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년 삼국사기 백제의 평양성 공격과 고구리사 초략의 한성공격 (revised)

2021. 10. 19. 04:37한민족 역사/고구려


성현식님이 스카이데일리에 쓴 "고구려·백제 치열한 전투지 치양(雉壤)은 ‘하남성 서부’, 백제의 도성 한성(漢城) 서산(西山)에서 백제군 화살에 맞아 전사" 2015년 5월 31일 기사에서 삼국사기의 371년 평양성공격이 고구리사 초략에서는 한성공격으로 기록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평양성과 한성의 위치 추정에 고심하고 있던 필자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어 펜을 들었다. 동 기사에서는 352년 관미령 전투에서부터 언급하고 이어서 치양성 전투도 언급하고 있어, 평양성내지 한성의 전투를 분석하기 앞서 이들 지역의 전투도 같이 보고자 한다.

 


 

1. 352-369년 관미령 전투 및 이후

 

 

1) 삼국사기 기록 (352-369)

 

 

고구려 고국원왕:

350-354 : 5년 공백

二十五年春一月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다 (355)
二十五年冬十二月 전연이 왕모 주씨를 돌려보내다 (355)

356-368 : 13년 공백

 

 

백제 근초고왕:

348-365 : 18년 공백

二十一年 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366)

367년 : 공백
二十三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368)
二十三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368)

 

 

 

2) 고구리사 초략 고국원왕 기록 (352-369) :

 


"고국원제는 352년에 있었던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과의 첫 관미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17년간 벌어진 4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백제에서 또 다른 영웅인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 태자가 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 고구리는 백제에게 급격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자료 :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고구려·백제 치열한 전투지 치양(雉壤)은 ‘하남성 서부’, 백제의 도성 한성(漢城) 서산(西山)에서 백제군 화살에 맞아 전사" 2015년 5월 31일 기사)

 

 

관미령 전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고구리사 초략에 첫 관미령 전투이후 17년간 4번의 전투에서 근초고왕에게 승리했다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모두  특히 이 기간 공백 (고구려:18년, 백제: 18년)으로 되어 있다. 백제의 패배 내용을 동류의식을 가진 일제가 모두 없앤 것이 아닌가 한다. 관미령 전투는 관미성 전투와도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그 위치 추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자료가 없어 매우 유감이다. 관미성 전투도 광개토태왕릉 비문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고구리사 초략에도 자세한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어떤 자료를 참고하여 고구리사 초략을 썼는지 궁금하지만 매우 아쉽다. 삼국사기의 빈 공백을 메꾸어 주는 기록이기를 기대했는데...

 

 

 

2. 치양성 전투 (369)

 

1) 삼국사기 기록 (369)

 

 

백제 근초고왕 :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69)
二十四年冬十一月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369)

 

370년 : 공백

 

 

고구려 고국원왕:

三十九年秋九月 치양에서 백제와 싸워 패하다 (369)

四十年 전연이 망하다 (370)

 

 

 

2) 고구리사 초략 고국원왕 기록 (369) : 

 

 

"369년 기사 정월에 백제는 고구리에게 빼앗겼던 이진성(伊珍城)을 5년 만에 수복했다. 이 때 고구리 군사들이 많이 죽고 상했다. 최체(最彘) 태수 우눌이 상장(上將)으로서 선극을 포용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패하고 만 것이었다. 이에 고국원제가 크게 노해 우눌을 불러들이고 람풍으로 상장을 대신하게 했다.

 

백제는 승승장구하면서 병사의 수를 늘려 곧 수곡(水谷)성을 탈취할 참이었다. 백제의 장수 막고해는 용병도 잘하고 사졸들의 신임도 얻고 있었는데, 고구리 군은 힘씀에 틈이 있고 싸울 뜻도 없었기에 패배가 예견되었다. 5월에 분기탱천한 백제군이 진격해 수곡성을 깨뜨림에 근구수 태자가 선봉이 되어 진영을 이끄니 병사들 모두 “태자께서 항시 이러하시거늘 우리들은 어찌해야 하겠는가!”라며 죽기로 싸우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은 고국원제가 직접 친정하기를 결심하니 태보가 극력 말려도 듣지 않았다. 친위군 2만을 추가로 징발해 남쪽으로 내려가 대암산을 거점으로 삼고 치양(雉壤)으로 나아가, 진영을 치고 북한산을 포위하니 백제는 대적하지 못하고 성을 비우고 물러갔다. 이에 고구리군은 승승장구하며 멀리 있는 이진천(伊珍川)에 이르렀다.

