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개로왕 이후 시기의 위례성, 한산성, 한성의 위치 검토 ; S(II)

2021. 8. 21. 04:31한민족 역사/백제

 

부제 : 백제의 위례성은 어디이고 한산성, 한성은 어디인가? (II) 

 

 

낙랑과 관련한 온조 백제 초기의 위치 때문에 낙랑의 위치를 연구 하느라 한참 이후에 다시 백제의 위치 분석을 다시 찾게 되었다. 낙랑군의 위치를 떠나 낙랑 조선까지 내친 김에 알아 보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동안 알아본 낙랑의 위치는 낙랑군과 낙랑조선의 위치는 별개의 것으로 판단되며, 낙랑군은 초기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판단된다. 나중에는 발칸반도 주위의 형식적인 진번군, 임둔군이 폐지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 동부도위는 토착 세력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정도 선지식을 가지고 위례성과, 한산성, 한성에 대해 백제 개로왕 이후 시기의 자료를 가지고 추정해 보고자 한다. 

 

 

I. 백제 개로왕 시기 위례성 (475)에 대한 검토

 

 

 475년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이 보낸 제중걸루 등에게 사로 잡혀 왕족과 왕이 살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위례성이 함락되고 한성백제가 망했다고 기록된다. 그래서 문주왕이 웅진백제로 옮겼다고 한다. 아래 자료를 보면 도성은 한성으로 판단된다. 즉 왕성은 한성으로 판단되며, 한성백제는 한성을 도성(수도)으로 하는 백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문주왕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했는데, 해로를 통해 웅진백제로 간 것으로 판단된다. 웅진은 바다에 닿아 있는 수군 기지의 이름이다. 

 

아래 일본서기에서는 왕성과 위례를 별도로 기록했다. 즉 왕성인 한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를 잃었다고 했다. 즉 위례성은 당시 왕성인 아닌 별도의 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위례성과 한성을 별도로 추정한다. 한성은 왕성이고 위례성은 이 당시 더 이상 왕성 즉 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도림의 바둑 이야기는 이 때 언급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 전선이 무너지고 도성이 위협을 받게 된다. 한성 방어전은 필사적이었다. 고구려군은 4방면으로 총 공격을 퍼부었고, 이마저도 실패하자 화공을 가한다. 화공은 성공적이었다.

개로왕은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의 태자 혹은 동생인 문주를 불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는 형, 혹은 아버지[22]인 개로왕의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를 데리고 남쪽으로 도망간다.[23] "

 

(자료 : 개로왕, 나무위키)

 

"20년(476년) 겨울에 고구려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아는 바이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없앰[24]

 

(자료 출처 : 개로왕, 나무위키) 

 

 

개로왕 二十一年秋九月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되다 (AD 475)

 

(자료 : 삼국사기, 인용출처 : 개로왕, 나무위키)

 

 

 

2) 백제사에서 위례성 언급 시기

 

그럼 위례성은 언제부터 수도였고 언제 이후 수도가 더 이상 아니었을까 분석해 보자. 

아래 온조왕 시기의 삼국유사 (고전기 인용) 자료를 보면 BC 18년 졸본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위례성에서 십제를 세운다. 그 이후 삼국사기에 의하면 하남 위례성으로 BC 6년 도읍을 옯겼는데, 일년 후 BC 5년에 다시 한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389년을 지냈다고 했다. 즉 AD 394년까지 한산이 수도였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위례는 온조왕 시기 BC 18 - BC 6년, 수도였다가 그 이후로 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BC 2년에는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한다. 그리고 대방과 사위관계였던  책계왕은 고구려의 대방침입에 원군을 보내 막아 주었으나, 한과 예의 침입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전에  AD 286년 위례성을 보수하였다 한다. 여기서 한은 낙랑군을 그리고 예는 동예를 의미한다고 추정된다. 즉 책계왕의 살해사건은 온조왕 시기 위례성이 낙랑과 동예의 격렬한 침입을 받은 것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위례성은 낙랑과 동예에 가까운 위치라서 낙랑과 동예가 매우 민갑하게 대응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개로왕 시기에 한성뿐만 아니라 위례성도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 자료를 우연히 읽다 보니, 삼국유사 왕력편 백제조에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혹은 사천(蛇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직산이다. 병진년 (BC 5)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 라고 했다 한다. 즉 위례성과 사천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한번 필자는 'Oh My God!'을 외쳤다. 한수와는 별도의 자료이다. 다음 글에서 언급되겠지만 발칸반도에 Sasu river가 있다. 즉 사천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지금까지 위례성이 Illyria지역에 있는 것을 짐작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 것이다. 더 이상의 언급은 다음 글에서 하고자 한다. (필자는 아래 자료의 추정에서 고전 자료를 잘 정리하고 해석했지만, 서쪽에 바다가 없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https://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404

