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활동무대는 산서성 남부였다
역사 기록들, 조선 활동지 산서성 남부 가리키고 있어
성헌식 필진페이지 +입력 2019-10-26 08:00: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올린 최만리의 상소와 세종대왕의 하교 및 정인지의 서문 등으로 미루어봤을 때 훈민정음의 모체가 되는 옛 전자에 관한 고서적이 당시에 분명히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로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 책이 전해지지 않는 걸까. 일단 그런 책은 민간에서 전해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언어 관련 책이기 때문에 민간보다는 국가기관에서 관리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민족은 줄곧 대륙에서 활동하다가 만주·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민초들은 대륙에 남고 극히 일부만이 국가지배계층들과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마도 고려가 몽골에게 항복한 직후로 보이는데, 여말선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종대왕의 어제서문에 언급된 “나라의 말과 음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잘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함이 많았다”는 훈민정음의 반포 이유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러한 민족대이동은 이주지배세력과 토착민의 소통 부재를 불러왔을 것이다.
궁궐 서고에 보관돼있던 옛 전자(篆字) 관련 서적들은 세조·예종·성종 때 내려진 수서령에 의해 수거된 단군 관련 고기(古記)들과 함께 수장고에 보관되다가 임진·병자 양대 전란에 소실됐거나 설사 보존되었다 하더라도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면서 일본왕실서고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들의 신대문자를 연구하는데 더 없이 좋은 자료이며 또한 만일 그 책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이 무려 4000년 전에 훈민정음의 모체인 위대한 소리글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들의 핵심 추진사업인 단군신화 등과 같은 ‘조선인 우민화정책’ 등이 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민족혼말살을 위해 20만권의 사서를 불태운 일제 [사진=필자 제공]
조선의 활동무대는 어디인가
가림토 문자를 만든 3세 가륵 단군은 나라(邦) 조선(朝鮮)을 세운 단군왕검의 손자였으며 2세 부루 단군의 아들이었다. 당시 조선의 중심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만주 일대가 아니고 산서성 중남부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아래와 같은 여러 기록으로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다.
‘단군세기’에 “단군왕검 50년(정사·B.C 2284년)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단제께서는 풍백에게 명해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해 백성들을 편하게 했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67년(갑술·B.C 2267년) 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파견해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순)과 만나게 했다.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가 속했으며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를 평정해 분조(分朝)를 두고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순임금)에게 그 일을 감독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왕검 50년에 있었던 대홍수는 중국의 요임금 시대에 천하가 물에 잠겼다는 바로 그 대홍수다. 이는 조선과 요임금의 당나라가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선은 치수로 대홍수를 극복했지만 요임금은 그러질 못해 민심이 떠나 정권이 순임금으로 바뀌는 것이다.
당시 홍수가 발생한 이유는 황하와 분하가 만나는 기점 위에 있는 맹문(孟門)산이 황하의 물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으로 황하의 유입량이 많을 경우에는 그곳이 넘쳐서 범람했기 때문이다. 당시 피해침수 지역은 주로 산서성 남부와 황하변 하남성 일대였다.
▲ 맹문은 대홍수의 원인, 포판은 순의 도읍, 평양은 요의 도읍 [사진=필자 제공]
‘태백일사 번한세가’에 “단군왕검은 요임금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단군)은 마침내 순임금에게 명해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해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唐)을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 미치니 단군왕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해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해 도산(塗山)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하우를 파견해 조선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리게 됐다. (생략)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동순해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東后)를 찾아뵙다’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중국에서는 요순시대가 태평성세였으며 요임금이 왕위를 아들에게 승계시키지 않고 순임금의 인간됨에 반해 선위했다고 하지만 요임금이 조선에게 굴복해 순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이다. 즉 단군왕검의 신하였던 순이 중국 총독이 됐던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요임금의 도읍은 산서남부 평양(平陽·임분)이고 그러한 순임금의 도읍이 산서성 서남부 포판(蒲板)이었으니 조선은 거기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곳에 위치해야 할 것이다. 종래의 이론대로 만약 아사달이 만주에 있었더라면 순임금이 동이사람이라는 맹자의 말까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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