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자치 공화국>
러시아를 구성하는 83개의 행정 구역 가운데 21개는 공화국이다.
8. 칼미크 공화국 |
15. 세베로오세티야 공화국 |
러시아의 역사 | |
---|---|
시기 | |
초기 동슬라브족 | 선사-8세기 |
불가르족 | 7-13세기 |
하자르족 | 7-10세기 |
루시 | 8-9세기 |
키예프 공국 | 9-12세기 |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 | 12-14세기 |
노브고로드 공국 | 12-15세기 |
몽골 침략기 | 1220-1240년대 |
몽골 점령기 | 1240-1480년대 |
모스크바 대공국 | 1340년-1547년 |
모스크바 러시아 | 1547년-1721년 |
러시아 제국 | 1721년-1917년 |
소비에트 러시아 | 1917년-1922년 |
소비에트 연방 | 1922년-1991년 |
1917-1927;(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1927-1953 · 1953-1985 · 1985-1991 | |
러시아 연방 | 1992년-현재 |
러시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동유럽의 슬라브 민족이 분열될 때, 키예프 공국이 세워지고 흥한 것에 의해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시의 옛 영토뿐만 아니라 우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에서 극동의 오호츠크 해연안까지 형성된 국가 발전의 역사로 파악된다.
그러나 실제로 루시에서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등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 의식을 확립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있고, 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에서는 동방 정교회 신도인 러시아인과는 다른 민족의 기원을 가지는 여러 사람이 독자적인 전통과 역사를 걸어 왔다.
[편집] 초기 역사
[편집] 슬라브인 이전
초기 동슬라브족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남러시아 쪽에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과 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트인이 각각 남러시아에 진출하였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남러시아에 들어섰지만, 7세기부터는 러시아 대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편집] 초기 동슬라브족
현재의 러시아 연방의 유럽 부분과 우크라이나의 북부, 그리고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게르만인의 서방으로의 이동 뒤 동슬라브족으로 불리는 슬라브 민족의 일파가 거주하고 있었다. 슬라브어파의 동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삼림 지대에서 소박한 농경 생활을 보내고 있던 동슬라브족의 서쪽에는 발트어파에 속한 발트족, 동쪽이나 북쪽에는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 핀족들이 그들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남쪽의 흑해 북해안의 스텝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유목민들이 거주했다. 이윽고 이 지역의 유목민 상당수는 언어적으로 투르크어족에 동화되었고, 돌궐의 대제국이 붕괴한 다음은 볼가 강의 하류에서 하자르 한국을 형성했다.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족의 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노르만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 해·북해의 교역에 종사한 노르만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쪽 슬라브 사람들은 노르만인과 하자르인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편집] 키예프 공국
7세기경 원래 스웨덴 계통의 이주 바이킹을 가리키는 '루스'라는 말에서 유래.
루스는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당시 이들은 볼가강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였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출신의 바이킹들은 바다로 남하하여 서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한 반면,
스웨덴 바이킹은 볼가강으로 남하하여 동로마와 압바스 왕조와의 무역 루트를 개척하였다.
스웨덴 바이킹인 류리크는 러시아의 노보그라드 시를 건설해 지배자가 되었고
9세기경 러시아의 기원이 된 키예프 대공국 역시 스웨덴 바이킹이었던 올렉이 세웠다.
또 다른 설로는 8세기경 우크라이나 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루시(Russi) 왕국이 유래라는 말도 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 출신의 바이킹들은 바다로 남하하여 서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한 반면,
스웨덴 바이킹인 류리크는 러시아의 노보그라드 시를 건설해 지배자가 되었고
후기 러시아인이 남긴 연대기에 의하면, 862년 노르만인 류리크가 교역도시 노브고로트의 공이 되었고 류리크의 일족이 동슬라브인의 거주지역으로 지배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 사이에서 몇 개의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라들이 있던 이 지역은 류리크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시로 불리게 되었지만, 루시라고 하는 명칭이 후에 러시아라고 하는 국명의 어원이다. 하지만 "러시아"라는 단어는 중세 시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한 단어였으며, 루시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루시라고 불렀다.
끼예프 공국(우크라이나어: Київська Русь, 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Ру́сь) 또는 끼예프 루시는 880년경부터 12세기 중반까지 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존재한 고대 국가로 동슬라브족들이 구성원들의 주를 이루었다.
창시자는 바랑기아인 출신 노브고로트의 올레크 공(公)으로 드니프르 강 유역을 정복하여 루시의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새 정복지의 키예프로 옮겼다.
[편집] 전성기
블라디미르 1세 때에 동방 정교회가 국교로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1세(재위 1019년∼1054년)까지 최전성기였다.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은 키예프 공국을 계승한 국가로, 블라지미르 모노마흐 이후 번성하였다
블라지미르(Владимир)는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180km 떨어진 오래된 도시이다.
소위 '황금의 고리'라고 불리우는 모스크바 북동쪽의 고(古)도시들 중에 하나이다.
1108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공(公)이 요새를 축조함으로써 건설된 러시아의 고도(古都)이다.
1157년 블라디미르 수즈달리 공국의 수도가 되면서 발전하여 당시 러시아 수도인 키예프를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1238년 몽골의 제1차 침입으로 파괴되고, 1293년에 또다시 몽골에게 약탈당했으나 곧 복구되었다.
130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대주교관구가 되었다.
한때 급속히 발전하는 모스크바와 수차례 타타르족의 침략을 당하면서 점차 쇠퇴하였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 후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주요 산업은 트랙터·자동차부품·모터·화학(플라스틱)·건축자재·통조림·정밀기계 등이다. 유명한 건축물로는 우펜스키 성당(1158∼1161), 대제 예카테리나 2세 때 복구한 황금개선문, 상트드미트리 대성당이 있다. 역사·종교 박물관, 화랑, 교육대학 등이 있다.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Galicia, Halych)와 볼히니아(Volhynia, Volodymyr-Volynskii)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전체 영토가 폴란드에 의해 정복되었다.
쇠퇴기
끼예프 루시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고 흑해 유목민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고, 블라지미르 모노마흐(재위 1113년∼1125년)가 회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중엽에 몽골에게 정복을 당해 멸망되
옛날 동유럽의 중심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한 키예프 공국이었다.
[편집] 노브고로드 공화국
*노브고로트 [Novgorod] 러시아 연방 북서부에 있는 노브고로트 주의 주도.
일멘 호(湖)에서 볼호프 강이 흘러나오는 바로 위쪽에 강을 끼고 있다.
노브고로트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연대기에 처음 기록된 것은 859년이다. 882년 노브고로트 공(公) 올레크가 키예프를 점령하고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989년 블라디미르의 치하에서 노브고로트 주민들은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1019년 키예프의 현명공(賢明公) 야로슬라프 1세가 이 도시에 자치권을 부여했으며, 시의회인 베체(veche)는 군사령관직을 주임무로 하는 시의 군주를 선출했다. 1270년부터 베체는 시장(市長)만을 뽑았고 주권은 도시가 갖는 '노브고로트 대공국'체제를 갖추었다.
이 도시는 5구역으로 나뉘어 구역마다 있는 민회가 드넓은 노브고로트 땅의 1/5을 관리했다. 이곳은 발트 해, 비잔티움, 중앙아시아 및 유럽, 러시아의 모든 지역과 강을 따라 연결되므로, 동유럽에서 가장 큰 교역중심지로 번성했다.
러시아에서 한자 동맹 도시들과의 교역은 노브고로트까지만 이루어졌으므로 한자 동맹과 교역량이 아주 많았다. 번영의 기반은 러시아 북부 삼림지대에서 획득되는 모피였는데, 그 삼림지대의 많은 지역이 노브고로트의 관할하에 있었다. 12세기에는 볼로그다와 뱌트카에 노브고로트의 자매도시들이 건설되었다.
12세기에 노브고로트는 수즈달 공국과 오랜 싸움을 벌였고 1169년과 1216년에 승리를 거두었다. 1238~40년의 타타르(몽골) 대침입 때 이 도시는 파괴는 모면했지만 타타르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40년 스웨덴이 침입해오자 블라디미르 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노브고로트 군대를 이끌고 네바 강에서 이들을 물리쳤고,
1242년에는 얼어붙은 페이푸스 호에서 튜튼 기사단의 공격을 물리쳤다.
14~15세기에 노브고로트는 지배권을 놓고 모스크바와의 길고도 험한 싸움을 했으며 자주 리투아니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모스크바가 1332년과 1386년에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앞세워 맹렬하게 공격해왔으나 모두 견디어낸 노브고로트는 1456년 바실리 2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뒤로도 계속 모스크바에 저항하고 리투아니아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으나 1471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패배해서 북쪽 땅의 많은 부분이 러시아에 합병되자 마침내 1478년에 모스크바의 통치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1570년 뇌제(雷帝) 이반 4세가 많은 시민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추방할 때까지 저항했다.
