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221-206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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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Park 2019. 2. 3. 08:55

 

분류

 

 

진 제6대 왕, 초대 황제
始皇帝
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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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시황제(始皇帝)

영(嬴)[1]

조(趙)[2] / 여(呂)[3]

정(政)[4], 조정(趙政)[5]

출생

기원전 259년 1월
 한단 영자초 사저

사망

기원전 210년 9월 10일 (50세)
 사구

능묘

여산릉

재위

기원전 247년 5월 7일 ~ 기원전 220년

황제

기원전 220년 ~ 기원전 210년 9월 10일

부모

장양왕[6], 모후 조희(趙姬)

 

1. 개요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2.1.1. 출생 문제
2.2. 왕위에 오르다2.3. 왕권을 되찾다2.4. 천하 통일2.5. 제국의 통치
2.5.1. 업적
2.6. 말년
2.6.1. 시황제의 미신 집착
2.7. 죽음과 사구정변
3. 긍정적인 평가
3.1. 최초의 통일
4. 부정적인 평가
4.1. 유의 사항4.2. 폭정4.3. 잘못된 후계자 선정4.4. 하나의 중국은 한(漢) 제국4.5. 한나라의 반면교사4.6. 법가 사상의 맹신
5분서갱유6. 용모7. 암살 위협8. 그 외9. 대중 문화에서 10영계도사

 

1. 개요[편집]

진(秦)나라의 제31대 군주이자, 제6대 왕이자, 첫 번째 황제. 휘는 정(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고 황제라는 직위명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7] 진나라 첫 황제라는 의미로 진시황이라 하기도 한다

고대 중국의 연, 조, 위, 제, 한, 초 6국을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이후 청나라 멸망까지 약 2000년에 걸친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며, 따라서 중국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는 유학자들을 탄압하는 등의 여러 이유 때문에 대대로 좋지 못한 평을 듣기도 했다. 대표적인 폭군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기껏 중국을 통일해놓고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괴롭힌 것만으로도 폭군이자 암군이라는 혹독한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통일 중국을 찬양하는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북방의 오랑캐들이라며 비난 받던 북방 민족의 정복 황조인 나라들이 동북공정 이후 중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는 것과 유사하다.

사기의 경우는 오로지 진시황 본기만 번역되는 경우도 잦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평민 황제이자 사실상 중국의 정치 패러다임을 설립한 유방과 한나라는 오히려 무시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유명하다. 흔히 불리는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다.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시황제는 말 그대로 첫 번째 황제라는 뜻. 호해가 '이세 황제'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8] 시황제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양한(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시황제와 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 


 어차피 진나라 이세 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그 다음 군주인 자영은 아예 왕을 칭했다. 따라서 시황제가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닌 듯. 물론 진황한무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2. 일생[편집]

 

2.1. 출생과 어린 시절[편집]

시황제는 기원전 259년 정월(음력 1월 15일)에 조나라 한단에서 훗날 장양왕이 되는 영이인과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황제의 아버지 영이인은 진나라의 태자(왕위 계승자)인 된 안국군 영주(嬴柱)의 아들이었지만, 서자라서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고 장평 대전 이전에 조나라의 인질로 파견된다. 그러던 중 한단의 상인 여불위의 주목을 끌고 여불위의 후원을 받고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 부인을 포섭해서 안국군의 후계자가 되기로 약속을 받는다. 얼마 뒤 영이인은 여불위 집에서 조희를 만나게 되고 여불위에게 부탁해 조희를 받는다. 그리고 영이인과 조희 사이에서 자녀를 갖게되고 12달 뒤에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시황제인 영정이다.

기원전 257년, 영정이 3살 때 증조할아버지자 진나라 국왕인 소양왕 영직이 장군 왕의(王齮)를 보내 장평 대전 때 함락하지 못했던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나라 효성왕은 진나라 인질인 아버지 영이인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여불위가 600금을 뇌물로 써가며 아버지 영이인만 간신히 구출했다. 그러나 영정과 어머니 조희와 한단에서 탈출하지 못했지만 조희가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어린 시절 영정은 연나라에서 볼모로 온 연단과 친하게 지냈는데(출처 - 사마천, 사기 자객 열전) 이때 친분을 계기로 연단은 영정이 진왕이 된 후 진나라의 볼모가 되었지만 사이가 틀어져서 탈출하고 후술할 형가의 암살 시도로 이어진다.

기원전 251년 영정이 13살 때 증조부 소양왕이 죽고 할아버지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영자초(영이인의 개명이름)[9]도 과거 약조대로 태자가 되었고, 조나라도 태자에 오른 영자초를 두려워해서 영자초의 가족인 조희와 영정을 진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병사하고 태자 영자초가 진나라 장양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정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나라 후계자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영자초의 후원자였던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2.1.1. 출생 문제[편집]

여불위는 한단 땅의 여자 중에 매우 아름다우며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다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여불위는 노했으나 이미 영자초를 위해 집안이 무너져도 진기함을 낚으려는 일을 생각해 마침내 첩을 바쳤다. 그녀는 스스로 임신을 숨기고 만삭이 될 때에 이르러 아들 영정(嬴政)을 낳았다.


