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위 지역에는 AD 632년부터 불가리아가 나타난다. Old Grea Bulgaria, Kara Bulgar, Volga Bulgaria 등이 그것이다. 서양사에서는 Huns, 즉 훈족과 Bulgars, 즉 부여족을 아시아에서 온 부족으로 판단한다. 필자는 Bulgar 부족을 부여족으로 판단한다. 부여족은 가는 곳마다 부류 등 '불'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볼가강 이름도 Bulgars라는 부여족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리고 Vulga latin이란 언어를 쓰는 로마제국도 결국 부여족의 일부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가- 이름이 붙는 지역은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부여족은 백제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고구려보다 더 부여의 전통을 더 계승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통일 신라에 많이 흡수된 상태이다. 그리고 발해도 고구려의 유민들이 말갈족과 더불어 구성한 나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통일 신라 시기 발해와 신라는 남북으로 접해 있었으며, 발해는 고구려의 지역을 더 많이 포함한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 신라가 쇠퇴한 시기,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생겨 나고, 결국 신라와 함께 모두 고려로 통일 된다. 비록 일부 발해는 요나라에 점령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도 발해 멸망 후에는 발해 유민이 고려로 많이 이주한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장황하게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사실을 되뇌이는 것은 이들의 지역이 계속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영역을 좀더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글 '후백제의 견훤이 불가리아 1제국 Simeon왕인가?' 라는 글을 쓰면서 흑해위 지역에 Magyar족, Pechenegs족, Khazar족 등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필자는 이들이 고구려, 발해, 말갈 등과 연관이 있는 부족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Old Great Bulgaria에 대해 알게 되었다. 흑해 위 지역에 잠시 동안 존재했던 나라로 서양사에서 기록된다. 그런데 36년이란 짧은 기간 존재한 나라를 Great Bulgaria라고 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다른 내막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깊게 살펴 보니, 고구려의 말기 역사의 일부로 나타난다. 그래서 펜을 들어 글을 쓰게 되었다.
Old Great Bulgaria (632- 668)
Old Grear Bulgaria는 우선 그 짧은 존속기간에 놀랐다. 632-668년 기간동안 36년 존재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전후 역사 기록은 일천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슨 이런 기록이 있나 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나 그 자세한 내용을 파악한 후에는 이해하게 되었다. 즉 이 기록은 전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기록을 한 나라로 기록한 것이다. 필자가 자세히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Old Great Bulgaria는 고구려 말기의 일부지역에 해당하는 흑해 위지역의 역사로 판단된다.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Map of Old Great Bulgaria (632-668) (source : Wikipedia)
"Establishment
Between 630 and 635, Khan Kubrat managed to unite the Onogur Bulgars with the tribes of the Kutrigurs and Utigurs under a single rule, creating a powerful confederation which was referred to by the medieval authors in Western Europe as Old Great Bulgaria,[15] or Patria Onoguria. According to some scholars, it is more correctly called the Onogundur-Bulgar Empire.[16]
Some scholars[who?] assume that it stretched as far west as the Pannonian Plain and included among its subjects some of the Pannonian Avars. It is presumed that Kubrat's capital was the ancient city of Phanagoria on the Taman Peninsula. Kubrat's grave was discovered in 1912 at Pereshchepina, Ukraine.[17]
(자료 : Old Great Bulgaria,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Bulgars 참조)
1) Khan Kubrat 재위기간 (632-665) 은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유사하다.
위키피디어 자료에 의하면, Khan Kubrat를 King of Onogundur Huns, Chief of the Huns 라 한다. (아래 자료 참조) 즉 훈족이라는 것은 고구려의 연개소문 (막리지, 총리)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Khan Kubrat가 Onogurs의 dynastic wars 와중에서 Khan 을 승계했다는 아래 기록이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Bulgars were Turkic nomadic people,[3] who participated in the 5th-century Hunnic confederation. Upon Attila's death, the tribes that later formed the Bulgars had retreated east into the Black Sea-Caspian Steppe. The western Bulgar tribes joined the Avar Khaganate, while the eastern Bulgars came under the Western Turkic Khaganate by the end of the 6th century.[4]
Theophanes the Confessor called him "king of the Onogundur Huns".[5] Patriarch Nikephoros I (758–828) called Kubrat "lord of the Onuğundur"[6] and "ruler of the Onuğundur–Bulğars".[7] John of Nikiu (fl. 696) called him "chief of the Huns".[6] D. Hupchick identified Kubrat as "Onogur",[4] P. Golden as "Oğuro-Bulğar",[6] H. J. Kim as "Bulgar Hunnic/Hunnic Bulgar".[8] According to H. J. Kim the Onogundur/Onogur were evidently part of the Bulgar confederation.[9]
(자료 : Kubrat, Wikipedia, 인용출처 : 본블로그, 카테고리, Bulgar)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아버지로부터 막리지 (총리) 지위를 이어 받아 재직하던 중, 자신을 제거하려는 영류왕과 귀족세력들을 642년 척결하고 보장왕을 세운다. (아래 자료 참조) 그리고 연개소문은 665년 죽는다. 즉 Khan Kubrat와 거의 일치하는 기간동안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대대로로 있었다. 위에서 Kubrat는 Onogurs내의 Dynatic wars (왕건다툼) 와중에 왕 (또는 Chief)이 되었다 했는데, 연개소문의 쿠테타도 보장왕의 왕권 욕심에 의해 실행되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이후에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동부 대인 대대로(大對盧) 연태조가 사망하자[22] 연개소문이 그 뒤를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연개소문을 성격이 포악하다면서 미워하였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직위를 계승함에 반대하였다. 