1611년부터 8년 동안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이곳은 1727년 지방중심지가 되기도 했지만 표트르 1세(1682~1725 재위) 때부터 중요도가 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크게 파괴되었으나 그뒤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이 복구되었다. 이 가운데는 볼호프 강 좌안(소피스카야 스토로나)에 있는 성채도 있다. 이 성채는 1044년 목재로 처음 지었고 최초의 석벽은 14세기에 건축되었다. 성채 안에 원래 목조교회가 있던 자리에 1045~50년에 걸쳐 건립된 상트소피야 대성당은 12세기부터 웅장한 청동문을 달기 시작한 초기 러시아 건축에서 가장 훌륭한 표본의 하나로 꼽힌다.
화강암 궁(1433), 종탑(1443), 상트세르게이 예배당도 15세기에 지어졌다. 상트안드레이스트라틸라타 예배당은 17세기에 세워졌다. 볼호프 강 건너편(토르고바야스토로나)에는 1113년에 세워진 상트니콜라스 대성당이 있다. 노브고로트 시내와 외곽에는 옛 교회들이 많은데 12세기의 성모성탄대성당과 상트게오르기우스 대성당, 14세기의 예수변모교회와 상트테오도루스트라틸라타 교회, 17세기의 즈나멘스키 대성당 등이 남아 있다.
오늘날 노브고로트는 중요한 관광도시이자 화학비료 생산지이다. 또한 라디오와 목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인구 218,815(2005 추계).
일멘 호(湖)에서 볼호프 강이 흘러나오는 바로 위쪽에 강을 끼고 있다.
노브고로트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연대기에 처음 기록된 것은 859년이다. 882년 노브고로트 공(公) 올레크가 키예프를 점령하고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989년 블라디미르의 치하에서 노브고로트 주민들은 강제로 세례를 받았다.
1019년 키예프의 현명공(賢明公) 야로슬라프 1세가 이 도시에 자치권을 부여했으며, 시의회인 베체(veche)는 군사령관직을 주임무로 하는 시의 군주를 선출했다. 1270년부터 베체는 시장(市長)만을 뽑았고 주권은 도시가 갖는 '노브고로트 대공국'체제를 갖추었다.
이 도시는 5구역으로 나뉘어 구역마다 있는 민회가 드넓은 노브고로트 땅의 1/5을 관리했다. 이곳은 발트 해, 비잔티움, 중앙아시아 및 유럽, 러시아의 모든 지역과 강을 따라 연결되므로, 동유럽에서 가장 큰 교역중심지로 번성했다.
러시아에서 한자 동맹 도시들과의 교역은 노브고로트까지만 이루어졌으므로 한자 동맹과 교역량이 아주 많았다. 번영의 기반은 러시아 북부 삼림지대에서 획득되는 모피였는데, 그 삼림지대의 많은 지역이 노브고로트의 관할하에 있었다. 12세기에는 볼로그다와 뱌트카에 노브고로트의 자매도시들이 건설되었다.
12세기에 노브고로트는 수즈달 공국과 오랜 싸움을 벌였고 1169년과 1216년에 승리를 거두었다. 1238~40년의 타타르(몽골) 대침입 때 이 도시는 파괴는 모면했지만 타타르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40년 스웨덴이 침입해오자 블라디미르 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노브고로트 군대를 이끌고 네바 강에서 이들을 물리쳤고,
1242년에는 얼어붙은 페이푸스 호에서 튜튼 기사단의 공격을 물리쳤다.
14~15세기에 노브고로트는 지배권을 놓고 모스크바와의 길고도 험한 싸움을 했으며 자주 리투아니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모스크바가 1332년과 1386년에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앞세워 맹렬하게 공격해왔으나 모두 견디어낸 노브고로트는 1456년 바실리 2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뒤로도 계속 모스크바에 저항하고 리투아니아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으나 1471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패배해서 북쪽 땅의 많은 부분이 러시아에 합병되자 마침내 1478년에 모스크바의 통치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1570년 뇌제(雷帝) 이반 4세가 많은 시민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추방할 때까지 저항했다.
1611년부터 8년 동안은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이곳은 1727년 지방중심지가 되기도 했지만 표트르 1세(1682~1725 재위) 때부터 중요도가 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크게 파괴되었으나 그뒤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이 복구되었다. 이 가운데는 볼호프 강 좌안(소피스카야 스토로나)에 있는 성채도 있다. 이 성채는 1044년 목재로 처음 지었고 최초의 석벽은 14세기에 건축되었다. 성채 안에 원래 목조교회가 있던 자리에 1045~50년에 걸쳐 건립된 상트소피야 대성당은 12세기부터 웅장한 청동문을 달기 시작한 초기 러시아 건축에서 가장 훌륭한 표본의 하나로 꼽힌다.
화강암 궁(1433), 종탑(1443), 상트세르게이 예배당도 15세기에 지어졌다. 상트안드레이스트라틸라타 예배당은 17세기에 세워졌다. 볼호프 강 건너편(토르고바야스토로나)에는 1113년에 세워진 상트니콜라스 대성당이 있다. 노브고로트 시내와 외곽에는 옛 교회들이 많은데 12세기의 성모성탄대성당과 상트게오르기우스 대성당, 14세기의 예수변모교회와 상트테오도루스트라틸라타 교회, 17세기의 즈나멘스키 대성당 등이 남아 있다.
오늘날 노브고로트는 중요한 관광도시이자 화학비료 생산지이다. 또한 라디오와 목공품을 생산하고 있다. 인구 218,815(2005 추계).
노브고로드 공화국(붉은색)
모스크바는 한참 뒤 몽골이 동유럽을 침범하면서 등장한다.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가 15만 기마군단을 구성해 러시아 침공에 나서 우랄산맥을 넘어 볼가르 족(族)을 쳐부수고 모스크바, 헝가리, 폴란드 지역까지 점령해 거대한 제국을 세운다.
이 때 몽골이 통치한 제국을 금장국(金帳國)이라 부른다.
이 무렵 모스크바 공국이 변방에 생겨났는데 주로 키예프 공국이 몽골로 보내는 조공을 정리하는 중개소 역할을 맡았던 작은 나라였다.
몽골 지배 150년이 지난 1380년에 모스크바 공국(公國) 디미트리 돈스코이 왕이 몽골에 반기를 들었다. 몽골의 1차 진압에서는 모스크바 공국이 이기고 2차 진압에서는 몽골이 이겨 지배가 이어졌다.
다시 100년이 지나 모스크바 공국 이반3세가 반기를 들었을 때 몽골은 쇠약해진 탓에 진압군을 보내지 못하고 240년에 걸친 제국의 지배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후 몽골의 금장국은 카잔, 아스트라칸, 크리미아의 세 나라로 분열되었다가 러시아 제국에게 흡수되는데 여기까지 계산하면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550년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기둥으로 등장한 것.
훗날 러시아는 소련이 라는 거대한 제국을 이뤄 몽골을 공산화함으로써
550년 식민지배의 설움을 되돌려 주었다.
몽골의 지배와 항전이 거듭되면서 러시아는 문화적으로 아시아적 감성과 깊이를 더했지만 서유럽의 르네상스에 제때 참여하지 못하고 뒤처지기도 했다.
유럽이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뉘는 2가지 결정적 요인이 있는데
하나는 몽골의 지배이고 하나는 공산주의의 지배.
러시아를 이룬 다수 인종은 슬라브족이다.
슬라브족은 인도·유럽어의 한 종류인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이다.
유럽 최대의 민족으로 하얀 피부에 금발이 많다.
러시아·우크라이나는 동슬라브,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는 서슬라브,
세르비아·크로아티아는 남슬라브로 구분한다.
러시아라는 이름의 배경도 살펴보자.
9세기 쯤 노르만인 류리크가 동슬라브 지역을 지배해 나가면서
동슬라브에 작은 나라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 나라들로 구성된 지역을
류리크가 속한 부족의 이름 ‘루스’의 이름을 따서 ‘루시’라고 부른다.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시의 중심이었다.
이것이 후에 러시아라고 하는 국명의 어원이 된 것.
슬라브 족은 동유럽을 기반으로 살았는데
동로마제국에게 눌리고 동방의 강국 터키에게 밀리고, 서쪽은 오스트리아에게 가로 막혀 꼼짝 못했다. 강대국들은 걸핏하면 슬라브 민족을 약탈하고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았다.
남자들은 건장하고 여자들은 금발에 하얀 피부로 미인이 많아 탐을 낸 것.
흑해 부근에 슬라브족 노예시장이 융성했다고 하고
멀리 있는 스웨덴 바이킹 족까지 쳐내려와서 노예무역 기지를 세우고
슬라브족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체코의 프라하가 유명한 노예무역 도시.
