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초기 스키타인의 역사 (BC 12c - BC 500)에 이어 중기 스키타인의 역사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연대별로 잘 정리된 History Files 내용을 먼저 살펴 보고, 그 다음에 2021년 위키피디아 자료, 2024년 위키피디아 자료 순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III) Classical Scythian ( BC 500 - BC 300)
1. The History Files Source
1) 500 BC - 400 BC
** fl c.450s? BC : Ariapeithes
Scythian king. m daughter of Teres I of the Odrysae.
(1) mid-400s BC
Ariapeithes' name is highly typical of Indo-Iranians. The first part, 'Aria', is a variation of 'Arya', usually shown as Aria (Latin), Areia (close to the Greek spelling), Haraiva (Persian), or Haraeuua (Avestan). The Areioi tribe of Indo-Iranians bear another variation of the same word. The name Arya appears to be the oldest one known for Indo-Europeans. Ariapeithes himself marries the unnamed daughter of Teres I of the Odrysae but is murdered by Spargapeithes of the Dacian Agathyrsi.
아리아페이테스 이름은 매우 전형적인 인도아리언 이름이다. 처움 부분 Aria는 보통 Aria(라틴), Areia (그리스 철자와 가까움), Haravia(페르시언) 또는 Haraeuua(아베스탄)으로 알려진 Arya의 변형이다. 인도아리언 Areioi부족은 같은 단어를 다른 형태로 간직한다. Arya 이름은 인도유럽인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이다. Ariapeithes 그는 오드리시언 왕국의 Teres I왕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과 결혼했으나, 다키언 Agathyrsi의 Spargapeithes에 의해 살해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스키타인왕의 이름이 아리언이름이라는 언급이다. 스키타인도 아리언이라는 뉴앙스이다. 오드리시언왕국의 공주와 결혼 했다는 것은 발칸반도에 진출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발칸반도에 접한 다키언과 전쟁으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키언(Dacian)은 할슈타트의 켈트인과 다른 그러나 늑대를 표상으로 하는 민족으로, 발칸반도와 다뉴브강 위의 중부 유럽지역에 있었다. 필자는 이들이 낙랑조선이 아닌가 한다. (아래 글 참조)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로마(大秦國)가 동쪽으로 들어와 낙랑(樂浪)을 통과했다는 문구가 있다"(박용숙교수의 '고조선은 지중해에 있었다' 펌글 자료(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고조선) 인용) 하였는데, 필자의 낙랑 위치 추정과 일치한다.
https://lostcorea.tistory.com/1543
https://lostcorea.tistory.com/1547
https://lostcorea.tistory.com/1553
서양학자들은 이 다키언이 카스피해 위의 Dahae와 연관(동족)이 있으며, Massagetae와도 연관(동족)이 있다고 한다.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lainfos), 카테고리, Dacia/Getae, Dacian and Dacia, 참조) (아래 자료 글 참조)
There are similarities between the ethnonyms of the Dacians and those of Dahae (Greek Δάσαι Δάοι, Δάαι, Δαι, Δάσαι Dáoi, Dáai, Dai, Dasai; Latin Dahae, Daci), an Indo-European people located east of the Caspian Sea, until the 1st millennium BC. Scholars have suggested that there were links between the two peoples since ancient times.[30][31][32][17] The historian David Gordon White has, moreover, stated that the "Dacians ... appear to be related to the Dahae".[33] (Likewise White and other scholars also believe that the names Dacii and Dahae may also have a shared etymology – see the section following for further details.)
(번역) Dacians과 Dahae (그리스어로 Daoi, Daai, Dai, Dasai, 라틴어 : Dahae, Daci)는 어원상으로 유사하다. Dahae는 BC 1000 - BC 1시기에 카스피해 동쪽에 위치한 인도유럽인이다.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두 부족사이에 관련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역사학자 David Gordon White는 더 나아가, "다키언은 Dahae와 동족이다"라고 말한다.
By the end of the first century AD, all the inhabitants of the lands which now form Romania were known to the Romans as Daci, with the exception of some Celtic and Germanic tribes who infiltrated from the west, and Sarmatian and related people from the east.[14]
(번역) AD 1세기말에, 지금 루마니아를 형성한 땅의 모든 주민들은 로마에게 Daci라 알려졌는데, 일부 켈트족과 서쪽에서 들어온 게르만족과 사르마티언과 동쪽의 천척들을 예외로 하고.
Etymology (어원)
The name Daci, or "Dacians" is a collective ethnonym.[34] Dio Cassius reported that the Dacians themselves used that name, and the Romans so called them, while the Greeks called them Getae.[35][36][37] Opinions on the origins of the name Daci are divided. Some scholars consider it to originate in the Indo-European *dha-k-, with the stem *dhe- "to put, to place", while others think that the name Daci originates in *daca – "knife, dagger" or in a word similar to dáos, meaning "wolf" in the related language of the Phrygians.[38][39]
(번역) Daci 또는 Dacians은 민족이름이다. Dio Cassius는 Dacians은 스스로 이 이름을 사용했고, 로마인들도 그렇게 불렀으며, 그리스인들은 Getae라 불렀다. Daci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떤 학자는 인도유럽어 dha-k, dhe라는 놓다는 의미에서 왓다 하고, 다른 학자는 daca라는 칼, 단검 또는 프리기언언어의 "늑대"를 의미하는 daos란 단어에서 왔다고 한다.
Another hypothesis is that "Getae" and "Daci" are Iranian names of two Iranian-speaking Scythian groups that had been assimilated into the larger Thracian-speaking population of the later "Dacia".[41][42] They might be related to Masagetae and Dahae people who used to live in central Asia in 6th century BC.
(번역) 다른 가정은 "Getae", "Daci"는 나중에 트라키언 언어주민들(후에 Dacia가 됨)에 흡수된 아리언어를 쓰는 스키타인그룹의 아리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BC6세기에 중앙아시아에 살던 마사게태와 Dahae사람들과 동족일 수 있다.
[출처] <펌>Dacians and Dacia -Wikipedia|작성자 CG Park
Dahae도 말위에서 배사법의 활을 쏘는 스키타인으로 추정되었다. (아래 그림 참조) 마사게태도 스키타인의 일종이다. 즉 이들과 인척관계인 다키언도 스키타인의 일종이라 추론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인(사카)의 유럽으로의 서진과 관련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Mounted Archer in Dahae (Brittish Museum) (source : Dahae, Livius)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Dahae/Hyrcania)
** fl c.430s BC : Scyles / Skyles / Scylas
Son. Promoted Greek culture. Executed by his brother.
(2) c.430 - 425 BC
The half Thracian Scyles is chased out of the Scythian kingdom by his own people due to his continuing promotion of Greek culture and traditions. He takes shelter with his relatives in the Odrysian kingdom but is followed by Octamasadas, his Scythian successor and full brother. After a certain amount of warfare between Odrysians and Scythians, Scyles is handed over as part of a prisoner exchange. He is subsequently executed.
반절은 트라키언인 Scyles왕은 그리스 문화와 전통을 계속하여 진흥한 것 때문에 자기 부족에 의해 스키타이 왕국에서 쫓겨났다. 그는 오드리시언 왕국의 그의 친척집에 피난처를 마련했으나, 그의 스키타인 후계자이며 형제인 Octamasadas에 의해 추격되었다. 오드리시언과 스키타인과의 얼마동안의 전쟁이후, Scyles는 전쟁포로 교환의 일부로 넘겨져 처형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 fl c.420s BC : Octamasadas, Brother.
** fl c.420s BC : Oricos, Brother
(3) c.400 BC
The Celts of the La Tène culture arrive in Bohemia and southern Poland, the northern limit of Celtic expansion, although there remains the question of where the Belgae and Venedi are located. This La Tène expansion is led by the Boii tribe which makes Bohemia its home for the next three centuries, but the same expansion also stops the Pomeranian Face-Urn culture from expanding any further south.
보헤미아와 폴란드 남부, 켈트족의 팽창 북쪽 경계인 이 지역에 컬트족의 La Tene 문화가 도착한다. 비록 Belgae와 venedi가 어디인지 의문이 남아 있지만. 이 La Tene문화 확장은 다음 3세기동안 보헤미아를 고향으로 하는 Boii족에 의해 리드된다. 그러나 이러한 팽창은 Pomeranian Face-Urn 문화가 더 이상 남쪽으로 퍼지는 것을 멈추게 한다. (상기 자료 참조)
Western and southern Poland have also been disrupted by Scythian raids, but these suddenly drop off around 400 BC, leaving the Face-Urn culture free to expand instead across the entire Vistula basin and to reach the upper Dniester in Ukraine, thereby bypassing the La Tène Celts.