《사기》 여불위 열전

시황제의 어머니인 조씨는 원래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던 기생인데, 이후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까지 된 것을 보고 원래 시황제는 조씨가 임신했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시황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여정[10]이라고 낮춰 불렀다.

사실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 열전에서 시황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는데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진 않았으므로, 현대에는 진나라의 멸망 이후, 진 왕조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 부정하는 견해가 주류이다. 원래 저자인 사마천 자신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료를 위주로 역사서를 써야 한다."고 주장이 강했지만 '시황제의 진짜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소문이나 주장이 워낙 거센 터여서 이를 여불위 전기 부분에 삽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11] 더구나 여불위 열전의 기록도 "그 무희(조희)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이윽고 12달 만에 아들 정(政)을 낳았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혼인 후에 사통을 했으면 몰라도 의학적으로 시황제가 여불위의 자식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사마천은 같은 사기 안에서도 공식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본기의 시황제 편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더욱이 여불위 열전에는 위의 기록 바로 다음에 이런 서술도 있다.

진 소왕 50년에 왕의(王齮)를 시켜 한단을 포위하게 하여 위급해지자 조나라는 자초를 죽이려 했다. 자초는 여불위와 모의하여 금 600근을 내어 자초를 감시하는 자에게 주고 탈출한 다음 진나라의 군대로 도망쳐서 마침내 귀국했다. 조나라는 자초의 아들과 부인을 죽이려 했으나 자초의 부인이 조나라의 부잣집 딸인지라 숨을 수 있었고, 이로써 모자는 결국 살아날 수 있었다.


《사기》 여불위 열전

여기에서 말하는 자초의 부인은 문맥상 바로 앞에서 여불위의 첩이었다가 자초의 부인이 된 그 여인임이 분명한데, 여기서는 그녀가 조나라 부잣집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국가를 피해 도피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라면 보통 부자는 아니었을 것인데, 그런 부잣집 딸이 무희(이자 일종의 접대부)였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기록이다. 물론 이 기록이 거짓이고 자초의 부인이 무희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여불위를 등에 업고 진나라의 대권을 잡기 위해 각종 포석을 두고 있는 자초가 무희이자 다른 사람의 첩이었던 사람을 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순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자초의 부인이 조나라 부잣집의 딸이었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이렇게 보면 이미 여불위 열전 안에서도 여불위 친부설은 쉽게 믿기 힘든 설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기 안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읽힌 부분은 딱딱한 본기가 아니라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고 스토리의 성격이 강한 열전인 것도 자연히 시황제의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주장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인 듯하다. 다만 이를 꼼꼼하게 읽지 않고 단장취의를 하다 보니...

2.2. 왕위에 오르다[편집]

영자초가 귀국한 이후, 당시 진나라 왕이자 시황제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사망하였다. 할아버지인 효문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사흘만에 사망하고 말았다.[12]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이 3년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훗날의 시황제인 영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2.3. 왕권을 되찾다[편집]

아직 진왕 영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방(相邦)[13]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는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14]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시황제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

여불위가 상방에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영정(시황제)의 어머니 조 태후와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했으나 조 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 환관 노애(嫪毐)를 조 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하였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 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 태후는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 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노애와 조 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고 키우면서 영정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

그러나 영정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이 되었다. 당시 노애는 하인 천여 명(정확하지 않음)을 거느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지고 있었다. 이러한 권력 덕택에 그의 성격은 점점 더 거만해졌으며 하루는 연회에서 술 주정을 하다가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다 도리어 노애에게 모욕을 당했고 모욕을 당한 그 신하는 속터지며 분개하며 그곳을 지나가던 영정이 그의 분개한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모욕을 당한 이 이야기를 들은 영정은 노애를 몰래 조사하여 이 과정에서 노애가 아이를 숨겨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게 된다.

노애는 조 태후와의 불륜이 드러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영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영정이 곧 창문군과 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승리한 영정은 조 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 즉 이부동생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후 자신의 어머니인 조 태후를 싫어하게 되어 그녀를 유폐하였다.[15] 하지만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 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

한편 영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 태후의 스캔들 깊이 연루된 것으로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한때 왕과 견줄 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결국 영정은 노애와 조 태후 그리고 여불위까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2.4. 천하 통일[편집]

영정(시황제)은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영정은 모사인 울료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을 시키도록 조언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매수당한 간신들은 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의 활동을 저지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영정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장군 '등'이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조나라를 장군 왕전이 수도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초나라는 이신의 주장대로 15만의 군사를 주어 첫 공격을 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이 이를 격파하고, 이후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 항연을 패퇴시키고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킨다

당시 초나라의 군사들은 사기에 의하면 40만 명이라 쓰여있는데 이는 사실로 보인다. 다만 진나라만큼의 중앙 집권력이 없었고 각 귀족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강했기에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때 영정의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 태자 연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영정의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영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공격했다.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왕 연희는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영정은 거부하고 요동까지 집요하게 추격해서 연나라 왕을 사로잡고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 왕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제위 17년인 39살에 약 10년 만에 영정은 중국을 통일하는 천하 통일의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시황제는 모든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전국 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衛)나라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멸망시켜 버린다.

