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 (결론)

2020. 2. 9. 07:45한민족 역사/백제

그동안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어디인가를 놓고 터어키의 Kayseri, Ankara, Constantinople을 놓고 검토해 보았다이제 이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을 논하고자 한다.

 

 

그동안 검토해 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Kayseri :

1) 주위에 3개의 산 (3916m, 3253m, 3756m의 화산이 있다.

2) 도시 북쪽에 터키 제일의 강(Kizilimark River)이 흐른다.

3) 문무왕으로 추정되는 무아위아에 의해 647(일시적), 654년 함락되었다.

4)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Justinian I 때 요새화돠었다고 한다.

5) 성곽은 내성외성으로 이루어졌고시가지를 포함한 Citadel이 있다.

 

 

Ankara;

1) 구도시를 관통하는 강이 있다. (앙카라강) – Sakarya river (2nd river in Turkey) crossing Ankara river and Porsuk river

2) 문무왕으로 추정되는 무아위아에 의해 654년 처음 함락되었다.

3) 사비성은 부소산을 둘러 쌓았다고 하는데앙카라성은 산위를 쌓고 있다.

4)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의 모습이 있다.

5)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비잔틴제국이후 제2의 황제 거처(여름)로 자주 이용되었다.

 

 

Constantinople ;

1) 로마 콘스탄황제 이전부터 왕성으로 존재했다고 위키 로마사는 말하고 있다즉 로마가 4두체제로 다스릴 때부터 왕성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그리고 475년 서로마가 망한 후부터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제국 황제 도시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이는 백제사에서 위례성에서 물러나 웅진으로 옮긴 역사와 대조된다그래서 백제 성왕때 옮긴 사비성으로 비교하기 보다 웅진인가 아닌가 하는 검토가 더 의미가 있다.

 

2) 현재 이스탄불 국제 공항을 Sabiha Gokcen International Airport라 한다왜 Sabiha (사비하)라 했는지 의문이 가지만주위에 사비하가 될 만한 강이 존재하지 않는 점에서뭔가 상징적인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백제사가 존재하는 지역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상징적인 이름으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정말 예전부터 내려오는 지명을 이용한지 모를 일이다터어키인들에게 물어볼 일이다또한 재야 사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3) 백제 성왕으로 추정되는 Justinian I황제는 533년 Constantinople에서 Belisarius의 아프리카 원정군을 출발하기 앞서 출정식을 하였다고 위키자료는 말하고 있다이것이 진실이라면 웅진이나 웅진성의 포구로서 수군 출정식을 하는 곳일 수 있다고 본다.

 

4) 그러나 Constantinople은 식량을 자체 조달할 수 없어 외부(이집트)에서 가져와야 하는 한계때문에 수도로서 방어기능이 제약된다는 점에서, Heraclius 황제 (백제 무왕으로 추정됨)가 수도를 자신의 출신지 Carthage(현재 튀니지아백제 무왕의 출신지는 미상임)로 옮기려 했다는 점에서 사비성보다는 웅진성에 더 근접한다고 하겠다.

 

5) Constantinople은 413-414 Theodosius II황제때 도시 방어를 위해 18미터 높이의 3중의 성 (Theodosian Walls)을 쌓은 후 그이후 대포(Gunpowder)가 생기기 전까지는 900년동안 함락되지 않았다고 위키 자료는 기술한다.

 

또한 654년 아랍군과의 전쟁 (Battle of the Masts)에서도 함락되지 않았다고 위키자료는 기술한다위키자료는 아랍내부의 반란(First Fitna)으로 병력을 철수했다고 하지만, Constantinople에서 수군이 철수하며에게해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풍랑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았다고 하는 위키자료 기술을 감안하면 아랍내 내부반란으로 인한 철수인지 함락할 수 없어 퇴각하는 것인지 의심이 가는 상황이다. 626년 사산왕조 페르시아군(신라군으로 판단)과 Avars(Pannonian Avars)군의 Constantinople공격을 극복했다 하고, 674-678, 717-718 의 아랍군 공격을 막아냈다고 위키자료는 기술하고 있다.

 

6)그리고 웅진성은 백제의 오방 지방 요새중 북방에 있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콘스탄티노플은 웅진성에 보다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들을 감안할 때사비성은 Kayseri 또는 Ankara로 축약될 수 있다.

 

그럼 앙카라와 카이서리에서 어느 쪽이 더 사비성에 가까울까?

 

 

앙카라와 비교하여 카이서리가 더 사비성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카이서리 주위에는 3개의 높은 산(3000m이상의 화산)이 있다.

 

2) 백제와 신라의 당시 전쟁사를 보면 황산벌이 사비성에서 매우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즉 계백장군의 황산벌 싸움이 지방 오방의 친위군사력 5천명을 결사대로 하여 최후의 방어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즉 황산벌싸움에서 지면 가까이 있는 사비성이 곧 함락될 것이라는 느낌이다이런 의미에서 황산벌 싸움을 터어키 카파도키아에서의 아랍군 무아위아(문무왕 태자시절)와의 전쟁 (654)이라고 판단할 때카파도키아와 가까이 있는 KAYSERI로 판단할 수 있다의지왕은 황산벌싸움 시작전인지 끝난후인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다고 역사에서 말하고 있다.

