. According to Prosper of Aquitaine, Gundahar and the majority of his people found their deaths in Aetius's attack.[7][10] 

Aetius resettled the survivors of the destruction of the Burgundian kingdom in Savoy on the upper Rhone.[10] The memory of Gundahar and his downfall was likely preserved by these survivors, as well as by observers from neighboring Germanic tribes.[11] "

 

(source : Gunther (407-436, king of Burgundy),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Burgundians, 펌글 참조)

 

 

그러나 필자는 위의 내용을 달리 해석한다. 동부여는 이미 광개토태왕에 의해 410년 정벌되었고, 고구려의 부용국으로서 고구려의 서진에 함께한 것으로 판단된다. 즉 435년 Burgundians의 Belgica Prima 공격은 고구려의 공격에 참여한 것일 수 있다.

또한 Flavius Aetius의 정체가 로마 장군인지도 의문이 든다. 그는 아버지가 고트족 출신이라 하며, 주위에 훈족 용병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451년에는 Battle of Charlons에 고트족 왕 Theodoric I의 편에 서서 훈족의  아틸라와 싸웠다 한다. 나중에는 Valentinian III 서로마 황제에 의해 칼로 죽었다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

 

훈족은 고구려이고 로마는 백제인데, 로마의 용병으로 훈족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고트족도 고구려라고 필자는 이미 추정했다. Burgundians을 대패시키고서도 그들의 지역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나 (이는 부용국으로 삼았다는 의미), 436년 많은 Burgundians을 살상하고도 살아 남은 주민을 이주시켰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Burgundians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표현도 없는데 말이다. 로마 황제가 직접 칼로 Aetius를 죽였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간다. Flavius Aetius는 장군으로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나약한 황제에 의해 칼로 죽을 수가 없다. 황제가 암살되었다면 이해가 가지만... 그러나 보통 남을 시켜서 하는 행동이다. 아무리 권력의 견제가 되는 장군이라 해도 직접 죽이는 우를 범하는 황제는 없다. 죽는 시기에 맞추기 위해 만든 것같은 너무나 엉성한 plot이다. 그래서 Flavius Aetius는 고구려의 장군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451년 Battle of Charlons은 고구려 내부의 권력투쟁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고 필자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만약 Aetius가 고구려 장군이라면 436년 Burgundians을 공격한 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로 남는다.  위의 환단고기 기록에서, 동부여는 대소왕 죽음이후 일부 세력이 고구려에 투항한 후, 이후 독립해서 이동한 지역이 연나라에 가깝다고 했다. 필자는 연나라가 요동과 요서 사이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나아가 북연이나 서연은 더 서쪽으로 이동한 형상이다. 따라서 북연시기인 이때의 연나라는 프랑스 북방지역을 점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우연히도 436년 북연이 북위에게 망한다. 이때 장수왕은 망명하고자 하는 북연의 왕 풍홍을 구출한 역사가 있다. 즉 장수왕이 보낸 고구려의 장수 갈로와 맹광이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공격하며, 화룡성의 주민을 구출한 뒤, 풍홍을 구출한 전쟁이, Aetius가 Burgundians을 공격한 전쟁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과거 아틸라가 죽었다는 451년 Charlons 전투가 북연왕 풍홍을 구출한 장수왕이 개입한 전쟁으로 판단한 바 있다. 15년의 차이가 있다고 추정했는데.... 436년 고구려의 북연왕 풍홍 구출전쟁이  Aetius가 Burgundians을 공격한 전쟁으로 묘사된 것일 수 있다고 본다.

 

Aetius가 살아 남은 주민들을 Savoy지역으로 옮겼다는 것은, 화룡성의 구출한 주민을 사보이 지역으로 옮긴 것일 것이다. 이들이 살아 남은 동부여 (Burgundians) 주민으로서, 493년 고구려 문자왕에게 항복한 부여주민일 것이다. 즉 이들이 연나부 부여인 것이다.

 

 

그러면 이 연나부 부여가 493년 문자왕에게 항복한 부여라면 Burgundians역사에 이와 유사한 상황이 있었는지 알아 보자. 

 

Kingdom of the Burgundians after the settlement in Savoy from 443

(source : Wikipedia)

 

아래 글에서 보듯이 Burgundy 왕인 Chilperic II는 493년 그의 Brother인 Gundobad에 의해 암살당한다. 즉 Civil War의 형태가 언급되지만, 493년 끝나는 것은 연나부여가 고구려 문자왕에게 항복하는 해인 493년과 일치한다. Burgundians의 형제가 Geneva, Vienne, Lyon을 나누어 통치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연나부 부여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470년대 초반 언젠가 Chilperic은 로마제국에 의지하게 되었다는 상황이 되었다고 언급된다. 그리고 이어 475년 서고트왕국이 Auvergne 지역을 점령하였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즉 475년 고구려가 이 지역, Auvergne를 점령함으로써 이미 위협을 느낀 Burgundy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연나부 부여는 493년 고구려에 항복해서 멸망하기 전까지는 고구려의 부용국으로서 지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연나부 부여의 내전 상황 중에서, 일부는 고구려 문자왕에 항복하고, 일부는 프랑크왕국의 Clovis I과 연계한 것으로 판단된다. 동부여가 고구려에 항복하기 전에 물길국의 압박이 있었다고 했다. Burgundy 일부 세력이 Clovis I의  프랑크왕국과 결혼으로 연계한 것을 보면 Clovis I의 프랑크왕국이 물길국인지도 모른다. 프랑크왕국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더 있을 것지만, 후일의 프랑크왕국은 북위의 일부 세력이 북부지역에서 독립한 세력을 이룬 것으로도 보인다. Clovis I은 교황이 왕관을 씌워 주었을 때, Sicambrians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Sicambri는 서쪽으로 이동한 Cambri/Cimbri/Cimmerians이라고 필자의 지난 연구에서 밝혔다. ('스키타인의 일원인 키메리언은 누구인가 (II)?' 참조)  Cimmerians은 스키타이의 일부로서 한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프랑크왕국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있을 것이다. 

 

"Chilperic II (Latin: Chilperikus; c. 450–493 AD) was the King of Burgundy from 473 until his death. Before that he co-ruled with his father Gondioc beginning in 463. He began his reign in 473 after the partition of Burgundy with his younger brothers Godegisel, Gundobad, and Godomar; he ruled from Valentia Julia (Valence) and his brothers ruled respectively from Geneva, Vienne, and Lyon.

 

Sometime in the early 470s Chilperic was forced to submit to the authority of the Roman Empire by the magister militum Ecdicius Avitus. In 475 he probably sheltered an exiled Ecdicius after the Visigoths had obtained possession of the Auvergne.

 

After his brother Gundobad had removed his other brother Godomar (Gundomar) in 486, he turned on Chilperic. In 493 Gundobad assassinated Chilperic and drowned his wife, then exiled their two daughters, Chroma, who became a nun, and Clotilde, who fled to her uncle, Godegisel. When the Frankish king, Clovis I, requested the latter's hand in marriage, Gundobad was unable to decline. Clovis and Godegisel allied against Gundobad in a long, drawn-out civil war."

 

(source : Chilperic II (473-493),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Burgundians, 펌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