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통

강거(康居)는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에 있지 않았을까?

Chung Park 2023. 3. 29. 07:33

제목 : 후백제의 견훤이 공격한 강주(康州)(Kangju)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지 않았을까?

 

강거(康居)의 강()은 강주(康州)와 같이 지역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은 강()지역, 즉 강거지역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중공사가들은 중앙아시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이 왜곡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나라, 주나라, 송나라, 흉노, 고구려, 발해에서 강왕(康王)이란 칭호를 쓰는 왕이 나타나는데, 이들 왕이 강(康)지역을 지배한 왕으로 판단되는 바, 이를 바탕으로  강거지역을 추정해 보고자 한다. 또한 통일신라도 경명왕시에 920년 강주장군 윤원이 고려에 항복했다 하고, 후백제의 견훤이 강주(康州)를 공격했으며, 아들 양검을 강주도독으로 임명하였다 기록되어 있는 바, 이를 바탕으로 강(康)지역을 추정하고자 한다. 

 

1. 하나라(BC 2100-BC 1605)의 강왕 (康王)

하나라의 수도는 대하, 안읍 평양,등이 거론된다. 하나라의 왕중에는 태강(太康)왕, 중강(中康)왕, 소강(少康)왕이 있다. 모두 강()자를 포함한다. 강지역을 지배한 왕이 아닌가 한다. 참고로 하나라의 왕들의 수도 위치를 알아 보자 (자료 : 하나라, 위키백과)

 

우왕의 아바지인 곤 (국왕) 시기의 수도는 대하(大夏), , 고밀, 양성(陽城), 양성양적(陽城陽翟 볕양,꿩적)으로 기술괸다. 치수를 잘하여 하나라의 시조가 된 우왕시기의 수도는 양적, 진양평양, 평양시, 안읍(安邑)(대하안읍) 등이 거론된다. 많은 수도가 있다는 것은 지역이 그만큼 넓어 여러 수도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에 띄는 지역은 대하,  평양 그리고 안읍(대하안읍)이다.  대하는 사하라사막에 있는지도 모른다. 평양(平陽)은 요임금이 있던 곳이므로 프랑스 어느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平壤)과는 양자가 다르다. 그러나 평(平)지역이므로 그들 사이는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읍은 안지역이므로 안달루치아지역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태강왕, 중강왕 시기의 수도는 양적(陽翟 볕양,꿩적), 짐심(斟 짐작할 짐, 尋 찾을 심)이라 한다. 소강왕 시기의 수도는 하읍(夏邑), 제구(帝丘)(=상구(商丘))라 하였다. 양적은 꿩과 더운 지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하읍도 더운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하는 아니므로 이베리아 반도의 어디가 아닐까 추측한다. 반면 짐심은 정확한 지역을 모른다는 의미 같고, 제구는 임금의 언덕이란 뜻으로 수도를 의미하는데, 제구 즉  상구는 이 다음 왕조인 상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다.  

 

즉 필자가 기대했던 태강왕, 중강왕, 소강왕 시기의 수도이름이 강거지역이라면 양적, 하읍 등에서 더운 지역이라는 것과 꿩이 관련된 지역으로 보인다. 꿩과 관련된 지역은 특수한 이름이므로 앞으로 주의를 가지고 살필 일이다. 

 

2. 주(周)나라의 강왕 (康王)

 

주나라도 강왕(康王)이 있다. 기원전 1020-기원전 996년기간동안 재위한 왕이다.

 

주나라 강왕은 동이족의 반란을  진압했고 ( 위강백, 소공석 (태보) 활약), 위강백은 북정을 하여 경양부근에 이르렀다 한다. 또한 서쪽의 유목민인 귀방족을 공격 하여, 많은 양의 전차, 전투용 말, 소와 양을  획득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 ()강왕, 나무위키)

 

그런데, 귀방(鬼方)은 곤융(昆戎) 낙천(洛泉), 곤이(昆夷), 곤이(緄夷), 관이(串夷) 등의

명칭과 혼용되는 흉노족의 전신이다.  (자료 : 귀방, 나무위키) 필자는 지난 글에서 귀방, 곤이 등의 흉노족 전신이 강족과 연관이 있음을 파악했다. 즉 강거의 강족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강(康)지역이 강족(姜族)이 있던 지역이 아닌가 했다. 강족은 주나라와 힘을 합쳐 상나라를 무너뜨렸으나. 후일 주나라와 반목하여 싸웠다 했다. 여기서 언급되는 서쪽의 귀방이 강족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유목민이 아닌가 한다. 귀방을 공격하여 많은 전투용 말, 소와 양을 획득했다고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래서 강왕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3. 전국시대 송나라의 강왕(康王)