 

그러나 날씨가 무더워 산에 뱀·호랑이·범들이 많았으며 양군 모두에게 역병이 돌았기에 할 수 없이 산 밑에 진을 치고는 민가를 약탈하며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 고구리가 약탈했다는 문구로 미루어 보아 치양과 이진성 일대는 원래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월, 백제가 해로(海路)로 군사를 보충하고는 치양을 습격했다. 이때 고구리군은 크게 피로해 죽는 자들이 끊이지 않는데다가 호랑이 피해도 많았다. 이에 상은 날래고 건장한 자들을 뽑아 호랑이를 산으로 쫒아냈다. 백제군은 고구리군이 지쳐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새로 온 정예군으로 갑자기 치니 고구리 군이 크게 무너졌다. 상은 단기로 무산(撫山)으로 피해 들어갔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날씨가 갑자기 겨울같이 추워졌고 많은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상은 좌우를 돌아보며 “짐이 태보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렇게 패하게 되었소”라고 말하고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돌리라고 명했다. 10월, 낙랑공 주영이 치양에서 종군했다가 병이 들어 죽으니, 상은 그의 충성에 감사하며 후하게 묻어주었고 아직 젊은 그의 처는 점선(秥蝉)태수에게 개가토록 했다.

 

점선(黏蝉)은 <한서지리지>에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우리에게는 일명 ‘점제현 신사비’로 널리 알려져 있는 지명이다. 1913년 9월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때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에서 ‘秥蟬’이라는 비문이 있는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일제식민사학은 이를 근거로 낙랑군 점선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비정했다. 물론 반도사관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비석을 몰래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위와 같이 상세하게 기록된 <고구리사초략>의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는 “고국원왕 39년(369) 가을 9월, 왕이 군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했으나 치양 전투에서 패배했다”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국본기>에는 “근초고왕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가 보·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우리 민가를 침범하고 약탈했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급히 쳐부수고 5천여 명의 목을 얻었으며, 노획한 물건들을 장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했는데, 깃발들은 모두 황색을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료 :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고구려·백제 치열한 전투지 치양(雉壤)은 ‘하남성 서부’, 백제의 도성 한성(漢城) 서산(西山)에서 백제군 화살에 맞아 전사" 2015년 5월 31일 기사)

 

 

 

상기 고구리사 초략기록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1) 대암산, 북한산 등이 주위에 있다.

 

치양(雉壤)은 치악(雉岳)으로 불린다고 하며, 치악산과도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참조). 즉 주위에 산악지형이라는 것이 치양성이란 치양산성 훅은 치악산성이 될 수 있다. 치는 꿩치이다. 양은 부드러운 흙양이다. 따라서 주위에 산이 있고, 강의 범람으로 부드러운 흙이 있을 수 있다. 즉 강과 산악이 병존하는 지역이라는 추정이다. 특히 북한산이 주위에 있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즉 한산 북쪽 주위에 치양이 있다는 것이다.

 

(2) 산에 뱀, 호랑이 등이 많았으며, 특히 호랑이가 피해를 주었다.

 

산에 뱀, 호랑이 등이 많았다 한다. 뱀이야 산에 많겠지만, 호랑이가 많다는 것은 낮은 민둥산 등이 아니라 주위가 매우 높은 산악지역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군사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이면 더욱 그렇다. 삼국사기 기록에 평양성에 호랑이가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호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삼국사기에 평양성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은유적 표현으로 생각해서 반란이나 침입자가 있는 것을 표현한 줄 알았는데, 이 고구리사 초략을 보면 사실 그대로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즉 평양성이나 가까운 치양등은 호랑이가 나오는 높은 산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3) 주위에 낙랑이 가깝다.

