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산대첩의 진실...왜선 70여척은 나포(생포)된 숫자만을 이른다.

2014. 12. 21. 09:57조선 (1392-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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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들은...

늘상 역사에 대해... 입만열면 일제가 왜곡했다 침을 튀기면서도...

정작, 중요 부분들에 대해선 일제가 왜곡한 대목들을 뭔 귀중한 사료증거나 되는듯 들이대며 아는척 하는 못된 관습에 물들어 있다.

특히, 나름 공부 좀 했다는 자들이 더 그 짓인 점 참으로 통탄스럽다.

 

상식으로 생각해 보자...

왜정시대에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등을 만들어 조선의 수 많은 사료들을 수거하여 교열하고

필요한건 소각하고 재 편집해 편찬했단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들이 정작 자신들과 가장 밀접한 역사인 임진란역사...

그 중 자신들에게 가장 치욕스런 이순신장군에게 참패당한 기록을 고대로 남겨뒀다 보이는가...?

난중일기는 이순신장군 친필기록이니 정확할 거라고...?

 

난중일기 내용은  크겐 정조대왕시절 활자화 되고...

역시 왜정시대에 또다시 편찬된 점을 보건데...주요 대목에선 일제의 손을 안탓을리 만무하다 하겠다.

그래,친필일기 자체도  잦은 수정과 누락의 흔적이 남은 것이라 난 예상한다.

 

근한 예로...

조선역사서들의 상당 부분에...명량대첩 바로 전날밤 왜군들의 벽파정(울돌목)야습과 조선수군의 승전이 명기됐음에도...

난중일기엔 전혀 거론이 없단 점이다.

 

다시 한 번 상식으로 접근해 보자.

명량대첩 기록들을 보건데...아침부터 치뤄진 명량대첩 초전에 이미 포격과 화공으로 적선 31척이 괴멸됐다 했는데...

저녁때까지 치워진 사생결단의 접전에서...급격히 수세로 몰렸던 왜적들을 추격하며 섬멸하여 명량바다엔 왜선들의 잔해만 가득했고 극히 일부만 도주했다 했는데...300여척(어떤 기록엔 5.6백척)중...아침 초전에 31척 괴멸인데...

그 긴긴 나머지 시간까지 치룬 섬멸전에서 갸오 2척만 파괴해서 왜선을 도합 33척만 파괴했단게 말이 되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중 하나인 한산대첩이야말로...일제의 왜곡을 엄청 탓을 것이란 점을 감안했어야 함에도...

우리 학자란 것들은 늘상 일본기록을 뭔 성경구절 같이 끌어다가 난중일기와 일치한다고 훈계질인 몰골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강단사학과 일제가 떠들어 대는 한산대첩의 기록이 진실이라면...한산대첩은 임란 3대 대첩의 조건에 한참 모자란다.

막강한 거북선도 포함됀 조선수군 80여척으로 왜선 70(59척 격침???)여척을 무찌른 전투가

어찌 패잔병력과 잔여함정 13척 만으로 330척(33척 격파???)을 무찌른 명량의 기적에 상대가 됀단 말인가...?

강단사학으로도...부산포해전의 적선 파괴숫자는 100여척에 이르니...당연 부산포해전이 임란 3대 대첩이어야 정상이지...

어찌 59척만 격파시켰단 한산대첩이 부산포해전을 제치고 임란 3대대첩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임란기록...특히 최소한 왜적들의 대표적이고 치욕적 패배인 한산대첩에 대해선...

우리 사서들 내용에서...일제가 철저하게 그 병력숫자를 왜곡했단 정황일 것이다.

 

객관적 과학적 증거를 대라고...?

 

 

루이스 프로이스"...

임란 당시에 일본에 있던 폴투갈 선교사다.

실상 임진왜란은...폴투갈등의 서구세력이 아세아를 먹기 위하여 왜적들에게 엄청난 수량의 격발식 첨단조총과 홍이포를 지원한 국제전이였으며...