 

전국시대에 송나라에 역시 강왕(康王) (재위 : 기원전 328-기원전 286)이 처음이자 마지막 왕으로 존재했다. 이 송강왕은 기원전 318년 제나라를 쳐서 이기고, 남하해 초나라를 쳐서 이겼다 한다. (자료 : 송강왕, 나무위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월지 북쪽에 강거(康居)가 있다고 했다. 월지는 월나라 지역이고, 초나라는 월나라지역에서 생겼다 한다. 즉 남하해 초나라를 쳐서 이긴 것은  강왕(康王)의 지배지역이 강거이기 때문에 남하해서 초나라를 친 것이 된다. 그래서 강왕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송나라가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고려시대의 북송은 프랑크지역에 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남송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후진 석경당이 요나라에게 바치고, 후일 송나라가 금나라에게서 찾지 못한 연운 16주 지역은 알자스 로랜지방으로 프랑크왕국 역사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4. 묵특선우 ( - 209 BC) 월지 점령, 서역 26개국 정벌

 

흉노의 묵특 선우 시기에 월지를 점령하고,  서역 26개국 정벌했다 한다. 서역의 구체적 국명은 백양국, 누번, 호게 등 일부만이 알려졌다. 또한 묵특선우는 오손을 정벌했다 한다. 필자는 오손이 프랑스 중남부지역에 존재한 Ossetians이였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여기서 더 서쪽, 남쪽으로 내려가 서역의 26개국을 정벌하지 않았나 한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국명은 백양국이다. 양(羊, sheep)과 관련된 국명이다. 그런데 강족은 사람과 양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각별한 양 존중사상이 있었다. 그래서 백양국이 강족의 나라가 아닌가 한다. 강족은 강거지역에 있다고 필자는 추정했다. 따라서 이베리아반도 지역이 강족의 지역, 강거의 지역, 백양국이 있는 지역이 아닌가 한다. 

 

 

5. 남흉노의 강거(姜渠) 선우 (재위 : 179-188 AD)

 

후한시기에 남흉노의 강거선우가 있었다. 그런데 강자가 강족의 강(姜)자이다. 그러면서도 강거선우라 한다. 필자는  강거(康居)지역의 강족(姜族)인 강거선우가 아닌가 한다. 후한은 전한과 달리 서역지역에 진출하지 못했다 한다. 즉 이베리아 반도지역을 포함한 북아프리카 등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남흉노가 이베리아반도에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하나라, 월나라가 흉노의 조상이라 한다. 따라서 하나라, 월나라가 북아프리카에 걸쳐 있었다면, 남흉노가 이베리아 반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흉노라 추정되는 키메리언도 북아프리카까지 내려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남흉노의 강거선우가 있던 지역은 강거지역, 강족의 지역인 이베리아 반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6. 고구려 장수왕, 강왕 (康王)

 

고구려 장수왕(재위 : 412-491)이 죽었을 때, 북위의 효문제는 ‘강왕(康王)’이란 칭호로 애도했다 한다. 즉 강()지역을 지배한 왕이라는 것이다.

 

서고트왕국은 고구려 장수왕 시기 성립했고. 필자는 서고트왕국도 고구려의 일부라 추정했다. 그래서 장수왕이 강왕으로 추모되지 않았나 한다. 북위의 효문제는 프랑크왕국의 Clovis왕으로 추정된다. 둘이 태어난 년도도 같다. 단지 효문제는 5살에 왕이 되어 태후가 섭정을 했고, Clovis는 15살에 왕이 되어 친정한 것으로 기술된다. 이 당시 Clovis는 지금의 프랑스의 동남쪽을 제외하고 전 프랑스지역을 통일했다.  즉 서고트왕국이 있던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장수왕이 강왕으로 불린 것이다. 즉 이베리아 반도가 강거지역이 된다. 이는 북아프리카가 대월지일 때 그 북쪽이 이베리아반도이며, 강거지역이라는 사마천의 사기기록과 일치하게 된다. 