 

낙랑공 주영의 치양 종군이 언급된 것을 보면, 낙랑군이 있던 지역이 근처라는 것이다. 필자는 낙랑군이 평양이 있던 곳이라는 기록을 기억한다. 즉 치양과 평양이 가깝다는 말이다.

 

 

(4) 낙랑공 주영의 처 점선태수에게 개가 함. 점선은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현

 

즉 낙랑군 지역이 고구려의 지역으로 있었음을 말해 준다. 유주의 일부만 고구려 지역인지 유주가 전 지역이 고구려 지역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유주는 요서지역도 포함하였었다.

 

(5) 백제의 근초고왕이 해로로 치양전투에 군사를 보충했다고 한다. 

 

즉 치양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치양의 위치 추정에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또한 평양도 근처에 있으므로 평양성 위치 추정에도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러한 기록은 성현식님이 추정한 중공 산서성 위치 추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공의 이 근처는 바다에서 멀리 있기 때문이다. 강을 바다로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견강부회이다. 그렇다면 황하도 바다로 말했어야 한다. 조그만 강을 바다로 한다면 큰 강은 더욱 바다로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잘못된 위치 추정을 합리화 하기 위해 중공지역에 위치 추정을 하는 재야사학자들의 공통된 잘못이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한 평양성 지역 (스위스 쥬리히)은 이태리반도 북쪽에 있으므로, 바다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위치이다.

  

(6) 수곡성과 치양이 가깝다.


이 또한 면밀히 검토해야 할 사항이다. 수곡성이 험한 산사이에 있는 강에 있다는 논리이다. 

 

 

(7) 북한산, 한수가 가까이 있다.


치양성싸움 이후 3개월만에 근초고왕이 한수에서 군사를 사열했다. 북한산이 치양에 가까이 언급되고, 이어서 한수가 언급된다. 즉 한산과 한수가 동일한 지역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평양성과도 멀지 않다는 것이 된다.

 

 

 

 

3. 평양성 전투 (371)

 

1) 삼국사기의 기록 (371) ​

 

 

백제 근초고왕 시기:

二十六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371)
二十六年冬十月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다. (371)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371)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 :

 

四十一年冬十月二十三日 고국원왕이 죽다 (371)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는 “근초고왕 26년(371),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해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강 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패배했다.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해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2) 고구리사 초략  고국원왕의 기록 (371):

 

"고국원제는 41년(371) 신미 정월에 연나라를 쳐서 지난날의 수모를 설욕하고자 우신을 정서(征西)대장군으로 삼고 10만 병력을 이끌게 했고, 주요 태수들의 인사를 단행했다.

 

10월, 백제는 고구리가 군사를 움직여 서쪽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허를 찔러 공격해왔다.

 

낙랑 또한 대거 쳐들어와서 양주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백제의 근구수 태자가 북한성을 공격해오자 고구리가 한수(漢水)에 복병을 깔았다가 이를 크게 깰 무렵, 근초고왕이 손수 3만 정병을 이끌고 와서 태자를 도우니 백제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고구리 군대는 서쪽을 정벌하기 위해 요동에 집결되어 있느라, 낙랑 및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 태자의 공격을 나머지 군사로 나누어 막아야 했기에 병력이 딸렸다.

 

이에 상이 직접 친위군을 이끌고 달려가 선봉에 서서 장수와 병사들을 독려하니 모두가 잘 따랐다.

 

한성(漢城)의 서산(西山)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상이 흐르는 화살 두 개를 맞았다. 하나는 어깨에 다른 하나는 가슴에 맞았다. 힘껏 화살을 뽑아내고 다시금 출진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극력 말렸다.