 

 

 

"온조왕 시기 (삼국사기 자료)

 

十三年夏五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BC 6)
十三年秋七月 하남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BC 6)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BC 6)
十三年秋九月 성과 대궐을 쌓다 (BC 6)
 

十四年春一月 도읍을 옮기다 (BC 5)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十七年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 (BC 2)

 

책계왕 一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다 (AD 286)

 

(개로왕 21년  475년, 왕성 함락, 위례성 빼앗김)

 

 

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자료 출처 : 온조왕, 책계왕, 개로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백제, 펌글 참조)

 

 

II. 백제 동성왕 시기의 한산성

 

백제는 개로왕 시기 475년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긴다. 이때의 한성은 근초고왕 시기에 371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남평양에 세운 북한성 (또는 한산)이라 사료된다. (삼국유사 자료).  그런데 동성왕 시기 482-483년에 한산성이 언급된다. 말갈과 가까운 곳이라는 짐작이 가는데, 수도는 아닌 것 같다. 동성왕이 한산성에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했다는 것은 왕성에서 떨어진 곳이라는 추정이다. 이 당시는 웅진백제 시절이다. 수도가 웅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산성이 개로왕 시기에 빼앗겼던 한성인지 모르겠다.  이후의 자료에서 동성왕 시기의 백제는 융성하여 북위와도 접하여 전쟁을 하고, 많은 정복전쟁을 하여 영역을 넓힌 것으로 판단된다. 490년 백제는 행안국지역, 누선지역, 낙랑태수 지역 등을 점령했다는 것을 장군지위명에서 알 수 있다. (아래 자료 참조). 따라서 개로왕 시기 빼앗긴 한성을 다시 찾았을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추정되는 이유는 이후 무령왕 시기 (507, 523년)에 한성이 다시 언급된다. 고구려 문자왕이 507년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하고, 523년 무령왕이 한성에서 돌아 오다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한산에 있는 성이 한산성 또는 한성이지 않나 추정된다. 한산이 한산성, 한성인지 더 검토해 보자.

 

동성왕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AD 482)

동성왕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AD 483) (삼국사기 자료)

 

 

   

"490년경 (동성왕) 백제는 행안국, 행정로, 행무위, 행광위(누선), 행용양 (낙랑태수), 행건무(성양태수), 행진위(조선태수), 행양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동성왕, 나무위키 자료)

 

 

1) 백제사에서 한산의 언급 시기 

 


온조왕 시기의 아래 자료를 보면 BC 18년 위례성에 도읍했다가, 하남 위례성으로 BC 6년 도읍을 옯겼는데, 일년 후 BC 5년에 다시 한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389년을 지냈다고 했다. 즉 AD 394년까지 한산이 수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초고왕 시기 371년 수도를 한산으로 옯겼다고 한다. 즉 그전에 언젠가 한산을 빼앗겼는데, 근초고왕때 다시 찾을 수 있고 또는 이때의 한산이 다른 한산일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북한성을 수도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한다. 105년을 더하면 476년 즉 475년 개로왕 때까지 수도였다는 것이다. 즉 한성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삼국사기의) 한산이 (삼국유사의) 북한성이란 말이고 고구려의 남평양 위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온조왕 시기의 한산과 그후의 백제에서 한산의 언급을 살펴 보자. 

