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스크랩] 연개소문의 3국 연합 당나라 정벌제안을 거부한 김춘추

Chung Park 2013. 6. 23. 07:25

 

진흥왕이 고구려 남하에 대비하여 백제와 신라가

서로 협력대응하자던 100년간의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전쟁을 할 때 파렴치하게 한강유역을 강탈하였다.

이에 분노한 백제는 신라에 대한 맹공을 퍼붓게 되었고,

백제의 법륜왕이라던 성왕이 신라와의 전쟁을 독려하려

나가던 중 신라군에 의해 살해당하여 성왕의 목이

경주 신작로에 묻힌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정벌전에 나선 이유다.

 

요즘 대왕의 꿈에서 미화시키고 있는 

김춘추 사위 김품석은 대야성의 성주였는데,

평소 자신의 부하 부인들을 겁탈하여 부하들이

김품석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대야성 민심을 위반한 상황에서 백제가 신라정벌의 관문인

대야성을 함락하고 경주로 진입하기 직전이였다.

이 때 대야성문을 열어준 자들은 김품석에게

부인의 정조를 상실한 김품석 부하들이였다.

 

다급해진 신라는 신라우월주의자들이

외교의 귀재(사실은 사대외교의 귀재)라고 칭송하는

김춘추를 왜에 급파하여 백제에 대응할 구원군을 요청했다.

그런데, 백제의 담로국인 왜가 지원해줄이 만무했다.

 

다시 고구려로 달려가 연개소문에게 애걸복걸했다.

이에 연개소문이 신라가 낼름해간 고구려 영토인 강원지역을

내 놓으라고 했다. 김춘추는 거부했고,

연개소문의 3국 연합 당나라 정벌제안도 거부했다.

김춘추가 거부한 이유는 흉노선비국가들이라는 차원에서

신라왕족과 혈통이 같은 당나라를 최후 의존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라가 살아 남은 건

고구려에 의존하고 백제에 의존하고

당나라에 의존한 사대외교노선때문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의식은 오늘날까지

신라우월주의 신라사관이나 정치인들에게

깊이 뿌리내려 있다.

 

우리 민족이 강성해지려면 하루 속히

이러한 신라위주의 우리가남이가 골품의식과 외교의식에서

탈피하여 동아시아를 경영했던

단군조선의 노선을 견지하여 대륙과 바다를 경영했던

고구려와 백제와 같은 대국적이고

통합적인 의식과 국가경영능력을 발휘할 때이다.

 

땅덩이가 작고 의식자체가 좁쌀같으면

강대국에 의존하는 심리가 강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후손대대로 그러한 의식이 자리하게 되어 있어

오늘날 45년 남북한의 영남권력들이

자기집단과 자기지역 위주의

소아적인 정치놀음을 해 온 것 처럼

민족의 미래가 암울해 질 수 밖에 없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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