러시아가 일찌감치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도
기독교 국가끼리의 약탈과 노예사냥은 자제했기에
재난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다시 유린되는데
몽골이 지배한 러시아 금장국 여러 나라 중 하나인
크림한국이 시베리아 슬라브족을 잡아다 터키에 팔던 노예중개무역국가.
이것이 노예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가 슬레이브가 된 배경이다.
중세에 흑사병이 자주 창궐한 이유는?
타르박.... 이 쥐가 중세 유럽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흑사병의 병원체였다.
1347년 일이다. 몽골제국의 4대 칸국 중의 하나인 킵차크칸국(칭기스칸의 장남 조치가 러시아와 동유럽에 세운 나라)의 9대 칸인 우즈벡이 사망할 무렵 몽골의 지배 계층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틈타 러시아의 각 공국을 비롯한 동유럽이 일제히 반기를 들었다. 킵차크칸국의 권위는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 와중에 바투의 후손인 톡타미시가 군대를 몰아 칸에 즉위한 뒤 혼란을 수습했다. 그가 칸으로서 처음 한 일은 그간 반란을 일으켜온 유럽을 응징하는 것이었다. “몽골이 살아 있음을, 우리 안에 칭기스칸이 살아 있음을 적들에게 보이자!”
킵차크군은 기마군단을 몰아 크림반도로 달렸다. 거기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하고, 유럽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의 전쟁을 벌였다.
몽골군은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서 흑사병으로 흉측하게 썩은 시신을 끌어모은 뒤 노포에 담아 적진을 향해 날렸다. 몽골군은 유럽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시신을 날려 보냈을 뿐이지만 가져온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시신을 쏘아 보낸 몽골군도, 시신 공격을 받은 유럽인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흑사병은 이동 유목민들에게는 그다지 공포스러운 질병이 아니었다. 그들은 타르박의 먹이, 즉 흑사병의 매개체였던 쌀 등의 곡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쥐는 겔(몽골식 주거용 천막)의 두꺼운 펠트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가 봤자 쥐가 먹을 것도 없었다. 오히려 겔을 수호하는 개들에게 잡아먹힐 뿐이었다.
그러나 농경정착민족에게는 허술하게 지어놓은 목제창고가 많았다. 곳곳에 곡식이 널려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 안에도 곡식이 있었다. 당연히 쥐가 들끓었다. 결과적으로 이동 유목민족과 농경 정착민족의 주거환경 차이가 실로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제노바 교역소에 떨어진 시신에는 페스트균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유럽인들은 몽골군의 야만적이 시신 공격을 받자 그 시신들을 수거해 한적한 곳에 갖다 버렸다.
시신 속의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벼룩은 쥐로 옮겨갔고, 그 쥐들은 사람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벼룩에 물린 사람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다가 며칠 만에 죽어버렸다. 쥐떼가 한번 지나갈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곧 시체로 변했다.
농경 정착 사회를 파고든 쥐들은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전 유럽으로 퍼졌다. 결국 중세 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약2천 5백만 명이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이로써 전쟁이 그쳤다. 교역도 중지됐다. 농노들도 사라졌다. 농경규모가 줄어들면서 봉건 영주들이 대거 파산했다. 엄청나게 귀해진 노동자들의 급료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봉건시대, 노동력이 생산의 모든 것이던 시대가 종말을 맞기 시작한 것이다.
흑사병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끔찍한 급성 전염병으로 기록되어져 오는데요
흑사병에 걸리면 열이 높게 오르고 손발이 쑤시며 임파선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등
피를 토하면서 3일 안에 죽게 되는 끔찍한 병 입니다.
이러한 흑사병은 1346년 크리미아 반도 교역의 중심지였던 카파시를 공격한
몽고제국의 한 군주가 이끄는 군대에서 처음 발생한 것을 시작으로,
이 전염병은 아시아 대륙의 대상교역로를 거쳐 1347년 크리미아에 도달했고
거기서부터 흑사병 균은 배에 실려 여러곳의 항구에 옮겨 졌으며,
다시 내륙지방으로 전파되어 유럽과 중동의 거의 모든 지역에 침투한 것이죠 .. ^^
우크라이나 영토는 동슬라브인들의 초기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남쪽 지방이었다. 이 중세 국가의 수도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였다. 키예프 공국은 현재의 스웨덴 영토에서 온 바이킹들이 세웠으며 이들은 현지의 슬라브인들인 루시에 흡수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그리하여 10세기와 11세기에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의 중심부가 되어 후의 우크라이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편집] 몽골 지배기
킵차크 한국의 바투의 서양 원정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킵차크 한국을 '황금의 약탈자'라는 뜻의 골든 호르드(Golden Horde)라고 불렀다.
킵차크 한국은 기존 러시아 지배자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간접 통치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반격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인 1380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처음으로 몽골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몽골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은 1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편집] 모스크바 대공국
몽골의 지배기동안 러시아의 중심지는 남부의 키에프에서 동북부로 이동하게 된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147년에 유리 돌고루키의 치세에 처음 이름을 드러낸다. 이후 몽골의 침략 기간 동안 약탈당했다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막내아들 다니일의 치세에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1317년에 모스크바의 군주는 금장 한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칸으로부터 러시아의 대칸으로 인정받는다. 트베르와 같은 경쟁도시들과의 투쟁,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같은 서쪽의 외국 세력과의 다툼 속에 모스크바는 점차 러시아 전체의 통합을 이루는 도시로 인정받게 된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은 이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당시 금장 한국으로부터 대공을 인정받은 트베르의 미하일과 싸워 이겼으며,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1380년에는 자신들이 임명한 대공인 미하일의 복수를 위해 출격한 몽골군을 돈 강에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1382년에 토크타미시 칸에게 패배하여 모스크바를 점령당한다.
이후에도 금장한국의 통치는 계속되었으나 돈 강의 전투 이후에는 러시아 독자적인 발달에 크게 간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반 3세때는 이미 유명무실화된 금장한국의 지배를 폐기하고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에 이르러 모스크바 공국은 '연합체'적인 모습을 벗고 통합적인 '국가'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1535년 모스크바 공국: 이반뇌제>
<모스크바 공국의 성립>
- 몽골 타타르 지배 아래 성장한 곳은 모스크바
- 모스크바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변경에 자리잡은 조그만 요새 도시
(모스크바라는 말은 핀란드어)
- 어떻게 이런 도시가 독립된 공국으로 크게 자랐을까?