때문에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할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이는 그만큼 평소에 연개소문의 반대파들이 많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연개소문의 가문은 할아버지인 연자유 때부터 3대에 걸쳐 동부의 군사를 장악하고 고구려 최고위직을 연임하고 있는 막강한 신흥 세력이었기에, 기존의 권력층이었던 구세대 귀족 세력들과 왕실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벼슬길이 끊길 위기에 처한 연개소문은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며 만약 자신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한 후에도 포악한 짓을 한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동부 대인의 직위에서 폐하여도 좋다고 간청하였다. 연개소문을 미워하던 사람들조차도 마음을 바꿔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 대인의 직위를 계승한 연개소문은 이후 642년 1월에 영류왕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받고 고구려의 북쪽 국경 지대로 파견되었다. 이는 6세기 이래의 고구려의 귀족연립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연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642년 10월, 왕과 대신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과감하게도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살해할 계획을 꾸몄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26]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모아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 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서열식 중에 연개소문이 관할하는 동부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 살해당한 대신들은 무려 100여 명에 이르었다고 한다.....
고구려-당 전쟁 중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을 수차례 격퇴했으나 당나라가 주요 방어선을 우회해서 수도 인근을 타격하는 전략을 구사함에 따라 상황은 심각해졌다. 더구나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후방도 매우 위험해졌다.
이러한 시기에 연개소문은 건봉 원년(666년)에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였다. 이는 구당서와 신당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642년 겨울에 난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를 제거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지 24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한편 천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665년에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태대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연개소문이 이미 665년에 죽었거나 혹은 그때에 큰 병이 들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미리 연남생에게 직위를 넘겨주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
(자료 : 연개소문,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2) Kubrat의 5 아들들의 분열과 멸망 ;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들 일화와 유사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Kubrat의 아들들 사이에 분열이 있어 668년 멸망했다고 기록된다. 즉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정권다툼으로 분열되어 고구려가 망하게 되는 계기가 된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둘째 아들(Kotrag)은 볼가 지역으로 가서 볼가 불가리아를 세우고, 셋째 (Asparukh), 넷째 (Kuber) 아들은 발칸반도로 가서 불가리아 제국의 초석이 되고, 다섯째 아들(Alcek, Alzek)은 이태리로 갔다고 했다. 볼가 불가리아는 발해 지역이고, 발칸반도와 이태리지역은 비잔틴제국의 영역 즉 통일신라의 지역이다. 볼가 불가리아는 Khazars의 압박에 의해 망했다는 추상적인 기록인데, 후에 발해의 일부가 되는 Khazars가 이 지역을 흡수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Khan Kubrat
Main article: Kubrat
According to the Nominalia of the Bulgarian khans, Kubrat was from the royal clan Dulo and a rightful heir to the Bulgar throne.[18] Hermann Zotenberg (1883), while translating John of Nikiu's Chronicles from Old Ethiopian, intentionally replaced the name Qetrades to Kubrat. Since then, the historiography holds a misconception that Kubrat was raised and baptized by the Byzantine court, while John's character Qetrades has no real-life connection to the ruler of the Great Bulgaria Kubrat.[2][18]
Kubrat quickly managed to overthrow Avar domination, extending Onogur influence among the Bulgars in Pannonia in what became known as Hungary. Ultimately, although there is no evidence that the Utigurs were independent of the Onogurs until after Kubrat's empire disintegrated, it is believed he seceded from the Onogurs when they became entangled in dynastic wars. After Kubrat's burial in Mala Pereshchepina, the Khazars, who had triumphed in the collapse of Onoguria, subjugated Kubrat's eldest son and heir Batbayan, forcing his other sons to flee north up the Volga (2nd son Kotrag) and west into the Balkans (4th son Kuber and 3rd son Asparukh) and Italy (5th son Alcek, Alzek)[19]
(자료 : Old Great Bulgaria,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Bulgars 참조)
"한편 일본서기 천지천황 3년 10월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664년에 죽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며 죽었는데 죽으면서도 아들들이 서로 분쟁하여 나라를 분열시킬까봐 두려웠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 달에 고려(高麗)의 대신 개금(蓋金, 개소문의 다른 이름)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漁水)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27 천지천황 3년 10월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맏아들이었던 연남생이 막리지의 직위를 계승하였으며, 남생의 두 아우였던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을 도와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주위의 여러 사람들은 이들 삼형제들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이간질하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결국 맏아들 연남생의 마음이 흔들려 남건과 남산에게 첩자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남생을 의심하여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미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연남생을 더욱 의심하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급기야 남생의 아들인 연헌충을 살해하였고, 이후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무리들과 거란, 말갈병 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는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자료 : 연개소문,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두 자료를 비교하면 고구려 자료는 세아들과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등장하고, Kubrat는 다섯아들을 두었다는 차이가 있다.
