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포로 없다더니..베트남 파병 장병이 평양에 나타나
한겨레 입력 2014.12.13 10:30(25) 포로 및 실종자
▶ 박태균
서 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한 국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 직후인 1973년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해도 남베트남은 공산군의 도발행위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베트남 상황을 브리핑하면서, "우리는 각하와 국민 여러분의 지원과 격려로 용감히 싸웠고, 그 결과 한국군 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특히 포로에 대해서는 8년 동안 파월된 한국군의 연인원은 32만여명이었으나 단 한명의 포로도 없었으며, '민간인 2명만이 지난 68년 사이공 외곽지역에서 납치돼 월맹에서 병사했다는 보고를 미국 측으로부터 받았다'고 말했다.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한명의 포로도 없었다고 말한 그날 사이공의 한국대사관은 북베트남 쪽에서 한국군 포로 1명을 송환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국방부는 포로가 아닌 실종자로 처리하기 위해 민간인 복장을 착용하도록 조처를 취했다. 안케 전투에서 베트콩의 포로가 되었다가 3월25일 석방된 맹호사단 2287 부대 소속 유종철 일병이 27일 밤 9시30분 대한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1972년 4월에 포로가 된 뒤 11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는 공항에 나설 때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연락이 안 되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가족들은 공항에 나오지 못했고, 그는 곧장 군병원으로 향했다.(동아일보 1973년 3월28일치) 유종철 일병의 경우 묘지까지 마련되었지만, 그는 '부활'했으며, 사령관의 발표를 일순간에 거짓말로 만들었다.
묘지까지 만든 뒤 '부활'(?)한 유종철 일병
국 방부는 다시 재조사를 벌였고, 그 결과 베트남에서 7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했다. 8년 동안 김인식 대위(태권단 소속, 1971년 7월14일), 유종철 일병, 정준택 하사(1967년 5월7일), 안삼이 상병(청룡3대대, 1969년 7월27일), 이용선 병장(청룡본부중대, 1969년 12월2일), 조준범 중위(100군수사, 1972년 3월29일), 박승렬 병장(맹호1연대, 1965년 11월3일), 안학수 하사(건설지원단, 1967년 3월22일) 등 7명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이들 7명은 모두 비전투 중 근무지를 이탈, 행방불명이 된 자들'이며, 베트콩에 의해 석방된 유종철 일병만이 전투 중에 부상당해 포로가 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국방부는 실종자의 신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승렬' 병장의 경우 외무부 문서에는 '박성렬'로 되어 있고, 이후 증언에는 '박승률'로 되어 있다. 영문 이름을 한글 이름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u'자를 놓고 '승'과 '성', '렬'과 '률'로 멋대로 바꾸었다. 본래 이름인 '박성렬'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오류일 수도 있지만, 소속 군인의 인적 사항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나중에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인수 상병의 경우에는 아예 7명의 행방불명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한국군이 철수하기 전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한국군도 있었다. 박정환 소위였다. 박정환 소위는 파월 기술자 채규장씨와 함께 구정공세 시기(1968년 1월31일) 베트남의 메콩 델타 지역 미토 전투에서 베트콩한테 납치된 뒤 북송되던 중 캄보디아로 탈출했다가, 간첩죄로 캄보디아에서 복역했다. 이들이 납치되어 북송되는 과정은 위의 실종자 중 안학수 하사의 납치 및 북송 과정과 유사했다.
