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392-1910)

<펌> 이성계 (위키백과)

Chung Park 2019. 5. 13. 12:16

조선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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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太祖
전주 경기전의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청룡포본
전주 경기전의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청룡포본
지위
제 1대 조선 국왕
재위1393년 3월 9일-1398년 9월 5일
전임자조선 건국 (고려 공양왕)
후임자정종
재상
고려 국왕
재위1392년 7월 17일-1393년 3월 9일
즉위식1392년 7월 28일
전임자공양왕
후임자본인 (조선 국왕)
권지고려국사
재위1392년-1398년
전임자공양왕
후임자정종
이름
이성계(李成桂) → 이단(李旦)
별호자는 중결(仲潔) 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
묘호태조(太祖)
존호지인계운 응천조통 광훈영명 (康獻至仁啓運應天肇通光勳永命)
시호강헌 성문신무 정의광덕 태상왕 (康獻 聖文神武 正義光德 太上王)
능호건원릉
신상정보
출생일1335년 10월 11일
출생지고려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금야군 순녕면 흑석리)
사망일1408년 5월 24일 (72세)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매장지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왕조조선의 기 조선
가문전주 이씨
부친환조
모친의혜왕후
배우자신의왕후
신덕왕후
자녀총 13명 중
대군(大君) 8명, 공주(公主) 2명, 옹주(翁主) 3명,
"§가족 관계" 참조.
기타 친인척한경(장인) 
강윤성(장인) 
한성기(처남) 
한창수(처남) 
한금강(처남) 
한융전(처남) 
한검(처남) 
강계권(처남) 
강유권(처남) 
지윤(사돈) 
김천서(사돈) 
최인두(사돈) 
민선(사돈) 
황형(사돈) 
금인배(사돈) 
민제(사돈) 
이거이(사돈) 
심덕부(사돈) 
왕우(사돈) 
심효생(사돈) 
이인립(사돈) 
조인벽(매부) 
이애(사위) 
심종(사위) 
이제(사위) 
홍해(사위) 
이등(사위)
종교불교  유교(성리학) → 무종교
군사 경력
복무고려 도평의사사
복무기간1356년 ~ 1392년
최종계급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지휘고려 삼군도총제부
참전쌍성부(영흥)탈환(1356, 21세)
개경 홍건적격퇴(1361년),
나하추(몽고족) 격퇴(1362년),
기황후(몽고족) 격퇴(1364년),
김삼선·김삼개(여진족) 격퇴(1364년),
동녕부(평양) 탈환(1370년),
개경 왜구토벌(1377년),
지리산 왜구토벌(1377년),
황산대첩 왜구토벌(1380년),
호바투(여진족) 격퇴(1383년),
길주 왜구토벌(1384년),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제2차 요동 정벌(1392년)

조선 태조(朝鮮 太祖, 1335년 10월 27일 (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 (음력 5월 24일)[1], 재위: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2] ~ 1398년 10월 14일(음력 9월 5일))[3] 고려 말의 무신  정치가이자 조선 초대 이다.

이력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였으며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하였다. 본관 전주이다.

(姓)은 (李),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晉), 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138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은 적이 있는 이성계는 고려에서의 관직이 문하시중 직위에 이르렀고, 고려 우왕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을 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문하시중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보위 선양의 형식으로 개경(지금의 개성특급시)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원래 이름은 성계였으나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으로 개명하였다. 조선 군주 보위에 오른 이후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시호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4] 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5]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다.

가계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고, 몽고군의 산길이 쳐들어왔을 때 조씨와 함께 항복하여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후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를 세습하였고, 실록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음력 10월 11일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유년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 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6]

어린 시절 고향인 함경도 영흥 함주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 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군대가 전장에 나아갈 때는 대라(大螺)를 부는 특유의 의식이 있었는데, 적들이 멀리서 그 소리만 듣고도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걸 알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1356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공민왕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고 하여 공민왕에 투항하였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기병이였다. 개인 병력으로만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수천의 기병을 거느린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협적이였다.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이성계의 여덟 마리 애마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유린청(遊麟靑), 횡운골(橫雲鶻),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의 장수 나하추 (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기황후 최유(崔濡)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金三善)·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평양의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한다.

