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그동안 신라의 위치에 대해 고심해왔다. 파사이사금이 있으니 페르시아 지방에 있는 것 확실하여, 그동안 페르시아 역사로 비교하며, 신라가 사산왕조 페르시아라는 것을 밝혔었다. 그러나 분명 이태리반도에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망설였었다. 그리고 그동안 의문을 품은 채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확실하게 판단되어 이글을 쓰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최근 신성로마제국 역사를 보면서 요나라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살수, 을지문덕 장군이 이룬 살수대첩의 장소를 스위스 북쪽 Saar river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또한 진흥왕 시기의 고구려 지역에 대한 점령이 이태리 북부 롬바르드왕국이라는 확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동안 신라에서의 태백산(발해 지리고에 의하면 태백산=백두산=장백산)에서의 제를 지낸 것, 살수에서의 고구려 신라의 전쟁, 스위스 쥬리히 근처의 신라하의 존재,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이 이태리 반도 위의 알프스산맥쪽으로 진군할 때, 신라의 삼국사기 기록에 동북쪽에 어두은 그림자가 생겼다는 기록, 그리고, 백제의 성왕으로 판단되는 Justinian I왕이 이태리 반도를 점령할 시, 페르시아에 있던 사산왕조의 시기어린 시선에 관한 기록, 그리고 장수왕의 신라 남쪽까지의 깊숙한 침범 기록과 고트족의 이태리 반도 점령, 그리고 500년경 신라의 동쪽으로의 이동, 신라에서의 빈번한 왜의 침입과 500년이후 신라에의 왜 침입의 사라짐, 백제의 한성백제 멸망과 유사한 기록이 475년 고트족의 프랑스의 지역에서의 점령 기록, 백제의 북위와의 전쟁 기록, 백제 온조왕 시기의 동서 동시의 존재 기록, 고구려 공격시 신라와 백제의 연합과 고트족 공격시 서로마 이태리반도의 지역과 발칸반도 동로마지역의 연합, 광개토태왕으로 추정되는 고트족의 Alaric I왕의 로마 입성 및 시실리아(왜의 임나성 지역), 튀니지아 카르타고 (왜의 가라성 지역) military campaign 등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II.본론
본론으로 들어 가서 이제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이는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여러 자료에 밑바탕이 되어 나온 결론이다.
1. 고구려 대무신왕(AD 44) 시기의 살수
아래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에 한나라 광무제가 살수 이남을 차지해 낙랑군으로 했다는 기록이다. 필자는 살수를 발견하기 전에 이미 낙랑군의 위치가 이태리 북부지방이라는 것을 밝혀 냈다. 이후 살수가 스위스 북쪽에 있는 Saar river라는 것이 밝힘으로써, 살수이남의 낙랑군(한사군의 하나)이 이태리북부지역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네이버 지식백과] 대무신왕 [大武神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2. AD 138, 신라의 일성 이사금의 태백산 순행 및 제사
신라의 일성이사금 시기 138 AD에 태백산에 순행하여 제사를 지냈다 하였다. 필자는 발해지리고 연구를 통해, 백두산=태백산=장백산이라는 것을 알았고, 백두산은 알프스산맥의 몽블랑산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북쪽으로 순행해 태백산에 제사를 지낸 신라는 이미 AD 138년 일성이사금시기부터 이태리 반도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일성 이사금 (134 - 154 : 20년) 본기
一年秋八月 일성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134)
一年秋九月 사면을 하다 (134)
二年春一月 시조 묘에 제사지내다 (AD 135)
三年春一月 웅선을 이찬으로 근종을 일길찬으로 임명하다 (AD 136)
四年春二月 말갈이 장령을 공격하다 (AD 137)
五年春二月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다 (138)
五年秋七月 알천 서쪽에서 사열하다 (AD 138)
五年冬十月 북쪽으로 순행해 태백산에 제사지내다 (AD 138)
六年秋七月 서리가 콩을 해치다 (139)
六年秋八月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다 (AD 139)
六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했다가 퇴각하다 (AD 139)
七年春二月 장령에 목책을 세우다 (AD 140)
八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41)
九年秋七月 말갈을 정벌하려다 중지하다 (AD 142)
(자료 : 일성이사금, 삼국사기,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3. 고구려 장수왕 시기(489년)의 신라 점령
고구려의 장수왕 시기 489년 신라의 호명성 등 7개성을 점령하고 미질부까지 진격했다는 아래 기록이 있다. 이시기에 이태리반도의 신라가 크게 밀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 문자왕 시기 494년에도 살수에서 신라와 고구려가 싸운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있었다는 추정이다. 468년 공격당한 신라의 실직주성도 이태리반도 북쪽 어디로 추정된다. 반면 백제의 위례성 함락은 발칸반도에 있는 위례성으로 추정되고, 동시에 한성백제의 한성은 프랑스 Clermont-Ferrand지역으로 추정된다. 475년 고트족은 이 도시를 공격하여 점하였다고 기록된다.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안정된 가운데 장수왕은 백제를 정벌하는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기 때문에 454년부터 신라와 적대관계가 되었다.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공하기도 하였다. 472년, 백제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전면전을 준비하는 한편 승려 도림(道琳)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내정을 정탐하였다. 도림은 바둑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사고 개로왕에게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사주하여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이러한 물밑작업을 마친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살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489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여 호명성 등 7개 성을 함락시키고 미질부까지 진격하였다. "
(자료 : 장수왕, 위키백과,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고구려하)
4. 고구려 문자왕 시기(494년)의 살수(薩水) 전투
고구려 문자왕 시기 494년에 살수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싸움이 있었다. 이때도 신라가 살수에서 싸운 것을 보면, 신라가 이태리반도에 아직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96년 고구려가 신라의 우산성을 함락시킨 후, 신라는 거의 이태리반도에서 물러난 듯 하다. 500년에 신라 소지마립간이 동부로 이동하여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났다는 시기에 신라가 이태리반도를 떠나 페르시아쪽으로 후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진흥왕 시기에 백제 성왕과 함께 다시 이태리 반도에 진출한다.