(source : Scythians, The History Files)
서부와 남부 폴란드는 스키타인의 약탈에 의해 역시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BC 400년경에 스키타인의 공격이 갑자기 줄어 들어, Face-Urn culture가 비스툴라강 유역을 건너 확장하게 되어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강 상류에 달하게 된다. 이로써 La Tene 켈트족을 우회하게 된다. (상기 자료 참조)
2) 350 BC - 250 BC
** 350s? - 339 BC : Ateas / Atheas / Ateia / Ataias
Most powerful' Scythian king. Killed in battle.
(1) 339 BC
Ateas is a Scythian ruler of the fortified settlement of Kamenka. He seems to be viewed as a usurper, someone who has defeated and subjugated the traditional ruling establishment and its three cooperating rulers to unify and command a greater number of Scythians than usual. He may not even be of the traditional ruling class. By the 340s BC he rules the territory between the River Danube and the Maeotian marshes (close to the Sea of Azov near the Crimea) - essentially much of Scythia.
Ateas는 Kamenka의 요새화된 정착지의 스키타인 지배자이다. 그는 정변을 일으킨 자로 보이는데, 전통적인 지배계층을 패배시키고 종속시킨 자로서, 3명의 협력적인 지배자들이 평상시보다 매우 많은 수의 스키타인들을 통합하고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통적인 지배계층의 구성원이 아닐 수 있다. BC 340년대에 그는 다뉴브강에서 마오티언 습지(크리미아 가까운 아조프해에 가깝다)사이의 영토를 지배했다 - 본질적으로 스키타이 대부분지역을 지배했다. (상기 자료 참조)
Kamenka 위치 (자료 : 위키피디아)
Ateas왕의 요새거주지라는 Kamenka에 대해 알아 보았는데, 좀 이상하다. 상기 지도에 나타난 위치는 흑해로부터 상당히 북쪽에 있다.
스키타인의 정복군주 Ateas왕이 있던 곳이라는 Kamenka 지명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는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카자흐스탄에 Kamenka 지명이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사카의 유물이 많이 나온 것을 필자는 "사카에 대한 고찰"이란 글에서 알아 보았다.
Ob강의 지류이름으로도 나타난다. Saint Petersburg 근처 강의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사이 호수의 섬이름에도 나타난다. 모두 서부 시베리아지역이다. 흑해지역의 스키타이가 스칸디나비아반도로 진출하려면 거쳐야 할 지역이다. 즉 스키타이와 관련 있는 지역이라는 필자의 추정이 틀리지 않을 수 있다.
"Kamenka may refer to:
Places
- Kamenka Urban Settlement, a municipal formation which the town of district significance of Kamenka in Kamensky District of Penza Oblast, Russia is incorporated as
- Kamenka, Russia, several inhabited localities in Russia
- Kamenka, an alternative name of the town of Taskala, Kazakhstan
- Camenca, capital of the Administrative Region of Camenca of Transnistria
- Kamianka (disambiguation) (Kamenka), several inhabited localities in Ukraine
Rivers
- Kamenka (Ob), a minor tributary of the Ob in Novosibirsk Oblast
- Kamenka (Saint Petersburg), a river in Lakhta-Olgino Municipal Okrug near Saint Petersburg
- Kamenka (Iset), a tributary of the Iset in Sverdlovsk Oblast, Russia
- Kamenka (Nerl), a tributary of the Nerl in Vladimir Oblast, Russia
Other
- Kamenka (island), an island in Lake Peipus-Pihkva (between Estonia and Russia)
(source : Kamenk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cythian/Saka)
Ob river map (source : universeonweb.com)
그외에도 러시아에는 거의 전국에 걸쳐 Kamenka 지명이 있다. 아무르지역부터, 알타이지역, 카자흐스탄, 러시아 서부, 볼가 우랄지역, 발트해지역, 러시아서부 북극해지역, 등에까지 여러 곳에 산재한 이름이다. (네이버 블로그 자료 참조) 왜 Kamenka란 이름이 이렇게 여러 곳에 있을까? 사카나 스키타인이 있던 지역을 나타낸 말일까? 매우 이상하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예정이다.
Following increasing contact with the Macedonian kingdom to the south of Scythia, Ateas enlists Macedonian troops to help him in a battle against the city of Histria on the coastal shores of Thrace. Histria's king dies suddenly and the Macedonian troops are summarily dismissed upon their arrival. Further petty insults are traded between Ateas and Phillip II of Macedon until the two sides go to war in 339 BC. The battle takes place on the plains of what is now Dobruja, with Ateas being killed in action, his army routed, and his kingdom collapsing.
스키타이 남쪽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접촉이 늘어나면서, Ateas는 트라키아 해안에 있는 Histria도시에 대한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를 협력자로 놓고 있었다. 히스트리아 왕이 갑자기 죽어, 마케도니아군은 도착하자마자 곧 해산됐다. 이후 자그마한 모욕이 Ateas와 마케도니아의 필립 II사이에 오가고 두 진영은 BC 339년 전쟁으로 치달았다. 전쟁은 지금의 도부르자 평원(흑해에 인접한 발칸반도지역)에서 일어 났는데, Ateas는 전쟁중 전사하고,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으며, 그의 왕국은 붕괴했다. (상기 자료 참조)
중부 Dobruja의 평야지대
(2) 250 BC
Germanic settlements have spread only a little farther south-westwards along the North Sea coastline, and eastwards into the heart of modern Poland and northern Germany. One exception to this is the tribe of the Bastarnae. They have already reached the Balkans by this time thanks to which they are often mistaken for being Scythians by Greek and then Roman writers.
(source: Scythians, The History Files)
게르만의 정착은 북해 해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좀더 퍼졌으며, 동쪽으로는 현대의 폴란드의 중심부와 독일 북부에 이른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외가 Bastarnae부족이다. 그들은 이미 이 시기에 발칸반도에 도착했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인이나 로마 작가들에 의해 스키타인으로 자주 오해를 받아서이다. (상기 자료 참조)
2. 2021 Wikipedia source
이러한 스키타인의 유럽으로의 팽창은 연대가 불확실하게 설명되었다. 그런데 지난 2021년 위키피디아자료는 보다 더 연대에 대해 구체적이다. (아래 자료 참조)
<<Golden Age>> (전성시기)
In the aftermath of their defeat of the Persian invasion, Scythian power grew considerably, and they launched campaigns against their Thracian neighbors in the west.[45] In 496 BC, the Scythians launched an great expedition into Thrace, reaching as far as Chersonesos.[5] During this time they negotiated an alliance with the Achaemenid Empire against the Spartan king Cleomenes I. A prominent king of the Scythians in the 5th century BC was Scyles.[42]
페르시아 침략(다리우스 I세에 의한)의 패배이후, 스키타인의 파워는 상당히 커져서 서쪽의 트라키언 이웃에 대해 원정을 시작했다. BC 496년, 스키타인은 트라키아에 대한 대구모 공격을 하여 Chersonesos까지 다달았다. 이 시기에, 그들은 스파르타 왕 Cleomenes I에 대항하여 아케메네스제국과 연합을 협상했다. BC 5세기의 스키타인의 출중한 왕은 Scyles였다. (상기 자료 참조)
The Scythian offensive against the Thracians was checked by the Odrysian kingdom. The border between the Scythians and the Odrysian kingdom was thereafter set at the Danube, and relations between the two dynasties were good, with dynastic marriages frequently occurring.[5] The Scythians also expanded towards the north-west, where they destroyed numerous fortified settlements and probably subjucated numerous settled populations. A similar fate was suffered by the Greek cities of the northwestern Black Sea coast and parts of the Crimea, over which the Scythians established political control.[5] Greek settlements along the Don River also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Scythians.[5]
트라키언에 대한 스키타인의 공격성은 오디리시언 왕국에 의해 점검된다. 스키타인과 오드리시언 왕국의 경계는 다뉴브강으로 되었으며, 자주 생기는 두 왕국사이의 결혼으로, 두나라 사이는 좋았었다. 스키타인은 북서쪽으로 팽창하였으며, 많은 요새화된 정착지를 파괴했으며 여러 정착민들을 복속시켰다. 이 같은 운명은 흑해 북서쪽 해안과 크리미아일부의 그리스 도시들도 겪었으며, 이들은 스키타인의 정치적 통제를 받았다. 돈강주위의 그리스 정착지들도 스키타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A division of responsibility developed, with the Scythians holding the political and military power, the urban population carrying out trade, and the local sedentary population carrying out manual labor.[5] Their territories grew grain, and shipped wheat, flocks, and cheese to Greece. The Scythians apparently obtained much of their wealth from their control over the slave trade from the north to Greece through the Greek Black Sea colonial ports of Olbia, Chersonesos, Cimmerian Bosporus, and Gorgippia.
