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고구려

고구려의 수나라에 대한 살수대첩의 살수는 패수인 라인강의 지류 Saar river이다

Chung Park 2022. 9. 5. 02:12

필자는 이미 라인강을 패수라 추정했다. 따라서 살수는 패수의 지류라고 밝혀진 바 라인강의 지류에서 찾아야 한다. 그동안 살수를 찾지 못해 여러 가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 요나라 역사를 찾던 중, 고려와 거란의 전쟁 기록과 신성로마제국과 슬라브족의 전쟁 기록을 보면서 우연히 Saar river 를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결국 살수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의 살수에서의 전쟁 기록, 신라의 태백산에서의 제사 내용, 그리고 스위스에서 발견한 신라하의 존재 등의 연관관계를 살펴 본바, 이를 거의 확신하게 되어 이글을 쓰게 되었다. 

 

우선 살수 관련 자료를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블로거 방랑자 님이 잘 정리하여 놓아 이를 인용한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에 카테고리 살수에 공유한 자료이다. 

 

"6월...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 번을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薩水)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척 하면서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임금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

 

우문술은 자신의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듣고 돌아갔다. 우문술은 방진(方陣)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그때 우리의 군대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述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鈔擊 述等且戰且行

 

 

가을 7월, 우문술의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의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 걸려서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나라의 장군으로서 천수(天水) 사람인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의 군대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물러났다. 다만 위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만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제가 크게 화를 내면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繫述等 癸卯引還"

 

[네이버 지식백과] 영양왕 [嬰陽王] 23년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우선 살수는 평양에서 30리 거리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30리면 12km로 매우 근접한 거리이다. 그리고 평양성이 매우 험하고 견고하다 했다. 진을 친 것도 산을 의지해서 했다고 했다. 즉 평양성은 산악지형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평양성과 살수를 찾는데 매우 중요한 점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이 지점에서 압록수까지 450리에 달한다고 했다. 이는 180km에 달하는데, 압록수와 평양, 살수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기록을 보면 수나라 군대는 보병이 주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프랑크왕국을 중국지역으로 판단하는데, 프랑크군은 보병이 주력이었다고 위키피디아 자료는 말한다. 보통 유목민 군대는 기병이 주력부대이며, 신속한 이동을 장점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수나라 30만 군대가 거의 전멸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래 자료는 상기 내용을 당나라 한원서와 통전 , 송나라 무경총요, 삼국사기, 자치통감, 수서 등의 자료를 인용하여 위의 사실을 확인한 내용이다. 모두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참고로 인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압록수와 평양성의 위치이다. 압록수~평양성을 알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살수의 위치를 알수있다.

 

▶ 당나라 한원서[660] 翰苑 고구려

 

高驪記云 馬訾水高驪一名淹水今名鴨淥水 其國相傳云水源出東北靺鞨國白山 水色似鴨□故俗名鴨淥水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即鹽難也 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 高驪之中此水最大

波瀾清澈所經津濟皆貯大船其國恃此以為天塹 今案其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也

 

 

▶ 당나라 통전[766] 고구려 : 요수와 압록수의 위치

 

通典 卷一百八十六 東夷下 髙句麗

又平壤城東北有魯陽山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有葦山 南臨浿水

 

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 南流至安市 小遼水源出遼山 西南流與大梁水會 大梁水在國西 出塞外 西南流注小遼水

 

馬訾(則移反)水一名鴨緑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西 南至安平城 入海 髙麗之中此水最大 波瀾清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為天塹 水濶三百歩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 (송나라) 무경총요[1044] 권22  압록수

 

鴨綠水,高麗國西,源出緵緥白山,水色似鴨頭,去遼東五百里。高麗之中也,此水最大,波瀾清澈,恃之以爲天塹,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裏。水東南二十裏分界,至新羅國興化鎮;自黃土岩二十裏西北至東京八百五十裏,南至海六十裏。"

[출처] 살수대첩, 고구려 살수의 위치|작성자 방랑자 

 

"물론 삼국사기, 자치통감, 수서 도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서 압록수까지 450리를 도주했다고 한다. 압록수~살수 450리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삼국사기

 

至薩水 軍半濟 高麗自後擊其後軍 左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자치통감

 

眾半濟 賊擊後軍 於是大潰 不可禁止 九軍敗績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裡  수서 우문술전

 

 

두번째는 살수薩水~평양성平壤城 관련 문헌 비교이다.