2.5. 제국의 통치[편집]

통일 후 영정은 기존의 전국 시절 군주의 호칭인 진왕(秦王)을 대체할 호칭을 찾는다. 이에 신하들은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으나 시황제는 그 주장을 물리고, 태황에서 '황'만을 남기고 신을 뜻하던 상고의 호칭 '제'를 붙여 황제란 칭호를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진나라의 첫 황제, 즉 진 시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교(敎)가 아니라 조(詔)라고 바꾸고[16],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고(孤)나 과인(寡人) 대신 짐(朕)으로 바꾼다. 이전까지 '짐'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17] 시황제는 '짐'을 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시황제가 확립한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또 시황제는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시황제가 천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시호라는 게 군주가 사망 후에 후대 왕이나 신하들이 생전의 공과 과를 평가하여 정하는 것이라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릴 경우 감히 아들(새로 즉위한 군주)이 아버지(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고감히 (살아 있는)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게 된다. 시황제는 이것이 굉장히 무엄하다고 생각해서 폐지했던 것이다.[18] 그래서 진나라의 황제는 다른 왕조와 달리 시황제(첫 번째 황제), 이세 황제(제2대 황제)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관습은 시황제의 아들 이후 한나라 때에 바로 부활했다.

2.5.1. 업적[편집]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시황제는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는다.

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전에 주 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러한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아무래도 주나라가 봉건 제도로 나라를 다스리던 중에 지나치게 성장한 제후국에게 온갖 못볼 꼴 다 보였던 것을 보고 배운 듯하다. 이 군현제는 진나라 멸망과 초한전쟁을 거치며 사라졌지만 전한의 한고제 시기에 군국제로 반쯤 부활하고 한무제 시기에 마침내 다시 정식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세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는지 주-군-현 3단체계로 개편되고 원나라 전까지 그러니까 남송시기까지 약 1300년 가까이 중국의 행정제도가 된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 역사책이나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적들을 없앨 것을 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9]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다. 법가의 지나치게 업격한 법률이 중국 전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엄격한 데다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은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20]

또한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21]과 진시황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기존 7국의 성벽들을 보수해서 길다란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 멸망 이후에도 여러 나라들이 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중국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서체가 달라 서로 간에 교류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중국 전역의 화폐와 서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통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넓은 중국 전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특히 서체의 통일은 단순 교류의 목적이 아니라 문서기반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핵심이었다. 모든 보고를 오직 문서로만 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이 관료제의 피라미드를 따라 전국에 전달되도록 하는데 공문서의 서체 통일은 필수적이었다. 

2.6. 말년[편집]

이렇게 통일과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우선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의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는 백성들 특히 정복당한 6국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고,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무거운 형벌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다. 또 진나라의 신분제는 군공수작제로 운영되었는데 전쟁에서의 공로, 정확히는 수급 하나당 한 계급씩 올려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진나라의 형벌과도 관련이 있어서 죄인은 계급에 따라 감형이나 형벌을 계급 강등으로 교환할 수 있었는데, 진나라의 백성들이야 지난 정복 전쟁에서 획득하였던 군공과 계급이 있었지만, 정복당한 육국의 백성들은 공을 세운 바가 없었기에 당연히 작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22] 결과적으로 보면 6국의 백성들은 진나라 백성들과는 달리 보다 가혹한 제도와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릉을 시작으로 흉노 정벌과 만리장성 건설에 수십만의 인력을 동원했으며, 아방궁 건설 등 초대형 국책 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잦은 인력 동원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진승, 오광이나 유방의 경우처럼 민중의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러한 점들이 진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농민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이 때문에 태자인 장남 부소마저 보다 못해 과도한 사업들을 중단하고 민생을 돌보라는 간언을 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부소를 몽염이 있는 만리장성 건설 현장으로 추방해버리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아방궁의 경우 아방궁 터로 알려졌던 유적을 조사 결과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아 존재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만리장성은 사업 규모와는 별개로 전혀 실용성이 없는 사업이었는지는 이견이 갈린다.