연개소문의 첫째 아들 연남생은 거란, 말갈병들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고,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길잡이 노릇을 했다고 한다. 당시의 당나라를 필자는 압록강인 프랑스의 론강의 서쪽에 있는 프랑크왕국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태리로 갔다는 다섯째 아들(Alcek)의 행선지와 비슷하다. 그러나 당시 이태리는 롬바르드왕국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므로 진흥왕시기부터 점령한 신라지역일 수도 있다. 아래 지도의 이태리반도의 비잔틴영역은 당연히 백제가 망한 후이므로 신라가 점령했을 것이다.
Lombardi (Grey color) in 652 (source : Wikipedia)
Frankish Kingdom in 628 (source : Wikipedia)
그리고 발칸반도로 갔다(후에 불가리아제국이 됨)는 4째아들 Kuber, 3째 아들 Asparukh는 당시 발칸반도의 백제를 통합(660)한 신라의 지역이다. 이는 연정토가 12개성(아마도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에 있는)을 가지고 신라로 투항했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세번째 북쪽 볼가강 지역으로 가서 볼가 불가리아를 세운 두번째 아들 Kotrag는 당시 고구려내의 북쪽 지역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Onogurs의 영토는 이들 지역을 포함한 것으로 아래 자료를 보면 추정할 수 있다. 즉 Jordanes자료를 참고하면 Onogurs가 Finno-Ugrian 사람들과 접촉하는 북쪽지역의 숲 가까이 살았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6-7세기에 아바르, 곡튀르크지역이 많이 언급된다고 했다. 즉 이들과 같은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필자는 곡튀르크가 고구려라는 글을 썼다.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그리고 아바르지역은 항가리 지역으로, Hungarian의 어원은 Onogurs에서 왔다 한다. 비교적 북쪽지역인 볼가강지역도 당시 고구려의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급인데, 이후 발해, 고려 등으로 가면서 볼가불가리아, 키예프루스 등 이들 지역이 발해나 고려의 영토가 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The ethnonym Hungarian is derived from Onogurs (> (H)ungars).[5]
The Onoghuric or Oghuric languages are a branch of the Turkic languages.
Jordanes in Getica (551) mentioned that the Hunuguri (believed to be the Onoghurs) were notable for the marten skin trade.[21][22][23] In the Middle Ages, marten skin was used as a substitute for minted money.[24][9] This also indicates they lived near forests and were in contact with Finno-Ugrian peoples.[9][25] .......
The Onoghurs (Oghurs), in the 6th and 7th century sources, were mentioned mostly in connection with the Avar and Göktürk conquest of Western Eurasia.[27] "
(source : Onogurs, Wikipedia, 인용출처 : 본블로그, 카테고리, Bulgars)
3) 668년 Old Great Bulgaria가 망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해이다.
"Disintegration
The events following Kubrat's death are described by the Byzantine Patriarch Nikephoros I.[15] In the times of Emperor Constantine IV, he narrates, Kubrat died and Batbayan, the eldest of his five sons, was left in charge of the state. Under strong Khazar pressure, Kubrat's other sons disregarded their father's advice to stay together in order to resist the enemies and soon departed, taking their own tribes.
Old Great Bulgaria disintegrated under Khazar pressure in 668.[20]
Aftermath
Some Bulgars remained in the former Onoguria, under the domination of the Khazars."
(자료 : Old Great Bulgaria, Wikipedia, 인용출처 : 본 블로그, 카테고리, Bulgars 참조)
"이렇게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하던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버려 그렇지 않아도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고구려는 더 이상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668년에 당고종과 신라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자료 : 연개소문,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Old Great Bulgaria의 수도는 Kuban river 하구인 Phanagoria라고 한다. 그리고 Kubrat Khan의 무덤이 1912년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필자는 스위스의 쥬리히라고 발해고 지리고를 참고하여 추정했다. 이는 요수 즉 압록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평양의 위치가 결정된다. 필자는 여러 지형적 조건, 예를 들어 백두산, 장백산, 그리고 압록빛의 압록강 색갈, 강의 지형 등의 연구를 통해 프랑스의 론강이 압록수라는 것을 증명했다. 따라서 평양 등 고구려의 수도가 흑해위의 어디로 추정될 수 있는 확율은 매우 적을 것으로 판단한다. Phanagoria는 이 지역의 수도역할을 하며, 하나의 고구려 지방도시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Phanagoria는 후고구려시절 궁예의 철원일 가능성도 있다. 이것 또한 계속되는 연구 중 하나의 제목이 될 것이다.
Map showing Fanagoria in Right side (source : Wikipedia)
이상으로 Old Great Bulgaria가 고구려 말기의 역사라는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필자가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우연히 발견하여 기쁘다. 앞으로도 계속 연구함에 따라 우리가 상상못할 정도의 자료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고구려의 역사를 한반도와 그 주위로 한정하려는 일부 사가들과 해외의 시도에 대해 매우 깊은 탄식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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