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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러시아 황제(짜르) 계보

러시아·시베리아

by Chung Park 2015. 4. 1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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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송한 러시아제국의 역사를 속기하듯 정리한 것으로 자의적으로 편집한 것임.

 

 [출처] 러시아의 역사-히스토리채널 방영분 중심|작성자 알탕

 

□ 제국의 탄생


 

“러시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러시아는 하나의 역사가 아닌 여러 가지 상반된 역사를 가진 나라”


“러시아는 수백개의 나라”

“러시아의 역사는 그 넓은 땅을 채울 만큼 아주 방대”


“러시아의 특징은 우선, 그 방대한 국토”

“유럽이면서도 유럽이 아닌 나라”



◇ 러시아의 기원


러시아는 한 번도 단일 국가였던 적이 없었으며,

그 국민 또한 단일 민족이었던 적이 없었음.

러시아는 여러 나라, 여러 민족들이 합쳐서 이루어진 나라.

 

러시아가 하나의 나라가 되기 이전,

유라시아 변방은 끝없이 이어진 강줄기들을 통해 연결돼 있었음.

널리 흩어진 사람들이 강으로 연결됐고, 강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함.

 

러시아는 강을 이용해 사방으로 뻗어나가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음.

강이 아니면 거대한 단일 국가가 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음


9C에 바이킹이 유럽의 경계선에 위치한 ‘드네프르’ ‘돈’ ‘볼가’ 江을 따라 남하.

바이킹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부유한 아시아아랍, 그리고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을 개척.


이 강변의 원주민들은 바이킹들을 ‘루스’라고 불렀음.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의 무역 거점이 된 이 지역을

‘루스들의 땅’ ‘러시아’라고 부르기 시작.


강변을 따라 주민들의 결속이 조금씩 늘어났고, 

강을 통해 이민족들이 서로 어울리다보니까 어느 사이엔가 러시아라는 큰 나라가 돼 버린 것.

 

 

◇ 키에프 공국


10C경에는 고만 고만한 도시국가들이 지금의 러시아 국토를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음.

그들은 서로 주도권을 다퉜음.

그 중 가장 강한 도시국가가 ‘키에프 공국’이었음.


키에프의 대공 블리디미르루스의 땅에서 최고의 강자였음.

그는 루스의 땅 전체를 혼자서 지배하고 싶었음.

대국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했음.

그러나 단지 힘의 우위보다 어떤 정당성을 근거로 한 중앙집권을 시도했음.


블리디미르는 루스의 땅에 사는 여러 종족들을 하나로 묶을 어떤 공통분모로 종교를 생각했음.

블라디미르는 종교를 도입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카톨릭 신자들을 두루 만나보게 함.

사신들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감.

그리스 정교의 심장부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신들은 드디어

블라디미르에게 힘을 실어줄 종교를 발견하게 됨.


콘스탄티노플의 위용과 영광은 블라디미르를 정교로 개종하게 만듦.

신의 대리인을 자처한 블라디미르 대공은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고, 어기면 처벌함.


블라디미르는 종교를 이용하여 루스의 땅을 통일했지만,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왕국은 아들들에 의해 다시 분열됨.


블라디미르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시바트폴크는 권력을 독차지하고 싶었지만,

나머지 형제 보리스글래프가 문제였음.


보리스와 글래프는 권력에 야심이 없었음.

보리스는 기도 중 시바트폴크가 보낸 암살자에게 저항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함.

보리스는 러시아의 대의를 위해(러시아의 분열을 막기 위해) 죽음.

또 다른 형제 글래프도 같은 방식으로 죽음


시바트폴크의 패륜으로 백성들이 봉기, 시바트폴크유배형에 처해졌고,

정교회는 보리스와 글래프를 성자로 추앙


보리스와 글래프가 흘린 피는 러시아정교 발전에 새로운 전기가 됨.

보리스와 글래프는 마치 예수가 수난을 당하듯이

무법자 시바트폴크의 공격을 저항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임.


보리스오 글래프의 죽음으로 러시아정교회는 신적인 권위가 생겨남.


그로부터 얼마 후 동방으로부터 침입자가 들이닥쳐 루스의 땅을 유린(몽골제국)


몽골은 1237년 루스의 땅을 침공.

단 3년 동안에 러시아 땅을 정복.

러시아 1천년의 역사동안 러시아를 무력 정복한 나라는 몽골 외엔 없었음


1240년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 은 키에프 성을 포위, 항복 요구.

키에프는 죽음을 선택함.

결국 처참한 폐허로 변함.


몽골제국의 지배는 2세기 반이나 지속됨.


침략군의 지배자는 몽골인이고,

군대는 동방의 투르크인.

러시아인들은 이들을 ‘타타르’라고 부름.


러시아 왕자는 장차 왕이 되기 위해서는

타타르 진영에 가서 자신의 모자에 말 먹이를 담아 말을 키우는 일을 해야 했음.

이러한 모욕의 댓가로 왕이 되고 나면,

그 이후엔 또 엄청난 조공을 바쳐야 했음.

 

  

모스크바 공국의 성장

 

모스크바 공작 (1283년 - 1359년)[편집]

류리크 왕조 (1283년 - 1359년)[편집]

모스크바 대공 (1359년 - 1547년)[편집]

류리크 왕조 (1359년 - 1547년)[편집]

           이반 4세 (이반 뇌제) (1547년 - 1584년)

동란 시대[편집]

           - 표도르 1세의 친동생인 드미트리 2세로 사칭하여 권좌에 올랐다. 처형됨.

차르 궐위 (1610년 - 1613년)[편집]

로마노프 왕조 (1613년 - 1721년)[편집]

            1721년 10월 22일 스스로 '러시아 국민의 황제'로 선언.

 

타타르 칸은 대공들 가운데 한 명을 정해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음.

당연히 가장 많은 조공을 바치는 자가 이 대리인 자를 얻음.

러시아 대공들은 이 자리를 노리고 서로 싸움.


그 중 한 도시가 몽골의 비위를 맞추는 법을 잘 알았음.

생긴지 겨우 1세기 밖에 안됐지만, 몽골의 호감을 샀음.

바로 모스크바.


12세기의 모스크바는 외딴 강변의 도시국가였지만,

13세기로 들어서면서 성벽, 즉 크레믈에 둘러싸여 성장하기 시작.


1325년 모스크바의 대공 이반1세몽골과의 교섭을 성공시킴.

이반이 모스크바를 포함한 러시아 전체의 조공을 합하여 칸에게 갖다 바치게 된 것.

이런 ‘마름’ 역할로 해서 그에게는 ‘칼리타’ 즉 ‘돈주머니’라는 별명이 붙여졌음.


모스크바 대공이 조공을 대신 갖다 바치는 마름 지위를 독점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몽골이 모스크바를 강국으로 만들어 준 결과임


모스크바공국은 다른 어느 공국보다도 자금이 풍부해졌음.

그 힘으로 당시 모스크바는 50여개로 나뉘어져 있던 도시국가들 가운데 군사적인 맹주가 되었음.


힘이 커진 모스크바 대공은 점점 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짐.

스스로 군대를 거느릴 역량이 갖춰지자 그는 몽골에게 등을 돌림.


1380년 새로운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전국에서 5만명의 군사를 소집.

드미트리는 이 군사를 이끌고 돈 강 강변에서 몽골군과 싸움.

 

수만명이 죽고 드미트리 자신도 부상당해 시체 틈에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살아났지만 러시아가 승리.

그러나 단번에 몽골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음.


이후 100년간에 걸쳐 독립을 얻기 위한 투쟁이 계속됐음.

한 두 차례의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나긴 과정을 거쳐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됨.

몽골이 내부 투쟁을 하는 동안 모스크바 공국은 점점 더 성장함.


15세기말 새로 등극한 모스크바 대공 이반3세부와 권력은 몽골 칸과 맞먹었다.

1480년 이반3세는 조공을 거절.

 

타타르 군대는 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지 못함.

몽골칸은 러시아의 지배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됨.


이반3세는 모든 루스들을 모스크바 공국의 깃발아래 뭉치게 하여 몽골세력을 몰아냄.

이반3세는 새로운 이름의 지위 ‘짜르’ 루스의 지배자 ‘황제’가 됐음.

 

이반3세(이반대제):(1462년 - 1505년)

1453년 정교회의 본산 콘스탄티노플의 이슬람 점령으로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자,

쇠퇴한 정교회를 이반3세가 모스크바에 옮겨와 정비.

 

비잔틴제국의 ‘쌍독수리’ 문장이반3세의 가문 문장으로 했고,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조엘’을 아내로 맞이하여 혈통의 권위를 높임.

이로써 모스크바 공국의 왕족 가계가 멀리 로마시대까지 올라가는 길이 트임.


이반3세는 아내의 말에 큰 영향을 받음.

같은 무리의 우두머리 보다는 유일한 높은 자 ‘짜르’(황제)가 돼라


1493년 이반3세비잔틴제국에서 사용하던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


이반3세는 모스크바를 새로운 로마로 만들기 시작.

이탈리아에서 일류 건축가를 초빙하여 건축물을 세움.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이 도시안의 도시인 것처럼, 모스크바의 크레믈도 도시안의 도시로 재건축함.


이전까지 농부들은 지대만 바치면 자유롭게 자신이 땅을 선택해 농사지을 수 있었지만

(지대가 비싸면 다른 농토로 옮겨갈 수 있었음),

짜르 이반은 농부들의 자유에 제동을 걸어, 

1년에 단 한 차례 겨울에만 농토 이동을 허용하여 거의 농노제에 가깝게 함.


1505년 이반3세가 죽고 아들 바실리가 대를 이음.

바실리는 제국 경영자로서 보다는 연인으로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남김.

바실리아내 살로메아를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구실로 수도원에 감금하고,

새 아내 ‘옐레나’를 맞이함.

 

그러나 정교회 대주교는 바실리의 재혼을 인정하지 않고 악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저주함.

대주교의 저주는 그대로 실행됨.

 

이반 뇌제 (그로즈니 이반4세  Иван ГрознЫй 1530-1584)


1530년 8월 25일 바실리의 아들 ‘이반4세’ 탄생.

전설에 의하면 하늘이 갈라지고 번개가 크레믈을 덮치는 가운데 이반4세가 태어났다고 함.

이 소문은 멀리 퍼져나감.

동방의 타타르 왕인 카잔의 칸은 러시아의 왕이 괴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


이반4세는 크레믈 내부의 암투 속에서 자람.

3세때 아버지 바실리가 사망하면서 권력투쟁이 시작됨.

어린 이반4세는 권력투쟁에서 밀린 보야르(귀족 боярин)들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자람.


이반4세가 태어난 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1547년까지 무려 14건의 궁정내 살인 사건이 발생.

크레믈은 음모로 뒤덮였고, 이반의 어머니까지 궁내 암투로 희생됨.

황태후(이반4세의 어미니)는 이반이 7세 때 독살됨.


본 것이라곤 폭력뿐인 이반은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음.

이반4세는 기회만 있으면 크레믈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하거나 독서를 하면서 복수할 계획을 꾸밈.


1543년 크리스마스 파티 때 이반4세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권세가문인 쉬이스키를 역적으로 몰아세움.


어린 황제 이반4세는 사나운 개를 키웠는데,

어느 날 쉬이스키가 입궐할 때 사나운 개를 풀어 쉬이스키를 물어뜯어 죽게함.

쉬이스키의 죽음은 왕권을 노리던 보야르(귀족)들에 대한 경고였음.


1547년 1월 크렘린 교회에서 ‘이반 바실리예비치’는 황제 대관식을 거행(17세).

16세의 이반4세는 단지 대공이 아닌 로마의 대를 잇는 황제(짜르)로 취임.

 

그는 할아버지 이반3세가 사용한 ‘짜르’라는 호칭을 공식사용.

이는 모스크바 공국이 러시아제국이라는 큰 나라로 변모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음.


이제 모든 권력이  짜르 이반4세 한 사람에게 집중됨.

보야르(귀족)가 있었지만 그 지위나 권력은 세습이 아닌 짜르가 직접 주거나 빼앗음.

이반4세는 영토 확장을 위해 동서로 군대를 파병함.

 

짜르의 통치 아래 모스크바 공국은 거대한 러시아제국으로 재탄생하게 됨.


1522년 이반과 그의 군대는 타타르의 요새 카잔(동방 무역의 요충지) 요새를 점령.

1556년 카스피해로 통하는 볼가강 유역 아스트라한을 점령함으로써

오랫동안 타타르의 지배지였던 곳이 러시아 땅이 됨.


폭군 이반4세 재위기간 동안 러시아의 영토는 하루평균 128평방 킬로미터씩 늘어난 셈.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반은 모스크바 한 복판에 승리기념 건축물로

‘바실리 성당’(Василий блаженный)을 세움.


이반4세는 권력과 영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아내 ‘아나스타샤’에 대해서도 정열적.

아나스타샤(Анастсия)장차 이어질 모든 러시아 왕의 정점에 위치하는

로마노프 가문임.


아나스타샤 황후가 살아 있을 때는 처형 같은 게 없었음.

황후가 살아 있는 동안 이반4세는 괜찮은 왕이었음.


1554년 후계자 ‘이반 이바노비치’ 탄생

1560년 이반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함.

모스크바 대화재로 잿더미가 됨.

거기다 황후 아나스타샤가 열병으로 앓다 사망.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이반은 전혀 다른 인물로 변함.

황태후가 독살된 것으로 봐서

혹시 황후 아나스타샤도 독살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음모’ 때문이라고 생각.

그래서 주변의 보야르 등 모든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


신하들의 수난이 시작됨.

군대의 영웅. 믿음직한 귀족들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유배되거나 처형당함.

짜르에게 가까울수록 먼저 죽는다”는 말까지 생겨남.


이반4세에게 ‘그로즈니’(두려운자, 무서운자, 폭군)라는 별명이 붙음.

사실 ‘그로즈니’라는 별명은 이반4세 자신이 붙인 별명.


폭정이 계속되자 1564년 이반4세의 최고위 장군이자 최측근인

‘안드레이 그레이브스키’ 장군마저 러시아의 적국으로 망명.

이반은 궁정 내부의 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


1564년 12월 짜르 이반은 짜르 지위를 버리고 크레믈을 떠남.

30년 이상 짜르로 있다가 이반이 떠나자 백성들은 나라가 분열될까봐 걱정함.

이반은 바로 그것을 노림.

 

제위를 포기함으로써 이반은 ‘짜르’라는 지위에 부과된 여러 가지 종교적, 정치적 제약에서 벗어남.

이것은 일종의 ‘자작 쿠데타’ 같은 것.

그는 백성들이 그의 복위를 간청해 올 것을 미리 알았음.

백성들, 특히 모스크바 주위 백성들은 보야르 계층을 불신했기 때문.


백성들은 이반4세를 찾아가 재위 복귀를 간청함.

이반은 환궁의 조건으로 마음대로 할 특권’을 조건으로 함.

복귀 이틀 후부터 공포정치를 시작해 수백명의 귀족과 사제들을 처형.

그에게 반대한 자는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빼앗김.


반대세력 말살을 위해 이반4세는 별도의 황제의 사병인 ‘오프리치니크’를 구성함.

이들은 최하층 계층에서 선발한 망나니들로 6,000명의 인간백정들임.

오프리치니크는 검은 옷의 수도승 복장을 하고, 수도승 흉내를 냈지만

실제로는 끔찍한 살인과 고문을 일삼았음.

