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기타

낙랑은 어디 있었는가? (IV)

Chung Park 2021. 7. 27. 09:33

부제 : 낙랑은 발칸반도 Dacians을 포함했다.

 

이제 보이족과 끝까지 싸운 독립된 낙랑지역으로 추정되는 Dacians에 대해 살펴 보자. 

 

아래 글에서 Dacians지역은 Carpathian Mountains지역에서 흑해의 서쪽까지 위치한다고 했다. 현재 나라에서는 루마니아, 몰다비아, 우크라이나 일부, 세르비아 동쪽, 불가리아 북쪽, 슬로바키아, 항가리, 그리고 폴란드 남부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The Dacians (/ˈdʃənz/LatinDaciGreekΔάκοι,[2] Δάοι,[2] Δάκαι[3]) were a Thracian[4][5][6] people who were the ancient inhabitants of the cultural region of Dacia, located in the area near the Carpathian Mountains and west of the Black Sea. This area includes mainly the present-day countries of Romania and Moldova, as well as parts of Ukraine,[7] Eastern SerbiaNorthern BulgariaSlovakia,[8] Hungary and Southern Poland."[7]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s, 펌글 참조)

 

Dacians은 또한 Getae라고도 불리운다. 그래서 현대 사가들은 Geto-Dacians이라 부르기를 선호한다. Strabo는 Getae와 Dacians을 구분했으나, 같은 언어를 쓴다고 했으며, 가한을 우두머리로 하는 부족 (Cognate Tribes)이라 했다. (아래 자료 참조). Jordanes는 Goths(고트족)을 Getae라고 했다. 필자는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라는 본 블로그 글에서 고트족은 고구려라고 추정했다. 

 

"The Dacians were known as Geta (plural Getae) in Ancient Greek writings, and as Dacus (plural Daci) or Getae in Roman documents,[10] but also as Dagae and Gaete as depicted on the late Roman map Tabula Peutingeriana. It was Herodotus who first used the ethnonym Getae in his Histories.[11] In Greek and Latin, in the writings of Julius CaesarStrabo, and Pliny the Elder, the people became known as 'the Dacians'.[12] Getae and Dacians were interchangeable terms, or used with some confusion by the Greeks.[13][14] Latin poets often used the name Getae.[15] Vergil called them Getae four times, and Daci once, Lucian Getae three times and Daci twice, Horace named them Getae twice and Daci five times, while Juvenal one time Getae and two times Daci.[16][17][15] In AD 113, Hadrian used the poetic term Getae for the Dacians.[18] Modern historians prefer to use the name Geto-Dacians.[12] Strabo describes the Getae and Dacians as distinct but cognate tribes. This distinction refers to the regions they occupied.[19] Strabo and Pliny the Elder also state that Getae and Dacians spoke the same language."[19][20]

Getae on the World map according to Herodotus (source : Wikipedia)

 

그런데 Dacians은 'Wolf'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늑대는 소아시아의 Phrigians의 신(神), Daos 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또 다시 소아시아의 Phrigians에 접하게 된다. Phrigians지역은 터어키 소아시아 지방의 Sakarya river(Saka족(=색족)의 강?)와 Porsuk River (포석정의 포석강?)지역인데,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이동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지난 글에서 Hannibal이 소아시아 Phrigians 출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솝우화의 저자 Aesop (BC 620-564 BC)도 Phrigian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켈트족이 BC 275년까지 활동한 영역 지도에서도 소아시아 이 지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알렉산더대왕 사후( BC 323) 켈트족이 Phrigia지역에 침입했다고 한다.  또 이 프리기언이 이동하여 아르메니아를 이루었다는 서술도 있다. 프리기아지역의 우측에는 Hittite (히타이트) 즉 햇족의 역사가 있는 지역이다. 필자는 웅진백제가 비잔틴제국이라고 추정했고, 이 소아시아 지역이 이들 활동의 중심지였다. 프리기아에 대해서는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Turkey에서 펌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언젠가 이들에 대한 연구가 있을 것이다. 단지 여기서는 프리기언 지역이 발칸반도의 Dacians지역과 연관관계가 있는 지역이므로, 늑대라는 동물과 관련하여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Location of Phrigia in Anatolia (source : Wikipedia)

 