 

 

(1) 온조왕 시기의 한산 

 

온조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주위를 살피고 한수 이남 하남위례성에 터를 잡았다 했다. 이곳(위례성)은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고 했다. 즉 부아악이 있는 한산과 한수 이남 하남 위례성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부아악, 횡악 등에서 볼 수 악자는 산악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산이 있는 곳은 높은 산맥이 있는 곳일 수 있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부아악(負兒嶽)[10]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중 수 이남의 땅이 나라를 세우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고 십제(十濟)를 건국했다.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자료 : 온조왕, 나무위키)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BC 18)
一年夏五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BC 18)

十三年夏五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BC 6)
十三年秋七月 하남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BC 6)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BC 6)
十三年秋九月 성과 대궐을 쌓다 (BC 6)
 

十四年春一月 도읍을 옮기다 (BC 5)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2) 온조왕 이후의 한산 언급 시기 

 

온조왕 이후 시기의 아래 한산 언급을 보면 사냥터 (103년, 131년, 455년)가 되었다. 사슴 등의 사냥감이 있으려면 큰 산맥이 있어야 한다. 즉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산은 큰 산맥에 있는 산이다. 그리고 398년 아신왕때,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에 이르렀다. 즉 한산이 고구려와 백제 경계지역에 있고, 482년 동성왕때 말갈이 한산성을 공격했으니, 말갈과도 가깝다는 것이다. 동성왕때에는 한산이 아닌 한산성이라 칭하고 있다. 즉 한산에 성을 쌓아 방비한 성이 한산성이라는 것이다. 483년 동성왕이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했다는 것은 한산성은 수도가 아니라 군사적 요새라는 의미를 주고 있다. 

 

 

기루왕 二十七年 한산에서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AD 103)

 

개루왕 四年夏四月 한산에서 사냥하다 (AD 131)

 

근초고왕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371) 

 

그 이전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안보인다.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371) 

(자료 : 삼국사기, 근초고왕)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북한성으로 수도를 옮겨 105년동안 지냈으며..(삼국유사) 

 

침류왕 二年春二月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승려에게 도첩을 주다 (AD 385)

 

아신왕 七年秋八月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에 이르다 (AD 398)

 

비유왕  二十九年春三月 한산에서 사냥하다 (455)

 

동성왕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AD 482)

 

동성왕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AD 483)

 

 

  

2) 동성왕 시기의 백제 영역 : 북위와 인접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을 보면 백제는 동성왕 시기 484-490 기간에 육지로 북위와도 접하고 있었다.  북위는 요서의 중국땅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서 2현을 백제가 두었다는 청나라의 역사서가 말하는 것을 보면, 이 당시의 백제 영토가 요서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요서는 론강의 서쪽지역을 말한다. 다음 글에 언급되겠지만 이 지역에 이 시기에 Burgundians Kingdom이 있었다. 혹시 이 지역이 동성왕 시기에 또는 그전에 이미 확보한 영역으로 요서에 있는 2개현의 땅일 수 있다. 

 

 

"3.1. 북위와의 전투

영명 2년(484) 위로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모도를 크게 격파하였다.
永明二年, 魏盧征之, 大破百濟王弁都.


건강실록


(동성왕 재위) 10년(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 본기 동성왕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권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년(488) 12월조


이해(490)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찬수류해예곤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자료 : 동성왕, 나무위키)

 

490년경 (동성왕) 백제는 행안국, 행정로, 행무위, 행광위(누선), 행용양 (낙랑태수), 행건무(성양태수), 행진위(조선태수), 행양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건무 2년(495)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경오년(490)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거꾸로 쳐서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사법명 등의 꾀이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합니다. 이제 임시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찬수류를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예곤을 행무위장군 불중후로 삼고, 목간나는 과거에 군공이 있는 데다 또 누선[臺舫]을 깨뜨렸으므로 행광위장군 면중후로 삼았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또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신(臣) 모견,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신 왕무, 겸 삼군 행진위장군 조선태수 신 장새,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의 사신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의 지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로 관직을 올려주어야 마땅하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조에서는 특별히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함과 아울러 장군의 호를 내려주었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중략)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남제서》 58권 동남이열전 백제


