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하라인 (Tocharians) - 자료 : 나무위키
1. 개요
기원전 2000년경부터 9세기경까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에 거주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으로, 인도유럽어족 계열 언어를 쓰는 민족들 중에서는 가장 동쪽에 거주한 민족이다[1]. 신장 지역의 타림 분지 일대의 선주민으로 그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소하공주 미라 등으로 미루어보아 꽤 오랜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명인 '토하라'는 알란족의 언어로 '무사'를 뜻하는 토하르(tokhar)에서 유래한 말로 기원전 2세기의 그리스 측의 기록에서 고대 그리스어로 '토카로이'라고 불린 것이 다시 로마인들에 의해 라틴어로 '토하리'라고 번역되면서 그대로 민족명으로 굳어졌다. 토하라인은 달리, 토하리인, 토카리아인으로 불린다.
2. 역사
2.1. 기원
토하라인의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인도유럽어족 계열 민족들 중에서는 인도유럽조어를 쓰던 공통 조상에서 직접 갈라져 나온 부류로 추정되며, 켈트족[2]과 라틴족[3]과는 공통의 조상을 가진다고 보여진다. 이런 추측은 인도유럽어족이 아르메니아에서 기원했다는 아르메니아 가설 및 러시아의 쿠르간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쿠르간 가설과도 연결되어 현재 주류 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기원전 3500년경에 처음 발생하여 기원전 2000년경까지 타림 분지 북부와 시베리아 일대에 걸쳐 존속한 아파나세보 문화가 토하라인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며, 실제로 기원전 2000년경의 타림 분지의 선사 유적지에서 타림 미라라고 불리는 미라 한 구가 하플로그룹 조사 결과, 토하라인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판명났다.
2.2. 초기 역사
기원이야 아무튼간에 토하라인은 기원전 2000년 경에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했고, 이곳의 선주민이 되었다. 당시 신장 지역의 동쪽에 있는 중국 지역에서는 상나라가 건국되었고, 토하라인들은 상나라를 세운 한족과 상당한 교류를 이루었다. 그 증거로 당시 갑골 문자에 기록된 글자인 蜜(꿀 밀)[4], 城(성 성), 里(마을 리) 등의 몇몇 한자와 당시의 마차 유물, 소하공주 미라의 존재[5] 등이 그 예다. 중국인들이 역사상 최초로 조우한 기마 민족이지만, 본격적으로 최초로 조우한 유목민은 아니다. 이 시기의 토하라인은 단순히 목축업을 주로하는 민족이었을 뿐, 제대로된 유목 생활을 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 최초로 등장한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리는 이들로[6] 이들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이후에 등장하는 동호[7]의 전신격의 민족이라고 추정된다. 중국 측의 기록에서 토하라인은 차사국, 고차국, 누란[8] 등의 국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언급된다.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전한 대의 기록에 나오는 서역의 유목민들인 오손과 월지가 이들과 동계라는 설도 있다. 다만, 주류 학계는 월지는 몰라도 오손은 토하라계가 아닌 인도이란어파 계열이라고 보고 있다[9]. 당시 한무제는 흉노에 대한 견제와 더불어 부유한 서역과의 무역을 목표로 장건을 파견하여 토하라계 제국(諸國)과 기타 국가들을 탐험하게 했고, 그 이후인 후한 시대에는 반초를 통해 이들에 대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10]. 비록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동북아시아 문명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 문물 교류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때 개척된 실크로드를 통해 동북아시아에 불교가 전래되기 시작했다.