우리는 지난 글(III)에서 에트루리아문명에서 로마의 시조라 불리는 Romulus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동상이 나왔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지난 글 (III)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이 소아시아 Lydia (상기 지도 참조)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BC 5세기의 Herodotus, BC 1세기의 Strabo 등의 역사가들이 주장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즉 늑대를 매개로 에트루리아지역, 다키안지역, 프리기아지역이 연관성을 갖는 것이다. 혹시 낙랑조선 지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The name Daci, or "Dacians" is a collective ethnonym.[34] Dio Cassius reported that the Dacians themselves used that name, and the Romans so called them, while the Greeks called them Getae.[35][36][37] Opinions on the origins of the name Daci are divided. Some scholars consider it to originate in the Indo-European *dha-k-, with the stem *dhe- "to put, to place", while others think that the name Daci originates in *daca – "knife, dagger" or in a word similar to dáos, meaning "wolf" in the related language of the Phrygians.[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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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theoriesSince the 19th century, many scholars have proposed an etymological link between the endonym of the Dacians and wo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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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thological theories

Dacian Draco as from Trajan's Column

Mircea Eliade attempted, in his book From Zalmoxis to Genghis Khan, to give a mythological foundation to an alleged special relation between Dacians and the wolves:[53]

  • Dacians might have called themselves "wolves" or "ones the same with wolves",[54][53] suggesting religious significance.[55]
  • Dacians draw their name from a god or a legendary ancestor who appeared as a wolf.[55]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aete, 펌글 참조)

 

다키언의 origins과 종족에 대한 언급을 보면 아래와 같다. 다키언은 스키타이인 트라키아인들의 후손으로서, 초기 청동기 시기인 BC 3300-3000년경,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스텝지역의 인도유럽인들이 건너와 토착세력과 융합한 사람들이라 한다. 범트라키아인(Proto-Thracians)은 발칸반도의 트라키아인들뿐만 아니라 Danubian-Carpathians, Geto-Dacians을 포함한다고 한다. 

기원전 15-12세기동안 Dacians-Getae는, 발칸반도에서 아나톨리아로 이동하는 Tumulus-Urnfield culture 전사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기원전 4세기 La Tene 켈트족이 이곳에 도달할 때에는, Dacians은 스키타이인들의 영향하에 있었다.  즉 다키언들은 훅해 주위의 스키타이인 영향권에 있었으며, 동시에 발칸반도에서 아나톨리아로 이동하는 세력의 영향도 받았다는 것이다. 

 

BC 3c와 BC 1c에 켈트족인 보이족은 다키언지역에 침입하고자 했지만, 다키언들은 이들을 쫓아내, 보이족들이 침략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우리가 글 (III)에서 살펴 본 내용이다. 즉 다키언은 흑위 주위 스키타이인권에 포함되면서도 보헤미아지역에까지 거주하던 켈트족 보이족과는 확실한 경계를 이루며, 독립적인 위치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에트루리아문명, 소아시아 프리기언들과는 공통점을 지닌 연대가 있다는 것이다. 

 

 

"Origins and ethnogenesis

See also: Prehistoric Balkans § Iron Age

Evidence of proto-Thracians or proto-Dacians in the prehistoric period depends on the remains of material culture. It is generally proposed that a proto-Dacian or proto-Thracian people developed from a mixture of indigenous peoples and Indo-Europeans from the time of Proto-Indo-European expansion in the Early Bronze Age (3,300–3,000 BC)[63] when the latter, around 1500 BC, conquered the indigenous peoples.[64] The indigenous people were Danubian farmers, and the invading people of the BC 3rd millennium were Kurgan warrior-herders from the Ukrainian and Russian steppes.[65]

Indo-Europeanization was complete by the beginning of the Bronze Age. The people of that time are best described as proto-Thracians, which later developed in the Iron Age into Danubian-Carpathian Geto-Dacians as well as Thracians of the eastern Balkan Peninsula.[66]

Between BC 15th–12th century, the Dacian-Getae culture was influenced by the Bronze Age Tumulus-Urnfield warriors who were on their way through the Balkans to Anatolia.[67] When the La Tène Celts arrived in BC 4th century, the Dacians were under the influence of the Scythians.[67]

Alexander the Great attacked the Getae in BC 335 on the lower Danube, but by BC 300 they had formed a state founded on a military democracy, and began a period of conquest.[67] More Celts arrived during the BC 3rd century, and in BC 1st century the people of Boii tried to conquer some of the Dacian territory on the eastern side of the Teiss river. The Dacians drove the Boii south across the Danube and out of their territory, at which point the Boii abandoned any further plans for invasion.[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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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ue Dacians were a people of Thracian descent. German elements (Daco-Germans), Celtic elements (Daco-Celtic) and Iranian elements (Daco-Sarmatian) occupied territories in the north-west and north-east of Dacia.[97][98][96] This region covered roughly the same area as modern Romania plus Bessarabia (Republic of Moldova) and eastern Galicia (south-west Ukraine), although Ptolemy places Moldavia and Bessarabia in Sarmatia Europaea, rather than Dacia.[99] After the Dacian Wars (AD 101-6), the Romans occupied only about half of the wider Dacian region. The Roman province of Dacia covered just western Wallachia as far as the Limes Transalutanus (East of the river Aluta, or Olt) and Transylvania, as bordered by the Carpathians.[100]"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aete, 펌글 참조)