"16년(서기 494) 여름 4월, 홍수가 났다.
가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薩水)의 벌판에서 고구려와 싸웠다.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고 있었다. 고구려 병사가 그곳을 포위하자 백제왕 모대가 병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구원해주었다.
十六年 夏四月 大水 秋七月 將軍實竹等 與高句麗戰薩水之原 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兵圍之 百濟王牟大遣兵三千 救解圍"
[네이버 지식백과] 소지 마립간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3년(서기 494) 2월,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가을 7월, 우리의 병사가 신라의 병사와 살수(薩水)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의 병사가 우리에게 패하여 견아성(犬牙城)으로 들어가 수비를 펼쳤다. 우리의 병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백제에서 3천 명의 병사를 보내서 신라를 구원하므로 우리의 병사가 물러났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
秋七月 我軍與新羅人 戰於薩水之原 羅人敗 保犬牙城 我兵圍之 百濟遣兵三千 梫救新羅 我兵引退"
[네이버 지식백과] 문자명왕 [文咨明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16년(서기 494)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薩水)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犬牙城)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었는데, 고구려 병사가 포위하였다. 임금이 병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여 포위를 풀었다.
十六年 秋七月 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 新羅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兵三千救 解圍
[네이버 지식백과] 동성왕 [東城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출처] 살수대첩, 고구려 살수의 위치|작성자 방랑자
二十二年夏四月 폭풍이 불고, 용이 나타나며 황색 안개가 끼다 (AD 500)
二十二年秋九月 왕이 파로의 딸 벽화를 만나다 (AD 500)
(자료 : 소지마립간, 삼국사기, 인용출처: 나무위키)
5. 신라 진흥왕 시기의 낙랑 지역 점령
신라가 다시 이태리 반도에 진출한 것은 진흥왕이 북제로부터 받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직책때문이다. 필자는 낙랑군이 이태리 북부에 있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
" 신라는 564년과 572년에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무성제 고담은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에 봉했다. "
(자료 : 북제, 나무위키,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북조)
신라 진흥왕은, 551년 고구려가 돌궐과 전쟁하는 사이, 나제동맹으로 맺은 백제의 성왕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한강유역을 차지한다고 아래 기록된다. 이과정은 서양사에서 비잔틴제국의 Justinina I(백제 성왕 추정)이 고트족(고구려)과 싸워 이태리 반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내 롬바르드왕국에 의해 이태리 북부지역을 빼앗기고 이태리남부만을 차지한 것으로 기록된다. 아래 롬바르드 기록에서 다시 보겠지만, 이것이 신라와 백제에 의한 고구려 공격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태리 반도에 다시 진흥왕 시기부터 신라가 있게 된다.
진흥왕 시기 대가야 사람인 우륵으로 하여금 악을 보급하게 하는데, 이때 대가야를 복속시킨 듯 하다. 우륵이 지은 곡에 우륵은 자기 나라 지방이름을 넣었다 하는데, 곡명중에 상가라도, 하가라도 등의 '가라'라는 명칭이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가야가 가라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대가야는 대가라, 즉 지중해 건너 편에 있는 카르타고가 아닌가 한다.