2.3. 불교 전래 이후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고 이것이 기원전 1세기경에 중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토하라인들의 대부분이 불교로 개종하게 된다. 이는 토하라인들의 역사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바꾸어놓는다. 동북아시아 불교 전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쿠마라지바[11]가 바로 토하라계 국가인 쿠차의 왕족이다. 그리고 토하라인들에게 전파된 불교가 서기 1세기경부터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당시 중국 후한 왕조의 수도인 낙양에 동북아시아 최초의 절인 백마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서기 2세기에는 본격적으로 인도인 승려와 토하라인 승려들이 대거 중국으로 건너가서 불교의 전파에 힘썼고, 이미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면 불교가 확고하게 주류 종교로 자리잡는다[12]. 이로써 토하라인들과 중국인들간에는 불교라는 공통점이 생기면서 더욱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중국 왕조들이 본격적으로 서역 정벌에 나서면서 토하라계 국가들의 전성기가 하나둘씩 끝나버렸다. 이미 전한 대에 토하라계 국가들 중 가장 부유했던 누란이 침공을 당하여 속국화되었다가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 후량에게 완전히 멸망하는 등, 서역 전반이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된다[13]. 하지만, 그럼에도 토하라인들이 중국과 가까워진 것은 그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어서, 전한의 발전으로 인해 본래 26~36개에 불과하던 신장 지역의 도시 국가들이 2배 가까이 되는 55개국으로 증가하였다. 신장 지역 국가들이 중화권에 편입된 데는 같은 토하라계 국가이던 사차국과 북쪽의 흉노 때문인 것도 있었다. 이 두 강대국들이 요구하는 조공품의 양이 엄청나서 짓눌릴 지경이던 서역의 도시 국가들이 그나마 자기들을 호의적으로 대하던 한나라에게로 붙은 것이 서역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14]. 이렇게 중국의 정세에 따라 토하라계 국가들과 중국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서역의 도시 국가들은 크게 번영하였다. 하지만, 8세기 경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2.4. 이슬람의 전파와 멸망
서기 7세기경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가 발흥하고 이후 세워진 우마이야 왕조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토하라인들을 포함한 서역의 여러 민족들도 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 중국은 당나라가 들어섰고, 우마이야 왕조와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를 향해 무한팽창을 벌이고 있었다. 때문에 당나라와 우마이야 왕조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당나라의 고관이 지금의 페르시아계 무슬림을 처형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해당하는 소그드인 도시국가인 사슈의 왕이 우마이야 왕조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두 제국이 격돌하게 되는데, 이것이 탈라스 전투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가 크게 패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종교적 헤게모니는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넘어가버렸고, 이내 불교를 기반으로 발전하던 토하라인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쳤다. 당시에 토번[15]이 중앙아시아를 침공하면서 당나라의 지배를 받던 토하라인들은 그대로 토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탈라스 전투 이후로 토번 역시 우마이야 왕조의 뒤를 이어 성립된 압바스 왕조의 침공으로 대차게 타격을 입으면서 토하라인들의 영역은 마니교를 믿던 위구르족이 세운 위구르 제국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위구르 제국 역시 키르기스족[16]에게 멸망하였고, 이 시기부터 토하라인들 사이에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일단 위구르족은 신장 지역을 정복한 뒤에 그대로 정착하였고, 이로 인해 토하라인의 튀르크화가 시작되었고, 반대로 위구르족의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17]. 이로써 9세기경에는 토하라어로 된 기록이 더이상 등장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위구르족에게 동화되어 소멸하였다.
3. 언어
언어는 토하라어를 사용하였고, 이것은 다시 토하라어 A와 토하라어 B로 나뉜다. 토하라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지만, 토하라인의 영역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서쪽에서 쓰이던 소그드어, 타지크어 등이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는 것과는 달리, 토하라어는 독자적인 토하라어파를 이룬다. 이에 대해 현재 주류 언어학계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가설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아르메니아 가설이 그것이다. 아르메니아 가설이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그리스어와 아르메니아어[18]가 공통조상을 가진다는 가설로, 이 가설에 의하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인도이란어파가 동계이고, 켈트어파와 이탈리아어파, 토하라어파가 동계이며, 발트어파, 슬라브어파, 게르만어파가 동계이다. 그리고 기원전 4000년경에 인도유럽조어에서 맨 처음 아나톨리아어파[19]가 갈라져 나왔고, 이후에 그리스-아르메니아-인도이란조어가 분리되었다가 기원전 3000년경에 각각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인도이란어파로 분리된 뒤, 그리스어 사용자들인 원시 그리스인들이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경에 켈트-이탈리아-토하라 조어에서 토하라어가 분리된 뒤에 인도이란어파의 사용자들과 함께 아시아로 동진하였다고 한다[20][21]. 즉, 토하라어는 넓게 보면,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스페인어 등과 동계인 셈이다.
4. 문화
비록 위에서 언급했듯이, 동북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족은 아니었으나, 동북아시아사 최초의 기마민족이었다. 토하라인은 중국에 말과 마차를 처음 소개한 이들이었고, 이들과의 접촉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전쟁에 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됐다[22][23]. 그래서 토하라인들은 이미 상나라시대부터 중국과 꾸준한 교류를 했고, 또, 북쪽으로는 흉노, 서쪽으로는 오손, 월지 등과 교류하면서 막대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한편, 동서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동서양 간의 문물 교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는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이어지게 된다[24]. 토하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토하라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인 카로슈티 문자를 개발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문자는 기원전 4세기에 처음 만들어져서 근 800년을 사용하다가 서기 3세기 경에 사용이 중단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들어온 브라흐미 문자도 사용되었지만, 역시 서기 3세기경에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후에는 소그드 문자에 기반한 마니교 문자로 대체되었다. 이들이 믿던 종교는 불교와 마니교이며, 이 두 종교가 전래되기 전의 고대 토하라인의 신화는 현전하지 않고 있다. 기원전 6세기경에 불교가 인도에서 발흥한 뒤, 중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전래되면서 토하라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8세기 경에 위구르족의 침공 이후로는 마니교 역시 받아들인 바 있다. 현재 적지 않은 수의 토하라인들의 프레스코화가 남아있기는 하나, 신장 지역에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무슬림들이 이 프레스코화에 대한 반달리즘을 벌여서 제대로 판독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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