당대에 북위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84년, 488년, 490년 총 3차례 충돌 기록이 있는데 놀라운 점은 북위는 명군이었던 효문제였던 반면, 백제는 불과 10여 년 전에 장수왕의 침입으로 왕이 죽고 수도가 불타버린 경험이 있었던 상황에서 중원의 맹주였던 북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

 

(자료 : 동성왕, 나무위키)

 

 

동성왕 시기에 한산성이란 지명이 등장했는데, 무령왕 시기에는 한산성이 아닌 한성으로 언급되는 지명이 등장한다. 개로왕 시기 함락된 한성과 같은 지명이다. 

 

 

III. 무령왕 시기 한성 (507, 523년)

 

무령왕 시기 507년 백제에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했는데, 이때의 고구려 기록에는 문자왕이 한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에서 싸우다가 물러났다 하였다. 이는 이미 무령왕 시기에 한성을 회복했다는 것이고, 한성과 횡악은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가로횡, 산악악자이다. 즉 옆으로 펼쳐진 산맥의 지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523년 무령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는 언급은 한성이 당시 수도가 아니라는 의미 같다. 

 

 

무령왕 七年冬十月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하다 (507) (삼국사기 백제본기)

 

507년 문자왕 시기의 기록에 고구려는 한성에서 백제와 싸워 이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507년 고로(高老)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橫岳)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자료 : 문자명왕, 위키백과, 본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인용글 참조)

 

무령왕  二十三年春三月 한성에서 돌아오다 (523) (삼국사기 자료)

 

 

그러면 한성과 가까운 횡악은 계속 백제의 지역이었나 역사적 기록을 보자.

 

 

IV.  백제사에서 '횡악' 언급 시기

 

횡악은 옆으로 길게 된 산맥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한 고구려와 접한 지역이다. 그리고 다루왕 시기 (31년) 횡악 아래에서, 진사왕 시기 (391년) 횡악 서쪽지역에서 사슴을 사냥했다고 했다. 무령왕 시기에 고구려, 말갈과 횡악에서 싸운 기록을 고려하면, 횡악은 백제 다루왕 시기(AD 31)에서부터 진사왕시기(AD 391), 그리고 무령왕시기까지 (AD 507년) 백제영역으로 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다루왕 四年秋九月 횡악 아래에서 사슴을 사냥하다 (AD 31) (삼국사기 자료)

 

기루왕  十七年秋八月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땅에 떨어지다 (AD 93) (삼국사기 자료)

 

진사왕 七年秋八月 횡악 서쪽 지역에서 사냥하다 (AD 391) (삼국사기 자료)

(자료 : 다루왕, 기루왕, 진사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백제 카테고리 펌글 참조)

 

필자는 요수를 프랑스의 론강으로 추정하므로, 횡악을 유럽에서 찾으면, 유럽에서는 옆으로 길게 걸쳐 뻗어 있는 알프스산맥이 있고, 이베리아반도에는 피레네산맥이 있다. 그리고 코카서스산맥이 있다. 즉 셋중의 하나가 횡악일 것이다.  사슴은 이들 모든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아래 자료 참조)

 

Digital Relief of the Alps (source : Wikipedia)

(By User:Perconte - Based on SRTM-Data, CC BY-SA 2.5,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02322)

 

 

"The Alps are a habitat for 30,000 species of wildlife, ranging from the tiniest snow fleas to brown bears, many of which have made adaptations to the harsh cold conditions and high altitudes to the point that some only survive in specific micro-climates either directly above or below the snow line.[4][80]

 

Young alpine ibex. When fully grown the horns of this male will be about one metre wide. (source ; Wikipedia)

 

The largest mammal to live in the highest altitudes are the alpine ibex, which have been sighted as high as 3,000 m (9,800 ft). The ibex live in caves and descend to eat the succulent alpine grasses.[81] Classified as antelopes,[9] chamois are smaller than ibex and found throughout the Alps, living above the tree line and are common in the entire alpine range.[82] Areas of the eastern Alps are still home to brown bears. In Switzerland the canton of Bern was named for the bears but the last bear is recorded as having been killed in 1792 above Kleine Scheidegg by three hunters from Grindelwald.[83]"