 

 

3) Kayseri 남쪽에 산이 있고북쪽에 강이 흐른다즉 배산임수의 조건이다.

 

4) 백제의 성왕으로 추정되는 Justinian I가 Kayseri를 요새화 하였다고 위키자료는 말한다.

 

5) 백제의 성왕은 사비로 가야국들을 불러 회의를 했다. 가야국들이 아르메니아지역 주위에 있다고 할 때 (본 블로그 글 참조), 카이서리가 사비로 더 가능성이 있다. 앙카라는 너무 멀지 않을까? 

 

반면 아래와 같은 내용에서 KAYSERI가 사비성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1) KAYSERI가 사비성이라면황산벌이라 추정되는 카파도키아 바로 옆에 있는데 신라군이터키 남부의 백강(터키의 WHITE WATER)을 거슬러 올라온 당군(?, 아랍의 이집트수군)에 비하여 사비성에 늦게 도착할 이유가 없다당군의 소정방은 신라군이 사비성을 치기 위한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하였다 하여 신라장수를 참하겠다고 하여 신라군의 김유신 장군이 격렬하게 항의한 기록이 있다.

 

2) 사비성이 부소산을 둘러 쌓았다 했는데현재 KAYSERI CASTLE은 시내를 둘러싼 CITADEL만 사진으로 보인다 (비록 후대에 지어진 성으로 보이지만). 부산 일산 오산 3개산은 신선들이 산다는 높은 산(3000m 이상)이므로 이들 위에 성을 쌓기는 힘들어 보이므로 부산에 가까운 자그마한 산이 부소산이 아닐까 한다현지에 가보지 않는 한 이를 확인할 수 없어 유감이다. Google Earth Map등을 보아도 확인이 안된다.

 

3) 의지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하기 위해 웅진하 상류에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는데웅진성을 터키의 Izmir나 Constantinople(Istanbul)로 가정할 때, Kayseri에서 오기에는 너무 멀고피난 중에 가까이 있는 당군 (터키 남부 백강을 올라온)에 붙잡힐 수 있다.

 

 

 

 

반면 앙카라가 Kayseri성보다 더 사비성일 수 있는 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앙카라성은 산위를 둘러 쌓고 있다이점이 Kayseri성과 다른 점이다앙카라성도 많은 민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부에 치소를 가지고 있는 사비성 조건과 일치한다.

 

2)Kayseri성은 647, 654년 두번에 걸쳐 함락되었다고 기술되지만 Ankara성은 654년 처음으로 아랍군 무아위아 (문무왕 태자시절)에 의해 함락되었다 기술된다백제 수도인 사비성이 두번 함락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3) 앙카라가 사비성이 되면 터키 남쪽의 백강(white water)을 통해 올라온 당군이 사비성인 앙카라에 신라군보다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카파도키아의 황산벌 싸움에서 고전한 신라군이 앙카라까지 오기에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다이런 지형은 의자왕이 사비성(앙카라)에서 웅진성(Izmir or Bursa or Istanbul)으로 피신하는 지형과도 일치한다.

 

4) 앙카라 주위에는 포석강 (Porsuk river)이 흐른다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견훤에게 잡혀 죽었다 하는데신하들과 연회를 즐긴 포석정이 포석강 가까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사비성 주위에 사비하가 흐르고 두산 사이에 대왕포가 있어 백제 군주들이 연회를 즐겼다 했다그러나 포석강 주위에 이런 지형은 아직 찾지 못했다.

 

5) 앙카라는 이전부터 비잔틴제국 황제들의 여름 거처가 되었으므로 많은 유적이 있다사비성이 수도였다면 많은 유적이 있을 것이다.

 

6) 신라 문무왕은 사비성을 점령한 후 소부리주라 했다. 소부리란 말은 서라벌, 서야벌 등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고 했다. 포석강이 가까이 있는 앙카라가 경애왕때의 신라의 서라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7) 사비성은 부소산성을 둘러싸고 좌우가 내려 앉아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 모양의 성을 쌓아 반월성이라 했다 한다. 신라의 수도 경주도 월성, 반월성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앙카라성이 반월성이 아닌가 한다. 

 

8) 앙카라에 접한 터키 제2의 강 Sakarya river는 Saka 라는 이름이 사카족 (색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라는 사카족에 속한다. 따라서 앙카라가 후기 신라의 서라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9) 사카리야강은 콘스탄티노플과 앙카라 사이를 흐른다. 우기 때 홍수에 의해 범람하여 목조다리가 떠내려 가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한다. 백제의 성왕이라 추정되는 Justinian I는 이곳에 유명한 다리, Sangarius Bridge를 견고히 세워 콘스탄티노플과 앙카라 등의 아나톨리아 내륙지방으로의 안전한 교통을 확보 했다. 이 430m짜리 Limestone으로 만든 다리가 군사적 필요이외에도 새로운 수도 사비(앙카라)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의 내용들을 고려할 때비록 앙카라가 주위에 3개의 높은 산 확인이 아직 안되지만 다른 여러 조건상 사비성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더 심증이 간다고나 할까? 그러나 Kayseri의 주위 3개의 높은 산 지형은 내내 Kayseri가 사비성일 가능성을 무시하기 힘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