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편집]
중국 전국시대의 상인이자, 정치가. 한(韓)나라의 거상이자, 진(秦)나라의 상방이었다. 조나라에 볼모로 가있던 진나라 떨거지 왕족인 영이인을 끌어내 끝내 진나라 왕으로 만들었으며, 진시황에게 권력을 빼앗기기 전까지 진나라의 실세로 군림했던 권신이었다.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킹메이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여불위의 출생지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한나라 양책 출신이라고 하였고, 유향의 전국책에서는 위나라 복양 출생으로 전한다. 그는 상인으로서의 수완이 뛰어나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사기에서는 "여러 곳을 오가며 물건을 싸게 사들이고는 비싸게 팔아 집에 천금을 쌓아 두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원거리 무역을 통해 한 지방의 특산품을 다른 곳으로 팔며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에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들어가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당시 한단에는 중원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진나라 소양왕의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2]의 아들 영이인(異人)[3]이 인질로 와있던 중이었는데, 여불위는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인은 비록 태자 안국군의 아들이었다고는 하나, 한낱 서자 출생인 데다가 서열이 높은 형제들이 워낙 많았으며 무엇보다 이인의 어머니인 하씨가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저 눈 밖에 난 처지였다.[4]
그러나, 이인을 한 번 만나본 여불위는 그의 잠재성을 꿰뚫어 보아 가히 왕재라 여겨 그에게 대뜸 오백금(五百金)이라는 막대한 재물을 나누어 주면서 이인의 후원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이인 역시 여불위의 뜻에 응하여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주거든 막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5] 이후로부터 여불위는 이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엄청난 자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한편, 자신의 첩이었던 미인 조희를 이인에게 바치는 등 갖은 정성으로 모셨다.[6]
2.2. 왕을 만들다[편집]
안국군의 아들들은 모두 첩들에게서 얻은 서자였기 때문에(정처 화양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안국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차기 태자가 될 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불위는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라고 이인에게 조언하였다. 이인은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5백금에(사기 여불위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五百金) 달하는 많은 재물을 그녀의 언니에게 보내어 비위를 맞추고, 그녀의 고향인 초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연극까지 하였다.[7]
화양부인은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으나, 태자인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다. 화양부인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안국군의 서자가 왕이 되면 모든 권력을 잃고 말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 와중에 자신을 지극히 위해주는 이인은 화양부인에게 유일한 희망과 같았다. 화양부인은 곧 이인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보호해주었고, 초나라의 자식이라는 뜻의 자초(子楚)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 장수 왕흘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해 오자 장평대전때도 참아줬던 조왕은 인내심이 바닥났던지 자초를 해하고자 병졸들을 보냈다. 여불위는 이 병사들에게 무려 황금 6백 근을[8][9] 뇌물로 뿌려 자초를 조나라에서 탈출시키고 그의 아내 조희와 아들 정은 잠적시켰다. 조왕은 자초의 처자식이라도 죽이려고 열심히 찾았지만 여불위가 잘 숨겨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조희와 정은 조나라에서 지냈는데, 기원전 251년 소왕이 죽고 효문왕이 즉위하면서 자초가 태자의 지위에 오르자 진나라로 왔다. 여담으로 왕흘의 군대는 이목이 격파했다.
자초의 할아버지인 소양왕은 무려 50년이나 왕위에 있던 중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었으나, 그 역시 이미 상당히 고령이었던 까닭에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안 되어 급사하였다. 결국 효문왕의 태자였던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장양왕이 되었다.[10] 이리하여 여불위는 서자 출신인 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하여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떨거지 왕족[11]을 당시 중원 제일의 강국이었던 진의 왕으로 만드는 가히 기적적인 활약을 하였다.