1. 지리적 혜택
- 리아잔 공국, 니제고로드 공국에 둘러싸여 킵차크칸국의 직접적 침공을 피하고,
- 노브고로드공국, 프스코프공국, 스몰렌스크공국에 둘러싸여
독일, 스웨덴, 리투아니아 침공을 피함
- 모스크바의 지리역 혜택을 보고 루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
- 또 무역의 길들이 서로 통하는 곳, 상인들의 무역, 상업의 중심지
2. 모스크바의 이점을 공후들이 잘 사용
- 노브고로드의 공후, 1240년, 스웨덴의 침략을 네바강에 전투에서 막아내고 네프스키라는 이름을 얻음
- 1242년, 독일 기사단의 침략을, 블라디미리-수즈달 공국 지원아래,
오늘날 에스토니아에 위치한 추드호의 얼음 위에서 무찌름
- 알렉산드로 네프스키 (1252~1263)는 루시 전체의 민족적 영웅
- 그는 곧 모스크바를 안고 있는 블라디미르-수즈달의 공후가 되었고,
루시의 많은 곳들을 정복한 몽골 타타르의 침공을 외교적으로 막아냄
- 몽골 타타르에 대한 항전은 살륙을 의미할 뿐이라고 판단,
침략자들에게 협조, 몽골 제국의 우위성을 받아들이고 정기적으로 조공
- 몽골 제국은 그에게 '루시의 대공'이라는 칭호, 영지를 침공하지 않음
- 이웃 노브고르드공국, 다른 공국들의 수호에 이바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곳이 모스크바
- 모스크바는 그가 죽은 1263년, 아들 다니엘을 공후로 하는 공국으로 독립
<모스크바대공국으로의 성장>
- 초창기 공후들은 모스크바공국 영토를 확장
- 3대 공후 이반 다닐로비치(1325~41, 이반 1세), 영토 확장, 재산 증식, "돈주머니"라는 별명
- 이반 칼리타(이반 1세)는 킵차크 칸국의 칸을 능란하게 다룸,
- 킵차크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자주 방문, 칸과 아내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모든 루시의 대공"이라는 칭호
- 모스크바공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격상, 모스트바대공국은 루시의 정치적 중심지
- 몽골 타타르에 대한 루시 사람들의 민족적 반항심
- 킵차크 칸국은 루시의 여러 공국들에 상주시켰던 징세관들을 불러들이고,
루시의 공후들로 하여금 세금을 거둬 바치게 함
- 이반 칼리타는 다른 공후들보다 먼저 공물과 세금을 바침
- 킵차크칸국은 그에게 모든 루시의 공물과 세금을 거두어 바치는 권한을 줌
- 루시의 모든 공후들은 더 모스크바 대공국에 예속
- 이런 정책이 반민족적인 것은 아님, 오히려 타타르족의 침략으로부터 구하는 결과
- 칼리타는 능란한 수완으로 모스크바를 종교적으로 모든 루시의 중심으로
- 1326년, 루시의 모든 정교 교회들의 수장인 '키예프와 모든 루시 교회의 총주교'가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가운데 죽고, 이반 칼리타는 그를 성인이라 선언, 그의 사당을 짓고,
- 그의 후계자에게 모스크바에 영구히 머물도록 설득
- 그는 '키예프와 모든 루시 교회의 총주교'라는 칭호를 유지,
모스크바에 정착, 모스크바에 정교의 중심이라는 후광
- 칼리타가 1341년 죽고, 세묜 고르디, 이반 크라스니(이반 2세), 차례로 대공,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고, 모스크다대공국 영토는 넓어짐
- 대주교 알렉시스가 중요한 역할
- 모스크바대공국의 정사에 많은 조언,
- 몽골 타타르의 지배자들을 외교적으로 다룸
- 킵차크 칸국은 쇠락의 길, 내부에 권력 투쟁,
1357년, 내전으로 확대, 20년에 걸쳐 유혈전쟁, 20명의 칸들이 명멸
- 킵차크칸국이 내전을 겪으며 몰락, 모스크바에는 다행
- 서쪽에 리투아니아의 힘이 성장, 모스크바 통치자들은 서쪽 국경선의 방어에 관심
- 이반 2세가 1359년 사망, 대공위 계승을 둘러싸고 갈등
- 이반 2세의 아들, 아홉살인 드미트리가 즉위,
이반 2세의 동생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공후 드미트리가 도전,
- 이미 힘을 잃은 킵차크 칸국은 두 사람 모두에 지지
-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력자들, 심지어 상공인들도 소년 드미트리를 공개적으로 지지
- 숙부 드미트리는 도전을 포기
[편집] 모스크바 러시아
몽골의 통치에서 독립을 이룬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는 3살의 나이에 대공이 된다.
초반 몇 년간의 섭정 통치가 끝나고 1547년에 이반 4세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 즉 왕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이로써 분권적인 모스크바 공국 시대가 끝나고, 중앙집권적인 모스크바 러시아(러시아어: Царство Русское, 짜르스뜨보 루스까예)가 성립된다.
강력한 이반 4세의 통치기간 동안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해외 영토가 많이 팽창하였지만, 후계 문제 때문에 러시아는 동란 시대로 접어든다.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가짜 차르가 3명이 등장한 가운데,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가 1613년에 자리를 계승한다.
초기 로마노프 왕가의 차르들의 권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표트르 대제의 등장과 함께 모스크바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코자크 헤티만국(Cossack Hetmanate)]1649 -1764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코자크 헤티만국(Cossack Hetmanate)이 세워져 백년 이상 모스크바 공국(Muscovy)의 압력을 견뎌냈으나 결국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1649 -1764 년사이 중앙 우크라이나의 Cossack 국가 이었다.
그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시베리아란, 시비르 한국>
러시아 영토 중에서 우랄산맥 동쪽은 시베리아라고 부릅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눌 때 시베리아 부분은 아시아에 속하지요. 러시아가 영토를 많이 가질 수 밖에 없던 이유를 저는 러시아 진출의 두 방향으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1. 동방진출: 시베리아 점령 원인
1) 담비 가죽 획득을 위해!!!(가장 중요한 이유)
러시아 인들에게 담비 가죽은 매우 귀중한 물건으로서 가히 조선시대 조선인들에게 '산삼' 과 비슷한 가치의 물건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러시아 인들은 모피 옷이나 모피 모자를 즐겨 쓰고, 당시의 러시아 이외 유럽 귀족들도 모피를 좋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담비는 최고급품이었지요.
유럽대륙과 북미의 식민지에서 모피를 조달할 만한 동물들이 급감하자, 시베리아 지역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특별한 산업이 적었던 러시아 지배층들은 시베리아 지역의 토착민들을 닥달하여 담비를 획득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담비가죽을 위해 군대를 동원해 시베리아 지역을 잠식해 가고, 러시아 농민들도 담비 한 마리만 잘 잡으면 팔자를 고칠 수도 있어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해 가는 예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점차 동진하여 시베리아를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2) 몽골 침략에 대한 반작용
14세기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세계지배) 시대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은 러시아까지 점령하지요. 이후 러시아는 몽골로부터 독립하지만 몽골의 후예들이나 동양 초원민족들이 세운 국가들 (대개 ~ 한국, ~칸국 이라 이름붙음)과 대립관계를 갖습니다.
16세기에 우랄산맥 서쪽의 카잔 한국을 점령한 러시아는 우랄산맥 동쪽의 시비르 한국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스트로브스키 가문을 중심으로 러시아 군대는 시비르 한국을 멸망시키고 시베리아로 나아갑니다.
시베리아란, 시비르 한국에서 나온 말로 '시비르의 땅', '시비르 지역' 의 의미입니다.
[편집] 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가)
조선시대는 숙종의 아들 경종이 32살의 나이에 병약 한 몸으로 즉위한 시기 경종 1년(1721)인1721년 10월 22일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 (1721년 - 1725년)
스스로 '러시아 국민의 황제'로 선언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 때이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유럽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하였다. 농민들은 톨스토이(일명 '대문호')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이는 크림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한 영향이 컸으며, 알렉산드르 2세의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은 농노 해방령이었다. 그러나 정작 농노들이 살 토지를 마련해주지 않아, 도시에서는 농민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1881년에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르 3세에 이르면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가 제한되었고, 전제정치는 더욱 강해졌다.
니콜라이 2세도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 정치를 행하였다. 그는 러일 전쟁의 패배에 대한 질책과 이에 따른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기병대에 의해서 살해 당한 사건인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906년 4월 24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1889년에 근대적 헌법을 도입한 일본보다도 늦은 것이었다.
러시아 군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맹국 세력에게 패퇴하여 동부 전선은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 점차 후퇴하였고, 1917년 제국은 전쟁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혼란 속에서 군대의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1917년 차르 정부는 전쟁을 도저히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 기업가, 군인, 귀족 모두가 차르 정부에 등을 돌렸다. 빈곤한 노동자 계층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차르 정부의 퇴진을 원하였으며, 이는 곧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되었고, 권력은 임시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소비에트(혁명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음 에도 해산하지 않았고, 그 중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는 민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집권하였다.
1918년,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Брест-Литов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에서 독일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내외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제정을 지지하는 세력을 격파하여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1920년 1,30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이로서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편집] 러시아 혁명
같은 해 11월 7일에 레닌의 지도하에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위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온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붉은 군대로 개편했다.
그후 일본을 포함한 열강에 의한 간섭 전쟁과 시베리아 출병, 백군과의 내전에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러시아에 있어서 볼셰비키의 일당독재 지배를 결정지었다.
[편집] 소비에트 연방
1922년 12월의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SFSR, 벨로루시 SSR, 우크라이나 SSR, 자카프카스 SFSR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924년 레닌의 사후(死後)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세계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나라안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일국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했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스탈린이 숙청한 사람은 1200만 명에 이르렀다고도 하며, 무리한 경제발전계획으로 강제수용된 이들도 많았다.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스가 집권했고, 스탈린은 중앙유럽 국가를 공산주의화 해 위성국(衛星國)으로 둘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자는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분할했다. 이어 소련은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으로 말미암아 발트 3국까지 점령했다. 또한 소련은 핀란드를 흡수하려고 겨울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1941년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首都)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끝에 승리, 전세(戰勢)를 역전시켜 끝내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켰다.
소련군 점령지대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연합군 점령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섰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사할린, 만주국 및 한국 북부를 점령했다.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 감시국가였다. 그는 식량 생산에 힘을 쏟아 일시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농업생산의 확대로써 농지의 비영양화, 사막화가 진행되어, 결국 소련은 식량을 해외로부터 수입해야 하게 되었다.
또, 중앙유럽 위성국에서는 자주 반체제 운동,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소련은 1956년 부다페스트 봉기,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대해 무력개입을 통하여 이를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핵(核)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의 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모택동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중소대립).
1964년에 농업정책의 실패와 서방에 대한 유화(宥化)정책을 이유로 실각(失脚)한 흐루쇼프에 대신해 강경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지도자가 된 이후, 관료의 세습화 등 체제의 부패가 진행된 동시에 식료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으며, 이와 함께 동쪽 제국 전체의 경제가 점차 침체해 갔다.