신진사대부와 연대

정치적 연대가 필요하던 그는 개혁성향이되 무장능력이 없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동북면에 있을 때 정몽주가 그를 수시로 찾아왔고, 그를 통해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그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와 정사와 현안을 논하기도 하였다.

정몽주 정도전을 통해 이색, 우현보, 권근, 성석린, 설장수, 이숭인 등의 인사들과 만나서 친분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친명 세력이자 반원 정책을 하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친분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 임견미, 염흥방 세력을 숙청할 때는 최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 깊은 권문세족 가문의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반대로는 최영이 구 권문세족 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후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뜻을 드러낸 때는 1380년, 이성계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임명된 때는 1382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서 처음 만났을 때는 1383년, 즉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는건 근거도 없고 억지스럽다.

왜구 격퇴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이 각지에서 빈번하였다. 우왕 6년(1380년) 아지발도(阿只拔都, 阿其拔都)가 이끄는 왜구의 대규모 군단이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전라도 운봉(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지발도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살 두 대를 연사하여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다시 화살이 날아와,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한 고조 유방(劉邦)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듯,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드디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드러냈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고려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요동 정벌 반대와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 철령(만주 심양 북쪽)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는 통고를 해 왔다.[7] 본래는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7][8]

4월, 최영 우왕은 이 기회에 명의 만주 기지인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1. 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
  2.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
  3.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원정하러 간 사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소지가 있는 것.
  4. 바야흐로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게 될 것.[7]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역사학자들은 그러나 이성계가 실제로 적국인 명나라를 큰 나라라고 부르는 반역죄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고 본다. 4불가론은 명나라를 정벌하러 간 이성계가 명나라와 화친하기 위해 후세에 지은 글로 보인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단행되었다.

최영과 협력하여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 염흥방 등 은퇴한 이인임의 남은 잔당들을 제거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병력 4만, 최영이 8도 도통사로 총지휘관이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9]

5월에 고려군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르렀다.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9세의 창왕을 옹립하여 섭정을 전담,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길가의 어린 아이들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이(李)를 파자(破字)하면 十八子가 되니 즉 "이씨(李)성을 가진 자가 왕(王)이 되리라."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훨씬 이전부터 이씨(李)성을 가진 자가 왕(王)이 된다는 도참이 있어 고려 왕실에서 한양에 오얏나무(李)를 심고 베기를 반복하며 그 기를 누른다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혼자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신진사대부가 신흥 무인 세력을 끌어들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단초를 이룬 사건이다.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지가 있어 내부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손쉽게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구세력의 대표 최영을 유배보냈다가 두달 후 유배지에서 처형시켰다.

새로운 왕조 건국과 정적 숙청

정치적 동지 포은 정몽주(후에 역성혁명과 온건혁명의 방법 차이로 정적이 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등과 결탁하여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특권층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한편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쿠데타를 주장하였다. 점차 쿠데타가 시작되고 있었다.

1392년(공양왕 4년) 정몽주는 1392년 3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은신해 있자, 정몽주는 이성계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측근들과 함께 역성혁명파의 핵심 세력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린다. 황주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가마에 몸을 싣고 개경 (지금의 개성) 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그 이유는 이성계가 낙마로 인해 크게 다쳤기 때문에 불편한 몸이 되어 있어서 왕의 어전으로 입궐할 수 없는 입장인 데다가, 설사 입궐한다고 해도 이성계의 측근 핵심들이 모두 탄핵받아 유배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몽주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불러 정몽주에게 찾아가 자기 자신들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주창할 것을 권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이방원은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정몽주를 만나 정자에 둘러 앉아 시조를 한 수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 시조가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다. '하여가'는 이방원이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엵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 천년만년 살고지고