 

 

7. 발해의 강왕(康王) (재위 AD 794- 809)

 

발해 제 6대 왕도 강왕(康王) 이라 한다. 역시 강(康)지역을 지배한 왕으로 추정된다.

 

아래 발해 강왕의 내용을 보면 당과 왜와의 교류가 있었다. 그런데 당의 책봉에 대한 반응이 떨떠름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발해의 세력이 강해 당의 위협이 되었다는 징조로 해석된다.  왜와는 빈번한 교류를 했는데, 왜가 발해의 빈번한 방문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나온다. 6년으로 제한 하려 했으나 왜의 뜻대로 하지 못했고, 왜의 서북지방 능등국에 객원을 설치했다고 한다.  발해는 내부 반란 진압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를 계승했고, 강역은 처음과 같이 되었다 언급하였다. 즉 당시 강왕 당시 발해의 위세가 커서 당이나 왜가 껄끄러워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때 발해의 내분이 당(唐)에 알려지게 되자, 당은 강왕의 즉위 이듬해인 795년 2월 내상시(內常侍) 은지섬(殷志贍)을 보내어, 강왕을 ‘발해국왕(渤海國王)’이 아닌 ‘군왕(郡王)’으로 낮춰서 책봉을 하였다. 이에 강왕은 책봉호(冊封號)를 ‘국왕(國王)’으로 올려줄 것을 요구하였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 성과로 798년에 당 덕종(德宗)은 강왕을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銀靑光祿大夫檢校司空)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805년에는 당 순종(順宗)으로부터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金紫光祿大夫 檢校司空)’을, 806년에는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받았다.

 

강왕은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강왕은 처음부터 일본에 보낸 국서에 “큰 사업을 잇고 삼가 조상의 위업을 거느리게 되어 조정의 기강은 예전대로 되고, 강역은 처음과 같이 되었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내었고, 고구려계승의식을 강조하며 대일(對日) 외교에 주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일본은 발해의 대규모 사신단 파견과 잦은 방문으로 부담을 느끼고, 방문기한[聘期]을 6년으로 제한하려고도 하였으나 실패한다. 그리고 발해 사신의 왕래와 교역이 빈번해지자, 804년에는 일본 서북지역인 능등국(能登國)에 객원(客院)을 설치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

(자료 : 강왕(발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필자의 블로그(paul-park.com), 카테고리, 발해)

 

발해의 강왕은 필자에겐  의외이다. 남북국의 북국이 발해이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발해가 이베리아 반도까지 와서 신라 영역이었던 강주를 그것도 신라 말기가 아닌 800년 전후에 점령할 수 있었을까? 회의가 가면서도 일본과의 잦은 교류 위 내용을 보면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한다. 필자는 당시 일본을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전의 글에서 발해는 카자르칸국을 포함하여  론강 우측의 지역이라 추정했다. 그러면서 발트해가 발해의 활동영역일 수 있으며, 해동성국이란 별칭은 발트해의 동쪽이 아닌가 했다. 그렇다면 동쪽의 바이킹인 Varangians은 발해의 활동일 수 있는데, 서쪽의 바이킹은 필자는 돌궐이라 추정했다. 그렇다면 서쪽 바이킹인 돌궐의 활동이 어느 시기에 가서는 발해의 그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돌궐과 말갈 지역으로 이동했다 한다. 그리고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국호도 고려라 칭했다 한다. (발해 사신이 일본에 가서 한 내용) 즉 돌궐의 정체가 발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당나라로 추정되는 프랑크왕국은  768-814기간 재위하며 크게 영토를 확장한 샤를마뉴왕이었다. 샤를마뉴왕시기에 삭슨족(돌궐 세력)을 약화 시키고, 동쪽의 아바르족(말갈세력)을 많이 살해했다. 남으로는 Galicia지역 (Aquitaine지역)을 점령하고, 이어 더 남쪽의 이베리아반도의 사라센 (신라)을 압박하고, 동쪽의 롬바르드왕국(신라)을 멸망시키고, 코르시카섬, 샤르데냐섬을 정복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프랑크왕국은 다시 약해진다. 이시기에 바이킹의 활동이 본격화 된다. 서양사가들은 Charlemagne왕에게 당한 것을 복수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아래 지도의 노르만 바이킹의 활동기간은 790년대 - 1066년의 기간으로 Viking Age라 불리운다. 위의 발해 강왕은  재위기간이 794-809 기간으로 노르만 바이킹의 시대 시작과 교묘하게 일치한다. 즉 노르만의 바이킹시대 활동이 발해와 고려의 그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지도에서 이베리아반도 남쪽은 바이킹의 활동 반경에 속한 지역이다. 연대는 40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일시적인 raids를 위해 지나친 지역을 두고 강역이라 할 수없는 점도 있다. 그래서 좀더 노르만 바이킹이 이베리아 반도 주위에서 활동한 지역을 살펴 보니, 프랑스 북부, 남서부 지역도 해당한다. (아래 두번째 지도 참조, 확대해서 보기를 권함) 그런데 프랑스 남서부 지역 이름이 Galicia, Gascony지역이다. 이 아래는 Suebic Kingdom이 있던 포루투갈 위의 지역이다. 이 지역이 발해가 점한 지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왜가 북아프리카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와 잦은 교류를 하였다는 것은 북아프리카와 가까운 이베리아반도 남부지방에 진출하였을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발해 강왕의 지배지역이 프랑스 남서쪽 갈리시아 지역인지 이베리아반도 지역인지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발해의 강왕의 존재는 또 다른 의미를 시사한다. 즉 발해의 강왕의 존재는, 동과 서의 바이킹의 활동이 발해의 그것일 수 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바이킹의 영역과 항해지역 (AD 793 - 1000 AD) (자료 : 위키피디아)