실종자 7명이 실제로 근무지를 이탈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정확한 해명은 없었으며, 포로가 되었는지 여부 역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1972년 파리평화회의 당시 미국 정부는 북베트남과 포로 교환에 대한 협의를 할 때 한국 정부에 한국군 포로 문제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으나, 한국 정부는 포로가 없기 때문에 한국군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실종자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외무부는 억류 포로 중 한국군이나 한국 민간인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조사해야 할 필요성을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에 제기했지만, 대사관의 답변은 간단했고, 그 내용은 1973년 3월27일 국무회의에 보고되었다. "주월한국군 실종자는 전투 중에 발생한 행방불명자가 아니고 모두 자의에 의한 탈영자로서 일부는 북한에서 방송한 사실이 있고, 나머지는 범법도주자이므로 주월사령부는 이들을 포로로 간주하지 않고 있으며, 송환 요청을 제기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견해.(주월대사 보고)"
미국의 자료는 달랐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에는 1966년에 포로가 된 한국군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10여명이었는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한국군 병장 키 155, 한국군 군의관 키 170'이라는 신체 묘사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18명의 포로가 남베트남 전 지역에서 발생했다.(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19회) 2000년 7월30일 방영, "베트남전의 포로, 실종자들") 또 다른 시아이에이 문서에는 한국군 포로 23명이 기재되어 있었으며, 다낭(5명), 푸깟(3명), 닌호아(3명), 호이안(이하 1명), 쭐라이, 빈케, 송까우, 뚜이호아 등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사이공 출장갔다 납치되어
북베트남 거쳐 평양 간 안학수
강제로 대남방송 녹음하다
중국 탈출 기도 실패 뒤 처형
월북자 낙인에 가족까지 고통
포로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주월한국군사령관의 발표는
당일 거짓말로 드러나버렸다
재조사 결과 8년간 실종자 7명
이것조차 믿을 수 없었다
1969 년 8월22일자로 외무부 아주국장이 작성한 문서에도 세 명의 포로가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는 병장 박성렬(임무수행 중 행방불명), 하사 안학수(1966년 9월9일 근무 이탈 중 1967년 3월23일 평양 방송 출연), 대위 박우섭(병력수송 중 헬리콥터와 같이 행방불명) 등 세 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상기 실종자는 포로로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포로로 간주함"이라는 내용이 '비고'로 기록되어 있었다.
1970년 1월22일에는 한국 외무부가 남베트남 정부 외무성으로부터 북베트남에 있는 포로 송환 문제에 대한 협조 공문을 수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같은 해 4월 국제적십자사에서 북베트남의 포로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에도 한국 쪽은 포로 또는 실종자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지 않았으며, 포로에 관한 결의안이 유엔에서 논의될 때에도 한국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포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인 고려가 있었던 것일까?
파리협정 뒤 미군포로 541명 석방
1975 년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된 이후 한국군의 실종자와 포로 문제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은 1975년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시)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함락될 당시 탈출하지 못한 한국 대사관 직원과 민간인들이었다. 최근 제이티비시(JTBC)의 '사이공 1975' 4부작(2014년 7월5일과 12일 방영)에서 이들이 억류되었다가 석방되는 과정, 그리고 탈출하는 과정이 잘 그려졌다.
사회적 무관심에 파묻혔던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실종자와 포로 문제는 포로였다가 생환한 박정환 전 소위에 의해서 1992년 다시 표면에 드러났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박정환씨는 실종자 중 박성렬 병장과 김인수 상병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증언했다. 미국의 재향군인회는 1987년까지 6명의 한국군이 북한에 생존해 있었다고 밝혔다.(경향신문 1992년 2월29일치)
또한 실종자 중 안학수 하사와 박성렬 병장은 북한이 베트콩을 통해 뿌린 전단에 사진이 실려 있다고 밝혔다. 이 전단은 전선의 한국군들을 회유하여 탈영, 입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9년의 외무부 문서에 나오는 안학수 하사의 북한 방송 출연 역시 이러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베트남에서 실종된 한국군이 어떻게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인가? 전말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들 한국군은 작전 중 길을 잃었거나 임무 수행 또는 휴식 중 베트콩에게 붙잡히거나 납치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곧 북베트남으로 이송되었다. 베트콩과 이들을 돕기 위해 내려온 북베트남군의 경우 남베트남 안에서 자신들의 군사기지를 갖고 있지 못한 게릴라 부대였기 때문에 따로 포로수용소를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 베트남에는 한국군뿐만 아니라 남베트남군과 미군, 그리고 해외 참전국(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포로들이 있었다. 남베트남군의 경우 같은 베트남 사람이기 때문에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으로 활동할 것을 강요했을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시기 북한에 있었던 한국군 포로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한국군을 제외한 미군과 기타 참전국 포로들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이들은 국제적십자사의 포로에 관한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 실제로 그렇게 대우를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미군 포로들은 파리협정 직후 541명이 석방되었다. 