장양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여불위에게 하남과 남양 땅의 10만 호를 하사하여 문신후로 봉했을 뿐 아니라, 진나라 승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보답하였다. 승상의 직위에 오른 여불위는 덕분에 진나라 정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한 순간에 중원의 정세를 좌지우지할만한 위치의 고관대작으로 거듭났다. 요약하면 당시 약소국이었던 위나라 상인으로 태어나서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던 왕족의 일원을 진왕으로 옹립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재상이 되어 막대한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불위는 비록 상인 출신이었으나 비범한 통찰력과 수완을 지닌 인물이었다.
2.3. 상방에 오르다[편집]
그러나, 장양왕은 즉위한 지 약 3년 만에 죽었고, 후대왕으로 여불위가 선물하였던 여인 조태후와 장양왕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그 뒤를 이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훗날에 중국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이다.
이를 두고 여불위가 나이가 어린 정을 빨리 왕으로 세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두 왕을 독살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하지만 효문왕이라면 몰라도 장양왕은 죽일 이유가 없다. 장양왕에게 있어 여불위는 그야말로 그가 오로지 의지할 인물이었다. 생명의 은인이자 진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인물이 여불위였는데, 굳이 장양왕을 살해하는 모험을 할 연유가 없다. 물론 야사에서는 영정이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이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그저 가설일 뿐이다.
아직 영정이 어렸기에 여불위는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승상보다도 높은 상방(相邦)의 자리에 올라 진나라의 실세를 거머쥐었으며, 왕의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의미로 그 칭호를 중보(仲父)라 하였다. 이렇게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 여불위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며 국정전반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한편, 남편인 장양왕을 잃은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태후는 본래 여불위의 첩이었기에 홀몸이 된 이후로 자주 여불위를 찾았다. 여불위는 조태후와 자주 만나다가는 선왕의 태후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 대신에 조태후를 만나줄 사람을 구했는고, 마침내 노애를 환관으로 위장시켜 조희에게 보냈다.[12][13] 노애는 양물이 컸고 정력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조희와 노애는 사실상 연인 관계가 되었다.
한편 진나라의 실권을 손에 쥔 여불위는 많은 신하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한편, 여러 학자들과 도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해주었다. 덕분에 여불위는 당대의 석학들과 대신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얻어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2.4. 몰락과 최후[편집]
노애는 조태후와의 간통 끝에 아이를 둘이나 얻었는데, 그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진나라의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진시황에게 이러한 사실이 곧 발각되었는데, 노애는 사병들을 동원하여 수도 한복판에서 난을 일으켜 항거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에 침착히 대응하여 곧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진시황은 노애를 비롯한 그의 삼족을 죽였으며, 노애의 가신들 또한 가산을 몰수당하고 촉땅으로 쫓겨났다.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았던 아이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진시황은 자신의 친어머니였던 조태후마저 옹에 유폐시켜버렸다.[14]
진시황은 노애의 반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불위도 죽이고자 하였다. 비록 직접적으로 역모를 꾀한 것은 아니었지만, 노애를 조태후 옆에 붙여 결국 반란이 일어날 여지를 제공했다는 것이 모든 사건의 시초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왕을 속이고 태후를 간통하게 부추겼다는 점에서 죄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전부터 여불위에게 포섭된 많은 학자들과 빈객들이 선왕을 모신 공이 크다며 여불위를 변호해준 덕분에 결국 법대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상방 직위에서 해임당하고 문신후 작위를 받을 때에 하사받은 봉국인 하남으로 쫓겨나면서 중앙 정계에서는 완전히 축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불위의 권세와 능력은 이미 세상에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가 상방 직위를 잃고 중앙 정계에서 축출당한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도 각국의 제후들이 빈객과 사신을 보내서 여불위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시황은 한때 진의 상방으로서 국정을 좌우했던 여불위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점을 깨달았고, 그가 또다시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게 되었다. 결국 진시황은 여불위와 그 가솔들을 험지 중의 험지인 촉으로 추방할 것을 명하는 친서를 보냈는데, 이를 받아 본 여불위는 절망에 빠진 채 독약을 마셔 자살하였다.