 

Dacians은 이외에도 좌식문화를 가졌으며, 초가집에서 살았고, 편두를 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 민족과 매우 관련이 깊은 민족이라 판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흑해연안의 스키타이인과 트라키언들은 직모(straight-haired)를 가졌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종교적 의미로 타투(Tattooing) 즉 보디페인팅을 남녀 모두 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우리는, 왜와 가까운 지역에 있는, 마한이나 진한의 남쪽 사람들이 타투를 했다는 것을 삼한에 대한 자료에서 보았다. 

 

"Aristotle wrote that "the Scythians on the Black Sea and the Thracians are straight-haired,.....

Body-painting was customary among the Dacians.[specify] It is probable that the tattooing originally had a religious significance.[146] They practiced symbolic-ritual tattooing or body painting for both men and women, with hereditary symbols transmitted up to the fourth generation.[147] "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aete, 펌글 참조)

 

다키언의 원조인 트라키언 (Thracians)은 blue eyes, red haired 라 한다. 또한 high-spirited and war-like people로 평가 받는다. 즉 전쟁에서 용감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플라톤은  스키타인, 켈트족, 페르시안, 이베리아인, 카르타고인 등이 전쟁에서 용감하다고 하였다. 

 

"Plato in his Republic considers them, along with the Scythians,[30]extravagant and high spirited and his Laws considers them war-like nations grouping them with Celts, Persians, Scythians, Iberians and Carthaginians.[31]"

(source : Thracians, Wikipedia,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Thracians, 펌글 참조)

 

 

훈족, Alans족들은 오래전부터 편두를 해왔다. AD 300-600시기에 동부의 게르만민족들, 즉 Gepids, 동고트족, 스칸디나비아 계통인 Heruli족, 반달족인 Burgundians족 등이 편두의 관습이 있었다 한다. 훈족의 지배를 받아서라기 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해온 관습이 아닌가 한다. 롬바르디언, Burgundians, Thuringians 등은 여성에게만 편두를 했다고 한다. 반면 서부 게르만족들은 이러한 편두의 관습이 매우 드물게 발견된다. (아래 자료 참조)

 

동부 게르만족들이 사는 지역이 Dacians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훈족은 스키타이인이라 하므로 스키타이인 문화의 영향하에 있던 Dacians들은 편두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태리북부 롬바르디언들도 여성들은 편두를 했다고 하니, 늑대에 이어 또 하나의 공통점을 Dacians과 가지고 있는 것이다. 

 

"In the Old World, Huns also are known to have practised similar cranial deformation,[6] as were the people known as the Alans.[7] In Late Antiquity (AD 300–600), the East Germanic tribes who were ruled by the Huns, the Gepids, Ostrogoths, Heruli, Rugii, and Burgundians adopted this custom. Among the Lombards, the Burgundians and the Thuringians,[8] this custom seems to have comprised women only.[9] In western Germanic tribes, artificial skull deformations rarely have been found.[10]"

(source : 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etae, 펌글 참조)

 

또한 Dacians 들은 좌식생활 (sedentary dwellings)을 했고, 초가집(Wattle and daub house)에 살았다. 발칸반도에 속한 로마의 속민(트라키아, 모에지아 지역)이 아닌 Dacians, 즉 Carpi(Carpathian Mountains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 free Dacians들은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좌식문화의 생활을 했고, 초가집에서 생활했다. 초가집은 모래, 짚, 젖은 흙 등을 섞어 만든 흙벽돌로 만들어졌다. (아래 자료 참조) 

 

아래 자료에서 Carpi의 이러한 좌식문화가 106년에 시작하고 318년에 사라졌다는 기록이 의미심장하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각각 313년, 314년 망했기 때문이다. 

