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상대의 신라(BC57 - AD 225)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II)
<목차>
3. 기원후 2세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지마이사금 (AD 112-13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113 : 백제 (로마)와의 화해
(2) AD 115-116 : 가야와의 전쟁
(3) AD 121-123 : 왜국과 전쟁과 강화
(4) AD 125 : 말갈과 전쟁과 백제의 지원
(5) AD 120-132 : 정변의 상황
2) 일성이사금 (AD 134-15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AD 137-142 : 말갈과 전쟁
(2) AD 138 : 북쪽의 태백산에서 제사
(3) AD 141, 149, 154 : 정변의 조짐
3) 아달라이사금 (AD 154-18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164 : 백제에 의한 금성의 일시적인 파괴
(2) AD 165-167, AD 170, 172 : 백제와의 전쟁 및 전염병
(3) AD 167 : 한수를 넘은 신라의 공격과 백제의 강화 요청
4) 벌휴이사금 (AD 184-196)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188-190 : 백제와의 전쟁
(2) AD 186, 193, 194 : 일식현상과 정변
(3) AD 191 : 치우기의 등장(신라, 백제)
5) 내해이사금 (AD 196-230)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199-224 백제와의 전쟁과 금성의 일시적 함락
(2) AD 201-212 : 가야와의 화친과 포상팔국의 난 진압 지원
(3) AD 208 : 왜와의 전쟁
(4) AD 203 : 말갈과의 전쟁
(5) AD 200-214 : 잦은 반란과 정변
(6) AD 229 : 사산왕조로의 전환
1) 지마이사금(AD 112-13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113 : 백제 (로마)와의 화해
(2) AD 115-116 : 가야와의 전쟁
(3) AD 121-123 : 왜국과 전쟁과 강화
(4) AD 125 : 말갈과 전쟁과 백제의 지원
(5) AD 120-132 : 정변의 상황
<삼국사기 지마이사금 자료>
一年冬十月 지마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112)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三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오다 (AD 113)
三年春三月 우박이 보리를 상하게 하다
三年夏四月 큰 비가 내린 뒤 사면을 단행하다
四年春二月 가야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다 (AD 115)
四年秋七月 가야를 친히 정벌하다가 황산하에서 퇴각하다 (AD 115)
五年秋八月 가야를 치다가 큰 비 때문에 중단하다 (AD 116)
九年春二月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지다 (AD 120)
九年春三月 서울에 전염병이 돌다 (AD 120)
十年春一月 이찬·파진찬·아찬을 임명하다
十年春二月 대증산성을 쌓다
十年夏四月 왜인이 침입하다 (AD 121)
十一年夏四月 왜군의 침공 소문으로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AD 122)
十一年秋七月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다
十二年春三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AD 123)
十二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금성 동쪽의 백성들 가옥이 연못으로 변하다
十三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24)
十四年春一月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AD 125)
十四年秋七月 말갈의 침입을 백제의 도움으로 물리치다 (AD 125)
十六年秋七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127)
十七年秋八月 꼬리가 긴 살별이 하늘에 뻗치다 (AD 128)
十七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七年冬十一月 천둥이 치다
十八年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삼다 (AD 129)
二十年夏五月 홍수로 가옥이 떠내려가다
二十一年春二月 궁궐의 남문이 불타다 (AD 132)
二十三年夏六月 봄과 여름에 가물다
二十三年秋八月 왕이 죽다 (AD 134)
(자료료 : 지마이사금, 나무위키)
(1) AD 113 : 백제 (로마)와의 화해
二年春三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오다 (AD 113) (지마이사금, 신라)
三十七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AD 113) (기루왕, 백제)
위자료에서 보듯이 AD 113년 신라 백제 양국은 화해를 했다. 아래 파르티마 로마의 상황을 살펴 보자. 그리고 백제가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한 상황을 살펴 보자
아래 자료에서 AD 98년 새로운 왕이 된 Trajan (r 98-117)은, 파르티마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부를 지배한 Osroes I가 지난 협정을 깨고 아르메니아 왕을 새로 임명하니, AD 113년 파르티마를 침략했다고 한다. 그래서 셀레우키아 도시와 크테시폰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페르시아만까지 이르렀으나, 시리아, 유대지역,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의 반란으로 파르티마의 공격을 받아 아르메니아 왕을 양보하고 철수했으며, 그의 사후 117년 모든 것이 원상으로 되돌아갔다고 했다.
"After Osroes I violated the Treaty of Rhandeia with the Romans by appointing Parthamasiris as the king of Armenia in 113, the Roman emperor Trajan (r. 98–117) invaded the Parthian lands, briefly seizing the Parthian cities of Seleucia and Ctesiphon and reaching as far as the Persian Gulf. These gains were short-lived; all the Roman gains had been lost after Trajan's death in 117."
(source : Wikipedia, Vologases II)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서기 2세기 로마의 우세 속에 두 나라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113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에게 영구적이고 확실한 패배를 안기고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병합하여 "동방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트라야누스의 원정으로 로마 제국의 대 파르티아 전략은 크게 변화했다.
114년 트라야누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 1세가 왕으로 세운 그의 동생을 살해하고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병합하였다. 파르티아가 남쪽으로부터 침공하여 아르메니아 본토와의 길목을 차단할 것을 우려한 트라야누스는 이듬해에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점령하고 마찬가지로 속주로 삼았다. 로마군은 뒤이어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강을 따라 페르시아 만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같은 해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북부, 그리고 유태인들의 반란이 동시에 일어나 로마군의 발목을 붙잡았다. 셀레우키아와 니시비스, 에데사에 주둔한 로마군이 주민들에게 공격받는 때를 놓치지 않고 파르티아는 로마의 주둔지를 공격하였다.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반란을 제압하였으나 파르티아 출신인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왕좌에 앉히고 시리아로 진군하여 안티오크에 본부를 세웠다. 트라야누스는 군사를 재조직하여 파르티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117년에 사망했다."
(자료 : 위키백과, 로마 파르티마 전쟁 (BC 66-AD 217))
<삼국사기 백제왕 기루왕 자료>
一年秋九月 기루왕이 즉위하다 (AD 77)
九年春一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AD 85)
九年夏四月 객성이 자미로 들어가다 (AD 85)
十一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87)
十三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다
十四年春三月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다
十四年夏六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쓰러지다 (AD 90)
十六年夏六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AD 92)
十七年秋八月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땅에 떨어지다 (AD 93)
二十一年夏四月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나다 (AD 97)
二十三年秋八月 서리가 내려 콩이 죽다
二十三年冬十月 10월에 우박이 내리다
二十七年 한산에서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AD 103)
二十九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AD 105)
三十一年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三十二年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다
三十二年秋七月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다 (AD 108)
三十五年春三月 지진이 일어나다 (AD 111)
三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七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AD 113)
(자료 : 기루왕, 백제, 삼국사기)
위에서 언급한 로마의 상황이 백제에서도 같은가 보면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백제에서는 기루왕시절 AD 97년에 두마리의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고 정변을 암시했다. 즉 새로운 왕이 된 로마 Trajan (r AD 98-117)의 임기 시작과 거의 같은 시기이다. 이후 백제는 AD 103년 사냥으로 정변을 암시하고 있고, AD 105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으며, AD 108년 말갈의 침입을 받고, AD 111년 두차례의 지진이 있었다 했다. 그리고 AD 113년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했다. 즉 내부 사정이 어려워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쟁을 하고 있었으니 강화를 요청했겠지만 말이다. 그 이후의 상황은 아래 가야와의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2) AD 115-116 : 가야와의 전쟁-아르메니아와 로마군과 파르티마 전쟁
四年春二月 가야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다 (AD 115)
四年秋七月 가야를 친히 정벌하다가 황산하에서 퇴각하다 (AD 115)
五年秋八月 가야를 치다가 큰 비 때문에 중단하다 (AD 116)
(자료 : 신라, 지마이사금, 삼국사기)
四十年夏四月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다 (AD 116)
四十年夏六月 한강 물이 넘쳐 가옥이 유실되다 (AD 116)
四十年秋七月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다 (AD 116)
四十九年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장수를 파견하다 (AD 125)
五十二年冬十一月 기루왕이 죽다 (AD 127)
(자료 : 백제 기루왕, 삼국사기, 나무위키)
AD 115년 가야가 신라 남쪽 변경을 침범했다고 했다. 로마는 AD 113년이후 셀레우키아, 크테시폰, 페르시아만 까지 공격했다고 했다. 이 지역은 파르티마제국의 남쪽이다. 그래서 신라의 남쪽을 공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로마는 시리아 지역,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에서 반란이 일어 나고, 이를 틈타 파르티마 공격이 시작된다. 이 당시 파르티마제국은 서부를 차지한 Osroes I 때이다. (당시 파르티마제국의 동부는 Vologases III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AD 115년 신라의 반격이 있었다고 한 상황이다.
그런데 신라는 황산하에서 퇴각했다 했다. 로마가 메소포타미아 북부 반란을 제압했다는 상황과 같다. 즉 황산하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있는 강인것으로 보인다.
AD 116는 신라는 가야를 공격하다가 큰 비로 인해 중단했다고 한다. 백제의 자료를 보면 백제에서도 AD 116년 백제의 수해가 있었다. 즉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는 가야와의 싸움이 파르티마제국 서부지역 아르메니아 지역,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와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이후 AD 116년 백제에서는 서울 성문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고 기술된다. 그리고 이후 9년간 기록이 없다. 이 당시 로마는 새로운 왕 Hadrian (r AD 117-138)이 등장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Hadrian왕은 파르티마제국에 대해 유화적인 정책을 편다. 즉 백제의 친 신라 정책을 편 것이다. 이것이 후일 AD 125년 백제가 신라와 공동으로 말갈의 공격에 대처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Trajan's successor, Hadrian (r. 117–138) renounced the remnants of Trajan's conquests in the east, and ackwledged the Treaty of Rhandeia, with the Parthian prince Vologases becoming the new king of Armenia. The weakened state of the western part of the Parthian Empire gave Vologases III—whose eastern domains were untouched—the opportunity to regain lost territory seized by Osroes I."
(source : Vologases III, Wikipedia)
(3) AD 121-123 : 왜국과 전쟁과 강화
十年夏四月 왜인이 침입하다 (AD 121)
十一年夏四月 왜군의 침공 소문으로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AD 122)
十二年春三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AD 123) (신라, 지마이사금)
신라는 AD 121년 왜의 침입이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왜의 침입 소문으로 동요하는 주민들 모습을 보인다. 이 상황은 파르티마제국 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이 당시 파르티마제국은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 서부는 반란을 통해 왕이된 Osroe I가 지배하고 있었고, 동부는 Vologases III가 지배하고 있었다. Osroe I는 아르메니아 왕의 임명으로 로마와 전쟁을 했지만 마무리 했다. 즉 수해로 가야와 전쟁을 마무리한 신라의 왕이다. 로마도 새로운 왕이된 Hadrian이 파르티마제국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반란으로 서부를 차지하고 있는 파르티마제국의 Osroe I는 로마와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르티마제국의 남서쪽에 있는 임나의 왜(사이프러스섬 세력)는 위협을 느껴 신라를 공격할 수 있다. 지난 글 (II)에서도 왜가 신라의 계림 남서쪽에 있다고 하여 사이프러스섬의 임나를 필자는 주장했다. 여기서도 같은 논리가 통한다. 아니면 파르티마 제국의 동서 내분상황을 이용하여 왜가 침입하였을 수 있다.