 

 

바이킹의 활동지역 (800-1050) (자료 : 위키피디아)

 

 

8. 후백제 견훤 (867-936, 재위 :900-935)의 강주(康州) 공격

 

후백제의 견훤 시기에 강주(康州)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즉 우리 역사에서 강주 즉 강(康)지역에 대한 지배를 나타내는 최초의 기록이다. 이전에는 고구려, 발해의 강왕(康王)이란 명칭에서 강(康)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추할 수 있었을 뿐이다. 동시에 강주라는 명칭은 강거지역과 강왕의 강(康)자가 지역이름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강주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강주에 대한 기록은 아래 3가지로 요약된다. (아래 글은 필자의 글, "불가리아 시메온 I 왕은 후백제의 견훤인가?' (paul-park.com) 일부 인용 하였습니다)

 

1) 927년 경애왕시 강주 4개현 고려에 항복

2) 928년 견훤의 강주 공격

3) 견훤은 양검을 강주 도독으로 임명

 

즉 강주는 이미 신라의 지역이었으며, 927년에 일부 지역이 고려에 항복했고, 928년 견훤의 강주 공격이후 후백제에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의 아들인 양검이 강주도독으로 임명되었으니 말이다. 그후 고려가 후백제를 통합했을 터이니 고려의 영토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강주지역이 이베리아반도였다면, 고구려의 서고트왕국에 이어, 신라의 우마이야왕조에 이어, 고려 시대에도 이 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판단되어 필자도 예상못했던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 보고자 한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927년 근품성(: 지금의 상주)을 공격하고, 고울부( : 지금의 영천)를 습격하였다. 이어 경주로 진격해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왕건도 공산() 싸움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928년) 강주(康州)를 공격하여 300여 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해 1,000여 인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막강했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 전투에서 8,000여 인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하면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해 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 어구에 침입하여 전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말 300여 필을 노획했다. 934년에는 운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대패하였다...............

 

정치가로서 견훤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925년에는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듬해(926)에는 오월(吳越)과 통했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마돌(麻咄) 등 35인이 당도하자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게 하였다. 또 922년과 929년 2차례에 걸쳐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양검을 강주(康州)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을 시켜 사람을 강주·무주 등으로 보내 음모를 꾸몄다....

(자료: 견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필자의 블로그 paul-park.com, 카테고리, 후백제)

 

상기 견훤자료는 상당히 의미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1) 925년 후당으로부터 백제왕 칭호 받음

2) 926년 오월과 교류

3) 927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교류

4) 927년 거란사신과 후백제 사신이 바다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 등주에 

   피난하여 도착했으나 살해 됨

5) 922, 928년 일본에 사신 파견

6) 견훤의 강력한 세력 : 신라와 고려 왕건의 세력을 추월하니 신라와 왕건이 연합 ,

    이에 대한 반작용인지, 견훤은 927년 신라의 수도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살해하고       꼭두각시왕 경순왕을 세운다. 

