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기타

북아프리카의 마우리족은 누구인가? (2)

Chung Park 2023. 3. 13. 02:13

II.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마우리족과 로마의 전쟁 (AD 54-AD 180s)

로마제국시대의 역사에서 마우리족과 충돌 역사가 자주 등장한다. 로마제국 역사에서 Revolts (반란) 또는 Raids(약탈) 등의 표현은 이들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래에서 보듯이 주로 Raids, 즉 약탈의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남쪽 또는 북아프리카지역에 한정되는 특징을 보인다. 신라시대에 왜국의 세력은 신라에 대한 약탈 성격의 전쟁을 많이 했지만, 신라가 수전에 약해 그러했다. 그래서 주로 신라의 영토에서 왜의 침입에 당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아래 로마 자료를 통해 마우리족의 활동을 다섯 단계의 기간에 걸쳐 살펴 보고자 한다.

1) Nero황제 시대(재위 : AD 54-68) 남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마우리족과 로마의 전쟁

Mauri raids into the southern Iberian Peninsula are mentioned as early as the reign of Nero...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네로 황제 시대에 남부 이베리아 반도에 마우리족이 약탈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위키피디아 자료에서 네로황제편에서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이 당시 네로 황제시기의 백제 역사를 보자. 이베리아반도는 신라 보다는 백제의 역사가 있을 확율이 높다. 필자는 이 지역이 마한의 가능성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백제의 다루왕 시기(재위 : AD 28-77)인데, 말갈과 신라와의 다툼만 있을 뿐 다른 기록이 없다. 그런데 공백기간이 많아 구체적인 확인이 불가능하다. 특히 백제의 AD 57-62기간의 6년 공백은 상기의 네로왕의 시기이기도 하니, 더욱 의문이 간다. 일제의 의도적인 지우기의 결과일 수 있다. 일제가 위의 기록과 매칭되어 지웠는가 하는 의혹이 간다.

 

이시기의 신라는 탈해이사금 시기(AD 57-80)인데, 신라는 왜와 우호관계를 맺고(AD 59년), 61년에는 마한의 장군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AD 73년에는 왜인의 침공을 막다가 우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AD 77년에는 이찬 길문이 가야(김수로왕의 금관가야)와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삼국사기 비교내용, https://blog.naver.com/lainfos/222338295693 참조) 즉 백제 보다 신라에서 오히려 왜와 가야, 마한 관련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왜의 침공을 받는 수세적 입장이었다.

 

탈해 이사금이 금관가야와 황산진 어구에서 싸워 이겼다는 기록은 신뢰성에 의문이 간다. 우선 수군이 약한 신라가 바다 건너 금관가야와 싸워 이겼다는 것이 의문이고, 김수로왕의 기록에서는 석탈해의 도전을 물리치고, 배 500척을 동원해 추적하다가 계림으로 향하는 것이 판단되자 되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러한 기록도 계림에서 패해 돌아온 것을 감추는 기록일 수도 있다. 황산진 어구에서 써움이란 것은 수군기지에서 싸웠다는 것이므로 신라의 수군기지에서 싸운 것으로 판단된다. 즉 금관가야의 수군이 계림의 수군기지까지 추적하다가 패해서 돌아간 것으로 해석된다. 필자는 금관가야를 카르타고의 금관가야로 이전 글에서 추정했고, 신라는 이태리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상기 네로왕 시기의 분쟁지역이 이베리아반도 남쪽 지역이므로, 백제와 신라 자료로는 현재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전 글에서 보는 것처럼, 기원 후 77년의 분쟁대상인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는 카르타고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들 마우리족의 로마와의 전쟁일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기원후 61년에 마한의 장군 맹소가 탈해이사금의 신라에 항복했다는 의문의 기록이 있다. 백제 온조왕은 전한이 망하는 AD 8년에 마한 병합을 계획하고, AD 9년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이다. AD 16년에는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백제의 치하에 있던 마한에서 맹소라는 장군이 신라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온조왕이 전한이 망하는 시기에 마한 병합 계획을 세운 것을 보면, 마한은 전한의 지역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협보가 남마한에 구야한국을 세운 시기도 이 즈음이다. 즉 남마한이 북아프리카지역일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들 월지국지역이 중국사의 월나라, 초나라의 지역으로 이들을 합병한 전한의 지역일 수 있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이는 매우 혁명적인 가설이 된다. 한고조인 유방이 이 지역출신일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베리아반도는 월지국,월나라의 북쪽에 있는 강거가 된다. (사마천의 사기 기록). 강거는 필자는 강국(姜國)의 지역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추정을 근거로 아래 후한의 2대 명제 시기 기록을 살펴 보자.