"우륵이 지은 곡으로는 상가라도(上加羅都),[1] 하가라도(下加羅都),[2] 보기(寶伎),[3] 달이(達已),[4] 사물(思勿)[5] 물혜(勿慧),[6] 상(上)/하기물(下奇物),[7] 사자기(師子伎),[8] 거열(居烈),[9] 사팔혜(沙八兮),[10] 이사(爾赦)[11] 등이 있으며 기악곡인 보기와 사자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5~6세기 가야 시절 군현(郡縣)에서 본딴 이름들로 가야 각 소속국의 지방 특색이 있는 고유 음악을 정리해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 우륵, 나무위키)
출처: https://lainfos.tistory.com/ [Hidden Corea:티스토리]
이 지역은 광개토토태왕이 가라 점령시 갔던 곳이다. 가라가 임나와 더불어 모두 왜 지역이라면, 가야는 왜와 같은 세력이 된다. 그러나 왜와 가야가 다르다면, 임나는 시실리섬의 왜가 되고, 카르타고는 가라라는 가야지역이 될 수 있다.
필자는 가야지역이 로마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다투는 아르메니아지역으로 보았는데, 이는 위키피디아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한 결과이다. 지금은 위키피디아 자료도 서양사가들의 왜곡이나 미화작업, 그리고 중공사가들의 왜곡을 고려하여 참고하고 있다. 그래서 가야지역이 지중해 지역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검토해볼 예정이다.
진흥왕은 평양성을 취하지 않고, 한성지역을 취했다 했다. 필자는 평양성이 스위스 쥬리히 지역이라 추정했다. 한성은 프랑스 Clermont-Ferrand지역으로 보인다. 이는 고구려 문자왕 시기에 한성을 공격한 시기에 고트족이 이 지역을 공격한 기록을 참고한 것이다. 따라서 한성을 취한 진흥왕이 진출한 지역은 프랑스의 Burgundy지역이다. Burgundians은 부여족이다. 부르군디언은 롬바르드족과 더불어, 여자들만 편두를 한 민족이다. 따라서 부여계인 백제가 있던 곳일 수 있다. 동성왕시기에 이곳에 있어 북위와 전투를 하여 이긴 적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진흥왕의 신라 지역이 이태리 북부 롬바르드지역 뿐만아니라, 프랑스지역 즉 전통적인 중국사지역인 부르군디지역까지 포함하였을 수 있다.
이때 신라는 남조의 진(陳)나라와 교류가 빈번했다. 즉 남조의 진나라가 신라의 진흥왕 시기 신라가 아닌가 한다. 한수(漢水)인 한강은 그러면 이태리반도의 포강이 아니라 프랑스의 르와르강이 된다. 그러면 한나라가 있던 강 즉 한수라는 의미가 맞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534년생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526년생으로 나와있다. 여러가지 역사적 기록을 대립해서 살펴볼때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로 여겨진다. 15세 때였던 540년 신라 법흥왕의 붕어로 왕이 되었는데, 540년부터 이듬해 541년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541년부터 551년까지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으며 그 후 551년부터 친정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고[2] 팔관회를 두었다. 대가야 사람인 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다.[3] 553년, 황룡사를 창건했다.[4] 568년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으며[5], 572년에 다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6]576년, 원화(源花) 제도를 만들어 남모와 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花郞)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576년(진흥왕 37년), 5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영토 확장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7]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8]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를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 등을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를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7월,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9][10]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1] 같은해, 음력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11] 한편, 이듬해 백제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554년).[12]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562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같은 해(562),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13]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14]
외교
564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15] 565년,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16]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17][18][19][20][21] 572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22] "
(자료: 진흥왕, 위키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내물-진지 (356-579))
진나라는 557-589년 존재한 남조의 마지막 국가이다. 성립시기가 진흥왕이 이 지역에 진출한 시기와 같다. 그리고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한수(漢水)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다른 중국사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다. 한수를 아래 지도의 Loire river(르와르강)이라 한다면, 장강 (아래 양자강으로 표현됨)은 그 밑의 강일 것이다. 아래 지도에서 장강은 Dordogne river(도르도뉴강)일 수 있다. 사천성은 4개의 강이 만나는 프랑스 동쪽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또한 Jura Mountains, Massif Central의 산맥이 있다. 중공지형의 양자강 중하류는 프랑스지형의 장강(도르도뉴강)의 중상류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 가까이에 한성일 수 있는 Clermont Ferrand이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부여계족인 Burgundians이 있는 부르군디지역이다.