라는 시조 한 수를 남겨 같이 새 나라, 왕조를 세우는 데에 같이 이루어 보자는 이방원의 뜻이었고, 그리고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는 시조를 내어 정몽주 자신은 자신의 몸이 백번 천번 죽어도 고려의 왕만을 섬긴다는 것이 정몽주의 뜻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가 있는 한 역성혁명(새 나라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이룰 수가 없다고 판단이 되자 다섯째 아들 방원은 자신의 수하 조영규를 시켜 밤중에 집에 돌아가는 정몽주을 쫓아가 선죽교에서 타살(살해)시켜 버린다. 그러하여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 조정은 다시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였다. 그래서 정몽주의 측근들인 온건 개혁파들을 대거 축출되어 유배길에 올랐고, 정몽주에 의해 탄핵받았던 이성계 일파인 급진개혁파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여 세력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온건개혁파들에 대한 많은 척결들이 이루어졌고,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사실상 역성혁명이 구체화되어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비로소 정식으로 폐위되고 이성계가 신하들의 계속된 추대와 간청으로 이성계는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의 왕조는 태조 왕건이 개국한지 474년 만에 제 34대 공양왕을 끝으로 하여 멸망되었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왕족 후손들인 왕씨들을 대단히 싫어해 그 동조 세력들을 강화도와 거제도 두 곳에 살도록 제한했으나 곧 왕씨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시작되었다. 이성계의 측근들의 신하들은 "왕씨를 살려두면 큰 화가 미칠 것이오! 조선의 앞날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니 모두 죽이시오!"라는 명분이 없는 말을 태조 이성계가 믿고 명령을 내어 강화도에 있던 왕씨들을 강화나루에 던져 수장시켜버렸고, 거제도에 있던 왕씨들 또한 바다에 던져 죽여버렸다. 그리고 원주로 유배갔다가 삼척으로 유배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살다가 이성계의 명령에 의해 1394년 4월 17일(태조 2년), 공양군 부자는 사사되었다. 공양군은 나중 태종 이방원에 의해 공양왕 실록이 편찬되고, 공양왕으로 다시 추봉 되었다. 이로 인해 남아있는 왕씨들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알고 '왕(王)'성에서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전(全)'씨, '옥(玉)'씨, '용(龍)'씨, '전(田)'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다. 이로써 고려 왕족인 왕씨일가와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정적들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 왕조 500년이 시작이 된다.

즉위 초기의 태조 이성계

뒤이어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10] 즉위한 다음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11]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12]

한편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즉위 초반의 집권기반은 취약하였고, 정도전 무학대사에게 명하여 민심을 수습할 방안을 마련케 한다.

고려 구신들의 반발

그러나 이성계를 지지한 신진사대부의 무력 쿠데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유능한 관리들로 하여금 벼슬길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게 만들었다.[13]

이때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에게 개국공신과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경기도 개풍군)에 모여 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로 심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했다.[13] 결국 태조는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것을 명한다. 바로 그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와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개정할 결심을 한다.

고려 구신들에 대한 회유책

태조 이단은 즉위 초, 민심을 두려워하여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고 했으며, 모든 법제를 고려의 예에 따르게 했다.[13] 개국 직후 그는 길재, 이색 등의 구신들을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했다. 권근, 하륜, 심덕부, 설장수 등은 그의 요청에 협력하여 새 조정에 참여하였지만 길재, 신호 등은 그가 보낸 사자들의 면담을 거절하였다. 신진사대부의 스승격인 이색 역시 이단의 조선 조정 참여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색 한양의 왕궁에 온 뒤에도 그를 임금이라 하지 않고 그대, 송헌이라 불러서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이 반발하기도 했다. 개국공신 남은의 동생 남재와 숙부 남을진 역시 이단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개국공신을 책록하면서 고려의 구신들에게도 원종공신의 칭호를 내려 회유, 포섭하려 하였으나 일부만이 협력하고 대부분 고려의 구신으로 남겠다며 요청을 거절하여 조선 초기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한양 천도와 조선 선포

태조 어진.

새 왕조를 연 태조 이단은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14]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14]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재위 3년(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 천도를 명령했다.[15][16]

처음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으나[15] 하륜이 계룡산은 땅이 좁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며 금강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17][15] 계룡산 대신 하륜이 거론한 무악(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일대)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정도전의 반대로 중지되었다.[15][17] 다음날, 태조는 왕사 무학, 정도전, 하륜 등과 함께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연려실기술》에는 한양을 새로운 왕조의 수도로 추천한 것은 승려 무학으로,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을 거쳐 백악산 아래의 땅(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15] 무학은 이곳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라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고,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15]"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고 정도전 등이 찬성하자, 태조는 그곳으로 도읍지를 정했다. 그곳이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록에는 태조 본인이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한 주체였다고 되어 있다.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다.[15]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18]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15]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재위 4년(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19]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태조 5년(1396년) 쌓기 시작한 한양 성곽은 1년여 만에 완성되었다.[19]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단(이성계)은 명나라로 가서 국명을 지어주길 부탁했다. '화령'과 '조선'중 하나로 이름을 지어주길 부탁하자 명의 홍무제는 국명을 조선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는 단군 이래로 내려오는 우리 역사에서 나라의 이름을 중국에 정해달라고 부탁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이 일 때문에 태조 이단은 자주적인 태도를 버렸다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논공행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퇴위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갈수록 쌓여갔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