진시황이 여불위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은 매우 모욕적인 것이었다. 비록 여불위가 자신의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는 공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그 외에 국가를 위한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서 군림한 그가 어떻게 자신으로부터 '상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냐고 비난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너 따위가 뭐라고 여태 엄청난 대우를 받으며 살았냐는 식으로 힐난했다고 할 수 있다.[15] 여불위는 아마도 이를 읽고는 진시황이 마침내는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모든 희망을 잃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여불위가 자살하기 전에 평소 그를 충직하게 따르던 이사가 와서 그에게 여러 번 조정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은 죽어서 왕이 되고 싶으니 땅을 왕관삼아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수직으로 몸을 세워 몸의 반만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훗날 한무제는 지금의 윈난 성 지역을 정복하면서, 여불위가 추방된 이후에 촉 지역에 모여살던 여씨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아예 현 이름에 여불위 이름까지 붙여주기도 하였다.
3. 평가[편집]
그저 맨 손에 아무것도 없었던 떨거지 왕족을 일국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도 일개 상인에서 한 나라의 실세를 거머쥔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를 농락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과 명성을 잃고 추락한 끝에 자결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예컨데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 여불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사마천은 그의 허무한 몰락을 논하며 "소위 이름만 알려진 자(所謂聞者)"라 평하였다. 이는 그 대단한 명성과 지위와는 대조적으로 그 행동은 올바르지 못한 간사한 자라는 말 정도로 해석된다.
다만, 이렇게 사후의 평이 박했던 것에 비해 생전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 자신이 권력을 손에 쥔 이후로도 학자나 선비, 도인등을 후원해주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여불위가 왕을 능멸하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석학들과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여불위를 변호한 덕분에 일단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불위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16][17]
사실 여불위가 장양왕을 만든 킹메이커이긴 했지만 그 뒤로는 눈에 띄는 업적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진시황은 어찌되었든 간에 영걸이라 할 만한 인물이라 중원의 통일을 노렸지만, 여불위는 태생이 상인 출신이라 현상 유지를 원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노애의 반란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진시황과 여불위는 대립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양왕의 즉위에 크게 기여한 일이나 여씨춘추 편찬 등에 관련된 일화를 볼 때에 정치적인 수완이나 안목은 분명 뛰어난 편이었으나, 결국 한 나라의 재상으로는 얼마나 탁월한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4. 그 외에[편집]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여불위는 애첩을 자초에게 주었는데, 그녀는 훗날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다. 이 때문에 진시황의 친아버지가 여불위라는 설이 있다. 자신의 자식을 임신한 여성을 남에게 주는 일이 전국시대에 종종 있었기 때문에[18] 사마천 시기까지만 해도 정설로 받아들여진 듯 하지만, 확실한 역사적 증거는 없으니 어디까지나 카더라일 뿐이다. 많은 창작물에서도 십중팔구 이 가설을 채용하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여기기 쉬운데,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다만,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 거리가 된 것은 사실이며, 현대에 이르어서는 대체로 정통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만든 이야기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게 열전의 기록도 '조희가 영자초과 혼인한 뒤 12개월 뒤에 자식 영정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되어있는데 혼인 후에 사통한 것이라면 몰라도 의학적으로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 되는건 불가능하다. 거기에다가 사마천은 같은 사기 안에서도 공식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본기의 시황제편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현재로 비유하자면 백과사전인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수많은 석학들을 동원하여 지었는데, 무려 20여 만 개의 단어를 수록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여씨춘추에 큰 자부심을 가졌는지 책이 완성된 후 그 책에서 한자라도 더하거나 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오늘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사자성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조나라 한단에서 이인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인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사자성어도 유명하다. 진귀한 보물은 제 때 잡아야 한다는 뜻.
성산, 함양, 성주 여씨 족보에서는 여불위를 자신의 선조로 취급한다. 자세한 것은 여(성씨)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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