폴투갈등의 서구세력은 기독교 포교란 구실로 일본부터 흡수하고

일본인들을 용병으로 사용해 동양을 먹겠단 장기적인 플랜의 하나로 일본을 지원하고...

그 결정적 작품으로 임진왜란을 부추긴다.

 

프로이스는 천주교도였던 소서행장을 통해 토요토미히데요시를 부추기고...

고로,왜군을 천주의 성스런 용병으로..조선군을 이교도들의 군대로 묘사한 "일본사"대목도 당연한 현상이다.

 

밑에 인용한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의 내용 중 임진왜란 대표적 해전기록을 두고...

어떤 이들은...왜선 300척이 동원됐다 했으니 "명량대첩"이다.

어떤 이들은...조선수군과 왜군들이 치룬 최초의 해전이라니 "옥포해전"이다.

왜장 "와키자카"가 거론되니...한산대첩"이다.

해석들이 분분한데...

 

내가 보기엔 임란의 대표적 전투기록이라니...한산대첩"이 맞다.

처음 치뤄진 해전이란 것은...옥포해전 부터 시작한 당포해전 사천해전등...초기의 해전들은...

각 포구에 분산돼 약탈질이던 왜적들을 조선 수군이 찾아가며 각개격파하던 일종의 토벌전이지...왜군들이 기획한 전면전이 아니다.

그러하기에...프로이스는 조선수군을 조선해적이라 했으며,,,늘상 일본군이 약탈당해 큰 문제거리였기에...

토요토미가 작심하고 본토의 대규모 정예병력을 300여척에 실어 보낸 최초의 해전이라 기록한 것이다.

그 시대적 싯점이 유일하게 한산대첩과 동일하기에...한산대첩을 조선 수군과의 대표적 해전으로 프로이스는 기술한 것이다.

 

그럼, 왜 73척이 아닌 300여척이냐고...?

그걸 왜 나에게 따지나...루이스 프로이스"와 강단사학자들을 대질시켜 따져야지...

 

프로이스의 객관적 기록을 보건데...

왜선 70척은 한산대첩때 조선 수군에 격파됀 왜선의 숫자가 아니라...순전히 나포(생포)됀 숫자만을 이른 것이다.

조선군은 이 왜군들 대부분을 살해(참수?)했다 한다.

프로이스"는 또한 대부분의 왜군들이 격파당해 도주했다 했으니...최소 300척에 가까운 적선이 괴멸됐다 보는게 객관적일 것이다.

본토에서 파견한 정예병력만 300척이였으니...한양에서 내려와 합세한 평수가(平秀家)와 "와키자카"군이 탓을 왜적들의 함선까지 ...

부산포,안골포등등의 왜군지원병력까지 포합하면 5,6백여척에서 천여척에 가깝다고 예상해 본다.

하여지간 프로이스가 일본사에 언급한 숫자표기만 적용해도...

본토에서 보낸 정예함대 300척이 참여한 전투가 한산대첩이란 국제적 대해전였던 것이다.

 

 

한달 전에 영화 "명량"의 근접 백병전은 허구라는 주장은...말이 안됀단 나의 글에...

예상대로 일제의 왜곡사서들을 성경구절같이 옆꾸리에 꿰차신 학자류들이 대들던데...

하는 주장은 이렇다.

 

조선군은 근접전에 약하고 왜군들의 조총사거리에 근접치 않기 위해 거의 다 원거리 포격을 주 전략으로 사용했다 떠드는데...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을 보건데...역시, 헛소리들이 맞다.

 

왜군들은 조선군의 성가신 근접전에 시달려 멀리 외해로 나가 싸우는 전략을 썼으며...

조선해적들은...왜군들을 만나면 약탈할 기쁨에 환호성을 올렸다 기록한다.

예의 근접전에 이르러선 쇳조각이 들어간 화포공격(천자총통에 넣은 쇳조각)과 거대한 화살모냥의 포를 발사해 왜선을 초토화하고...