 

"There is no dispute among scholars that some Decebalic-era Dacian settlements in Moldavia (mostly west of the Siret, with a few on the east bank (including Piroboridava, identified with Poiana-Tecuci), were abandoned by 106, most likely, according to Bichir, as a result of the Roman conquest of Dacia.[27] From this time, Bichir identifies two distinct cultures in Moldavia, existing side-by-side. One, a sedentary culture, labelled "Daco-Carpic" by Bichir, started around 106 and disappeared around 318;[28] A smaller culture displayed characteristics usually associated with nomadic peoples from the Eurasian steppes, labelled "Sarmatian" by Bichir.[25]

Wattle and daub house

By 1976, 117 sedentary settlements had been identified, the great majority (89) located West of the Siret (thus inside Dacia's borders as defined by Ptolemy).[29] The inhabitants lived in both surface-dwellings and sunken-floor huts. The single-roomed surface-dwellings were made of wattle and beaten-earth, usually of rectangular or square form, varying from 9 sq m to 30 sq m in size. Each contained a clay hearth placed at the centre of the dwelling. The more numerous sunken-earth huts are usually of oval or round shape.[30] The sedentary people generally cremated their dead, both adults and children, according to Bichir: all the 43 purely "Daco-Carpic" (sedentary) cemeteries used only cremation. The ashes from the cremation were, in the great majority of cases, buried inside urns.[31] Some graves contained grave-goods, but no weapons other than a single dagger. Mundane goods include knives, keys, and belt-buckles; valuable goods include Sarmatian-style mirrors, silver ear-rings, gold pendants and beads.[32] Pottery found in sedentary sites includes the hand-made "porous" type, grey wheel-made ware, red-fired pottery and imported Roman ware. Bichir describes the first two as continuing Dacian La Tène pottery, and points to the presence of the so-called "Dacian cup", a cup of distinctive design, as evidence of a Dacian base to this culture. However, he admits that the pottery also shows Roman and Sarmatian influence.[33] "

(source : Carpi(people),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Dacia/Getae, 펌글 참조)

 

"Wattle and daub is a composite building method used for making walls and buildings, in which a woven lattice of wooden strips called wattle is daubed with a sticky material usually made of some combination of wet soil, clay, sand, animal dung and straw. .....

It was common for houses of Linear pottery and Rössen cultures of Central Europe, but is also found in Western Asia (ÇatalhöyükShillourokambos) as well as in North America (Mississippian culture) and South America (Brazil)."

(source : Wattle and Daub,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Getae, 펌글 참조)

 

Dacians을 Getae라고도 하는데, 고구려인으로 판단되는 Goths족을, Jordanes(고트족에 대한 책을 쓴 6세기의 역사학자)는 Getae라 했다. 필자는 또한 동예가 발칸반도 동쪽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동예가 있는 창해는 어디인가? (II)' 참조). 동예는 예족으로 본디 낙랑과 같은 부류라 했다. 따라서 창해군이 있던 알프스산맥 지역도 예족이 살고 있었지만 (후일 낙랑군의 지역 추정), 이들이 동부여족의 이동에 의해 밀려 동부 동예로 옮겨 간 지역도 낙랑으로 불리우는 지역이 아닐까 한다. 

로마에 예속되지 않은 Dacians이 일부 Carpi라고 불리우며, 발칸반도 동쪽위에 살았다 하는데, AD 313년경까지 존재했다고 로마사는 말한다. 로마사에서는 이들 Carpi가 로마를 아주 괴롭히는 존재였고, Dacians자체도 로마의 Trajan 황제의 Dacians War (AD 101-106)이후 Aurelius 황제때 Dacians의 정벌을 포기한다. (본 블로그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 참조).

 

그런데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낙랑군이 멸망하는 시점 이후로는 이 Carpi의 존재가 로마사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보면, 비록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점령하여, Dacians지역의 일부 독립된 낙랑국을 흡수하였지만, 낙랑군이라는 존재는 발칸반도에도 계속 존재했다는 의미가 된다. 즉 낙랑군의 지역이 알프스산맥 지역에서 발칸반도까지 넓게 퍼져 있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전한(前漢)의 소제 시원 5년 (BC 82)에 동부의 진번, 임둔을 폐지하고 낙랑군으로 합쳤으며, 단단대령(Dinaric Alps로 추정) 동쪽의 옥저와 예맥 또한 낙랑군에 속하였으며, 그 관할지역이 넓어지자, 단단대령  동쪽의 영동의 7현을 낙랑 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는 아래 자료는 낙랑군이 알프스산맥에서 발칸반도까지 넓게 펴져 있을 수 있다는 필자의 추정을 밑받침하고 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에 임둔과 진번을 파하고 낙랑과 현도에 합쳤다.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겨갔다.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후에 그 경토(境土)가 넓어지자, 다시 (단단대산)영동(領東)의 7현(縣)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원전 : 후한서 동이전 예조, 인용출처 : 청천의 블로그,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캬테고리, 낙랑 옥저 동예 부여, 공유글 참조)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군을 멸망시키는 313년경,  로마사에서는 이와 유사한 흐름으로, 250년경 고트족의 Cniva왕 (고트족의 알렉산더로 불림, 고구려의 중천왕으로 추정)이 발칸반도로 내려와 Carpi, 즉 Dacians을 공격하여, 이들은 로마와 고트족의 사이에서 쇠락해 갔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이때 많은 수의 Carpi가 290년이후 25년동안 (즉 315년까지) 로마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미천왕의 낙랑군(313) 대방군(314) 멸망과 유사한 기록이다. 

