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순(堯舜)시대가 태평성대였다는 것은 허구
중국 시조 헌원은 배달족에서 갈라져 나온 부류
훤원의 후손 요가 반란 일으킨 후 당나라 세워
성헌식 필진페이지 +입력 2022-07-19 09:05:4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중국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 헌원의 조상도 본시 배달(倍達)족이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웅씨(熊氏)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少典)의 별고(別孤)에 공손(公孫)이라는 자가 헌구(軒丘)로 유배되었는데, 그의 후손들이 헌원의 무리였다”고 한다. 즉 헌원은 배달족의 본가지가 아니라 곁가지에서 나온 부류였다.그에 대한 출생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소전의 큰 부인을 여등(女登), 후처를 부보(附寶)라고 했다. 하루는 부보가 교외로 놀러 나갔다가 갑자기 폭우를 만나 큰 번갯불이 오랫동안 온몸을 뒤덮고 휘감고는 북두칠성으로 돌아갔다. 부보가 잉태한 지 25개월 만에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운이라 했다. 소전이 부보를 미희(美姬)라고 불렀기에 헌원이 커서 희성을 가져 희운(姬云)이라 불렸다고 한다.
웅녀군의 또 다른 후손에 여(黎)라는 자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壇墟)에 책봉되어 왕검(王儉)이 되자 그에게 귀속하는 왕검들이 많아져 영토를 차츰 크게 넓혀갔다. 왕검은 속어로 대감(大監)이라고 했다는데 아마도 배달족들이 살던 특정 지역을 다스리던 제후를 칭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460년이 지난 갑진년(B.C. 2357)에 웅씨 왕은 14세 되는 ‘신인(神人) 왕검’을 비왕(裨王)으로 삼아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시켰다. 웅씨 왕이 전쟁터에서 돌아가셔서 섭정 24년 만에 왕검이 왕위를 대신했고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에 이르자 온 나라 사람들이 천제(天帝)의 아들로 받들어 모시니 구환(九桓)을 통일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이가 바로 단군(檀君) 왕검이다.
▲ 김산호 화백이 그린 단군 왕검 영정. [필자제공]
역년 1565년에 18분 환웅에 의해 다스려졌던 배달국이 소멸되고 단군이 다스리는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장면인데, 웅씨의 왕을 전사시킨 상대는 누구였는지 또 무슨 일 때문에 그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전쟁이 배달국의 소멸과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 때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 제17장에 “요(堯)가 관문을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는데,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비웠기에 요가 그 기회를 이용해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으로 흩어졌으며, 요가 9주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符都)와 대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 부도지의 내용은 한마디로 헌원의 후손인 요가 반란을 일으켜 묘예들을 내쫓고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요가 일으킨 정변과 웅씨 왕의 전사는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웅씨 왕이 배달국의 환웅이 아니라 일부를 다스리던 제후였으므로 그의 전사가 배달국의 소멸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요가 반란을 일으킨 후 당나라를 세웠다는 의미는 그 이전에는 화화족의 나라가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유웅국(하남성 신정시)의 황제 헌원이 치우에게 패해 항복하고는 머나먼 섬서성 중부 황룡 땅으로 유배 보내졌다는 기록이 사실로 여겨지며, 이후 하화족들은 요가 나라를 세울 때까지 배달족에게 예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요임금의 당나라와 백성들로부터 추대된 단군의 조선은 서로 대치하게 되었고, 단군은 요임금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부도의 땅을 되찾고자 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요의 덕이 날로 쇠퇴해지자 천왕(天王=단군)이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요임금의 당(唐)나라를 치도록 명하니 힘이 딸린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단군세기>에 “갑술 67년(B.C 2267) 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파견해 도산(塗山)에서 우사공(=순)과 만나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고 나라의 경계를 정하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가 우리에게 속했으며, 회대(淮岱) 지방의 제후를 평정해 분조(分朝)를 두고 다스렸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항상 잃어버린 고토 수복을 염원했던 단군 왕검이 신하 순을 보내 수년간의 대홍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민심을 잃은 요임금을 공격해 왕위를 빼앗고 순에게 통치하도록 명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요임금이 태평성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슬하에 아들들이 많았음에도 신하들이 추천한 순을 사위로 삼아 선양(禪讓)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도지> 제18장에 의하면, 요임금이 두 딸로 미인계를 써서 순임금을 유혹했으며,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순이 요를 평양에 가두고 겁박해 왕위를 취했다”와 <한비자 설의>에 “순이 요를 시해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위 <태백일사>와 <단군세기>의 내용이 허구가 아님을 입증해 주고 있다.
▲평양(산서성 임분시)에 조성된 가짜 요능(왼쪽), 산동성 하택시 견성현에 있는 진짜 요능. [필자 제공]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들어가는 순임금을 헌원의 후손인 하화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공빈(孔斌)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었는데 다스림이 탁월해 백왕의 으뜸이었다.(虞舜生於東夷而, 入中國爲天子 至治卓冠百王)”는 기록과 맹자가 <이루장구 하(離婁章句下)>에서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옮겨가고 명조에서 돌아가셨으니 그는 동이 사람이다(舜生於諸馮 移於負荷 卒於鳴條 東夷之人也)”라는 문구가 있어 순임금은 동이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풍은 산서성 남단 원곡현성(垣曲縣城) 동북 40리, 부하는 하남성 동단 복양현 오성향 하구촌(濮阳县五星乡瑕丘村), 명조는 순능이 있는 운성염지 부근이다.
▲요순과 관련된 지명들. 이곳 황하까지가 동이족의 활동무대다. [필자제공]
단군 왕검의 명을 받아 당나라를 정벌한 후 중국 총독이 된 순임금은 요임금의 미인계에 빠져 그의 두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묘족을 정벌하는 등 조선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 이에 2세 부루 단군이 군사를 보내 순임금을 제거하고는 치수에 공이 많은 우사공(禹司空)으로 하여금 그 자리를 잇게 했는데 이가 바로 하(夏)나라의 시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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