스키타이에는 맡은 바 분업이 있었는데, 스키타인은 정치적 군사적 힘을 가지고, 도시인들은 무역을 담당하고, 지역에 머물러 사는 이들은 노동을 제공했다. 그들의 영토에서는 곡식을 재배하고, 밀, 가축들, 치즈를 그리스에 실어 날랐다. 스키타인들은 북으로부터 그리스로 노예무역을 통제하며 많은 부를 얻었으며, 이는 흑해의 그리스 식민지 항구, Olbia, Chersonesos, 키메리언 보스포러스 그리고 Gorgippia를 통해서였다. (상기 자료 참조)
When Herodotus wrote his Histories in the 5th century BC, Greeks distinguished Scythia Minor, in present-day Romania and Bulgaria, from a Greater Scythia that extended eastwards for a 20-day ride from the Danube River, across the steppes of today's East Ukraine to the lower Don basin.
헤로도투스가 BC 5세기에 그의 Histories를 쓸 때, 그리스인들은 지금의 루마니아, 불가리아지역에 있던 Scythia Minor를 보다 넓은 스키타이와 구분했다. 이 넓은 스키타이는 다뉴브강으로부터 동쪽으로 20일 말을 타고 가는 거리까지 팽창했는데, 지금의 동우크라이나 초원을 건너 돈강 하류유역까지이다. (상기 자료 참조)
Scythian offensives against the Greek colonies of the northeastern Black Sea coast were largely unsuccessful, as the Greeks united under the leadership of the city of Panticapaeum and put up a vigorous defence. These Greek cities developed into the Bosporan Kingdom. Meanwhile, several Greek colonies formerly under Scythian control began to reassert their independence. It is possible that the Scythians were suffering from internal troubles during this time.[5] By the mid-4th century BC, the Sarmatians, a related Iranian people living to the east of the Scythians, began expanding into Scythian territory.[42]
흑헤 북동쪽 해안의 그리스 식민지에 대한 스키타인의 공격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이 Panticapaeum도시의 리더수비하에 단결하여 잘 방어하였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인 도시들은 보스포러스왕국으로 발전했다. 반면, 형식상 스키타이 지배하에 있던 몇몇 그리스 식민지들은 다시 독립을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스키타인은 이시기에 내부적 문제에 시달렸을 것이다. BC 4세기 중반에, 스키타인의 동쪽에 사는 관련된 아리언 사람들인 사르마티언은 스키타인 영토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상기 자료 참조)
Scythian king Skilurus, relief from Scythian Neapolis, Crimea, 2nd century BC |
The 4th century BC was a flowering of Scythian culture. The Scythian king Ateas managed to unite under his power the Scythian tribes living between the Maeotian marshes and the Danube, while simultaneously enroaching upon the Thracians.[45] He conquered territories along the Danube as far the Sava river and established a trade route from the Black Sea to the Adriatic, which enabled a flourishing of trade in the Scythian kingdom.
BC 4세기에는 스키타이 문화가 꽃을 피웠다. 스키타인왕 Ateas는 마오티언 습지에서 다뉴브강사이에 사는 스키타이 부족들 모두 그의 힘아래 통합하였으며, 동시에 트라키언까지 잠식했다. 그는 다뉴브강가의 Sava강까지 영토를 정복했으며, 흑해로부터 아드리아해까지 무역루트를 확보하여, 스키타인왕국의 무역을 중흥시켰다. (상기 자료 참조)
The westward expansion of Ateas brought him into conflict with Philip II of Macedon (reigned 359 to 336 BC), with whom he had previously been allied,[5] who took military action against the Scythians in 339 BC. Ateas died in battle, and his empire disintegrated.[42] Philip's son, Alexander the Great, continued the conflict with the Scythians. In 331 BC, his general Zopyrion invaded Scythian territory with a force of 30,000 men, but was routed and killed by the Scythians near Olbia.[5][4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August, 2021)
Ateas왕의 서쪽으로의 팽창은 마케도니아의 필립 II왕(359-335 BC 재위)과 부딪히게 되었다. 필립II왕은 전에는 동맹이었으나, BC 339년 스키타인을 공격했다. Ateas는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제국은 분산되었다. 필립의 아들 알섹산더대왕은 스키타인과 계속 분쟁관계였다. BC 331년, 그의 장군 Zopyrion은 3만의 병력으로 스키타인 영토를 침범했으나, Olbia근처에서 스키타인에 의해 괴멸되고 전사했다. (상기 자료 참조)
Pontic Olbia location in Black Sea (source : Wikipedia)
알랙산더 수하 장군이 스키타인에 패배한 곳인 Olbia가 상기 지도에서는 흑해 북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로 표시되었다. Olbia란 지명은 그리스 지명으로 사르디니아섬에도 있다. 따라서 위에서 Pontic Olbia라 하고 있다. 트라키언 governor인 Zopyrion이 3만의 육군병력으로 (바다로 공격했다는 말이 없음) 상당히 멀리 온 느낌이다.
위 2021년 자료에서 스키타이 왕 Ateas가 마케도니아의 필립 II왕과 싸워 지고 전사했다 한다(BC 339). 그래서 스키타이 제국은 분산되었다 한다. 그러나 BC 331년 알렉산더대왕 수하 장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고 한다.
그래서 관련 자료를 살펴 보니, 마캐도니아의 필립II왕은 Ateas왕의 딸과도 결혼했으며, 동맹군이었으나, Histria공격에서 Histria왕이 갑자기 죽어 마케도니아 원군이 해산되니, 감정싸움이 되어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다. (상기 History Files 자료 참조) 필립II왕은 8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부인의 친정국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일도 흔했다. 그리고 Ateas왕의 후계를 꿈꾸기도 했다 한다.
그리고 필립II왕의 Olympia부인의 아들인 알렉산더 대왕이 우여곡절 끝에 마케도니아 왕에 이르러, 항복을 하지 않으면 정복된 곳의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잔학하게 살해하는 징기스칸식의 공포적 전투전략으로 주위를 평정해 나가 결국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상기 BC 331년 전투는 알렉산더가 동방으로 원정갔을 때, 그의 부하 장군 트라키아 governor인 Zopyrion이 스키타인을 공격하다가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스키타인왕 Ateas가 마케도니아 필립II왕에게 평원전투에서 패배한 후 완전히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3. 2024 Wikipedia Source
다시 2024년 위키피디아 자료로 돌아 가면, 스키타인은 중부유럽을 넘어 서부유럽까지 진출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래 글 참조) 그러나 구체적 연대나 자료는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유물로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금속가공기술로 보았을 때 할슈타트문화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언급된다. (더 아래 글 참조)
Attacks by the Scythians were directed at southern Germania, and, from there, until as far as Gaul, and possibly even the Iberian Peninsula; these activities of the Scythians were not unlike those of the Huns and the Avars during the Migration Period and of the Mongols in the mediaeval era, and they were recorded in Etruscan bronze figurines depicting mounted Scythian archers as well as in Scythian influences in Celtic art.[45][63][99] Among the sites in Central Europe attacked by the Scythians was that of Smolenice-Molpír [sk], where Scythian-type arrows were found at this fortified hillfort's access points at the gate and the south-west side of the acropolis[10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스키타인의 공격은 게르마니아 남부로 향했으며, 여기서, Gaul(프랑스지역)지역까지,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다 : 이러한 스키타인의 활동은 Migration 시기의 훈족과 아바르족의 그것과 같으며, 중세의 몽골의 그것과 같다. 스키타인들은 에트루스문명의 청동기 모형(스키타인의 말탄 궁수, 상기 그림 참조)으로 기록되었으며, 켈트 예술에서의 스키타인의 영향에서 알 수 있다. 스키타인의 공격을 받은 중부 유럽의 유적지 중에, Smolenice-Molpir지역(슬로바키아)이 있는데, 스키타인 타입의 화살이 요새화된 언덕 성곽의 입구 접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광장의 남서쪽에서도 발견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중부유럽을 넘어 프랑스지역인 Gaul지역, 심지어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했다는 상기 언급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태리 북부의 에트루스문명에서 스키타이에 관한 유물이 나온다는 것은 확실히 이 지역까지 진출한 것을 말해 준다. 훈족이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선조들의 진출을 반복한 것일 수 있다. 실제 History Files자료에서도 훈족이나 고트족 등이 스키타이 선조들의 정복을 모르고 반복했다고 기록했다. (이글 말미 내용 참조). 광개토태왕은 과거 고조선의 유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고토지역을 회복했다고 했다. 필자는 고트족의 Alaric I왕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으로 추정한다. (아래 글 참조)
https://lostcorea.tistory.com/1394
https://lostcorea.tistory.com/1417
The Scythians attacked, sacked and destroyed many of the wealthy and important Iron Age settlements[101] located to the north and south of the Moravian Gate and belonging to the eastern group of the Hallstatt culture, including that of Smolenice-Molpír [sk],[100] leading to the adoption of the Scythian-type "Animal Style" art and mounted archery by the population of these regions in the subsequent period.[101][102] It was also at this time that the Scythians introduced metalwork types which followed Shang Chinese models into Western Eurasia, where they were adopted by the Hallstatt culture.[90]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스키타인은, Moravian gate의 남쪽과 북쪽에 위치하고, Smolenice-Molpir지역을 포함한 할슈타트문화의 동쪽 그룹에 속하는, 부유하고 중요한 철기시대의 많은 거주지역을 공격하고 포위하고 파괴했다. 이것이 이 지역에서 스키타인 타입의 "동물 양식" 예술과 말타고 활을 쏘는 것이 이후 시기에 이 지역의 사람들에 의해 채택되게 하였다. 또한 이시기에 스키타이의 금속가공 형태가 할슈타트문화에 채택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스키타인이 할슈타트 문화의 동쪽지역까지 진출했다는 내용이다. 위에서 살펴 본 루사티언 문화지역(폴란드지역)까지 진출했다는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더 서쪽으로 진출한 역사에 대해서는 2024년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박용숙교수가 말한 헬펜교수의 자료(스키타인이 남프랑스, 스칸디나비아까지 진출했다 주장)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스키타인이 상나라의 금속가공술을 받아들여 서유라시아로 전파되어 할슈타트문화에 적용되었다는 윗 글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다. 우선 스키타인이 과연 중국 상나라 (여기서는 현재 중공지역의 상나라를 가정한 것으로 판단됨)의 금속가공술을 받아들였는지가 의문이며, 또한 할슈타트문화에 이러한 흔적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중국의 상나라가 프랑스(Gaul)지역에 있었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중공지역의 상나라 금속가공기술이 스키타인을 통해 이전된 것이 아니고,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로부터 전해진 스키타이의 금속가공기술이 할슈타트문화에 전래되었을 수 있다.
