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온조왕 (BC 18 - AD 28 재위) - 위키백과

2019. 6. 24. 01:28백제 온조-개루왕(BC18-166)

 

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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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온조왕
百濟 溫祚王
지위
백제의 초대 어라하
재위 기원전 18년~28년
대관식 온조왕(溫祚王)
전임자 ?
후임자 다루왕(多婁王)
부왕 ?
이름
부여온조(扶餘溫祚)
별호 해온조(解溫祚)
묘호 온조왕(溫祚王)
시호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
신상정보
출생일 ?
출생지 ?
사망일 28년 음력 2월
사망지 ?
왕조 백제(百濟)
가문 부여씨(阿莘氏)
부친 ?
모친 소서노(召西奴)
배우자 ?

온조왕(溫祚王, ? ~ 28년 음력 2월재위: 기원전 18년 ~ 28년 음력 2월)은 백제의 건국자이다. 아버지는 고구려의 동명성왕이다. 형으로는 유리명왕와 미추홀의 창업자 비류가 있다.

 

동명성왕의 부인 예씨 소생 유리명왕이 졸본으로 오자 어머니 소서노와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위례성에 자리잡고 백제를 건국하였다. 일본에서는 음태귀수왕(陰太貴首王)이라 부른다.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여러 내용을 전하고 있다.

생애

초기 활동

고구려의 왕자였으나, 동명성왕의 적자 유리명왕이 부여에서 고구려로 와, 태자가 되자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자리를 잡았고, 온조왕은 하남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살 수 없어 백성들이 위례로 떠나자 비류는 자결했고, 온조는 이들을 받아들인 뒤 나라의 이름을 백제라 하였고, 이 이름은 성왕이 남부여로 바꿀 때까지의 국호가 되었다. 이때 본래 성(姓)은 (解)였으나,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이후 부여(扶餘)를 성으로 삼았다. 온조의 이름이 본명이 아닌 묘호라는 주장이 있으나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백제는 태조(고구려 태조 추모왕 (중모왕), 백제 태조 도모대왕)를 제외하면 묘호를 따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백제의 경우 무령왕~성왕 시기 중국 양나라의 강례박사 육후가 백제로 건너와 시호법을 전수하기 이전에는 그 나라의 방언으로 왕호를 붙였다고 한다. 해동역사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시호법을 제정한 시기는 백제 성왕 1년(523년)이다. 백제 역사상 최초로 시호를 받은 군주는 성왕의 부친인 무령왕이다. 즉, 백제는 성왕 1년 이전에는 묘호와 시호 둘 다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사에서 묘호를 최초로 사용한 시기는 신라 태종 무열왕 때 일이다. 그 다음으로 오래된 건 발해 고왕(대조영) 시기이다. 때문에 시조 온조의 이름이 묘호라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고구려 태조대왕처럼 묘호 비슷하게 지은 왕호일 가능성이 있다.

 

백제 건국

백제 건국 설화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상기한 시조 온조설에 입각해 있으나,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는 시조 비류설과 시조 구태설 등 다른 설도 있다. 현재는 시조 온조설이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동부여에서 유리가 생모 예씨부인을 데리고 남하하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형제를 데리고 남하했다. 기원전 18년 형 비류는 인천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미추홀이라 하였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제라 했다가 나중에 인구가 늘어나자 백제라 하였다.

 

기원전 17년 음력 3월 족부(族父: 왕의 7촌 종숙) 을음(乙音)을 우보로 삼았다.

 

기원전 16년 음력 9월에 말갈이 침입해 왔지만, 백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15년에는 낙랑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1년에는 말갈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10일만에 식량이 떨어져 후퇴하다가 온조왕에게 500명이 죽었다.

 

기원전 8년에는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인 100명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후에 백제는 동예와의 관계를 끊고 목책을 세웠다.

 

기원전 4년에는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기자 

 

그 틈을 노려 동예가 기원전 1년에 위례성을 함락했다.

 

기원전 1년에는 말갈이 쳐들어왔지만 추장이 생포되었다. 

 

그리고 위례성을 쳐들어간 보복으로 동예를 쳐들어갔지만 폭설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서기 4년 음력 8월에는 석두와 고목에 성을 쌓았고, 

 

6년 음력 7월에는 남쪽 경계에 목책을 쌓았다. 하지만 마한의 압력으로 목책을 철거했다.

 

7년 음력 2월에는 왕궁의 우물이 넘쳤고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가 하나고 몸이 2개였다. 온조왕은 그것이 길조라고 생각하여 합병계획에 들어갔고, 

9년 음력 2월에는 마한을 기습공격해 패망시켰고 마한은 원산성[1]등지에서의 최후의 저항을 끝으로 백제에 병합되었다. 

