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스크랩] 역사속 신무기<35>고트족 ‘ 등자 ’

Chung Park 2015. 4. 26. 15:21

역사속 신무기<35>고트족 ‘ 등자 ’

서기 378년 현재의 터키 북서쪽에 위치한 아드리아노플에서 서양 역사와 전쟁사에 한 획을 긋는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다.

동로마 황제 발렌스가 이끄는 로마군단과 훈족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밀려난 고트족이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의 주요 교통로가 지나는 전략 요충지 아드리아노플에서 충돌한 것이다.

동로마 황제 발렌스는 승리를 장담했지만 전투는 로마군의 선공에도 불구하고 600여 년 전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가 경험하지 못했던 최악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무적을 자랑하던 로마군을 상대로 고트족이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등자와 일당백의 기량을 갖춘 중기병이었다.

로마군 역시 용병과 이민족으로 구성된 용맹한 기병대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고트족 중기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등자란 사람이 말 위에 올라타거나 말을 타고 다닐 때 말 등에 얹어 놓는 안장에 매달아 발을 걸칠 수 있게 만든 승마 기구다.

그 원리나 구조는 단순하지만 등자의 등장은 과거 특별한 기술과 남다른 감각을 요했던 승마를 보다 쉽고 대중적으로 바꿔 놓았다.군사적 측면에서도 기병이 승마시 두 발을 디딜 수 있어 더 안정된 자세로 활을 쏘거나 칼·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등자에 발을 걸치면 같은 조건에서도 더 무거운 갑옷을 착용하고 더 무거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무거운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상태에서도 안장 위에서 몸을 지탱하거나 적과 격돌할 때의 충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일례로 등자가 없었던 로마군 기병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한 손으로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했지만 고트족 기병은 고삐를 잡지 않더라도 등자만으로 몸을 고정하고 양손 모두를 사용해 싸울 수 있었다.

등자의 존재가 중기병 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등자는 기원전 4세기께 동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1세기께 스키타이나 사르마티아 같은 유목민족을 통해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졌다. 훈족의 압박으로 남부 러시아와 중앙 유럽을 거쳐 장기 이주를 하면서도 2세기께 고트족은 등자와 사르마티아인의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기병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를 통해 고트족 중기병이 거둔 보병에 대한 첫 승리는 중세 기사의 전형이 된 중기병의 탄생과 중세 전쟁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기원전 13세기께 아시리아에 의해 인류 최초의 기병부대가 전장에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기병의 전략적 가치가 보병을 압도한 것이다. 이후 중기병은 14세기 영국의 궁수와 스위스의 창병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 전장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기병의 시대로 불리는 전성기를 열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승리한 고트족은 로마제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권리와 강력한 무력을 갖춘 독립된 유랑민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것은 결국 로마제국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등자는 매우 간단한 승마용 기구다. 그러나 등자가 미친 역사적·군사적 영향은 서양 고대사를 완전히 뒤바꿀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출처 : 해병대 독립군 충실한 해병
글쓴이 : 충실한해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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