7) 이듬해 928년 견훤은 강주와 부곡성을 공격하였다.

8) 932년 예성강 침입하여 전함 100여척 불태우고 말 300필 노획

 

이러한 8가지 사항에 대해 그 의미를 음미해보자.

첫째 후당으로부터 백제왕이란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백제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백제는 해상왕국으로 판단한다. 해외의 담로 22개를 고려해도 그렇다. 필자는 백제가 발칸반도, 튀르키예, 이태리반도, 프랑스 동부 등에 위치한 것으로 판단한다. 즉 지중해 해상활동을 한 것으로 판단한다. 후당도 당나라가 있던 지역 프랑크왕국 지역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후백제사신과 거란사신이 태풍을 만나 피신한 후당의 등주는  프랑스의 남쪽, 지중해에 접한 지역으로 판단한다. (이태리 중남쪽 Calabria일 수도 있음, Simeon I 자료 참조)

 

서양사가들은 후당이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바다에 인접한 지역이 없다. 따라서 서양사가들이 후당이 중앙아시아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틀렸음을 증명한다. 

 

중공사가들은 당(唐)나라 위치가 현 중공지역이라 추정하는데, 그렇다면 후당도 같은 지역으로 추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란은 중공 북쪽지역으로 추정한다. 백제는 한반도로 추정했다면, 거란 사신과 후백제 사신이 바다 건너 아무리 북쪽으로 간다 해도 후당의 등주가 될 수 없다. 후당의 등주는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중공땅에서 동지나해 남쪽이나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공 사가들의 추정도 틀렸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필자가 추정한 바는 이에 딱 들어 맞는다. 즉 백제는 지중해와 접하고 있었고, 당나라는 프랑크왕국 위치, 거란은 독일의 위치에 있다는 추정이 맞다는 것이다.

 

둘쩨, 후백제가 오월과 일본과 사신을 교류한 것은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지역과의 교류를 의미한다. 즉 이미 이 지역에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이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것으로 지난 마우리족 분석에서 추정했다. 오월은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걸쳐 있지 않나 판단한다. 따라서 여기서 가까운 강주 지역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성강에 침입해 전함 100여척을 불태운 것은 후백제의 수군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성강은 지중해로 흐르는 Ebron river가 아닌가 위에서 언급했다. 즉 충분히 바다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은 후백제가 강주인 이베리아반도까지 와서 공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공사가들이 주장하는 오월의 위치는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위치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백제가 한반도에 있다면 중공남쪽에 있는 오월과 교류할 이유가 빈약하다. 그리고 더구나 중공사가들이 중앙아시아 있다고 주장하는 강거(강주지역)에 진출할 이유도 없다.   즉 중공사가들과 한반도 식민사관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또한 강주(康州)는 이미 신라지역이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에 관한 기록을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 911년 궁예가 태봉으로 국호를 고침

- 918년 왕건이 궁예를 밀어 내고 고려 건국

- 920년 1월 신라와 고려의 국교 수립 (나무위키 경명왕 자료)

 

 - 920년 2월 신라 강주 장군 윤원이 고려에 항복 (나무위키 경명왕 자료)

 

 - 927년 4월, 신라 강주(康州) 관할하 4개향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 (삼국사기 경애왕 기록)

 

즉 920년 신라 강주 장군 윤원이 고려에 항복했다는 기록, 그리고 927년 4월 신라 강주 관할하  4개향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는 기록이다. 

 

즉 강주가 신라로부터 고려 왕건에게 넘어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928년 견훤의 강주 공격이후, 강주도독으로 양검을 임명한 것을 보면, 일시적으로 후백제가 강주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935년 신라와 후백제의 멸망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928년- 935년 시기의 후백제

​- 928년 1월 김상이 흥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다 (")

- 928년 5월 (신라)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

- 928년 견훤의 강주(康州) 공격, 부곡성(缶谷城) 공격

- 928년 秋八月 견훤이 왕충에게 쫓겨나다 (")

- 928년 秋八月 견훤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가다 (")

- 928년 冬十月 견훤이 무곡성(부곡성?)을 함락시키다 (")

- 929년 견훤이 일본에 사신 파견

- 929년 夏六月 천축국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오다 (")

- 929년 秋七月 견훤에 맞서 출정한 홍술이 전사하다 (")

- 929년 秋七月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

- 929년 冬十月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

- 930년 春一月 (신라의)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다 (")