* 오프리치니크(опричник) : опричинина의 대원. 오프리치니나는 이반4세의 친위대



이반4세의 의 잔인성은 신비주의와도 결합.

그는 보야르들만 죽인 게 아니라 그 가문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다 죽임.

그 이유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할 자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임.

누군가의 기도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죽인 사람들이

천당이건 지옥이건 갈 수 있게 한다면 그의 능력이 신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기 때문.


이반4세는 거의 8년 동안 자기 백성들과 전쟁을 치룸.

이렇게 되자 진짜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러시아는 너무나 약해져 있었음.


1571년 러시아의 오랜 숙적 타타르이반4세의 폭정을 틈타서

크림반도 북쪽으로 밀고와 모스크바를 유린,

목조 도시 모스크바를 단 3시간 만에 잿더미로 만들고 그날 하루 동안 6만명이 사망함.


이 대학살로 이반4세는 잠시 광기에서 깨어나 ‘오프리니치키’를 대폭 정리했지만,

천재지변까지 겹쳐 모스크바를 황폐화시킴.

(당시 모스크바 인구가 적게는 50~60%, 많게는 80~90%까지 줄었다고 함)


그런 지경에도 이반4세의 폭정은 끊이지 않음.

이반은 첫 아내 아나스타샤 사망 이후 여러번 재혼하는 바람에

교회도 더 이상 결혼을 축복하지 않음.

이반은 멀리 영국의 ‘메리 헤이팅스’(엘리자베스 여왕과 가까운 친척)와 결혼도 검토했음.


1581년 11월 이반4세는 황태자비가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던 차에

이에 항의하던 황태자를 무거운 장검으로 내리쳐 죽임.

황태자가 죽고 나서 이반의 기세도 한풀 꺾임.


1584년 3월 17일 자정이 다가올 무렵 갑자기 쓰러져 생을 마감.


폭군 이반4세는 작은 공국을 대 제국으로 키움.

그러나 그의 잔인함으로 후계자마저 목숨을 잃게 돼 제국은 주인 없이 남게 됨.

이반 4세는 근 7세기 동안 내려온 왕통을 스스로 끊어버림.

제국은 다시 국권을 둘러싼 혼돈에 빠짐.

 

고난의 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 1604-1613)


폭군 이반4세의 죽음(1584)으로 공포정치는 사라졌지만,

국권을 둘러싸고 혼란이 생김.

러시아인들은 1600년대를 (고난의 시대, 혼돈의 시대; Смутное время 1604-16013)라고 부름.

기근, 질병 등 모든 나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남.


표트르 이바노비치, 보리스 고드노프, 표드르 고드노프, 바실리 쉬이스키 등 

1598년~1610년 사이 6명의 왕이 자신이 짜르라고 주장했지만, 모두 살해됨.


크렘린이 권위를 잃자 노골적인 사기꾼들이 덤벼듦.

자기가 짜르 이반의 잃어버린 후계자라며 폴란드 출신의 한 사기꾼이 1년 동안 왕관을 썼음.

그 후 실체가 탄로나 러시아식으로 추방됨.

러시아 식이란 그를 죽인 후 화장해서 대포에 넣은 채 폴란드 쪽을 겨눠 발사.


그 후 사태는 더욱 심각해짐.

남부에서는 타타르의 습격과 농부들의 반란으로 모스크바의 권위가 추락.

 

북쪽에서는 당시 군사 강국인 스웨덴이 발트해 연안을 침범해왔고,

폴란드가 평원을 넘어 밀려옴.

1610년에는 폴란드 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기까지 함.


폴란드 왕은 러시아 짜르의 땅을 자기 땅으로 만들 속셈이었고,

실제로 짜르에 오를 가능성도 높았음.

그것을 두려워한 러시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남.


폴란드 군대는 러시아 마지막 권위의 상징인 정교회 대주교를 크렘린 감옥에 감금.

죽음에 직면한 대주교는 러시아 인민에게 나라를 구하라고 마지막으로 호소.

귀족과 농민 모두가 이 호소에 감동해 한데 뭉쳐 전국에서 민병대가 일어나 모스크바를 탈환.

2년에 걸친 공방전 끝에 러시아 민병대가 조국을 수호한 것임.


수도를 되찾은 러시아 국민들은 짜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함.

귀족, 상인, 전사, 사제 등 사회지도층이 모여 새로운 짜르를 뽑음.

 

폭군 이반과 혈연이 닿는 인물 가운데 신실한 정교회 신자

미하일 표트로비치 로마노프(당시 16세)를 뽑았는데,

미하일은 처음에 왕위를 거부했으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왕위에 오름.


1613년 7월 미하일은 ‘짜르’로 등극하여,

이후 300년 동안 로마노프 왕조가 이어짐(어떤 왕조든 300년 동안 계속됐다면 성공한 것임)


로마노프 왕조의 첫 두 짜르는 러시아 귀족에 대한 모스크바 공국의 지배권을 확립.

중앙집권에 도전하는 자는 유배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함.


반대로 충성을 바치면 그에게 주어지는 땅과 그 땅의 농부에 대해 전례 없이 강력한 권리가 주어짐.


고난의 시대는 러시아 농민에게는 출애굽 즉, 탈출의 기회였음.

농민들은 혼란을 틈타 땅과 빚, 지주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남.

이 때문에 러시아 경제가 쇠퇴함.


그 해결책은 ‘농노제’(1649년).

지주에게서 달아난 농민을 추적해 잡아와 땅에 예속시킬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를 준 것.

자유농민이 토지에 예속된 귀족의 법적 소유물로 전락함.

농노제는 로마노프 왕조가 망할 때까지 계속됨.


로마노프 왕조의 두 번째 짜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풍을 도입함.

서방과의 교류에 러시아 국경을 개방함.

한편 그의 군대는 동부로 뻗어나가 태평양까지 이르렀음.

또한 바다로 나가야 한다는 욕구가 컸음.

러시아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큰 바다로 나가된다고 생각.

동쪽으로는 태평양. 북쪽으로는 발트해, 남쪽으로는 흑해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음.


흑해에 대한 러시아의 욕심으로 이 지역은 전쟁과 평화가 계속 반복됨.

발트해를 지배하려는 야심은 알렉세이의 손자 표트르 대제에게 강박관념으로 작용.


 

표트르 대제(1672~1725)


1672년 5월30일 모스크바는 축제 분위기.

새 황태자(표트르-후처 소생)의 탄생한 때문.

영명한 표트르는 짜르의 재질이 보였지만, 문제는 황태자 서열이 밀렸음.

 

표트르의 아버지 알렉세이는 아내가 2명이었음.

전처 소생인 표(효)도르와 이반은 후처 소생인 표트르보다 서열이 앞서 있었음.

그런데다 이복누이 소피아’(이반의 누나)마저 대권경쟁에 끼어듦.

전통을 깨뜨리고 그녀 자신이 대권을 거머쥐려 함.


소피아는 영리한데다 보통 여성보다 많은 교육을 받았음.

소피아는 어린 동생 둘을 제위에 올려놓고 자신은 ‘섭정’이 됨.

당시 로마노프 가문 형편상 그럴 수밖에 없었음.


짜르 알렉세이가 죽자 소피아와 표도르가 제위를 이음.

그러나 표(효)도르도 얼마 안 가 죽음. 다음은 표트르의 차례였음.

표트르의 삼촌은 10살 소년 표트르를 새로운 짜르로 만들려고 함.

그러나 누이 소피아의 훼방으로 표트르는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음.


소피아는 표(효)도르의 죽음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림.

암살에 의한 죽음이라고 함.

소문의 위력은 대단해 귀족출신 스트리례츠(стрелец 16-17세기 러시아 친위병, 소총병)

표트르 가문을 응징하는 데 나섬.

 

표트르의 삼촌들 가까운 지인들, 부친의 밑에서 일했던 대신들이

방에서 끌려나와 곧추세운 창날 위로 내 던져짐.

그들의 시체는 다시 붉은 광장으로 끌려와 난도질당함.

사흘 동안 표트르 모자는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에 떨어야 했음.


표트르는 황태자 신분이라 죽음은 모면함.

합법적인 짜르를 죽이는 것은 큰 죄이기 때문.

소피아는 감히 표트르를 죽이지 못하고, 궁여지책으로 타협안을 냄.

 

짜르를 2명으로 만든 것. 이복동생인 표트르 1세그녀의 동생 이반 5세.

소피아는 그들의 섭정 자리에 앉아 실권을 휘두름.

아무리 막강해도 전통상 소피아 자신이 짜르가 될 수는 없었음.

(나중에 예카테리나 여제가 나오기는 하지만)


소피아는 자신을 ‘대섭정’이라고 하고 짜르의 복장으로 초상화를 그리게 함.

외국사신 접견 등에도 직접 나섬.

 

피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표트르는 수도 모스크바를 포기함.

소피아가 크렘린에 권력기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표트르는 어려서부터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해, 기술자들을 데려다 무언가 만드는 실습을 계속 함.

표트르의 경우 사생활의 자유는 많이 허용된 편


표트르(13세때)는 모스크바 외곽에 돌로 요새를 만듦.

그리고 300명의 건장한 소년병을 모집하여 이 요새에서 전쟁놀이를 함.

귀족과 평민의 자식들이 표트르의 사나운 전쟁놀이에 참가함.

비록 전쟁놀이지만, 사망자가 단 한차례 접전에서 24명이나 나옴.


17세 때 표트르 알렉세이비치 로마노프는 권력을 잡기로 마음먹음.

소년 표트르는 7척 장신이 됐고, 러시아에서 가장 세련된 2개 연대를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음.

그의 존재가 신하들을 압도함. 신하들은 위압감을 느낌.


1689년 표트르는 이복형제이자 공동 황제인 이반5세에게 편지를 보내 섭정을 물리칠 것을 제안.

1689년 8월 소피아와 스트리례츠(стрелец 16-17세기 러시아 친위병, 소총병)가

연합하여 표트르를 몰아낼 것이라는 소문이 돔.

 

소피아와 표트르의 실제 대결구도가 성립되자 사람들은 표트르를 지지함.

스트리례츠 대부분의 연대도 소피아가 아닌 표트르를 지지.

대섭정 소피아의 권력기반이 표트르의 대담한 첫 번째 도전 앞에 맥없이 무너짐.

소피아는 반역죄로 수도원에 감금.


17세기 말 모스크바 공국에서는 두 형제(표트르, 이반5세)가 공동으로 짜르의 지위에 앉아있었음.

17세기 러시아는 어느 모로 보나 중세기 방식을 답습하고 있었음.


러시아는 르네상스도 없었고, 17세기에 과학적 산업혁명도 없었음.


중세기적 환경에서 성장한 표트르는 근대적인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함.

서구에서 온 것은 사람, 사상 심지어 복장까지 좋아함.


1696년 공동 짜르인 이반5세가 죽음.

표트르는 단독 짜르에 오르면서 그의 필생의 목표를 천명함.

서구화만이 당시 러시아의 살 길이었음.


표트르가 건설하고자 하는 새 러시아는 한 마디로 ‘배’였음(전함, 상선, 수송선).

짜르 표트르의 꿈은 해군을 통해 러시아를 변화시키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일이었음.

표트르는 배 만드는 일을 어려서부터 좋아함.

조선에 관해서는 뭐든지 배우려고 함.

 

그러나 러시아는 해양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였음에도 사방이 대륙에 막혀있었음.

러시아는 항구가 필요했고, 특히 유럽으로 향해 열려있는 창이 필요했음.


러시아를 고립과 후진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자면 서구와 교류를 활발하게 해야 하고,

서구의 선진 기술과 사상, 상품을 들여와야 했음.

그러자면 부동항이 필요했음.


23세 때 표트르는 흑해 연안인 아조프(터기의 거점)에 눈독을 들임.

1695년 표트르의 군대가 남진하여 아조프를 쳤음.

표트르 자신도 포병으로 참전.

 

표트르는 전쟁의 현장에 있었고, 그 후에도 항상 현장에 있었음.

전쟁이 아닌 곳에도 항상 현장에 가서 봐야 하는 성격이었음.

신변의 위험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나, 그의 군대는 터키에 패함.

패전은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줌.

해군 기지를 얻으려면 적을 공격할 해군이 먼저 필요하다는 사실.


그는 5개월 내로 함대를 만들라고 명령.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는 ‘해군’이라는 것이 없었음.

그래서 우선 조선소를 지어야 했고, 외국에서 조선 기술자를 데려와야 했음.


조선소 현장에 표트르가 직접 나와 독려한 끝에 러시아 해군이 탄생함.

이듬해 봄, 러시아 함대가 돈 강 하류로 시험항해를 했고, 짜르 자신도 탑승.


육군으로 흑해 연안인 아조프를 공격하고, 해군으로 함포 사격을 한 끝에 쉽게 아조프를 함락.

이 성공으로 표트르는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끈기를 갖게 됨.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실전 경험을 통해 막강해짐.


마침내 흑해에 항구를 갖게 됐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표트르는 유럽이 가진 첨단기술 전함을 갖고 싶어함.

그래서 표트르 자신이 직접 나라를 떠나 몸소 유학길에 오름.


표트르는 장기간 왕궁을 비운 유일한 짜르이자, 유럽을 직접 가 본 유일한 짜르였음.

한 마디로 ‘혁신가’였음.


1697년 겨울 200여명의 귀족과 기술자, 악사, 하인, 왕자들을 거느리고

1년반 예정의 유럽 유학길에 오름.


과학기술에 목마른 표트르에게 서유럽은 지식의 보고였음.

인쇄술, 금형기술, 제지술, 심지어는 고래기름 정제술도 배움.

해부학과 수술, 미술, 치과학을 배움. 그는 만물박사였음.


그가 가장 관심을 둔 것은 조선기술

네덜란드의 조선소 대목수에게 조선술을 배운 그는

러시아 목수에게 대형 대포를 실을 수 있는 전함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함.

표트르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해양산업이 발달한 영국으로 건너 감.

영국에서 항해술을 배움.


영국은 표트르가 묵을 저택까지 제공했지만, 표트르는 무례로 이를 갚음.

정원과 울타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집안에서 총을 쏘는 등 훼손함.

어떤 면에서는 황제가 아니라 개구쟁이 아이 같았음.

영국뿐 아니라 이들 일행이 다녀간 곳은 성한 곳 없는 난장판이 되어있었음.


1698년 7월 빈에서 파티를 열고 있던 표트르는 모스크바로부터 긴급 연락을 받음.

짜르의 부재를 틈타 반동적인 스트리레츠가 반역을 꾀한다는 연락이었음.

이 때문에 짜르의 16개월 간의 유럽 연수는 이렇게 갑자기 중단됨.


1698년 러시아로 돌아와 자신의 나라와 유럽을 비교해 보니

러시아는 너무나 초라하고 낙후돼 있었음.

수도 모스크바는 너무 음울했고, 러시아 귀족들은 털보에 촌스럽기 짝이 없었음.

그리고 정교회는 짜르의 돈으로 운영되면서도 너무 많은 독자적 권한을 쥐고 있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트리례츠(친위 소총부대)는

너무나 보수적이어서 공개적으로 표트르와 대립함.

 

표트르는 모든 것을 바꾸기로 함.

그는 전혀 새로운 나라, 서구화된 나라, 질서와 진보가 확립된 나라로 가는 혁신을 단행하기로 함.

그의 혁명은 이발로 시작됨.


귀족들에게 복장을 바꾸라고 명령.