 

"Relations with Germanic tribes

 

Map showing the Dacian-speaking Carpi place in invading Roman Dacia in AD 250-1, under the Gothic leader Kniva

The Goths, a confederation of east German peoples, arrived in the southern Ukraine no later than 230.[165] During the next decade, a large section of them moved down the Black Sea coast and occupied much of the territory north of the lower Danube.[165] The Goths' advance towards the area north of the Black Sea involved competing with the indigenous population of Dacian-speaking Carpi, as well as indigenous Iranian-speaking Sarmatians and Roman garrison forces.[166] The Carpi, often called "Free Dacians", continued to dominate the anti-Roman coalition made up of themselves, Taifali, Astringi, Vandals, Peucini, and Goths until 248, when the Goths assumed the hegemony of the loose coalition.[167] The first lands taken over by the Thervingi Goths were in Moldavia, and only during the fourth century did they move in strength down into the Danubian plain.[168] The Carpi found themselves squeezed between the advancing Goths and the Roman province of Dacia.[165] In 275 AD, Aurelian surrendered the Dacian territory[clarification needed] to the Carpi and the Goths.[169] Over time, Gothic power in the region grew, at the Carpi's expense. The Germanic-speaking Goths replaced native Dacian-speakers as the dominant force around the Carpathian mountains.[170] Large numbers of Carpi, but not all of them, were admitted into the Roman empire in the twenty-five years or so after 290 AD.[171] Despite this evacuation of the Carpi around 300 AD, considerable groups of the natives (non-Romanized Dacians, Sarmatians and others) remained in place under Gothic domination.[172]"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aete, 펌글 참조)

 

우리는 지난 글 (II)에서 최숭의 낙랑국이 BC 195년 많은 보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북부여 단군 해모수에게 많은 선물을 했다고 했다. BC 169년에는 곡식 300석을 해성에 바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질적인 낙랑국이 발칸반도에 있었는지 로마사 기록을 보면 유사한 Dacian Kingdom이 존재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기원전 4세기에는 Cothelas왕국이 흑해가까이 오늘날의 불가리아지역에 있었고, 기원전 2세기(최숭의 낙랑국 시기)에는 Rubobostes왕국이 존재했다. 

 

" kingdom of Cothelas, one of the Getae, covered an area near the Black Sea, between northern Thrace and the Danube, today Bulgaria, in the 4th century BC.[175] The kingdom of Rubobostes controlled a region in Transylvania in the 2nd century BC"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aete, 펌글 참조)

그리고 이후 BC 75-72기간동안 로마의 공격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위만조선이 BC 108년에 망한 이후이므로, 한(漢)나라의 공격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후 Dacian Kingdom은 Burebista 왕 (BC 82-44 BC) 시기에 최전성기를 이룬다 한다. 최씨의 낙랑국을 의미하지 않나 한다. 이후 Decebalus (AD 87-106)왕이 마지막 왕이 되고 로마의 정벌로 자살했다고 한다. 이 뒤로도 로마는 Carpi라는 Dacians에 의해 로마가 골치를 앓았다는 것을 보면 Decebalus왕 이야기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고구려에 의해 최리의 낙랑국이 AD 37년 망하므로, Decebalus왕 이야기는 고구려 세력일 수 있거나, 아니면 일부 남아 있는 낙랑군의 존재일 지도 모른다.

 

이후 로마제국과의 마찰은 본 블로그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에서 다루었으므로 참고로 관련 자료만을 부록으로 싣는다. 이상으로 Dacians이 낙랑국지역이 아닌가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즉 결론적으로 말하면, 독립국인 낙랑국이 기원전 4세기부터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기원전 2세기에 존재한 다키안왕국이 최숭의 낙랑국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로마와 대립을 하는 Carpi라는 Dacians이 315년까지 있는 것을 고려하면, 한나라의 낙랑군이 이 지역 일부에 존재하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다. 

 

Dacians은 좌식문화, 초가집, 편두의 관습 등으로 낙랑조선의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늑대 등의 표상에서 에트루리아지역, 소아시아 Phrigians지역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낙랑이란 지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게 펴져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므로 13세 단군 홀달 시절 (BC 1767), 하나라를 치기 위해 동원한 낙랑군은 어디인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하나라와 은나라가 미노이 문명, 미케네 문명과 연관이 있지만, 이들의 지역이 Britain지역까지 넓게 펴져 있어, 현재로서는 그 위치를 가늠하기 힘들다. 