As part of the Scythians' expansion into Europe, one section of the Scythian Sindi tribe migrated during the 7th to 6th centuries BC from the region of the Lake Maeotis towards the west, through Transylvania into the eastern Pannonian basin, where they settled alongside the Sigynnae and soon lost contact with the Scythians of the Pontic steppe.[45][99] Another section of the Sindi established themselves on the Taman peninsula, where they formed a ruling class over the indigenous Maeotians, the latter of whom were of native Caucasian origin.[46][96]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스키타인의 유럽으로 팽창의 일부로서, 스키타이 Sindi부족의 일부가 기원전 7-6세기에 Maeotis호수(=Sea of Azov)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트랜실바니아를 거쳐 동쪽 파노니아 유역(항가리지역)에 Sigynnae(Sigunnae, 식구네?, 스키타인의 일종, 아래 자료 참조)와 함께 정착했으며, 곧 흑해위 초원의 스키타인과는 접촉을 끊었다. Sindi의 다른 한 부분은 Taman 반도에 정착했는데, 코카시언 원주민 오리진이었던 Maeotians들 위에 지배층을 형성했다. (상기 자료 참조)
The Sigynnae (Ancient Greek: Σιγύνναι, romanized: Sigunnai; Latin: Sigynnae) were an obscure nomadic[1] people of antiquity belonging to the Scythian cultures[2] who lived in the region corresponding to parts of present-day Hungary.[3]
(source : Sigynnae,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cythian/Saka)
Sigynnae족은 스키타인이 중앙아시아에서 BC 9c 경 서부이동시 파노니아지역에 도착한 스키타인으로서, 스키타인과 모든 문화면에서 거의 동일하다. 단지 별도의 지배계층이 없었다는 것만이 다르다.
1) Early decline
Over the course of the late 6th century BC, the Scythians had progressively lost their territories in the Kuban region to another nomadic Iranic people, the Sauromatians, beginning with the territory to the east of the Laba river, and then the whole Kuban territory. By the end of the 6th century BC, the Scythians had lost their territories in the Kuban Steppe and had been forced to retreat into the Pontic Steppe, except for its westernmost part which included the Taman peninsula, where the Scythian Sindi tribe formed a ruling class over the native Maeotians, due to which this country was named Sindica. By the 5th century BC, Sindica was the only place in the Caucasus where the Scythian culture survived.[96][15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BC 6세기말에 걸쳐, 스키타인은 Kuban지역에서 다른 아리언 유목민 Sauromatians에게 점차 그들의 영토(Laba강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모든 Kuban 영역)를 잃어갔다. BC 6세기말에는 스키타인은 Kuban초원의 모든 영토를 잃고 Pontic 초원으로 후퇴해야 했다. 단 예외적으로 Taman 반도를 포함한 가장 서쪽의 부분은 스키타인 Sindi부족이 원주민 Maotians위에 지배세력을 형성했는데, 그래서 이 나라를 Sindica라 이름지었다. BC 5세기까지, Sindica는 코카서스지역에서 스키타인 문화가 생존한 유일한 장소였다. (상기 자료 참조)
Ancient terracotta vessels unearthed at the Sindian necropolis near Phanagoria. The photograph by Prokudin-Gorskii (c. 1912). (source : Wikipedia)
Sindi warrior statue, Limestone (source : Wikipedia)
Scythian Sindi는 인도사카인의 일부가 아닌가 한다. Sindhis는 Sindhi language를 말하는 파키스탄의 Sindh province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Sindhis에 관한 자료는 필자의 네이버블로그, 카테고리, Scythian/Saka에 있는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어쩌면 Scythian Sindi가 인도사카일 수 있는 Sindhis와 관련성으로 사카와 스키타인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Scythian Sindi가 BC 9세기에 이미 그리스인들에 의해 코카서스지역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니, 기후변화로 파키스탄지역의 사카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 이미 이동한 스키타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도 스키타인이라는 말도 있고 여러 밀접한 관계, 헤로도투스의 스키타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고려할 때, 그리고 메디어제국과 만네아, 키메리언과 스키타인의 밀접한 관련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페르시언인 아케메네스제국이나 파르티언이나 스키타인, 키메리언 모두 아리언이라는 주장도 있는 것을 고려할 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제국은 인도스키타인이나 인도아리언족을 하나로 만든 예가 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II왕은 가장 강력했던 스키타인의 Ateas왕의 후계자가 되고자 했다는데, 이런 필립II왕의 야망은 아들인 알렉산더가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키타인의 Ateas왕은 사카스탄 인도지역에서 중부 유럽까지 이르는 광범한 지역을 다스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전의 Tugdamme 스키타인왕도 King of the Universe라고 불린 것을 보면, Ateas왕과 유사한 제국의 소유자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스키타인이 남프랑스나 스칸디나비아도 진출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상정할 때, 필자가 유럽에 있었다 추정하는 12환국은 남프랑스에서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유럽,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러시아, 인도, 북유라시아까지 이르는 남북 2만리, 동서 5만리의 영역이었는지도 모른다. (환단고기의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는 남북 2만리, 동서 5만리를 후대 사가들이 왜곡시킨 것일 수 있다.)
한편 알렉산더대왕은 왜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았는지 필자는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다. 로마공화국이 서쪽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집단이었는지 의문이 간다. 아니면 키메리언이 유럽으로 가서 강력한 집단이 되어서 엄두를 못냈을까 저윽히 궁금하기도 하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볼 부분이다.
2) Expansion (팽창기)
Scythian Gold Vessel from Crimea, 4th Cent. BC
Scythian golden gorytos, Melitopol kurgan (340-320 BC)
Scythian sword with golden sheath from Tovsta Mohyla kurgan, 4th century BC
After losing their territories in the Kuban Steppe in the late 6th century BC, the Scythians had been forced to fully retreat into the Pontic Steppe, and the Royal Scythians' centre of power within Scythia shifted to the south, in the region of the bend of the Dnipro, where the site of Kamianka became the principal industrial centre of Scythia, with the sedentary population of the city being largely metal-workers who smelted bog iron ores into iron that was made into tools, simple ornaments and weapons for the agricultural population of the Dnipro valley and of other regions of Scythia, and the city itself was the most prominent supplier of iron and bronze products to the nomadic Scythians; the city of Kamianka also became the capital of the Scythian kings, whose headquarters were located in the further fortified acropolis of the city.