2.6.1. 시황제의 미신 집착[편집]

(중략)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주상께서 천하를 다스리시지만 욕심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머무시는 궁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시황은 “짐이 진인을 흠모해왔다. 이제부터 짐이라 하지 않고 ‘진인’이라 부르겠다”라고 했다. 바로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관 207곳을 구름 다리와 회랑으로 연결하고, 휘장, 종, 북, 미인들로 채우되 모두 등록된 각자의 부서에서 함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하여 거처하는 곳을 발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

말년에 들어 시황제는 미신에 집착하게 되어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시황릉으로 진시황 본기에 따르면 즉위 직후부터 짓기 시작해서 통일 이후에는 70만 명(총인원으로 추정)을 동원해서, 수십 년간 나라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초대형 무덤을 만들었고 결국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진나라는  때문에 망한다는 망진자호야라는 점쟁이의 점괘[23]를 믿고 수십만을 동원해서 흉노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낭비하고, 불로불사에 집착해서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잡초를 사들이거나 당시 귀금속인 수은을 사는 등 국고를 낭비하고, 최후에는 홍의동자 꿈을 꾸고 꿈속의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거라는 해몽을 믿고 순행길에 올랐다가 병사하는 등 미신에 푹 빠져 버린다.

시황제의 미신에 대한 집착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불로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던 시황제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로불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갖은 사기를 당하며 재정을 낭비하였다. 특히 서복이라는 사기꾼이 동해 바다에 살고 있는 신선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뻔히 보이는 사기를 쳤는데도 시황제는 그대로 속아 넘아가 서복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을 딸려보내 주었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제주도의 서귀포시의 이름도 시황제의 불로초를 찾아 온 서불의 전설에서 나온 지명. 이외에도 수많은 사기꾼들이 돈을 노리고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겠다면서 시황제에게 돈을 뜯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시황제는 늘 속아넘어갔다. 

근데 이럴 거면 무덤은 왜 만들었냐

 

보험이지 뭐

2.7. 죽음과 사구정변[편집]

말년에 불로초 찾기 대모험과 같은 삽질만 하던 시황제는 자신이 제패한 중국의 천하를 둘러보고자 전국 순행을 단행했으나 중도에 병에 걸려 회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210년 7월 사구(沙丘 : 河北省 平鄕縣 부근)에서 병사하면서 약 50년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이에 대하여 사기에서는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평소에 미신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시황제가 낮잠을 자던 도중,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 꿈 속에서 홍의동자와 청의동자가 나타나 서로 그 태양을 가지기 위해 싸웠는데, 청의동자가 홍의동자를 수차례 때려 쓰려뜨려도 기어이 일어나 단 한 번의 일격으로 홍의동자가 청의동자를 물리쳤다. 시황제가 홍의동자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나는 백제(百帝, 서쪽의 방위신)의 아들이며 이후 사백 년 황조의 기틀을 다질 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바로 한 고조 유방을 상징하는 것. 당연히 청의동자는 항우로, 시황제는 이 홍의동자를 찾기 위해서 대규모 전국 순행을 벌였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후 시황제의 유서에 의해 멀쩡한 장남 부소는 몽염과 같이 사형시키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호해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나라가 작살나 버렸다. 이 때문인지 호해가 이사와 조고 등과 짜고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호해 제위 직후부터 돌아서, 진승 · 오광의 난 등 부소를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 이후 공식화 되어서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정설이 되었다. 위에서도 말한 이야기지만 문제는 그 측근들이 설사 정말로 유서를 위조했다 하더라도 대체 그들이 유서를 위조했는지 여부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흔히 떠돌던 낭설을 2세 황제의 바보짓 때문에 시황제 같은 사람이 정말 2세 황제를 후계로 삼았을 리가 없다고 여긴 사마천이 믿어 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이 이 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다른 설은 사마천이 책을 쓰던 시기에는 정말 모두가 저 밀담에 대해서 당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라 따로 출전을 적지 않았다라는 의견도 있고 이사가 형을 받으면서 모든걸 불었다라는 의견도 있다 단지 사마천이 따로 적지 않았을 뿐.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단순히 호해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에 지나지 않고 뜬금없이? 휘하에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장군 몽염과 자신의 장남 부소에게 자결까지 명했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조작의 냄새가 나긴 난다고 봐야 되긴 하겠다. 사구정변 항목 참조.

아들 호해와 관련되어 한 가지 민간 설화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는 호에게 멸망할 것이다(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라는 점괘가 사실은 이민족(胡)이 아니라 호해에게 망하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오랑캐에 의해 멸망할 줄 알아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되려 나라는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는 무능한 아들인 호해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3. 긍정적인 평가[편집]

 

3.1. 최초의 통일[편집]