화약남비 화공으로 시달려...왜군들은 차라리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고 기술했다.

 

특히, 왜선들이 도주하는걸 막기 위해 쇠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을 아래의 왜선에 던져 달아나지 못하게 했단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대부분은 근접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왜선을 향해 아래로 대 놓고 포탄을 퍼 부은 것이고...

특히나 수백개의 쇳조각이 들어간...오늘날의 크레모어 같은 포격으로 왜선을 아주 초토화 시키고...

근접해서 화약남비들 왜선에 던져 화공으로 불태운게 주 전략이지...대부분 원거리포격만 했단 주장은 말이 안된단 증거기록인 것이다.

 

이 공격으로 왜군 함선들이 초토화 됀 연후...

예의 조선수군(조선해적)들의 약탈이 시작돼는 것이니...왜선에 가득한 무기와 화물을 접수하는 과정이고...

특히나 왜군들을 생포해서 참수하는 의식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니...

왜란기록중 적의 머릿수는...죽어서 물에 떠다니는 왜군들을 참수한 숫자가 아닌...

순전히 생포해서 의식을 치루면서 참형을 한 숫자라 보는게 합당하겠다.

 

그래, 이순신은 적의 목을 탐하지 말라...내가 니들의 실력을 봐서 안다"고 경계한 것이다.

이는 불필요하게 적선에 올라 적을 생포해 참수하다간 병력손실이 있단 이순신장군의 경계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기록엔...불태우는 적선의 불을 구집씨고 끄며 약탈품에 욕심을 내는 장수를 문책하는 대목도 보인다.

 

 

정리해 보자...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왜적들의 수송,약탈,보급선이 결정적으로 약탈당하고...육상 수송에서도 조선 의병들에게 약탈당하던 관계로...

왜군들은 군수품과 특히나 식량부족으로 허덕거리게 돼면서...더이상의 북상이 어려웠고...

이를 절감한 토요토미는...본토의 정예병력을 300척의 함선에 실어 보냈음이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으로 증명되는데...

이게 명량대첩이 아님은...

루이스 프로이스는 명량대첩 이전인 1597년 7월에 이미 나가사키에서 죽은 자이니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루이스프로이스"의 기록은...마치 전장을 종군하며 기록하듯 정밀하단 점인데...

기록상으론...프로이스는 임진난 발발당시인 1592년에 홍콩근처로 갔다가 1595년에 나가사키로 돌아왔기에 종군기록은 아니란 주장인데...

 

이교도 정복과 포교가 지대한 임무이자 목표였던 프로이스가...

가장 중요한 임진란때 왜 조선이나 그 근처인 대마도가 아닌 생뚱맞은 홍콩근처로 갔는가란 점에서...

대륙조선 사가들이 주장하는 조선은 원래는 중원대륙에 있었단 주장에 신빙성이 부여됀다 하겠다.

아직은 다소 논란이 있겠으나...원래는 대륙조선 남부의 어느 항구가 홍콩이란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좌우지간...

명량해전이 아닌...임진왜란 초기의 대표적 최초의 전면전격 해전에서...왜군은 70여척이 나포(사로잡힘)되어...

대부분 죽임(참수?)을 당했다고 프로이스는 일본사에 명기했고...대부분의 일본함대가 괴멸돼고 도망치고 할복자살하고 난리였다니...한산대첩에서 박살난 왜적의 함선수는 어림잡아 300여척이란 얘기가 된다.

70여척 나포(생포)를 70여척 괴멸로 왜곡한 일제의 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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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기록 중...임진란 해전부분 기록이다.

그 밑의...녹도만호 정운의 전공을 논한 "백호전서"의 "사실(事實)"이란 기록에도 틀림없이 적선 70여척 노획이라 명기됐다.

일제가 수 많은 조선사 임진란 부분중 요건 빠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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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부딪힌 두번째 난관은 조선군이 궁여지책으로 서로 단결하여서 연합군을 편성,

수많은 배에 승선하여 공격해온 사실이었다.