태조(太祖)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정종(定宗)마저 2년간의 재위기간동안 동생 이방원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힘이 없어지고 동생 이방원의 힘이 갈수록 세지자 방원(태종)을 왕세자[20] 책봉하고 개경으로 다시 천도를 하자 왕세자였던 이방원이 이를 구실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이방원(태종)이 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差使)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활에 화살을 넣고 족족 오는 차사마다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태조의 시호

8월 7일,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써 묘호 태조(太祖), 존시(尊諡)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으로 정했다.

강헌(康獻)이라는 시호는 명의 영락제가 보내 온 것인데, 광무 원년(1898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태조를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면서 명에서 보냈던 시호를 폐기하고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라 하였다.

능원(陵園)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태조의 건원릉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그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그가 죽자(1408) 태종은 부왕이 수시로 찾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1409),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청계천 광통교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1410)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켜버렸다(1410).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이 태종에 의해 훼철된 뒤, 태종에게 자신을 선산이 있는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은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 대신 한양 근교의 양주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

고려로 귀순한 뒤 태조는 고려의 관습을 따라 개경 출신의 경처와 고향 출신의 향처, 두 사람의 정실 부인을 두었다. 향처 청주 한씨(훗날 조선 왕조의 개국과 함께 신의왕후로 추존)로부터는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고, 경처인 신천 강씨(신덕왕후)로부터 두 아들을 두었다. 경처 신천 강씨는 그가 1392년 7월 출정을 머뭇거릴 때 갑옷을 입힐 정도로 그의 건국에 기여했다 한다. 그는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혹은 정안군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신덕왕후가 대전 뒤에서 곡을 하는 바람에 대신들이 방석을 택했다고 한다. 강씨 소생 아들들에 대한 편애는 후일 정안군에 의한 방번, 방석이 살해되는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조부모와 부모

왕비


구분시호별칭생몰년도비고
정비

(正妃)

신의고황후 한씨

(神懿高皇后 韓氏)

원신택주

(元信宅主)

1337년 ~ 1391년태조 즉위 전 사망하여 태조가 즉위하면서 절비(節妃)로 추존하였고,

정종 즉위 후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됨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건국하면서 황후로 추존됨

계비

(繼妃)

신덕고황후 강씨

(神德高皇后 康氏)

보령택주

(保寧宅主)

1356년 ~ 1396년태조 즉위와 함께 현비(顯妃)로 책봉되어 왕비가 되었으나,

태종 즉위 후 후궁으로 강등되었다가 1669년(현종10년)에 복권됨

대한제국 때 황후로 추존됨

후궁들


시호성씨별칭/이름생몰년도비고
성비

(誠妃)

원씨

(元氏)

? ~ 1449년
정경궁주

(貞慶宮主)

유씨

(柳氏)

정경옹주

(貞慶翁主)

? ~ ?
화의옹주

(和義翁主)

김씨

(金氏)

칠점선

(七點仙)

? ~ 1428년김해 관기 출신
찬덕

(贊德)

주씨

(周氏)

? ~ 1436년
궁인

(宮人)

김씨

(金氏)

? ~ ?
무협아

(巫俠兒)

? ~ ?기생 출신

대군/군


구분시호별칭이름부인생몰년도생모비고
1대군

(大君)

진안대군

(鎭安大君)

진안군

(鎭安君)

이방우

(李芳雨)

삼한국대부인 충주 지씨

(三韓國大夫人 忠州 池氏)

1354년 ~ 1393년신의고황후 한씨
2 (王)정종대왕

(定宗大王)

영안대군

(永安大君)

이방과

(李芳果)

정안왕후 경주 김씨

(定安王后 慶州 金氏)

1357년 ~ 1419년
3대군

(大君)

익안대군

(益安大君)