BC 6세기말에 Kuban초원의 영토를 잃은 후에, 스키타인은 Pontic초원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왕후 스키타인들은 드네프르강이 굽어지는 남쪽으로 힘의 중심이 이동하고, Kamianka사이트가 스키타이의 주요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의 정착주민들은 대부분 금속 노동자로서 철을 생산하여 기구, 단순한 장식물, 무기 들을 만들어 드네프르 계곡의 농민들과 다른 지역 스키타인에게 주었다. 도시 자체가 유목민 스키타인에게 철과 청동제품의 가장 중요한 공급자였으며, Kamianka는 또한 스키타인 왕의 수도가 되었다. 여기에 지휘부가 더 요새화된 도시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했다. (상기 자료 참조)
Kamianka 위치 (우크라이나) (자료 : 위키피디아)
스키타인의 수도였다는 Kamianka는 상기 지도의 우크라이나 도네프르강가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여러 이름이 거론된다. 폴란드의 지명도 나온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 본 Kamenka 보다는 작은 수의 지명이지만, 역시 여러 지명이 있는 특이한 지명이다. 필자는 Kamianka(BC 6c), Kamenka(BC 350)가 동일한 지역명이라 판단한다. 스키타이와 관련 있는 지명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아래 내용은 스키타인 수도라는 Kamianka 지명에 대한 여러 위치의 내용이다. 폴란드지역에 Kamianka지명이 많은 것이 눈에 띤다. 스키타이는 폴란드지역에 진출했다고 필자는 이미 "스키타이 역사(1) Early Scythians (BC 12 c - BC 500)"에서 살펴 보았다.
Kamianka (Ukrainian: Кам'янка) may refer to:
Ukraine[edit]
Populated places[edit]
Cities[edit]
- Kamianka, Cherkasy Oblast
- Kamianka-Buzka, Lviv Oblast
- Kamianka-Dniprovska, Zaporizhzhia Oblast.
Urban-type settlements[edit]
- Kamianka, Polohy Raion, Zaporizhzhia Oblast
Villages[edit]
- Kamianka, Volnovakha Raion, Donetsk Oblast
- Kamianka, Luhansk Raion, Luhansk Oblast
- Kamianka, Chernivtsi Oblast
- Kamianka, Pluzhne hromada, Khmelnytskyi Oblast
- Kamianka (est. 1596), a former village now in the Amur-Nyzhnodniprovskyi District of Dnipro
Other populated places[edit]
- Kamianka, Horlivka Raion, Donetsk Oblast
- Kamianka, Ivano-Frankivsk Oblast
- Kamianka, Izium Raion, Kharkiv Oblast
- Kamianka, Pokrovsk Raion, Donetsk Oblast
Other[edit]
- Kamianka (Bazavluk), a tributary of the Bazavluk in Dnipropetrovsk Oblast
- Kamianka, a research ship of the State Oceanarium, Armed Forces of Ukraine
- Kamianka, a forest reserve of the Synevyr National Park
Poland[edit]
- Kamianka, Łosice County in Masovian Voivodeship (east-central Poland)
- Kamianka, Ostrołęka County in Masovian Voivodeship (east-central Poland)
- Kamianka, Ostrów Mazowiecka County in Masovian Voivodeship (east-central Poland)
- Kamianka, Sokołów County in Masovian Voivodeship (east-central Poland)
(source : Kamianka,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cythian/Saka)
At the same time, a wave of Sauromatian nomads from the lower Volga steppe in the east immigrated into Scythia over the course of 550 and 500 BC and were absorbed by the Pontic Scythians with whom they mingled. A large number of settlements in the valleys of the steppe rivers were destroyed as a result of these various migr스키탕atory movements.[159][160][161][47][46][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동시에, Sauromatian유목민이 BC 550년에서 500년사이에 동쪽에 있는 볼가 하류 초원에서 스키타이에게 이주하였으며 이들은 Pontic 초원의 스키타인과 흡수 혼합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이주 움직임의 결과로, 초원강들의 계곡에 있는 많은 수의 정착지가 파괴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많은 계곡의 정착지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전쟁터였다는 의미이다. 즉 볼가 하류의 Sauromatian이 무력으로 Pontic초원에 들어 왔다는 의미일 수 있고 또는 BC 513년 다리우스 1세의 침범으로 초토화작전을 편 스키타이 전략으로 파괴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로마티언은 Maeotian 여성과 스키타이 남성의 혼합으로 생겨난 부족이라 했다. 위의 글의 뉴앙스로 보아도 소로마티언과의 전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구학자들은 소로마티언이 스키타인을 서쪽으로 밀어냈다고 많이 말한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The retreat of the Scythians from the Kuban Steppe and the arrival of the Sauromatian immigrants into the Pontic steppe over the course of the late 6th to early 5th centuries BC caused significant material changes in the Scythian culture soon after the Persian campaign, changes which are not attributable to a normal autochthonous evolution. Some of the changes were derived from the Sauromatian culture of the Volga steppe, while others originated among the Kuban Scythians, thus resulting in the sudden appearance within the lower Dnipro region of a fully formed Scythian culture with no local forerunners, and which included a notable increase in the number of Scythian funerary monuments.[96][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BC 6세기말부터 BC 5세기초까지 기간에 Kuban초원에서의 철수와 Pontci 초원으로의 Sauromatians의 이주는 스키타인 문화의 상당한 물질적 변화를 초래했다. 이 변화는 페르시안 원정후에 있었으며, 일상적인 자생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몇몇 변화는 볼가 초원의 Sauromatian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다른 것은 쿠반 스키타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따라서 드네프르강 하류지역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지역의 선구자들의 것이 아니며, 특히 스키타인의 장례 기념물 수가 많이 증가한 것이 눈에 띤다. (상기 자료 참조)
The Scythians underwent tribal unification and political consolidation in reaction to the Persian invasion, and[18] the names of kings who ruled over the Scythians the 5th century BC are known, although it is unknown whether these kings were ruling only the western regions of Scythia located between the Danube and Pontic Olbia or over all the Scythians:[18]
- Ariapeithes
- Scyles, the son of Ariapeithes by a Greek woman from Histria
- Octamasadas, the son of Ariapeithes by the daughter of the Thracian Odrysian king Teres I. Octamasadas deposed Scyles and replaced him on the throne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페르시아 침범(BC 513)에 대한 반작용으로 스키타인은 부족의 통합과 정치체제 강화 움직임이 있었다. BC 5세기의 스키타인 왕들의 이름이 알려졌는데, 이들이 다뉴브강과 Pontic Olbia사이에 위치한 스키타인의 서쪽지역을 지배한 왕인지 전 스키타인을 지배한 왕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Ariapeithes
Scyles , Ariapeithes와 Histria의 그리스여인 사이의 아들
Octamasadas, Ariapeithes와 트라키언 오드리시언왕 TeresI왕 딸의 아들. Octamasadas는 Scyles는 폐하고 왕위를 차지했다. (상기 자료 참조)
The Scythians also became more active and aggressive around this time, possibly as a result of the arrival of the new Sauromatian nomadic elements from the east, or out of necessity to resist Persian expansionism. This change manifested itself through the consolidation of the dominant position of the Royal Scythians over the other tribes within Scythia and through the Royal Scythians' hold on the western part of their realm to the west of the Dnipro, where lived the agriculturist populations, becoming heavier and more oppressive, and the Scythians may also have gained access to the Wallachian and Moldavian plains at this time, although Oltenia and parts of Moldavia were instead occupied by the Agathyrsi.