 

23세 아홀단군시기(기원전 1237년)에 청구군, 구려군, 남국군, 몽고리까지 합쳐 은나라를 정벌하고 오지인 회수, 회대지역까지 진출했다 한다. (지난 글 (II)참조). 구려군, 몽골 등의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고구려의 발상지인 요수와 가까운 곳에 은나라가 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그리고 은나라가 망한 후 수양산에 들어간 백이 숙제의 고죽국이 고구려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고죽국은 론강인 요수지역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하나라) 은나라는 보다 좌측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단군이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관중, 기(岐)지역에 관청을 세웠다 했는데, 서주에서 동주로 이동하면서 서주의 예전 기(岐)지역을 진나라에 분봉했다고 한다. 즉 기(岐)지역도 서주가 있던 지역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단군조선에 의해 동원된 낙랑(낙랑골)이 이태리북부로 판단되는데, 단군조선지역과 중국 하나라, 은나라 위치에 대한 추가 연구가 있어야 BC 18C - 13C BC의 낙랑지역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당시의 단군조선의 위치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홀달단군, 아홀단군시기의 자료를 가지고 BC 18C -13C BC 의 낙랑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렵다고 본다. 단지 알프스산맥지역에서 발칸반도까지의 영역 중 하나로 판단된다. 단군조선과 하나라, 은나라 위치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연구가 있은 후일 이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서양사에서 낙랑의 위치로 추정되는 발칸반도도 매우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트라키아 지역에 Odrysian Kingdom이 기원전 5세기부터 존재했는데, 이 지역에서 발견된 Golden Wreath (금관?, 아래 그림)이 10여개 발견 되었는데, 이것의 연대가 기원전 5세기가 아닌 BC 1300년대까지 올라가며, 트로이전쟁때의 시기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Thracians, 펌글 참조)

 

그리고 트라키아 바로 좌측에는 신비의 Dardania Kingdom 이 기원전 4세기에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트라키아 아래에는 마케도니아가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4세기경에 알렉산더가 나타나 페르시아, 인도까지 진출했다 한다. 이러한 마케도니아는 동양사에서 누구를 의미하는지도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왜 마케도니아는 서쪽으로는 진출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혹시 큰 세력이 서쪽에 있어서 동쪽으로만 진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Dacians은 청동기 시초인 BC 3300년경부터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단군조선의 일부지역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그리스 지역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역사도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역사자료는 현재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위에서 살펴 본 Dacian Kingdom의 연구로 만족하고자 한다. 

 

 

발칸반도의 기원전 3세기 지도 (source : Wikipedia)

 

 Thrace in BC 431-424 BC (sourec : Wikipedia)

 

 

A gold wreath and gold ring from the burial of an Odrysian aristocrat, the central figure of the wreath is Nike wearing a peplos on top of a chiton and the ring features a woman accompanied by a horse and rider - National Museum of History, Sofia (source : Wikipedia)

 

"Dacian kingdoms

Further information: Burebista and Decebalus

Dacian kingdom during the reign of Burebista, 82 BC

Dacian polities arose as confederacies that included the Getae, the Daci, the Buri, and the Carpi[dubious – discuss] (cf. Bichir 1976, Shchukin 1989),[154] united only periodically by the leadership of Dacian kings such as Burebista and Decebal. This union was both military-political and ideological-religious[154] on ethnic basis. The following are some of the attested Dacian kingdoms:

The kingdom of Cothelas, one of the Getae, covered an area near the Black Sea, between northern Thrace and the Danube, today Bulgaria, in the 4th century BC.[175] The kingdom of Rubobostes controlled a region in Transylvania in the 2nd century BC.[176] 

Gaius Scribonius Curio (proconsul 75–73 BC) campaigned successfully against the Dardani and the Moesi, becoming the first Roman general to reach the river Danube with his army.[177] His successor, Marcus Licinius Lucullus, brother of the famous Lucius Lucullus, campaigned against the Thracian Bessi tribe and the Moesi, ravaging the whole of Moesia, the region between the Haemus (Balkan) mountain range and the Danube. In 72 BC, his troops occupied the Greek coastal cities of Scythia Minor (the modern Dobrogea region in Romania and Bulgaria), which had sided with Rome's Hellenistic arch-enemy, king Mithridates VI of Pontus, in the Third Mithridatic War.[178] Greek geographer Strabo claimed that the Dacians and Getae had been able to muster a combined army of 200,000 men during Strabo's era, the time of Roman emperor Augustus.[179]