3가지 출처의 문장이 나오는데, 크게 차이 없이 동일한 문장이다.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삼국사기

又逼群議 於是遂進 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為營。  자치통감

又內逼群議 於是遂進 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裡 因山為營。수서 우문술전

 

추가 : 송나라 무경총요의 살수

隋煬帝征高麗,將軍宇文述與九軍過鴨綠水,又東濟薩水,去高麗平壤城三十裏,因山爲營。

 

 

◆ 네이버 지식백과 번역 :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薩水)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수나라 군사가 살수를 건너서 한참 행군하여 평양성 30리 떨어진 야산에 진을 친것으로 해석되어 있는데,

 

그런 의미로 한문 문장을 바꾸면,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因山爲營 去平壤城三十里 가 되어야 한다.

 

去平壤城三十里 라는 문장은 뒤가 아닌 앞의 문장을 수식하는게 상식이다. 문장의 순서를 바꿔야 하는것이다.

 

◆ 블로그 방랑자 번역 :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살수(薩水)를 건넜다.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

[출처] 살수대첩, 고구려 살수의 위치|작성자 방랑자  

 

그럼 이런 자료를 근거로 한 살수는 어디인가 살펴 보자. 상기의 블로거 방랑자님은 이런 자료를 근거로 한반도에서 찾아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패수를 독일의 라인강으로 추정하였다. (필자의 본 블로그 글, '한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되는 패수는 라인강인가?' 참조) 아래에 일부 내용을 인용하며, 패수가 서북쪽으로 흐르는 라인강임을 말하고자 한다.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역도원(郦道元:470~527)이 쓴 《수경주(水經注)》제14권 패수(浿水)조를 보면, 고구려 사신이 북위의 수도 평성(平城: 지금의 山西省 大同)에서 역도원에게 설명하는 글 중에 패수와 고구려 수도에 관한 생생한 대화 기록이 나온다.

 

「수도는 패수 북쪽에 있고 그 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옛날 낙랑군 조선현, 즉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치소를 지나간 다음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옛 《지리지》에는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城在浿水之阳,其水西流,迳故乐浪朝鲜县,即乐浪郡治,汉武帝置。而西北流,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县入海.」고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 사신 말을 요약하면, ‘패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른다. 그리고 서쪽으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城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는 설명이다. 그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때가 대략 서기 510년경이므로, ‘城’이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고, 당시의 고구려왕은 문자왕(文咨王: 재위 491~519)이다."

 

[출처] 평양성은 요양|작성자 일승 (자료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lainfos), 카테고리, 패수, 공유 글 참조)

 

 

상기 방랑자님 자료에서 패수와 살수의 위치 관계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단지 패수와 평양과의 거리는 60리라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살수와 패수는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살수는 패수의 지류라고 하였다.

 

 

" 패수 하구와 평양의 거리 :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612)

 

六月己未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入 自浿水去平壤六十里

 

6월 좌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데리고 뱃머리와 뱃꼬리를 수백리에 잇고 바다에 띄워 먼저 진입했다. 패수(浿水)로부터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通典 卷一百八十六 東夷下 髙句麗
又平壤城 東北有魯陽山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有葦山 南臨浿水 평양성 서남쪽 20리 위산(葦山) 남쪽에 패수가 있다. - 통전
 
 

그러면 수당전쟁의 살수(薩水) 와 패수(浿水)의 위치는 동일한가 ? 

