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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용숙 교수의「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

고대 문명/고조선

by Chung Park 2015. 5. 19.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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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사관을 지향하는 문명서래설의 박용숙 교수의「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

 

 

http://cafe.daum.net/Joseon./C8iQ/129

 

 

 

 

 


필자는 그의 학설이 반도사관에서 대륙사관을 열어가는 과도기상에서 그 빗장을 강단사학에서 처음 시도한 것이라 평가하고 그간 반도 내에서 상고사학을 찾고있던 우물안 개구리에 머물고 있는 반도 고고학자들을 계몽할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최태영 옹이 지적한 말대로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상고사는 불모지에 불과하다. 왜 그런가.

이는 일제주구 관동군 헌병 보조원 출신 김창룡 특무대장을 통해 보도연맹을 비롯 113만의 정적을 좌익으로 몰아 죽인 희대의 살인마이자 자신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해방 후 친일파를 휘하로 끌어들여 반공주의 애국자로 변신시킨 이승만 때문에 친일잔재 청산이 안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원인이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이 안되고 있다는 점도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라면 하나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적지 않은 중국 상고사서들이 화하족의 뿌리가 동이 제 족임을 밝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곡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만 매달려 국조단군을 신화로만 보고 한민족의 시원을 반도 안에서만 찾는 골빈 고고학자들을 보고 모조리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 위인들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역시 철밥통으로 변해버린 민족혼의 차도살해(借道殺害) 집단에 불과하다. 히딩크가 한국을 월드컵 4강에 올리고 한 말이 보도되었다. 그가 2001년 초 한국축구팀을 맡으러 입국해 26개의 한국팀 경기 비디오를 정밀 분석한 결과 내린 진단은 정도에 입각해 지극히 정상적인 진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은 말도 안 된다고 헐뜯은 바 있었다.

이는 그동안 한국의 모든 패러다임이 해방공간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문화여건이 그대로 온존해 굳어진 낡은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 패러다임의 전환은 곧 정치적인 사망이며 문화사상적인 떼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두렵지 않을 수 없다.

그 정점에는 항상 수구세력이 보수로 위장해 백년묵은 여우처럼 1000년묵은 구렁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히딩크가 한국 선수들이 치룬 비디오를 분석하니 발 재간이 대단히 기민하고 민첩해 놀랐다고 했다. 더 놀란 것은 거의 모든 한국선수들이 왼 발을 오른발같이 자유자재로 능숙히 이용하는데 놀랬다고도 했다.

유럽에서도 양발을 능숙하게 하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선수들이 왜 1등을 못 할까 생각했더니 원인은 체력이었다고 진단을 내리고 체력 기르기에 전력을 투구했다. 물론 한국인 고유의 병폐인 지역주의나 연고의식 및 학연, 지연 등에 얽매인 선후배간의 구태의연한 비효율적이고 보수적인 상명하복 전통이라든가 연공 서열위주나 헛된 명성위주의 한국전통의 낡은 방식을 과감히 깨고 능력위주, 실력 위주로 국가대표팀을 재선발해 나아갔다.

물론 이러한 진단이 지극히 정상적인 패러다임이자 아주 자연스런 준거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공간 이후 구태의연한 정치권, 공무원사회, 재계, 학계, 언론계 등 사회 전 분야의 시각에서 보면 엄청난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고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밖에 비쳐질 수밖에 없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거였다.
1년 반 만에 월드컵 4강에 이르자 비로소 사회 각층은 히딩크 사단의 용병술과 정책을 높이 평가해 재계에서 정계에서 히딩크 접목을 외치고 침이 마르게 칭찬해 대는 상황이 왔다.

패러다임의 전환, 이것이 없이는 한국상고사학계는 영원히 반도사학의 우물안 개구리 연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민족 상고사의 원형은 대륙에 있었고 당시의 한반도는 그야말로 변두리 주변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반도 식민지사학자들은 수많은 대륙의 고서들이 동이족이 대륙의 안방을 차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조리 수수방관하고 반도시절 왜곡 집필된 국내사서만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정작 그 원서가 되는 대륙의 사서는 도외시하고 있다.