AD 122년 왜의 침입 소문으로 주민들이 동요했다는 표현은 실제 왜의 노력질 피해가 심해서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 AD 123년 신라는 왜와 강화를 맺었다 했다. 동부에 있는 Vologases III와 싸워야 하는 Osroe I는 로마와 그랬던 것처럼, 왜와 강화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이 신라와 왜의 강화로 판단된다. 서부의 Osroe I는 AD 129년 동부의 Vologases III에 패배하여 파르티마제국은 다시 통일된다.
(4) AD 125 : 말갈과 전쟁과 백제의 지원
AD 125년 신라는 말갈의 북쪽 변경 침입을 백제의 도움으로 물리친다. 이러한 신라와 백제의 협력상황을 필자는 위에서 로마 Hadrian왕과 파르티마제국의 Osroe I왕의 상황에 따른 협력으로 해석했다.
여기서는 신라 역사, 백제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갈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十四年春一月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다 (AD 125)
十四年秋七月 말갈의 침입을 백제의 도움으로 물리치다 (AD 125) (신라 지마이사금)
四十九年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장수를 파견하다 (AD 125) (백제 기루왕)
아래 말갈 자료를 보면, 말갈은 흑수말갈이 주를 이루고, 이들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의 주류를 이루며, 발해 멸망후, 발해 유민과 흑수말갈을 합쳐 당과 신라에서는 여진이라 불렀다.
우리는 지난 글에서 백제의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하자 동예와 말갈이 자주 침입했다고 했다. 근처의 지역에 있던 세력으로 백제의 온조의 새로운 세력에 대한 견제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동예는 코카서스산맥 동쪽 카스피해에 접한 지역에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앞으로 말갈의 위치 추정을 하는데 이를 참조했으면 한다.
- 말갈에 대한 참고 자료
<개설>
대체로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불리는 헤이룽강(黑龍江) 중·하류에 사는 주민들이 그 대표적인 종족이다. 그러나 말갈이란 중국 동북방의 몇 개 이민족에 대한 총칭이자, 고구려의 변방주민들에 대한 낮춤말〔卑稱〕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말갈 안에는 예맥계(濊貊系) 내지 부여·고구려·옥저계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백산말갈(白山靺鞨) 등도 포함된다. 말갈의 조상으로 알려진 종족은 진(秦) 이전의 숙신(肅愼)과 한대(漢代)의 읍루(挹婁), 그리고 후위대(後魏代)의 물길(勿吉)로 불리는 주민들이다.
『수서(隋書)』에는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라는 7부의 말갈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구려·발해와의 관계>
수·당대 이후에는 7말갈 이외에 월희(越喜)나 철리(鐵利)와 같은 말갈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말갈 부락 간에 일단의 세력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결과물로 짐작된다.
고구려 당시 이들은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되어 신라를 공격하거나 당과의 전쟁에도 동원되었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고구려부흥운동에 참가했으며, 신라의 9서당(九誓幢)에서는 고구려인의 황금서당(黃金誓幢)과 함께 흑금서당(黑衿誓幢)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갈을 고구려의 피지배 주민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당나라를 도운 적도 있어, 고구려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다기보다는 간접 지배를 받았다고 이해되고 있다.
말갈은 발해국에서까지 그 존재가 논란이 되고 있다. 즉, 말갈은 발해 지배층인 고구려유민과 대비되어 다수의 피지배 주민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가 하면, 건국자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으로 간주되어 발해국이 말갈족에 의해 건국된 중세왕조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대조영은 쑹화강〔粟末水〕 출신의 고구려 장수였으며, 흑수말갈 지역을 제외한 다수의 주민들은 고구려유민이었다. 당나라는 한때 발해를 ‘(발해)말갈’이라 낮추다가,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발해’라고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말갈은 당나라와 신라 등에서 동북방 및 북방의 미개 부락에 대한 통칭이기도 하였다. 발해 멸망 후는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을 통칭해 ‘여진(女眞)’이라 하였다. 말갈의 실상은 아직껏 명확하지 않다. 그들의 종족계통 문제라든가, 고구려·발해 왕실과의 관련성들이 쟁점으로 남아 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말갈의 실체>
말갈의 등장은 『북제서(北齊書)』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년(563)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 원년(서기전 37)부터 말갈을 기록하고 있어 『북제서』와는 차이가 있다. 이는 신라에서 보는 말갈에 대한 인식이 중국과는 달랐다는 증거다.
『삼국사기』의 말갈 기록이 갖는 특징은 북쪽에 위치한 발해를 말갈의 국가로 인식한 신라인의 관념이 반영되었다는 것과, 단순히 중국 정사의 말갈 호칭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말갈 기록이 갖는 이러한 문제로 인해, 조선 후기 정약용(丁若鏞)은 말갈 중에는 거짓말갈〔僞靺鞨〕이 있었다고 이해하고, 6세기 이전에 나오는 말갈은 불내예(不耐濊)의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말갈에 대한 다른 견해는 낙랑과 관련된 말갈을 예라 하기도 하며, 예맥(동예)을 잘못 지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혹은 정약용의 견해를 보강하여 위말갈이란 예로부터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동예의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제하고, 이를 통해 동예사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말갈의 활동지역이 보이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마한 동쪽에서 백제에 밀려나 남하하는 도중에 신라와 접촉한 사실의 기록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도 말갈과 신라가 주로 충돌하던 니하(泥河) 등의 지명 분석을 참고하여 진흥왕의 한강유역 10군 점령사건 이후 북방의 돌궐과 대치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말갈동원 사실을 소급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초기기록에 나오는 말갈관계 기사들은 과거 북쪽의 ‘적대세력=동예=말갈’로 인식하여 원사료에 ‘예맥’으로 쓰여 있던 것을 통일신라시대의 관념에 맞추어 말갈로 전면 개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보이는 말갈을 맥계말갈(貊系靺鞨), 신라본기에 보이는 말갈을 예계말갈(濊系靺鞨), 그리고 이들의 문화기반이 해체된 이후 새롭게 고구려에 의해 이주된 아말갈(亞靺鞨)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자료 : 말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말갈과 유사한 마자르족에 대한 자료를 보면 말갈과 같은 종족을 의미하며 하자르 왕국의 주요 피지배민족이라 한다.(아래 자료 참조)
- Magyars 족에 대한 참고 자료
"According to András Róna-Tas the locality in which the Hungarians, the Manicha-Er group, emerged was between the Volga river and the Ural Mountains. Between the 8th and 5th centuries BC, the Magyars embarked upon their independent existence and the early period of the proto-Hungarian language began.
Around 830 AD, when Álmos was about 10 years old, the seven related tribes (Jenő, Kér, Keszi, Kürt-Gyarmat, Megyer [hu], Nyék and Tarján) formed a confederation in Etelköz, called "Hétmagyar" ("Seven Magyars"). Their leaders, the Seven chieftains of the Magyars, besides Álmos, included Előd, ond, Kond, Tas, Huba and Töhötöm, who took a blood oath, swearing eternal loyalty to Álmos. Presumably, the Magyar tribes consisted of 108 clans.
The confederation of the tribes was probably led by two high princes: the kende (their spiritual ruler) and the gyula (their military leader). The high princes were either elected by the leaders of the tribes or appointed by the Khagan of the Khazars who had been exerting influence over the Magyars. Around 862 AD the seven tribes separated from the Khazars.[citation needed]
Before 881 AD three Turkic tribes rebelled against the rule of the Khagan of the Khazars, but they were suppressed. After their defeat they left the Khazar Empire and voluntarily joined the Hétmagyar confederation. The three tribes were organised into one tribe, called Kabar, and later they played the roles of vanguard and rear guard during the joint military actions of the confederation. The joining of the three tribes to the previous seven created the On-ogur (Ten Arrows), one of the possible origins for the name Hungarian.....
Genetics
Magyars comprised seven clans and later three more clans made of Kabar people. Recent genetic research have shown that the first-generation Magyar core gene pool originated in Central Asia/South Siberia and, as Magyars were moving westward, admixing with additional strata of people of European origin, and people of the Caucasus. Burial samples of the Karos-Eperjesszög Magyars place them genetically closest to Turkic peoples, modern south Caucasian peoples, and modern Western Europeans to a limited degree, while no specific Finno-Ugric markers were found. However, a 2008 study done on 10th century Magyar skeletons, indeed found a few Uralic samples."
(source : Magyar tribes, Wikipedia)
흑수말갈에 대한 위치 추정을 위해 흑수의 위치를 살펴 보자. 흑수(Karasu)는 발칸반도 북쪽, 흑해연안의 터어키 북서쪽 아나톨리아, 시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여러 곳에서 그 이름이 발견되나, 우리는 여기서 흑해 주위에 있는 발칸반도 위쪽, 불가리아, 트라키아 (그리스 북쪽) 방면을 주시하고자 한다.
- Karasu (흑수)에 관한 참고 자료
"Karasu is a town in Sakarya Province, northwest Turkey, on the Black Sea coast.
Karasu, Kara-su, Kara su, Qarasu or Gharasu (lit. 'black water/river' in Turkic languages) may also refer to:
Rivers
The Balkans
- A former name of the Struma River (Struma Karasu) in Bulgaria and Thrace, northern Greece
- A former name of the Mesta River (Mesta Karasu) in Bulgaria and northern Greece, forming the border between Greek Macedonia and Thrace
- A former name of the Haliacmon (İnce Karasu) in western Macedonia, northern Greece
- Karasu (Istanbul), a river in the greater Istanbul area of Turkey
Central Asia
- Gharasu River, a small river in northeast Iran feeding into the southeast corner of the Caspian Sea
- Kara-Suu River (Aksy), a right tributary of the Naryn River in Kyrgyzstan
Turkey
- Karasu (Euphrates), the western of the two major sources of the Euphrates in Eastern Anatolia
- Karasu (Hatay), a tributary of the Orontes River (formerly of Lake Amik) in Hatay Province, southeastern Turkey, bordering Syria
- A small river in northwest Anatolia, a tributary of the Sakarya River
(source : karasu, Wikipedia)
흑수말갈족, 즉 여진족으로 보이는 Sarmatians은 발칸반도 북쪽에서 흑해북부, 카스피해 북부에 걸쳐 있는 것으로 서술된다. Sarmatians은 여인들이 전사로 참여하며, 여인들의 주도적인 활동이 특징이다. (잃어버린 한민족 역사-Lost COREA 블로그 자료, Sarmatians 참조)
아래 Alans 족은 Sarmatians의 일부이다. 즉 흑수말갈족의 일부이다. 혹자는 이들이 거란족이라 하나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거란족은 Germans(게르만)족으로 보이며, 여진족인 말갈족 서편에 있던 종족으로 여겨진다.
- Alans에 대한 참고 자료
"The Alans (Latin: Alani) were an Iranian nomadic pastoral people of antiquity.