그들의 배는 견고하고 높았으며 무기,탄약,식량을 가득 싣고 있었다.

그들이 바다를 휘젓고 다니면서 해적질을 하였는데, 

일본 배를 발견하면 곧바로 습격하고 약탈하였다.

조선군은 일본군보다도 해전에 훨씬 익숙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는데

이러한 일본군의 재난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계속 이런 약탈전의 반복)

 

.... 관백의 두 지휘관 곧 가토 도라노스케(가토 요시아키를 일부러 가토 도라노스케라 적음: 실제로 명량해전 참전)와 

아와노쿠니의 영주인 다른 한 사람

(하치스카 이에마사:실제로 명량해전 참전)는 바다에서 조선인이 일본군에게 끼쳤던 막대한 손해를 보고서 가지고 있던

300척의 함대를 조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회전會戰에 필요한 무기,탄약을 (300척 함대에) 적재하고서 유능한 정예병력을 승선시켰다.

그들은 수많은 총포,창,활과 화살을 휴대하였다.

이렇듯 일본군은 자신들의 우수한 장비를 믿고서 약간의 배 밖에 보유하지않은 조선의 해적을 찾아서 출격하였다.

 

그런데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

우선 조선 수군 쪽에서 화기에 의한공격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인을 몹시 애먹이고 괴롭혔다 ...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노를 저어 배와 함께 달아날 수 없게끔 튼튼한 갈고리로 만든 쇠사슬을 사용하여 일본 배들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 해전이 몇 시간 지속되면서 일본군은 의기소침해지고 전황은 이미 그들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가토 쪽(가토 요시아키)의 장수 한 사람이 전사하였다.

그는 대단히 용감한 전사로 그의 용기와 뛰어난 전술 덕택으로 시코쿠라고 불리는 4개의 령국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관백이 매우 총애하는 심복이었다.

 

(아와노쿠니의 다른 장수도 패배를 당하고나서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적의 손에 사로잡히기 전에 할복하기도 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인들은 70척의 일본 배를 빼앗고 병사 대부분을 살해하였다.

 

나머지 병사들은 겨우 목숨만 건지고서 도망쳤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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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사실(事實)   원문이미지 
확대 원래대로 축소
 
 사실(事實)
 
 
제장전(諸將傳)
 

 

 

 

...중간생략... 

 
“지도는 고성(固城)과 거제(巨濟)의 사이에 끼어있어 목이 좁아서 싸움을 할 수 없으니, 만일 그들을 큰 바다로 꾀어내서 공격한다면 격파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순신이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마침내 여러 배들을 지휘하여 거짓 후퇴하는 척하자, 여러 군사들이 상앗대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이억기(李億祺)의 군대 또한 먼저 당포 앞을 지나갔고, 오직 순신이 탄 배와 녹도의 여러 배들만이 노를 느리게 저어 천천히 갔다. 적들은 군대를 모조리 내서 우리를 뒤쫓아와 순식간에 견내량을 넘어서 한산도 앞 큰바다에 이르러 아군과 지척의 사이에 버티고 있으면서 그 선봉 부대는 이미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러자 순신이 운과 함께 깃발을 흔들어 뱃머리를 돌리게 하여 급히 서로 맞서서 싸움을 벌이니, 대포 소리와 북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시석(矢石)이 비 쏟아지듯 하므로, 적들은 기가 꺾이어 포를 쏠 겨를도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와 이억기가 연해서 나가 사력을 다해 싸워서 적들을 크게 격파하고 그 배들을 모조리 불태웠는데, 물에 뜬 적의 시체가 바다를 뒤덮어 물이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 적의 대루선(大樓船) 1척이 빠져나가 도망치자 아군이 그를 급히 추격하니, 적이 한산도에 배를 대놓고 절벽을 바싹 따라서 달아났다. 장사들이 강한 쇠뇌로 그들을 향해 쏘아대자, 적들이 모두 살을 맞고 저절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겹겹이 쓰러져 죽었다. 이 싸움에서 적선 70여 척을 노획하였는데, 운이 적을 죽인 숫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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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나오는 조선 전기 사회
 
 

 

 

 

....조선은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호두,무화과,밤,사과,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약간의 비단,다량의 면화와 배를 생산하고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양질의 노새,당나귀,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이야기에 따르면)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들이 타는 배는 견고하고 크며, 상부에 갑판을 두르고 있다.