 

(source : Alps,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중부유럽, 펌글 참조))

 

 

 

Composite satellite image of the Pyrenees (NASA) (source : Wikipedia)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31817)

 

 

Satellite image of the Caucasus Mountains (source : Wikipedia)

(By NASA/MODIS - Jacques Descloitres, MODIS Land Rapid Response Team - http://visibleearth.nasa.gov/view_rec.php?id=1939,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659187)

 

 

"Present-day fallow deer populations in Europe are a result of historic man-made introductions of this species, first to the Mediterranean regions of Europe, then eventually to the rest of Europe. They were initially park animals that later escaped and reestablished themselves in the wild. Historically, Europe's deer species shared their deciduous forest habitat with other herbivores, such as the extinct tarpan (forest horse), extinct aurochs (forest ox), and the endangered wisent (European bison). 

 

Good places to see deer in Europe include the Scottish Highlands, the Austrian Alps, the wetlands between Austria, Hungary, and the Czech Republic and some fine National Parks, including Doñana National Park in Spain, the Veluwe in the Netherlands, the Ardennes in Belgium, and Białowieża National Park of Poland. 

Spain, Eastern Europe, and the Caucasus Mountains still have virgin forest areas that are not only home to sizable deer populations but also for other animals that were once abundant such as the wisent, Eurasian lynxIberian lynxwolves, and brown bears.

 

(source : Deer, Wikipedia,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중부유럽, 펌글 참조)

 

그러나 낙랑의 밑에는 마한이 있었고, 마한의 동북쪽에 온조의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했으며, 온조의 건국지 설명 중에 패대지간 (패수와 대수 사이), 진번지간(진한과 임둔 사이)에 맞는 지형과  낙랑이 요동지역에 있고, 마한의 확실한 지역을 고려하면 상기 3개의 횡악 중에 알프스산맥이 제일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이다. 지난 번 (1)의 글에서 한수, 한산이라는 지명 때문에 프랑스 지역을 검토했는데, 이 지역은 3세기까지 후한의 지역으로서 백제가 1세기에 계속 점하여 있을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V. 백제 성왕 시기의 한성의 포기(552년)와 신라의 신주 설치

 

 

한성백제가 망하고 웅진백제이후 시기에,  신라의 진흥왕이 낙랑국공이란 직책을 북제로부터 받은 것은 이 지역을 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 시절, 백제의 동북부 지역을 신라가 점하고 신주(新州)를 설치 하였다 (552년). 그런데 일본 서기에서는 이 신주가 설치된 지역에 평양(平壤),  한성(漢城)이 있었다고 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한성이 평양과 가까이 신주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성왕) 31년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 변두리를 가지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성왕본기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
이 해(552년)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조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 以阿湌武力爲軍主.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가져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진흥왕본기"

 

(자료 : 진흥왕, 나무위키,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펌글 참조)

 

(26대 성왕때에 와서 수도를 소부리로 옮기고.. 삼국유사)

 

 

필자는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인 평양(平壤)이 알프스 산맥에 있는 라인강 상류와 론강 상류가 만나는 어느 도시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한성(漢城)이 이 지역의 남쪽에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한성이란 이름을 보건데, 이 지역이 한나라의 지역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따라서 한수(漢水)라면 이곳의 Po river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위례성도 한수 이남으로 언급되고, 한수는 띠처럼 길게 뻗어 있다는 표현을 보면 다뉴브강이 아닌가 한다. 그동안 아리수강으로 알고 있는 다뉴브강이 자꾸 한수로 느껴져 왔었는데, 아리수이며 한수라 판단된다. 또한 대방(帶方)군의 대자가 있는 대수(帶水)로도 판단된다. 다뉴브강이 한수라면, 그리고 이 다뉴브강 아래에 한성이 있다 하면, 한나라 시대 다뉴브강 아래 지역을 점령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필자의 추가 연구를 요하는 점이다. 로마공화국 시대 다뉴브강을 경계로 방어막을 가졌었다. 실제 다뉴브강변에 많은 성곽이 있었다 한다.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매우 거대한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흉노와 한나라의 경계를 하는 장성이 다뉴브강을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차후 연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곳을 신주(新州)로 칭한 것도 혹시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 지역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에서 나라 이름은 세워진 곳의 명칭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이곳은 론강의 동쪽 요동지역으로, 한(漢)나라지역에 가까우며 (혹은 한사군이 있는 현도군과 낙랑군이 있는 지역이며), 고구려와 접한 지역이므로, 왕망의 신나라 지역이 될 수 있다. 왕망은 고구려에게 흉노를 칠 군사를 보내 달라는 요구를 했는데, 고구려가 거절하자 하구려라고 칭했다 한다. 이러한 추정도 상기의 다뉴브강을 경계로 한 한나라 경계추정과 궤를 같이 한다. 