​- 930년 1월 왕건이 견훤과의 고창군(古昌郡) 전투에 크게 승리 - 이후 후백제 열세 (")

- 930년 春二月 경순왕이 왕건에게 만나기를 청하다 (")

- 930년 秋九月 (신라)동쪽 바닷가의 주군(州郡)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다(")

- 931년 春二月 왕건이 신라 경순왕을 찾아가다 (")

- 931년 秋八月 왕건이 경순왕과 신료들에게 물품을 보내주다 (")

​- 932년 견훤 충신 공직이 고려에 투항

- 932년 후백제군이 예성강(禮成江) 어구 침입 - 전함 100여척 불태우고 말 300여필 노획

- 934년 9월 견훤이 운주 (運州) 공격했으나 대패

- 934년 9월 운주내의 30여 군현이 왕건에 항복하다 (")

​- 양검은 강주 도독, 용검은 무주(武州)도독, 장남 신검은 견훤 자신 옆에 둠. 견훤은 4남 금강을 총애하여 후계자로 고려함

- 935년 3월 장자 신검은 양검, 용검과 짜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함. 4남 금강 살해됨

- 935년 6월 견훤은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 왕건에 의탁, 양주를 식읍으로 받음

- 이후 후백제 내분으로 왕건에게 멸망, 신검, 양검, 용검 살해됨

- 935년 견훤은 연산(連山) 불사에서 창질로 죽음

(자료: 필자의 글, '불가리아 시메온왕은 후백제의 견훤인가?' 글 참조)

 

9. 강주지역과 이베리아반도

 

아래에서는 강주 지역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이베리아 반도의 당시 역사를 살펴 보고 이를 검토해 보자.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사라센 우마이야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들이 문무왕 이후의 신라라 추정했다. 또한 최근의 마우리족의 연구에서 모로코지역에 신라어(Shilha language), 신라사람들(Shilha people)이란 표현까지 확인 했다. 즉 이 지역에 신라가 있었다는 지울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필자는 스위스의 Sihl river가 Shilaha 즉 신라하로 불렸음을 밝혀냈다. 이러한 내용은 신라가 이들 지역에 있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이다. 이러한 것을 고려하고 이베리아 반도 이 시기의 역사를 보기로 하자. 

 

아래 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우마이야왕조의 이베리아반도 지배는 750년이후 코르도바 에미레이트 (Emirate of Cordoba)로 변한다. 우마이야 왕조는 한때 프랑크의 Poitiers(=Tours, 북아키텐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Umayyard Invasion of Gaul,https://blog.naver.com/lainfos/222875883231 참조), 이는 신라가 서고트왕국의 고구려를 접수한 후 프랑크왕국인 당나라와 싸운 것인지, 아니면 이 시기의 당나라내의 안록산, 사사명의 난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지 추가 연구가 있어야 알 것 같다. 필자는 안사의 난으로 보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둔다.  여하튼 여기서는  후백제시기에 집중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Emirate of Cordova (756-929) in 929 (green) (source : Wikipedia)

 

"In 756, Abd al-Rahman I, a prince of the deposed Umayyad royal family, refused to recognize the authority of the Abbasid Caliphate and became an independent emir of Córdoba. He had been on the run for six years after the Umayyads had lost the position of caliph in Damascus in 750 to the Abbasids. Intent on regaining a position of power, he defeated the existing Muslim rulers of the area who had defied Umayyad rule and united various local fiefdoms into an independent emirate.[6] However, this first unification of al-Andalus (including Toledo, Zaragoza, Pamplona, and Barcelona) under Abd al-Rahman still took more than twenty-five years to complete.

For the next century and a half, his descendants continued as emirs of Córdoba, with nominal control over the rest of al-Andalus and sometimes even parts of western Maghreb, but with real control always in question, particularly over the marches along the Christian border, their power vacillating depending on the competence of the individual emir. For example, the power of emir Abdullah ibn Muhammad al-Umawi (c. 900) did not extend beyond Córdoba itself.

Upon the ascent to the throne of Abd al-Rahman III, in 912, the political decline of the emirate was obvious. Abd al-Rahman III rapidly restored Umayyad power throughout al-Andalus and extended it into western North Africa as well. In 929, to impose his authority and end the riots and conflicts that ravaged the Iberian peninsula, he proclaimed himself caliph of Córdoba, elevating the emirate to a position of prestige not only in comparison to the Abbasid caliph in Baghdad but also the Shiʿite Fatimid caliph in Tunis, with whom he was competing for control of North Africa."