화약 용기와 화기들을 사용하며, 쇠로 된 사석포와 같은 포를 쏘는데,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서 대신 쇳조각을 물고기 꼬리같이 덧붙인, 사람 넓적다리 굵기의 나무 화살을 채워넣어서 발사한다.

이들 화살은 부딪치는 어떤 것도 다 꿰뚫어 파괴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개머리판이 없는 몇 가지 총포를 사용한다...
조선은 중국인에게 공물을 바치고는 있지만 그들에게 위협을 받고있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정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국왕은 토지로부터 나는 수확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나중에 농민들에게 살아갈 식량을 나누어 준다....

 

문자는 중국과 똑같은 것을 쓰며, 국민은 종교와 인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있다.

동사 활용에는 1.2.3인칭의 변화와 접속법이 있고, 글자의 발음은 중국보다도 더 쉽다.

서민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속어 이외에 학자들이나 궁정의 귀인들이 쓰는 더욱 세련되고 우아한 말이 있다.

 

종교 의식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나 아미타불을 숭배한다 ...

 

조선으로부터 대마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가장 많이 들어오는 상품 중 하나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호랑이 가죽으로 조선인들은 말을 타고 호랑이를 창이나 활로 쏘아잡는다고 한다.

 

그들이 입는 의복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넓고 긴 소매가 달린 장의長衣로 빙 둘러 주름이 잡혀 있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
을 통해 관백(히데요시)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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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프로이스(포르투갈어: Luís Fróis, 1532년 ~ 1597년 7월 8일)는 포르투갈로마 가톨릭 사제로, 선교사다. 그의 저서로는 《일본사》(Historia de Japam)가 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임진왜란에 관련한 구절도 있는데, 전쟁 당시에 그는 마카오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목격하지는 못했다.

생애[편집]

1532년 리스본에서 태어났으며, 1541년 9세의 나이로 포르투갈 왕실에서 일하였다. 1548년 16세의 나이에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당시 인도 경영의 중심지였던 고아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이 곳에서 일본 선교에 들어가기 직전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일본인 협력자인 야지로를 만났다. 1561년 고아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어학과 문필의 재능이 높이 평가되어, 각 선교 지역에서 통신을 다루는 일에 종사하였다.

1563년(에이로쿠6년), 31세로 요코세우라(横瀬浦, 현재의 나가사키 현 사이카이 시 북부의 항구)에 상륙하여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어를 배운 뒤,1564년(에이로쿠 7년)에 히라도에서 교토로 향했다.1565년 1월 31일(에이로쿠 7년 12월 29일)에 교토에 입성해, 가스파르 빌레라와 일본인 수도사 로렌소 료사이(ロレンソ了斎) 등과 함께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보호자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이로쿠의 변에서 살해되어 미요시 가문 등에 의해 교토를 빼앗기자, 셋쓰 국 사카이에 피난했다. 1566년 빌레라가 규슈로 떠나자, 교토 지역의 선교 책임자가 됐다.

1569년(에이로쿠 12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끼고 세력이 커진 오다 노부나가니조 성 건축 현장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노부나가가 불교계와 사이가 나빠지자,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아 기나이에서 포교를 허락받아, 녜키 솔도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등과 함께 선교 활동을 하여 많은 신도를 얻었다. 당시 프로이스의 저술에서 노부나가는 이교도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호의적으로 그려져 있다(프로이스의 저작에는 『노부나가 공기』(信長公記) 등에서 보이지 않는 기술도 많아, 전국 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그 후에는 큐슈에서 활약했지만,1580년(덴쇼 8년)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에 즈음해서는 통역으로 시찰에 동행해, 아즈치 성에서 노부나가를 배알하였다. 1583년(덴쇼 11년) 당시 예수회 총장의 명령으로 선교의 제일선을 떠나 일본 예수회의 활동 기록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후 프로이스는 이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일본 전국으로 견문을 넓혔다. 이 기록이 후에 『일본사』라고 불리게 된다.