 

단, 마한 전토가 모두 병합된 것은 아니고 노령이남의 전남지역은 일단 백제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한동안 독립을 유지해 침미다례를 형성했다.[2]

 

생애 후반

 

서기 9년 음력 7월에는 대두산성을 쌓았고, 

 

서기 10년 음력 2월에는 왕자 다루를 태자로 삼아 군정을 맡겼다. 

 

16년 음력 10월에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1달 만에 진압되고 주근은 자결했다. 

 

18년에 백제는 탕정성[3]고사부리성[4]을 쌓았고 원산성과 금현성[5]을 수리했다. 

 

22년 음력 9월과 11월에는 말갈이 술천성[6]부현성[7]을 습격하였지만 간신히 적을 퇴치했다.

 

온조왕은 28년 음력 2월에 생을 마감했다.

 

백제 시조 주몽설

일본에서는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왕이 아니라 주몽을 백제의 시조로도 본다. 속일본기에는 "백제 원조(遠祖) 도모(都慕)왕은 하백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라고 연력 8년 1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도 백제의 시조를 도모(주몽)으로 설정하고 있다. 백제왕실의 후예인 인정(仁貞)은 백제의 태조를 온조왕이 아니라 주몽으로 지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백제에서 어느 시점에 주몽에게 태조라는 시호를 추존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일본 칸무 덴노의 생모 고야신립의 묘비명에는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8]"라고 기록되어 백제에서 온조가 아니라 그 아버지인 주몽을 시조로 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계

삼국사기에 의하면 다루왕이 온조왕의 첫째아들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왕력편에 의하면 다루왕은 온조왕의 차남이라 한다.

 

삼국사기 설

  • 부왕 : 미상 - 소서노의 첫번째 남편이자 동부여 해부루왕(解夫婁王) 서손 우태(優台)라고도 하고, 소서노의 두번째 남편이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 모후 : 소서노(召西奴, 66[9]~6) 또는 졸본 부여의 공주 : 현재 정설로 인정 받는 온조 중심의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이름은 기록 되어 있지 않고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이라고만 기록 되어 있다. 또 다른 설인 비류 중심의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라는 설도 있다.
    • 형 : 비류(沸流)
    • 왕비 : 미상
      • 장남 : 다루왕(多婁王, ? ~77, 재위:28~77)
      • 차남 : 미상
      • 셋째 아들(?) : 덕좌왕 - 일본 신찬성씨록 좌경제번(左京諸蕃)편에 의하면 덕좌왕은 일본에 정착한 초기 백제인의 한 사람으로 백제 도모대왕의 손자라고 한다.

 

삼국유사 설

  • 부왕 : 미상
  • 모후 : 소서노(召西奴, 66~6)
    • 형 : 비류(沸流)
    • 왕비 : 미상
      • 장남 : 이름 미상
      • 차남 : 다루왕(多婁王, ? ~77, 재위:28~77)
      • 셋째 아들(?) : 덕좌왕 - 일본 신찬성씨록 좌경제번(左京諸蕃)편에 의하면 덕좌왕은 일본에 정착한 초기 백제인의 한 사람으로 백제 도모대왕의 손자라고 한다.

대중 문화속에 나타난 온조왕

참고

각주

  1.  전주
  2.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온조왕은 9년에 마한을 정복하고 백제의 판도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학계의 이전의 정설에 의하면 실제로 마한을 복속시킨 것은 고이왕 때로 그때까지 작은 마한 소국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의 축성연대는 대략 BC 1세기 이후로 추정되어 백제국이 소국이었다는 시대와 맞아떨어지는데 각 성의 축성 규모나 사용된 기술력 등은 고작 인구 만 명 안팎의 부족국가가 감당하기는 불가능하고 웬만한 규모의 영토와 상응하는 주민을 보유하고 이를 동원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진 국가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가령 백제신라의 초기 내용들은 대체로 정확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 사서에서 한참 뒤까지 마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한 후에 새로 정복한 영역을 포섭할 요량으로 대외적으로 한동안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소국체제를 일단 지방 행정체제로 유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  아산시 온양동
  4.  정읍 고부
  5.  충남 연기군 전의면
  6.  여주군 금사면
  7.  강원도 평강
  8.  [시론] 日王발언과 한.일 관계..李道學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9.  온조왕의 어머니가 기원전 6년에 61세로 죽었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라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