전통의상인 카프탄 복장을 하면 즉석에서 아랫단을 짧게 자름.

그가 러시아인에게 요구한 것은 이제 러시아인을 그만 두고 유럽인이 돼라!

교육을 다시 받아서 유럽식 신사 숙녀가 돼라!는 것이었음.


급진적 변화, 그는 러시아를 암흑 바깥으로 끌어내려고 혼자서 소리치며 발길질 하며 애씀.


표트르는 새로운 러시아의 실현을 위해 피 흘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음.

그는 러시아의 반동 보수 군부 ‘스트리례츠’ 중 1,182명을 처형.


표트르는 발트해에 항구를 가져야 세계로 향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을 제위 내내 가짐.

표트르 차르

 

그러나 1700년대 당시 발트해 연안은 다른 나라의 것이었음.

칼 12세’라는 강력한 왕이 다스리는 스웨덴이 발트해를 노리는 표트르에게 쓴 맛을 보여줌.

수만명의 목숨과 20년간의 북방전쟁이 바로 그것.


1700년에 시작된 러시아-스웨덴 전쟁.

표트르의 4만 군대가 스웨덴의 나르바로 진격.

칼12세의 군대는 겨우 8,000으로 수적으로 5분의 1에 불과했지만,

승기를 잡은 것은 오히려 칼12세.

칼 12세

스웨덴 군은 눈보라 속의 러시아군을 습격하여, 대승을 거둠.


러시아를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칼12세는 내친김에 서쪽 폴란드까지 쳐 들어감.

그러나 이것은 과욕이었음.


표트르는 전국의 교회에 있는 종을 녹여 대포를 만듦.

군비 마련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러시아 농민 4만5천명을 징발해 병력 보강(당시 러시아군 복무기간은 25년)


1703년 칼12세의 군대가 폴란드로 들어간 틈을 타

표트르의 해군이 발트해로 나가 핀란드만에 교두보를 마련.

네바 강과 만나는 늪지대 섬에 기지를 세움.

바로 그곳에 도시를 건설함.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여서 모든 것을 새로 세워야 했음

이것은 새로운 러시아의 가시적 상징이라는 중대한 사업이었음.


1703년 5월 짜르가 친히 도끼를 들고 도시 건설에 착수.

‘상트 페테르부르크’

요새를 굳건히 하고 전함을 정비.

그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원해, 돈이 얼마가 들든 그렇게 지으라고 명령.


수만명의 농노, 군인, 심지어 스웨덴 포로들까지 동원해 도시를 건설.

일꾼들이 한꺼번에 수천명씩 죽어나감. 강제 노동으로 도시를 건설함.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사람 뼈 위에 세워졌다는 말도 있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강제로 근대화를 이루게 된 것.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새 도시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이기도 함.

짜르의 여름궁전을 지어 베르사유의 영광을 능가해보려고 함.

그는 신하들을 서쪽으로 열린 창문도시로 이주시킴.

그곳에 가서 지을 집 모양까지 정해줌.


새 도시(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탄생부터 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음.


스웨덴 왕 칼12세는 표트르가 새 도시를 건설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웃음.

1708년 스웨던 군대는 폴란드를 떠나 모스크바를 향함.

표트르는 불로 응대함. 스웨덴 군대가 가는 곳마다 불을 지름.

결국 칼12세가 정복한 것은 전부 잿더미 뿐

이윽고 겨울이 오자 스웨덴 군은 러시아 영토 한 복판에 갇혀버림.

수백킬로미터의 보급로가 끊어져 식량과 탄약이 바닥남.

봄이 오자 표트르는 새로 조련한 6만 대군으로 칼12세의 군대를 응징하기 시작.


1709년 우크라이나 외곽 폴타바라는 도시에서 맞섬.

부상당한 칼12세는 전투에 임함.

숫적으로 열세인 스웨덴 왕은 오히려 공격 명령을 내림.

러시아 군대가 물러났지만, 대신 러시아 대포가 스웨덴 군대를 유린함.


이로써 러시아는 발트해의 새 주인이 됐고, 마침내 유럽의 강국이 됨.


1711년 표트르는 수도를 그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김.

그러나 러시아 백성들은 여전히 모스크바를 수도로 여김.


러시아 최초의 신문, 최초의 병원, 최초의 박물관, 최초의 항해학교, 지리학교,

수학학교, 정치학교, 천문학교, 해군, 육군, 그리고 새로운 수도. 심지어는 왕관까지 바꿈.


궁정음모를 보고자란 표트르는 40대에 이르자 갑자기 앞날이 불안해짐.

그는 새 러시아를 이어갈 충성스럽고 유능한 지도자를 원함.

그러나 외아들 알렉세이는 위대한 아버지가 볼 때 매우 실망스러웠음.


아들은 아버지와 대조적, 키도 작고, 게으르고 굼뜨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했으며

영리하지도 않았음.


황태자는 아버지에게 후계자의 부담을 거둬줄 것을 요청.

 


리투아니아 농부의 딸,

마르파 스카브론스카(소위 종군위안부)로 미인이었고,

러시아 장군들이 좋아함.

그러다 표트르의 눈에 띄게 돼 표트르의 정부가 됨.


표트르의 가장 가까운 명사가 되면서 ‘예카테리나’라는 이름까지 얻음.

그녀는 표트르에게 꼭 필요한 조력자였음. 전쟁터까지 표트르를 따라감.

그녀는 표트르를 편하게 보살폈고 아들까지 낳아줌.


표트르와 농노출신 여왕은 처음엔 비밀리에, 나중엔 정식으로 결혼함.

그 후 황후 대관식까지 함.


1715년 표트르가 그렇게 원하던 새로운 후계자인 아들을 낳아줌.


이복동생이 태어나자 25세의 황태자 알렉세이의 입장이 묘해짐.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후계자 수업을 쌓든지 아니면 수도승이 되라고 최후통첩을 보냄.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알렉세이는 아버지를 피해 외국으로 달아남.


그러자 표트르는 이것이 러시아 왕권 찬탈 음모라고 오해함.

그래서 스파이를 보내 오스트리아로 달아난 알렉세이를 꾀어서 데려온 후 가두어버림.

상트 페테르부르크 섬 감옥에 갇힘. 알렉세이는 아버지의 친국을 받음.

 

알렉세이는 고문에 의해 아버지가 씌운 혐의를 모두 시인하고 아무 이름이나 협력자라고 말함.

표트르는 이틀 동안 아들을 매질하라고 명령.

(15대~20대가 상한선인 채찍질을 단 한차례 동안 25대를 때림)


1718년 6월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는 아버지 내린 명령에 의해 매를 맞고 사망.


그로부터 1년도 못가 운명의 여신이 이번에는 표트르를 배반,

어린 아들, 사랑하는 예카테리나의 소생이 죽음.

러시아는 이제 후계자가 없어졌음.


1724년 11월 어느 추운 날 표트르는 발트해에서 배 한척이 침몰하는 광경을 목격.

그 순간 황제는 선원을 구출하기 위해 추운 바다에 뛰어듦.

그 일이 있은 후 짜르는 병석에 눕게 됨.

1725년 1월 병석에서 짜르는 유서를 쓰기 위해 펜을 듦.


두 명의 아내로부터 15명의 아이들을 얻었지만, 살아 남은 것은 딸 둘 뿐.

그는 유언장에 모든 것을 준다라고 썼지만,

받을 자의 이름은 공란으로 둔 채 후계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

 

예카테리나 1세(재위 1725년 - 1727년)

 

(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I Алексеевна, 1684년 4월 15일 - 1727년 5월 17일)는

표트르 1세황후이자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여황제(재위 1725년 2월 8일 - 1727년 5월 17일)이다.

생애

표트르 1세의 두 번째 부인으로, 리투아니아 출신이다.

거기에다 그녀는 귀족 출신이 아닌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1698년에 당시 예카테리나와 사랑에 빠진 표트르 1세는 본부인인 황후 예브도키아 로푸히나가 성정이 너그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정교회 수녀원으로 강제 추방시켰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1712년에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되었다.

 

1725년 표트르 1세폐렴으로 서거하였으나,

표트르 1세의 아들인 황태자 알렉세이1718년에 반란에 가담하여 황태자 직분을 박탈당한 뒤 고문후유증으로 죽고, 그 아들인 표트르도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측근들과 황제 근위대가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추대,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2년 간의 짧은 치세로 남편처럼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1727년 5월 17일 43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5명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하였다.

살아남은 자식들은 모두 딸들이었는데,

큰딸 안나는 훗날의 표트르 3세를 낳았다,

둘째 딸은 옐리자베타는 훗날 어머니를 따라 역시 여제가 된다.

전 임
표트르 1세
(재위 1725 - 1727)
러시아의 군주
1725년 2월 8일 - 1727년 5월 17일
후 임
표트르 2세
(재위 1727 - 1730)

 

표트르 2세(재위 1727년 - 1730년)

 

(러시아어: Пётр II, 1715년 10월 23일 ~ 1730년 1월 29일)는 러시아 제국황제, 로마노프 왕조의 3번째 군주다. 본명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다.

표트르 1세의 손자다.

생애[편집]

17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와 브라운슈바이크의 샤를로테 크리스틴 공녀 사이에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 표트르 1세에게 맞서다 고문으로 죽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깊이 원망하고 미워하였는데, 이러한 감정은 그의 통치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1727년, 계조모인 예카테리나 1세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황위를 이었다.

 

통치 초기에 황실의 실권은 자신의 딸을 황제에게 시집 보낸 장인인 멘쉬코프에게 있었다. 그러나 멘쉬코프가 몰락한 후 표트르 2세는 대귀족층의 큰 영향 아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조모인 예브도키아 로푸히나와 그녀의 근친들을 귀양가 있던 정교회 수녀원에서 불러들였다.

 

자신을 할아버지 표트르 1세의 개혁에 대한 반대자라고 선언한 그는, 표트르 1세의 개혁을 취소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돌고루코프 공후의 세력 아래 있으면서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결혼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대관식과 결혼식 준비가 한창일 때 천연두에 걸려 서거하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

전 임
예카테리나 1세
(재위 1725 - 1727)
러시아의 군주
1727년 5월 18일 - 1730년 1월 29일
후 임
안나
(재위 1730 - 1740)

 

안나 이바노브나(재위 1730년 - 1740년)

(러시아어: А́нна Иоа́нновна, 1693년 1월 28일 ~ 1740년 10월 17일)는 러시아 제국여제,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다.

생애[편집]

1693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이반 5세와 프라스코비아 살트이코바 사이에 태어난 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의 이복동생 표트르 1세의 궁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10년에 쿨란스키 공작과 결혼하고 공작이 죽은 후에는 주로 민타프에서 살았다.

 

1727년부터 에른스트 비론이 안나의 총신이 되었다.

표트르 2세가 서거한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하였다.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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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년에 내각을 창설하고, 잔혹한 고문을 행하는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하여 정권에 대항하려는 반대세력들의 어떠한 시도도 엄중하게 진압하였다. 그에 따라 돌고루코브이 가, 골리츠인 가, 볼르인스키 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유폐되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나는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의 특권을 넓혀 주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법을 개정하였다. 폴란드 소귀족 계급을 위한 육군유년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이사장의 아들 중 한 명이 이 영지를 관리하도록 했다. 귀족의 국가봉사를 35년으로 제한했다.

 

안나는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할 목적으로 국가적인 벌채금지법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였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1735년에는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미니흐가 주장한 군사개혁도 추진하였는데, 1737년에는 비론을 쿠를란스크와 세미갈리스크의 공작에 임명하였다.

 

표트르 1세 때에 합병되었던 카스피 해 연안의 영토를 페르시아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에 불리한 조건으로 벨그라드와 체결한 국제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하였다.

 

이반 5세의 후손을 따르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그는 죽기 전에 이질녀 메클렌부르크의 안나의 아들 이반 안토노비치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이반이 장성할 때까지 그의 섭정자로서 비론을 임명하였다.

전 임
표트르 2세
(재위 1727 - 1730)
러시아의 여제
1730년 1월 29일 - 1740년 10월 28일
후 임
이반 6세
(재위 1740 - 1741)

 

 

엘리자베타 여제(제위 1741~1761)



1741년 11월 어느날 밤, 표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베타 표트로브나 로마노바는

변장을 통해 대권을 거머쥐려고 함.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는 바람에

러시아는 주인 없는 나라로 혼란에 빠짐.


표트르의 딸 엘리자베타를 후계자로 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반대파는 생각이 달랐음.

그리고 엘리자베타는 겨우 15살 어린 나이라

크렘린의 권력 투쟁에 나설 수도 없었음.

 

그래서 엘리자베타는 그후 16년 동안

경쟁자들이 로마노프 왕조를 이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음.


처음엔 어머니(예카테리나1세)가

다음엔 조카가 그 다음엔 낯선 사촌이 왕관을 썼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다들 병에 걸려 일찍 죽음.

마지막에는 너무 먼 친척이라 표트르 대제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두 달짜리 간난 아기가 제위에 오르기도 함.

엘리자베타는 간난 아기가 제위에 오른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행동에 나섬.


1741년 11월 25일 엘리자베타는 근위병 복장으로 변장하고

아버지에게 충성을 바쳤던 근위병들과 함께 재빨리 왕궁을 점령.

간난 아기 짜르는 유폐돼 불행한 일생을 살게 됐고,

엘리자베타는 32살에 비로소 권리를 되찾아 여황제로서 왕관을 씀.


엘리자베타는 “나는 내 부모의 통치이념을 계승하여 개혁자가 될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즉각 발표하는 등 승계절차를 제대로 밟음.


엘리자베타는 우선 후계자부터 지정함.

자신의 소생이 없었으므로 1742년 독일 태생의 조카 표트르 울리히를 지명.


표트르 울리히는 최고의 행운아였음.

태어나는 순간 홀쉬타인 공, 스웨덴 왕, 러시아 왕의 자격을 한꺼번에 취득.

 

14살 때 왕자는 사랑하는 독일의 홀쉬타인을 떠나 러시아 왕국으로 옴.

그러나 문제가 있었음.

장차 표트르 3세가 될 이 왕자는 이상하게도 러시아가 몹시 싫었음.


여황제 엘리자베타의 조카로 러시아의 후계자가 됐지만,

사람 됨됨이는 어리석고 모자란 인물. 정서적으로 유치했음.

남을 따분하게 하는 그런 목소리에, 위트 있게 한다는 것이 고작 혀를 날름 내미는 것.

거기다 러시아를 공개적으로 비웃는 행동은 그가 자격미달이라는 인상을 줌.


엘리자베타는 로마노프 왕가를 이어가려면

아무래도 믿을만한 새로운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

그(표트르3세)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교육시켜 후계자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

그러자면 표트르 3세의 왕자비를 구해야만 했음.


1744년 겨울, 엘리자베타는 또 다른 독일 처녀를 불러들임.

안 할트 체르부스트家의 ‘소피아’

영락한 귀족의 딸 ‘소피아’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

‘예카테리나 알렉산더’가 되기까지의 긴 여정이 시작된 것.


예카테리나는 이 것이 큰 기회라는 것을 앎.

지위가 낮은 귀족이라 독일에서는 기대할 것이 없지만,

러시아에서라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었음.


러시아에 오자마자 이 15세 소녀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

이름도 존경하는 엘리자베타의 어머니 이름 ‘예카테리나’로 개명.

그녀는 이처럼 열심히 러시아 생활에 적응해 감.