수당전쟁의 패수(浿水)는 壩水 라고도 표기 하기 때문에 살수와 패수는 동일하지 않다. - 수서 내호아 열전

-. 遼東之役,護兒率樓船,指滄海,入自壩水,去平壤六十里,與高麗相遇。進擊,大破之,乘勝直造城下,破其郛郭。수서 내호아"

 

 

 

그러면 이러한 패수로 추정되는 라인강의 지류로서 살수는 어디인가? 다음의 3가지 가능성을 두고 검토해보자. 

 

1. Saar (Rhine) river in Swizterland

 

첫째 스위스에 있는 Rhine river의 지류인 Saar river가 그 후보이다. Saar ->사르 -> 살 이다. river는 우리말 물수로 흔히 썼다. 그래서 Saar river는 살수이다. 필자는 이런 강이름을 발견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강이름은 알자스 로렌지방에 또 하나 있었다. 아래 3번째 검토자료이다. 필자는 살수가 평양과 30리 거리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스위스에 있는 Saar river가 살수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평양을 스위스의 쥬리히로 추정했다. Saar river는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St. Gallen Canton에 있는데, 알프스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지나는 라인강(Alpine Rhine)의 지류이다. 이 강의 원천은 2087m의 높이에서 발원하며, 북쪽으로 흐르다가 Saarfall이라는 폭포를 지나서 라인강 계곡에 달한다.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은 수공을 펼쳤다 했다. 그래서 수공을 펼치려면 계곡과 폭포지형이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Saar river가 나타나지 않는다. 너무 작은 강이라 그런지 모른다. 고구려군이 수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강의 중간쯤 건널 때 공격하기 시작했다 했다. 수공을 펼치기도 했지만 너무 작은 강은 건너기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큰 강은 강을 막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The Saar is a minor tributary of the Alpine Rhine in the Swiss canton of St. Gallen. It rises in Mittelsäss, Bad Ragaz municipality, at 2,087 m elevation. Flowing generally north, it passes the Saarfall waterfall, dropping from 560 m to 500 m, reaching the plain of the Rhine Valley. From here, it is strongly canalised, flowing through the territories of the Vilters-Wangs, Mels and Sargans municipalities before joining the Rhine downstream of Trübbach at 480 m.

 

Its named tributaries are Kleine Saar (left), Vadanabach (left) Saschielbach (right), Silbergiessen (right), Chrummgiessen (right) and Kaltgiessen (right)."

(자료 : Saar(Rhine),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카테고리, 스위스)

 

Map of location of  Zurich and St Gallen canton in Switzerland around Alpine Rhine river 

Map of location of Zurich and St. Gallen canton in Switzerland with Sihl river and Rhein river

 St. Gallen canton 내의 Bruggen 주위 지형 

 

 

2. Sihl river in Switzerland

 

두번째 후보는 쥬리히 바로 남쪽에 있는 Sihl river이다. (상기 두번째 지도 참조) 필자가 이미 글을 쓴 '신라하와 조선하' 글에서 신라하(Sylaha)에 해당하는 강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살수에서 많이 전쟁을 했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은 평양성 근처에서 고구려와 전쟁을 했으나, 고구려와의 협상으로 평양성을 취하진 않았다고 한다. 발음도 Sihl 실 -> 살 로 갈 수 있다. 즉 살수라고 발음한 것을 Sihl river로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이강은 중간에 Sihlsee Reservoir란 저수지 같은 곳이 있다. 따라서 강물을 차단하기 보다 용이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북쪽으로 흘러 Limmat강에 합류하고 Limmat강은 라인강에 연결된다.  Sihlsee reservoir 주위는 모두 험한 산세를 보이고 있다. (아래 그림 참조)

 

"The Sihl is a Swiss river that rises near the Druesberg mountain in the canton of Schwyz, and eventually flows into the Limmat in the centre of the city of Zürich. It has a length of 73 km (45 mi), including the Sihlsee reservoir, through which the river flows. Water is abstracted from the river at the Sihlsee, leading to decreased downstream water flows and a consequent reduction in water quality.[1][2]

