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기타

북아프리카의 3-5세기 마우리족은 왜국인가 가야인가?

Chung Park 2023. 3. 5. 08:02

부제 : 북아프리카의 마우리족은 누구인가? (3)

 

III. 북아프리카에서의 마우리족, 베르베르족과 로마 전쟁 (3세기 - 5세기)

1) 296-297 시기 아틀라스 산맥에서의 마우리족과 로마와의 전쟁

로마 황제 Diocletian의 co-emperor인 Maximian이 296-297 2년기간에 걸쳐 마우리족에 대한 원정을 하였다고 기록된다. 북아프리카의 산악지역이니 아틀라스산맥으로 추정된다. (아래 자료 참조)

"While many Mauri were part of the Roman empire, others resisted Roman rule. As Gibbon related for the years 296–297, "From the Nile to Mount Atlas, Africa was in arms."[9] Diocletian's co-emperor Maximian campaigned against the Mauri for two years, entering into their mountain fastness to terrify them of Rome's power. This may be the reason why the border legions of northwest Africa were reinforced in Diocletian's time with seven new legions spread through Tingitania, Tripolitania, Africa, Numidia, and the Mauritanias.[10]"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로마제국의 서쪽을 담당한 Maximian황제의 북아프리카 원정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비교적 소상히 위키피디아에 기록이 있다. 즉 이집트, 다뉴브, 골지역 및 게르만, 트라키언 등의 병력을 동원하여, 스페인을 통해 내려 가서 무어족의 약탈에 대한 응징에 나섰다. 카르타고에 지역본부를 두고, 게릴라전에 능한 베베르족을 아틀라스산맥으로 내모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사하라 사막으로까지 쫓아내는 승전보를 올렸다고 기록된다. (아래 자료 참조)

 

"Campaigns in North Africa

 

With Constantius' victorious return, Maximian was able to focus on the conflict in Mauretania (Northwest Africa).[113] As Roman authority weakened during the third century, nomadic Berber tribes harassed settlements in the region with increasingly severe consequences. In 289, the governor of Mauretania Caesariensis (roughly modern Algeria) gained a temporary respite by pitting a small army against the Bavares and Quinquegentiani, but the raiders soon returned. In 296, Maximian raised an army, from Praetorian cohorts, Aquileian, Egyptian, and Danubian legionaries, Gallic and German auxiliaries, and Thracian recruits, advancing through Spain later that year.[114] He may have defended the region against raiding Moors[115] before crossing the Strait of Gibraltar into Mauretania Tingitana (roughly modern Morocco) to protect the area from Frankish pirates.[116]

 

By March 297, Maximian had begun a bloody offensive against the Berbers. The campaign was lengthy, and Maximian spent the winter of 297–298 resting in Carthage before returning to the field.[117] Not content to drive them back into their homelands in the Atlas Mountains – from which they could continue to wage war – Maximian ventured deep into Berber territory. The terrain was unfavorable, and the Berbers were skilled at guerrilla warfare, but Maximian pressed on. Apparently wishing to inflict as much punishment as possible on the tribes, he devastated previously secure land, killed as many as he could, and drove the remainder back into the Sahara.[118] His campaign was concluded by early 298 and, on March 10, he made a triumphal entry into Carthage.[119] Inscriptions there record the people's gratitude to Maximian, hailing him – as Constantius had been on his entry to London – as redditor lucis aeternae ("restorer of the eternal light").[118] Maximian returned to Italy in early 299 to celebrate another triumph in Rome.[120]"

(source : Maximian,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 (235-364))

 

 

이시기의 백제는 책계왕 시기(AD 286-298)인데, 역시나 AD 288-298기간 11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2338333729 참조) 역시 일제의 장난으로 판단된다. 스페인지역을 통해 내려 가는 로마의 원정 경로를 고려할 때, 백제의 그것이 더 확율이 높은데, 아쉽게도 백제기록에 11년이 공란으로 남아 있다.