이시기의 스키타인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는데, 아마도 동쪽으로부터 새로운 소로마티언 유목민 요소가 도달한 결과로서, 또는 페르시아 팽창주의에 저항할 필요에 의해서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스키타이 왕후의 다른 부족에 대한 지배적 위치의 강화로 나타나고, 그들의 왕국 서쪽에 있는 드네프로강 서쪽에 사는 농민들에 대해 스키타인 왕후가 더 무겁고 억압적인 조치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 스키타인은 왈라키언과 몰다비언 평원에 대한 접근을 획득하였을 수 있다. 비록 Oltenia와 몰다비아의 일부는 Agathyrsi에 의해 점령되었지만. (상기 자료 참조)
Another result of the changes within Scythia during this period was increased Scythian expansionism:[18][63][162] one of the target areas of Scythian expansionism was Thrace, where the Scythians seem to have established a permanent presence to the south of the Danube at an early point, with the Greek cities of Kallatis and Dionysupolis in the area corresponding to the present-day Dobruja both being surrounded by Scythian territory; and, in 496 or 495 BC, the Scythians raided the Thracian territories far to the south of the Danube till the Thracian Chersonese on the Hellespont, as an attempt to secure themselves from Persian encroachment.[47][63][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이 시기의 스키타이 내의 또 하나의 변화는 스키타이의 증가된 팽창주의이다. 스키타인의 팽창주의 타깃 지역의 하나가 트라키아이다. 스키타인은 다뉴브강 남쪽에 일찍부터 진출했었다. 현재의 도브루자에 해당하는 지역의 그리스 도시 kallatis, Dionysupolis는 모두 스키타인 영토에 포위되었었다. BC 496-495년에, 스키타이는 트라키언 영토, 다뉴브강 남부의 트라키언 Chersonese (Hellespont)까지 약탈했는데, 이는 페르시아 잠식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상기 자료 참조)
The emergence of the Thracian Odrysian kingdom during the 5th century BC soon blocked the Scythian advances in Thrace, and the Scythians established friendly contacts with the Odrysians, with the Danube river being set as the common border between the two kingdoms, and a daughter of the Odrysian founder king Tērēs I marrying the Scythian king Ariapeithes; these friendly relations also saw the Scythians and Thracians adopting aspects of each other's art and lifestyles.[47][63][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BC 5세기에 트라키언 오드리시언 왕국의 출현은 트라키아 지역에 대한 스키타인의 진출을 막았다. 스키타인은 오드리시언과 우호적으로 지냈고, 다뉴브강이 두 왕국의 공통 국경이 되었으며, 오드리시언 왕국의 창시자 Teres I왕의 공주가 스키타이왕 Ariapeithes와 결혼함으로써, 스키타인과 트라키언은 서로 상대방의 예술과 생활방식을 받아 들였다. (상기 자료 참조)
However, at some point in the 5th century BC, the Agathyrsian king Spargapeithes treacherously killed the Scythian king Ariapeithes.[155][163]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그러나, BC 5세기 어느 시점에, Agathyrsian 왕 Spargapeithes는 속임수를 써서 스키타인왕 Ariapeithes을 죽였다. (상기 자료 참조)
Scythian comb from Solokha, early 4th century BC
In the north and north-west, Scythian expansionism manifested itself through the destruction of the fortified settlements of the forest steppe and the subjugation of its population.[18]
북쪽과 북서쪽에서, 스키타인 팽창주의는 숲-초원의 요새화된 거주지역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복속시킴으로써 나타났다.
흑해위 지역에서 북쪽과 북서쪽은 발트해 지역 방향인데, 이에 대한 설명이 없이 너무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위의 History Files 자료는 폴란드지역에서의 스키타인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였다.
In the south, the Scythians tried to impose their rule over the Greek colonies on the northern shores of the Black Sea: the Greek settlement of Kremnoi [uk] at Taganrog on the lower reaches of the Don river, which was the only Greek colony in that area, had already been destroyed by the Scythians between 550 and 525 BC, and, owing to the Scythians' necessity to continue commerce with the Greeks, was replaced by a Scythian settlement at Yelizavetovskaya [ru] which became the principal trade station between the Greeks and the Scythians in this region.[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남쪽으로, 스키타인은 흑해 북쪽 연안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에 대해 지배하려 했다: 돈강의 하류지역에 있는 Taganrog의 Kremnoi 그리스인 정착지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그리스 식민지인데, BC 550과 BC 525년 사이에 스키타인에 의해 이미 파괴되었었다. 그리스와 무역을 계속하기 위해, 스키타인은 Yelizavetovskaya의 스키타인 정착지로 대체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그리스인와 스키타인과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상기 자료 참조)
Although the relations between the Scythians and the Greek cities of the northern Pontic region had until then been largely peaceful and the cities previously had no defensive walls and possessed unfortified rural settlements in the area, new hostile relations developed between these two parties, and during the 490s BC fortifications were built in many Pontic Greek cities, whose khōrai were abandoned or destroyed, while burials of men killed by Scythian-type arrowheads appeared in their nekropoleis.[18]
Pontic 지역 북쪽의 그리스 도시들과 스키타인의 관계가 이때까만 해도 대체로 평화로왔으며, 도시들은 방어벽이 없이 요새화되지 않은 시골 정착지였는데, 새로운 적대적 관계가 진행됨에 따라, BC 490년대에는 많은 Pontic 그리스 도시에 요새가 지어졌다. 이들의 Khorai(=신에게 봉헌되는 여인 조각물)는 버려졌거나 파괴되었으며, 반면 스키타인 타입의 화살촉에 의해 죽은 남자들의 무덤이 그들의 nekropoleis에 나타났다. (상기 자료 참조)
Between 450 and 400 BC, Kerkinitis was paying tribute to the Scythians.[18] The Scythians were eventually able to successfully impose their rule over the Greek colonies in the north-western Pontic shores and in western Crimea, including Niconium, Tyras, Pontic Olbia, and Kerkinitis,[63][18][97] and the close relations between Pontic Olbia and the Scythian political centre ended at this time.[152]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BC 450 - 400 BC사이에, Kerkintis는 스키타이에게 공물을 지불했다. 스키타인은 결국 성공적으로 그리스 식민지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할 수 있었는데, Niconium, Tyras, Pontic Olbia, Kerkintis 등을 포함한 북서쪽의 Pontic 해안과 크리미아 서쪽에 대한 지역이었다. (상기 자료 참조)
The hold of the Scythians over the western part of the Pontic region thus became firmer during the 5th century BC, with the Scythian king Scyles having a residence in the Greek city of Pontic Olbia which he would visit each year, while the city itself experienced a significant influx of Scythian inhabitants during this period, and the presence of coins of Scyles issued at Niconium in the Dnister valley attesting of his control over this latter city.
Pontic서부지역에 대한 스키타인의 지배는 BC 5세기에 더 강해졌다. 스키타이 왕 Scyles는 Pontic Olbia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매년 방문했는데, 이 시기에 상당한 스키타인 주민들의 유입이 있었다. 이는 드니스터 계곡에의 Niconium에서 Scyles가 발행한 동전이 나타난 것이 이 도시에 대한 그의 지배를 말해준다. (상기 자료 참조)
This, in turn, allowed the Scythians to participate in indirect relations with the city of Athens in Greece proper, which had established contacts in Crimea.[63][18] The destruction of the Greek cities' khōrai and rural settlements however also meant that they lost their grain-producing hinterlands, with the result being that the Scythians instituted an economic policy under their control whereby the sedentary peoples of the forest steppe to their north became the primary producers of grain, which was then transported through the Southern Buh and Dnipro rivers to the Greek cities to their south such as Tyras, Niconium and Pontic Olbia, from where the cities exported it to mainland Greece at a profit for themselves.[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이는 역으로, 스키타인이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도시와 간접적 관계에 참여하게 했다. 아테네는 크리미아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리스 도시 Khorai와 시골 정착지의 파괴는 이들이 곡물을 생산하는 내륙지역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스키타인의 경제정책으로, 그들의 북쪽의 숲-초원의 정착농민들이 곡물을 생산하게 되고, 이는 남부 Buh강과 드네프르강을 통해 남부 Tyras, Niconium, Pontic Olbia 등에 이 곡물을 수송하게 되고, 이들 도시는 다시 그리스 본토에 이윤을 남기고 수출하였다. (상기 자료 참조)
Scythians on a gold pectoral from Tovsta Mohyla kurgan
The Scythians were less successful at conquering the Greek cities in the region of the Cimmerian Bosporus, where, although they were initially able to take over Nymphaeum, the other cities built or strengthened city walls, banded together into an alliance under the leadership of Panticapaeum, and successfully defended themselves, after which they united into the Bosporan Kingdom.[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스키타인은 키메리언 보스포러스지역의 그리스인 도시들을 정복하는데 덜 성공적이었다. 스키타인은 Nymphaeum을 취할 수 있었으나, 다른 도시들은 도시 성벽을 세우거나 강화하고, Panticapaeum 리드하에 서로 연대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보스포러스 왕국을 세웠다. (상기 자료 참조)
우리는 위에서 스키타인이 Panticapaeum을 파괴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이러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도시였기 때문이 아닌가 판단된다.