 

 

중국이 프랑스지역이라 추정한 필자는 이베리아 반도지역이 이시기에 후한의 지역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시기 후한의 2대 명제 (유장) (재위 : AD 57-75)시기에 마황후의 오빠 마방이 서강족을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oldconan.tistory.com/36346 참조) 이 강족(姜族)이 티베트어족인데, 이들이 베르베르족일 수도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강족은 양을 주로 키우는 유목민이고, 진(秦)나라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월수강(越수姜), 광한강(廣漢姜), 무도강(武都姜)으로 발전했다. (아래 나무위키 자료). 월수강은 월나라와 관련된 강족이지 않나 생각한다. 광한강은 넓은 한나라의 강족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무도강은 한나라가 점령하고 무도라 지명을 한데 따른 이름이다. 이들 세개의 이름이 북아프리카지역과 이베리아반도 지역을 말할 수도 있다고 본다.

 

Berbers족과 가장 유전자가 일치한 지역이 바스크지역과 사르디니아지역이라 했다. 그런데 사르디니아 섬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을 키우고, 그 양(羊)(sheep)의 종류가 가장 많다. (아래 자료 참조). 양을 표상으로 하는 강족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Sardinia's land is dedicated 60% to livestock, 20% to agriculture and the rest is occupied by closed forests, urban areas and areas that are not exploitable.[citation needed] Sardinia is home to nearly 4 million sheep,[120] almost half of the entire Italian assets and that makes the island one of the areas of the world with the highest density of sheep along with some parts of UK and New Zealand (135 sheep every square kilometer versus 129 in UK and 116 in New Zealand). Sardinia has been for thousands of years specializing in sheep breeding, and, to a lesser extent, goats and cattle that is less productive of agriculture in relation to land use. It is probably in breeding and cattle ownership the economic base of the early proto-historic and monumental Sardinian civilization from Neolithic to the Iron Age."

(source : Sardini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Corsica/Sardinia)

 

한나라 초에 흉노의 묵돌선우가 서역을 압박하고 세력이 강해지자, 흉노에 귀부해 한나라의 서쪽 지역을 자주 침범했다. 흉노와 연합한 기록이 자주 나오고, 농서지역에 거주한 적이 많다. 거주지역에 따라 서강과 동강으로 나뉘었다 한다. 북송때 서하국을 건국하였으며, 서하를 세운 강족의 일파인 탕구트족이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상나라 말에 주나라가 상나라를 공격할 때 강족을 상나라가 인신공양할 때 제물로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주나라의 세력에 가담해 이를 도왔다.[2]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해관계가 맞물려 손을 잡았던 지라 오래치 않아 다시 사이가 벌어졌고, 춘추시대  진(秦)나라가 발전하면서 진나라에게 밀려,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월수강(越雋羌), 광한강(廣漢羌), 무도강(武都羌) 등으로 발전했다.

진 효공 때 진나라에게 굴복했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몽염을 통해 흉노와 함께 압박을 받았으며, 한나라 초에 묵돌이 서역을 압박하고 세력이 매우 강성하자 흉노에 귀부해 한나라의 서쪽 지역을 자주 침범했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을 자주 공격해 농서까지 진출했지만 강족과 흉노가 왕래하는 길을 끊어 황중 지역에서 쫓겨났다가 선제 때 이르러 흉노와 연합해 장액, 주천 등 하서 지역을 공략했지만 의거안국, 조충국 등의 공격을 받아 패했으며, 전한 말기에는 중국이 혼란하자 금성, 농서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후한 초기에 내흡, 마원 등의 공격을 받아 한나라에게 귀부와 저항을 반복하면서 한양, 안정, 농서를 정복하며 살았다.

이때부터 강족은 거주 지역에 따라 서강과 동강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와 서진 시기에도 중국을 정복해 관중 지역에 거주했으며,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족이 중국 지역을 정복하여 건국한 국가인 후진이 건국되었다.