(source : Emirate of Cordova, Wikipedia, 필자의 블로그 (paul-park.com), 카테고리, 후우마이야왕조)

 

위의 내용은 두가지가 주목된다. 즉 코르도바 에미레이트가 750년 다마스커스의 아바스왕조와 독립하여 Al-Andalus지역 (Toledo, Zaragoza, Pamplona, and Barcelona  포함)에 세워졌지만, 이후 150년에 걸쳐, 그 후손들은 북아프리카지역까지 지배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기술된다. 900년에는 코르도바를 넘어서는 그 영향력이 상실되었다는 기록이다. 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912년 새로운 왕(Abd al-Rahman III)이 등장하여 안달루스지역과 서북 아프리카지역까지 우마이야 세력을 확보하고 929년 Caliphate of Cordoba를 칭한다. 즉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와 동일한 칼리프를 칭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튀니지아에 Fatimid왕조도 칼리프를 칭하여 경쟁구도가 되었다 기술된다. 필자는 이 시기가 고려가 신라의 강주를 이어 받는 시기이므로, 코르도바 칼리프는 고려 왕건의 그것으로 판단된다. 즉 강주를 둘러싼 후백제, 신라, 고려의 역사가 이베리아 반도의 코로도바 에미레이트에서 코르도바 칼리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강주가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10. 불가리아 시메온왕의 이베리아 반도 공격 가능성 

 

필자는 지난 글에서 불가리아 시메온 I왕을 후백제의 견훤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면 후백제의 견훤이 강주를 공격하였으므로, 불가리아의 시메온왕이 강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베리아 반도를 공격하였는지 살펴 보자 

 

불가리아 시메온왕은 북아프리카의  Fatimid Caliphate와 연합하려한 기록이 아래 요약된다. 수군의 지원을 목적으로 접촉했는데, 사절단 일행이 비잔틴군(신라)에게 Calabria(이태리 중남부)에서 잡혀서 연합에 실패했다는 기록이다. 

 

​-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에 목마른 시메온왕은 924년 대공격을 계획하고, Fatimid 칼리프에 사절을 보내 수군의 지원을 요청

- 칼리프는 동의하고 자신의 대사와 불가리아 사절단과 함께 보냈으나 그들이 Calabria에서 비잔틴군에 잡힘

 

- 비잔틴왕 Romanos는 칼리프에 많은 선물을 주며 평화를 제안하여, 칼리프와 시메온의 연합은 실패로 돌아감 (자료 : Simeon I, wikipedia)

Fatimid Caliphate 영역 (source : Wikipedia)

필자는 상기 연합의 실패 이야기는 후백제가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강주를 공격하며, 북아프리카에 있는 왜와 연합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그리고 견훤은 예성강 어구를 공격하여 전함 100여척을 불살랐다 한다. 필자는 예성강이 피레니산맥아래 있는 지중해로 흐르는 Ebron river가 아닌가 한다. 예성강 하구에 벽란도가 있어 고려가 송나라와의 교역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하는데, 이 당시 송나라가 프랑스지역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를 고려가 차지하였다면, Ebron 강이 예성강이 될 수 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3개의 강중 제일 큰 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메온왕의 이야기가 후백제의 견훤의 강주 공격을 간접적으로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서양사가들이 시메온의 이 지역 진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축소할 수 있었다 생각한다. 

 

11. 강거에 대한 중공사가들 주장의 허구성

그런데 이 강주지역을 중공 사가들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주장한다. (아래 지도 참조) 즉 현재의 중공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해서 강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키피디아 자료를 보면 유전자 검사에서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동아시아가 아닌 쿠샨제국의 토착인으로 나타난다. 즉 중공 사가들의 주장이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또한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에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후백제, 통일 신라에서 언급되는 강주의 위치가 중앙아시아라고 하는 셈이 된다. 즉 그들의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후백제가, 신라가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로 그 먼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Kangju(강주) area in 200 AD (source : Wikipedia)

Kangju area in Central Asia insisted by Chinese historians (source : Wikipedia)

 