At the same time, the Scythians sent a diplomatic mission to Sparta in Greece proper with the goal of establishing a military alliance against the Achaemenid Empire. Ancient Greek authors claim that the Spartans started drinking undiluted wine, which they called the "Scythian fashion" of drinking wine because of these contacts.[164]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동시에 스키타인은 그리스 본토의 스파르타에 외교사절을 보내 아케메네스제국에 대항하는 군사적 동맹을 목표로 하였다. 고대 그리스 학자는 스파르타가 희석되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들은 이러한 포도주 마시는 것을 스키타인 스타일이라 불렀는데, 이러한 접촉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상기 자료 참조)
필자는 스파르타가 스키타인이라는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이제 이해가 가며, 스파르타가, 해전에 강한 아테네와 달리, 유목민처럼 지상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며, 그 특성을 보이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스파르타는 스키타이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After Scyles, coins minted in Pontic Olbia were minted in the name of Eminakos, who was either a governor of the city for Scyles's brother and successor, Octamasadas, or a successor of Octamasadas. Around the same time, there were inner conflicts within the Scythian kingdom, and a new wave of Sauromatian immigrants arrived into Scythia around c. 400 BC, which destabilised it and ended Scythian military activity against the Greek cities of the Pontic shore.
Scyles왕이후, Pontic Olbia에서의 동전은 Eminakos이름으로 발행되었는데, Eminakos는 Scyles의 동생이며 후대왕인 Octamasadas나 Octamasadas의 후계자가 지명한 도시 governor였다. 이 시기쯤에, 스키타인 왕국에 내부 혼란이 있어, BC 400년경 Sauromatian 이주흐름이 스키타이로 유입되는데, 이것이 스키타인왕국을 불안정하게 하고, Pontic 해안에 있는 그리스인 도시들에 대한 스키타인의 군사적 활동을 끝나게 한다. (상기 자료 참조)
Scythian control of the Greek cities ended sometime between 425 and 400 BC, and the cities started reconstituting their khōrai, and Pontic Olbia regained control over the territory it occupied during the Archaic period and expanded it, while Tyras and Niconium also restored their hinterlands. The Scythians lost control of Nymphaeum, which became part of the Bosporan Kingdom that had itself been expanding its territories within the Asian side of the Cimmerian Bosporus.
그리스인 도시들에 대한 스키타인의 지배는 BC 425 - 400 BC사이에 끝나게 된다. 이 도시들은 Khorai들을 다시 세우게 되고, Pontic Olbia는 Archaic 시기에 점령했던 지역의 통제를 회복하였다. 반면 Tyras와 Niconium은 그들의 내륙지역을 회복했다. 스키타인은 Nymphaeum의 통제를 잃어 버리고, 보스포러스앙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들은 키메리언 보스포러스의 아시아쪽에 있는 영토까지 확장하였다. (상기 자료 참조)
With the arrival of a new wave of Sauromatian immigrants, the Royal Scythians and their allied tribes moved to the western parts of Scythia and expanded into the areas to the south of the Danube corresponding to modern Bessarabia and Bulgaria, and they established themselves in the Dobruja region. One of the Scythian kings who ruled during the later 5th century BC was buried in a sumptuously furnished kurgan located at Agighiol during the early 4th century BC.[18][165]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Sauromatian 이주흐름의 도착으로, 스키타이 왕후와 그들의 동맹 부족들은 스키타이 서쪽으로 이동했고, 현재의 Bessarabia와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다뉴브강 남쪽지역으로 확장하여, 도브루자지역에 정착했다. BC 5세기 말기의 스키타인 왕중의 한 사람은 BC 4세기초에 Agighiol에 위치한 무덤에 화려한 장식과 함께 묻혔다. (상기 자료 참조)
Agighiol에 대한 자료를 위키피디아에서는 일부러 피하는 모습이다. 라틴어로 된 설명만 있다. 필자에게는 Agighiol이 아기골로 읽혀진다. 그 옆에 있는 Sarighiol(아래 자료 참조)은 사리골로 읽혀진다. Dacian, Getae지역이라 하는데, 스키타인의 왕 한사람이 이곳에 묻혔다 한다. 은으로 된 Helmet(Helmet of Agighiol)이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Valea Nucarilor is a commune in Tulcea County, Northern Dobruja, Romania. It is composed of three villages: Agighiol, Iazurile (formerly Calica) and Valea Nucarilor (formerly Sarighiol de Vale and Ion Gheorghe Duca)." (Agighiol에 대한 위키피디아 설명)
Agighiol location map (source : Wikipedia)
Silver Helmet of Agighiol (BC 4c) (source : Wikipedia)
한국어 '골'(골짜기)에 해당하는 튀르어계통의 'Gol'은 보통 호수(lake)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기골, 사리골에서 호수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Valley(골짜기)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Sauromatian의 이주에 따라 스키타인의 Valley정착지가 많이 파괴되었다는 글을 위에서 많이 보아 왔다. 필자는 외국의 사례에서 Gol(골)을 Valley(골짜기)로 해석되는 경우를 처음 본다. 그만큼 스키타이어와 한국어의 밀접성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3) Golden Age
The Scythian kingdom in the Pontic steppe at its maximum extent
아래 자료는 스키타인이 그리스와 무역에 의해 큰 부를 쌓았다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정착농민이 되어 곡식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BC 5세기에서 BC 4세기까지 드네프르강 하류 그리고 Dnister강 어귀에 머물렀다 한다. 스키타인들은 곡물, 모피, 생선, 노예 등을 그리스인들에게 팔고, 그리스인들은 와인,올리브오일, 사치품등을 스키타인에게 팔았다 한다. (아래 자료 참조)
The Scythian kingdom of the Pontic steppe reached its peak in the 4th century BC, at the same time when the Greek cities of the coast were prospering, and the relations between the two were mostly peaceful; some Scythians had already started becoming sedentary farmers and building fortified and unfortified settlements around the lower reaches of the Dnipro river since the late 5th century BC, and this process intensified throughout the 4th century BC, with the nomadic Scythians settling in multiple villages in the left bank of the Dnister estuary and in small settlements on the lower banks of the Dnipro and of the small steppe rivers which were favourable for agriculture; at the same time, the Scythians sold furs, fish, and grain to the Greeks in exchange of wine, olive oil, and luxury goods,[166] while there was high demand for the Scythians' exports done through the Greek colonies, such as trade goods, grain, slaves, and fish,[166][167] due to which the relations between the Pontic and Aegean regions, and most especially with Athens, were thriving; the importation of Greek products by the forest steppe peoples had instead decreased since the 5th century BC, and the Scythians captured territories from them in the area around what is presently Boryspil during this time.[47]
Although the Greek cities of the coast extended their territories considerably, this did not infringe on the Scythians, who still possessed abundant pastures and whose settlements were still thriving, with archaeological evidence suggesting that the population of Crimea, most of whom were Scythians, during this time increased by 600%.[63][18]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크리미아의 주민 대부분은 스키타인이었으며, 이 시기에 600%가 증가했다고 한다.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보스포러스왕국도 스키타인과 잘 지냈으며, 왕족이 스키타인과 결혼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The rule of the Spartocid dynasty in the Bosporan Kingdom was also favourable for the Scythians under the rules of Leukon I, Spartocus II and Paerisades I, with Leucon employing Scythians in his army, and the Bosporan nobility had contacts with the Scythians, which might have included matrimonial relations between Scythian and Bosporan royalty.[63][18]
BC 4세기에는 보스포러스왕국이 그리스의 곡물 주요 공급자였다 한다. 스키타인은 중개자역할도 하고, 직접 곡물을 더 생산하려 정착하기도 했다 이는특히 크리미아 동쪽, 보스포러스 도시들과 인접한 지역에서 더욱 그랬다. (하기 자료 참조)
By the 4th century BC, the Bosporan kingdom became the main supplier of grains to Greece partly because of the Peloponnesian War that ragied in the latter region, which intensified the grains trade between the Scythians and the Greeks, with the Scythians becoming the principal middlemen in the supply of grains to the Bosporan kingdom: while most of the grains that the Scythians sold to the Greeks was produced by the agricultural populations in the northern forest steppe, the Scythians themselves were also trying to produce more grains within Scythia itself, which was a driving force behind the sedentarisation of many of the hitherto nomadic Scythians; the process of Scythian sedentarisation thus was most intense in the regions adjacent to the Bosporan cities in eastern Crimea.[47]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Scythian vessel from Voronezh, 4th century BC. Hermitage Museum.
스키타인의 왕족과 귀족은 양곡 무역에서 엄청난 이익을 취했으며, 이로 인해 스키타인 문화가 번성하였고, 대부분의 알려진 기념물이 이때부터이며, 또한 급속도로 헬레니즘화 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Scythian royalty and aristocracy obtained enormous profits from this grains trade, and this period saw Scythian culture not only thriving, with most known Scythian monuments dating from then, but also rapidly undergoing significant Hellenisation.