문제는 한국군이었다. 왜냐하면 북한이 북베트남과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었고, 베트콩과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군사전문가들을 파견해 놓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안학수 하사의 경우 베트콩에 의해서 납치된 뒤 북베트남으로 끌려가 수용되었다가 다시 북한으로 이송된 것이 확실한 사례다. 안 하사는 의무부대 근무자였다. 그는 1966년 9월9일 사이공으로 출장을 갔다가 실종되었다. 그러나 그가 실종된 사실은 상급 부대에 보고되지 않았으며, 동년 10월1일에는 하사 호봉 승급 명령이 있었고, 정상 근무자로 처리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실종 6개월여 뒤인 1967년 3월27일 북한의 대남방송에 출연했다. 안 하사가 실종 뒤 반년이 넘어서 북한 방송에 출연했다는 것은, 박정환 소위의 경우처럼 납치 또는 체포된 뒤 캄보디아에 있는 호찌민 루트를 통해 북베트남으로 끌려가 일정 기간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다시 북한의 심리전 요원에 의해 북쪽으로 압송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
안 하사의 행적은 1969년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자수한 정상환씨의 증언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는 남파되기 전에 평안남도 대동면에 위치한 '의거자 정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베트남에서 포로로 잡혀온 안 하사와 1년여 동안 같은 내무반 생활을 했었다. 박성렬 병장은 다른 내무반에서 생활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한국군 장교 1명이 평양 초대소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경향신문 1992년 5월12일치) 정상환씨는 안 하사가 사이공에서 납치된 뒤 북베트남으로 강제로 호송되는 과정, 그리고 강제로 대남방송 녹음을 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도 진술했다.
1976년 거문도로 침투했다가 귀순한 북한의 또 다른 남파공작원 김○○씨는 안 하사가 대남방송에 협조를 하지 않다가 많은 고초를 받았다는 진술을 했다. 김씨가 남파 담당 지도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안 하사는 이후 중국을 통해 탈출을 하려다가 붙들려 평양 근교에서 사형당했다고 한다. 김○○의 증언은 후에 납북자심의위원회에서 안 하사를 납북자로 인정하는 데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포로에 대한 다양한 증언이 나오면서 국방부에서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포로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철수한 지 35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것이고, 국방부의 발표에 의하면 박성렬 병장이 실종된 지 4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들 실종자 중에는 전사 처리는 되었지만, 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전사 통보가 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안학수 하사가 바로 그 경우였다. 국방부는 2008년 조사를 통해 내린 첫번째 결론에서 '여러 각도에서 조사를 했는데, 탈영이나 월북의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 여러 정황에 의하면 납북 개연성 혹은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2009년 4월28일에 가서야 통일부 납북자심의위원회에 의해서 안 하사는 납북자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동년 12월1일, 1974년 3월15일 전사했다는 통지서가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철수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안 하사가 실종된 날로부터 43년이 지나서야 가족들은 전사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 하사는 직계 가족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국가유공자로 등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사자 보상금은 만원도 되지 않았다.
사찰대상 된 반공포로들과 닮은꼴
안 학수 하사의 경우 실종된 날짜가 1966년 9월9일이었는데도 1973년 국방부가 발표한 실종일은 1967년 3월22일이었다. 한국 정부는 실종 뒤 북한으로 이송되어 대남방송을 하거나 주월한국군의 탈영을 권고하는 전단지에 사진이 나왔던 한국군에 대해서는 자진 월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 경우 그 가족들은 지난 40년 동안 모진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정상적으로 생활하기 어려웠다. 강제로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북한에 가지 않고 남한에 남았던 반공포로들이 칭찬을 받기는커녕 일생을 정보기관에 의해 사찰 대상이 되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납북자의 동생으로 낙인찍혀 40년 동안 정상적으로 살 수 없었던 안 하사의 동생 안용수씨는 그의 자전적 글(은폐와 진실 1: 베트남전쟁 참전 제50주년 기념도서 자전적 에세이, 실화소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베트남전 전쟁 특수로 약 10억달러라는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이 외화 종잣돈은 베트남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흘린 피 값이었다. 이 외화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이 외화는 우리 경제를 성장하게 한 주춧돌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익(돈)' 때문에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전쟁범죄자들이 있었다. 이 전범자들은 베트남전과 관련된 진실을 은폐했고, 조작까지 했다. 한국에서 '끝나지 않은 베트남전쟁'을 일으킨 주범이었다."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해 주신 안용수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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