러시아에 관한 것 중 예카테리나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짜르의 후게자 표트르 3세 뿐이었음.

어딘가 아둔해 보이고 어린애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음.

표트르 3세는 장난감 병정놀이에 열심.

신랑감이 그러고 있으니 신부는 같이 놀아줄 수밖에 없었음.

신부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행군을 시켰으니 좋아할 리가 없음.


결혼식날 신방에서도 불꽃놀이나 하고 있는 신랑 때문에

후계자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었음.


결혼 8년 후인 1753년에야 러시아 황태자비 예카테리나는 처녀를 면함.

그러나 실상 상대 남자는 남편 표트르 3세가 아니었음.

로마노프 혈통을 낳기를 엘리자베타 여황제도,

예카테리나도 원했으나 남편이 도무지 협력을 하지 않았음.

 

예카테리나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세르게이 살티코프에게 순결을 바침.

주변에서는 예카테리나가 남자를 알게 하는 것이

남편과의 관계를 더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함.


간통은 위험했으나, 예카테리나(황태자비가)는

아이 없이 지내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었음.

얼마 후 예카테리나는 여황제가 원하는 아기 ‘파페르’를 낳음.


아기의 아버지가 남편인지 연인인지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음.

자신의 임무(후계자 생산)를 완수했지만,

예카테리나는 여전히 남편과 여황제 엘리자베타와 궁정신하들로부터 소외당함.


하지만, 예카테리나는 권력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나감.

예카테리나는 조용히 관찰을 통해 모든 것을 배워나감.

러시아의 풍습, 언어, 심지어 체제 적응을 위해 자신의 종교까지 바꿨고,

러시아 정치도 배움.

유럽식 사상을 유지하려고 독서도 많이 함.

그러다보니 궁정 사람들이 예카테리나에게서 지적 매력을 느끼게 됨.


예카테리나는 어려서부터 대담했고,

그리고 아들까지 낳았으니 정치에 뛰어들만도 했음.

 

한 번은 만찬 석상에서 프랑스 대사에게 야심을 털어놓음.

“난 간이 큰 여자요. 내 대담성은 아무도 못 말려요!”


표트르3세와 예카테리나 사이에는 적대감이 깊어짐.

표트르3세는 자기가 제위에 오르면 아내를 수녀로 만들거나 아예 없애겠다고 공언.

 

남편이 위협해 오자 예카테리나도 방어대책을 세움.

그녀는 러시의 장군들, 정치가들은 물론 유럽 각국과도 교분을 맺었음.


1758년 여황제가 예카테리나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예카테리나는 보관 중이던 일기장과 편지들을 불태워버림.

그리고는 여황제를 독대하여 자신의 충성심을 표하고, 남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음.


예카테리나는 자기도 대권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음.

사람들은 표트르3세를 무능하고 난폭한 인물이라고 봤고,

그래서 자꾸만 사람들이 예카테리나 주변으로 모임.


국내에서 후계자 부부가 다투는 사이에

밖에서는 러시아 군대가 전쟁을 벌임.

적국은 프로이센, 상대국 왕은 군인출신 프리드리히 대왕,

그는 공교롭게도 표트르 3세가 우상처럼 숭배하는 왕이었음.

 

프로이센의 약진으로 유럽의 힘의 균형이 깨지자

엘리자베타 여황제가 프리드리히를 견제하는 동맹에 가담한 것.


1761년 러시아군이 승기를 잡음.

영웅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귀환.

그중에서도 빛나는 영웅은 근위대 출신 그레고리 오를로프.

그는 예카테리나의 마음을 사로잡음.

 

그레고리 오를로프는 5형제 중 둘째.

5형제는 하나같이 미남이었지만, 오를로프는 경솔했지만 저돌적이었음.

어쨌든 예카테리나는 오를로프와 사랑에 빠짐.


오를로프는 근위병들을 규합하고 설득해서

예카테리나가 집권하는 것을 돕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됨.

 

예카테리나와 오를로프는 표트르3세를 ‘괴물’이라고 규탄하고,

프로이센을 숭배한다고 비난.

 

그해 말 전선에서는 러시아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

프리드리히 대왕은 무릎을 꿇었고, 프로이센은 지도에서 사라질 판이었음.


왕국에 남아있던 표트르3세는 프로이센이 지자 실망이 대단.

한편 엘리자베타 여제는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었음.

곧이어 성탄절이 왔음.

엘리자베타 여제는 향년 52세로 별세.


엘리자베타는 유럽식, 즉 여성중심의 궁정문화를 도입.

여자가 홀대받던 러시아로서는 큰 변화.


엘리자베타는 여러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예카테리나 입장에서는 본 받을 만한 귀감이었음.

우선 집권 방식(쿠데타)부터 그러했음.

 

전 임
이반 6세
러시아 여제
1741년 12월 6일~1762년 1월 5일
후 임
표트르 3세

........................

예카테리나 2세 (1762년~1796년)

 
예카테리나 2세
Johann-Baptist Lampi d. Ä. 007.jpg
러시아 여제
재위 1762년 7월 9일~1796년 11월 6일
대관식 1762년 9월 12일
전임자 표트르 3세
후임자 파벨 1세
러시아 황후
재위 1761년 12월 25일~1762년 7월 9일
전임자 마르타 헬레나
후임자 마리아 표도로브나
배우자 러시아의 표트르 3세
본명 소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왕가 혼전:아스카니아 가문
혼후:로마노프 왕가
부모 안할트 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테
홀슈타인고트로프의 요한나 엘리더베토
출생 1729년 5월 2일(1729-05-02)
프로이센 프로이센 왕국 슈체친
사망 1796년 11월 6일 (67세)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서명 SignatureEkaterina II.jpg
종교 러시아 정교

 

예카테리나 2세(예카테리나 2세 대제, 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II Великая 예카테리나 벨리카야[*], 1729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1762년 - 1796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하였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하였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정무를 결재받음으로써 황권을 강화시켰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하였다. 본래 이름은 소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독일어: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이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이다. 루터교 세례명은 소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러시아 정교 세례명은 예카테리나[1], 이후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즉위 이전
[편집]

초기 삶[편집]

소녀 시절

 

예카테리나는 프로이센 왕국의 속국이었던 안할트체르프스트 공국[2] 포메른슈체친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 루터교의 세례를 받고 소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예카테리나란 이름은 후일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되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얻은 세례명이었다. 소피에게는 남동생이 2명 있었는데, 위의 남동생은 12살에, 아래의 남동생은 태어나자마자 곧 사망하였다.

 

소피의 아버지는 프로이센군 소장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Christian Augustus)로 폰 안할트 체르프스트 공작이며, 어머니도 프로이센의 지방 귀족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의 요한나 엘리더베토(Johanna Elisabeth)이며, 스웨덴의 홀슈타인고토로프 왕가의 일족이었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지만 교양과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어머니의 도움으로 소피는 2살 때부터 프랑스 출신의 위그노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합리적인 정신을 가진 소녀로 자랐다. 승마도 능숙했지만, 음악 실력은 별로 좋지 못하였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그녀는 사람들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다섯 살 때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궁정에 출입하며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배우기도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소피는 수려한 외모에 요염한 숙녀로 자라났다.

 

소피의 외가는 독일의 귀족가문인 스웨덴의 왕실인 홀슈타인-고트로프 가문이었는데, 그녀의 어머니 요한나가 러시아 황실홀슈타인-고트로프 가문의 먼 친척이었다.

 

홀슈타인-고트로프 가문은 러시아 황실의 인척이자 표트르 대제 가문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황위 계승권을 획득하였으며, 스웨덴 왕가의 친척이기도 했다.

 

소피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성실하기만 했던 아버지 크리스티안의 밑에서 평범한 귀족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소피의 어머니 요한나는 아무런 야심 없는 남편에게 답답해하며 정략결혼을 통해 소피를 이용하여 권력을 얻을 궁리를 하게 되었다.

황태자비 시절[편집]

결혼 직후[편집]

 

 

 

본래 가문의 명성으로 봤을 때 도저히 대국의 황후 후보에 오르내릴 정도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어머니 요한나의 요절한 오빠 카를 아우구스트가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옐리자베타와 약혼자였던 인연이 있어, 소피는 14살이 되던 해인 1745년에 러시아로 가서 정교회 세례명인 예카테리나란 이름을 받고[1],

 

러시아 제국의 제위 계승권자인 대공 카를 울리히(뒷날 표트르로 즉위)와 결혼하여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한 뒤 대공비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두 사람 모두 독일 태생이었이 때문에, 표트르에게는 우선 독일어로 마음껏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였던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략 결혼이 그러하듯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1]

 

1744년 그가 시집올 당시 이미 남편 표트르 3세핀란드의 왕이었으므로 그는 대공비이면서 러시아의 황태자비이자 핀란드의 왕비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3]

그러나 몸이 약하고 마음이 거세지 못한 남편과 마음이 맞지 않아 불만스러운 신혼생활을 보낸다.

결혼 생활 초기[편집]
가면무도회 참석 시 러시아 전통 의상 차림인 예카테리나

 

비록 러시아 문화에 서툴렀지만,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어를 습득함은 물론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교파를 바꾸는 등 러시아의 귀족들과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데 반해, 지적 장애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표트르는 독일풍을 계속 고집하여 독일식의 군인 놀이에만 열중하여 주위의 반감을 산다.

 

서로 무관심하여 표트르는 예카테리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예카테리나 역시 그런 표트르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채로 두 사람은 각자 정부를 두고 18년간을 함께 살았다.

예카테리나가 낳은 세 아이도 모두 정부의 소생으로 아버지가 각각 달랐다 한다.[1]

 

일부의 견해에 의하면 불행하게도, 표트르가 심각한 남성 능력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그 때문에 결혼 후에도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으며, 훗날 표트르는 수술을 받아 간신히 부부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에 이미 예카테리나는 다른 남성들과 공공연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미래의 황후라는 대의명분으로 묵인했다고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했다고도 전해진다. 결혼 초기부터 예카데리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표트르도 유력 귀족의 딸 보론초파를 총애하게 되어 부부 관계는 완전히 파탄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궁정 내에서는 제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가 난무했다.

황후 시절[편집]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자 표트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표트르 3세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에 반해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했고, 황후가 된 직후부터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과 접견하면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군부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다.

 

또한 그녀는 궁정의 인물들과 모스크바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과도 자주 만나 자리를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측근이자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결국 1762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힘을 빌려 남편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얻을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갔다. 그곳의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는 예전부터 예카테리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군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함과 동시에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어 예카테리나는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를 거느리고 대성당으로 갔다. 곳곳의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속속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는 예카테리나가 장악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예카테리나는 군복으로 남장을 하고서 그들의 선두에 서서 어전회의에 난입하였다고 한다.

재위 기간[편집]

정변과 즉위[편집]

러시아의 군대는 그녀를 지원했으며, 당시 그녀의 정부였던 오를로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그녀가 지시를 내리면 바로 일어날 여러 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1762년 7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휘하에 모인 근위연대(近衛聯隊)의 쿠데타로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유폐하였다. 놀란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에 맞설 군대를 모으려 했으나 이미 많은 군대는 예카테리나의 편으로 돌아서 있었고 결국 표트르는 유폐되었다.

 

1762년 8월 예카테리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러시아 차르 예카테리나 2세로 즉위하였다.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하였다. 마침내 예카테리나가 대성당에 이르자 대주교는 그녀의 즉위를 축복해주었다. 이후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압력을 받고 제위에서 물러나 유폐되고 8일 후 예카테리나의 정부인 오를로프의 손에 암살되었다.

 

그녀의 치세 동안 러시아는 유럽의 정치 무대와 문화 생활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제위에 오른 직후 신고전주의풍을 선호했던 예카데리나는 예카테리나 1세가 지은 예카테리나 궁전이 지나치게 꾸밈이 많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이 총애하던 건축가 찰스 카메론을 불러들여 건물을 새로이 단장하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거주할 '마노의 방'을 짓게 했다. 즉위 직후 쿠테타를 일으켰다는 비판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그는 선황제이자 표트르 1세의 딸인 엘리자베타 여제가 나이 33세에 쿠데타를 통해 러시아의 왕권을 획득한 점을 들어 항변하였다.

치세 초반[편집]

예카테리나 2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가장 시급하게 당면한 문제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저항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와 다른 하나는 군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 수행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사회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법전을 편찬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에 맞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녀는 먼저 입법을 논의하기 위해 입법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것은 러시아 제국 전 지역에서 성직자와 노예를 제외한 모든 계층의 대표자인 564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국가회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입법의 틀을 기초하기 위하여 예카테리나 2세는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베카리아를 비롯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참고하여 계몽 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계몽사상가들이 제시한 이상적 정부 구성의 요건인 3권 분립 이론과 같은 권력 행사의 제약 요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러시아의 전제군주주의 원칙 수호에서는 단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은 결과를 낳아 입법회의 소집 의의는 빛을 잃고 말았다. 또한 지주 계급에서도 노예에 대한 권한의 내용을 명시하여 실질적으로 무한대에 가까웠던 자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의도에 필사적으로 반발했다. 이같은 충돌로 입법회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고 느낀 예카테리나 2세는 위원회가 구성된 지 2년도 채 안 되어 해산시키고 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녀는 지배 계층과의 투쟁보다는 그들의 요구에 어느 정도 순응하는 쪽을 선택했다. 즉 몰수했던 교회 영지와 황실 영지 중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농노와 함께 신하들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자신의 즉위 전에는 농노제가 실시되지 않았던 지역에도 농민들의 이동을 금지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농민 정책은 그녀의 기본 노선이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는 사실상 농노제의 발달과 확장이 절정에 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남성 편력[편집]

스타니슬라브(그는 폴란드 왕이 되었다.)

 

 

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하였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하였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하였다. 또한 엘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영토 확장 정책[편집]

치세 중반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을 겪은 예카테리나 2세는 대외 정치에서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다. 처음 착수한 계획은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민족 및 우크라이나 민족의 주거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자신의 2번째 손자인 콘스탄틴을 새로운 그리스 제국의 황제로 앉히고자 하였다. 이 계획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넓히는 데에 그녀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의 대립을 이용했다.

 

2회에 걸쳐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즉 1768년부터 1774년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시 성당을 세우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정교도들을 보호 및 관리하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또한 상업을 목적으로 보스포루스 해협다다넬스 해협을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영해 내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도 1722년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으로 폴란드 분할에도 가담하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혁명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폴란드의 일부 영토를 획득하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의 승리와 프로이센과의 3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장시켰다.

 

또한 러시아의 보호하에 있던 폴란드와 그밖에 프로이센, 헝가리, 동부 독일의 일부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예카데리나의 재위말기 러시아는 서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20만 평방 마일 이상의 영토를 넓혔으며, 러시아의 통치자들이 오래도록 꿈꾸어온 보스포루스 해협을 손에 넣어,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남부 유럽으로의 진출기반을 확보하는 숙원사업을 실현가능한 목표로 만들었다.

 

 

예카테리나는 이러한 영토 확장과 각 영지, 점령지의 직접 통치하며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서류를 보고, 결재받거나 행정 장관에게 직접 결재받게 했다. 이어 효과적인 지방 관리를 위한 자신의 행정개혁 계획에 따라 29개주를 재조직하였다. 또한 그의 측근 인사들과 충성심이 강한 지식인, 종교인들을 내치와 행정, 문화 분야를 담당하게 하여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러한 치세 후반의 개혁은 군사적 승리의 영광과 당대 유럽의 최고 명사들을 모여들게 했던 호화로운 궁정의 명성과 함께 그녀를 역사상 두드러진 인물로 평가되게 하였다.