 


해명은 고국원제의 상처가 심각할 정도로 위중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를 숨기고는, 군사를 불러들여 진지를 굳게 지키게 했으며 선극과 람풍을 시켜 힘껏 싸우도록 했다. 해명이 옥체를 철저히 호위하던 중 상은 극심한 고통 끝에 붕어하고 만다. 죽음을 앞두고는 입에서 해후와 태자비 천강을 부름이 끊이지를 않았다고 한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외부로는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고 말을 몰아 왕천(王川)으로 가서 급히 국부 해현에게 알리니, 해현과 해후가 상을 도성으로 모시고 들어가 발상했다. 동궁 구부(丘夫)가 천룡궁에서 즉위했다. 해후를 태후로, 국부 해현을 조왕(祖王)으로, 이련(고국양제)을 태제로 하였다. 새 황상(소수림제)이 원수를 갚고자 친히 백제를 정벌하려 했으나, 조왕과 태후가 서쪽의 일이 더 중요하다며 말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고구리사초략>에는 고국원제가 백제의 도성이었던 한성의 서산에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고구리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중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확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전체적인 스토리의 흐름으로 볼 때 백제의 한성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자료 : 성현식, 스카이데일리, "고구려·백제 치열한 전투지 치양(雉壤)은 ‘하남성 서부’, 백제의 도성 한성(漢城) 서산(西山)에서 백제군 화살에 맞아 전사" 2015년 5월 31일 기사)

 

 

상기 고구리사 초략 내용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1) 371년 연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태수들을 새로 임명하고 10만의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거대 병력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특히 왕이 부상을 당한 후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소수림왕 시기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즉 10만 병력의 이야기는 패배의 원인을 돌리기 위한 핑계로 만든 이야기일 수 있다고 본다.

 

(2) 10월 백제는 고구려가 서쪽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허를 찔러 공격해 왔다.

 

(3) 낙랑 또한 대거 쳐들어와서 양주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치양싸움에서는 낙랑공이 고구려 편에 서서 싸우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낙랑이 대거 쳐들어 왔다 한다. 태수를 새로 임명해서 그런지 상황 설명이 필요한데, 그런 서술은 없어 더욱 신뢰하기에 그렇다.


(4) 백제의 근구수 태자가 북한성을 공격해오자 고구리가 한수(漢水)에 복병을 깔았다가 이를 크게 깰 무렵, 근초고왕이 손수 3만 정병을 이끌고 와서 태자를 도왔다.

 

북한성과 한수가 백제의 영역이 아니라 고구려의 영역인 것처럼 서술된다. 이는 삼국사기 근초고왕 시기에 치양성 전투 승리후 3개월만에 한수에서 군사를 사열했다는 기록과 배치된다.

 

(5) 고구리 군대는 서쪽을 정벌하기 위해 요동에 집결되어 있느라, 낙랑 및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 태자의 공격을 나머지 군사로 나누어 막아야 했기에 병력이 딸렸다.

 

요동에 집결한 고구려군의 동태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6) 이에 고국원제가 직접 친위군을 이끌고 달려가 선봉에 서서 장수와 병사들을 독려하니 모두가 잘 따랐다. 한성(漢城)의 서산(西山)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상이 흐르는 화살 두 개를 맞았다.

 

 

한성의 서산에서 큰 싸움이 벌어진 후에, 왕이 다친 후에도 요동에 집결한 병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한 이후 소수림왕 시기의 고구리사 초략에도 별다른 내용이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구리사 초략의 내용도 다소 신뢰성이 떨어진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그러나 이 전투 직후, 승리한 근초고왕이 한산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비록 구체적인 월수가 없지만)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을 보면, 평양성 공격을 했지만 평양성을 함락 시키지는 못하고 물러 나고, 북한성 내지 한산을 확보한 결과일 수 있다. 즉 고구리사 초략의 한성의 서산에서의 싸움이란 기록도 진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산을 수도로 옮긴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고구리사 초략 자료를 고려하면 백제가 한산을 회복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온조왕 이후 한산의 수도를 이후 언젠가 고구려에게 빼앗겼는지 기록을 보지 못했다. 일제의 장난으로 삼국사기에서 삭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4. 2차 평양성 전투 (377)

 

<삼국사기 기록  (377)>

 

백제 근구수왕 시기의 평양성 공격 (377) :

三年冬十月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의 기록 (377) :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1차 평양성 공격 (371) 기록과 달리, 2차 평양성 공격 (377)은 고구려, 백제 양국의 삼국사기 기록에 같이 나와 있다. 즉 평양성 공격이라는 것에 대해, 1차 공격은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2차 공격은 확실히 평양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 2차 평양성 공격에 대한 소수림대제에 대한 고구리사 초략 자료를 보면 (다른 티스토리 블로그 자료 참조), 삼국사기 내용과 별다른 내용은 없다. 즉 10월에 백제의 평양성 공격이 있었는데, 11월에 백제를 정벌했다는 간단한 기록뿐이다.