 

이시기의 신라는 유례이사금 시기(AD 284-298)인데 유난히 왜와의 전쟁이 많은 시기이다. (아래 자료 참조) 특히 위 시기인 296-297년 기간과 근접한 295년에 왜를 정벌하려다 그만두었다 언급된다.

 

즉 왜에 관한 한, 백제 보다는 신라기록에서 많은 내용이 있다는 것은 당시의 서로마가 신라인가 하는 의혹도 들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신라가 로마의 이태리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베리아반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왜는 주로 도이(島夷)로서 섬지역의 종족이므로, 말타섬(대마도?)이나 발레아레스제도 등의 지중해의 섬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유목민인 마우리족이 왜인지 의문도 든다. 

 

-"四年夏四月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다 (AD 287)

六年夏五月 왜병에 대비해 무기를 손질하다 (AD 289)

七年夏五月 물난리로 월성이 무너지다 (AD 290)

八年春一月 말구를 이벌찬으로 삼다 (AD 291)

九年夏六月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하자 일길찬 대곡에게 구원병을 주어 보내다 (AD 292)

九年秋七月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292)

十年春二月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시키다 (AD 293)

十一年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다 (AD 294)

十一年秋七月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치다 (294)

十二年 왕이 왜국을 정벌하려다 실행하지 않다 (AD 295)

十四年春一月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치다 (AD 297)

十五年春二月 서울에 짙은 안개가 끼다 (298)

十五年冬十二月 왕이 죽다 (AD 298)

(자료: 유례이사금, 삼국사기,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사)

2) 마우리족의 로마시대 용병의 역할 (AD 272-AD 298)

이 시기에 다른 마우리족은 로마의 용병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일부 마우리족은 로마와 싸우고, 일부 마우리족은 로마의 용병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아래 용병의 역할이 있는 지역을 살펴 보면, 이태리 북부, 페르시아와 다뉴브 강변,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지역, 그리고 발칸반도의 일리리아 지역임을 고려하면, 이 당시의 로마가 필자가 추정하는 백제의 지역과 일치한다. 즉 백제가 이 당시의 로마의 일부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병의 역할도 한 마우리족은 백제에 협력한 왜가 아닌가 한다. 또한 백제에 협력한 가야의 일부일 수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근초고왕 시기의 마우리족에 대한 분석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When Aurelian marched against Zenobia in 272, his army included Moorish cavalry.[5] The Notitia Dignitatum mentions Roman cavalry units called Equites Mauri, or Moorish cavalry. Many Mauri were enlisted in the Roman army and were well known as members of the comitatus, the emperor's mobile army, prior to the reign of Diocletian.[6]

........

By the time of Diocletian, Moorish cavalry were no longer part of the mobile field army, but rather were stationed along the Persian and Danube borders. There was one regiment of Equites Mauri in "each of the six provinces from Mesopotamia to Arabia".[8] The Mauri were part of a larger group called Equites Illyricani, indicating previous service in Illyricum.[5]"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3) 372년 서북아프리카에서의 마우리족과 로마의 전쟁

372년은 중국사에서 남북조시대이고,남조는 동진(東晉), 북조는 전진(前秦)시대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346-375)시기이고, 신라는 내물마립간(356-402) 시기이다. 372년에 특히 북아프리카, 모레타니아 왕자인 Firmus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아래 기록된다. 이들은 특히 Austoriani라 불리는 마우리족의 일부라 한다. 로마의 Valentinian황제 (백제의 근초고왕으로 추정됨)는 Theodosius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압에 나서게 한다. 즉 상당히 큰 반란이고 어떻게 보면 이들과 전쟁을 하는 느낌이다. 프랑스 남부 Arles에서 출병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백제가 아닌가 한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한수와 한성지역을 점하고 있었다. 즉 프랑스 동부지역을 점하였었다. 따라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북아프리카지역을 점령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근초고왕 시기에 남만인 침미다례를 도룩했다는 기록, 야마토 용병을 써서 야마토 북쪽에 있는 침미다례를 철저히 응징했다는 기록과 관련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근초고왕 시기의 마한 정복, 왜국의 규수진출, 이백지국, 탁순국 등 가야소국의 백제 부용화 등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 (근초고왕, 나무위키 자료 참조, 자료출처 : 필자의 lostcorea.tistory.com, 카테고리, 백제 근초고왕)