The river flows through, or along the border of, the cantons of Schwyz, Zürich and Zug. The main settlements of the Sihl Valley are all in the canton of Zürich, and include the towns of Langnau am Albis and Adliswil, along with a south-western segment of the city of Zürich. Above Langnau am Albis, some 13 km (8.1 mi) from the confluence with the Limmat, there are no major settlements alongside the river, and only a few small villages. Whilst the town of Einsiedeln is situated close to the Sihlsee, it is actually in the valley of a tributary river, the Alp.[1]

Etymology

The first written reference to the name dates to 1018, in the form Sylaha.[3] The name may be of Old European or Celtic origin: *Sîla ("quiet watercourse", from a root *sîl = "to trickle, wet") > Romance Sila with the addition of the Old High German element aha "flowing water".[4]

(source : Sihl river,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Switzerland)

 

 Sihlsee Reservoir in Switzerland (source : Wikipedia)

 

     Map of Sihl river in Switzerland (source : Wikipedia)

 

아래 삼국사기의 살수 내용을 보면, 살수의 위치는 고구려와 한나라, 낙랑 지역, 그리고 신라와 백제가 가까운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내용을 만족 시키는 지역은 이태리 북부지역이다.  필자는 한사군의 낙랑군 지역을 이태리 북부 지역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패수를 라인강으로 볼 때, 살수는 스위스의 쥬리히 주변의 어디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백제가 발칸반도에 있다고 추정했다. 특히 아래 문자왕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Sihl river도 하나의 후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살수 벌판이라는 문귀가 이목을 끈다.  즉 강 주위에 벌판이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살수(薩水)

 

16년(서기 494) 여름 4월,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薩水)의 벌판에서 고구려와 싸웠다.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고 있었다. 

고구려 병사가 그곳을 포위하자 백제왕 모대가 병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구원해주었다.

 

十六年 夏四月 大水 秋七月 將軍實竹等 與高句麗戰薩水之原 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兵圍之 百濟王牟大遣兵三千 救解圍

[네이버 지식백과] 소지 마립간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네이버 지식백과] 대무신왕 [大武神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3년(서기 494) 2월,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가을 7월, 우리의 병사가 신라의 병사와 살수(薩水)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의 병사가 우리에게 패하여 견아성(犬牙城)으로 들어가 

수비를 펼쳤다. 우리의 병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백제에서 3천 명의 병사를 보내서 신라를 구원하므로 우리의 병사가 물러났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 

秋七月 我軍與新羅人 戰於薩水之原 羅人敗 保犬牙城 我兵圍之 百濟遣兵三千 梫救新羅 我兵引退 

 

[네이버 지식백과] 문자명왕 [文咨明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16년(서기 494)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薩水)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었는데, 고구려 병사가 포위하였다. 임금이 병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여 포위를 풀었다.

 

十六年 秋七月 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 新羅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兵三千救 解圍

 

[네이버 지식백과] 동성왕 [東城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3. Saar river in France and Germany

 

제3의 후보는 Alsace and Lorraine지방에 있는 Saar river이다.  이강은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라인강의 지류인 Moselle river의 지류인 Saar river이다. 알자스 로렌지방은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다. 과거 독일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프랑스 지역이다. 강의 길이는 153마일로서 상기 두 강보다 긴 강이다. 

 

"The Saar (German: [zaːɐ̯] (listen); FrenchSarre [saʁ]) is a river in northeastern France and western Germany, and a right tributary of the Moselle. It rises in the Vosges mountains on the border of Alsace and Lorraine and flows northwards into the Moselle near Trier. It has two headstreams (the Sarre Rouge and Sarre Blanche, which join in Lorquin), that both start near Mont Donon, the highest peak of the northern Vosges. After 246 kilometres (153 mi) (129 kilometres; 80 miles in France and on the French-German border,[1] and 117 kilometres; 73 miles in Germany) the Saar flows into the Moselle at Konz (Rhineland-Palatinate) between Trier and the Luxembourg border. It has a catchment area of 7,431 square kilometres (2,869 sq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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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luence of Saar and Moselle in Konz