The name Alan is an Iranian dialectical form of Aryan. Possibly related to the Massagetae, the Alans have been connected by modern historians with the Central AsianYancai and Aorsi of Chinese and Roman sources, respectively. Having migrated westwards and become dominant among the Sarmatians on the Pontic Steppe, they are mentioned by Roman sources in the 1st century AD. At the time, they had settled the region north of the Black Sea and frequently raided the Parthian Empire and the Caucasian provinces of the Roman Empire.
In the 1st century AD, the Alans migrated westwards from Central Asia, achieving a dominant position among the Sarmatians living between the Don River and the Caspian Sea. The Alans are mentioned in the Vologeses inscription which reads that Vologeses I, the Parthian king between around 51 and 78 AD, in the 11th year of his reign, battled Kuluk, king of the Alani. The 1st century AD Jewish historian Josephus supplements this inscription. Josephus reports in the Jewish Wars (book 7, ch. 7.4) how Alans (whom he calls a "Scythian" tribe) living near the Sea of Azov crossed the Iron Gates for plunder (72 AD) and defeated the armies of Pacorus, king of Media, and Tiridates, King of Armenia, two brothers of Vologeses I (for whom the above-mentioned inscription was made).
The fact that the Alans invaded Parthia through Hyrcania shows that at the time many Alans were still based north-east of the Caspian Sea. By the early 2nd century AD the Alans were in firm control of the Lower Volga and Kuban. These lands had earlier been occupied by the Aorsi and the Siraces, whom the Alans apparently absorbed, dispersed and/or destroyed, since they were no longer mentioned in contemporaneous accounts. It is likely that the Alans' influence stretched further westwards, encompassing most of the Sarmatian world, which by then possessed a relatively homogenous culture..............
Ammianus writes that the Alans were "somewhat like the Huns, but in their manner of life and their habits they are less savage." Jordanes contrasted them with the Huns, noting that the Alans "were their equals in battle, but unlike them in their civilisation, manners and appearance"
The 4th century Roman historian Ammianus Marcellinus noted that the Alans were "formerly called Massagetae," while Dio Cassius wrote that "they are Massagetae." It is likely that the Alans were an amalgamation of various Iranian peoples, including Sarmatians, Massagetae and Sakas.
(source : Alans, Wikipedia)
즉 흑수말갈족인 Sarmatians의 일부인 Alans족의 파르티마제국, 아르메니아 (로마)에의 침입 기록은 백제와 신라에 대한 말갈족의 침입 역사를 말해 준다 할 것이다. AD 125년 신라가 백제의 지원을 받아 말갈족의 침입을 막았다고 했는데, 코카서스산맥을 지나 내려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Media Artapotene, 파르티마 영토)와 아나톨리아 동쪽, 아르메니아 (로마 영역) 지역을 공격했을 텐데 (AD 72년, AD 135-136 침입 경우), 그래서 백제와 신라의 연합 방어가 가능했던 것이다.
(5) AD 120-132 : 정변의 상황
九年春二月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지다 (AD 120)
九年春三月 서울에 전염병이 돌다 (AD 120)
十三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24)
十六年秋七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127)
十七年秋八月 꼬리가 긴 살별이 하늘에 뻗치다 (AD 128)
十八年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삼다 (AD 129) (Vologases III의 Osroe I 진압)
二十一年春二月 궁궐의 남문이 불타다 (AD 132) : Mithridates V의 도전
일식현상과 정변에 관해서는 우리가 여러 번 확인 한 바 있다. 여기서도 파르티마제국의 Osroe I와 Vologases III의 왕권 다툼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AD 129년 Vologases III는 Osroe I를 패배시키고 파르티마제국을 다시 통일했는데, 이에 따라 새로운 군통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에서 파진찬 옥권이 이찬으로 승진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AD 132년 궁궐의 남문이 불탔다고 했는데, Vologases III가 또 하나의 반란, Mithridates V의 왕권도전을 받은 상황이라고 본다. (아래 글 참조)
"Vologases III's reign was marked by civil strife and warfare. At his ascension, he had to deal with the usurper Osroes I (r. 109–129), who managed to seize the western part of the empire, which left Vologases III in control of its eastern parts.
Vologases III, whose eastern domains were untouched, took advantage of the weakened state of Osroes I to regain lost territory, and finally defeated him in 129. Another contender named Mithridates V shortly appeared afterwards, but was also defeated by Vologases III, in 140."
(source : Vologases III (r 110-147), Wikipedia)
- Vologases III (AD 110-147)에 대한 참고 자료
"Vologases III (Parthian: ???? Walagash) wa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from 110 to 147. He was the son and successor of Pacorus II (r. 78–110).
Vologases III's reign was marked by civil strife and warfare. At his ascension, he had to deal with the usurper Osroes I (r. 109–129), who managed to seize the western part of the empire, which left Vologases III in control of its eastern parts. After Osroes I violated the Treaty of Rhandeia with the Romans by appointing Parthamasiris as the king of Armenia in 113, the Roman emperor Trajan (r. 98–117) invaded the Parthian lands, briefly seizing the Parthian cities of Seleucia and Ctesiphon and reaching as far as the Persian Gulf. These gains were short-lived; all the Roman gains had been lost after Trajan's death in 117. Vologases III, whose eastern domains were untouched, took advantage of the weakened state of Osroes I to regain lost territory, and finally defeated him in 129. Another contender named Mithridates V shortly appeared afterwards, but was also defeated by Vologases III, in 140.
Vologases III had to face an invasion by the nomadic Alans from 134 to 136, while in the east, he sought to increase the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s as a response to the enlargement of the Kushan Empire. Under the Roman emperor Antoninus Pius (r. 138–161), disturbance once occurred in Armenia due to the Romans appointing a new king in Armenia. Vologases III, however, did not protest, either due to not being powerful enough, or possibly because he did not want to put the thriving long-distance trade in jeopardy, from which the Parthian state was gaining hefty income from. Vologases III was succeeded by Mithridates V's son Vologases IV in 147. .......
Vologases III was a son of Pacorus II (r. 78–110). During the last years of Pacorus' reign, Vologases III co-ruled with him. A Parthian contender named Osroes I appeared in 109. Pacorus died in the same year, and was succeeded by Vologases III, who continued his fathers struggle with Osroes I over the Parthian crown. Osroes I managed to seize the western part of the empire, including Mesopotamia, while Vologases III ruled in the east. Osroes I violated the Treaty of Rhandeia with the Romans by deposing Vologases III's brother Axidares and appointing the latters brother Parthamasiris as the king of Armenia in 113. This gave the Roman emperor Trajan (r. 98–117) the pretext to invade the Parthian domain and take advantage of the civil war ongoing between Vologases III and Osroes I. Trajan conquered Armenia and turned it into a Roman province in 114. In 116, Trajan captured Seleucia and Ctesiphon, the capitals of the Parthians. Trajan even reached as far as the Persian Gulf, where he forced the Parthian vassal ruler of Characene, Attambelos VII, to pay tribute. Fearing a revolt by the Parthians, Trajan installed Osroes I's son Parthamaspates on the throne at Ctesiphon.
However, these gains were short-lived; revolts occurred in all the conquered territories, with the Babylonians and Jews pushing the Romans out of Mesopotamia, and the Armenians causing trouble under the leadership of a certain Sanatruk. After Trajans death in 117, the Parthians removed Parthamaspates from the throne and reinstated Osroes I. Trajan's successor, Hadrian (r. 117–138) renounced the remnants of Trajan's conquests in the east, and acknowledged the Treaty of Rhandeia, with the Parthian prince Vologases becoming the new king of Armenia. The weakened state of the western part of the Parthian Empire gave Vologases III—whose eastern domains were untouched—the opportunity to regain lost territory seized by Osroes I.
Vologases III finally managed to remove Osroes I from power in 129. However, shortly afterwards, a new contender named Mithridates V appeared. Vologases III also faced new challenges in other places; in 134, the king of Iberia, Pharasmanes II (r. 117–138) caused the nomadic Alans to invade the domains of the Parthians and Romans. They reached as far as Caucasian Albania, Media, Armenia, and also Cappadocia; they were eventually repelled two years later after many obstacles and heavy economic costs. In the east, Vologases III sought to increase the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s as a response to the enlargement of the Kushan Empire. Vologases III defeated and deposed Mithridates V in 140.
Under Hadrian's successor, Antoninus Pius (r. 138–161), a disturbance occurred after the Romans appointed a new king in Armenia. Vologases III, however, did not protest, either due to not being powerful enough, or possibly because he did not want to put the thriving long-distance trade in jeopardy, from which the Parthian state was gaining hefty income from. Vologases III was succeeded by Mithridates V's son Vologases IV in 147.
(source : Vologases III (AD 110-147) , Wikipedia)
2) 일성 이사금 (AD 134 -15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AD 137-142 : 말갈과 전쟁
(2) AD 138 : 북쪽의 태백산에서 제사
(3) AD 141, 149, 154 : 정변의 조짐
<삼국사기 일성이사금 자료>
一年秋八月 일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134)
一年秋九月 사면을 하다
二年春一月 시조 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一月 웅선을 이찬으로 근종을 일길찬으로 임명하다 (AD 136)
四年春二月 말갈이 장령을 공격하다 (AD 137)
五年春二月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다 (AD 138)
五年秋七月 알천 서쪽에서 사열하다 (AD 138)
五年冬十月 북쪽으로 순행해 태백산에 제사지내다 (AD 138)
六年秋七月 서리가 콩을 해치다
六年秋八月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다 (AD 139)
六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했다가 퇴각하다 (AD 139)
七年春二月 장령에 목책을 세우다 (AD 140)
八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41)
九年秋七月 말갈을 정벌하려다 중지하다 (AD 142)
十年春二月 궁실을 수리하다 (AD 143)
十年夏六月 화성이 토성을 침범하다 (AD 143)
十年冬十一月 천둥이 치다
十一年春二月 제방 수리와 전야 개척을 명하고 민간의 금은주옥 사용을 금하다 (AD 144)
十二年 기근이 들자 진휼을 베풀다 (AD 145)
十三年冬十月 압독의 반란을 토벌하다 (AD 146)
十四年秋七月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추천하도록 하다 (AD 147)
十五年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삼다 (AD 148)
十六年春一月 득훈을 사찬으로 삼고 선충을 나마로 삼다 (AD 149)
十六年秋八月 살별이 천시에 나타나다 (AD 149)
十六年冬十一月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돌다 (AD 149)
十七年夏四月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十八年春二月 대선을 이찬으로 삼다 (AD 151)
十八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年冬十月 궁궐 문이 불타고 혜성이 나타나다 (AD 153)
二十一年春二月 왕이 죽다 (AD 154)
(자료 : 일성 이사금, 삼국사기, 나무위키)
(1) AD 137-142 : 말갈과 전쟁
일성이사금 시기의 신라는 말갈의 많은 공격에 시달렸다.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말갈은 훅수말갈로서 흑해 북쪽, 카스피해 북쪽에 있었다. 아래에서 공격했다는 장령은 산맥을 의미한다. 즉 아래 파르티마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공격해 왔다는 것이다. 필자는 코카서스산맥이 철령이고, 철문관도 여기에 있는 Alexander's gate라고 추정했다. (본 블로그 글, '알렉산더는 진시황인가?' 참조). 아래 Alans 자료에서 AD 72년에 iron gate (철문관)을 넘어 Media, Armenia를 공격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즉 철문관이 있는 철령 코카서스산맥을 넘어 공격해 온 것이다.