증산도 본부에 새로이 복원되어  모셔진 복원 단군영정단군영정이다. 증산도는 환인 천제(桓國:3301년간 7대), 환웅 천황(배달국:1565년간 18대), 단군 성조(고조선:2096년간 47대)등 3위 성조 시대에 신앙했던 신교(神敎)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三神上帝님을 신앙하는 신교(神敎) - 풍류도(風流道)는 최치원 선생이 말하듯 유불선 3교를 모두 포함한 인류 문화의 뿌리였다. 증산도는 한민족 신교 신앙의 마지막 열매다. 요즘과 같이 뿌리 의식이 말라 비틀어져가는 때, 증산도는 9천년 민족 정통 신교 道家신앙의 등불이다.


그러다 보니 고고학 하면 으레히 반도내의 유물이나 유골만 움켜쥘 줄 알았지 대륙에 동이 제 족의 유물이 있는 줄 모르며, 상고시절에는 변두리에 불과했던 반도내의 고인돌만 움켜쥘 줄 알았지 본 바닥이었던 대륙의 흥륭애 문화, 홍산문화, 하모도 문화, 앙소문화, 양저문화, 대문구문화, 용산문화를 비롯한 수많은 고고학적 유적지가 한민족의 유적지임을 배제시키고 있다.

가령 오월문화를 본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로, 그들이 바로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일찍이 그들이 창조한 찬란한 문화는 뭐가 뭔지 모르는 만장(漫長) 시대 중, 돌로 병기를 제작한 송택(崧澤)문화(5500-6000년전)와 옥으로 병기를 제작한 양저(良渚)문화(4000-5500년전)와 동(銅)으로 병기를 제작한 마교(馬橋) 문화(3000-4000년전)가 있는데 지나 고고학자들은 이들이 황하 유적지보다 결코 문화수준이 낮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하다못해 남월국의 오랑캐 무덤이라 칭하는 마왕퇴가 발굴되어 대륙을 놀라게 했을 때 그 무덤의 주인공이 막상 동이족의 후예라고 평한 국내 사학가를 나는 보지 못했다. 이러한 면은 바로 그들이 식민지 반도사학자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나는 본다. 

필자가 볼 때에는 지나사가들이 대륙의 역사의 주인공을 동이족이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고 있는 터에 백이면 백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아니요 하고 합창하는 한국의 사학자들이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참으로 이건 기막힐 정도로 신기한 현상이다.

어쩌다가 정신구조가 이 정도로 썩었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민족 개벽의 도미(掉尾)는 언제나 힘차게 민족혼을후려칠 것인가. 한국의 지성은 이병도가 들어설 무렵인 오래전에 이미 사망했던 이래 아직도 부활할 줄 모르고 있다.  


필자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박용숙의 몇 몇 논지와 함께 안 창범 교수의 논지를 인용하며 설명하려 한다.

우선, 박 용숙 교수의 핵심논지를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에서 보기로 하자.

그의 학설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이미 중국에서는 소위 중국문명 서래설(지중해, 중동에서 기원했다는 설)로 이미 용도폐기된 학설이지만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기마 민족 한반도 도래설을 부인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학설로 채용되고 있으니 오향청언이나 가시마노보루가 바로 대륙사관에 근거한 일본민족 서래설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박 교수의 시각은 옳다 그르다의 차원을 떠나 한반도 사관에 갇혀있는 민족 상고사를 대륙사관의 시각으로 확장한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라 본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그리스의 강력한 원주민을 페라키스인이라 했는데 그들은 지중해를 지배한 산스크리트 문화를 대표하며 방향을 색깔로 바꾸어 부르는 등 고대 바빌론의 음양사상이나 중국문화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 문화, 이란 문화에서도 5행 사상이 발견된다.