"그러나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를 이은 북주에게 정복당했고, 거기에 양자강 중하류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자료 : 진(남조), 위키백과, 인용출처: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남조)
River map in France
6. Lombards 기록과 신라 진흥왕
1) 흉노족 신라 왕족설과 롬바르드왕국 기원설
아래 자료에 보면 전한(前漢)에 김일제가 투후로 지내다가 이후 자손들이 한(漢)나라의 수도 장안에 살다가, 전한(前漢)이 멸망하는 시기에 요동(遙東)으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Lombards의 유적의 여인들 유전자를 보면 France, Greece에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했다. (Lombards, wikipedia) 즉 프랑스지역이 중국사 지역이므로 위의 전한시기에 프랑스에 살다가, 전한말기에 요동으로 피신했다는 것인데, 요동은 프랑스 론강의 동쪽 즉 이태리 북부지역이다. 비록 시기적으로 전한멸망시기부터 흉노의 후손이 이태리 북부에 살았다는 것이 새로운 가정을 제시하지만, 신라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이 결국 진흥왕이 회복한 롬바르드지역이다. 또한 그리스지역은 필자가 추정하는 진한지역과 가까운 지역으로 신라가 태동 시기에 있던 지역이 아닌가 한다.
"우선 가장 많이 언급 되는 인물이 바로 전한(前漢) 때의 흉노 왕자 출신인 김일제다.
투후(秺侯)는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3자불명) 하였다.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후략)
『문무왕릉비』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의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 온 천하에 만연하니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김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귀순하여 무제 아래에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겼으므로 그를 발탁해 시중[1]과 상시[2] 에 임명하고 투정후(투후)에 봉하였다.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3]에 기대어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 [4]
흉노족 신라왕족설이 생겨나게 된 근원엔 신라인이 직접 남긴 기록인 문무왕릉비와 대당고부인묘지명의 2개 비문에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중 하나로 투후 김일제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투후'라는 직책은 오직 김일제만이 받았으므로 투후를 말하면 바로 김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정리하자면, 투후 김일제는 흉노에 있다가 한무제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재상직을 얻은 유명인이고, 그의 후손들은 당시 한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살다가 전한이 멸망하는 시기에 요동으로 피난왔다는 것."
(자료 : 흉노족 신라왕족설, 나무위키,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Archaeologists have unearthed burial sites in the area of Szólád of Lombard men and women buried together as families, a practice that was uncommon for Germanic peoples at the time. Traces have also been discovered of Mediterranean Greeks and of a woman whose skull suggests French ancestry, possibly indicating that migrations into the Lombard territory occurred from Greece and France. "
(source : Lombar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상기 내용 즉, 롬바르드 유적에서 발견된 여인의 뼈가 프랑스 조상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는 기록은 롬바르드족이 스웨덴남쪽에서 기원하여 이주했다는 설(아래 내용)을 부정한다. 그리고 롬바르드족은 다른 게르만민족과 달리, 가족이 같이 무덤에 묻히는 예, 그리고 카스트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이한 사례인데, 여자들이 편두를 했다는 사실과 함께, 신라와의 동질성을 말하고 있다. 롬바르드족에 대한 원천을 스칸디나비아 남부로 말하는 아래 내용은 부여족이나 흉노족의 원천을 말하지 않나 생각된다.
필자는 덴마크지역을 (북)부여의 원천 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이후 동부여로 보이는 발트해 연안지역의 Burgundians(선비족인 Suebi족의 일원인 Vandals족(월지족)의 일원), 그리고 연나부부여로 보이는 프랑스의 부루군디지역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본다.
흉노족의 이동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륵단군에 의해 약수(BC 2177)에 갇혀 있다 그땅에 봉해진 흉노의 선조(본 블로그, 카테고리, 흉노, 펌글 '약수에 살던 흉노족 조상은 단군의 신하' 참조)는 스칸디나비아의 어느 지역이 아닌가 하고 있으며, 한(漢)나라를 괴롭힌 흉노는 프랑스 북부지역이나 만주지역으로 보이는 덴마크 남쪽 지역 등에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왜나하면 오손을 멸망 시킨 월지족과 흉노의 이야기가 있으며, 오손은 프랑스남부에 걸쳐 있는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흉노의 후손이라고 특히 주장하는 신라 진흥왕 시기에 롬바르드 지역을 차지한 것과 흉노의 원천지역일지도 모르는 스칸디나비아지역에서 롬바르드인들이 내려왔다는 아래 이야기는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이다.
"The medieval Lombard historian Paul the Deacon wrote in the History of the Lombards (written between 787 and 796) that the Lombards descended from a small tribe called the Winnili,[3] who dwelt in southern Scandinavia[4] (Scadanan) before migrating to seek new lands. By the time of the Roman-era - historians wrote of the Lombards in the 1st century AD, as being one of the Suebian peoples, in what is now northern Germany, near the Elbe river. They continued to migrate south."
(source : Lomar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2) 롬바르드족의 카스트제도와 신라의 골품제도
아래 자료에서 롬바르드족은 다른 게르만족과 달리 경직된 카스트제도를 가지고 있다 했다. 바로 신라의 골품제도와 같다.
