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는고구려의 영토에 들어간다.여수전쟁때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살수대첩으로수나라군대를 물리친 곳이 현 안주 일대로 추정된다. 지금도 일대에는 을지문덕이 수군을 유인하기 위해 7명의 승려들로 하여금 거친 살수를 건너게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7명의 승려들이 먼저 강을 건너자 수군이 이를 보고는 안심하여 급히 살수를 건너다가 을지문덕의 계략에 휘말려 몰살당했다는 전설이 바로 그것이다.[3]
남북국시대에는고려사지리지에 의거해 원래 고구려 식성군(息城郡)이었다가통일신라의 중반군(重盤郡)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패강진을 북쪽으로 잡은 것이고, 실제로 식성군/중반군은황해남도재령군혹은삼천군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안주 지역은발해와 신라의 변방으로써 남북국의 공백 속에고구려유민(호족)들의 무주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후삼국시대고려태조에게 접수된 후 처음에는 팽원군(彭原郡)이라 했다가 931년(태조 14) 안북부(安北府)로 개칭된다.
고려시대인 983년(성종2)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라 개칭되었고,[4]1018년(현종9)에 안북대도호부라 개칭된다. 995년서희가 크게 성을 보수하였다. 안북대도호부는 주로요나라를 경계하여 설치되었는데, 비슷하게 다른도호부로는백제유민을 경계해 설치된 안남도호부(전라북도전주시→여기저기 이치되다 폐지),신라유민을 경계해 설치된 안동도호부(경상북도경주시→여기저기 이치되다→안동시정착),여진족을 경계해 설치된 안변도호부(강원도안변군)가 있었다. 대도호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으며여요전쟁[5]과여몽전쟁[6]의 격전지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안주군이 되었다. 이때도 여전히 군사요충지라평안도병영이 있던 지역이며, 상술했듯 평안도의 '안'자가 바로 안주에서 따온 것.선조때임진왜란이 끝나고 안주성을 개축(1607)했으나,인조때이괄의 난으로 털린 다음남이흥과후금군대에 의해정묘호란의안주성 전투(1627년 양력 1월 20일 ~ 1월 21일)가 벌어졌던 곳이다.[7]1895년23부제개편으로평양부 안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평안남도안주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1931년안주면이 안주읍으로 승격되었다.광복당시 안주군은 1읍 7면, 안주읍 북문리에 군청이 있었다.1952년안주읍 ·신안주면 ·동면 ·운곡면 지역 지역이 안주군으로 남고 나머지는 문덕군으로 갔다.1987년시(현재 19동 14리)로 승격되었다.
남흥지구의남흥청년화학기업소는함흥시흥남구역과 함께 "주체비료" 공업 지역으로 언급되는 북한의 대표적인 석유화학공장이 있다. 그외요소비료공장, 견직공장이 있다.석탄,철,흑연등의 자원이 풍부하다. 연풍수력발전소(5천 kw)·청천강화력(20만 kw)·안주(120만 kw,건설중)화력발전소가 있다.
재입북으로 화제가 된탈북자전혜성(임지현)이 안주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전혜성은 탈북하여모란봉 클럽,애정통일 남남북녀/시즌2등 여러 방송에도 출연하여 이름이 알려졌으나, 돌연북한으로 돌아가 화제가 되었다. 이 이유에 대해서 3가지 설이 있다. 1.북한에서 보낸간첩이라는 설, 2.중국에 갔다가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는 설, 3. 스스로 원하여 북한에 돌아갔다는 설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주로 2번으로 추정하는 편. 탈북민들 말로는 꽤나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물론 북한 방송과 전혜성이 주장하는 것은 3번.
[1]2022년[2]2022년[3]고려시대에 만들어진관촉사은진미륵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여기서는수나라군이거란족의요나라군대로 바뀌었고,승려도 7명이 아니라 1명이라는 것이 다른 정도다.[4]즉 지명은 영주인데 영주에 안북대도호부가 설치되었단 뜻이다.[5]1차 침공에서소손녕이봉산에서 승리하자 안북대도호부까지 친정했던 성종이서경(평양)으로 후퇴하였다. 2차 침공에서는소배압이 진작에 점령하고 주둔하였는데 여기서는 영주(寧州)라는 이름으로 나온다.[6]1차 침공의안북성의 패배로몽골 제국군의 주된 주둔지가 됨.[7]결국 남이흥은 스스로 폭사했다. 후금군 총대장버이러(beile)아민조차 머리를 조아려 곡을 하며 “조선은 충의의 나라라더니 내 이제 그 참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8]본래 김씨였으나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씨를 따랐고, '란사'는 Nancy라는 영어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