문치 정책[편집]

그는 교육과 문학을 장려하는 한편 음유시인과 철학자 등을 궁정에 초대하였다. 그리고 국외의 명사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당대의 명사인 볼테르, 디드로 등을 궁정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볼테르, 디드로 등과 친구가 되기도 했던 그는 이후 당대 유명인사 대부분과 폭넓게 서신교환을 했다. 문학을 적극 후원했으며 러시아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예카데리나 자신이 직접 글도 썼으며 소설가와 시인들의 작품에 대한 평론과 작품평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후 문학 작품에 대한 평론이 귀족층, 상류층에게로 확산되면서 문학평론 역시 문학의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했다.

 

또한 발레와 무용, 연극 등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발레에 매력을 느낀 그는 발레의 진흥, 장려, 육성에 적극 개입하였다. 예카데리나는 프랑스의 위대한 발레안무가인 샤를 르 피크(Charles Le Picq)에 대한 정보를 접한 후, 그를 러시아 궁정으로 초빙하였으며, 샤를 르 피크러시아로 와서 장 조르주 노베르(Jean-Georges Noverre)가 쓴 <무용과 발레에 관한 편지(Letters on Dancing and Ballets)>를 번역해 소개하였고, 무용가 교육과 이론 등을 교육하였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의 무용 안무가인 가스파로 앙지올리니(Gasparo Angiolini) 등을 초빙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르게 하면서 무용 기술과 기교, 이론 등을 교육하게 하여 러시아 발레의 발전을 도왔다. 그녀의 재위 기간 중 발레에 대한 집중 육성 정책이 추진되어 이때부터 러시아의 발레는 국가 제도처럼 그 지위를 확고히 했고 이는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철학과 과학을 장려하고 학문에 관심을 갖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학교를 건립하는데 아낌없이 투자하였다. 또한 흥미와 열정은 건설계획에서부터 법률제정과 예술품 수집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고고학과 고미술학 지식도 풍부하였으며, 러시아사와 이집트, 그리스 등의 유럽 역사 등 역사 지식에도 해박하였다. 그는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신임하는 행정 관료들 및 가까운 여러 총신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함으로써 농노제(農奴制)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농민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

생애 후반[편집]

행정 개혁과 반란[편집]

그는 표트르 3세의 아들이자 합법적 상속자였던 아들 파벨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신 손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특히 손자들 가운데 유능하고 똑똑했던 큰손자인 알렉산드르를 매우 사랑했는데, 아들 파벨을 제치고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넘겨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정부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1767년 입법회의를 소집, 이때 소집한 사회 각층의 대표들을 법전(法典)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하였다. 이어 예카데리나는 입법의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계몽주의 철학을 정치에 도입하려는 새로운 정치원리를 해설하는 훈시를 하여 유명해졌고 동시에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 법전의 편찬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767년 입법회의의 실패를 겪고 난 그녀는 영국인 블렉스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지방의 행정적 개혁에는 프랑스보다 영국의 예를 많이 적용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내에는 진보적인 성격을 띤 집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히 장 자크 루소볼테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을 선호했다. 계몽주의자들의 책이 빠른 속도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러시아의 계몽주의자들은 당시 러시아 내의 봉건주의적 폐단과 전제주의의 폐단과 지주들의 잔인함에 의한 하층 계급의 고통에 대해 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몽 군주로서 명성을 얻고자 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이때 이들의 작품을 관심 있게 읽었으며, 궁전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녀는 서유럽보다 훨씬 뒤처져 있는 러시아를 문명 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 국민들에게 문학, 예술, 과학을 장려하고 새로운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힘썼다. 그래서 대규모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고 수많은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또한 자신의 자금을 풀어 100개가 넘는 새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옛 도시들은 확장되고 새로이 단장되었다. 풍부한 상품과 함께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던 1773년 그동안 쌓여 왔던 농노제에 대한 불만이 푸카초프를 중심으로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이 농민 반란은 농노제에 대항한 가장 큰 봉기였다. 그 여파는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농민들은 푸카초프를 환영할 태세를 갖추는 위험한 사태에 이르렀다. 많은 도시를 점령했으며 주력 부대가 오렌부르크를 포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푸카초프 군대를 저지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774년 4월 부분적으로 반란군을 격파할 수 있었고 여세를 몰아 푸카초프 주력부대를 우랄 지방으로 일단 퇴각시켰다.

 

그러나 타타르족, 마리족 등이 합세한 바시키르 기병대가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추자 정부군이 급파되어 푸카초프 군대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반란군은 수천 명의 병사를 잃고 결국 패배하게 되었으며 바시키르 기병대는 우랄 연방관구 지역 너머로 급히 도주했다. 이 봉기는 예카테리나 2세가 신봉하고 있던 계몽 사상과 러시아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1775년 행정법령을 제정하여 지방행정 개혁을 실시하였다.

말년[편집]

예카테리나 2세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허영심이 매우 강해졌다. 푸카초프의 반란에서 나타난 잔인성에 크게 충격을 받은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젊은 시절의 자유주의적 이념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또 자신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러시아에 도입하려 했던 자유 사상을 강력하게 탄압을 가했다. 또한 유럽의 여러 군주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프랑스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고 호소했다.

 

허영심과 과대망상을 가졌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오래도록 외면하였다. 이는 러시아의 지식인과 문인들은 물론 유럽의 지식인과 문인들이 그녀에게 다투어 아첨을 한 것도 있었는데, 나중에 예카테리나도 문인들과 지식인들의 칭찬이 아첨이자 과장된 내용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 뒤 1785년 그는 귀족 특권 인가장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하였고, 동시에 귀족들과의 협력체제도 강화하였다.

 

 1793년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당황하게 되었고 예카테리나 2세는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하였다.

 

1796년 67살이 된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차르스코예셀로의 별궁에서 요양하던 중 사망하였다.

 

한편 그녀는 정신이 불안정하던 아들 파벨과 불화가 심한 반면 손자 알렉산드르는 편애하면서 그에게 계몽주의적 교육을 시켜 차기 후계자로 양성시켰다. 그녀는 알렉산드르가 파벨을 대신해 제위에 오르기를 원했지만, 알렉산드르는 아버지를 위해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계몽 교육을 받은 황손 알렉산드르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격퇴한 알렉산드르 1세이다.

평가와 비판[편집]

러시아인들과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러시아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그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하여 독일 출신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또한 화려한 이성 편력을 가졌던 예카테리나를 오래도록 찬미하였고 이반 뇌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과 유럽계의 시각에서는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기타[편집]

예카테리나는 많은 귀족 부인들을 친구로 두기도 했다. 우정에 있어서는 충실하고 너그러웠으며,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기도 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권력남용이나 부패행위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다. 이해심과 아량을 베풀었지만 자기자신이나 혹은 국가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는 무자비하였다.

 

예카테리나의 남성편력은 정적들의 공세대상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가 족히 3백 명은 넘는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잘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양 옆에는 연인이 남자의 체력을 시험하는 역할을 하는 여자 둘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1] 그녀의 기마호위병 장교였던 알렉산더 란스코이는 23세의 나이에 고열로 죽었는데, 예카테리나의 정적들은 루머를 지어냈다. 그가 성욕을 촉진시키는 최음제를 과다 복용하고 예카테리나와 함께 있다가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1]

 

* 에카테리나 2세 - 남성파트너'성병감식법'

에카테리나 2세는 18세기 러시아 제국을 호령한 여자 황제 로 유명하다. 역사에 명군으로 이름을 남긴 에카테리나 2세는 남편인 표트르 3세가 성에 차지 않자 폐위시키고, 1762년스스로 황위에 올랐을 정도로 대가 센 여자였다. 이후 34년간 러시아 제국을 다스렸다 .

에카테리나 2세가 신경을 쓴 것은 단 한가지 .당시 러시아 황실과 귀족 사회에 만연한 성병이었다 .

16 세기 러시아 제국의 차르제도를 확립한 이반 4세를 비롯 ,그녀의 시할아버지격인 표트르 대제가 성병 (매독)으로 목숨을 잃은 사실을 그녀는 반면교사로 삼았다.

제국의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며 명군의 면모를 보였던 이반 4세는 통치 말기 뇌제(雷帝)라고 불렸을 정도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후세 학자들은 이반4세의 이러한 성격 변화를 성병에서 찾고 있다 .

1560년 첫 아내인 아나스타샤가 죽은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얻은 매독으로 정신질환을 앓으며 폭군으로 변했다는 것.

 

계몽전제군주인 표트르 대제 역시 성병 때문에 수은치료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에카테리나 2세는 성병에 대해 극히 민감했다 . 그렇다고 밤의 쾌락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남편의 왕위를 빼앗았지만 그녀는 결코 남자를 싫어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안전책이 바로 남자 감별 비서 '.궁녀 6명을 선발해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와 6 개월 동안 동침시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비로소 여황의 침실로 불러들였다 .

 

말하자면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여부를 감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 시식 비서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시식 비서'만으로는 단속이 불가능했던 것일까.

 

그녀의 장남인 파벨1 세는 어릴 적에 이미 선천성 매독에 감염돼 코가 함몰된 채 일생을 마쳤다.

주석[편집]

  1. 이동: 언론을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 - 인터넷 경향신문
  2. 이동 안할트체르프스트 공국은 프로이센과 스웨덴의 접경지에 있던 프로이센의 속국이었다.
  3. 이동 1742년 표트르 3세는 핀란드의 왕위를 계승한 상태였다.

 

예카테리나 대제(제위 1762~1796)


여황제의 친조카이자 후계자인 표트르 3세는

여황제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뛸 듯이 기뻐함.

표트르3세가 즉위한 후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프로이센과 강화조약.


이렇게 프리드리히를 살려주자 러시아 군부가 분노함.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음.

표트르 3세는 전통적인 러시아 장교복의 색을 녹색에서

프로이센식 감청색으로 바꿈.

 

러시아 정교회의 장식물을 떼 내는가 하면,

신부들에게 루터교식의 복장을 강요.

그리고 더욱 바보 같은 짓으로 프로이센 원정군에게

프로이센 대신 20년전 자기 고향인 홀쉬타인 공국을 점령하라고 명령.


표트르 3세는 이 거사를 위해 축배를 제안함.

예카테리나가 이 축배를 거부하자,

예카테리나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겠다고 협박.

예카테리나와 이혼하고 그녀를 수도원으로 보낼 생각이었음.


그러자 예카테리나는 지금이야말로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할 시기라고 판단함.

다음날 밤, 예카테리나의 연인 오를로프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근위대 추종세력이 합세하여 쿠데타를 단행.


표트르는 너무나 쉽게 제위를 빼앗김.

뿐만 아니라 더 큰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음.


예카테리나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오를로프는 표트르3세를 궁 밖으로 끌어냄.

마지막 처리(표트르 살해)를 끝내고

오를로프가 예카테리나에게 “괴물은 죽었다”고 편지를 보냄.


1762년 7월 표트르3세는 비극적인 사고를 당함.

야심에 찬 아내 예카테리나와 충돌한 것.


표트르3세의 공식사인은 ‘탈장’

사인치고는 흔치 않은 것이지만 그렇게 발표됨.


이제 예카테리나는 자기가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해낸

구세주라고 선전하기 시작함.


독일인인 자신(예카테리나)이 이제 러시의 짜르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자신과 러시아 둘 다 바꿔놔야 했음.

어떻게 짜르가 될 생각을 했는지 알고 보면 뻔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결국 그대로 실현함.


예카테리나는 표트르3세가 제위에 있으면

러시아의 운명이 위태롭다고 생각함.

그래서 자신이 러시아를 구출했다고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은 잘 먹혀듦.


예카테리나는 늘 동조세력을 키워 권력을 향한 길을 닦음.

크렘린 교회에서 대관식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교회에 바침.


재빨리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자신의 집권이 마치 신의 뜻 또는 민의인양 만듦.

그리고 즉각 개혁에 착수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개혁자로만 생각하게 만듦.



33살의 독일 공주가 이제 러시아 제국의 짜르가 된 것.

예카테리나 대제는 지식욕과 권력욕이 대단했음.


그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궁전을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으로 채우며 은둔자의 집을 세계 최대의 박물관으로 바꿔놓음.

예카테리나는 그림은 물론 사람들도 끌어모음.

힘있는 자, 충성하는 자 등을 이용해 권력기반을 다지고

독재에 따르는 부담을 완화함.


영토욕 또한 대단해서 사방으로 국토가 확장됨.

동유럽에서 알래스카까지 뻗어나감.


무엇보다 그녀는 개혁을 단행.

지방행정조직을 강화, 학교와 대학을 세우고 러시아적 폐습의 타파를 권장.


이렇게 해서 러시아에 혁명의 바람이 붐.

러시아의 전 지도층이 예카테리나와 일종의 밀월 관계를 유지함.

지도층과 같은 생각, 같은 언어를 썼기 때문.

다시 말해 개인이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를 생각한 것임.

그래서 지도층에서는 대환영.


예카테리나가 제위에 오른 것은 1762년, 이른바 ‘계몽시대’였음.

예카테리나는 시대의 흐름에 적극 동조.


‘인권’ 문제는 예민한 사안.

러시아 경제는 농노들의 희생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인권사상’은 예민한 사안.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과 일반 백성들 간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음.

국민의 대다수인 농민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이

점점 통제하기 힘든 방향으로 흘러감.


농노 문제는 예카테리나의 이상 실현에 중대한 장애였음.

하지만 자신의 대권을 귀족의 충성심에 의존하고 있는 터에

농노를 해방한다면 귀족과 왕권도 붕괴될 수밖에 없었음.


주저하고 있는 사이 볼가 강 유역의 농노들이 스스로 해방을 선언함.

1773년 카작 기병대의 탈영병 푸가조프

자신이 환생한 표트르3세라며 여왕을 토벌하자고 선동.

푸가조프는 자신의 왕궁을 세우고, 칙령을 반포함.


그런데 칙령이 대단히 혁명적이었음.

예를 들면,

“관리와 지주를 없애자!”

“세금을 추방하자!”

“무기를 없애자!”

“농노를 해방하고, 토지를 분배하자!” 같은 것으로

농노들에게는 환영할만한 것.


이 반란은 1년 이상 볼가 강 유역을 휩쓸었음.

반란군들은 지주를 살해했고, 저택을 불살랐음.


푸가조프가 이끄는 반란군이 10만을 넘었지만,

왕실군대의 적수가 되지는 못함.

1774년 푸가조프가 체포됨.

그는 철창에 갇혀 심문을 받은 후 처형되면서 농민반란을 끝이 남.


훗날 제국은 가난한 노동자에 의해 멸망하지만,

당시 예카테리나는 ‘인권사상’이 곧 수그러들 것으로 생각했음.


예카테리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평민들을 두려워하게 됨.

그래서 농노를 해방하면 뭔가 큰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함.


예카테리나 여제에게는 자신의 생존이 더 중요했고,

그녀의 생존은 농노제의 유지는 물론이고,

때때로 폭력과 정복에 의존해야 했음.


러시아의 팽창에는 필연의 정치논리가 있음.

러시아의 지배계층은 땅을 가진 지주계급으로 영토가 늘어나면

그 만큼 그들의 이익이 됨.