"During their stay at the mouth of the Elbe, the Lombards came into contact with other western Germanic populations, such as the Saxons and the Frisians. From these populations, which had long been in contact with the Celts (especially the Saxons), they adopted a rigid social organization into castes, rarely present in other Germanic peoples.[91] "
(source : Lomar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3) 롬바르드왕과 비잔틴제국의 551-552 Gepids(고구려)과의 전쟁 승리와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나제동맹)의 고구려에 대한 연합작전
"The Lombards (/ˈlɒmbərdz, -bɑːrdz, ˈlʌm-/)[1] or Langobards (Latin: Langobardi) were a Germanic people[2] who ruled most of the Italian Peninsula from 568 to 774.......
(번역) 롬바르드족은 게르만 민족으로, 이태리 반도 대부분을 568-774년 기간동안 지배했다. ..
By the end of the fifth century, the Lombards had moved into the area roughly coinciding with modern Austria and Slovakia north of the Danube, where they subdued the Heruls and later fought frequent wars with the Gepids. The Lombard king Audoin defeated the Gepid leader Thurisind in 551 or 552, and his successor Alboin eventually destroyed the Gepids in 567. The Lombards settled in modern-day Hungary in Pannonia. .......
(번역) 5세기말까지, 롬바르드족은 대강 지금의 오스트리아 및 다뉴브강 북부 슬로바키아지역으로 이동하여, Heruls족을 복속시키고, 나중에는 Gepids족과 자주 전투를 했다. 롬바르드 왕 Audoin은 Gepids족 리더 Thurisind를 551년 또는 552년 격파했으며, 그의 후계자 Alboin은 결국 567년 Gepids를 파괴했다. 롬바르드는 현대의 판노니아 항가리에 정착했다.
위 자료에서 551년 Gepids족과 싸워 격파했다 기록된다. 이는 551년 고구려(Gepids=Goths)가 돌궐과의 전쟁으로 바쁜 사이,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연합(나제동맹)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서 롬바르드왕국이 신라 진흥왕의 점령지역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아래 지도는 롬바르드왕국의 초기 (560년) 지역을 나타낸다.
Kingdom of Lombards, in 560 (source : Wikipedia)
Following Alboin's victory over the Gepids, he led his people into North Eastern Italy, which had become severely depopulated and devastated after the long Gothic War (535–554) between the Byzantine Empire and the Ostrogothic Kingdom. The Lombards were joined by numerous Saxons, Heruls, Gepids, Bulgars, Thuringians and Ostrogoths, and their invasion of Italy was almost unopposed. By late 569, they had conquered all of northern Italy and the principal cities north of the Po River, except Pavia, which fell in 572. At the same time, they occupied areas in central and southern Italy. They established a Lombard Kingdom in north and central Italy, later named Regnum Italicum ("Kingdom of Italy"), which reached its zenith under the eighth-century ruler Liutprand. .........."
(번역) Alboin이 Gepids에 승리한 후, 그는 그의 부족들을 이태리 북동부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은 그동안 동고트족과 비잔틴제국 사이의 고트족 전쟁 (535-554)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었다. 롬바르드지역은 삭슨족, Heruls족, Gepids족, Bulgars족, Thuringians족, 동고트족 등 여러 부족에 의해 차지한 바 있으며, 그들의 이태리 침략은 별로 저항이 없었다. 569년말까지 롬바르드족은 포강북쪽의 주요 도시들을 포함한 이태리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정복했으며, Pavia도시는 572년 함락했다. 동시에 그들은 중부 이태리, 남부 이태리를 점령했다. 그들은 중부와 북부 이태리에 롬바르드왕국을 건설했고, 후에는 이태리왕국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8세기의 지배자 Liutprand에 의해 Zenith까지 진출했다.
(source : Lomar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Lombards Kingdom in 572 (source : Wikipedia)
롬바르디왕국이 판노니아 지방에서 이태리 북동부로 이동한 것은 Gepids 즉 고구려의 반격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상기 지도 참조) 아래 자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Gepids, Heruls, Kutigurs등이 한편이 되어 Lombards와 비잔틴에 대항해서 싸운 것으로 기록된다. Gepids, Heruls, Kutigurs족 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지역으로 보인다.