당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대 예수회 정책을 계승했으나, 이윽고 그 세력 확대에 위기감을 갖게 되고 1587년 7월 24일(덴쇼 15년 6월 19일)에는 신부 추방령을 실시했다. 프로이스는 기나이를 떠나 가즈사(加津佐)를 거쳐 나가사키에 정착했다.

1590년(덴쇼 18년), 귀국한 덴쇼 소년사절단을 따라 발리냐노가 다시 방일하였다. 프로이스는 발리냐노와 동행하여 주라쿠 다이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했다. 1592년, 발리냐노과 함께 함께 마카오로 건너갔으나 1595년(분로쿠 4년)에 나가사키로 돌아와 1597년(게이쵸 2년)에는 『26성인의 순교 기록 』을 집필한 것을 끝으로 7월 8일(5월 24일) 승하하였다. 프로이스는 일본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영광과 비극, 발전과 쇠퇴를 직접 목격하고 그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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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명량대첩에서 근접전이 없었단 주장은  말이 안된단 글에 인용한 "조선역해전도"를 보고...

예상대로 아는체 나대는 강단사학류 먹물쟁이님들이 나름 조목조목 근거를 대며...밑의 조선역해전도는

명량대첩도,한산대첩도 아닌...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대패한 칠전량해전도라 나대는 자들이 있던데...

 

그 알량한 근거가 이렇다.

 

명량대첩엔 이미 칠전량패전으로 거북선이 없었는데 밑의 그림엔 있으니...명량대첩도가 아니다.

명량대첩도엔 박씨(朴氏)성의 수군장이 없는데 밑의 그림엔 있으니 명량대첩도가 아니다.

맞다. 명량대첩도가 아닌거 인정한다.

그러나 그게 명량대첩에 근접전이 없었단 증거일 순 없다.

 

한산대첩에도 역시 박씨(朴氏)성의 수군장은 없었으며...

한산대첩은 월등한 화력으로 적을 원거리 포격으로 때려잡은 전투이니 그림같은 백병전은 없었다...?

반은 맞다.

한산대첩 때도 박씨(朴氏)성의 수군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근접백병전이 없었단 증거일 순 없다.

 

밑의 "조선역해전도"에는...분명 "경상우수영"이란 깃발이 보이는 고로...이는 원균이 주장인 칠전량 패전의 기록화며...

그러기에 왜군들이 조선군의 함선에 기어오르는 백병전이 그려진 것이다.,,?

이건 헛소리다.

칠전량패전때도 박씨(朴氏)성의 수군장은 없었고...

칠전량해전도라면...일제의 유일한 자랑거리인데 조선함선이 불타는 그림이 없단게 말이 안됀다.

 

 

그럼 밑의 조선역해전도의 진실은 뭘까...?

밑의 그림은  조선의 수군장인 이순신을 해신(海神)으로 받들어 섬기던 일본해군들의 영웅인 도고제독과

그 후예인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제해군들이 의뢰해서 1940년에 그린 그림이란다.

고로, 왜군들의 유일한 승전인 칠전량해전도일 것이란 강력한 증거란다.

 

그런데 말이다...

이순신장군을 해신으로 떠받들던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 해군들...

한창 내선일체의 논리로 조선인들을 회유하며 전장에 동원하던 일제가...

징병됀 조선인들을 자극할 칠전량해전도를 대표적인 임란기록화로 과연 내 걸었을까...?

 

그래, 내 예상으론...