국가는 결국 짜르와 귀족의 것이니까

영토확장은 짜르와 지주의 공동이익이 됨.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흑해 연안을 빼앗는 것이 예카테리나 여제의 목표였음.


1768년 예카테리나 여제는 오토만 제국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

예카테리나의 왕권은 물론 사생활까지 크게 좌우할 전쟁이었음.


예카테리나는 군대에 극진한 예를 표해 장군들의 충성심을 샀음.

이 전쟁에서 여제의 특별한 호의를 입은 장군,

그레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포촘킨

 

터키군을 몰아낸 댓가로 포촘킨은 크렘린에 입성.

그의 지위는 그 옛날 그레고리 오를로프와 맞먹음.


포촘킨은 키만 크고 외눈박이에 지저분해서 여자들이 싫어할 특성을 고루 갖추었지만,

예카테리나는 개의치 않음.

포촘킨은 그녀에게 잘 보인 덕에 상당한 실력을 행사함.


이 상처투성이에 음울한 사나이는

예카테리나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 겸 연인이 됨.

겨울 궁전 내에 전용실이 하사되고, 밤에도 궁내를 마음대로 어슬렁거림.


여러 사료를 볼 때 두 사람은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비밀리에 결혼식도 올림.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유능한 정치가로 성장할 인물을 잘 이용한 것임.

예카테리나는 포촘킨과 함께 노쇠한 오토만 제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움.

첫 단계가 요충지 크림반도를 치는 일이었음.

크림반도는 흑해의 열쇠 같은 곳.

크림반도를 통치하게 되면 러시아는 남쪽 진출이 가능해짐.


포촘킨은 여러 차례 크림 원정을 시도함.

결국 1784년에 러시아는 크림반도 지배권을 확보함.


그에 대한 댓가로 예카테리나는 포촘킨을 크림 대공에 봉했음.

엘리자베타가 제위 20년 동안 꿈꾸던 바를 실현함으로써

이제 러시아는 흑해를 지배하는 해군 국가가 됨.


이를 기념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한 복판에 표트르 대제 기념비가 제막됨.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대제의 정책을 계승 실천한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 것.

 

18세기 마지막 10년간 예카테리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여인이었음.

영토는 폴란드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렀고,

3,000만명에 이르는 귀족, 평민, 농노를 장악하고

‘진보’와 ‘개혁’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이끌어갔음.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대중의 정치참여’ 제도를 도입.

이를 토대로 오늘날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토대가 마련됨.


18세기말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에도 영향을 미침.

1793년 혁명의 소용돌이가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목숨을 앗아감.

예카테리나가 볼 때 이것은 신의 뜻에 반하는 죄악이었음.


예카테리나는 루이 16세의 처형 소식을 듣자

계몽사상이 가져온 결과가 이런 것인가 하며 회의에 빠짐.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게 됨.


1796년 혁명의 기운은 프랑스 밖으로까지 미침.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쳐들어감으로써 나폴레옹의 시대를 엶.


이제 67세인 예카테리나 여제는 퇴장할 때가 됐음을 직감.

그러나 그녀는 단호함.

자신의 왕국은 대중이 아닌 자신의 혈육이 다스려야 한다고 확신함.


법에 의해 그녀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 선택할 수 있었음.

친아들 파페르가 황태자이긴 하지만,

굳이 대권을 그에게 넘기지 않아도 그만이었음.


파페르는 잔인하고 불안정한 성품이었음.

줄곧 자기 아버지(표트르3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

왜 어머니가 왕이냐고 물어봄.

예카테리나는 파페르를 겁냈음.

그에게서 위험한 소질이 엿보였기 때문.


불편하기도 하고,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황태자 파페르는 자신의 프로이센식 군대를 조련하는 데 열중.


예카테리나가 볼 때 파페르가 가장 잘 한 일은 자식 키우는 일이었음.

손자 알렉산드르는 마음에 들어함.


알렉산드르는 유소년기를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지내야 했음.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여제와

아버지인 파페르 황태자 틈새에 끼어 살았기 때문.

알렉산드르는 두 사람 모두의 마음에 듦. 그런 척이라도 해야 했음.


그 결과 조심성이 많고, 누구에게나 호의적인 인물,

주관보다는 남의 의견에 찬성하는 그런 인물로 자람.

할머니는 학자들을 시켜 알렉산드르에게 계몽사상을 가르쳤고,

아버지 파페르는 그를 군대 교관이 되라고 가르침.


예카테리나는 죽음이 임박하자 후계 문제로 고민.


1796년 11월 5일, 예카테리나는 뇌출혈로 마비 증상이 옴.

그리고 다음날 밤 34년간 러시아 제국을 다스린 독일 출신 여황제는 세상을 떠남.

 

알렉산드르 1세(제위 1801~1825)


어떤 학자는 파페르가 어머니 시신이 식기도 전에 방을 뒤져서

왕위 계승이 적혀있는 지장이 있는 문서를 찾아 불살랐다고 함.

그리고 서둘러 복수를 시작했다고 함.


파페르 1세는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무덤에서 아버지 시체를 꺼내

어머니 시신 옆에 놓고 부모가 저승에서라도 함께 하라고 빌었다고 함.


러시아는 71년 동안 여걸시대였음.

파페르는 어머니에게 눌려 지낸 반발심으로

앞으로는 로마노프 집안의 남자만이 러시아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칙령을 선포함.


파페르는 20년이 넘게 권력에 굶주렸던 사람이었음.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권력이니 잡은 김에 뭐든 하루속히 처리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매사를 그르침.


파페르는 정책을 모두 바꿈.

귀족들은 걱정하기 시작함.

파페르는 러시아인의 생활방식까지 마구 뜯어고침.

장례식이나 결혼식 복장까지 이래라 저래라 함.


파페르의 즉위 당일부터 알렉산드르가 진짜 짜르라는 소문이 있었음.


러시아 지식인들은 아버지 파페르를 내쫓고 아들을 앉히는 작업에 들어감.

알렉산드르 자신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


파페르는 자신이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함.

그래서 해자로 둘러싸인 요새를 새로 짓고,

회반죽이 채 마르기도 전에 거처를 옮김.

그리고 아들 알렉산드르를 가택연금시킴.

 

* 파페르는 1801년 초에 나폴레옹에게 러시아와 프랑스가 합동으로 인도를 침공하자고 제안했지만,

  나폴레옹은 파페르의 계획에 시큰둥함.

* 파페르는 1801년 1월24일 돈 코사크족 족장에게  국경 도시 오렌부르크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인도로 행군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지만, 모인 병력은 고작 2만2000명으로

  작전에 필요한 숫자에 턱없이 모자랐음.

  그 병력은 한달만에 거의 650킬로미터를 달려 아랄해 북단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파페르의 암살 소식을 듣고 회군함.

  회군하지 않았다면 모두 혹한과 식량부족 등으로 적군을 만나기도 전에 몰살했을 것임


하지만 며칠 후 음모자들이 거사를 일으킴.

1801년 3월 11일 밤.

음모자들은 보초들을 쓸어버리고 파페르의 요새 궁전으로 들이닥침.

그들은 짜르가 침실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냄.

이어서 한 바탕 난투극이 벌어짐.


연속해서 3대째 왕관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이 계속됨.

(엘리자베타, 예카테리나, 알렉산드르 모두 쿠데타로 대권쟁취)


아버지의 횡사는 23살의 새 짜르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음.


그들(쿠테타 세력)은 알렉산드르에게

아버지는 그저 퇴위할 뿐이라고 했을 것임.

그래서 알렉산드르는 그런 줄로만 알았음.

그러나 그것은 비현실적인 생각임.


강제로 물러난 전 황제가 살아 있다면

언제고 복위할 음모를 꾸미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데

그것은 현재의 황제가 용납할 수 없는 일.


알렉산드르는 직접 쿠데타에 참여하지도, 그것을 막으려 하지도 않았음.

그의 이런 애매모호한 태도는 내내 계속됨.


그는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러시아에 헌법을 도입.

그러나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함.


알렉산드르 1세 치하에서 러시아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확실치가 않았음.

그는 자신의 대권을 어떻게 누구에게 나눠주느냐에 대해 어떠한 용단도 내리지 못함.

알렉산드르가 러시아의 장래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사이,

프랑스에서는 새롭게 부상한 젊은 장군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가 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을 재편성하려 함.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처럼 상반된 한 쌍은 찾아보기 힘듦.

나폴레옹은 자신감에 차서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 될 사명감을 타고 났다고 확신한 천재였음.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전략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음.


반면, 알렉산드르 1세는 우유부단했음.

갈 방향을 결정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고,

결과적으로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하고 말았음.

 

* 1801년 9월 독립 왕국이던 그루지야를 합병함

* 1804년 6월 페르시아 왕인 샤의 기독교 소유물인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포위


1807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친선 조약을 맺자고 요구.

그러나 러시아의 짜르와 자수성가한 프랑스 황제는 서로 숙적이 돼 유럽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됨.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러시아는 당황함.

완충지대가 없어졌기 때문.


나폴레옹이 대서양 연안부터 러시아 국경까지 지배하게 되면

막대한 자원을 이용해 러시아를 압박할 게 뻔하기 때문.


1811년 알렉산드르 1세는 드디어 입장을 정함.

나폴레옹의 야망을 꺾기로 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음.

프랑스와 전면전을 각오함 것.


나폴레옹의 대답은 전쟁이었음.

50만에 이르는 유럽 역사상 최대의 군대인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란 러시아 장군들은 수백년 전부터 써온 전법을 사용.

러시아군은 퇴각하고 적들이 드넓은 러시아 땅을 헤매게 하는 전법.


여름철 내내 나폴레옹 군은 러시아 내륙으로 진군함.

결정적인 대전을 기대했지만, 가는 곳마다 적은 없고 텅 비어 있었음.


1812년 9월 7일 아침.

모스크바까지 말로 달리면 하루 걸리는 지점에서

나폴레옹 군은 마침내 적을 만남.

120만이 넘는 러시아 대군, 알렉산드르 1세의 제국 군대가

결사항전의 자세로 보르디노에서 버티고 있었음.


두 황제의 군대는 일진일퇴 공방을 벌임.

새벽에 벌어진 전투가 해가 진 뒤에도 계속됨.


나폴레옹의 군대는 10년간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천하무적이었음.

이제 러시아 군대만 무찌르면 유럽 전역이 나폴레옹의 것이 됨.


1812년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적군을 그 자리에서 섬멸해야만 했음.

퇴각하게 놔두면 언제 또 덤벼들어 프랑스 군의 보급로를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었음.


그날 하루 7만5000명이 죽음.

양측은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

그러나 러시아 장군들은 희생이 너무 크다고 보고

모스크바를 나폴레옹에게 내어주고 퇴각해버림.


양측 모두 희생이 엄청났음.

나폴레옹은 여러 주 동안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요청해 오기를 기다림.

그러나 러시아는 모스크바에 불을 지름.(청아작전)

도시의 절반 이상이 불에 탐.

러시아로서는 아까운 희생이었고, 나폴레옹에게는 뜻밖의 재앙이었음.


프랑스는 공포를 느낌.

간신히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얻은 게 없었음.

모스크바가 불타지 않았어도 프랑스군이 겨울을 나기는 불가능했음.


나폴레옹의 퇴각은 이미 때 늦은 것이었음.

러시아의 겨울은 빨리 찾아왔고 혹독했음.

모스크바~파리까지는 2700km

식량은 부족하고 추위도 피할 길이 없었음.

게다가 알렉산드르는 적을 추격해서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림.


각계각층의 러시아인들이 봉기하여 침입자들을 공격함.

나폴레옹의 상승(常勝) 군대라는 딱지가 여지없이 떨어지고 말았음.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50만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음.

손실이 너무 컸음.

병력도 병력이지만, 말이 죽은 게 더 치명적이었음.


유럽전쟁 사상 유래가 없는 숫자인 무려 50만 병력을 잃었지만,

말이 없어서 프랑스 기병대는 사실상 와해됨.

대포를 운반할 수가 없어 포병도 사라짐.

그러니 퇴각이 불가피했음.

돌아올 때 나폴레옹 군은 2만5000으로 줄어있었음.

파일:Battle of Borodino.jpg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 보로디노 전투>

 

그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이색적인 종교활동을 함.

동방정교인 그가 서방정교의 십자군이 되어 나폴레옹으로부터 유럽을 탈환하여

원 주인인 군주들에게 돌려 줌.


알렉산드르 1세는 신이 자기에게 큰 힘을 내려주었다고 믿었음.

그래서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을 패하게 만든 것은

신이 준 사명이라고 생각함.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이 십자군에 동참.

1814년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친히 지휘하는 연합군은 유럽을 석권,

파리 문 앞까지 진격함.

프랑스는 25년간 끊임없는 혁명과 전쟁에 시달려온 터여서

파리는 혼란에 빠짐.

알렉산드르 1세는 파리로 향함.


이는 18세기에 러시아가 전성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함.

러시아는 18세기 내내 조금씩 조금씩 유럽으로 진출했는데

이제 러시아는 하나의 파트너 수준에서

불순한 세력을 분쇄하는 유럽동맹의 맹주 역할을 하게 됨.


그러나 러시아 군인들은 계몽사상과 혁명의 현장,

자유주의의 현장을 낱낱이 목격함.

러시아 군인들은 유럽에서 절대군주제가 아닌

입헌군주제의 실상을 직접 봤음.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시민의 자유,

정치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사상.

법 앞에 평등의 원칙 등을 목격함.

그들은 군주가 아닌 법의 지배 원리가 근대국가의 초석임을 확인한 것임.


러시아로 돌아온 많은 청년 장교들은

자유와 개혁 사상에 흠뻑 물들어 있었음.

그들은 비밀리에 만나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기 시작함.

절대군주 짜르를 견제할 헌법에 관해 토론을 벌이곤 했음.


청년 장교들은 짜르가 동조해 줄지 의심스러워 했음.


알렉산드르 1세는 전에도 자유사상을 너무 자주 포기하곤 했음.

짜르 알렉산드르 1세는 개혁의 열풍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종교적 신비주의에만 빠져 살았음.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흑해 연안에서 사망.


 

니콜라이 1세(제위 1825~1855)


알렉산드르 1세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니콜라이에게 제위를 넘김.

니콜라이는 알렉산드르 1세보다 19살이나 어린 동생.


알렉산드르 1세는 개혁사상 열풍 속에서 자랐지만,

니콜라이는 정반대로 개혁에 대한 반동의 분위기,

반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자람.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의 승계는 비밀리에 이루어짐.

니콜라이는 처음에 승계를 주저함.


아무것도 공표된 것이 없었음.

그래서 사실 며칠간 짜르가 공석이었음.

급진파들은 이때를 틈타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리려 했음.


급진파들에게는 제위 승계의 혼란기보다 더 좋은 찬스는 없었음.


1825년 12월14일 니콜라이는 지도층으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음.

그러나 한 무리의 급진주의 장교들, 이른바 데카브리스트들은 따로 모임.


그리고는 새로운 형태의 통치체제, 헌법 제정을 요구함.

정오가 되자 700명의 반란군이 의회 광장에 도열.

* декабрист: 12월 당원. 1825년 12월14일 농노제와 전제정치에 반란을 일으킨 귀족 혁명가



니콜라이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대가 이들 반란군을 둘러쌈.

절대왕정의 존속이냐, 새 헌법이냐

잠시 러시아의 운명이 흔들림.


결국 발포 명령이 떨어짐.