The kingdom of Burebista

The Dacian kingdom reached its maximum extent under king Burebista (ruled 82 – 44 BC). The capital of the kingdom was possibly the city of Argedava, also called Sargedava in some historical writings, situated close to the river Danube. The kingdom of Burebista extended south of the Danube, in what is today Bulgaria, and the Greeks believed their king was the greatest of all Thracians.[180] During his reign, Burebista transferred the Geto-Dacians' capital from Argedava to Sarmizegetusa.[181][182] For at least one and a half centuries, Sarmizegethusa was the Dacian capital, reaching its peak under king Decebalus. Burebista annexed the Greek cities on the Pontus.(55–48 BC).[183] Augustus wanted to avenge the defeat of Gaius Antonius Hybrida at Histria (Sinoe) 32 years before, and to recover the lost standards. These were held in a powerful fortress called Genucla (Isaccea, near modern Tulcea, in the Danube delta region of Romania), controlled by Zyraxes, the local Getan petty king.[184] The man selected for the task was Marcus Licinius Crassus, grandson of Crassus the triumvir, and an experienced general at 33 years of age, who was appointed proconsul of Macedonia in 29 BC.[185]

The kingdom of Decebalus 87 – 106

By the year AD 100, more than 400,000 square kilometres were dominated by the Dacians, who numbered two million.[b] Decebalus was the last king of the Dacians, and despite his fierce resistance against the Romans was defeated, and committed suicide rather than being marched through Rome in a triumph as a captured enemy leader.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aete, 펌글 참조)

 

 

 

 

 

 

 

 

-------------  부록 : 로마제국과 Dacians과의 관계  -------------------

 

Conflict with Rome

Main articles: Domitian's Dacian War and Trajan's Dacian Wars

Burebista's Dacian state was powerful enough to threaten Rome, and Caesar contemplated campaigning against the Dacians.[186] Despite this, the formidable Dacian power under Burebista lasted only until his death in 44 BC. The subsequent division of Dacia continued for about a century until the reign of Scorilo. This was a period of only occasional attacks on the Roman Empire's border, with some local significance.[187]

The unifying actions of the last Dacian king Decebalus (ruled 87–106 AD) were seen as dangerous by Rome. Despite the fact that the Dacian army could now gather only some 40,000 soldiers,[187] Decebalus' raids south of the Danube proved unstoppable and costly. In the Romans' eyes, the situation at the border with Dacia was out of control, and Emperor Domitian (ruled 81 to 96 AD) tried desperately to deal with the danger through military action. But the outcome of Rome's disastrous campaigns into Dacia in AD 86 and AD 88 pushed Domitian to settle the situation through diplomacy.[187]

Emperor Trajan (ruled 97–117 AD) opted for a different approach and decided to conquer the Dacian kingdom, partly in order to seize its vast gold mines wealth. The effort required two major wars (the Dacian Wars), one in 101–102 AD and the other in 105–106 AD. Only fragmentary details survive of the Dacian war: a single sentence of Trajan's own Dacica; little more of the Getica written by his doctor, T. Statilius Critonothing whatsoever of the poem proposed by Caninius Rufus (if it was ever written), Dio Chrysostom's Getica or Appian's Dacica. Nonetheless, a reasonable account can be pieced together.[188]

In the first war, Trajan invaded Dacia by crossing the river Danube with a boat-bridge and inflicted a crushing defeat on the Dacians at the Second Battle of Tapae in 101 AD. The Dacian king Decebalus was forced to sue for peace. Trajan and Decebalus then concluded a peace treaty which was highly favourable to the Romans. The peace agreement required the Dacians to cede some territory to the Romans and to demolish their fortifications. Decebalus' foreign policy was also restricted, as he was prohibited from entering into alliances with other tribes.

However, both Trajan and Decebalus considered this only a temporary truce and readied themselves for renewed war. Trajan had Greek engineer Apollodorus of Damascus construct a stone bridge over the Danube river, while Decebalus secretly plotted alliances against the Romans(citation needed). In 105, Trajan crossed the Danube river and besieged Decebalus' capital, Sarmizegetusa, but the siege failed because of Decebalus' allied tribes. However, Trajan was an optimist. He returned with a newly constituted army and took Sarmizegetusa by treachery. Decebalus fled into the mountains, but was cornered by pursuing Roman cavalry. Decebalus committed suicide rather than being captured by the Romans and be paraded as a slave, then be killed. The Roman captain took his head and right hand to Trajan, who had them displayed in the ForumsTrajan's Column in Rome was constructed to celebrate the conquest of Dacia.