비록 시황제가 말년의 폭정으로 기껏 통일해놓은 진나라를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시황제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외형적인 통일을 넘어서서 서체(서체 통일은 한나라 때 완성)와 도량형, 화폐, 법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워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 민족들과 중국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는 역사적으로도 있었고, 중국 정부의 평가도 폭군으로서의 실정은 인정하는 등 찬양일색은 아니므로 '이게 다 중국 정부 덕이다'라는 식의 인식은 어느 정도 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황하 유역, 장강 유역, 나아가 서부 내륙과 난링, 우이산맥 이남 남중국 일원까지 모조리 통일하여 단일 국가 하에 놓이게 한 첫 인물이 시황제임을 상기하면, 그가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개념, 문명권 개념이 태동함에 있어 끼친 영향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라 평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또한 그가 최종적으로 완성해 낸 법가적 국가 운영 방략과 그에 기반한 율령, 관료 체제는, 유교적 이념과 함께 후일 동양 왕조의 한 전형성을 구성하는데 있어 필수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그가 적어도 역사의 한 대목에서 기념비적 이정표를 제시한 인물이란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계속 언급되듯 시황제의 업적이 아무것도 없던 변방의 후진국을 혼자의 힘만으로 발전시킨 후, 여섯 나라를 모두 무너뜨리고 천하 통일을 17년 만에 했다고 포장하는 건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어려운 것이 그 숟가락도 밥상에 못 얹는 어리석은 이들은 분명 있다.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도 능력이며 그마저도 못 해먹은 것뿐만 아니라 그 밥상을 뒤엎어버린 이들도 수두룩한데 천하 통일이란 업적을 밥상에 숟가락 얹어 이뤄낸 것을 폄하할 수는 없다. 이신과 왕전의 기용 면에서 보더라도 군사적 안목과 재능은 별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군주로서의 아량과 그릇은 참되어 이신의 대패에 상심하지 않고 바로 백전 노장 왕전을 기용하며[24] 이례적으로 패배한 이신을 재신임하여 연나라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우도록 다시 쓴 정도로 보아 그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업적을 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추가로 시황제와 진나라의 업적은 '중화'라는 관념을 물리적으로 실현해내었다는 데 있다. 하나의 중화, 하나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토와 통치의 단일화는 필수이다. 하나의 문명권이라는 개념을 심어주지는 못 했지만, 하나의 영토가 될 수 있다는 점 만으로도 중화의 단초를 제시한 군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의 통일은 하나된 중화를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인 하나된 영토를 최초로 달성했다는 측면에서, 한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시황제의 진이 중화 문명의 형성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나라 이후 일어선 초와 한은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진나라의 체제를 부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의 창업군주인 유방과 항우도 내심 시황제의 위세를 부러워 했었고, 시황제를 워너 비로 여겼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부러워한 위세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통일제국의 군주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여 일시적으로 분봉제를 시행했던 한나라도 결국은 점차적으로 분봉왕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으로 갔고, 항우의 분봉 역시 끝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한나라, 초나라가 분봉제를 채택한 건 옛날이 좋아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구세대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과도기적인 성격이 크다.

4. 부정적인 평가[편집]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던 대업적은 당연히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최초의 통일 이후 갖은 폭정과 숱한 실책을 벌였고 결국 자신이 합쳐놓은 나라를 자신이 도로 흩어놓기에 이르렀다.

4.1. 유의 사항[편집]

먼저 알아둬야 할 건 통일 제국으로서 중국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꽃피운 건 한 제국부터라 할 수 있다. 이전 시대의 사료 및 평가를 집대성한 사마천의 '사기'도 한대에 작성한 것임을 유념하자. 진을 엎어버리고 세운 게 한나라인 셈이니 어느 정도 선입견이 씌워진 분석과 서술이 한나라 시절 내내 있었고 그만큼 진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 또한 많은 편이다.

특히 폭정에 대한 부분을 경계해야 할것이 전국시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10만 단위로 전쟁이 벌어지고 한전투에서 수만씩 죽어나가는 생지옥이었다. 전국 칠웅 전체가 병영사회로 국가 총동원령이 상시 유지되는 체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통일 진나라의 통치가 가혹하긴 하나 전국시대보다 특별히 더 가혹한 통치라고 단언하긴 애매한 면이 있다. 대외 원정과 궁궐신축등은 신생 통일왕조 중에 안한 왕조를 찾기 힘들정도기도 하고. 

또 진 본토의 오리지널 진나라 백성들은 딱히 큰 반발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자.반진 봉기도 육국의 정체성과 기반이 남은 상태에서 바로 어제까지 원수였던 진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을 지역에서만 봉기가 일어났으니 단순히 폭정탓으로만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25] 결과적으로 진을 멸한 것도 육국 지배층의 후예들의 대표인 항우였고.진승 오광의 난의 시발점 이야기등 사서의 기록과 실제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진나라의 법과 제도가상충하는 면도 많다. 한나라의 왜곡과 별개로 당대백성 및 귀족들 눈에 육국병탄과정에서 생긴 강한 반진감정이 진의 통치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할것이다.

4.2. 폭정[편집]

통일 이후를 보면 진나라인들을 제외한 6국의 후예들은 토목 공사, 군역, 가혹한 세금 때문에 삶이 비참해지는데 시황제 본인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자회자찬하며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 대표적인 사실이 윗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던 불로초를 찾아 헤메고 수은을 복용한 것. 진나라 멸망 후 유방은 관리와 제후왕들이 조세법이 애매모호한 걸 툭하면 악용해서 사람들을 혹사한다면서 이 부분은 예외적으로 아예 뜯어고쳐버렸다. 온갖 이유로 세금을 깎고 요역을 막았는데도 나라 운영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국고는 갈수록 부유해지는 걸 보면 시황제 시기의 세금이 얼마나 불합리했는지 상상이 안갈 지경.