"In the 540s, Audoin (ruled 546–560) led the Lombards across the Danube once more into Pannonia. Thurisind, King of the Gepids attempted to expel them, and both peoples asked for help from the Byzantines. Justinian I sent his army against the Gepids, however it was routed on the way by the Herulians and the sides signed a two-year truce. Revenging what he felt as a betrayal, Thurisind made an alliance with the Kutrigurs who devastated Moesia before end of the armistice. The Langobard and Roman army joined together and defeated the Gepids in 551. In the battle, Audoin's son, Alboin killed Thurisind's son, Turismod.[73]
In 552, the Byzantines, aided by a large contingent of Foederati, notably Lombards, Heruls and Bulgars, defeated the last Ostrogoths led by Teia in the Battle of Taginae.[74]
(번역) 540년대 Audoin (재위 : 546-560)은 다뉴브강을 건너 판노니아까지 진출했다. Gepids왕 Thurisind는 이들을 쫓아내려 했으나, 양쪽 모두 비잔틴에 도움을 청했다. 비잔틴왕 Justinian I은 Gepids에 대항하여 군대를 보냈으나, 오는 도중 Herulians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양쪽은 2년의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배신으로 느낀 Thurisind는 복수를 위해, Kutrigurs와 동맹을 맺어 모에지아 지역을 휴전조약이 끝나기 전에 유린했다. 롬바르드와 로마군대는 연대하여 551년 Gepids를 패배시켰다. 이 전투에서 Audoin의 아들 Alboin은 Thursind의 아들 Tursimod를 죽였다.
552년 비잔틴은 특히 롬바르드, Heruls, Bulgars등의 연합의 도움을 얻어, Tela에 의해 이끌어지는 마지막 동고트족을 Battle of Taginae에서 패퇴시켰다.
...............................
In 572, Alboin was murdered in Verona in a plot led by his wife, Rosamund, who later fled to Ravenna. His successor, Cleph, was also assassinated, after a ruthless reign of 18 months. His death began an interregnum of years (the "Rule of the Dukes") during which the dukes did not elect any king, a period regarded as a time of violence and disorder. In 586, threatened by a Frankish invasion, the dukes elected Cleph's son, Authari, as king. In 589, he married Theodelinda, daughter of Garibald I of Bavaria, the Duke of Bavaria. The Catholic Theodelinda was a friend of Pope Gregory I and pushed for Christianization. In the meantime, Authari embarked on a policy of internal reconciliation and tried to reorganize royal administration. The dukes yielded half their estates for the maintenance of the king and his court in Pavia. On the foreign affairs side, Authari managed to thwart the dangerous alliance between the Byzantines and the Franks."
(번역) 572년 Alboin은 그의 부인 Rosamund의 음모에 의해 Verona에서 살해되었다. Rosamund는 후에 Ravena로 도주했다. 후계자 Cleph도 18개월의 잔혹한 정치이후 암살되었다. 이 죽음은 한동안 Dukes에 의해 왕을 뽑지 않는 중단시기 (Dukes의 지배)가 수년간 있었는데, 이때는 폭력과 무질서의 시기였다. 586년 프랑크의 침입 위협에 dukes들은 Cleph의 아들 Authari를 왕으로 선출했다. 589년 그는 Bavaria의 duke인 Garibald I of Bavaria의 딸, Theodalinda과 결혼했다. 카톨릭 Theodalinda는 교황 Gregory I의 친구이므로 기독교화를 추진했다. 한편 Authari는 내부적인 화해에 진력했고, 행정조직을 재조직화하려 노력했다. Dukes들은 왕과 Pavia궁의 운영을 위해 그들의 재산 반을 양보했다. 외치에 있어서는 비잔틴제국과 프랑크왕국의 위험한 동맹관계를 좌절 시켰다.
(source : Lomar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572년 진흥왕으로 보이는 Alboin이 그의 부인 Rosamund에 의해 암살되었다 위 자료에 기록된다. 그리고 Rosamund는 위 지도의 Ravenna (비잔틴지역, 즉 백제지역)로 도주했다. 진흥왕은 572년 새로운 연호를 쓰고 태자 동륜이 죽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진흥왕이 이 시기에 차남인 이후의 진지왕에 의해 정변이 있어 죽은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기록에서는 다음왕, Cleph는 잔혹한 정치후 18개월만에 암살당했다 나온다. 또는 진흥왕은 성왕의 딸을 소비로 맞이했는데, 이후 백제와 신라의 갈등상황에서 성왕의 딸인 소비가 진흥왕을 암살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사에서는 성왕이 갑작스럽게 죽는 것으로 나타나나, 비잔틴제국사에서는 이러한 Justinian I(성왕)의 갑작스런 죽음 기록이 없다. 김부식이 신라사를 미화하기 위해 진흥왕의 죽음을 성왕의 죽음으로 바꿔치기한 것일 수 있다.