 

On the banks of the Saar is the UNESCO-World Heritage Site Völklinger Hütte. At Mettlach the Saar passes the well-known Saar loop. The lower Saar in Rhineland-Palatinate is a winegrowing region of some importance, producing mostly Riesling. Until the early 20th century, much more wine was grown on the banks of the Saar, reaching much further up from the mouth of the river, up to Saarbrücken. Only in the early 21st century have some enterprising farmers from the Saarland area started experimenting with winegrowing again.

The name Saar stems from the Celtic word sara (streaming water), and the Roman name of the river, saravus......"

(자료 : Saar,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티스토리 블로그, 카테고리, Holy Roman Empire)

 

Saar and Moselle River in Alsace (source : Wikipedia)

 

필자가 이 강을 접하게 된 것은  수 당과 고구려의 전쟁 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프랑크왕국의 동시기의 역사에서 찾은 것이다. 수나라에 대한 고구려의 살수대첩은 612년 있었다. 따라서 그 시기의 프랑크왕국의 역사를 찾아 보았다. 필자는 프랑스 지역을 중국의 역사지역으로 추정한다. 프랑스의 론강을 요수 즉 압록수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크왕국의 역사는 3형제의 집안싸움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소설을 쓰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무시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러면 그들끼리 싸운 지역이 힌트가 될지 모른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가장 동쪽의 Austrasia지역 (아래 지도 참조)은 독일과의 경계지역으로 이 지역에서의 전쟁이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Alsace지역에서  Saar river를 발견했다. (상기 지도 참조) 즉 살수와 발음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610년에 프랑스 동부의 Ausrasia왕 Theudebert II는 Alsace지방을 그의 동생, 부르군디왕 Theuderic II왕으로부터 빼앗는다. 그래서 서로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612년에는 Alsace지역의 Toul 도시(아래 지도 참조)와  Zulpich(독일 서부끝 중간지역 도시, Strasbourg 근처)에서 프랑스동부의 Ausrasia왕 Theudebert II는 부르군디왕 Theuderic II왕에게 결정적 패배를 맞는다. 그리고 그후 형제들의 할머니의 중개로 Theudebert II가 제거된다고 기술된다. 618년 망한 수나라의 모습을 보인다. 

 

 

Frankish Kingdom in 628 under Dagobert king (source : Wikipedia)

 

어떻게 보면 형제끼리 전쟁하는 양상이지만,  이러한 설정을 무시하고, 지역적 고려를 한다면, Ausrasia왕 Theudebert가 살수대첩에서  패배한 수나라가 될 수 있으며, 부르군디왕의 승리가 고구려의 승리가 될 수도 있다. 부르군디지역은 부여지역으로 추정된다고 필자는 이미 추정한 바 있다. 광개토태왕시 부하가 되어 같이 싸운 동부여의 무리들이 그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부르군디왕국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 (아래 지도 참조)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의 지역일 수 있다. 필자는 보다 서쪽의 서고트왕국이 점령했던 스페인지역도 고구려로 추정했다. 아래 지도의 이태리 반도의 동고트왕국지역도 고구려 지역이었으나, 진흥왕이후 신라에게 일부 빼앗긴 것(롬바르디왕국, 상기 지도)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수나라 보병들이 론강인 압록강 위쪽을 지나 패수인 라인강을 따라 내려오는 공격 루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또한 Theudebert II와 Theuderic II왕과의 전쟁 지역으로 나타난다. 