진나라가 가혹할 정도로 민중들을 쥐어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시황제가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의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현실과 맞지않는 법률들을 계속 이어간게 치명적이였다. 현대의 법도 안정성 때문에 그리 쉽게 바꾸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을 맹신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가도록 하진 않는다. 법은 사회를 안정되고 질서있게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 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시황제의 진나라는 법을 지키는 게 목적이 되었다.

특히 현대의 법과 당시의 진나라의 법은 전혀 달랐었다. 당시 진나라의 법들은 세상을 공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 아니라 군주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며 민중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주요 수단이었기 때문.

결국 통일 이후 진나라는 전국 칠웅 시대와 중국의 첫 통일 제국이라는 새롭게 바뀐 상황과 현실에 대해 과거 전국 칠웅 시절 때의 법가 정책을 강요하는 실책을 저지른 것. 결국 시황제의 통치 시기와 사후에도 끊임없이 귀족과 백성들의 불만들을 가중시켰고 그로인해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중국 최초의 통일이란 대업을 성취해냈음에도 진나라는 3대 만에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멸망해버렸다. 자신을 시황제로 칭하며 이후의 진나라 황제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를 칭할 것을 기대었건만..... 이세 황제의 폭정으로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시황제을 찬양하는 측에서는 진의 멸망 원인을 죄다 2대 황제인 이세 황제에게 몰아붙이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세 황제의 암정이 큰 비중을 차지했긴 했지만 이러한 진 제국의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 것에는 시황제 또한 일정 부분 기여여했다. 최근 정당한 황위 계승권자인 장남을 내친게 조고와 이사의 농간이 아닌 시황제 본인이 아닌가 라는 의혹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4.3. 잘못된 후계자 선정[편집]

시황제는 진나라를 3대 만에 망하게 하는 시발점을 제공하였는데 바로 후계자 결정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본인은 정상대로 태자 부소를 진나라의 2대 황제를 이어받을 황제로 지명했지만 조고와 이사가 자신들이 권력에서 소외될 것을 두려워해 유언을 거짓으로 조작하여 호해를 2대 황제로 옹립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구정변 항목에서도 지적했듯이 사기 이사 열전에 실려있는 대화의 내용은 옆에서 직접 보고 듣지 않으면 도저히 알기 힘들 정도로 너무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게다가 시황제 본인의 유서 조작 같은 엄청난 사건을 꾸밈에 있어 조고와 이사가 희대의 바보가 아닌 이상 철저하게 보안에 신경써서 기밀 유지를 했을 것인데 고대 궁궐의 비밀스러운 대화 내용들이 알려지기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시황제가 조고이사에게 농락당했던 것이 아니면 시황제 본인이 결정을 내린 것인데 후자가 맞는다면 시황제는 중국 최초의 통일이란 대업을 성취했음에도 이를 본인 스스로 걷어 차버린 희대의 병신 짓을 한 것. 단순히 호해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에 지나지 않고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까지도 명했다는 점에서 조작의 기운이 느껴지긴 한다. 법가도 유가 못지않게 적서 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데[26] 스스로 법가 사상도 거슬러 주시는 가식의 극치를 달린 셈.

일단 사기 기록상 부소 대신 호해가 2세 황제가 된 이유는 사구정변 때 시황지의 유서를 조작한 것이라고 기록은 되어 있다. 그러나 유서 조작 자체도 의심되는 부분이지만 무엇보다 재위 35년 경 부소를 함양이 아닌 국경의 만리장성으로 내친 것은 분명 시황제의 결정이었다. 시황제가 죽기 직전에 어떻게 생각하고 누구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줬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시황제가 아직 멀쩡했을 때 계승 1순위인 부소가 황제 직위를 계승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것은 확실하다.

시황제의 이런 생각은 당시 진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답이 없는 결정이었다. 진나라 본토는 적서 차별이 심한 법가 사상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그리고 진나라 외각의 옛 전국 6국은 시황제에게 엄청난 반감을 사고 있었다. 통일 이후에도 고점리와 장량 같은 구 6국 지지자들에게 암살 위험에 시달렸고, 시황제 사후 1년도 안 되어서 진승항우, 유방 등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반란 세력이 전국 각지에서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부소는 장남이라 진나라 국민의 지지도 강했고, 백성 친화적 행보를 보여줘서 훗날 진나라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초나라 출신 진승, 오광이 진나라 왕자인 부소를 사칭할 정도로 다른 6국 주민들에게도 어느정도 지지를 받는 상황이었다. 시황제가 죽기전에 호해를 진짜로 황제로 지명했는지는 몰라도, 통일왕조를 이어갈 최고의 후계자가 명분까지 완벽하게 갖춘 상황이었는데도 시황제는 부소를 변방으로 보낸 것만으로도 엄청난 문제가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만약 시황제가 부소에게 황제 자리를 계승한다는 유언장이 갔더라도 함양을 점거한 호해파와 몽염 세력을 중심으로 한 부소파 사이의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27]