익안부원대군

(益安府院大君)

이방의

(李芳毅)

삼한국대부인 동주 최씨

(三韓國大夫人 東州 崔氏)

1360년 ~ 1404년
4회안대군

(懷安大君)

회안부원대군

(懷安府院大君)

이방간

(李芳幹)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

(三韓國大夫人 驪興 閔氏)

1364년 ~ 1421년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

(三韓國大夫人 密陽 黃氏)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

(金陵府夫人 金浦 琴氏)

5왕 (王)태종대왕

(太宗大王)

정안대군

(靖安大君)

이방원

(李芳遠)

원경왕후 여흥 민씨

(元敬王后 驪興 閔氏)

1367년 ~ 1422년
6대군

(大君)

덕안대군

(德安大君)

이방연

(李芳衍)

여흥 민씨 (驪興 閔氏)

*원경왕후의 여동생

? ~ ?요절
7무안대군

(撫安大君)

무안군

(撫安君)

이방번

(李芳蕃)

개성부부인 개성 왕씨

(開城府夫人 開城 王氏)

1381년 ~ 1398년신덕고황후 강씨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8의안대군

(宜安大君)

왕세자

(王世子)

이방석

(李芳碩)

현빈 유씨 (賢嬪 柳氏) : 폐출1382년 ~ 1398년
삼한국대부인 심씨

(三韓國大夫人 沈氏)

공주/옹주


구분시호별칭부마생몰년도생모
1공주

(公主)

경신공주

(慶愼公主)

경신궁주

(慶愼宮主)

상당부원군 이애

(上黨府院君 李薆)

? ~ 1426년신의고황후 한씨
2경선공주

(慶善公主)

경선궁주

(慶善宮主)

청원군 심종

(靑原君 沈悰)

? ~ ?
3경순공주

(慶順公主)

경순궁주

(慶順宮主)

흥안군 이제

(興安君 李濟)

? ~ 1407년신덕고황후 강씨
4옹주

(翁主)

의령옹주

(宜寧翁主)

의령옹주

(宜寧翁主)

계천위 이등

(啓川尉 李䔲)

? ~ ?찬덕 주씨
5숙신옹주

(淑愼翁主)

숙신옹주

(淑愼翁主)

당성위 홍해

(唐城尉 洪海)

? ~ 1453년화의옹주 김씨


태조가 등장한 작품

드라마

연도방송사제목배우
1967년TBC이성계김성원
1976년MBC예성강이대근
1983년KBS개국임동진
1983년MBC추동궁 마마김무생
1996년~1998년KBS용의 눈물김무생
2005년~2006년MBC신돈이진우
2012년SBS신의오재무
2012년~2013년SBS대풍수지진희
2014년KBS정도전유동근
2014년~2015년JTBC하녀들이도경
2015년SBS육룡이 나르샤천호진
2016년KBS장영실김기현

영화

연도제목배우
1965년태조 이성계신영균
2014년해적이대연
2015년순수의 시대손병호
2016년봉이 김선달임종윤

외모

왕조의 개창자로써 태조는 조선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내내 존숭받았다. 태조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은 태조가 태어난 고향인 함경도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 등에 소장되었으나, 순조 32년(1832) 도둑이 들어 파손되면서 어진이 파괴되어 여러 개의 모사본이 그려졌는데 고종 10년(1872)에 그려져 전북 전주 경기전에 남은 것만이 전해져왔다. 그후 2006년 5월에 모사본 초상화가 발견되었으며 이것은 순조 32년(1832)에 그려져 영흥 준원전에 봉안한 모사본 초상화이다.[21]

남아 있는 어진을 보면 태조는 검은 수염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이었다.[21]

기타

태조 이단에 대한 설화는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고려 무신이면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에 관한 설화로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야승』·『동사강목』·『연려실기술』·『성호사설』·『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상세하게 전하는 신화이다.

왕씨 몰살

왕건이 세운 고려는 1392년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에 의해 멸망되었는데, 이때부터 왕씨들에게는 대대적인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고려조의 왕씨의 후예에 대해 구세력의 유화(宥和)하는 뜻에서도 비교적 온건책을 썼으나 왕손인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조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개국공신(開國功臣)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이들 왕씨 일족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찾아 볼 수 있다.

