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스크랩] 김춘추의 숭당사대주의와 고구려의 김춘추 참수작전

Chung Park 2013. 6. 23. 07:27

 

 

 

사료[삼국사기 5권 신라본기 28.진덕왕 ]

제28대 진덕왕(眞德王 647~654 재위기간 7년)


겨울, 감질허를 당 나라에 보내 조회하도록 하였다. 태종이 어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신라가 신하의 자격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당과 다른 연호를 사용하는가?" 질허는 "일찌기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 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대국(당나라)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를 사용하였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이세민)이 이를 수긍하였다. 이찬 김 춘추와 그의 아들 문왕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조회케 하였다. 태종은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내보내 맞이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태종이 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늠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는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당의 황제가 지은 온탕 및 진사비의 비문과 새로 지은 [진서]를 주었다. 태종이 하루는 춘추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면서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춘추가 무릎을 꿇고 "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의 파견을 승락하였다.

춘추는 또한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이에 태종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의복을 춘추와 수행원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춘추를 특진에, 문왕을 좌무위장군에 제수하였다. 춘추가 귀국할 때, 태종이 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춘추는 황제에게 "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 중의 하나인 문왕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태종은 곧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 (원문 2자 결자)에게 숙위를 명하였다.

 

 

춘추가 귀국하는 도중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다. 이렇게 되자 춘추의 시종인 온 군해가 큰 모자를 쓰고 대의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라병은 그를 춘추로 알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군해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3년,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