이 당시 말갈은 Media, Armenia, 심지어 카파도키아까지 침략한 것으로 서술된다. 파르티마 자료에서는 2년뒤에 물러났다는 서술이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도 2년후인 AD 139년 말갈이 퇴각했다고 서술된다. 서로 자료를 공유하는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신라와 파르티마 자료가 일치한다.
四年春二月 말갈이 장령을 공격하다 (AD 137)
六年秋八月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다 (AD 139)
六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했다가 퇴각하다 (AD 139)
七年春二月 장령에 목책을 세우다 (AD 140)
九年秋七月 말갈을 정벌하려다 중지하다 (AD 142)
"Alans (whom he calls a "Scythian" tribe) living near the Sea of Azov crossed the Iron Gates for plunder (72 AD) and defeated the armies of Pacorus, king of Media, and Tiridates, King of Armenia, two brothers of Vologeses I.......
In 135 AD, the Alans made a huge raid into Asia Minor via the Caucasus, ravaging Media and Armenia. They were eventually driven back by Arrian, the governor of Cappadocia, who wrote a detailed report (Ektaxis kata Alanoon or 'War Against the Alans') that is a major source for studying Roman military tactics."................
(source : Alans, Wikipedia)
"Vologases III finally managed to remove Osroes I from power in 129. However, shortly afterwards, a new contender named Mithridates V appeared. Vologases III also faced new challenges in other places; in 134, the king of Iberia, Pharasmanes II (r. 117–138) caused the nomadic Alans to invade the domains of the Parthians and Romans. They reached as far as Caucasian Albania, Media, Armenia, and also Cappadocia; they were eventually repelled two years later after many obstacles and heavy economic costs. In the east, Vologases III sought to increase the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s as a response to the enlargement of the Kushan Empire. Vologases III defeated and deposed Mithridates V in 140."
(source : Vologases III (r 110-147), wikipedia)
"134년 즉위 직후 다른 왕들처럼 시조 묘(나정)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사면한 뒤, 138년 금성(金城)에 국가 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했다. 144년에는 모든 주군(州郡)이 제방(堤防)을 수축하고 전야(田野)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다. 당시 금은과 주옥의 사용이 진한의 풍습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당시 귀속된 오환족의 고유 풍습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기록에는 오환족의 풍습 중 금은주옥을 사용하는 것이 있다고 되어 있다. 146년에는 전 전왕 파사 이사금 때 항복했던 압독국(押督)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고 주민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남쪽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148년에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에 삼았다.
전왕과 마찬가지로 재위 중에 여러 번 북방 말갈족의 침입을 받아서 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도 하였다. 약 세 차례(137년 1번, 139년 2번)의 침입이 있었다. 138년 10월 왕이 친히 북쪽 영토를 순행하고 태백산에 들러 하늘에 제를 올리기도 했고 140년 2월 말갈을 막기 위해 장령 고개에 목책을 세우기도 했다. 말갈이 자꾸 쳐들어오자 142년 7월에는 아예 예방전쟁격으로 선제 공격해서 뿌리를 뽑자고 대신들을 불러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찬 웅선이 반대해서 그냥 그만뒀다."
(자료 : 일성이사금, 위키백과)
(2) AD 138 : 북쪽의 태백산에서 제사
말갈의 침략(AD 137, AD 139)의 중간 시기(AD 138)에 일성이사금은 알천 서쪽에서 사열하고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낸다.
五年秋七月 알천 서쪽에서 사열하다 (AD 138)
五年冬十月 북쪽으로 순행해 태백산에 제사지내다 (AD 138)
알천은 파르티마제국 동부에 있는 알천 지역을 의미한다고 본다. 내천자가 들어 가니 강의 의미가 있으나, 동일한 한자로 진덕여왕 시기의 상대등 알천이 있었다. 즉 알천지역의 가문 귀족이라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 지역에 Alchon Huns (370-670)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위키피디아는 말한다. 지난 번 파사이사금 시기에도 알천에서 사열했다 기록이 있었는데, 당시 반초의 동부 경략이 있었다.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살펴 볼 때, 당시 신라가 아르메니아의 상당부분을 이미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은 Armenian Kingdom of Ararat (Urarut) (아라가야, 안라국)으로 추정된다. 이 근처에 꼬깔모자를 쓴 왕들의 두상이 널려 있는 Mount Nemrut가 있다. 필자는 전편의 글에서 이러한 모습의 두상이 변한 즉 가야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 지역 근처에 태백산으로 추정되는 Ararat Mountain이 있다. 이러한 추정은 아래 자료글에서 언급하는 황지 (=Lake Van (Kingdom of Van, 반로국?), 그리고 황수 즉 낙동강으로 추정되는 유프라테스강과 관련이 있다. 아래에서 본블로그에 올린 글,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는 코카서스산맥 아래 아르메니아에 있었다' 라는 글에서 언급한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며, 태백산을 추정한다.
Mount Ararat (5137m) in Armenian Area, Caucasus (source : Wikipedia)
"정약용, 여유당 전서 강역고에 이르기를
“김해의 금관가야이다. 또 이름이 대가라이다. 함안은 아나가라인데, 또 이름이 아시랑이다. 고성은 소가야인데, 또한 고지국이다. 이 모두가 황수 이남의 여러 현에 있다.
황수는 태백산의 황지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3백여리 흘러, 함창현의 동쪽으로 이르고, 꺾여 남쪽으로 3백여리를 흘러 함안군 북쪽에 이른다. 또 꺾여 동쪽으로 백여리를 흘러, 금해부 동북 황산 포구에 다다른다. 또 꺾여 남쪽으로 흘러 김해부에 다다라, 동쪽 바다로 들어 간디. 이게 소위 낙동강이다.” 라고 하였다. (자료 : 문무님의 조선사 카페, 언급된 글)
그 흐름을 말한 것을 보면 낙동강은 유프라테스강으로 보인다. 신라라 판단되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지역에서 이렇게 흐르는 강은 유프라테스강뿐이다. 또한 유프라테스강은 강의 흐름 속도가 느려 토사가 많이 쌓인다. 따라서 황수가 될 것이다. 반면 티그리스강은 swift river, 즉 유속이 빠른 강이다.
- Map of Euphrates River (source : Wikipedia)
“The Euphrates receives most of its water in the form of rainfall and melting snow, resulting in peak volumes during the months April through May. Discharge in these two months accounts for 36 percent of the total annual discharge of the Euphrates, or even 60–70 percent according to one source, while low runoff occurs in summer and autumn. The average natural annual flow of the Euphrates has been determined from early- and mid-twentieth century records as 20.9 cubic kilometres (5.0 cu mi) at Keban, 36.6 cubic kilometres (8.8 cu mi) at Hīt and 21.5 cubic kilometres (5.2 cu mi) at Hindiya….
Tamaz V. Gamkrelidze and Vyacheslav Ivanov suggest the Proto-Sumerian *burudu "copper" (Sumerian urudu) as an origin, with an explanation that Euphrates was the river by which the copper ore was transported in rafts, since Mesopotamia was the center of copper metallurgy during the period...
Both the Kara Su and the Murat Su rise northwest from Lake Van at elevations of 3,290 metres (10,790 ft) and 3,520 metres (11,550 ft) amsl, respectively.”
(source : Euphrates, Wikipedia)
낙동강은 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낙동강이라 했다 한다. 또한 낙동은 가락의 동쪽이란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택리지에는 상주가 낙양과 같다고 하여 그 동쪽을 흘러 지명이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하였다. 가락은 가락국을 말하며, 금관가야를 말한다.
상주는 사벌주를 말한다. 따라서 낙동강은 가락국 금관가야의 동쪽을 흐르며, 사벌주의 동쪽에 있다. 여기서 유프라테스강을 낙동강으로 대체하면, 유프라테스강의 서쪽에 사벌주와 금관가야가 있는 것이 된다. Greater Armenia에 가까이 위치한다.
코카서스산맥의 아래에 흐르는 Kura River가 한강이고, 이지역을 놓고 싸우는 비잔틴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Lazic war이 한강유역을 다투는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라 난 추정했다. 따라서 한강유역을 빼앗긴 것에 대한 성왕의 보복 전투인 관산성 전투도 이 근처일 것이다. 이 경우 금관가야의 후예인 김해에 식읍을 가진 김무력이 낙동강인 유프라테스강의 서쪽에 있었다면, 관산성에 증원군으로 근접하기 용이할 것이다. 즉 나의 추론과 논리가 맞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다음과 같은 부수적인 추론을 가능케 한다.
황수는 태백산의 황지에서 발원한다고 했다. 유프라테스강 (지류인 Kara su와 Murat su)은 3290 미터(가라강), 3520미터(무라강) 고지의 Lake Van (=황지)에서 발원한다고 했다. 이곳이 태백산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앞에서 Armenian Highlands가 Lake Van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본 블로그 글,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코카서스산맥 아래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 에서 인용)
(3) AD 141, 149, 154 : 정변의 조짐
八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41)
十三年冬十月 압독의 반란을 토벌하다 (AD 146)
十四年秋七月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추천하도록 하다 (AD 147)
十五年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삼다 (AD 148)
十六年秋八月 살별이 천시에 나타나다 (AD 149)
二十年冬十月 궁궐 문이 불타고 혜성이 나타나다 (AD 154)
일성이사금에서 아달라이사금(154-184)으로 왕권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정변이 있었던 것으로 위 삼국사기 기록은 말하고 있다. 파르티마제국의 기록에서는 AD 147년 왕이 된 Vologases IV가 쿠데타에 의해 왕에 올랐다고 했다. Vologases IV는 AD 140년 왕권에 도전하다 진압된 Mithridates V의 아들이다.
이러한 과정이 압독의 반란과 토벌로 묘사되고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파르티마제국의 서술에서는 사라센지역을 점령하고 친척을 지역왕으로 봉한 것으로 서술된다. 즉 압독국은 사라센지역, (앗)시리아지역으로서 지중해에 접한 지역이 아닌가 한다.
"In the east, Vologases III sought to increase the political and military actions as a response to the enlargement of the Kushan Empire. Vologases III defeated and deposed Mithridates V in 140.....
Vologases III was succeeded by Mithridates V's son Vologases IV in 147."
(source : Vologases III (r AD 110 - 147), Wikipedia)
- Vologases IV (r AD 147-191)에 관한 참고 자료
"Conquest of Characene
Vologases IV was a son of Mithridates V, who had contended against the ruling Parthian monarch Vologases III (r. 110–147) for the throne from 129 to 140. Vologases IV staged a coup d'état and succeeded Vologases III in 147, marking the establishment of a new branch of the Arsacid dynasty on the Parthian throne. In 150/51 AD, he defeated the Arsacid ruler of Characene (also known as Mesene), Meredates, and appointed Orabazes II, most likely a relative of his, as the new king of Characene. Vologases IV's forces seized a statue of Heracles, the patron god of the Characenian royalty. The statue was taken to the temple of Apollo in Seleucia, where it was displayed as a demonstration of Vologases IV's victory. A bilingual inscription (Greek and Parthian) was carved on the statue, which recounts Vologases IV's conquest of Characene:
"In the year of the Greeks 462 (151 AD) the King of Kings Arsaces Vologases, son of Mithridates king, led a military expedition into Mesene against Mithridates king, son of previous ruler Pacorus, and after king Mithridates had been expelled from Mesene, became the ruler of all of Mesene and of this bronze statue of the god Heracles, which he himself transported from Mesene, placed in this Sanctuary of the god Apollo who guards the Bronze Door.""