오늘날 머리와 눈동자가 검은 웅족(熊族)의 특징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몽고인은 물론, 터키인, 헝가리(마자르족), 그리스, 남 러시아, 중앙아시아인에서도 발견된다.(「康熙字典」 인용)

§지중해의 뮤케나이(스파르타)를 「산해경(山海經)」에 무함(巫咸)이라 한다. 슐레이만과 그 이후의 고고학자들은 그곳에서 발굴한 점토판 미노아 문자와 크노소스 문자의 해독에 실패했는데 이중 크노소스 문자는 한자(漢字)의 원시형태이며, 선(線) 문자 B로 불리는 미노아 문자는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의 원리와 거의 같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사슴발자국에서 녹도문을 만든 신지(神誌)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나온다. 상고문자인 녹도문은 바로 설형문자(쐐기문자)이다. 미노아 문자 속에는 중국 은대(殷代) 청동기로 알려진 여러 모양의 세발 제기(鼎)가 나타난다.

고구려시대의 성곽 석조방식이 뮤케나이(스파르타)의 그것과 일치하며, 공주의 한 무덤에서 뮤케나이의 제기(祭器)인 아스코스(Ascos)와 같은 소모양(소시머리)의 토기가 발굴되었다. 산스크리트어 문화인 뮤케나이는 샤머니즘을 신봉했고 페라키스는 불교이전의 종교적 메카를 가리킨다.

§백제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한 와당에서는 히브리 문자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페니키아 문명과 관련있는 글자이다. 우리의 고대문화가 지중해와 관련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경주의 금관유물인데, 천마총에서 발굴된 푸른색 유리잔은 스키타이 제품임이 밝혀졌다.

특히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황금보검은 카자스탄 커질에서 출토된 보검과 양식적으로 동일한 것이며 황금 귀고리와 구슬로 만든 곡옥은 그리스 신화의 놀이 서품(敍品)이다.



황금 인간상(복제품) - 카자흐 국립박물관



스키타이족 초원 무희도-그들은 바로 치우천왕의 철기문명을 받은 동이족의 후예였다.



▲ 스키타이 문양(YTN 대 몽골기행 제공)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기원전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스키타이를 소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초원지대로 들어갔으나 여기 저기로 이동해 다니는 그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 허탕을 치고 말았다고 최초로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훈민정음의 원본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3대 가륵단군이 창제한 것으로 나오는데, 중국인은 고린도(Corinth)를 '哥林多'라 하고 고구려, 말갈은 모두 오늘날의 지중해와 터키땅을 무대로 역사를 펼쳐 갔던 나라들이다.

발해는 그들의 혈통을 이었으며, 「단기고사(檀奇古史)」에 가림토는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방언으로 가륵 단군은 산수가림다로 역사편찬을 하게 했다. 뒤에,  대야발(大野勃)은 이를  '발해문(渤海文)'으로 옮겼는데 발해문은 고대 페르시아 문자로 생각된다.

가림토(加臨土) 문자와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는 산스크리트어를 말하며, 진시황과 알렉산더는 산스크리트어 문서를 모두 불태웠다고 하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이 수광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우리의 한글(언문)이 고대 인도의 글자를 본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대 인도 글자 구자라트문자는 자음이 ㄱ, ㄴ, ㄷ, ㄹ, ㅁ, ㅅ, ㅇ(7자)으로 모음은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과 같다. 이 글자가 가림토 문자이고 산스크리트어와 관련있다.

크레타 언어의 가장 유력한 모델은 히타이트어인데, 히타이트는 기원 전, 1600년 경에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앗시리아에 까지 세력을 뻗쳤던 제국으로 후루리족(부여족)이 주축이 되어 세운 나라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히타이트 제국의 지배층은 아리안 언어를 사용했으나 후루리족의 언어나 인종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나 그들 언어가 크레타언어와 같으며, 소아시아 남부에 있는 골족의 언어, 이탈리아 원주민인 에투루리아인의 언어, 피레네 반도의 태고 주민인 바스크 언어, 코카서스 원주민 언어, 크루지아 언어와도 맥락이 같다는 걸 확인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크레타 언어와 후루리 언어가 여전히 미스터리 속에 남겨있으며 가림토문의 비밀이 그 가능성이다.