三十三年春一月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AD 572)
三十三年春三月 왕태자인 동륜이 죽다 (AD 572)
(자료: 진흥왕, 삼국사기,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한민족역사 I, 삼국사기 자료 모음 (519-590))
상기 지도에서 나제동맹에 의한 고구려 공격으로 백제(비잔틴제국, Justinian I)가 처음에는 이태리 북부이남을 거의 다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신라로 판단되는 Lombards왕국이 이태리 반도 거의 전 지역을 차지한다. (아래 지도 참조)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에게 밀린 것이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도 이태리 반도에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Lombards Kingdom in 652 (source : Wikipedia)
7. 진흥왕의 남조 진나라 진출 가능성
신라 진흥왕 시기인 562, 568년에 Avars족은 프랑크왕국 Austrasia(북제)에 침입하여 그 수도를 옮기게 할 정도였다. (아래 자료 참조)
"Incursions by the Avars, a fierce nomadic tribe related to the Huns, caused Sigebert to move his capital from Rheims to Metz. He repelled their attacks twice, in 562 and c. 568. "
(source: Sigebert I, Wikipedia, 인용출처: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프랑크왕국(481-613))
562, 568년 당시 Avars족 이들은 누구일까? 일차적으로 고구려라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훈족과 연관된 이들이라고 위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고구려는 551년,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의 공격으로 이태리지역을 거의 빼앗기고 주위 다른 지역도 빼앗기는 형편이었다. 즉 고구려는 북제를 공격할 상황이 안된 것으로 보인다. 즉 아래 삼국사기 기록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565년, 573년 북제에 조공하였다고 기록된다. 비록 568년 전후로 3년간 공백기간이 있지만 말이다. 백제의 위덕왕 시기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역시 568-569기간은 공백이다.(일본의 역사왜곡으로 일부러 지운 것인지 모른다. )
四年春二月 진이 왕을 책봉하다 (562)
五年 큰 가뭄이 들다 (563)
六年 북제에 조공하다 (564)
七年春一月 왕자 원을 태자로 삼다 (565)
七年 북제에 조공하다 (565)
八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566)
567-569 : 3년 공백
十二年冬十一月 진에 조공하다 (570)
十三年春二月 진에 조공하다 (571)
十三年秋七月 왕이 패하에서 사냥하다 (571)
十三年秋八月 궁실 수리를 중단하다 (571)
572년 : 공백
十五年 북제에 조공하다 (573)
十六年春一月 진에 조공하다 (574)
(자료: 평원왕, 삼국사기, 인용출처 : 나무위키)
一年秋七月 위덕왕이 즉위하다 (554)
一年冬十月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하다 (554)
555-558 : 4년 공백
六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559)
八年秋七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561)
562-566 : 5년 공백
十四年秋九月 진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567)
568-569 : 2년 공백
十七年 제가 왕을 거기 대장군으로 책봉하다 (570)
十八年 제가 왕을 다시 책봉하다 (571)
十九年 사신을 제에 보내 조공하다 (572)
(자료: 위덕왕, 삼국사기, 인용출처 : 나무위키)
그런데 아래 신라 진흥왕 시기의 기록은 다소 다르다. 565년 역시 북제에서 조서를 내려 낙랑군공 신라왕의 직책을 주었다. 그러나 그 이후 남조의 진나라와는 사신교류가 빈번했지만 (566,567, 568, 570, 571) 북제와의 교류는 기록되지 않는다. 572년 연호를 홍제로 바꾸고, 같은 해 동륜태자가 죽은 후 북제에 사신을 보냈다. 572년은 태자가 죽은 사건이 난 것과 연호를 바꾼 것은 뭔가 변화가 있었다는 조짐으로 보인다. 진흥왕이 이때 죽은 것이 아닌가 앞에서 추정했다.
그리고 568년 위의 Avars족이 북제지역을 공격할 때, 신라 진흥왕은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했다고 기록된다. 즉 전쟁에 이겨 새로운 영토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신라 진흥왕이 남조의 진나라지역으로 진출하여 북제지역을 공격한 것일 수 있다. 남조의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가 수의 침입에 대비한 것을 보면, 진나라는 프랑스의 우측에 있는 론강에 가까이 있는 지역일 수 있다. 따라서 진흥왕이 Clermond Ferrand인 한성지역인 이 지역을 점령했으므로, 진나라 지역에 진출했을 수 있으며, 그래서 북쪽의 북제와 전쟁할 수 있는 것이다.
롬바르드왕국은 이때 파노니아 지역(Gepids지역, 9세기이후 Avars칸국지역)까지 점령하였다가 이태리 북부지역으로 이동했다 기록된다. 이때 아바르족은 롬바르드족과 동맹 사이였다. 그래서 후세 사가들이 착각하여 Avars족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롬바르드족은 농경민족이었다고 기록된다. 따라서 유목민족 아바르족과는 구별되기 때문에 의문시되지만, 진흥왕 시기에 유독 흉노의 후예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훈족과 연관된 아바르족은 흉노의 후예인 진흥왕의 신라세력을 아바르족이라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 롬바르드왕국이 판노니아지방에서 이태리 북부지방으로 이동한 것은 Gepids,즉 고구려의 반격의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내친 김에 북제까지 공격해 수도를 옮기게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훈족과 연결된 유목민족 아바르족의 공격이라고 기록될 수 있다고 본다. 고구려 평원왕은 571년 패하에서 사냥하였다고 위에서 기록하였다. 패하, 패수를 라인강으로 본다면, 고구려가 북쪽에서는 북제 국경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바르족의 북제 공격은 고구려의 그것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북제가 고씨 왕조이고,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판단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런 가능성은 신라의 진흥왕 진출에 비해 낮다고 본다.