(source : Vologases IV (r 147-191), Wikipedia)
3) 아달라 이사금 (AD 154-184)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AD 164 : 백제에 의한 금성의 일시적인 파괴
(2) AD 165-167, AD 170, 172 : 백제와의 전쟁 및 전염병
(3) AD 167 : 한수를 넘은 신라의 공격과 백제의 강화 요청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 본기
一年春二月 아달라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154)
一年春三月 계원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다
三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계립령의 길을 열다 (AD 156)
四年春二月 감물과 마산의 두 현을 설치하다
四年春三月 장령진에 순행하다 (AD 157)
五年春三月 죽령을 열고, 왜인이 예방하다 (AD 158)
七年夏四月 알천의 물이 넘치다 (AD 160)
八年秋八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九年 사도성에 순행하다 (AD 162)
十一年春二月 용이 서울에 나타나다 (AD 164)
十二年冬十月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 백제로 망명하다 (AD 165)
十三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166)
十四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함락시키다 (AD 167)
十四年秋八月 군대를 보내니 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AD 167)
十五年夏四月 흥선을 이찬으로 삼다 (AD 168)
十七年春二月 시조묘를 중수하다 (AD 170)
十七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十七年冬十月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다 (AD 170)
十八年 봄에 백성들이 굶주리다 (AD 171)
十九年春一月 구도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를 일길찬으로 삼다 (AD 172)
十九年春二月 시조묘에 병고가 생기고 전염병이 돌다 (AD 172)
二十年夏五月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다 (AD 173)
二十一年春一月 흙비가 내리다 (AD 174)
二十一年春二月 우물이 마르다 (AD 174)
三十一年春三月 왕이 죽다 (AD 184)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아달라이사금)
아달라이사금은 박씨로서 마지막 왕이다. 다음 왕인 벌휴 이사금 (184-196)(석씨 왕)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달라 이사금 시기에 파르티마제국은 로마와 161-166기간에 전쟁을 한다. 여기에 165년 길선의 모반이 더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고 본다. 파르티마제국은 161년 로마제국에 최초로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하였다고 위키는 말한다.
(1) AD 164 : 백제에 의한 금성의 일시적인 파괴
十一年春二月 용이 서울에 나타나다 (AD 164)
용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위 은유적인 표현은 서울에 백제군이 쳐들어 왔다는 표현으로 추정된다. 아래 파르티마 자료에서 파르티마제국이 165년 또는 166년에 Seleucia의 수도와 Ctesiphon (바그다드 근처)을 일시적으로 파괴당한 것으로 서술된다. 크테시폰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추정된다.
"161년 볼로가세스 1세가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로마군을 공격하여 에데사를 점령하고 시리아를 약탈하였다. 163년 로마 장군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을 몰아내고 로마에게 호의적인 속국 정부를 세웠다. 이듬해 (164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두라-에우로포스와 셀레우키아에서 파르티아를 패퇴시키고 크테시폰을 파괴했다. 그러나 당시 파르티아를 휩쓸었던 역병(천연두로 추정됨)이 로마군에 번져 로마군은 후퇴해야 했다."
(자료 : 위키백과, 로마-파르티마 전쟁)
(2) AD 165-167, AD 170, 172 : 백제와의 전쟁 및 전염병
"十二年冬十月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 백제로 망명하다 (AD 165)
十四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함락시키다 (AD 167)
十四年秋八月 군대를 보내니 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AD 167)<
十七年冬十月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다 (AD 170)
十九年春二月 시조묘에 병고가 생기고 전염병이 돌다 (AD 172)"
(자료 : 삼국사기, 신라 아달라이사금 (AD 154-184), 나무위키)
167년에는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하였고, (백제 초고왕 (167-214), 위키백과)
AD 165년 아찬 길선의 반란은 AD 164년 용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서술에 이어 나타난다. 백제군이 크테시폰(서울)까지 들어 오니, 아찬 길선이 모반을 꾀하고 백제에 협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어 167년 백제가 신라를 역습하여 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천여명을 잡아갔다고 했는데, 아래 위키자료에서도 유사한 시기에 로마가 두 지역(Media and Adiabene)을 점령한 것으로 기술된다.
이 직후 신라에서 2만8천의 군사를 동원해 공격하니 백제가 화해를 했다고 서술된다. 이러한 상황은 위키에서는 166년 Seleucia에서 발생한 페스트때문에 로마군에 큰 손실이 나서 철수하고 화해했다고 하며, 대신 북메소포타미아지역을 로마지역으로 했다고 서술된다. 다소 연대의 차이가 있지만 신라에서도 172년 전염병이 돌았다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The Parthian capitals of Seleucia and Ctesiphon were captured by the Roman general Avidius Cassius in 165 or 166. Most likely around the same time, Roman legions invaded Media and Adiabene. However, the Romans suffered heavy losses from a plague erupting from Seleucia in 166, forcing them to withdraw. The war ended soon afterward, with Vologases IV losing most of northern Mesopotamia to the Romans."(source : Wikipedia, Vologases IV(r 147-191))
(3) AD 167 : 한수를 넘은 신라의 백제에 대한 공격과 강화조약
"十四年秋七月, 百濟襲破國西二城, 虜獲民口一千而去. 八月, 命一吉湌興宣領兵二萬伐之, 王又率騎八千自漢水臨 之. 百濟大懼, 還其所掠男女乞和." (삼국사기 원문)
"12년(165년)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치자 왕은 백제에 길선의 신병을 요구했으나 백제는 거절했고, 이에 왕이 몸소 백제 원정을 나섰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2년 뒤인 14년(167년) 7월 백제가 신라를 역습해 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잡아갔으며, 8월에는 일길찬(一吉湌) 흥선을 시켜 군사 2만으로 백제를 공격하고 왕은 8천 기(騎)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넜으며, 이에 백제는 노략한 주민들을 반환하고 강화를 청하였다고 한다." (위키백과, 아달라이사금)
여기서 한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한수가 한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수는, 파르티마 제국과 로마의 충돌 상황을 참조하면, 아르메니아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 어디인가로 판단되는데, 그동안 Kura River를 한강으로 추정한 필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온조왕은 BC 4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했다. 그래서 백제의 한성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수가 설립한 앙카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지역 지리를 다시 살펴 보았다.
필자는 여기서 한수는 Aras River가 아닌가 한다. 한수를 한강으로 추정할 때, 우리는 흔히 북한강, 남한강, 북한산성, 남한산성의 두가지를 항상 언급한다. Kura River가 북한강이고 바로 그 밑에 있는 Aras River가 남한강이 아닌가 한다. 두 강은 모두 카스피해쪽 즉 동으로 흐른다. 따라서 남한강인 Aras River도 한수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병력을 언급한다. 즉 신라는 3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백제가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일시적인 강화를 요청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 아달라 이사금에 대한 참고 자료
"12년(165년)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했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치자 왕은 백제에 길선의 신병을 요구했으나 백제는 거절했고, 이에 왕이 몸소 백제 원정을 나섰으나 공성전을 벌이던 중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2년 뒤인 14년(167년) 7월 백제가 신라를 역습해 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잡아갔으며, 8월에는 일길찬(一吉湌) 흥선을 시켜 군사 2만으로 백제를 공격하고 왕은 8천 기(騎)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넜으며, 이에 백제는 노략한 주민들을 반환하고 강화를 청하였다고 한다. (길선의 모반 사건은 신라 역사상 최초의 「반란」이었다).
17년(170년) 봄 2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중수하였다.
10월에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공하였다.
19년(172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波珍湌),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구도는 훗날 김씨로서 최초의 신라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미추(味鄒)의 아버지이다.
20년(173년) 음력 5월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왔다.
이후 10년간 기록을 남기지 않다가 31년(184년) 봄 3월에 왕은 사망하였다.
사인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내해 이사금이 아달라왕 사후 12년 만에 왕위에 올른 것과 그의 생모가 내례부인이란 것을 감안할때, 이매가 아달라 이사금의 아내 내례부인 과 모종의 일이 있었고, 이에 아달라왕과 이매의 아버지 벌휴 이사금 사이에 내분이 있었고, 결국 아달라 이사금은 패배하여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자료: 아달라이사금, 위키백과)
- 아달라이사금으로 판단되는 파르티마제국의 Vologases IV에 대한 참고 자료
"When Marcus Aurelius became the new Roman emperor in 161, Vologases IV unexpectedly declared war against the Romans, marking the only time in a Roman-Parthian conflict where the Parthians declared war. Vologases IV invaded Armenia and replaced its Roman client king Sohaemus with his own son Pacorus.
At the same time, an unanticipated Parthian invasion of Syria led to the defeat of the Roman soldiers assigned there. Confident, Vologases IV declined an offer for peace by the Romans in 162. Although the Roman–Parthian War of 161–166 started auspiciously for the Parthians, after the Romans recovered from the first shock and setbacks, they counterattacked, restored Sohaemus to the Armenian throne in 163. Around the same time, the Parthians captured Edessa and installed Wa'el as puppet king. Ma'nu VIII, the legitimate king, was forced to flee to the Roman Empire. The Parthian forces were pushed out of Syria, in 164, and also lost Dura-Europos, which led many Parthian vassal rulers to desert Vologases IV. The Romans laid siege to Edessa in 165; during the siege, the citizens of the city massacred the Parthian garrison and opened its gates to the Romans. The Romans entered the city and restored Ma'nu VIII as ruler of Edessa/Osroene; he also received the epithet Philorhomaios ("Friend of the Romans").
The Parthian capitals of Seleucia and Ctesiphon were captured by the Roman general Avidius Cassius in 165 or 166. Most likely around the same time, Roman legions invaded Media and Adiabene. However, the Romans suffered heavy losses from a plague erupting from Seleucia in 166, forcing them to withdraw. The war ended soon afterward, with Vologases IV losing most of northern Mesopotamia to the Romans. After Sohaemus' death in 180, Vologases IV's son managed to gain the Armenian throne as Vologases II (r. 180–191).
The end of Vologases IV's reign was marred by the revolt of Osroes II in 190, who minted coins of himself at Ecbatana in Media. However, Vologases IV' son, Vologases II, succeeded him, and appears to have quickly put down Osroes II, ascending the throne as Vologases V."