Kamianka도시는 BC 4세기부터 BC 3세기초까지 스키타인의 정치적, 산업적, 상업적 수도가 되었다. 이 시기에 스키타인은, 돈강 하류, 마에오티스 호수(Sea of Azov) 북쪽에, Velizavetovskaya라는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했고, 이곳은 행정적, 상업적, 산업적 중심지가 되었고, 지역 스키타이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city of the Kamianka site remained the political, industrial and commercial capital of Scythian during the 4th and early 3rd centuries BC, during which time the Scythians founded a new settlement at Yelizavetovskaya [ru] which functioned as the main administrative, commercial and industrial centre of the lower Don river and northern Lake Maeotis areas and was also the residence of local Scythian lords.
이 시기의 스키타인의 주요 매장지는 드네프르강 하류의 Nikopol, Zaporizhia 지역인데, 여기서 Solokha, Chortomlyk, Kransnokutsk, Oleksandropil Kurgans 등이 위치했다. Chortomlyk mohyla 같은 부유한 봉분은 BC 4세기에 스키타인 귀족들이 곡물 무역에서 얻은 부를 보여주는데, 관계된 이들(순장), 사용하던 물건들, 그리스에서 제조한 금속세공품, 보석 등을 포함한 금제품, 은제품 등의 매장품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 스키타인들은 이러한 무역에서 소득이 없었으며, 사치품도 그들의 매장지에서 볼 수 없었다. (아래 자료 참조)
The main burial centre of the Scythians during this period was located in the Nikopol and Zaporizhzhia region on the lower Dnipro, where were located the Solokha, Chortomlyk, Krasnokutsk and Oleksandropil [uk] kurgans. Rich burials, such as, for example, the Chortomlyk mohyla [uk], attest of the wealth acquired from the grains trade by the Scythian aristocracy of the 4th century BC, who were progressively buried with more, relatives, retainers, and grave goods such as gold and silver objects, including Greek-manufactured toreutics and jewellery; the Scythian commoners however did not obtain any revenue from this trade, and luxury items are absent from their burials.
동쪽의 조그만 독립된 사르마티언 그룹으로부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일반적이지 않게 평화로웠으며, Pontic 초원에서의 스키타인의 헤게모니는 굳건했다. (아래 자료 참조)
Despite the pressure of some smaller and isolated Sarmatian groups in the east, the period remained largely and unusually peaceful and the Scythian hegemony in the Pontic steppe remained undisturbed, with the Scythian nomads continuing to form the bulk of the northern Pontic region's population.[47][63][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BC 4세기의 가장 유명한 스키타이왕은 Ateas인데, Ateas는 약 BC 360년경부터 지배한, Agighiol에 묻힌 스키타이왕의 아들이며 계승자였다.
The most famous Scythian king of the 4th century BC was Ateas, who was the successor and possibly the son of the Scythian king buried at Agighiol, and whose rule started around the 360s BC.
이러한 위의 설명은 History Files의 자료(반란자로 설명)와 다른 내용이다. 이 당시의 발칸 Agighiol 지역의 왕(Minor Scythia)이 Pontic 초원의 왕들 계열과 달랐는지도 모른다.
By this period, Scythian tribes had already settled permanently on the lands to the south of the Danube, where the people of Ateas lived with their families and their livestock, and possibly in Ludogorie as well, and at this time both Crimea and the Dobruja region started being called "Little Scythia" (Ancient Greek: Μικρα Σκυθια; Latin: Scythia Minor).
이 시기에, 스키타인 부족들은 이미 다뉴브강 남쪽땅에 영구히 정착하여, Ateas 부족이 그들의 가족과 가축들과 함께 살았으며, (뤼도고리(불가리아)지역 포함), 그리고 이시기에 크리미아와 도브루자지역은 "Little Scythia"라 불리웠다. (상기 자료 참조)
Athough Ateas had united the Scythian tribes under his rule into a rudimentary state and he still ruled over the traditional territories of the Scythian kingdom of the Pontic steppe until at least Crimea, around 350 BC he had also permanently seized some of the lands on the right bank of the Danube from the Thracian Getae, and it appears that he was largely based in the region to the south of the Danube.
비록 Ateas가 스키타이 부족들을 통일하고 기본적인 상태로 다스렸다 해도, 그는 Pontic 초원과 크리미아까지의 스키타인왕국의 전통적인 영토도 지배하였고, 마침내 BC 350년에는 트라키언 Getae로부터 다뉴브강 오른쪽 bank (남쪽)의 일부 땅을 영구히 확보했다. 그는 다뉴브강 남쪽지역에서 주로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상기 자료 참조)
Under Ateas, the Greek cities to the south of the Danube had also come under Scythian hegemony, including Kallatis, over which he held control and where he probably issued his coins; further attesting of the power that the Scythians held to the south of the Danube in his time, Ateas's main activities which were centred in Thrace and south-west Scythia, such as his wars against the Thracian Triballi and the Dacian Histriani and his threat of conquest against Byzantium, which might be another possible location for where Ateas minted his coins.
Ateas하에서, 다뉴브강 남쪽의 그리스 도시들은 Kallatis를 포함하여, 스키타인의 패권하에 있었으며, 이 지역에 그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전을 발행하였다. Ateas의 주요 활동은 트라키아와 스키타이의 남서쪽에 있었다. 예를 들어, 트라키언 Triballi과 다키언 Histriani에 대한 전쟁, 그리고 비잔티움에 대한 정복 위협 등이다. 비잔티움에서 Ateas는 동전을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상기 자료 참조)
Ateas initially allied with Philip II of Macedonia, but eventually this alliance fell apart and war broke out between Scythia and Macedonia over the course of 340 to 339 BC, ending with the death of Ateas, at about 90 years old, and the capture of the Scythians' camp and the 20,000 women and children and more than 2,000 pedigree horses living there.[165][47][63][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Ateas는 애초에 마케도니아의 필립 II와 연합했는데, 결국 연합은 깨져 BC 340, 339년에 스키타이와 마케도니아는 전쟁을 했다. 90살 먹은 Ateas의 죽음으로 전쟁은 끝났으며, 스키타이 캠프의 함락으로, 거기 사는 2만명의 여인과 어린이, 그리고 2천마리이상의 말들이 잡혔다. (상기 자료 참조)
The Scythians appear to have lost some territories on both sides of the Danube due to Ateas's defeat and death, with the Getae moving to the north across the Danube and settling in the lands between the Dnipro and the Prut rivers, although.
Ateas의 죽음과 패배로, 스키타인은 다뉴브강 양쪽의 영토를 잃은 것같다. 다뉴브강 건너 북쪽으로 Getae가 이동하여 드네프르강과 Prut강 사이의 땅에 정착하였다. (상기 자료 참조)
These changes did not affect Scythian power: the Scythians still continued to nomadise and bury their dead in rich kurgans in the areas to the north-west of the Black Sea between the Dnipro and the Prut; the Scythian capital of the Kamianka site continued to exist as prosperously and extensively as it had before the defeat of Ateas; and the Scythian aristocracy continued burying their dead in barrow tombs which were as sumptuous as those of Ateas's time.
이러한 변화는 스키타인의 power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스키타인은 드네프르강과 Prut강 사이의 흑해 북서쪽지역에서 계속 호화로운 봉분에 시신을 묻었으며, 스키타인의 수도 Kamianka는 Ateas죽음이전처럼 계속 번창하였으며, 스키타인 귀족들은 Ateas시기와 마찬가지로 게속하여 호화로운 봉분에 시신들을 묻었다. (상기 자료 참조)
이러한 내용은, History Files의 내용에서 Ateas 죽음이후 왕국이 붕괴했다는 내용과 다르다. 필자는 이 내용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후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Britannica자료도 이를 옹호하고 있다. (아래 자료 참조)
In 339 the ruler Ateas was killed at age 90 while fighting Philip II of Macedonia. The community was eventually destroyed in the 2nd century BCE, Palakus being the last sovereign whose name is preserved in history.
[출처] <펌>Scythian - Britannica|작성자 CG Park
In 331 or 330 BC, the Scythians were able to defeat an invasion force of 30,000 men led against them and the Getae by Alexander III's lieutenant Zopyrion and which had managed to attain and besiege Pontic Olbia, with Zopyrion himself getting killed. [63][47][18]
(source : Scythians, Wikipedia, February 2024,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lainfos), 카테고리, Sacythian/Saka)
BC 331, 또는 330년에, 스키타인은 알렉산더 III의 부하 Zopyrion의 3만명과 Getae의 침입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Zopyrion은 어떻게 하여 Pontic Olbia에 도착하여 포위하였으나, 패배하고, Zoprion은 전사했다. (상기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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