또한 시황제는 살아있을 때 공식적인 후계자, 태자를 지명한 적이 한번도 없다.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하는 태자 제도는 이미 춘추 전국 시대에도 보편화되어 있어서 후계 구도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아버지 장양왕이 후계자 서열이 떨어짐에도[28] 진나라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죽을 때까지 태자를 임명하지 않았고, 유언장에 호해를 태자로 임명한다고만 기록(혹은 조작)만으로 왕위를 승계해서, 호해가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반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고작 수십년의 분열기를 끝내고 태어난 왕조들도 분열기의 관성때문에 모두 2-3대에서 한번씩 위기를 맞이했지만 중앙정부가 굳건하면 어렵지않게 위기를 넘겼다. 농민봉기는 제대로 동작하는 중앙정부가 있다면 치명적인 문제가 전혀 아니다. 후대의 국가들의 예를보면 진시황은 비교도 안되는 폭군들이 온갖 미친짓을 해서 온사방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중앙정부만 제기능을 유지하면 수십년은 거뜬히 버텨냈고 결국 지배층 내부의 반발로 망하는게 대다수다. 따라서 통일 왕조의 가장 취약한 시점에 정통성이 부족한 호해를 아무 사전준비없이 후계로 올려 엄청난 숙청과 내부 혼란을 초래한 이 후계문제야 말로 진시황 최대의 실정이자 진나라 멸망의 가장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4.4. 하나의 중국은 한(漢) 제국[편집]

시황제의 대업은 첫 중화 통일이다. 그러나 시황제는 말년의 폭정과 후계자 문제 해결의 실패로 인해 중국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엔 실패하였다. 결국 시황제의 업적으로 흔히 알려져 있던 하나의 중국을 실현시킨 대업을 이룬 것은 한고제다. 한고제가 건국한 한(漢) 제국은 이후에도 중국이 여러 분열기를 겪음에도 하나의 중국으로 인식하고 느낄 수 있게하는 정신적 기반을 형성했다.

명백하게 중국은 한(漢) 제국의 400여 년 통치를 겪으면서 하나의 중국의 개념과 정신이 형성되었다. 3대 만에 망한 진나라에서 하나의 문화 개념과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

시황제의 중국 통일이 이후 한제국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하는데 밑거름들 중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나 시황제의 중국 통일은 이후 진나라가 빠른 속도로 무너진 데다 무엇보다도 항우가 18제후왕들을 분봉하면서 진의 통일이 무색하게 중국을 또다시 갈라 버림으로서 한제국의 하나의 중국의 형성에서 진나라의 영토 통일의 의미는 상당부분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다.[29] 결국 한 제국은 항우의 임명을 받은 여러 제후왕들과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하게 된다.[30]

4.5. 한나라의 반면교사[편집]

한나라에게 있어 진나라는 좋은 반면교사였다.

진은 한 제국이 가지게 국가 운영 방략과 율령, 관료 체제, 국가 이념 성립, 경영 전략에 있어 좋은 반면교사[31]이자 참고 대상이었다. 게다가 한나라는 국가 운영 방략으로 법가를 시행하면서 정신적 이념으로는 유교를 택하는 등, 3대 만에 망해버린 진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비판하고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진론.

4.6. 법가 사상의 맹신[편집]

시황제는 법가를 신봉하다 못해 맹신해 통일 후에 불편함 등을 이유로 도량형과 화폐 등을 통일, 개선하면서도 정작 진나라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령을 고치지 않고 통일된 중국 전역에 계속 적용, 지속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저질렀다. 효공 시절부터 내려온 진나라의 법가적 통치는 진나라의 강성한 국력의 기반이었다. 법가 사상이 진나라에게 천하 통일을 안겨주었으니 곧바로 개선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능한 개혁가가 출현해야 가능했을 것이니 이건 비단 시황제만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황제은 이러한 법령을 고치지 못했으며 결국 적절한 개혁을 하지 못한 진은 외부의 적이 더이상 없음에도 내부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급속도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진나라의 법가는 엄격하지만 이십 등작으로 부여된 작위에 따라 팔다리를 자르거나 사형, 혹독한 유형지로 끌려가는 신체적 처벌 대신 자신이 얻은 작위가 강등되는 등으로 처벌이 감형받거나 용서받고 면제받을 방법이 있었기에 실제 진나라 백성들이 법전에 적힌 혹형들을 그대로 받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작위가 실제로 공을 세워서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무거운 처벌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중국 통일 후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됐는데 진나라 백성들이야 진나라가 육국과 벌인 전쟁 등에서 자주 징병되면서 올라간 작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복 당한 육국 백성들은 작위가 있을 리 없으니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적 발견은 본 문단괗반대되는 정황을 암시한다.[32]

사실 진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린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한 원인도 기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바로 목이 베이는 진나라의 엄격한 법률 때문이었다. 본디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지역이었으므로 태업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전역이 진나라가 아니고 폭우가 자주 오기 때문에 발이 묶이는 지역에서 이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차이가 없다.