또한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정권을 지지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다음해의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나라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낭비했기 때문에 경제를 더욱더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1985년에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경공업에 대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구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제 대신 복수정당제(複數政黨制)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衛星國家)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국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했다.
이에 따라 냉전은 사실상 붕괴, 1989년 12월에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했다.
개혁노선에 반대하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등은 이에 반발해 8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개혁파와 소련 국민, 서방 각국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어 같은 해 9월 최고 소비에트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 SFSR, 우크라이나 SSR, 벨로루시 SSR은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에 합의하고, 다른 소련 가맹 공화국들도 CIS에 연달아 가입했기 때문에,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사임하고, 소련은 해체되었다.
[편집] 러시아 연방
1990년 6월 12일에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러시아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보리스 옐친에 이어 대통령에 선출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집권하며 혼란을 수습하고 러시아의 재건을 이끌었다.
2008년 3월 총선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러시아의 군주>
모스크바 공작 (1283년 - 1359년)[편집]
류리크 왕조 (1283년 - 1359년)[편집]
- 다니옐 (1283년 - 1303년)
- 유리 (1303년 - 1325년)
- 이반 1세 (돈주머니의 이반) (1325년 - 1341년)
- 세묜 (긍지의 세묜) (1341년 - 1353년)
- 이반 2세 (공정한 이반) (1353년 - 1359년)
모스크바 대공 (1359년 - 1547년)[편집]
류리크 왕조 (1359년 - 1547년)[편집]
- 드미트리 돈스코이 (1359년 - 1389년)
- 바실리 1세 (1389년 - 1425년)
- 바실리 2세 (장님 바실리) (1425년 - 1462년)
- 이반 3세 (이반 대제) (1462년 - 1505년) - 몽골로부터 독립을 이뤄낸 군주
- 바실리 3세 (1505년 - 1533년)
- 이반 4세 (이반 뇌제) (1533년 - 1547년) -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군주
동란 시대[편집]
- 표도르 1세의 친동생인 드미트리 2세로 사칭하여 권좌에 올랐다. 처형됨.
차르 궐위 (1610년 - 1613년)[편집]
로마노프 왕조 (1613년 - 1721년)[편집]
- 미하일 1세 (1613년 - 1645년) 1613년 2월 21일 차르로 선출됨.
- 알렉세이 1세 (1645년 - 1676년)
- 표도르 3세 (1676년 - 1682년)
- 이반 5세 (1682년 - 1696년) 표트르 1세와 공동 통치.
-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 (1682년 - 1721년) 1696년까지 형 이반 5세와 공동 통치.
1721년 10월 22일 스스로 '러시아 국민의 황제'로 선언.
-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 (1721년 - 1725년)
- 예카테리나 1세 여제(1725년 - 1727년)
- 표트르 2세 (1727년 - 1730년)
- 안나 여제(1730년 - 1740년)
- 이반 6세 (1740년 - 1741년)
- 옐리자베타 여제 (1741년 - 1762년)
- 표트르 3세 (1762년)
- 예카테리나 2세 여제 (예카테리나 대제) (1762년 - 1796년)
- 파벨 1세 (1796년 - 1801년)
- 알렉산드르 1세 (1801년 - 1825년)
- 니콜라이 1세 (1825년 - 1855년)
- 알렉산드르 2세 (1855년 - 1881년)
- 알렉산드르 3세 (1881년 - 1894년)
- 성 니콜라이 2세 (1894년 - 1917년)
<4>칼리닌그라드
(러시아어: Калининград, 독일어: Kaliningrad, 폴란드어: Kaliningrad, 리투아니아어: Kaliningradas, 라틴어: Calininopolis, 문화어: 깔리닌그라드)는 발트 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의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 주(북쪽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으로는 발트 해에 접해 있다)의 주도이며, 발트 해에 면한 항구 도시다.
1256년에 건설된 이 도시는 튜튼기사단 국가 및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으며, 동프로이센의 주도(州都)로서 쾨니히스베르크(독일어: Königsberg)로 불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독일 북동부 변경의 중요 도시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북부 1/3 가량이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면서 1946년에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인구는 43만 5천 명이다. 부동항으로 선박수리·기중기·차량·어류통조림 등의 제조, 펄프, 제지업 등이 있다. [1]
역사[편집]
쾨니히스베르크[편집]
1256년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의 권고로 튜튼 기사단에 의하여 쾨니히스베르크 성(城)이 건설된 것이 이 도시의 시초였다.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가 되었고,
1457년 튜튼 기사단의 본부가 세워졌으며,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544년 프로이센의 알베르트 공에 의해 알베르티나 대학이 세워져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고,
1701년에 이 도시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諸候)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로서 즉위식을 올렸다.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이 성립되어 수도가 베를린이 되기 전까지 수도였으며, 베를린으로 왕국의 수도가 이전한 뒤에도 역대 프로이센 왕들은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이 도시가 속한 동프로이센은 폴란드 회랑(回廊)에 의해 독일 본토로부터 육로가 끊기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이 도시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역사적 건축 문화재 또한 많이 파괴되었다. 또한 1945년의 쾨니히스베르크 전투에 의해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봄, 1940년 37만 명이던 도시의 인구는 5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들 독일인 주민들은 1948년까지 거의가 추방되었다.
소비에트 연방[편집]
1945년 이 도시는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으며, 이듬해 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미하일 칼리닌이 죽자 그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독일인이 추방된 도시에는 러시아인이 이주해 들어왔다. 소련의 서단(西端)에 위치한 이 도시는 냉전시대에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했다.
발트 함대는 1950년대에 이 도시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칼리닌그라드는 폐쇄된 도시가 되었다.
러시아[편집]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해 칼리닌그라드와 칼리닌그라드 주는 러시아 본토와 떨어진 고립된 지역이 되었다. 칼리닌그라드는 부동항(不凍港)이기 때문에 러시아 발트 함대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고 있다. 칼리닌그라드에 이웃한 국가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2004년에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칼리닌그라드는 유럽 연합에 둘러싸여 버렸다.
최근에, 이곳의 일부 사람들은 러시아의 일부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와 니즈니노브고로드, 트베리 등)가 소련 시절에 변경된 이름을 다시 옛 이름으로 환원한 것처럼, 칼리닌그라드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사용된 이름이므로 다시 이 도시의 이름을 쾨니히스베르크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계속 사용된 이름인 칼리닌그라드는 적어도 몇 년동안은 사용된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쿄니크"(Kyonig,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를 줄인 러시아말)는 종종 이곳의 관광사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지리[편집]
프레골랴 강이 칼리닌그라드 석호(潟湖)로 흘러드는 하구에 자리잡고 있다.
주요 관광지[편집]
-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 자크하임 문, 왕의 문 및 브란덴부르크 문
- 칼리닌그라드 동물원
- 소비에트 하우스 (쾨니히스베르크 성터에 지음)
-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
- 승리 광장 (시 중심부)
- 이마누엘 칸트 국립대학 (알베르티나 대학 터에 지음)
- 옛 요새들
주민 및 언어[편집]
본래 이 도시의 주민은 독일인이었으나 2차 대전 후 추방당하여, 지금은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인이다. 러시아인이 82%를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벨라루스인이 5%를, 우크라이나인이 4%를 점한다. 그 외에 1.4%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 출신이고, 0.8%가 아르메니아인과 독일인, 0.5%가 타타르족, 리투아니아타타르족과 유대인, 바슈키르족, 폴란드인이다. 주민들 대부분은 러시아어를 쓴다.
산업 및 경제[편집]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해에 접한 부동항이자 해군기지, 산업·어업·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군사[편집]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주는 중무장된 지역이다.
▷현재 러시아는 유럽 쪽의 유일한 부동항으로 칼리닌그라드를 갖고 있다. 한때 프로이센의 주도(主都)였고, 독일 철학자 칸트의 고향이지만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소련의 리투아니아 공화국 땅으로 편입됐다. 소련 해체 뒤에도 러시아 땅으로 남은 이유는 1990년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독일 정부가 소련 영토임을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이곳에 유럽 심장부를 겨냥한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배치돼 있다고 러시아가 인정했다. 칼리닌그라드를 둘러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미국이 즉각 반발했지만 러시아는 미국과 나토가 유럽 미사일방어(MD)망 구축 계획을 강행하는 데 따른 대응 조치라며 완강하다. 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이 되는 2014년을 앞두고 유럽에선 전쟁 전야(前夜)에 대한 책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 유럽에서 칼리닌그라드는 고독한 섬 같은 운명이다.