 

1차 평양성 공격을 삼국사기 백제 자료에서는 언급되는데, 고구려사 삼국사기 자료에 없는 것을 보면,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다.  한성 공격을 평양성 공격으로 바꿔치기하는 일제의 장난일 수도 있다고 본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 평양성과 북한성이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근초고왕시절 북한성이 평양성이거나 근처의 성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고구리사 초략과 삼국사기가 다른 기록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필자가 추정한 평양성 위치는 스위스 쥬리히로 이태리 북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성과 멀지 않다. 즉 (북)한성이 이태리 북부지역에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필자가 추정하는 평양성지역인 스위스 쥬리히 지역에 호랑이가 있었나 하는 문제가 남는다. 알프스산맥에는 Brown Bear​는 있는 것으로 기록되나 Tiger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알프스산맥의 고봉중의 하나인 스위스  Rhone Valley에 있는 암석으로 된 산 'Matterhorn' (4478m)을 '알프스의 Tiger'라고 부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암산'일 수도 있는 이 산을 알프스의 Tiger라 부르는 것은 호랑이가 과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대암산일 수도 있는, Alps Tiger라 불리는, 스위스의 Golden Matterhorn mountain (4478m)  (source : Wikipedia)

 

만약 알프스산맥에 호랑이가 있었다면, 위에서 언급한 치양과 평양성이 알프스산맥에 있다는 필자의 추정이 매우 힘을 받는다. 또한 태백산에 단군이 내려왔다는 삼위 태백의 단군신화가 이 지역일 수 있다는 추정이 더욱 힘을 얻는다.  발해고 자료에 의하면, 백두산이 장백산이고 태백산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백두산 즉 태백산이 알프스산맥에 있고, 알프스 산맥에 곰과 호랑이가 있다면 단군신화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평양성이며 동시에 단군조선의 왕험성 (왕검성)이 스위스 쥬리히라 추정한 것이다. 즉 단군신화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왕검성의 위치도 되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한성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북한산, 북한성 등이 이태리 북부에, 스위스 쥬리히로 추정되는 평양성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는 한성의 추정 글에서 507년 고구려 문자왕의 한성 공격과 로마사 자료의 Clermont-Ferrand 자료를 바탕으로 클레르몽 페랑, 여기가 혹시 한성이 아닌가 하였다.  그런데 위의 고구리사 초략 자료에서, 고국원왕은 전연에 대한 복수를 위해 서쪽으로 10만대군을 요동에서 출병 시킨 가운데 (비록 이 자료도 신뢰성에 의심이 가지만), 백제가 이틈을 타서 평양성을 공격했다고 했다. 그래서 고구려 군대가 나뉘어져 고국원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대응하다가 유시에 맞아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한성의 서산에서 화살에 맞았다 한다. 즉 평양성과 한성이 가깝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이 지역은 요동 우측에 있다는 것이 된다. 낙랑공의 전투 참여도 이를 말해 준다. 태자인 소수림왕이 복수전쟁을 바로 하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서쪽의 싸움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말렸다 한다. (비록 이 자료도 신뢰성에 의심이 가지만).  즉 한성과 평양성은 요동 동쪽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고구려 문자왕 시기 507년 한성 공격의 한성은 Clermont-Ferrand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Clermont-Ferrand은 프랑스 르와르강 이남지역으로 요수인 Rhone river의 한참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비록 공백투성이와 삼국사기 자료와 약간 의문점을 주는 고구리사 초략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바이지만, 371년 평양성 공격과 한성에서의 전투는 모두 맞는 것으로 판단되며, 백제는 과거 잃어 버린 한산을 회복하여 다시 수도로 삼은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그리고 평양성과 한성, 한산, 한수는 서로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필자는 평양성을 스위스 쥬리히로 추정하였으므로, 한성의 추정에 한발 더 가까이 갔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