토번의 압박을 받아 감숙, 영하, 섬서 북쪽 일대로 옮겼다가 후에 하주로 옮겨갔으며, 북송 때 강족들이 한족들을 정복하면서 한족들을 피지배민족으로 둔 서하국이 건국되었고, 서하국은 철저히 몽골보다 더욱 대부분의 한족들을 노예로 만들어 농락한 국가였다. 서하를 세운 강족의 일파인 탕구트족이 있다.

그래도, 5호16국시대에 살던 그 많은 종족들 중 거의 유일하게[3] 지금까지 정체성을 잃지 않고 내려온 것은 매우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다른 이민족들은 대다수가 한족들을 정복하면서 후손들을 퍼트려 현재는 중국어를 쓰고 있지만 백마인들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상나라 시대까지 올라가는 민족이다. 하지만 백마인이 티베트계 민족이지만 이들이 저족인지 강족인지 불분명하다. 중국 사회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민족들을 중국 사서에 기록된 민족들과 근거가 없어도 일치시키는 경향이 매우 자주 있으며 이것은 관광 산업에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백마인이 실제 저족이나 강족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증거는 전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궁벽한 변방에 있어 수백 년간 여러 왕조가 바뀌었으나 그럭저럭 무난하게 살아온 강족들에게 온 가장 큰 재난은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었고, 이때에 강족들의 여러 마을들이 크게 파괴되었다. 대지진 이후 중국 정부가 생존자들을 도시로 옮겨 거주하게 한 정책으로 인해, 급속도로 민족의 정체성이 희석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 사료들의 기록

후한 초기의 허신이 지은 설문에 따르면 서융 가운데 양을 목축하는 사람들로 사람 인(人)과 양 양(羊)의 뜻을 따른다고 했다.

후한 말의 응소가 지은 풍속통의에 따르면 강족은 주로 양을 기르기 때문에 강(姜)이란 글자는 양(羊)의 뜻에 따르고 그 곳 사람들을 이 때문에 강족이라 불렀다고 하며, 군신이나 상하의 구분이 없고 힘센 자가 수령이 되었기에 서로 하나가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종족은 거주지에 따라 나누고 강자는 약자를 멸시했으며, 일정한 거주지 없이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했다. 남자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길하게 생각했으며, 병사하는 것을 흉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자료 : 강족,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토욕혼-토번/강족)

 

 

필자는 베르베르족이 이들 강족(姜族)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그중에서도 월수강이라는 강족의 영역이 북아프리카가 아닌가 한다. 강족은 대월지국의 북쪽에 있으니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백양국이 이 이베리아반도에 있지 않나 생각했는데, 베베르족과 가장 유전자가 일치한 사르디니아의 양 목축을 고려하면, 이들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들이 남으로 내려가 북아프리카에 거주했었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사하라사막에 거주하는 베르베르족이 대하(大夏)의 강족이 아닌가 한다. 대하는 탕구트족인데 티베트어계통이다. 모레타니아 베베르족이 접하는 사하라 사막쪽에 Tibestian mountain이 있다. 티베트산이라 읽힌다. 필자는 티베트의 전신인 토욕혼이 대서양에 접한 지역이라 했다. 포루투갈이나 프랑스의 Gascony지역으로 추정했다. 이들이 세에 밀려 남으로 내려와 모레타니아 베르베르족이 될 수 있다.

 

필자는 북아프리카의 나라들이 대월지족 (BC 221-AD 30) 즉 월(越)나라가 아닌가 한다. 누미디아왕국과 모레타니아왕국과 존재 시기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서양사학자 말로리는 월지가 오손과 함께 인도이란인이라 했다. 프랑스의 루네 쿠르세는 월지는 인도 스키타인이라 했다. 대월지가 인도이란인이나 인도 스키타인이라면 결국 키메리언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흉노의 일종인 구야한국이 북아프리카에 있었지 않나 하는 추정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필자는 오손이 프랑스 남부에 걸쳐 있는 Ossetians이라 추정했다. 흉노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나는 월지는 오손을 멸망 시키고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 북아프리카에 대월지로서 정착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월의 남쪽에는 대하가 있고, 북쪽에는 강거가 있으며, 서쪽에는 안식이 있고, 동남쪽에는 대완이 있다고 사마천의 사기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강거는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서고트왕국을 필자는 고구려라 추정했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장수왕 시기인데, 장수왕은 강왕이란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필자의 추정은 대월지와 강거를 중앙아시아로 주장하는 중공사가들의 추정과 다른 것이다. 중공 사가들은 현 중공지역을 중국사의 지역으로 주장하니 계속 거짓을 말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기의 대완열전에 의하면 월나라 남쪽에는 하(夏)나라가 있다고 했다. 이집트에서부터 대서양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일대에 걸친 나라가 중국의 우가 건국한 하(夏)나라가 아닌가 한다. 실제 나일강 지역을 제외하고도, 리비아 베르베르족 지역에서 수로 건조가 있었다고 기록된다. 이는 매우 큰 주제이므로 차후 검토가 있을 것이다.