(source : Wikipedia, Vologases IV (r 147-191))
4) 벌휴 이사금 (184-196)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AD 188-190 : 백제와의 전쟁
(2) AD 186, 193, 194 : 일식현상과 정변
(3) AD 191 : 치우기의 등장(신라, 백제)
<벌휴이사금 삼국사기 자료>
一年春三月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다 (AD 184)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소문국을 정벌하다 (AD 185)
三年春一月 주·군을 순행하다
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86)
三年秋七月 상서로운 벼 이삭을 바치다
四年春三月 토목 공사로 하여 농사의 시기를 뺏는 일이 없도록 하다
四年冬十月 북쪽 지방에 큰 눈이 오다
五年春二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오자 구도에게 막도록 하다 (AD 188)
六年秋七月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다 (AD 189)
七年秋八月 구도를 부곡성주로 좌천시키다 (AD 190)
八年秋九月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나다 (AD 191)
九年春一月 국량을 아찬으로 삼고 술명을 일길찬으로 삼다
九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九年夏五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193)
十年春三月 한기부의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다 (AD 193)
十年夏六月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 (AD 193)
十一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94)
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AD 196)
十三年春三月 가물다
十三年夏四月 왕이 죽다 (AD 196)
(자료 : 벌휴이사금, 삼국사기, 나무위키)
(1) AD 188-190 : 백제와의 전쟁
五年春二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오자 구도에게 막도록 하다 (AD 188)
六年秋七月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다 (AD 189)
七年秋八月 구도를 부곡성주로 좌천시키다 (AD 190)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파르티마제국 자료에는 이 시기의 전쟁에 대해 언급이 없다. 소규모 전쟁으로 판단된다.
아래 위키 기록을 보면 그 규모가 작음을 알 수 있다. AD 190년 구도가 5백기의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다고 했다. 지난 아달라이사금 시기에는 8천의 기병을 움직였다고 했다.
"185년 음력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해 소문국(召文國)을 치게 하였다.
188년 음력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니, 파진찬 구도에게 명해 군사를 내 막게 하였다.
이듬해인 189년 음력 7월 구도가 백제군을 상대로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에 190년 음력 8월 백제가 다시 공격해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했다. 구도가 5백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패배하니, 이사금은 구도의 벼슬을 깎고 설지(薛支)를 그 자리에 앉혔다."
(자료 : 위키백과, 벌휴이사금(r 184-196))
189년 음력 7월에는 구양(狗壤)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190년 신라 서쪽 국경에 있던 원산향(圓山鄕)을 공격하였고,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와산(蛙山)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
(자료: 위키백과, 백제, 초고왕)
(2) AD 186, 193, 194 : 일식현상 - 정변
벌휴이사금 시기에는 3번의 일식현상이 있었다. 정변이 계속 일어나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었음을 말해 준다.
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86)十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193)
十一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94) (신라, 벌휴이사금)
AD 186년의 일식은 아래 자료의 Osroes II와 관련된 반란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곧 AD 190년 제압되었다. AD 193-194년 일식은 Vologases V가 로마 황제들의 권력다툼에 간여 하고 또 Adiabene와 Osroene지역의 로마 식민지에 간섭하면서 생긴 혼란 상황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Vologases ascended the Parthian throne in 191 after the death of his father Vologases IV, passing the Armenian throne to his son Khosrov I (r. 191–217). It is uncertain if the transition of power was peaceful or if Vologases took the throne in a civil war. Vologases' succession, however, was not uncontested; a rival king, Osroes II (190), had already set himself up in Media before the death of the previous ruler, but Vologases appears to have quickly put him down. .....
Vologases supported Emperor Pescennius Niger (r. 193–194) in his struggle for the Roman throne against Emperor Septimius Severus (r. 193–211) in 192–193, during the Year of the Five Emperors. Furthermore, he also intervened in the affairs of the Roman vassal states in northern Mesopotamia—Adiabene and Osroene. Because of this, Septimius Severus, who emerged victorious in the struggle, attacked the Parthian Empire in 195. Severus advanced into Mesopotamia, made Osroene a Roman province, and captured the Parthian capital Ctesiphon in 199. At the same time, revolts were occurring in the Parthian provinces of Media and Pars."
(source : Vologases V (r 191-208), wikipedia)
(3) AD 191 : 치우기의 등장(신라, 백제)
八年秋九月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나다 (AD 191) (신라, 벌휴이사금)
二十六年秋九月 치우기가 각·항에 나타나다 (AD 191) (백제, 초고왕)
AD 191년 신라와 백제에 동시에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났다고 했다. 치우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겠으나, 전쟁의 신 치우를 고려하면 혼란한 전쟁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로마는 5황제의 시대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며, 파르티마제국은 이러한 백제의 내분에 관여하여 일부의 편을 들은 것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경계지역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도 관여한다. 그래서 또한 로마가 파르티마를 공격하는 전쟁이 AD 195년 벌어진다. (아래 자료 참조)
"Vologases supported Emperor Pescennius Niger (r. 193–194) in his struggle for the Roman throne against Emperor Septimius Severus (r. 193–211) in 192–193, during the Year of the Five Emperors. Furthermore, he also intervened in the affairs of the Roman vassal states in northern Mesopotamia—Adiabene and Osroene. Because of this, Septimius Severus, who emerged victorious in the struggle, attacked the Parthian Empire in 195."
- 벌휴 이사금 (184-196) 참고 자료
벌휴가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및 그 해의 풍흉을 예지하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
185년 음력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임명해 소문국(召文國)을 치게 하였다.
188년 음력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니, 파진찬 구도에게 명해 군사를 내 막게 하였다.
이듬해인 189년 음력 7월 구도가 백제군을 상대로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에 190년 음력 8월 백제가 다시 공격해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했다. 구도가 5백 기병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패배하니, 이사금은 구도의 벼슬을 깎고 설지(薛支)를 그 자리에 앉혔다.
193년 왜인 1천여 명이 기아를 피해 대규모로 신라에 도망왔다."
(자료 : 위키백과, 벌휴이사금(r 184-196))
- Vologases V (r 191-208) 참고 자료
Vologases V (Parthian: ???? Walagash) was King of Kings of the Parthian Empire from 191 to 208 AD. As king of Armenia (r. 180–191), he is known as Vologases II. Not much is known about his period of kingship of the Armenia, except that he put his son Rev I (r. 186–216) on the Iberian throne in 189. Vologases succeeded his father Vologases IV a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in 191; it is uncertain if the transition of power was peaceful or if Vologases took the throne in a civil war. When Vologases acceded the Parthian throne, he passed the Armenian throne to his son Khosrov I (r. 191–217).
Vologases' reign was marked by war with the Roman Empire, lasting from 195 to 202, resulting in the brief capture of the Parthian capital of Ctesiphon, and reaffirmation of Roman rule in Armenia and northern Mesopotamia. At the same time, internal conflict took place in the Parthian realm, with the local Persian dynast Pabag seizing Istakhr, the capital of the southern Iranian region of Persis. .....
King of Armenia
During Vologases' early life, he became the ruler of Armenia, succeeding Sohaemus. Throughout the 1st and 2nd-centuries, the Armenian throne was usually occupied by a close relative of the Parthian King of Kings, who held the title of "Great King of Armenia". According to the 5th-century Armenian historian Agathangelos, the king of Armenia had the second rank in the Parthian realm, below only to the Parthian king. The modern historian Lee E. Patterson suggests that Agathangelos may have exaggerated the importance of his homeland. Unlike the previous eight Arsacid princes who ruled Armenia, Vologases managed to ensure his descendants ruled on the Armenian throne; they would rule the country until the Sasanian abolition of the Armenian throne in 428 AD. During Vologases' rule in Armenia, he managed in 189 to impose his son Rev I (whose mother was the sister of the Pharnavazid ruler Amazasp) on the Iberian throne. His descendants would rule Iberia until 284 when it was replaced by another Parthian family, the Mihranid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Vologases ascended the Parthian throne in 191 after the death of his father Vologases IV, passing the Armenian throne to his son Khosrov I (r. 191–217). It is uncertain if the transition of power was peaceful or if Vologases took the throne in a civil war. Vologases' succession, however, was not uncontested; a rival king, Osroes II (190), had already set himself up in Media before the death of the previous ruler, but Vologases appears to have quickly put him down.
Coin of the Roman emperor Septimius Severus
Vologases supported Emperor Pescennius Niger (r. 193–194) in his struggle for the Roman throne against Emperor Septimius Severus (r. 193–211) in 192–193, during the Year of the Five Emperors. Furthermore, he also intervened in the affairs of the Roman vassal states in northern Mesopotamia—Adiabene and Osroene. Because of this, Septimius Severus, who emerged victorious in the struggle, attacked the Parthian Empire in 195. Severus advanced into Mesopotamia, made Osroene a Roman province, and captured the Parthian capital Ctesiphon in 199. At the same time, revolts were occurring in the Parthian provinces of Media and Pars. Septimius Severus now declared himself Parthicus Maximus ("great victor in Parthia"). He was, however, unable to maintain his conquests, due to lack of food supplies and reinforcements. As a result, he withdrew his forces; during his withdrawal, he attempted in vain to conquer the Arab fortress of Hatra twice, later withdrawing his forces to Syria.
In 202, peace was restored, reaffirming Roman rule in Armenia and northern Mesopotamia. The Iranologist Touraj Daryaee argues that the reign of Vologases was "the turning point in Arsacid history, in that the dynasty lost much of its prestige." The kings of Persis were now unable to depend on their weakened Arsacid overlords. Indeed, in 205/6, Pabag, a local ruler in Persis, rebelled and overthrew his overlord Gochihr, taking the Persis capital Istakhr for himself. His son Ardashir I would go on to continue his conquests, overthrowing the Parthian Empire and establishing the Sasanian Empire in 224.
Vologases died in 208, succeeded by his son Vologases VI (r. 208–228), however another son, Artabanus IV (r. 216–224), attempted to seize the throne a few years later, resulting in a civil war.
(source : Vologases V (r 191-208), Wikipedia)
- 백제 초고왕 (재위 AD 166-214) 시기의 참고 자료
선왕(先王) 시절인 155년에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망명해온 아찬(阿飡) 길선(吉宣)의 송환문제로 양국 사이에 불화가 생겼으며 개루왕의 즉위 후에도 신라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89년 음력 7월에는 구양(狗壤)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190년 신라 서쪽 국경에 있던 원산향(圓山鄕)을 공격하였고,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와산(蛙山)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204년에는 신라의 요차성(腰車城, 요거성)을 함락하고 성주(城主)인 설부(薛夫)를 죽였다.
또,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을 쌓아 동부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214년 북부출신 진과(眞果)에게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여 탈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갈의 날랜 기병으로 인해 술천(述川) 지역까지 침범 당하기도 하였다.