이렇게 해서 12월 당원,

즉 데카브리스트의 반란과 정치개혁의 꿈은 산산조각이 남.

짜르 체제는 계속됨.


니콜라이 1세는 ‘진보’가 아닌 ‘왕권수호’를 택한 것임.


러시아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한 그 순간부터

거의 100년 동안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됨.


니콜라이 1세는 짜르로 즉위한 바로 그날 1814년 12월 14일

대포로써 반란을 진압.


12월당(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분쇄하기는 했지만,

니콜라이 1세는 겁이 났음.

자신의 앞날이 줄곧 혁명의 위협에 시달릴 것임을 예감했음.


니콜라이는 반란에 연루된 장교와 사병을 시베리아로 유배시키고

핵심간부들은 교수형에 처함.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는 그의 말 하나하나가 공식 칙령이었음.

그가 한 번 선언하면 이의 제기가 불가능함.


러시아 제국에서는 정치 그 자체가 불법이었음.

합법적인 정당이 있을 수 없고,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토론하거나 발표하면 불법이고, 범죄였음.

정치가는 전혀 존재할 수가 없었음.


그러나 러시아의 엘리트들이 자기 몫을 찾기 시작함.

귀족, 지성인, 기업가들이 사회개혁을 꿈꿨음.

그들은 러시아의 후진성에 분개.

영국, 프랑스의 상류층이 누리는 자유가 부러웠음.

반란은 말만 꺼내도 큰 범죄였음.


비밀경찰은 유배와 처형으로 짜르의 의지를 실행.

그런 가운데도 감히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공개적으로 주장한 사람이 있었음.

바로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


“무거운 사슬이여 풀려라

감옥이여 내 말에 열려라

문 앞에 자유가 와 있다.

형제들이 그대에게 칼을 돌려주리라”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나라에서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국가적 영웅이었음.


1837년 1월27일

러시아 민중의 반란을 촉구하던 푸쉬킨은 죽음의 약속을 지켜야 했음.

푸쉬킨은 그날 근위대 장교와 결투

근위대 장교가 푸쉬킨의 아내와 불장난을 했고,

푸쉬킨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음.

짜르의 나라에서 남자의 명예는 목숨보다 소중했음.

위대한 시인의 죽음은 국가적 비극이었음.

그러나 훗날에 닥칠 비극의 소용돌이에 비하면 그저 피 한 방울에 불과.


러시아 안에서는 정치적 변혁이 극도로 억압됐지만,

바깥에서는 舊제도가 이미 사라진 상태였음.

서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한창이었으며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었음.

 

1848년 민중의 반란으로 파리~프라하까지 전제정치가 모두 사라짐.

러시아의 입구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에 혁명이 일어나

황제의 권위가 무너지자 짜르 니콜라이 1세가 개입.

니콜라이 1세는 군대를 끌고가서 합스부르크 황제를 복위시킴.


전 유럽에서 복고적 왕당파들이 다시 고개를 듦.

짜르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군주제를 수호하는 경찰을 자처함.


니콜라이 1세 마음속 한 복판에는 짜르로서 자신의 역할은

무정부적인 각종 세력을 힘으로 압도하고 진압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음.


오스트리아 황제를 복원시킨 여세를 몰아

터키와 발칸에 눈독을 들임.

죽어가는 오토만 제국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함.


1853년 짜르의 군대가 터키령 발칸과 흑해를 공격.

러시아가 오토만 제국을 공격하자

런던과 파리에서 이를 경계함.

영국과 프랑스는 서둘러 터키를 도움.

이것이 ‘크림 전쟁’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서유럽의 힘을 제대로 깨닫게 됨.


크림전쟁에서 유럽은 러시아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음.

영국과 프랑스는 산업혁명의 신기술을 전쟁에 투입.

증기선, 소총병, 철도가 그런 예.

그에 비해 러시아는 전근대적인 옛날 기술을 가지고 싸움.

결국 니콜라이 1세의 군대가 참패.


나폴레옹을 이긴 나라이기 때문에 러시아는 자신의 실력 이상으로 과대 평가받았던 것.

그러나 수십년 지나는 동안에  러시아군은 약체화 됐다는 것이 증명된 것.

러시아 군은 과거의 명성에만 안주한 것.


크림전쟁 이전에는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노쇠하여 죽어가고 있었음.


크림전쟁 패전은 일대 충격이었음.

끔찍한 수치로 생각됐음.

크림 전쟁에서는 연합국의 지원으로 오스만 제국이 유일하게 러시아 제국에게 전쟁에서 이겼다. 

전쟁의 대부분은 흑해에 위치한 크림 반도에서 일어났으며,

1856년파리 조약으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파리 조약의 결과로 러시아 제국다뉴브 하구 및 흑해 인근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이후 흑해는 모든 국가에 대해 군함 통과 및 무장이 제한되며 중립이 선언된다.


 

1885년 2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니콜라이 1세를 칭송하던 군주들이 등을 돌린 가운데,

짜르 니콜라이는 어느 날 차가운 빗속에서 군대를 사열함.

이튿날 그는 폐렴에 걸렸고, 1주일 후 사망.


제위는 니콜라이 1세의 아들 알렉산드르 2세에게 넘어감.

 

 

알렉산드르 2세(제위 1855~1881)

 

 

* 알렉산드르 2세 제위 후반기부터는 러시아가 혁명의 시대로 돌입하기 때문에 황제의 제위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편의상 블로그 글은 그렇게 구분한다.


새 짜르 알렉산드르 2세는 아버지의 패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움.

그는 현실을 직시함.

패배를 인정하고 군대를 철수함.

그리고 새로운 전쟁, 바로 러시아의 과거와의 전쟁에 돌입.


크림전쟁의 패배는 러시아가 후진국임을 여지없이 증명함.

러시아의 구식 군대와 경제와 사회가 서구를 따라가려면 변화가 필요했음.


강철과 증기기관이 온 세계를 변화시켜도

러시아에서는 어떤 변화도 금지됐었음.

그러나 러시아도 이제는 달라짐.


1855년 

러시아의 새 짜르로 등극한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히 앎.


서부 유럽은 산업혁명이 한창이었지만,

러시아는 아직 잠잠한 상태였음.


알렉산드르 2세는 근대화와 농노제가 양립할 수 없음을 알았음.


보수적인 귀족들은 농노해방을 반대함.

농노가 사라지면 부가 사라지고, 곧 러시아 경제가 몰락한다고 주장.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음.


농노해방은 오히려 군주제 유지에 도움이 됐음.


알렉산드르 2세:


“우리가 위로부터 농노를 해방하지 않으면

 그들이 아래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할 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를 해방하기 2년 앞서

1861년 짜르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 선언에 서명.


처음에 농노해방은 위대한 용단으로 환영받아

알렉산드르 2세는해방자 짜르라는 존칭을 얻음.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존칭에 자존심을 느꼈다고 함.


그렇지만 얼마 안 가 사람들은 이 해방의 실질적 효과에 매우 실망함.

농부들은 지주들로부터 비싼 값을 내고 땅을 사야했고,

그래서 농부들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음.


짜르는 농노를 해방시켜 줬지만, 농부들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음.

농업생산이 감소했고,

많은 사람의 우려대로 러시아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함.


지하 혁명세력은 급진적인 행동을 부르짖음.

어떤 자들은 선거와 토지 국유화를

어떤 자들은 짜르의 피를 요구함.

그들은 스스로를

‘나로드나야 볼랴’(народная воля: 민중의 뜻)라고 불렀음.

이 용의주도한 테러단의 주도자는

소피아 페로프스카야’(С.Перовская)라는 여인.


소피아는 특권층 자녀로서 아버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장이었으므로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센 사람 중의 하나였음.

그런데도 소피아는 짜르를 죽여야만 한다는 급진주의자였음.


이는 러시아 역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한 단면.

특권층이 바로 그 특권을 분쇄하려는 혁명 세력을 만들어냈음.


“우리는 정부 안에서 가장 해로운 이를 제거함으로써만

혁명이 성공할 수 있으며,  투쟁에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피아는 왕실 가문을 없애는 것만이 새로운 자유 러시아를 세우는 길이라고 확신함.


1879년 자살특공대가 러시아의 지도적 진보주의자 알렉산드르 2세 암살작전에 착수함.

1879년 11월 짜르를 태운 열차가 모스크바에 도착.

짜르의 객차에서 폭탄이 터짐.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다른 열차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함.


1880년 2월

짜르 가족이 만찬장으로 가던 중 겨울궁전의 식당이 폭발.

수십명의 하인과 근위병들이 죽거나 불구가 됨.


진보와 개혁에 헌신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암살의 대상일뿐이었음.


“내가 야수인가? 그들은 왜 나를 사냥하려 드는 걸까?”


알렉산드르 2세가 온다는 곳은 행인도 상인도 사라진 텅 빈 장소가 됐음.


암살과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짜르는 개혁을 계속 추진함.


짜르는 새 입법부 계획을 발표함.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짜르가 자신의 권력을 나눠주기로 한 것임.


1881년 3월1일 일요일

알렉산드르 2세는 이틀 후인 화요일부터 입법부에 권력을 나눠주어 권력의 균형을 맞추기로 결정함.

다시 말해 ‘의회주의’를 도입하기로 한 것임.


그러나 테러집단 나로드나야 볼야가 볼 때 개혁은 짜르가 죽어야만 가능했음.


소피아 페로프스카야와 그 개혁세력은

일요일 오후 알렉산드르 2세의 나들이 마차를 급습.


소피아가 손수건을 떨어뜨리자 거사가 시작됨.

하나의 자살 특공대로는 실패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소피아는 4팀을 준비함.


혁명대원 한 명이 폭탄을 던짐.

그러나 그 마차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라서 짜르는 무사했음.

그러나 짜르가 실수를 범함.

짜르는 마차에서 내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려 했음.


그때 두 번째 대원이 두 번째 폭탄을 던짐.

두개골이 흩어지고 다리가 절단돼 날아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해방자 짜르는 그렇게 죽음.


혁명가들은 그래서 새 시대가 열리고, 인민은 해방될 거라고 믿었음.

 

그들은 진짜 그렇게 믿었지만, 실제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됐음.

 

뒤이은 짜르가 복수를 시작한 것.

 

알렉산드르 3세(제위 1881~1894)


피살된 짜르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는 소피아와 공범들을 색출하여 교수형에 처함.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 건축의 대가를 불러 아버지가 암살된 현장에 교회를 짓게 함.

‘피 흘린 구세주의 교회’

 

그러나 권력을 입법부와 나누려했던 짜르의 빛나는 결단은 없던 일이 돼버림.

새 짜르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서 개혁은 사라짐.


알렉산드르 3세는 정치, 경제, 사회 등에서 진행되던 모든 개혁을 중단시킴.

그러나 개혁을 중단시킨 것은 사실상 ‘혁명’이라는 더욱더 큰 변화의 문을 열게 된 것임.


6년후 나로드나야 볼야 잔당이 다시 짜르 암살을 시도함.

그러나 사전에 발각돼 주모자들이 처형됨.


그 주모자 중 하나가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그는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레닌)의 형이었음.


형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는

후에 러시아를 새로 만들어낸 대혁명가가 됐음.


1894년의 러시아는 종잡을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었음.

러시아는 30년 동안 5만km에 달하는 철도를 건설함.

이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기록.


산업생산이 치솟았음.

공장이 농부들의 새로운 일터가 됨.

시골 마을들이 번성하는 도시로 변함.


러시아가 산업화됨에 따라 대도시를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이 나타남.

특히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키에프 등에서 그랬음.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이 그 계급 속으로 파고들었음.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수백만명으로 인구가 늘어남.


젊은 급진주의자 변호사인 블라디미리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도 이곳 시민이었음.


다른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교육 받은 엘리트집안 출신으로 지방 교육청 장학관의 아들이었음.

블라디미르는 형이 혁명가로 처형되자 그의 뒤를 이어 투사가 됨.


1893년 레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사회주의 노동당을 조직함.

아주 결정적인 시기에 간 것이었음.

그 무렵은 13년간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팽창으로 일관됐던 짜르 알렉산드르 3세의 통치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음.


이듬해 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26살의 아들 니콜라이 2세 뒤를 이음.

 

혁명의 시대


어린 시절부터 니콜라이 2세는 정치나 권력에 관심이 별로 없었음.

반개혁적인 그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는 물론 가정교사들도

근대 사회의 실상에 대해 니콜라이에게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음.


니콜라이 2세는 짜르가 될 마음이 없던 사람이었음.

주위의 반응도 그랬음.

주위 사람들도 그가 짜르가 될 준비를 갖춘 사람이 아니라고 봤음.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의 지배자라는 지위에 두려움을 느낀 니콜라이 2세는

젊은 독일 왕녀 헤세 가문의 알리스 빅토리아 헬레나를 약혼녀로 맞이함.

이 처녀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로

그녀 역시 남편만큼이나 대권 행사에 관심이 없었음.


몹시 수줍음을 타서 모임에서도 조용히 장갑이나 매만지는 정도.

알현 받는 것을 싫어하고, 그저 은둔만 좋아하는 성격.

이런 태도는 오히려 그녀가 러시아 인민의 고통을 모른 체 한다는 인상을 줌.

교만하고 동정심 없는 독일 여자라고 여겨졌음.


아버지에 대한 공식 애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는 결혼을 서두름.

알렉산드라로 이름을 바꾼 이 독일 여자에 대해

사람들은 관 뒤에서 새 황후가 나타났다고 수군거림.


니콜라이 2세는 짜르와 백성들 간의 단결을 기약하는 현란한 즉위식을 거행.

그러나 이 화려한 행사는 오히려 니콜라이 2세와 백성들 간의 틈을 벌려 놓았음.


30년에 걸친 강요된 산업화로 인해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난해짐.

공장, 광산, 농장 어디를 가나 불안감이 감돎.

거기다 레닌 같은 급진주의자들이 불안을 부채질 함.

그들은 공산주의를 선동하며 혁명 세포들을 조직함.


1895년 

짜르의 경찰이 그들을 반격함.

레닌은 체포되고 기소돼 시베리아로 유배됨.

석방된 후 레닌은 서방으로 망명함.

그는 그곳에 머물면서 러시아에 공산주의 혁명의 불꽃을 피움.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임을 전혀 몰랐음.

그가 러시아 최고 지도자로서 취한 조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 됨.

니콜라이 2세는 태평양 연안의 중국과 한국에서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려 했음.

그러나 그의 원대한 제국주의적 꿈은 신흥 제국 일본과 충돌하고 말았음.


러시아의 진출에 경각심을 느낀 떠오르는 신흥제국 일본은 전쟁을 일으킴.

건설된 지 얼마 안 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짜르의 군대를 실어 나름.

그러나 일본군 특유의 전술과 기관총은 엄청난 러시아군을 죽게 만듦.


군사력을 보강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는 300척의 해군 함대를 동해로 파견.

이것은 장장 3만2,000km의 머나먼 항해였음.


1905년 5월

8개월 동안의 굶주림과 반란, 질병의 항해 끝에 러시아 함대는 마침내 태평양에 도착.

일본은 기다리고 있었음.


더 빠른 전함과 고성능의 함포를 이용해서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3분의 2를 격침시킴.

러시아의 자존심.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 해군의 명성이 일거에 무너짐.


안 해도 될 전쟁을 해서 엄청난 손실을 입은 것.

거기다 패전까지 했으니 정권의 정당성에 금이 갔고

교육받은 지식층은 물론 공무원, 심지어 측근 신하들에게까지

짜르의 권위가 실추되고 말았음.