 

하나라, 월나라 모두 흉노와 같은 조상이라 했다. 월나라에서 초나라가 생겼다 한다. 초나라의 항우가 카르타고의 한니발인지 모른다. 포에니전쟁은 1차가 진(秦)나라의 통일전쟁일 수 있고, 2차 포에니 전쟁은 한(漢)나라의 유방과 초(楚)나라의 항우의 전쟁일 수 있다. 그 이후 3차 포에니 전쟁은 전한(前漢) 시기의 오월과의 전쟁일 수 있다. 포에니 전쟁에 대해서도 차후 검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흉노 즉 견융, 서융, 견이가 키메리언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흉노와 관련 있는 탕구트족이 세운 대하는 사하라사막의 유목민 베르베르족, 마우리족일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추정은 앞으로 더 깊이 검토될 것이다.

 

2) AD 170s -180s 기간 Baetica지역 (스페인지역)에서의 마우리족과 로마 전쟁

 

다음 시기는 170-180년대에 이베리아반도지역인 Baetica지역에서 마우리족과 로마와의 전쟁기록이다. 마우리족이 지브랄타 해협을 건너 남부 스페인지역을 약탈했다는 기록이다. (아래 자료 참조)

 

"Mauri raiding into Baetica in the first century CE. Mauri from the mountains beyond the border of the Roman Empire crossed the straits of Gibraltar to raid into the Roman province of Baetica, in what is today southern Spain, in the early 170s.[3]......

 

Mauri raided Baetica again in the late 170s or 180s in the reign of Commodus. At that time they besieged the town of Singilia Barba, which was freed from the siege by the arrival of Roman troops from the province of Mauretania Tingitana, led by C. Vallius Maximianus.[4]....."

(source : Mauri,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아프리카)

 

역시 마우리족의 약탈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위키피디아의 Commodus왕이나 Marcus Aurelius황제에게도 없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백제 초고왕 시기(AD 166-214)이나, 이 시기에 AD 171-185년 15년 기간동안 특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또한 일제의 지우기 결과일 수 있다.  (https://blog.naver.com/lainfos/222338314603 참조) 

 

신라 아달라 이사금 시기(AD 154-184)에는 AD 173년에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신라 아달라이사금 시기도 AD 175-183년 기간 9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역시 이 또한 일제의 지우기 결과일 수 있다. 백제, 신라 모두 이 기간에 공백이 많은 것을 보면, 일제가 지우고 싶은 기록일 수 있다.

 

위의 강족의 자료에 의하면 이 후한(後漢) 시기에 '농서'에 진출했으므로, 이베리아 반도의 Baetica지역이 강거, 강족이 있던 농서지역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강거(康居)와 강족(姜族)을 동일하게 추정한다. 중공사가들이 이들을 한자를 다르게 쓰며 역사를 조작한 것으로 본다. 중공지역에 남북조시대에 강족의 역사가 있으니 강거, 월지와 다르게 해야 현 중공지역을 중국사 지역으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강족의 강(姜)과 강거의 강(康)은 같은 것으로 본다. 실제 인물 중에 후한시기에 남흉노의 강거선우(재위 : AD 179-188)가 있다. 그런데 강거의 강자를 강(姜)자를 쓰고 있다. (자료 : 본 블로그, 카테고리, 토욕혼-토번/강족) 즉 강거와 강족은 동일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며, 이베리아반도지역에 있던 것이다. 그동안 남흉노에 대해 어느 지역인지 의문을 품어 왔는데, 이제 이해가 갈 것 같다.

 

다른 한편,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의 이 기간의 15년, 9년 공백을  고려하면, 왜의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현재로서는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마우리족이 강족인지 왜인지 아직 판단이 가지 않는다. 좀더 추가적인 연구가 있은 후 판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To be continued...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