최초의 기마민족으로 알려지고 있는 스키타이족 관련해 다음의 경주 황남대총에 대한 기사를 보면 흉노 스키토 시베리언이 우리의 환단시대와 얼마나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www.cheramia.net/

 

 

 

 

  • 글쓴이: 김재만
  •  
  • 조회수 : 581
  •  
  • 08.07.24 00:51
http://cafe.daum.net/chosunsa/POVo/2989
 

가림토가 산스 크리트 의 크리트 였군요... / 그리고 몽골의 역사를 대조선의 역사로 보면 모든 것이 풀림니다 08.07.24 05:29
 
 

 

유럽을 포함한 유라시아는 고대부터 동아시아와 한문화권이었읍니다. bc3000년대 붉은색토기의 발굴현장을 보면 유라시아전체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동일문화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08.07.24 08:40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은 '조선의 역사'를 없애기 위함 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시황의 정체도 좀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동방이라는 것은 결국은 '조선' 및 '조선의 후예'들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08.07.24 12:50
 
 

 

산스크리트어/로마자/그리스문자/한글자모 등은 같은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글자모와 같은 것입니다. 석가의 탄생지가 그리스 또는 콘스탄틴 노플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 희랍인은 확실히 불교를 믿었습니다. 다만 현재 불교유적 사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누가 찾으면 올려주시기 바람니다. 08.07.24 19:21
 
 
역사를 모조리 없애버리고 소설을 써놓아서...'그리스'와 '로마'의 정체가 명확치 않습니다......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환단고기'와 같은 '서양의 고서'가 찾아지길 바라는 바입니다... 08.07.24 20:09
 
 

 

베다 경전엔 수백만년전 일도 적혀있다니,, 인도역사가 더 오래된 것?? 08.07.24 22:19
 
 
저는 그 인도를 조선, 중국으로 봅니다만... 수백만년이라는 것은 '우주의 태조' 시점? 08.07.24 22:57
 
 

 

조선의 강역을 아시아 자체로 보면,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가 되는 지역의 력사적 관계가 풀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경계가 현재의 지리적 구도로써만 보더라도 말입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일식현상에서 1905년 8월 30일에 일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날의 일식은 서-아시아의 끝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거든요. 조선정부의 공식적 문헌에서 일식현상이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을 신뢰하려면, 조선이 아시아 자체였다는 말 이외에는 풀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서-아시아까지 조선이라는 력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08.07.25 01:59
 
 
바로 그렇습니다... 또한, 이 유럽과 아시아의 그 기원도 아마도 '아리안'으로 하나였다는 것이죠... 우리의 삼국시대는 유럽과 아시아가 나눠지기 전인 것 같습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나뉜것은 고려이후 거의 조선시대에 와서 인 것 같습니다... 지도를 보면 색갈이 달리 나눠져 있는 것이 1400년대 이후,1500년대 가서야 그러니까요.. 08.07.25 11:49
 
 

 

초보라 잘 모르지만..그냥 느낌에..동부유럽쪽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쪽은 아무래도 조선과 가까운곳이잖아요..근데..이상하게도...그들 지역은 거의 공산화국가란겁니다;;; 공산화란건...개방적이지 못하고 폐쇄적이기 때문에....예전 역사나 유물..관련.....조작하기 쉽다..? 뭔 핑계로 학살(인종청소)하기도 쉽다? 이런거 아닐까 합니다;; 동부유럽과 동남아 국가 그리고 소련..중원대륙..다..공산국가였습니다;;;;;;; 뭔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요? 08.07.28 01:03
 
 
중요한 발견이네요.... 다른 말로 얘기하면, 주요산업국이 아나었다는 얘기네요... 주요산업국에서는 민주주의 라는 이념으로 왕을 처단하고, 주요산업국이 아닌곳에서는 공산주의 라는 이념으로 왕을 처단하면 되니까요.... 모두 개개의 백성이 중요한 시스템이네요... 가만히 보니까... 선비나 성인은 헛소리 하는 집단이 되죠... 그들에게는.... 영국이 지금의 패권을 잡은 것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소규모 농가와 자본은 파산할 수 밖에 없습니다.... 08.07.29 22:01
출처 : 하나님께 영광을...
글쓴이 : 돌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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