▷이곳에 유럽 심장부를 겨냥한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배치돼 있다고 러시아가 인정했다. 칼리닌그라드를 둘러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미국이 즉각 반발했지만 러시아는 미국과 나토가 유럽 미사일방어(MD)망 구축 계획을 강행하는 데 따른 대응 조치라며 완강하다. 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이 되는 2014년을 앞두고 유럽에선 전쟁 전야(前夜)에 대한 책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 유럽에서 칼리닌그라드는 고독한 섬 같은 운명이다.
러시아를 구성하는 83개의 행정 구역 가운데 21개는 공화국이다.
8. 칼미크 공화국 |
15. 세베로오세티야 공화국 |
1. 아디게야 공화국
아디게인은 크리미아 한의 타타르인이나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등 주위 민족의 위협 때문에 1550년대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때부터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에 많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여 아디게인을 비롯한 이 지역 토착민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 갈등이 원인이 되어 19세기 중반의 크림 전쟁 때 이들이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 제국에 맞서기도 하였으나 결국 1864년 러시아인에게 정복당해 추방되거나 러시아 내륙으로 강제이주되었다.
1918년에 쿠반 흑해 소비에트 공화국이 성립되었으나 곧바로 백군에 의해 전복되었다. 적군이 백군을 몰아낸 후에는 아디게야 자치주가 성립되었고, 자치주는 1937년에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크라스노다르 지방으로 합쳐졌다.
1922년 7월 27일에 체르케스 자치주(Черкес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가 설치되었다.
1922년 8월 24일 ~ 1928년 8월 13일까지 아디게이 자치주(Адыгей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로 변경되었다.
1991년 7월 3일까지 아디게이 자치주(Адыгей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는 크라스노다르 지방에 소속되어 있었다가, 1991년 7월 3일부터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공화국으로 승격된 뒤부터 몇달뒤인 1991년 12월에 아디게야 공화국에 최초의 의회가 들어서게 되었다.1992년 1월에 아디게야 공화국에 선거가 시작되면서 아슬란 자리모프(Аслан Алиевич Джаримов)가 아디게야 공화국 제1대 대통령이 되었다. 1992년 3월에 아디게야 공화국은 총리 선거를 시작하면서 제1대 총리로 아담 텔레우시(Адам Хусейнович Тлеуж)가 뽑혔다.
2.알타이 공화국
2002년 인구는 20만2,947명이다. 2002년의 조사에서 러시아인들이 11만6,510명(57%) 있으며
알타이인들은 6만2,192명(30.6%)를 차지한다.
다른 민족들로는 카자흐족{1만2,108명(5.97%)}, 텔렝기트족{2,386명(1.18%)}, 투발라르족{1,533명(0.76%)}, 우크라이나인{1,437명(0.71%)}과 독일인, 쿠마딘족 (0,46%),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등 소수 민족이 있다.
알타이 공화국은 1922년 1월 1일에 자치공화국이 되기 전에는 알타이 지방이 포함된, 오리로트 자치주(Ойро́т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로 있었다.
1948년 7월 7일에 개정이 되어서 고르노알타이 자치주(Го́рно-Алта́й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가 되었다. 1991년에 다시 개정되어 고르노알타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ASSR)으로 잠깐 개정되었다. 1992년부터 알타이 공화국이 되었다
3.바시키르 공화국=바시코르토스탄
러시아인 (36.3%), 바시키르인 (29.3%), 타타르족 (24.1%), 추바시인(2.9%), 마리인(2.6%), 우크라이나인(1.3%), 모르도바인(0.6%), 벨라루스인과 독일인(0.6%)이 거주한다.
사용 언어: 러시아어 (96.4%), 타타르어 (34.0%), 바시키르어 (25.8%).
- 인구: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의 인구는 410만4336명(2002년)으로 262만6613명은 도시에, 144만7723명은 농촌에 거주한다. 인구밀도는 28,4명/km2 (2005년)이고, 인구의 59,7%가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2005).
1919년 3월 23일에 바시키르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설치되었다.
1992년 5월 31일에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10월 11일에 주권을 선언했으며
1993년 12월 24일에 헌법을 채택되면서 ‘바시코르토스탄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주민은 러시아인 (69.9%), 브리야트족 (24%), 우크라이나인 (2.2%), 타타르족과 몽골족 (1%), 벨라루스인 (0.5%), 유대인 (0.06%), 기타(2,5%)(대부분이 에벤키인, 독일인, 투바인) (1989년의 조사에서)이다.
17세기중엽에 러시아인들이 식민지로 개척을 했다.
1923년 5월 30일에 브리야트-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58년까지는 브리야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었다. 1992년에 브리야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은 브리야트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5.다게스탄 공화국 : 이슬람교
주민[편집]
- 인구: 257만6,531명 (2002)
소수민족[편집]
이 나라의 사람들을 다게스탄인이라고 불렀다. 다게스탄에는 여러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소수 그룹을 형성하는 발카르족(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에 주로 거주), 기누흐족(200명), 아흐와흐족 등을 포함해서 40개의 민족이 거주한다. 라크인과 훈지브족, 훈잘족과 아랍인, 이란인, 터키인도 거주한다.
러시아어가 공용어이다. 30개 이상의 지방 언어가 쓰인다.
7세기에 이 지역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18세기에 러시아와 이란은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1813년에 이 지역은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8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이곳은 계속 반러 봉기(이맘 샤밀이 주도함)가 일어났다.
이 반란은 나중에 진압되었다.
1921년에 다게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Дагестанская АССР)이 설치되었다. 1
991년 9월 17일에 잠시 다게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가,
소련 해체 전인 1991년 12월 17일 다게스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1994년에는 다게스탄 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6.인구시 공화국 : 체첸과 친함
인구시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구시어는 체첸어와 마찬가지로 북중카프카스어족에 속한다. 2002년의 조사에 따르면 77%를 차지하고, 36만여 명이 거주한다. 체첸인(95,403명, 20.4%), 러시아인(5,559명, 1.19%), 터키인(903명, 0.2%)과 아랍인, 조지아인 등의 기타 민족이 거주한다.
인구시 공화국은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처럼 러시아를 싫어하고 많은 러시아 인들이 이 나라를 떠났기 때문에 러시아 인들의 비율은 점점 감소하고 있다.
- 인구: 46만 7,294명(2002년)
인구시와 체첸은 1859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러시아 제국이 해체(1917년)되자 체첸과 인구시는 자치를 얻었다.
이때 체첸과 인구시는 하나가 되었으나 2차 대전 중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스탈린은 체첸인과 인구시인을 중앙아시아로 쫓아냈다.
1958년에야 체첸인과 인구시인은 귀환을 할 수 있었다.
7.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 : 터키계 이슬람 민족이다
카바르디노발카리아에서는 카바르디어와 발카르어가 쓰인다.
카바르디어는 카프카스어족에, 발카르어는 투르크어족에 속해 있다.
43%가 카바르딘인, 8%가 발카르인이지만, 러시아인은 33%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인 1,7 %, 오세트인 1,3 %, 독일인 1,1 %, 터키인 0.97%, 아르메니아인 0.59%, 한국인 0.5%, 체첸인 0.5%, 기타 6,3 %가 차지하고 있다.
- 인구: 90만1,494명 (2002년)
카바르디인은 아디게인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터키계 이슬람 민족이다.
이들은 크리미아 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561년 러시아의 이반 4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힘을 빌었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역할을 하여 1739년에는 중립을 표방하는 국가도 건설하였다. 그러나 1774년에 결국 러시아로 병합되었고 많은 카바르디인들이 오스만제국의 영토로 이주하였다.
발카르인 역시 크리미아 타타르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민족집단으로, 카바르디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오다가, 1827년부터 러시아의 확고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하면서 1921년에 발카르 자치구(Okrug)와 카바르딘 자치구가 수립되었으며, 1922년에 이들이 통합되어 카바르디노-발카르 자치구가 만들어졌다가 곧 자치주(Oblast)로 재구성되었고, 1936년에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발카르인들은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는 혐의로 1943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해 이 지역은 카바르딘 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1956년 흐루쇼프에 의해 귀향이 허락된 발카르인들이 돌아오자, 다시 카바르디노-발카르 자치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발카르의 몇몇 지도자들이 1996년에 러시아 연방에 속하는 발카르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으나 발카르인들의 지지를 그다지 얻지 못하자 곧 이를 취소했다. 그동안, 1991년 12월 31일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은 주권을 선포했으며, 1995년 연방과 상무 협약을 체결하였다. 2001년 7월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는데, 이 헌법은 공화국의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8. 칼미크 공화국 :몽골 계통의 민족
주민은 러시아인과 칼미크인이 대부분이다. 소수민족은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독일인, 카자흐인, 타타르족, 고려인, 체첸인, 다게스탄인, 다르긴인, 아바르인, 터키인, 기타가 거주한다.