 

즉 한성은 이태리 북부 지역에 있으며, 횡악은 알프스산맥이 될 수 있다.  한산은 이 알프스산맥의 어느 산이며, 여기에 있던 산성이 한산성일 것이다. 알프스 이북지역은 고구려지역이며, 말갈백산이란 백두산 몽블랑 산은 말갈지역이었다는 것이다. 

 

 

 

VI. 삼국 시대의 서해, 동해 및 남해의 위치 추정

 

 

삼국시대에 서해, 동해, 남해가 언급된다. 이는 이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이므로 약간의 검토를 하고자 한다. 

 

 

1) 백제사에서 '서해' 언급 시기 (236, 391 AD)

 

백제사에서는 서해가 자주 언급된다. 그것도 사냥터로 언급된다. 즉 서해에 큰 섬이 있어 사냥터로 될 만큼 산악지역이 있어 사냥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서해의 관문이라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 쌓인 관미성의 추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필자는 이 사냥터의 섬과 관미성의 위치가 이태리반도의 서쪽 코르시카섬과 샤르데냐섬 아니면 대서양의 서쪽 아일랜드섬이나 영국지역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 두 경우 모두 관미성의 요건을 갖춘 섬지역이 존재한다. 코르시카섬과 아일랜드의 섬지역이 관미성의 가능성 지역으로 주목된다. 그런데 아일랜드나 영국지역은 보다 더 많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고 하지만, 이 지역이 동양사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대서양 서해는 중천왕의 고구려도 접했었다. 그리고 지역상 후한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다소 보수적 추정을 한다면 서해는 이태리반도의 서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시 관미성을 확보할 때, 숙신, 거란, 그리고 브리튼으로 추정되는 비려국 정벌 등이 언급되므로 대서양의 서해를 의미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진사왕시 391년 서해의 큰 섬은 대서양의 아일랜드 섬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후일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고이왕  三年冬十月 서해에서 사냥하다 (236)

진사왕 七年秋七月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다 (AD 391)

 

 

2) 고구려의 동해, 서해, 남해 언급 시기

 

고구려는 동해, 서해 남해를 언급한다. 북해는 언급이 없는데, 북부여가 접했을 것이다.

 

동해는 동쪽에 있는 바다인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동천왕이 동해의 미녀를 후궁으로 맞이한 것을 고려하면, 발칸반도의 동쪽 흑해가 아닌가 한다. 동천왕은 위의 관구검에 밀려 동옥저(흑해 연안 추정)까지 피신했고, 이때의 동평양이 항가리의 부다페스트가 아닌가 한다.

 

중천왕시 서해는 대서양으로 추정된다. 