그렇지 않아도 반정부 운동이 심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패전 소식이 전해짐.

1905년은 ‘혁명의 해’가 되고 말았음.


중세기부터 내려오던 짜르의 신성한 절대권이 러시아 인민의 도전을 받음.



1904년 8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

10년 동안 딸만 넷이었는데 드디어 황태자 알렉세이가 탄생한 것.


20세기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왕손이 됐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저주이기도 함.

호사스런 생활은 축복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저주였음.


황태자 알렉세이는 어려서부터 건강하지 못함.

의사들은 황태자가 출혈이 멈추지 않는 질병인 혈우병이라고 진단.

아무 치료법이 없었음.

혈우병 환자는 모두 어려서 죽었음.

알렉세이의 병은 로마노프 가문의 저주였음.


황태자가 죽으면 후계를 둘러싸고 말썽이 생길 것이고,

짜르의 권위가 흔들리는 시기에 이런 말썽는 좋을 리가 없음.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극비에 부쳐짐.

그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후계자였고, 아무도 그의 건강을 말하지 못했음.


그러나 러시아 길거리에서는 로마노프는 벌써 없어져야 할 가문으로 인식되어 있었음.


1904년 가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굶주림과 고난의 겨울이 옴.

거기가 러일전쟁 패전의 소식이 전해지자 짜르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짐.


1905년 1월 9일 일요일

항의자들이 대집단을 이루어 겨울궁전으로 몰려옴.

노동자, 학생, 신부

정교회 신부 게오르기 가폰이 이끄는 항의자들은

10만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서를 제출했음.

그들은 짜르에게 대의정치, 언론의 자유, 근로자의 권리, 일본과의 강화를 청원했음.


이것은 비폭력 데모였지 정치투쟁은 아니였음.

항의자들은 혁명적 구호를 외치지 않았음.

그들 스스로 명확히 했듯이 짜르에 대한 애정과 종교적 신앙심에 입각한 집회였음.

짜르에게 자신들의 곤경을 직접 얘기하고 그것을 면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호소를 하려고 모인 집회였음.


항의자들은 자기들의 청원서를 짜르에게 직접 전달할 생각이었음.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다른 곳에 있었음.

궁전 근위대의 반응은 신속하고도 잔인했음.


가폰 신부:

“근위병들이 우리에게 다가오자 고함소리가 났다.

칼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남자 여자 어린이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신음과 고함과 저주가 광장에 메아리쳤다.”


근위대는 사망자가 100명 미만이라고 주장.

항의자들은 사망자가 1,000명이라고 주장.

어느 쪽이 맞건, 이 ‘피의 일요일’(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사건은

반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말았음.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시민들 마음 속에는

짜르는 말 뿐이지 사실은 러시아 백성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깊이 자리잡게 됐음.


그해 여름 전국적인 소요 사태로 공장도 농장도 휘청거림.

혁명군이 50개 도시를 장악했음.

무장한 노동자들이 문을 연 공장을 습격하여 파괴


내란에 직면한 니콜라이 2세는 왕조의 수호에 대해 어떻게 할까 망설임.


“순전히 무력으로 진압하자면 피가 강처럼 흐를 것이다.

다른 방법이라면 시민의 권리를 인정하고

국가의회 ‘두마’가 제정한 법률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나보고 짜르를 그만두라는 얘기다.”


1905년 10월

짜르는 현실에 굴복함.

‘10월 선언’을 통해 시민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새로운 선거에 의한 의회를 승인.


니콜라이 2세는 뭔가 양보해야만 했음.

정말로 마지못해서 한 양보였음.

그는 정당, 의회 이런 것을 아주 싫어했음.

헌법을 인정하는 것도 마지못해서였고,

내심으론 전혀 인정하지 않았음.


1906년 5월

새로 구성된 러시아 의회가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자

니콜라이 2세는 의회 해산으로 대응함.

그리고는 선거법을 4년 동안이나 주물러 이번에는 보수적인 의회를 다시 구성함.


니콜라이 2세는 그때까지도 오직 로마노프 왕가만이 러시아를 다스릴 수 있으며,

그것은 신이 그 가문에 내린 사명이라고 믿었음.

그래서 아무도 그 권한을 그에게서 뺏어갈 수 없으며,

만일 그렇게 된다면 러시아는 망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음.


정치적인 혼란이 극에 달했건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초미의 관심사는

아들 알렉세이 뿐이었음.

알렉세이는 혈우병으로 날마다 사경을 헤맸음.


그래서 황후는 신비적, 종교적인 구원을 찾아 헤맸음.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고, 어디든지 가려고 했음.

황후는 기적을 원함.

측근 하나가 황후를 이적을 행하는 사람에게 데려갔음.

시베리아의 수도승 그레고리 라스푸틴


알렉세이가 8살이 되자 라스푸틴의 신적인 힘이 주입됨.

아이가 쓰러져 다시는 못일어날 듯 싶었음.

 

알렉산드라는 아들이 아프니 어떻게든 해달라고 라스푸틴에게 호소하는 전보를 쳤음.

라스푸틴은 “내일이면 피 흘림이 멈출 것이니 염려 말라”고 답전을 쳤음.

그런데 정말로 황태자가 출혈을 멈춤.

그날부터 라스푸틴은 황후 알렉산드라에겐 신같은 존재였음.


그 후부터 야성적인 시베리아 농부는 짜르 집안의 귀빈이 됐음.

그러나 이 수수께끼 인물은 사교계에서 추문을 일으킴.

 

러시아 상류사회 여인들은 매우 엄격한 생활을 했음.

그런데 러시아의 시골, 시베리아에서 온 이 사나이는 성적 에너지가 넘쳤음.


라스푸틴에게는 두 얼굴이 있음.

황후에게 그는 신이었음.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탕아에 불과했음.

그는 거칠고 지저분했고 호색한이었고 야수같은 데가 있었음.

그런데도 황후에겐 그런 면이 안보였음.

오직 자기 아들을 도와 줄 신성한 존재로만 보였음.


라스푸틴은 황후에게 알렉세이와 왕조의 생과 사에 대해 주문처럼 설교함.

그러나 러시아의 국민은 황태자의 질병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라스프틴을 치료사가 아니라 로마노프 가문을 좀먹는 암으로 생각.


짜르를 알현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라스푸틴을 통해서 왕실에 접근해야 했음.

우선 라스푸틴과 친교를 맺어 놓으면 그 다음은 짜르를 만나기가 쉬웠음.


1913년에 러시아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계속된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 300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음.

그러나 짜르의 권위는 이미 쇠퇴 일로에 있었음.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사회의 어느 집단 할 것 없이

모두가 독재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

 

농부계층도 중산층도 모두 짜르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음.

측근 장관들이 니콜라이 2세에게 좀더 의회를 존중하라고 진언했지만,

도리어 그런 장관은 해임되어 쫓겨나곤 했음.


1914년 여름

짜르의 권위가 마지막 시험대에 오름.

유럽이 폭발한 것(1차 세계대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세르비아에서 충돌.

그러자 며칠 후 독일, 영국, 터키, 프랑스 등 유럽의 모든 나라가 전쟁의 폭풍에 휘말림.

 

잠시마나 러시아를 갈갈이 찢어놓은 갈등이 사라짐.

급진주의자건 노동자건 귀족이건, 과거 러시아인이 그랬듯이 하나가 되어 싸움.

러시아군은 1천5백만으로 늘어남.

그 후 2년 반 동안 러시아는 그중 반이 넘는 8백만을 상실했음.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함.


1915년 여름

제국의 위기를 맞아 짜르 니콜라이 2세는 전선을 시찰함.

시련에 처한 그는 그것이 제국의 지배자인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함.


그는 아무 군사적 경험도 없었음.

게다가 쇼맨십도 전혀 없었음.

이를테면 군인들을 위문하면서 사기를 북돋아주거나 격려를 해줄만한 능력도 없었음.

군인들 앞에서도 조용하기만 했었음.

그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몰랐음.


백성들은 전쟁의 패배와 굶주림으로 국가 지도자에 대해 염증을 느낌.

혁명의 불꽃이 다시 점화됨.


레닌의 구호, ‘평화, 땅, 빵’

이것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실감나는 당면 문제였음.


300년 동안 러시아 국민은 로마노프 가문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해왔음.

그런데 그 신화가 깨짐.

혁명이 코 앞에 다가옴.


1916년 12월 어는 어두운 밤

악명 높은 시베리아의 신비스런 인물 라스푸틴이 파티장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옴.

황후와 왕실에 대한 라스푸틴의 암적인 영향력은 왕당파조차도 분노를 느끼게 했음.

짜르를 구하기 위하여 펠릭스 유소포프 왕자와 동조자들이 그를 제거하기로 함.


유소포프는 라스푸틴을 궁전 안 자신의 방에서 열린 심야 만찬에 초대함.

그래서 독약을 넣은 포도주를 마시게 함.

다섯 명을 죽일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고 함.

그러나 라스푸틴은 얼마나 건장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버텼다고 함.

독약이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그들은 이제 총을 쐈음.

그리고 라스푸틴이 밖으로 도망가자 쫓아가 여러 발을 또 쐈음.

라스푸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했음.


그들은 시체를 네바강으로 끌고 가서 얼음 구멍을 파서 그 속에 쳐 박았음.

죽은 걸 확인하고 시체를 내버린 것.

사흘 후 네바강에 그의 시체가 떠오르자 라스푸틴이 벌떡 일어났다는 설도 있음.

시체를 건져보니 폐에 물이 차 있었다고 함.

이것은 그가 물에 빠져서도 숨을 쉬었다는 얘기임.


라스푸틴의 죽음은 황후를 절망시켰음.

황후에게 라스푸틴의 죽음은 아들 알렉세이와 로마노프 왕가의 종말을 의미했음.

그러나 왕당파도 혁명파도 라스푸틴의 죽음을 다 좋아함.


세계 최대의 제국에서 황제의 최고 고문이 국가 엘리트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잘된 일이라고 하니

이러고서야 러시아라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는 나라라고 할 수 없음.


1917년 2월

수백만명이 전선에 잡혀있는 가운데 러시아 경제는 피폐해짐.

인플레이션으로 루블화 가치가 떨어짐.

식량과 연료가 결정적으로 부족해짐.

기나긴 빵 행렬이 형성됨.


2월23일 

빵 행렬이 소요로 변함.


제국의 종말, 2월 혁명이 시작됨.

군대도 경찰도 지식인도 니콜라이 2세를 지지하지 않음.

군대와 경찰이 지지하지 않으면 정권은 유지될 수 없음.


군대가 짜르의 수호를 포기하자 도시에 무정부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


12월당(데카브리스트) 당원들이 개혁을 요구한 이래

러시아인들은 근 100년 동안 혁명을 시도했음.

그들에게 혁명은 먹고 숨쉬는 것과 다름없는 생활의 일부였음.

혁명에 열중했고,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랬고, 기다렸음.

그러나 막상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모두 놀람.


2월 27일

니콜라이 2세는 짜르 전용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달아나 피신하려 함.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외에서 열차를 세움.


1917년 3월 1일

철도 위에 좌초한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의 최후통첩을 받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짜르가 퇴위하고 모든 권한을 두마로 넘기라는 내용이었음.

그것은 니콜라이 2세로서는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음.



제국의 운명이 그에게 달렸 있었음.

왕국의 몰락을 막을 생각으로 니콜라이 2세는 12살의 아들 알렉세이에게 왕권을 양위하겠다고 제안함.

그러나 측근들이 그것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이라고 말렸음.

그러자 니콜라이 2세는 동생에게 제위를 넘기려함.


그러나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도 왕관 쓰기를 거부함.

 

이렇게 해서 300년 만에 유럽에서 마지막 절대군주인 로마노프 왕조는 몰락.


절대군주가 무너짐과 동시에 볼세비키들이 그 기회를 이용했고

그래서 실권을 장악했다는 점이 중요.


한달 후 또다른 열차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향했음.

바로 이 열차에 러시아의 미래가 타고 있었음.


노동자 천국을 예언했던 레닌이 20년 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것.


1917년 10월

레닌의 볼세비키당은 두마를 위협.

2월 혁명이 10월 혁명에 무너진 것.

 

 

 *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다수파(большевики)와 소수파(몐셰비키 меньшевики)로 분열,

   다수파는 레닌의 지도하에 1917년 정권을 잡았다.

   그후 공산당으로 개명한 후에도 1952년까지 당명에 볼셰비키 글자를 첨가했다.



러시아인들은 혁명과 쿠데타라는 혼란을 겪어야했음.

1917년 2월 혁명 이후 사람들은 군부의 우익 쿠데타는 예상했어도

볼세비키의 좌익 쿠데타는 전혀 예상못했음.


한편, 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궁전에 연금된 상태였음.

한 때 모든 장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니콜라이 2세의 딸들

올가, 타티니야, 마리아, 아나스타샤는 소박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했음.

황태자 알렉세이는 부모 곁에 머뭄.


러시아를 통지하던 가문이 이제는 정치투쟁의 저당물이 돼버림.


볼세비키당은 짜르 일가를 마치 농노 다루듯이 시베리아로 유배시킴.


1918년 7월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우랄산맥이 있는 평범한 집에 연금됨.


얼마 후 모스크바의 레닌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이 내려옴.

한밤에 잠을 깬 짜르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게됨.

이제는 갑작스런 여행에 익숙해졌음.

딸들은 다이아몬드, 루비 등 로마노프 가문의 부로 장식된 옷을 입음.


출발 전에 지하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라는 명령이 있었음.

그러나 정작 사진사는 없었음.

붉은 군대 병사들이 레닌의 새 정부로부터 내려온 사형선고를 읽음.

 

  * 유혈의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Кровавый)

이것은 볼세비키 정부 역시 약체 정부임을 상징하는 행위였음.

내란이 시작된 1918년 여름 그 해는 볼세비키로써는 매우 어려운 해였음.

그들은 그 해를 지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왕가 일행을 처형해버리기로 결정한 것.

그들의 통치에서 위험요서를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한 결정.


피로 물든 시체들은 약품에 적셔진 후 화장됨.

왕가 일행은 살아남거나 되살아나서는 안됐음.

새로운 러시아를 위해서 잔인한 청소도 불사한 것.


레닌은 빛나는 미래를 주장.

그러나 러시아의 새 지도자가 그의 권력을 강화할수록

집권 공산당은 왕년의 짜르를 닮아감.


예카테리나 여제가 그랬듯이 그들은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새로운 체제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짜르를 죽여 없앰.

 

이반4세가 그랬듯이 그들은 국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테러와 유배를 일삼았음.

 

표트르 대제가 그랬듯이 그들은 끝없이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시도했음.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훨씬 빛나는 유산을 남김.

온 러시아인들이 아끼는 유산.

위대한 성취의 기념비들.

끈질긴 애국심.

이 나라의 역사적 동질성을 유지시키는 정교회 신앙.


이제 소비에트 연방이 몰락한지 여러 해가 흘러

러시아는 역사의 새 장에 들어섰음.


뿌리 깊은 자존심과 뿌리 깊은 모순의 나라


2000년 러시아 정교회는 한 러시아 가족을 새로운 성자로 시성함.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 마지막 짜르 일가족을 성자로 받든 것.

 

 

출처 : 내마음의 보석상자(上善若水/木鷄之德)
글쓴이 : 대륙철도횡단열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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