칼미크인들은 반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계통의 민족이다. 원래 중국 중서부에 거주하던 민족이었는데 중국인들에게 밀려서 17세기 초부터 볼가강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십 수만에 달하던 이들은 칼미크 한을 세우기도 했으며 1771년에 러시아에 멸망당했고, 이 지역에 러시아인 및 독일인들이 많이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칼미크 자치주는 1920년 11월 4일에 성립되었고 다른 러시아지역에 살던 칼미크인들도 칼미크 자치주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다. 이 지역은 1958년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으나, 칼미크인들이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면서 자치 지역은 해산되었다.
흐루쇼프에 의해 귀향을 허락받아 1957년에 자치주가 회복되었다가 1958년에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스탈린의 강제 이주에 대한 항의와 지역의 지하자원의 통제권에 초점을 맞춘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였다.
러시아인(33.6%), 카라차이인(38.5%), 체르케스인(11.3%), 아바진인 또는 아바자인, 노가이인(3.4%), 우크라이나인(1,5 %), 기타 5,4 %(대부분이 타타르족) 등 80개 이상의 민족들이 거주한다.
최근 조사에서는 러시아인 비율의 줄어들었는데, 1990년대 이후의 북코카서스 지방의 불안정화, 경제 상태의 악화등이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노가이인의 인구를 웃도는 약 2만명의 체첸인 난민이 유입했다.
- 인구: 43만9,470명 (2002년)
1918년 4월 1일에 이곳에 잠시지만 쿠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고, 1918년 5월 28일에 쿠바노체르노모르스카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1918년 7월 5일에서 1918년 12월까지 북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1921년 1월 20일에 고르스카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의 일부에 속하게 되었다.
1922년 1월 12일, 카라차예보체르케스카야 자치주(Карачаево-Черкес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가 설치되었다.
10. 카렐리야 공화국
카렐리야 공화국(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Каре́лия, 카리알라어: Karjalan Tazavalla/Карьялан Тазавалла, 핀란드어: Karjalan tasavalta, 벱스어: Karjala, 문화어: 까렐리야 공화국)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수도는 페트로자보츠크이고 인구는 71만 6281명(2002년)이다
카렐리야 공화국의 주민들은 대부분 러시아인(73.6%)과 카리알라인(10.0%)이다. 벨라루스인(7.0%), 우크라이나인(3.6%), 핀란드인(2.3%), 라프인, 벱스인(0.8%), 기타도 거주한다.
11. 코미 공화국 : 핀계
코미 공화국은 핀계의 코미인과 코미지리안인들이 거주한다. 공화국 주민의 25%를 차지하고, 러시아인들은 이 공화국에서 다수 민족인데, 58%를 차지한다. 그외에도 우크라이나인(6.10%), 타타르족(1.54%), 벨라루스인(1.49%), 독일인(0.91%), 추바슈인(0.74%)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의 75.3%가 도시에 거주한다.
공용어는 코미어와 러시아어이고, 대부분이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다.
- 인구: 101만8,674명 (2002)
12세기부터 이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1478년에 모스크바 공국에 병합되었다. 1697년에 이 지역에 석유가 발견된 이후 석유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혁명 이후에는 1921년 8월 22일 코미 자치주(oblast)가 성립되었고 1931년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코미공화국은 1990년 8월 30일 주권선언을 하고 1994년 2월 17일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2001년 9월에 코미공화국의 주권선언이 연방법과 충돌한다는 연방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주권선언을 철회하였다. 2002년 5월에는 96년에 맺었던 쌍무조약을 취소하며 푸틴과 새로운 조약을 맺었다.
12. 마리옐 공화국
마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초원 마리인(марий йылме)과 산지 마리인(мары йӹлмы), 동부 마리인으로 나뉘어 있다. 체체미스인이라고도 하며 핀우고르어파의 마리어를 쓴다. 마리어의 방언인 초지 마리어가 러시아어와 함께 공식언어로 지정되어 있다.
마리인의 48.3%가 마리엘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다. 4.1%만이 러시아밖에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인이 47.5%를 차지하고, 마리인이 42.9%, 타타르족이 6.0%, 기타 3.6%(추바시인, 우드무르트인, 모르도바인, 우크라이나인등)가 거주한다.
- 인구: 727,979명 (2002년)
마리인은 몽골/타타르의 지배를 받다가 1552년이 카잔 한국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리인들은 러시아 정교를 받아들였고, 1870년대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는 종교운동인 Kugu Sorta를 제외하면 그다지 러시아인에 저항적이지 않았다.
이 지역엔 1930년에 마리 자치주가 성립되었고 1936년 12월 5일에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공화국은 1990년 10월 22일에 주권을 선언하였고 1991년 12월 14일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13. 모르도바 공화국
러시아인 (60,8 %), 모르도바인 (32,5 %)들이 거주한다. 타타르족 (4,9 %)과 아르메니아인 0,15%, 벨라루스인 0,14%, 기타 (1,8 %)가 거주한다.
모르도바인들은 핀우고르어계의 모르도바어를 쓴다. 모크샤어와 에르자어가 쓰이는데 둘 다 모르도바의 공식언어이다.
- 인구: 888,766명 (2002년)
모르도바인은 몽골과 타타르의 지배하에 있다가 1552년 카잔 한국이 러시아에 멸망당하자 자발적으로 러시아에 복속되었다. 이 지역에 러시아인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러시아인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1890년대 모스크바와 카잔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자 지역의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게 되자 더욱 그랬다. 모르도바인은 상당히 러시아인에 동화되었지만 1928년에 모르도바 자치구(Mordovian autonomous Okrug)가 만들어졌고, 이가 1930년에 자치주(Mordovian Autonomous Oblast)로 승격되었고 1934년에는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이 공화국은 1990년 12월 8일에 주권을 선언하며 모르도바(Mordoviya) 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도시의 인구수는 야쿠츠크 (23만 5,600명), 네륜그리 (6만 9,100명), 미르니 (34,400명), 렌스크 (2만 6,200명), 알단 (20,500명)이다.
이 지역에는 여러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이 야쿠트인(45.54%)과 러시아인(41.15%)이다. 다른 소수 민족은 우크라이나인(7%)과 체첸인, 아제르바이잔인, 고려인, 아르메니아인, 중국인, 에벤인, 에네트인, 나나이인, 돌간인, 축치인, 유카기르인 등이 있다. 2002년의 조사에서, 사하 공화국에 거주하는 민족은 127개이다.
공용어는 야쿠트어와 러시아어이다. 러시아어는 25%가 쓰고 있다.
야쿠트어는 투르크어족에 속하나, 몽골어에서 차용어가 들어왔다.
- 인구: 949,280명(2002년)
‘사하(Sakha)’는 이 지역의 중심민족인 야쿠트(Yakut)인들의 별칭이다. 이들은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 전통적으로 반유목생활을 해 왔다. 이들의 지역은 1620년대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가 모피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자, 야쿠트인들은 이에 1634년과 1642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였다. 이 지역은 극동으로의 우편 체계의 완성, 정치범 수용시설의 건설, 1846년의 금광 발견 등으로 러시아인의 유입이 크게 증가하였고,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과 레나(Lena) 강으로의 상선 운영으로 러시아인들의 유입이 더욱 증가하였다.
1851년에 야쿠츠카야 주가 설치되었다. 1922년 4월 27일에 야쿠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1991년 12월 28일에는 잠시 야쿠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1992년 4월 27일에 사하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15. 세베로오세티야 공화국
인구시인과 아르메니아인그룹이 거주하고 있다.
오세티야인들이 53%, 러시아인 (30%), 인구시인 (5%), 아르메니아인 (2%), 쿠미크인(1.78%), 조지아인(1.52%), 우크라이나인(0.73%)순으로 되어 있다.
- 인구: 710,275명 (2002년)
카바르디인들과의 충돌 때문에 오세티아인들은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했고, 기존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대신 러시아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러시아인은 오세티아인들이 무슬림이 많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정교회를 믿는 종족 중 하나였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북카프카스의 오세티야인 거주 지역은 1774년에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1921년에 오세티야는 고르스카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24년에 이 지역은 자치주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1936년에는 세베로오세티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СОАССР)이 되었다. 1922년에 남오세티야 자치주가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오세티아인들은 2차 대전 동안 소련에 보여준 충성을 높게 평가받았다. 소련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잉구쉬인들의 영토를 빼앗아 오세티아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하부민족인 디고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였다.
북오세티아 공화국은 주위 국가·지역과 영토분쟁이 많은 편이다.
1990년 그루지야가 독립을 선언할 때 그루지야에 속했던 남오세티아의 오세티아인들이 그루지야에서 분리하여 북오세티아와 통합하려 하였다. 1992년 1월 남오세티아의 국민투표에서 통일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보였다. 그러나 그루지야 정부는 이에 강경 대처했고, 남오세티아의 오세티아인들이 북오세티아로 도피해왔다.