(자료: 위키백과, 초고왕)
5) 내해이사금 (196-230)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199-224 백제와의 전쟁과 금성의 일시적 함락
(2) AD 201-212 : 가야국과의 화친
(3) AD 209-212 : 가라 - 포상팔국의 난 진압지원
(4) AD 208 : 왜와의 전쟁
(5) AD 203 : 말갈과의 전쟁
(6) AD 200-214 : 잦은 반란과 정변
(7) AD 229 : 사산왕조로의 전환
<삼국사기 내해이사금 자료>
一年夏四月 나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다 (AD 196)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배알하다
三年夏四月 버드나무가 스스로 일어나다
三年夏五月 수해를 입은 주·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해주다
三年秋七月 사자를 보내 위로하다
四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다 (AD 199)
五年秋七月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五年秋九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200)
六年春二月 가야국이 화친을 청하다 (AD 201)
六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201)
八年冬十月 말갈이 변경을 침범하다 (AD 203)
十年春二月 진충을 일벌찬으로 삼다
十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다
十年秋八月 여우가 금성과 시조 묘의 뜰에서 울다 (AD 205)
十二年春一月 왕자 이음을 이벌찬으로 삼다
十三年春二月 서쪽의 군읍에 순행하다
十三年夏四月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자 이벌찬 이음을 보내 막다 (AD 208)
十四年秋七月 포상의 여덟 나라가 가라를 침입하자 이를 구하다 (AD 209)
十五年 봄과 여름에 가물어 죄수들을 사면해 주다
十六年春一月 훤견을 이찬으로, 윤종을 일길찬으로 삼다
十七年春三月 가야가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다 (AD212)
十七年夏五月 큰 비가 내리다 (AD 212)
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다 (AD 214)
十九年秋七月 백제가 요거성에 쳐들어오자 사현성을 함락시키다 (AD 214)
十九年冬十二月 천둥이 치다 (AD 214)
二十三年秋七月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자 왕이 이를 물리치다 (AD 218)
二十五年春三月 이벌찬 이음이 죽자 충훤을 이벌찬으로 삼다 (AD 220)
二十五年秋七月 양산 서쪽에서 사열하다 (AD 220)
二十七年夏四月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를 해치다
二十七年冬十月 이벌찬 충훤이 백제군에 패하자 진주로 좌천시키다 (AD 222)
二十九年秋七月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싸워 이기다 (AD 224)
二十九年秋八月 봉산성을 쌓다 (AD 224)
三十一年秋七月 날이 가물자 백성들을 진휼하다
三十一年冬十月 죄수를 사면하다
三十二年春二月 서남의 군읍을 순수하고 돌아오다
三十二年春三月 파진찬 강훤을 이찬으로 삼다 (AD 227)
三十四年夏四月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다 (AD 229)
三十四年秋九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四年冬十月 큰 눈이 오다
三十五年春三月 왕이 죽다 (AD 230)
(자료 : 내해이사금, 나무위키)
(1) AD 199-224 백제와의 전쟁과 금성의 일시적 점령
- 四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다 (AD 199)
十年秋八月 여우가 금성과 시조 묘의 뜰에서 울다 (AD 205)
아래 파르티마 자료에 의하면 AD 195년부터 202년까지 로마와의 전쟁이 있었고, 잠시나마 수도인 Ctesiphon이 점령(AD 199)되었으며, 아르메니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로마가 통치지역으로 확인했다고 서술된다.
"Vologases' reign was marked by war with the Roman Empire, lasting from 195 to 202, resulting in the brief capture of the Parthian capital of Ctesiphon, and reaffirmation of Roman rule in Armenia and northern Mesopotamia."
(source : Vologases V(191-208), Wikipedia)
十九年秋七月 백제가 요거성에 쳐들어오자 사현성을 함락시키다 (AD 214)
二十三年秋七月 백제가 장산성을 포위하자 왕이 이를 물리치다 (AD 218)
이때의 신라 즉 파르티마는 Vologases VI에서 Artabanus IV로 권력이동이 되는 혼란한 상황(AD 214)이다. 이런 상황을 백제가 이용한 전쟁이 아니었나 판단된다. 그러나 백제가 패배한 후 평화조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황제 카라칼라는 마지막으로 대 파르티아 전쟁을 일으켜 216년 아르벨라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카라칼라가 암살된 후 후임이 된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파르티아에 패하여 카라칼라가 입힌 피해에 대해 배상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자료 위키, 로마 파르티마 전쟁)
"The Roman emperor Caracalla sought to take advantage of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brothers.....
Caracalla thus chose to preoccupy himself with an invasion of Armenia. He appointed a freedman named Theocritus as the leader of the invasion, which eventually ended in a disaster."
(source : Vologases VI, wikipedia)
"Artabanus soon clashed with Caracalla, whose forces he managed to contain at Nisibis in 217. Peace was made between the two empires the following year, with the Arsacids keeping most of Mesopotamia."
(source : Artabanus IV, wikipedia)
- 二十七年冬十月 이벌찬 충훤이 백제군에 패하자 진주로 좌천시키다 (AD 222)
二十九年秋七月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싸워 이기다 (AD 224)
AD 224년에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창시자가 되는 Aradasir I가 Artabanus IV를 제거하고 파르티마제국의 왕으로 등장하는 때이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파르티마가 혼란 중에 로마(백제)와의 완충지대 싸움에서 패하였으나, Ardashir I의 등장으로 다시 강한 나라(신라)가 되는 모습으로 보인다.
(2) AD 201-212 : 가야와의 화친과 포상팔국의 난 진압 지원
六年春二月 가야국이 화친을 청하다 (AD 201)
十四年秋七月 포상의 여덟 나라가 가라를 침입하자 이를 구하다 (AD 209)
十七年春三月 가야가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다 (AD212)
이러한 로마(백제)와 파르티마(신라)의 아르메니아 지역,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둘러싼 각축전 속에서 가야의 입장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래서 신라와 화친정책을 청했을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신라는 가야의 1, 2차 포상팔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도와 주고, 결국 가야는 위성국으로 전락해 볼모를 보내는 상황에 처한다.
"209 년 :고자국, 사물국, 보라국, 골포국, 칠포국 등 8개의 소국이 금관국 또는 안라국을 치고 신라가 이를 도와 제압함
212년 : | 2차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나나 신라의 도움으로 제압" |
(자료 : 가야, 위키)
(4) AD 208 : 왜와의 전쟁
十三年夏四月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자 이벌찬 이음을 보내 막다 (AD 208)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로마)의 5황제시대 등 혼란상황을 틈타, 신라의 위세가 백제와의 완충지역인 아르메니아, 북부 메소포타니아지역에서 높아지자, 가야와 마찬가지로 신라와 가까이 있게 된 왜도 위협을 느껴 신라의 변경을 침범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5) AD 203 : 말갈과의 전쟁
八年冬十月 말갈이 변경을 침범하다 (AD 203)
말갈은 이 즈음부터 백제에의 침략이 잦았다.그래서 백제 초고왕은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을 쌓아 동부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여기서 북한강은 코카서스산맥아래 Kura River로 추정된다. 백제와 접한 신라는 그래서 동시에 말갈의 변경 침략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6) AD 200-214 : 잦은 반란 및 정변
五年秋九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200)
六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201)
十年秋八月 여우가 금성과 시조 묘의 뜰에서 울다 (AD 205)
十九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다 (AD 214)
十九年冬十二月 천둥이 치다 (AD 214)
AD 200-201년의 일식현상은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Media와 Pars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보이며, AD 205년 현상은 Persis에서 일어난 지역반란으로 추정된다.
"Severus advanced into Mesopotamia, made Osroene a Roman province, and captured the Parthian capital Ctesiphon in 199. At the same time, revolts were occurring in the Parthian provinces of Media and Pars....
At the same time (205/206), internal conflict took place in the Parthian realm, with the local Persian dynast Pabag seizing Istakhr, the capital of the southern Iranian region of Persis."
(source : Vologases V(r 191-208), Wikipedia)
AD 214년 현상은 Vologases V후 Vologases VI(208-213)와 Artabanus IV (213-224) 권력이동 상황에서의 권력다툼 정변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 참조)
"Vologases VI succeeded his father Vologases V as king in c. 208. His rule was unquestioned for a few years, till his brother Artabanus IV rebelled. The dynastic struggle between the two brothers most likely started in c. 213. Artabanus successfully conquered much of the empire, including Media and Susa. Vologases VI seems to have only managed to keep Seleucia, where he minted coins."
(source : Vologases VI (208-213), wikipedia)
(7) AD 229 : 사산왕조로의 전환 : Vologases VI -> Ardashir I
三十四年夏四月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다 (AD 229)
AD 229년 이 현상은 후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창시자가 되는 Ardashir I (r 224-242)에 의해 패배하여 쫓겨나는 Vologases VI을 의미한다고 판단한다. (아래 자료 참조) . 7가문의 귀족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 들이는 것을 보면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그 이전의 파르티마제국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신라의 연속인 것이다.
"A few years later (224), Ardashir I (r. 224–242), the founder of the Sasanian dynasty, defeated and killed Artabanus, thus putting an end to the Parthian Empire. Over the next few years, Ardashir I further expanded his new empire, and must have driven out or defeated Vologases in Mesopotamia soon after 228."
(source : Ardashir I (r 224-242), wikipedia)
"Vologases VI was driven out of Mesopotamia by Ardashir I's forces soon after 228. The leading Parthian noble-families (known as the Seven Great Houses of Iran) continued to hold power in Iran, now with the Sasanians as their new overlords. The early Sasanian army (spah) was identical to the Parthian one. Indeed, the majority of the Sasanian cavalry were composed of the very Parthian nobles that had once served the Arsacids."
(source : Vologases VI (r 208-213), wikipedia)
- 내해이사금 (196-230) 참고 자료
내해 이사금(奈解 泥師今, ? ~230년, 재위: 196년~230년)은 신라의 제10대 왕이며, 이사금의 칭호를 사용한 8번째 왕이다. 다른 이름은 엽(燁)이다.
재위중 자주 백제의 침입을 받았다. 214년 백제군이 요차성(腰車城)을 공격해오자 반격에 나서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218년 백제가 장산성(獐山城)에 침입해오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했다. 이밖에 가야와 밀접한 교류를 했다.
- 199년 음력 7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 201년 음력 2월 가야와 화친을 요청하였다.
- 203년 음력 10월에는 말갈의 공격을 받았다.
- 207년 왕자 이음(利音), 혹은 내음(奈音)을 이벌찬으로 임명했다.
- 208년 음력 2월 왜가 국경을 침범하자 이음을 보내 막게 하였다.
- 209년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략하고자 해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해 진한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였다. 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여를 구해냈다.
- 212년 가야의 왕자를 볼모로 받았다.
- 214년 음력 7월 백제가 요거성(腰車城)을 공격, 요거성주 설부(薛夫)를 죽이자, 이음을 보내 6천여 병사로 백제를 치게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였다.
- 218년 백제가 다시 공격해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이사금이 친정하여 격퇴하였다.
- 220년 왕자이자 이벌찬인 이음이 죽어 충훤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 222년 음력 10월 백제가 우두주(牛頭州)를 공격, 충훤이 막았으나 웅곡(熊谷)에서 적에 피해 홀로 도망치니, 이사금이 충훤을 강직시키고 연진을 새 이벌찬으로 삼았다.
- 224년 연진은 음력 7월 봉산(烽山) 아래에서 백제와 싸워 승리하고 1천기를 죽이고 사로잡은 뒤 음력 8월 봉산에 성을 쌓았다.
(자료 : 위키백과, 내해이사금)
- 백제의 초고왕 참고자료
204년에는 신라의 요차성(腰車城, 요거성)을 함락하고 성주(城主)인 설부(薛夫)를 죽였다.
또,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210년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을 쌓아 동부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214년 북부출신 진과(眞果)에게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여 탈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갈의 날랜 기병으로 인해 술천(述川) 지역까지 침범 당하기도 하였다.
(자료: 위키백과, 초고왕)
- 백제 구수왕 (재위 AD 214-234) 시기의 참고자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말갈·신라 등과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나, 대부분 백제의 참패로 끝난다. 또, 재위 말에는 혹심한 가뭄이나 기근 등의 재난이 겹치기도 했다.
216년 음력 8월에 말갈이 적현성(赤峴城)을 침범하였으나 성주가 굳게 지켜 막아 물러가게 했고,
왕이 기병 8백명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크게 이겼다.