 

     Europe in 526 (source : Wikipedia)

 

그러나 이 Saar river는 필자가 평양으로 추정하는 쥬리히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래서  다시 뒤져보니 쥬리히 근처에서 Saar river가 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1번에서 분석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왕국의 역사 기술에서 살수대첩의 시기인 612년에 Saar river가까운 지역에서 고구려의 승리로 볼 수 있는 편린이 발견되니, 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론강의 좌측에서 우측 이태리로 가는 길은 당시에는 지금의 Route Napoleon 80과 같은 남프랑스의 도로가 유일한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압록수 하구의 서안평을 점령하니, 압록수  우측에 있는 낙랑군이 중국과 연결이 끊어져 고립되어 고구려에 망하였다. 따라서 수나라는 압록수 위쪽의 알자스지역을 동으로 지나 패수인 라인강을 지나 고구려로 공격하였을 것이고, 스위스의 쥬리히인 평양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다시 패수를 따라 남하하는 경로를 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 지도 참조) 이러한 이동경로의 중간에 알자스지역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 Saar river가 있다. 따라서 살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Saar river at Mettlach in Germany (source : Wikipedia)

 

Saar river in Germany

 

"Theudebert II (French: Thibert ou Théodebert) (c.585-612),[1] King of Austrasia (595–612 AD), was the son and heir of Childebert II. He received the kingdom of Austrasia plus the cities (civitates) of Poitiers, Tours, Le Puy-en-Velay, Bordeaux, and Châteaudun, as well as the Champagne, the Auvergne, and Transjurane Alemannia.

 

During his early years, his grandmother Brunhilda ruled for Theudebert and his brother Theuderic II, who had received the realm of Burgundy. After the two brothers reached adulthood, they were often at war, with Brunhilda siding with Theuderic. In 599,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Sens, but then the two brothers allied against their cousin Chlothar II and defeated him at Dormelles (near Montereau), thereby laying their hands on a great portion of Neustria (600–604). At this point, however, the two brothers took up arms against each other; Theuderic defeated Theudebert at Étampes. In 605, Theudebert refused to aid his brother whose kingdom was invaded by Clothar II. In 610, Theudebert extorted Alsace from his brother and Theuderic took up arms against him, yet again.

 

Theudebert was defeated decisively by Theuderic at Toul and at Zülpich in 612.[2][3][4] Theudebert was locked up in a monastery at the order of his grandmother, and killed with his son Merovech.[5] "

(Theudebert I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ks)

 

"Theuderic II (also spelled Theuderich, Theoderic or Theodoric; in FrenchThierry) (587–613), king of Burgundy (595–613) and Austrasia (612–613), was the second son of Childebert II. At his father's death in 595, he received Guntram's kingdom of Burgundy, with its capital at Orléans, while his elder brother, Theudebert II, received their father's kingdom of Austrasia, with its capital at Metz. He also received the lordship of the cities (civitates) of ToulouseAgenNantesAngersSaintesAngoulêmePérigueuxBloisChartres, and Le Mans. During his minority, and later, he reigned under the guidance of his grandmother Brunhilda, evicted from Austrasia by his brother Theudebert II............

 

In 610, he lost Alsace, the Saintois, the Thurgau, and Champagne to his brother and his men east of the Jura were soundly defeated by the Alemanni. However, he routed Theudebert at Toul (c.611) and later at Tolbiac (=Zulpich) in 612. He captured the fleeing Theudebert in the latter battle and gave him over—after taking his royal paraphernalia—to his grandmother Brunhilda, who had him put up in a monastery. Bishop Ludegast is said to have beseeched him in a fable to spare Theudeberts life.[1][2] Brunhilda probably had Theudebert murdered (along with his son Merovech) to allow Theuderic to succeed to both thrones unhindered...

(source : Theuderic I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Franks)

 

론강과 라인강 부근 지형 및 도시 (source : Worldatlas.com)

 

이상으로 살수대첩의 살수의 위치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자 한다. 비록 정확한 강의 위치를 지정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여러 가지 정황상 지금의 스위스 쥬리히 근처에 있는 강으로 추정된다. 즉 쥬리히가 평양성이라는 필자의 추정이 거의 맞는다는 결과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신라가 살수에서 고구려와 싸운 역사를 보면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있었다는 귀결을 낳는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