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지방, 보수-진보 전면전 양상
무상보육도 무상급식도 국가의 의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사과해야
복지 논쟁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계속돼온 논란이지만 지금의 양상은 훨씬 심각하다. 전국의 시장과 군수들이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있다. 진보교육감들은 무상보육을, 보수 시ㆍ도지사는 무상급식의 발목을 잡고 있다. 중앙과 지방의 전면전이자 진보와 보수가 벼랑 끝 승부를 벌이는 형국이다. 나라 전체가 부글부글 끓다 결국 폭발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김 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방에서 우선 순위를 둬서 해결하라”고 말하고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중앙정부도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모두 지방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휑하니 빈 정부 곳간의 형편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집권세력으로서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정부와 여당은 무상복지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공약인 무상보육보다는 진보진영의 간판인 무상급식을 겨냥하고 있다. “진짜 어려운 학생들은 휴일에 밥을 굶고 있다”며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으로 몰면서 재검토하자는 입장이다. 여권의 주장은 이데올로기적 공세의 성격이 짙다. 공약 파기 논란을 진보진영과의 대립으로 몰아가 돌파하려는 의도가 역력해 보인다.
무상보육이나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으로 보는 인식부터가 잘못됐다. 무상보육은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다. 아이를 낳고 기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은 국가의 성장 동력을 높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저출산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인구와 노동력 감소는 물론 시장규모까지 줄어든다. 나라의 미래가 없다.
무상급식은 자라나는 아이들 건강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헌법 31조에는 의무교육을 무상으로 하도록 규정돼 있다. 무상급식은 책걸상과 같은 의무교육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청와대는 “무상보육은 법적 장치가 마련돼있지만 무상급식은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궤변에 가깝다. 무상보육과 무상급식은 복지나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이자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고유의 의무다.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다.
무상보육과 무상급식을 지키는 데는 당연히 돈이 든다. 돈이 없으면 세금을 더 거두는 방법밖에 없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다수는 복지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며, 복지를 위한 세금을 부담할 용의가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증세를 통한 복지재원 마련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지만 박 대통령은“세금 거둬서 복지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무슨 정책이냐”며 호언장담했다. 증세 없이 나라를 운영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이제 와서 번복할 경우 쏟아질 여론의 비난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약속한 ‘공짜 복지’ 공약은 이미 허구로 판명 났다. 증세의 대안으로 거론했던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탈세를 뿌리뽑겠다는 약속은 실패했다. 설혹 일부를 충당한다 해도 임기 5년간 복지공약 가계부를 통해 제시한 135조원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박 대통령은 잘못된 공약부터 사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재앙은 다가오는데 증세는 없다는 공허한 구두선에만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다. 솔직히 증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바람직한 증세의 방향에 대한 논의를 거쳐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서민에게 부담이 큰 담뱃세나 지방세 인상 같은 ‘꼼수 증세’로 적당히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부자일수록 더 많이 내는 소득세와 법인세 등 직접세를 먼저 올리는 것이 증세의 정도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살리기를 이유로 이런 세금의 부담을 많이 낮춰 놓았다. 그러나 경제가 살아나기는커녕 빈부격차만 심해졌을 뿐이다.
우리나라 1인당 조세부담률은 19%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5%보다 한참 떨어진다. 조세부담률이 1%포인트 높아지면 재원이 12조원 가까이 늘어난다. 그 정도는 우리 경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복지증세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물결이다. 박 대통령은 복지와 증세 문제에서 진솔해야 한다.
논설위원cjlee@hk.co.kr 출처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