 

태조왕과 문자왕 시기에 남해가 언급된다. 문자왕 시기에 494년 동부여가 고구려에 항복했다. 따라서 남해에 접근할 수 있어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문자왕 시기에 해당하는 고트족은 이 당시 파노니아, 달마티아 지역을 점했다. 즉 아드리아해가 남해가 아닐까 한다. 기존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가 접한 서해 (중공 동북부 지역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또는 남해(한반도 주장하는 분들에게는)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민중왕 四年秋九月 동해사람이 고래 눈을 바치다. (47)

태조왕 五十五年冬十月 동해 곡수가 붉은 표범을 바치다 (107)

태조왕 六十二年秋八月 남해 지역을 순수하다 (114)
태조왕 六十二年冬十月 남해에서 돌아오다 (114)

동천왕 十九年春三月 동해의 미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다 (245)

중천왕 四年夏四月 왕이 관나부인을 죽이다 (서해에 버리다) (251)

문자명왕 四年秋七月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AD 494)

 

 

VI. 온조왕 시기의 백제 : 말갈, 낙랑, 마한, 남옥저, 고구려, 예와 상관관계

 

 

온조왕 (BC 18 - AD 28) 본기 에서 말갈, 낙랑, 마한, 남옥저, 고구려, 동예 등과 관련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즉 이들 지역의 위치 선정이 백제 위치 선정과 맞아야 하는 것이다. 

백제의 건국지설에는  5대설이 있다.  (윤여동설 -백제의 건국지 검증 자료, 다음 블로그 참조)

 

(1) 마한 동북 건국설 : 마한의 동북쪽의 땅을 강을 건너온 온조에게 마한왕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의 초기 강역은 북쪽의 패수, 남쪽의 웅천, 동쪽의 주양, 서쪽의 대해로 언급된다. 주양은 삭주라고 칭하기 전에 주양, 원래 맥의 땅이었으나, 온조왕시 백제영역의 동쪽 끝에 포함되며, 5세기에는 고구려 영역에 포함되었다가 6세기 중엽에 신라의 삭주가 되었다 한다. 필자는 발칸반도 지역으로 본다. 동쪽의 주양은 발칸반도 동쪽,  흑해에 접한 동예 지역의 서쪽으로 판단한다. 북쪽의 패수는 다뉴브강으로 판단한다. 패수는 북으로 흐르는 라인강과 동남으로 흐르는 다뉴브강으로 판단된다. 모두 강의 범람으로 진흙땅이 생기는 패수이다. 서쪽의 대해는 아드리아해 또는 이태리 반도 서쪽의 바다로 판단된다. 남쪽의 웅천은 발칸반도 남쪽의 어느 강이 아닐까 한다. 

 

(2) 한산 부근 건국설 : 한산에 올라 지형을 살폈다고 했다. 따라서 한산 부근이다. 

 

필자는 한산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알프스산맥에 있는 어느  산으로 추정한다. 

 

(3) 대방고지 건국설 : 구태 건국설 - 대방 옛땅에 나라를 세웠다. (주서, 수서, 북사 백제전)

 

​대방고지 건국설은 대방, 대수와 관련하여, Dalmatia, Danube river로 판단한다. 구태는 이 Dalmatia지역에 당시 있었던 Augustus를 한자화 한 것으로 추정된다. Julias Caesar가 암살될 때 Augutus는 Dalmatia지역에 있었다 한다. 

 

(4) 진번지간 건국설 :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지간(진한과 진번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라 언급된다. 

 

이 당시 진한은 발칸반도 남쪽으로 추정되며, 진번은 발칸반도 북서쪽 어디였을 것이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에서 건국해 이후 십년만에 반 천리의 땅을 확보했다 했다.  필자는 위례성 지역을 발칸반도의 서쪽 Illyria지역, Dalmatia지역으로 보고 있다. 

 

(5) 패대지간 건국설 :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패수는 라인강, 대수는 다뉴브강으로 추정한다. 미추홀은 발칸반도 서쪽 바닷가에 접한 지역으로 판단한다. 

 

즉 필자가 추정한 지역은 이들 5대 건국설에 모두 부합한다. 

 

 

1) 말갈과 관련한 기록

 

이 당시 온조가 접한 말갈은 중동부유럽에 있던 흑수말갈, 속말 말갈이 아닌가 한다. 