 

"In the 370s, Mauri raided the Roman towns of Northwest Africa. Theodosius the Elder campaigned against them in 372.[11] A Moorish tribe called the Austoriani are specified as participating in these raids.[12]..............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In 372 Firmus, a Mauretanian prince, rebelled against Roman rule and plunged the Diocese of Africa into disarray.[12] Valentinian decided to give the command of the expedition to suppress the rebellion to Theodosius. The army was reorganized, extra troops were recruited, Theodosius' son was made dux Moesiae Primae replacing his father as commander in Illyricum and Theodosius himself started mustering his troops at Arles. [13] In the spring of 373 Theodosius sailed to Africa and led a successful campaign against the rebels in the east of Mauritania.[14] At the end of the campaigning season, when he led his army into western Mauritania, he suffered a major setback.[15] In 374 Theodosius invaded western Mauritania again. This time he was more successful, defeating the rebels and capturing Firmus.[16] "

(source : Count Theodosiu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로마제국 (364-475))

 

즉 372년 시기의 로마와 북아프리카 마우리족의 충돌은 근초고왕 시기의 백제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침미다례와의 충돌일 수 있으며, 아니면, 탁순국 등 가야소국의 부용국화, 또는 일본 큐슈지역 진출, 이백지국 등과 관련될 수 있다. 즉 북아프리카에 왜국 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주 왜국지역에 구야한국이 진출했다는 기록이 상기된다.

4) 411-412년 서북아프리카에서의 마우리족과 로마의 전쟁

이 411-412년 시기는 로마가 무어족에 대응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군대가 주둔하는 것으로 아래 기록된다.

"In the late 4th and early 5th centuries, large numbers of troops from the mobile imperial field army (the comitatus) were permanently stationed in Africa to maintain order against the Moors."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In 411–412, the dux Libyarum (commander of Roman forces in Libya) was named Anysius. He is recorded as the commander of a war against the Austuriani Mauri. Synesius of Cyrene praised him for courage and effective management of the war.[19]

In the year 412, the limitanei (permanently stationed border guards) of Cyrenaica needed help to resist attacks by the Austuriani group of Mauri. "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이시기는 백제의 진지왕 시기로서, 진지왕은 왜국에 있다가 백제로 와서 왕이 된 경우이다. 그 와중에 진씨 세력과 해씨 세력의 권력 다툼이 있었고, 진씨 귀족세력이 제거되고, 해씨 귀족세력이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런데 위의 시기인 삼국사기의 진지왕 시기에도 408-415년 7년 기록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는 또한 왜의 세력이 신라에 침입한 시기로서 광개토태왕이 신라를 구원한 시기이다.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은 이 시기에 시실리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 병력을 보냈다. 임나, 가라가 관련된 시기이다. 따라서 위의 7년 공백 기록은 다분히 의도적인 일제의 지우기 결과일 확율이 매우 높다.

 

여하튼 372년 근초고왕 시기부터 확보한 북아프리카에 상시병력을 주둔시켜 지배한 것으로 판단된다. 진지왕이 있던 왜국의 위치는 따라서 북아프리카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여기서는 북아프리카가 왜국지역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역으로 카르타고의 가라는 가야의 일부라는 추정도 또한 가능하다. 근초고왕 시기 탁순국 등 가야국이 언급되는데, Austriani 마우리족이 이들일 수 있다. 즉 마우리족은 가야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추정이다.

 

To be continued...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