<신라 진흥왕 삼국사기 기록>
二十三年秋九月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다 (AD 562)
563년 : 공백
二十五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AD 564)
二十六年春二月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AD 565)
二十六年秋八月 아찬 춘부에게 국원을 지키게 하다 (AD 565)
二十六年秋九月 품주를 설치하다 (AD 565)
二十六年 진에서 불경을 보내다 (AD 565)
二十七年春二月 기원사와 실제사가 세위지다 (AD 566)
二十七年 동륜을 왕태자로 삼다 (AD 566)
二十七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6)
二十七年 황룡사가 준공되다 (AD 566)
二十八年春三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7)
二十九年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다 (AD 568)
二十九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68)
二十九年冬十月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하다 (AD 568)
569년 : 공백
三十一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70)
三十二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AD 571)
三十三年春一月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AD 572)
三十三年春三月 왕태자인 동륜이 죽다 (AD 572)
三十三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AD 572)
(자료 : 진흥왕, 삼국사기,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신라 )
8. 623-626, 663-664 ; 수, 당 -고구려 전쟁에 신라의 참여
롬바르드족은 623-626년, 663-664년 기간에 슬라므족과 치열한 싸움을 하였다 아래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슬라브족은 고구려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며, 실제 623년 프랑크와 크게 싸운 슬라브족 Samo's Empire기록이 나온다. 즉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보인다. 여기에 롬바르드가 참여한 것은 수나라, 당나라를 도와서 고구려와 싸운 것을 의미한다. 아래 기록을 보면 크게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즉 롬바르드가 신라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고 본다.
"The Lombards engaged in fierce battles with Slavic peoples during these years: from 623 to 626 the Lombards unsuccessfully attacked the Carantanians, and, in 663–64, the Slavs raided the Vipava Valley and the Friuli."
(source : Lomar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9. 774년 당나라에 의한 롬바르드 지역 점령
롬바르드왕국은 774년 프랑크왕국에 의해 점령된다. 그래도 자치를 계속한 것으로 아래 기록된다. 11세기에는 Norman에 의해 정복되어, 시실리에 포함된다 한다. 그래서 바이킹족의 기록(runestones)에 롬바르드를 지배했다고 나오는 것같다. 필자는 바이킹의 활동이 발해나 고려의 활동이 아닌가 한다. 즉 신라의 영역을 이어 받은 고려가 이 지역도 지배했을 수 있다. 이 또한 신라의 영역이었다는 논리가 전제된다.
"In 774, the kingdom was conquered by the Frankish king Charlemagne and integrated into the Frankish Empire. However, Lombard nobles continued to rule southern parts of the Italian peninsula well into the 11th century, when they were conquered by the Normans and added to the County of Sicily. In this period, the southern part of Italy still under Lombard domination was known to the foreigners by the name Langbarðaland (Land of the Lombards), as inscribed in the Norse runestones.[5] Their legacy is also apparent in the name of the region of Lombardy in northern Italy. "
(source : Lomards,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Italy)
이상으로 롬바르드지역이 신라 지역이라는 것, 또한 신라가 이태리 반도에 있었다는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래서 신라하가 스위스북쪽 지역에 강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또한 '로마는 백제이다'라는 의미가 비잔틴제국이 백제이다 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태리 반도 지역은 여러 세력이 나누어 가진 바, 그 구체적인 지역설정은 매우 어려운 작업으로 보인다. 시실리는 왜의 임나지역으로 보이고, 로마나 북부 이태리는 신라지역으로 보이며, 장수왕 이후에는 고구려 지역으로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 시기 다시 신라의 지역을 된 것 같다. 그리고 이때에도 백제가 일부지역을 점한 것으로 보인다.
774년에는 롬바르드 지역을 프랑크왕국이 차지했으니, 중국의 당나라가 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당나라는 당 대종시기(762-779)로서 안사의 난 등으로 어수선한 시기였으며, 신라 또한 혜공왕 시기(765-780)로서 역시 반란이 많았던 시기이다. 따라서 반란군의 행동으로 신라에서 당으로 이전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한 것이 아쉽다. 이후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이 어떻게 서양사에서 나타나는지 알아보는 과정에서 롬바르드가 신라지역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검증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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