 

二年春一月 말갈에 대한 방어 대책 마련을 지시하다 (BC 17)

三年秋九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BC 16)

八年春二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BC 11)

十年冬十月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다 (BC 9)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BC 8)

十八年冬十月 말갈을 격파하고 추장을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다 (BC 1)

二十二年秋九月 말갈을 격파하다 (AD 4)

四十年秋九月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AD 22)

四十年冬十一月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다 (AD 22)

 

 

2) 낙랑과 관련 기록

 

낙랑은 이 당시 판노니아지역에 있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그 동남쪽에 대방군이 후일 생겼을 것이다. 이태리북부 한성지역으로 옮긴 온조의 백제는 우측에 낙랑군이 있고, 발칸반도 서쪽에 있던 위례성은 판노니아지방의 낙랑과 아주 접하고 중동부유럽의 말갈과도 접한다. 그리고 동예는 발칸반도 동쪽 흑해 연안에 있어 역시 가깝다. 따라서 낙랑과 동예가 위례성 시기에 매우 적대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四年秋八月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 맺다 (BC 15)

八年秋七月 백제와 낙랑의 우호 관계가 단절되다 (BC 11)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BC 8)


十一年秋七月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다 (BC 8)

十七年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 (BC 2)

十八年冬十一月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까지 행차하다 (BC 1)

 

 

3) 마한과 관련 기록

 

 

이 당시 마한은 이태리 반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마한의 동북쪽이 발칸반도 서쪽 달마티아지역이 된다. 온조는 대수인 다뉴브강을 건너오니 마한왕이 동북쪽 땅을 주었을 것이다. 웅천책을 세우니 마한왕이 항의하였다 한다. 웅천이 발칸반도 남쪽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마한이 발칸반도 남쪽도 포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했다는 것은 이태리 반도의 마한, 발칸반도의 마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十年秋九月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 (BC 9)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BC 6)

十八年冬十月 말갈을 격파하고 추장을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다 (BC 1)

二十四年秋七月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AD 6)

(22대 문주왕이 즉위하여 475년 웅천으로 수도를 옯겨 63년동안 지냈으며..삼국유사)

 

二十六年秋七月 마한 병합을 계획하다 (AD 8)
二十六年冬十月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하다 (AD 8)
二十七年夏四月 마한을 멸망시키다 (AD 9)

三十四年冬十月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다 (AD 16)

 

 

4) 고구려와 관련 기록

 

고구려와 접했으므로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본다. 고주몽 이후의 고구려는 론강유역에서부터 중동부 유럽에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백제와 가깝다. 

 

三十七年夏四月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많이 나타나다 (AD 19)

 

 

5) 남옥저와 관련 기록

 

남옥저는 중부유럽의 스위스 Augusta Raurica지역으로 추정한다. 고주몽이 정벌한 행안국 지역(북옥저지역) 남쪽이다. 이태리반도와 발칸반도의 백제와 가깝다. 따라서 남옥저지역의 사람들이 용이하게 귀순할 수 있다. 

 

四十三年冬十月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하다 (AD 25)

 

6) 동예와 관련 기록

 

동예는 발칸반도의 동쪽 해안에 접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에는 동옥저가 있었다. 낙랑도 예의 하나이므로 이 지역이 낙랑조선지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례성이 있는 달마티아지역에 있는 백제와 매우 가깝다. 따라서 동예가 백제에게 매우 적대적으로 나오는 것 같다. 기원전 1년에 동예를 쳐들어 갔지만 폭설로 그만두었다 했다. 이는 높은 산맥이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실제 발칸반도에는 이러한 산세가 있다. 

 

기원전 8년에는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인 100명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후에 백제는 동예와의 관계를 끊고 목책을 세웠다.

 

기원전 4년에는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기자 

 

그 틈을 노려 동예가 기원전 1년에 위례성을 함락했다.

 

기원전 1년에는 말갈이 쳐들어왔지만 추장이 생포되었다. 

 

그리고 위례성을 쳐들어간 보복으로 동예를 쳐들어갔지만 폭설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자료 : 온조왕, 위키백과, 필자의 다음 블로그, 카테고리, 온조-개루왕, 펌글 참조)

 

 

이상으로 개로왕 이후의 백제 역사와 전체 역사를 통한 위례성, 한산, 한산성, 한성, 횡악, 서해 등의 위치 추정을 마치고자 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 지역에 해당하는 서양역사를 검토하며 이러한 추정을 검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