217년 음력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赤峴城)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218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신라 내해 이사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백제군이 패하였다.
(자료 : 위키백과, 구수왕)
- 로마 - 파르티마 전쟁 참고 자료
195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또다시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셀레우키아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197년에는 또다시 크테시폰을 파괴했다. 이 전쟁으로 로마는 니시비스와 싱가라 주변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영토를 획득했다.
황제 카라칼라는 마지막으로 대 파르티아 전쟁을 일으켜 216년 아르벨라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카라칼라가 암살된 후 후임이 된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파르티아에 패하여 카라칼라가 입힌 피해에 대해 배상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자료 : 위키백과, 로마 파르티마 전쟁)
- Vologases V 참고 자료
Vologases V (Parthian: ???? Walagash) was King of Kings of the Parthian Empire from 191 to 208 AD. As king of Armenia (r. 180–191), he is known as Vologases II. Not much is known about his period of kingship of the Armenia, except that he put his son Rev I (r. 186–216) on the Iberian throne in 189. Vologases succeeded his father Vologases IV a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in 191; it is uncertain if the transition of power was peaceful or if Vologases took the throne in a civil war. When Vologases acceded the Parthian throne, he passed the Armenian throne to his son Khosrov I (r. 191–217).
Vologases' reign was marked by war with the Roman Empire, lasting from 195 to 202, resulting in the brief capture of the Parthian capital of Ctesiphon, and reaffirmation of Roman rule in Armenia and northern Mesopotamia. At the same time, internal conflict took place in the Parthian realm, with the local Persian dynast Pabag seizing Istakhr, the capital of the southern Iranian region of Persis.
King of Armenia
During Vologases' early life, he became the ruler of Armenia, succeeding Sohaemus. Throughout the 1st and 2nd-centuries, the Armenian throne was usually occupied by a close relative of the Parthian King of Kings, who held the title of "Great King of Armenia". According to the 5th-century Armenian historian Agathangelos, the king of Armenia had the second rank in the Parthian realm, below only to the Parthian king. The modern historian Lee E. Patterson suggests that Agathangelos may have exaggerated the importance of his homeland. Unlike the previous eight Arsacid princes who ruled Armenia, Vologases managed to ensure his descendants ruled on the Armenian throne; they would rule the country until the Sasanian abolition of the Armenian throne in 428 AD. During Vologases' rule in Armenia, he managed in 189 to impose his son Rev I (whose mother was the sister of the Pharnavazid ruler Amazasp) on the Iberian throne. His descendants would rule Iberia until 284 when it was replaced by another Parthian family, the Mihranid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Vologases ascended the Parthian throne in 191 after the death of his father Vologases IV, passing the Armenian throne to his son Khosrov I (r. 191–217). It is uncertain if the transition of power was peaceful or if Vologases took the throne in a civil war. Vologases' succession, however, was not uncontested; a rival king, Osroes II (190), had already set himself up in Media before the death of the previous ruler, but Vologases appears to have quickly put him down.
Vologases supported Emperor Pescennius Niger (r. 193–194) in his struggle for the Roman throne against Emperor Septimius Severus (r. 193–211) in 192–193, during the Year of the Five Emperors. Furthermore, he also intervened in the affairs of the Roman vassal states in northern Mesopotamia—Adiabene and Osroene. Because of this, Septimius Severus, who emerged victorious in the struggle, attacked the Parthian Empire in 195. Severus advanced into Mesopotamia, made Osroene a Roman province, and captured the Parthian capital Ctesiphon in 199. At the same time, revolts were occurring in the Parthian provinces of Media and Pars. Septimius Severus now declared himself Parthicus Maximus ("great victor in Parthia"). He was, however, unable to maintain his conquests, due to lack of food supplies and reinforcements. As a result, he withdrew his forces; during his withdrawal, he attempted in vain to conquer the Arab fortress of Hatra twice, later withdrawing his forces to Syria.
In 202, peace was restored, reaffirming Roman rule in Armenia and northern Mesopotamia. The Iranologist Touraj Daryaee argues that the reign of Vologases was "the turning point in Arsacid history, in that the dynasty lost much of its prestige." The kings of Persis were now unable to depend on their weakened Arsacid overlords. Indeed, in 205/6, Pabag, a local ruler in Persis, rebelled and overthrew his overlord Gochihr, taking the Persis capital Istakhr for himself. His son Ardashir I would go on to continue his conquests, overthrowing the Parthian Empire and establishing the Sasanian Empire in 224.
Vologases died in 208, succeeded by his son Vologases VI (r. 208–228), however another son, Artabanus IV (r. 216–224), attempted to seize the throne a few years later, resulting in a civil war.
(source : Vologases V (191-208), Wikipedia)
- Vologases VI 참고 자료
Vologases VI (Parthian: Walagash, Persian: بلاش, Balāsh) was the uncontested king of the Parthian Empire from 208 to 213, but afterwards fell into a dynastic struggle with his brother Artabanus IV, who by 216 was in control of most of the empire, even being acknowledged as the supreme ruler by the Roman Empire. Vologases VI continued to rule Seleucia until 221/2, and coin mints of him even appear in Mesopotamia until 228, when he was presumably defeated by the Sasanian Empire, who had previously defeated Artabanus IV and now succeeded the Parthians as the kings of Iran.
Vologases VI succeeded his father Vologases V as king in c. 208. His rule was unquestioned for a few years, till his brother Artabanus IV rebelled. The dynastic struggle between the two brothers most likely started in c. 213. Artabanus successfully conquered much of the empire, including Media and Susa. Vologases VI seems to have only managed to keep Seleucia, where he minted coins. The Roman emperor Caracalla sought to take advantage of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brothers. He tried to find a pretext to invade the Parthian Empire by requesting Vologases to send two refugees—a philosopher named Antiochus and a certain Tiridates, who was possibly either an Armenian prince or an uncle of Vologases. To the surprise of the Romans, Vologases had the two men sent to Caracalla in 215, thus denying him his pretext. Caracalla's choice of contacting Vologases instead of Artabanus shows that the Romans still saw him as the dominant king.
Caracalla thus chose to preoccupy himself with an invasion of Armenia. He appointed a freedman named Theocritus as the leader of the invasion, which eventually ended in a disaster. Caracalla then once again sought to start a war with the Parthians. In another attempt to gain a pretext, he requested Artabanus to marry his daughter, which he declined. It is disputed whether Caracalla's proposal was sincere or not. Caracalla's choice to contact Artabanus shows that the latter was now considered the dominant king over Vologases, who would rule a small principality centered around Seleucia until 221/2. A few years later (224), Ardashir I (r. 224–242), the founder of the Sasanian dynasty, defeated and killed Artabanus, thus putting an end to the Parthian Empire. Over the next few years, Ardashir I further expanded his new empire, and must have driven out or defeated Vologases in Mesopotamia soon after 228. Vologases had a son named Vachagan I, who founded the Arsacid dynasty of Caucasian Albania.
(Vologases VI (208-213), Wikipedia)
- Artabanus IV 참고 자료
Dynastic struggles and war with the Romans
In c. 208, Vologases VI succeeded his father Vologases V a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His rule was unquestioned for a few years, till his brother Artabanus IV rebelled. The dynastic struggle between the two brothers most likely started in c. 213. Artabanus successfully conquered much of the empire, including Media and Susa. Vologases VI seems to have only managed to keep Seleucia, where he minted coins. The Roman emperor Caracalla sought to take advantage of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brothers. He tried to find a pretext to invade the Parthian Empire by requesting Vologases to send two refugees—a philosopher named Antiochus and a certain Tiridates, who was possibly either an Armenian prince or an uncle of Vologases. To the surprise of the Romans, Vologases had the two men sent to Caracalla in 215, thus denying him his pretext. Caracalla's choice of contacting Vologases instead of Artabanus shows that the Romans still saw him as the dominant king.
Caracalla thus chose to preoccupy himself with an invasion of Armenia. He appointed a freedman named Theocritus as the leader of the invasion, which eventually ended in a disaster. Caracalla then once again sought to start a war with the Parthians. In another attempt to gain a pretext, he requested Artabanus to marry his daughter, which he declined. It is disputed whether Caracalla's proposal was sincere or not. Caracalla's choice to contact Artabanus shows that the latter was now considered the dominant king over Vologases, who would rule a small principality centered around Seleucia until 221/2. Artabanus soon clashed with Caracalla, whose forces he managed to contain at Nisibis in 217. Peace was made between the two empires the following year, with the Arsacids keeping most of Mesopotamia. However, Artabanus still had to deal with his brother Vologases, who continued to mint coins and challenge him.
War with the Sasanians
1840 illustration of a Sasanian relief at Firuzabad, showing Ardashir I's victory over Artabanus IV and his forces.
The Sasanian family had meanwhile quickly risen to prominence in their native Pars, and had now under prince Ardashir I begun to conquer the neighboring regions and more far territories, such as Kirman. At first, Ardashir I's activities did not alarm Artabanus, until later, when the Arsacid king finally chose to confront him. According to al-Tabari, whose work was probably based on Sasanian sources, Ardashir I and Artabanus agreed to meet in Hormozdgan at the end of the month of Mihr (April). Nonetheless, Ardashir I went to the place before due time to occupy an advantageous spot on the plain. There he dug out a ditch to defend himself and his forces. He also took over a spring at the place. Ardashir I's forces numbered 10,000 cavalry, with some of them wearing flexible chain armor akin to that of the Romans. Artabanus led a greater number of soldiers, who, however, were less disposed, due to wearing the inconvenient lamellar armor. Ardashir I's son and heir, Shapur I, as portrayed in the Sasanian rock reliefs, also took part in the battle. The battle was fought on 28 April 224, with Artabanus being defeated and killed, marking the end of the Arsacid era and the start of 427-years of Sasanian rule.
Aftermath
The chief secretary of Artabanus, Dad-windad, was afterwards executed by Ardashir I. Thenceforth, Ardashir I assumed the title of shahanshah ("King of Kings") and started the conquest of an area which would be called Iranshahr (Ērānshahr). He celebrated his victory by having two rock reliefs sculptured at the Sasanian royal city of Ardashir-Khwarrah (present-day Firuzabad) in his homeland, Pars. The first relief portrays three scenes of personal fighting; starting from the left, a Persian aristocrat seizing a Parthian soldier; Shapur impaling the Parthian minister Dad-windad with his lance; and Ardashir I ousting Artabanus IV. The second relief, conceivably intended to portray the aftermath of the battle, displays the triumphant Ardashir I being given the badge of kingship over a fire shrine from the Zoroastrian supreme god Ahura Mazda, while Shapur and two other princes are watching from behind.
Vologases VI was driven out of Mesopotamia by Ardashir I's forces soon after 228. The leading Parthian noble-families (known as the Seven Great Houses of Iran) continued to hold power in Iran, now with the Sasanians as their new overlords. The early Sasanian army (spah) was identical to the Parthian one. Indeed, the majority of the Sasanian cavalry were composed of the very Parthian nobles that had once served the Arsacids. Memories of the Arsacid Empire never completely vanished, with efforts trying to restore the empire in the late 6th-century made by the Parthian dynasts Bahram Chobin and Vistahm, which ultimately proved unsuccessful.
(source : Artabanus IV (r 213-224),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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