또한 상기 강왕은 하나라, 주나라, 송나라, 고구려, 발해에서도 나타난다. 즉 강거지역이 강주 지역으로 판단되는 바, 하나라, 주나라, 송나라가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결과가 된다. 중공사관을 가진 이들은 하나라, 주나라, 송나라가 현 중공지역에 있었다 주장한다. 따라서 위의 주장은 그들의 주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고구려, 발해가 중앙아시아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게 되어 한반도와 동북삼성지역에 고구려와 발해가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 즉 중공학자들의 주장은 이처럼 앞뒤가 안맞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거 지역이 중앙아시아에 있었다는 주장은 몹시 틀린 주장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래 지도의 Kangar Union이 중앙아시아에 있다는 주장도 당나라, 티베트가 오른쪽에 나타나는 것을 고려하면, 중공사가들의 왜곡이거나 그런 왜곡을 받아 들인 주장으로 보인다.  필자는 티베트의 전신인 토욕혼이 서해에 접한 지역이라 했다. 북위의 효문제가 토욕혼왕에게 서해 개국공이라 책봉했기 때문이다. 아래 지도에서 서해는 없다. 서해는 대서양이라 필자는 추정한다. 

Kangar Union (659-750) in Central Asia (source : Wikipedia)

12.  강주가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다는 결론

후백제의 견훤은 외교의 폭이 넓다. 후당, 발해를 멸망 시킨 거란, 일본, 후고구려, 흑수국, 보로국 등과 교류했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시메온 I 왕도 서쪽의 프랑크왕국 (필자는 거란 또는 후당이라고 판단), 흑해 위의 마자르 및 Pechenegs, Khazar Kaganate, Rus Khaganate 등과 가까이 있어 이들과 교류할 가능성이 있다. 이당시 비잔틴제국을 통일신라로 보는 필자는 당시 이베리아반도, 남부 이태리 등이 신라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도 고려, 후백제, 신라의 경합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불가리아는 이태리 남부에서 온 비잔틴군과도 싸웠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필자는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판단하는데, 신라 말기에는 신라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혼란한 사회에서 해적화된 신라인들이 신라구가 되어 지중해에서 활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불가리아 시메온은 북아프리카의 Fatimide Caliphate와 연합을 추진했다. 그들의 강한 수군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다. 비록 비잔틴제국의 견제로 실패했지만 말이다. 후백제의 견훤도 예성강 어구 싸움에서 전함 100여척을 쳐부수고 말 300필 이상을 노획했다고 했다. 즉 해전을 했다는 것이다. 예성강이 어디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후백제가 강력한 수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주 싸움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는 우마이야왕조 (Al-Andalucia (712-756), Emirate of Cordova (756-929)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필자는 우마이야 왕조가 신라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으로 건너간 것은 거기에 있는 고구려인 서고트왕국을 정벌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따라서 당시 통일신라의 영역이었던 이곳에 수군이 와서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강주 중 4개향이 고려에 귀부했다 하였다 했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 났을 수 있는 것이다. 후백제는 후당과 교류하며 백제왕이란 호칭을 받았다 했는데, 당이 있던 자리에 있었을 후당은 프랑크왕국 일부지역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남쪽인 이베리아 반도에 후백제가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후백제는 오월과도 교류했다 했다. 필자는 오월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오나라)나 북아프리카 지역(월나라, 월지국으로 필자는 추정)으로 판단한다. 실제 불가리아 시메온 왕도 북아프리카의 Fatimid Caliphate (상기 지도 참조)와 연합하려 했다.

 

또한 발해의 강왕의 존재는 발해가 서쪽의 바이킹도 포함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서쪽의 바이킹은 돌궐로 필자는 추정했는데, 프랑크왕국의  Charlemagne왕이후는 서쪽의 바이킹의 활동이 매우 활발한 바,  발해의 강왕이 이시기의 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발해를 발트해로 추정한다. 

 

또한 고려초에 왕식렴의 해양세력이 강주를 지배했다고 한다. 왕건의 세력 일부가 아닌가 한다. 이들은 해양세력이다. 해양세력이 중공사가들이 주장하는 중앙아시아의 내륙에 있는 강주를 점령하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즉 중공사가들의 강주 위치 추정은 허구라는 것이다. 지금의 중공지역이 중국사의 지역이라는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한 억지 주장이다. 반면 필자가 주장하는 강주의 위치가 이베리아 반도에 있다면 해양세력의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다. 즉 강주는 발해나, 고려, 후백제 등의 해양세력의 접근이 용이한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