이후 그 유방의 한나라도 유교 사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통치의 수단은 계속 법치에 중점을 뒀는데, 한 제국은 유교를 근간 이념으로 삼고 법가는 제국을 운영하는 제도로서 삼았다. 한 제국은 법가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도 과진론이라 하여 진의 과실을 분명하게 따졌다. 게다가 한 제국 초기엔 도가가 상당히 흥하는 등 유가, 도가[33], 법가가 서로 어우러진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漢)이 이처럼 법가 하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매달렸던 진나라와 달리 좋은건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은 철저히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있어서는 한 고제 특유의 유연한 태도도 있었다. 이는 최초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도 3대 만에 망해버린 진과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권을 태동시킨 400년 역사의 한(漢) 제국의 명백한 차이점.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34]

 

육생이 옛날 시경과 서경을 때때로 인용하여 유세하자 고조가 꾸짖었다.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들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실제로도 한은 법률과 관료체제 자체는 법가에 준해서 만들며, 국가 통치 이념과 법의 적용에 대해서는 유가나 도가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치에 경중과 가감을 두었다. 이렇게 하면 법가의 장점을 활용한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으고, 법이 규정하지 않은 예외 상황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시황제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3대 만에 멸망한 진과 달리 한 제국이 40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5. 분서갱유[편집]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건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여,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해왔다.

시황제 최대의 악행으로 분류

6. 용모[편집]

사마천의 『사기』에서 울료는 시황제의 용모를 가리켜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 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했으며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같은 자"라고 혹평한다.

중국 근대의 학자 곽말약은 그의 저서 '십비판서(十批判書)'에서 "시황제는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의 외모가 추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렸고,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전형적인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랑 안 좋은 환경 때문에 비뚤어진 케이스"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배우지 못했을 텐데, 이게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 게 아닌가 그래서 뭔가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 통일을 이루거나, 만리장성 축조 등 큰 규모의 건축을 계획하게 된 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시황제의 비정상적인 외모와 말년에 보인 정신착란 증세가 사실 심각한 뇌 손상이 가져온 결과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수은은 소량 섭취 시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어 시황제는 이를 불로장생 약으로 믿게 되고 시황제는 매일같이 수은을 먹고, 발라서 결국 수은 중독에 이르렀고, 거기에 수은은 금단 증상까지 있어서 결국 시황제는 수은을 더 많이 더 자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수은중독에 과로까지 겹쳤는데도 50대까지 살았다(...). 

수은 안 퍼 마셨으면 100살까지 살았을 기세

[35] 결국 죽어서도 진시황릉에도 수은으로 만든 강을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36] 실제로 진시황릉의 토지 수은 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있다.

7. 암살 위협[편집]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 국가를 멸망시키고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 공신이 되는 젊은 시절 장량 등이 있다. 이연걸 주연의 영화 "영웅 (부제 : 천하의 시작)"을 보면 이 암살 시도를 모티브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시황제는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단도 vs 장검이었다지만, 이름난 자객인 형가를 몸소 제압했다는 점에서, 소드마스터 아니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8. 그 외[편집]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황후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을 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가 십칠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릉에 대한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다.

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皆令從死, 死者甚眾)


여기서 선제는 당연히 시황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나 후궁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 후궁의 시신이 매장되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저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시황제는 절대 권력 확립에 집착해 현대 독재자처럼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가량이었다고 한다. 여불위의 섭정과 어머니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 탓으로 추정된다.

폭군인 것 치고는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없는 편인데, 이는 시황제이 신하들에 대하여 자비로와서가 아니라, 그냥 숙청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보통 공신 숙청은 군주의 권위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개국 초창기에 많이 일어나는 편인데,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래로 제도가 상당히 정비되어 있고 군주의 입지도 탄탄했다. 당장 백기나 여불위같은 거물들도 군주의 명령 한 마디에 얄짤없이 버로우 타는 걸 보면... 또한 공신 숙청이 적었다고 해서 신하들이 맘편하게 생활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왕전이 왜 재물에 환장하는 생색을 냈겠는가.

현대 한국에서는 시진핑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보통 본래 시황제는 진시황이라 부르는 편이기도 하고, 북한의 김씨 삼부자가 사실상의 전제군주제를 택한 것처럼, 주석 집권 후 지배력을 강화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바람에 '시'씨 성의 '황제', 또는 '진' 짜 '시' 진핑 '황' 제가 되었다는 뜻. 이 표현은 연합뉴스에서도 쓰인 바 있다.[37]

 

출처 : 나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