'추강냉화(秋江冷話ㆍ남효온의 한문 수필집)'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잠궈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살아 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22]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 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變姓名)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왕씨들이 변성명한 이야기는 '일토초가자(一土草家者)가 왕이 된다'는 기자조선시대의 고사(古事)와 중첩된다. 田씨, 全씨, 玉씨, 車씨, 申씨 등으로 임금 왕(王)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 남았다고 한다.[23] 그러다 제5대 왕인 문종(文宗) 때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됐다. 그리고 이후 정조 때는 탕평책에 따라 관직에도 등용되었다.

회룡사 전설

1401년(태종 1년) 함흥에 은거한 태조를 모시고자 태종 무학대사를 시켜 태조를 회유하여 양주까지 내려오게 했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를 뵙고자 찾아갔지만 태조는 만나주지 않았는데, 이때 태조와 태종이 머물던 곳을 회룡(回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태조 7년)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되돌아오던 길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무학대사 1394년 정도전(鄭道傳)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전설은 후일 1881년(고종 18년) 구한 말의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도 실려 있다.

성계탕 설화

돼지고기와 관련해서 경기도 개성 지역에는 돼지고기를 가리켜 성계라고 부르는 전설이 있다. 태조가 직접 지시한 것의 여부는 불확실하나 고려 멸망 후 수많은 고려의 왕족들이 개성 강화도 앞바다에서 실족사와 익사 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고려 말부터 개성사람들은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개성 왕씨와 고려의 절신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수도 역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개성 사람과 평안도 사람들은 '위화도 회군'으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최영 장군은 무속의 신이 된다. 그런데 일부 최영 장군 제사 때는 집돼지 혹은 멧돼지를 통으로 삶아서 제물로 바쳤다. 이때 제물로 바쳐진 통 돼지를 '성계육'이라 했는데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할 때 통 돼지를 칼로 도려냈다. 또한 개성과 평안도 지역 전설에는 돼지고기를 썰어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때의 돼지탕을 돼지탕이라 부르지 않고 '성계탕'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이성계가 을해년생(乙亥年生) 돼지띠였기 때문이다.

이연계와 이원계

그의 이복 형 이원계 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부정적이었고,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을 애써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원계 1388년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자신과는 다르니 숙부를 따를 것을 유언하며 죽었다. 그의 6촌 형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는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연계 역시 사람을 보내 그의 새 왕조 수립을 만류하였으나, 조선 태조는 듣지 않았다. 실망한 이연계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이연계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여 대흥 이씨로 분관하였다.[24]

최영과의 비교

이성계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이자 신진사대부의 일원이었다.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옮겨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원이 그 자리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 쌍성총관부를 공격 할 때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고려군을 지원함으로써 이성계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권문세족의 후예였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요동정벌 실패 후 최영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그의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최영의 의연한 죽음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좋은 대조를 이루며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9]

함흥차사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러나 함흥차사 고사는 태조 이단과 태종 이방원이 제 1차와 제 2차의 왕자의 난 이후로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대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함흥차사의 모티브는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인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이 자기자신의 친척인 신덕왕후 강씨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강씨의 소생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노한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다. 조사의는 동북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그는 그곳에 기반이 있지도 않았고 신덕왕후 강씨 또한 그 지역과 아무 관련이 없었으며 그 시기 태조 이단이 이단의 조상들의 능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동북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조사의의 난에 대한 배후에 태조 이단이 들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태종 이방원은 박순을 보내어 반군을 설득하게 하고 태조를 설득하기 위해 이서와 설오대사를 보냈으며 이천우를 선발로 하여 진압군을 보냈다. 하지만 박순은 반군에게 살해당하고 이서와 설오대사는 반군들에게 가로막혀 돌아왔고 진압군은 패하며 상황이 어렵게 되자 태종은 장인인 민제에게 수도를 맡기고 직접 출전하였다. 그 후, 반군의 포로로 잡힌 김천우가 "관군이 4만여명 정도 된다, 썩 항복해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라는 소문을 내어 그날 밤 반군의 도망치는 도망병들이 속출하였고, 한 도망병이 지른 불때문에 하룻밤 만에 와해되고, 조사의는 관군에 잡혀 처형되고 그 후 평양에 머물고 있었던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대사의 간청과 부탁으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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