한편, 소련의 붕괴 이후 잉구쉬인들은 소련에 의해 몰수당했던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자 하여 1992~1994년 동안 북오세티아 공화국과 잉구쉬 공화국 사이에 수백 명이 죽는 무력 충돌이 있었다.
16. 타타르 공화국 : 카잔 한국
국명은 타타르스탄 공화국으로, 러시아어로 번역하면 레스푸블리카 타타르스탄, 가끔 타타르어에서는 Tatarstan Cömhüriäte(라틴, cömhüriät는 공화국이라는 뜻)이라는데 이것은 아랍어의 줌후리야(Jumhuriyya)에서 유래된 말이지만, 공식이름은 아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전에 타타르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의 자치 공화국이었다.(타타르 ASSR) 다른 러시아어 이름은 Тата́рия (타타리야)로, 소비에트 연방의 자치 공화국이었을 때 불렸던 이름이었다.
타타르족 (51.3%), 러시아인 (41%), 추바슈인 (3%), 우크라이나인 (0,6%) 이 거주하고 있다. 모르도바인, 우드무르트인, 마리인, 바슈키르인도 타타르스탄에 거주하고 있다.
공식 언어는 타타르어와 러시아어이다. 2002년, 러시아연방법에 따르면 공식문자는 키릴 문자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타타르 측에서는 라틴 문자도 쓰고 있다. 인구는 377만 9,265명 (2002년)이다.
타타르인들은 카잔 땅에 카잔 한국을 세웠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살아왔으나, 1552년 이반 4세의 러시아 제국에 정복되었다. 일부 타타르인들은 정교로 개종하여, 크리아센(Kriashens)이라는 하위민족을 이루게 되나, 대부분의 타타르인들은 개종을 거부하였다.
현재의 타타르 공화국은 1920년 5월 27일 소비에트 연방의 자치 공화국으로 성립되었다. 1990년 8월 31일 주권선언을 한 타타르 공화국은 체첸을 제외하면, 1992년 연방조약을 거부한 유일한 공화국이다.
공화국 대통령 샤이미예프(Shaimiyev)는 1994년에 연방 정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여, 석유자원 및 산업시설에 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대부분의 세입에 대한 권리·독자적인 대외 무역 정책을 추진할 권리 등을 얻어냈다. 이 협약은 다른 공화국들에게도 자극을 주어 연방정부가 공화국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특혜를 주는 시발점이 되었다.
투바 공화국(투바어: Тыва Республика 트바 레스푸블리카,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Тыва 레스푸블리카 티바[*])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국교는 불교이며, 수도는 키질이다
주민[편집]
2002년의 조사에서 투바인 (또는 투빈인)들이 77%(23만5,313명)이 거주하고 있다. 투바인들은 투르크종족이지만 불교를 믿는다. 러시아인(6만1,442명, 20.1%), 코미인(1,404명), 하카스인(1,219명)이 거주하고 있다.
- 인구: 30만7,925명 (2010)
역사[편집]
투바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44년 10월이다.
투바인들은 1758년부터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청나라의 혼란과 신해혁명을 틈타 1911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재빨리 이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언하여 지배권 아래 넣었고, 말뿐인 독립국으로 유지하다가 1944년 10월에 투바 자치주(Tuvinian Autonomous Oblast)로서 소련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61년 10월 10일에 소련의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투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은 1992년 3월 31일에 투바 공화국(Republic of Tuva)이 되었다. 1993년 10월 21일에는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18. 우드무르트 공화국
러시아인 (60.1%), 우드무르트인 (29.3%), 타타르족 (7.0%), 벨라루스인(2%), 우크라이나인(0.9%), 마리인(0.6%), 바시키르인(0.3%), 추바시인(0.2%), 독일인(0.2%), 기타(0.9%)가 거주한다. 2/3이상이 우드무르트밖의 지역에 거주한다.
- 인구: 157만316명 (2002년)
우드무르트인은 몽골과 타타르의 지배를 받다가 15세기 중반부터 차츰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정교를 받아들였으며 러시아에 비교적 순응적인 민족이었다.
1920년 11월 4일 이전까지는 보츠크 자치주가 세워졌다. 1932년 1월 1일이 되자 보츠크 자치주에서 우드무르트 자치주가 되었다. 다시 1934년 12월 28일에는 우드무르트 ASSR이 되었고, 1990년 9월 20일에 우드무르트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19. 하카스 공화국 :타타르와 뿌리가 유사한 민족으로 한때 시베리아에 강력한 국가
아바칸이 하카스 공화국의 중심지이다. 아바칸은 하카스 공화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하카스의 인구는 54만 명이고 아바칸의 인구는 16만 명이다.
러시아인 (60.1%), 우드무르트인 (29.3%), 타타르족 (7.0%), 벨라루스인(2%), 우크라이나인(0.9%), 마리인(0.6%), 바시키르인(0.3%), 추바시인(0.2%), 독일인(0.2%), 기타(0.9%)가 거주한다. 2/3이상이 우드무르트밖의 지역에 거주한다.
하카스인은 타타르와 뿌리가 유사한 민족으로 한때 시베리아에 강력한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이 17세기 때부터 이들의 지역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했는데, 하카스인들은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의 침입을 막아준다고 이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카스인들의 땅은 표트르 대제에 의해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러시아인들은 무거운 세금, 토지 갈취, 정교로의 개종 강요 등으로 하카스인들을 핍박했다. 그리고 1890년대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의 수가 하카스인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혁명 이후 1925년에 하카스 자치구(Khakass Autonomous Okrug)가 성립되었고 1930년 10월 20일에 자치주(Oblast)로 승격되었다. 1992년에는 연방 조약을 통해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헌법은 비교적 늦은 1995년 5월 25일에 채택되었다.
20. 체첸 공화국
거의 대부분이 체첸인이다. 일부는 러시아인, 잉구슈인, 우크라이나인과 기타 북카프카스계 민족도 섞여있다.
1989년에 행해진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의 통계에서는 체첸인이 956,879명, 잉구슈인이 237,438명으로, 269,000명의 러시아인은 인구의 약 23%로 소수 민족이었다.
그 후 서부가 잉구슈 공화국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잉구슈인들의 수가 절반 가까이 감소하고, 내전과 사회불안으로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체첸공화국에서 대부분 떠났다. 1990년대 체첸 공화국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은 약 6만 명이었다.
체첸 공화국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연방 중에서도 젊은 층이 가장 많은 인구 구성을 가진다. 1990년대에는 몇몇 지방에서 인구증가가 있었다.
1830년에서 1859년에 이르는 동안, 러시아 군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접경지역의 안보를 이유로 체첸에 진주했다. 체첸은 1859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됐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소비에트 정부는 체첸이 나치군과 협력했다고 비난하였다. 스탈린은 체첸 국민 전체에게 카자흐스탄으로의 강제이주를 명령했다. 그
후 스탈린이 사망한 지 4년 후인 1957년에 이르러서야 체첸인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21. 추바시 공화국
민족
2002년도의 인구 수 (*)
추바시인
889,3 (67,69 %)
러시아인
348,5 (26,53 %)
타타르족
36,4 (2,77 %)
모르도바인
16,0 (1,22 %)
우크라이나인
6,4 (0,49 %)
마리인
3,5 (0,27 %)
벨라루스인
1,9
아르메니아인
1,3
추바쉬인들은 13세기 몽골인과 타타르인들에 정복된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1551년 러시아 제국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후 강도 높은 러시아화의 영향으로 정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1917년 이후 자치권을 강하게 요구하여 1920년 6월에 추바쉬 자치주가 성립되었고 1925년 4월 21일에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추바쉬 자치공화국은 1990년 10월 27일 주권선언을 하고 1992년 3월에 추바쉬(Chuvash) 공화국으로 개명하였다.
'러시아·시베리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시베리아·레나강을 가다] 쇠락의 길 걷던 석탄도시, 신동방정책 플랫폼 꿈꾼다 (0) | 2017.12.03 |
---|---|
[스크랩] [시베리아·레나강을 가다] 1920년대 `골드러시`, 조선인들도 뿌리내려.. 천혜의 풍경 `새 희망` (0) | 2017.12.03 |
[스크랩] [시베리아·레나강을 가다] `소수민족` 야쿠트인, 러시아인과 융화.. 극동지역 개척 전초기지로 우뚝 서다 (0) | 2017.12.03 |
[스크랩] [시베리아·레나강을 가다] 다가올 북극항로 시대.. `극동의 젖줄`서 한국 미래 찾자 (0) | 2017.12.03 |
[스크랩] 러시아 황제(짜르) 계보 (0) | 2015.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