Death of Decebalus (Trajan's Column, Scene CXLV)

The Roman people hailed Trajan's triumph in Dacia with the longest and most expensive celebration in their history, financed by a part of the gold taken from the Dacians.[189] For his triumph, Trajan gave a 123-day festival (ludi) of celebration, in which approximately 11,000 animals were slaughtered and 11,000 gladiators fought in combats. This surpassed Emperor Titus's celebration in AD 70, when a 100-day festival included 3,000 gladiators and 5,000 to 9,000 wild animals.[190][191]

 

Roman rule

Main article: Roman Dacia

See also: Danubian provinces

Only about half part of Dacia then became a Roman province,[192] with a newly built capital at Ulpia Traiana Sarmizegetusa, 40 km away from the site of Old Sarmisegetuza Regia, which was razed to the ground. The name of the Dacians' homeland, Dacia, became the name of a Roman province, and the name Dacians was used to designate the people in the region.[193] Roman Dacia, also Dacia Traiana or Dacia Felix, was a province of the Roman Empire from 106 to 271 or 275 AD.[194][195][196] Its territory consisted of eastern and southeastern Transylvania, and the regions of Banat and Oltenia (located in modern Romania).[194] Dacia was organised from the beginning as an imperial province, and remained so throughout the Roman occupation.[197] It was one of the empire's Latin provinces; official epigraphs attest that the language of administration was Latin.[198] Historian estimates of the population of Roman Dacia range from 650,000 to 1,200,000.[199]

Roman DaciaMoesia InferiorMoesia Superior and other Roman provinces

Dacians that remained outside the Roman Empire after the Dacian wars of AD 101–106 had been named Dakoi prosoroi (Latin Daci limitanei), "neighbouring Dacians".[23] Modern historians use the generic name "Free Dacians" or Independent Dacians.[200][201][124] The tribes Daci Magni (Great Dacians), Costoboci (generally considered a Dacian subtribe), and Carpi remained outside the Roman empire, in what the Romans called Dacia Libera (Free Dacia).[193] By the early third century the "Free Dacians" were a significantly troublesome group, by now identified as the Carpi.[200] Bichir argues that the Carpi were the most powerful of the Dacian tribes who had become the principal enemy of the Romans in the region.[202] In 214 AD, Caracalla campaigned against the Free Dacians.[203] There were also campaigns against the Dacians recorded in 236 AD.[204]

Roman Dacia was evacuated by the Romans under emperor Aurelian (ruled 271–5 AD). Aurelian made this decision on account of counter-pressures on the Empire there caused by the CarpiVisigothsSarmatians, and Vandals; the lines of defence needed to be shortened, and Dacia was deemed not defensible given the demands on available resources. Roman power in Thracia rested mainly with the legions stationed in Moesia. The rural nature of Thracia's populations, and the distance from Roman authority, encouraged the presence of local troops to support Moesia's legions. Over the next few centuries, the province was periodically and increasingly attacked by migrating Germanic tribes. The reign of Justinian saw the construction of over 100 legionary fortresses to supplement the defence. Thracians in Moesia and Dacia were Romanized, while those within the Byzantine empire were their Hellenized descendants that had mingled with the Greeks.

 

After the Aurelian Retreat

See also: Free DaciansCarpi (people)Costoboci, and Origin of the Romanians

Dacian on the Constantine Arch

Roman Dacia was never a uniformly or fully Romanized area. Post-Aurelianic Dacia fell into three divisions: the area along the river, usually under some type of Roman administration even if in a highly localized form; the zone beyond this area, from which Roman military personnel had withdrawn, leaving a sizable population behind that was generally Romanized; and finally what is now the northern parts of Moldavia, Crisana, and Maramures, which were never occupied by the Romans. These last areas were always peripheral to the Roman province, not militarily occupied but nonetheless influenced by Rome as part of the Roman economic sphere. Here lived the free, unoccupied Carpi, often called "Free Dacians".[168]

The Aurelian retreat was a purely military decision to withdraw the Roman troops to defend the Danube. The inhabitants of the old province of Dacia displayed no awareness of impending dissolution. There were no sudden flights or dismantling of property.[169] It is not possible to discern how many civilians followed the army out of Dacia; it is clear that there was no mass emigration, since there is evidence of continuity of settlement in Dacian villages and farms; the evacuation may not at first have been intended to be a permanent measure.[169] The Romans left the province, but they didn't consider that they lost it.[169] Dobrogea was not abandoned at all, but continued as part of the Roman Empire for over 350 years.[205] As late as AD 300, the tetrarchic emperors had resettled tens of thousands of Dacian Carpi inside the empire, dispersing them in communities the length of the Danube, from Austria to the Black Sea.[206] 

(source : Dacian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Dacian/Gaete, 펌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