이 조선역해전도는...임진란 이후 조선과 일본 어쩌면 명나라에까지 나돌던 성웅 이순신이란 신화적인물에 대한 기록화를

역시, 이순신을 해신으로 받들던 왜군들이 입수해...

일제에겐 상당히 역부족였던 미국과의 전쟁에서 내선일체의 논리로 조선징용병들의 필요성이 대두된 시기...

열세의 전력으로도 전승을 일궜던 이순신이란 해신의 업적을 본받잔 슬로건으로 그린 기록화가 분명함이며...

그러함에도 불고하고,,,기저귀만 찬 조상들의 몰골이 무안스러워...생살에 색칠을 해서...

당시는 존재할 수도 없었던 최첨단 고탄력 판타롱스타킹과 쫄티를 왜군들이 착용하게 그린 눈물겨운 역작이자...

왜군들이 도망 못가게 던지던 조선수군의 쇠사슬갈고리를...왜군들이 반대로 던진것 같이 그린 문물겨운 왜곡작이고...

조선수군의 포격과 화공을 피해 차라리 바다로 뛰어든 수 많은 왜군들을 바다에서 지워버린 문물겨운 역작일 것이다.

 

 

밑의 조선역해전도가 한산대첩도가 아니란 근거는 마땅히 없다.

박씨(朴氏)성의 조선 수군장은 한산대첩 때 없었다고...?...칠전량패전 때도 그는 없었다.

조선수군기에 "경상우수영"이란 글씨들이 있으니 한산대첩이 아니라고...?...한산대첩때도 경상우수군은 참전했다.

박홍(朴泓)이란 유일한 박씨성의 수군장은 경상좌수사 출신으로 임란 초기부터 육지로 도망처서 해전에는 전무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밑의 조선역해전도가 칠전량해전도라면...

대장선의 깃발엔 이순신이나 이억기의 이씨(李)가 아닌 원균의 원씨(元)가 달렸어야 한다.

조선수군의 시체들이 바다에 새까맣게 떠다니고...거북선과 판옥선이 불타는 장면이 하나라도 그려졌을 것이다.

 

 

그럼 일본과 한반도 학자들의 합의대로...그냥 일본군의 용맹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린  근세의 상상화일 뿐일까...?

그렇다면 "불멸의 이순신"이란 드라마 같이...구한말 대한제국의 포졸복을 조선수군들이 다 착용하고...

조선수군은 삼지창만이 주 무기로 그려졌어야 제격일 것인데...

밑의 그림엔 조선수군은 전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최첨단 화기들을 다루는데...그 의복과 무기의 묘사가 상상으로만 그리기엔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란 점에서...

이는 원래 존재하던 조선의 임진왜란 그림을 왜곡 필사한 일제의 그림인 정황이 가장 합당하다 하겠다.

 

 

그런데...

조선군의 의례상...장수의 성씨를 돛대에 내 거는 예는 없다 한다니...

필사하기 전의 원본의 그림엔 저 돛대에 뭐가 걸려있었을까 하는 상상을 자극하게 되는데...

원래는 수(帥)자가 달려있어야 관례기록과 맞는데...

내 예상으론...왜장들 머리가 달려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명량에서 마타시(馬多時)와 내도수(구루지마?)의 머리를 돛대에 매 달았듯이 말이다.

일제는 그 대신...

조선수군의 대표적 영웅인 이순신의 이(李)자와...조선 수군의 최초 패장격인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성씨를...

나름 중립적으로 그려넣은 정황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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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역해전도: 朝鮮戰役海戰圖]

[오오타 텐요오- 太田天洋: 1884-1946]라는 유명한 일본의 역사화가의 그림이다.


 

이 그림이 2차 대전중 일본 해군성의 의뢰로 그려져 일본 해군의 ''수교사(해군 장교 집합소)''에 걸려있었다.
당시 ‘야마모토 켄베에’ 대장의 초상화와 함께 도쿄의 모처로 반출되어 미군에 접수되는 것을 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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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삼태극
글쓴이 : 궐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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