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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신라(BC 57-AD225)는 파르티마 제국이다 (II)

한민족 역사/신라

by Chung Park 2020. 8. 2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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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대의 신라(BC57 - AD 225)는 파르티마제국이다. (II)

 

< 목 차 >


2. 석탈해 등장 이후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유리이사금 (AD 24-57)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34 : 왕권다툼과 분열된 왕국

  (2) AD 36 : 낙랑과의 전쟁

  (3) AD 40-42 : 맥국과의 우호관계

  (4) AD 54-57 : 정변의 상황, 왕계 : 박씨 -> 석씨

2) 탈해이사금 (AD 57 - 80)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58-76 : 백제(로마)와의 전쟁
  (2) AD 73 왜와의 전쟁
  (3) AD 77 : 가야와의 전쟁
  (4) AD 65-67 : 박씨 가문과 김씨세력의 연합
  (5) AD 79-80 : 정변의 혼란  석씨왕에서 박씨왕으로

3) 파사이사금 (AD 80-112)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AD 87 - 106 : 가야와의 전쟁
  (2) AD 73 - 94 : 반초의 활동과 파르티마제국의 동부 경략
 

  (3) AD 101 : 월성으로의 이전

  (4) AD 102 - 106 : 음즙벌국,실직곡국,압독국 정벌과 백제와의 평화조약 (AD 105)
  (5) AD 108 :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합병

4) 파사산성 존재의 의미

5) 파사국의 존재 및 위치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기원 전후의 박혁거세의 초기를 지나, AD 225년까지의 신라 역사가 파르티마제국 페르시아에 있었다는 주장을 위해,  신라와 백제의 전투가 치열했던 시기와 파르티마와 로마의 전투가 치열했던 시기를 살펴 보고자 한다.  [II]부에서 유리이사금 (AD 24-57), 탈해 이사금 (AD 57-80), 파사이사금 (AD 80-112), [III]부에서 지마 이사금 (AD 112 - 134), 아달라 이사금 (AD 154-184), 벌휴이사금(AD 184-196), 내해이사금(AD 196-230) 시절을 살펴 보며 검증하고자 한다. 이 시기에는 백제의 자료도 있으므로 같이 보고자 한다. 

 

2. 석탈해 등장이후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1) 유리이사금 (AD 24-57)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一年秋九月 유리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4)
二年春二月 시조 묘에 제사지내다
五年冬十一月 진휼을 실시하다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AD 32)
十一年夏五月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AD 34)
十一年夏六月 홍수가 나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AD 36)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AD 37)


十七年秋九月 맥국과 우호를 맺다 (AD 40)
十九年秋八月 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AD 42)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AD 54)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AD 56)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三十四年秋九月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AD 57)
三十四年冬十月 왕이 죽다

 

(자료 : 유리이사금, 나무위키)

 

유리이사금 시기에는 4가지 정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권 11년차인 AD 34년에 분열된 왕국, AD 36년 낙랑과의 전쟁, AD 40년 맥국과의 우호 관계, AD 56년 박씨왕에서 석씨왕으로의 정변 등이다.

 

(1) AD 34년 이후: 왕권 다툼과 왕국의 분열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AD 32)
十一年夏五月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AD 34)

 

AD 32년, 진한 6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었다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시기의 파르티마 제국 왕인 Artabanus II (AD 12-41)는 왕권강화와 동시에 AD 35년 아르메니아를 점령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기술을 하고 있다. Artabanus II는 이후, 아르메니아의 지배를 복원하려는 로마에 의해, Phraates IV의 손자인 Tiridates III가 보내져서, 왕권다툼에 밀려 동부로 도망갔으나, 곧 스키타이 군대 (Dahae지역, 카스피해 우측지역)의 지원으로 Hyrcania (카스피해 남쪽에 접한 지역)에서 돌아와 다시 왕권을 회복했다고 기술된다.  이러한 현상을 서울에서 땅이 갈라졌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해석은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유리아시금의 강력한 왕권 강화 체제에 진한 6가문은 반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2년 후 AD 34년 서울에서 땅이 갈라졌다는 표현은 지진이라기 보다 귀족들의 반란으로 왕국이 분열된 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추정은 파르티마제국의 역사에서 나타난다. 아래에서 보듯이 Artabanus II (r AD 12-41)는 왕권을 강화하는데 주력했다고 기술되고, 박트리아서쪽을 포함한 북동부의 호라즘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기술된다. AD 30년, 후한인 동한이 세워진 시기와 유사하다. 이는 쿠샨왕국이 세워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Artabanus는 동시에 AD 35년 아르메니아를 점령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기술을 하고 있다. 즉 같은 왕이 동과 서로 확장을 추구한 것을 보면 왕망에 망해 동한을 세웠다는 중공 사가들의 주장은 어폐가 있다 할 것이다.

 

반면 아래 다른 글에서는 Artabanus II의 강력한 왕권강화에 반발한 동부의 일부 귀족들이 독립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고 기술된다. Sakastan, Drangiana, Arachosia 등의 지역에서 새로운 왕국을 선포했다고 기술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독립은, 후에 같은 신라인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Kushan 왕국을 흡수한 것을 보면 위키피디아에서는 잠정적인 분열이 아닌 것으로 표현한다. Artabanus II시기의 위키피디아 글에서도 이렇게 앞과 뒤가 일치하지 않는 설명을 하는데, 중공측의 개입으로 그러한 기술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중공측이 주장하는 한나라는 전한(서한), 후한(동한) 두번이나 모두 신라에 의해 망했다는 것이 된다.


"The Parthian satrap of Sakastan, Drangiana and Arachosia, named Gondophares, declared independence from Artabanus II and founded the Indo-Parthian Kingdom."

 (Vonones I, Wikipedia)

 

- 로마 제국 대 파르티아 불확실한 전쟁

양국 간의 불화가 고조됨에 따라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프라아테스 5세는 서기 1년 양국 간에 대략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다. 합의 내용은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로부터 군사를 물리고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로마의 보호령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수십년간 아르메니아에서 양국의 불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36년 아르메니아의 왕좌가 공석이 되자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2세가 아들 아르사케스를 왕위에 앉히려 시도함으로써 로마와의 전쟁이 촉발되었다. 그러나 아르타바누스는 로마 장군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의 협상 끝에 아르메니아를 파르티아의 세력권에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하였다. 58년에 또다른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 티리다테스를 강제로 아르메니아 왕좌에 앉히자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이다. 코르불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티리다테스 왕실을 전복시키고 카파도키아 왕자를 왕위에 앉혔고, 아르메니아의 반격으로 양군 사이에 여러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양국의 전쟁은 63년 티리다테스의 왕위 등극을 로마 황제에게 승인받는 것에 로마가 동의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자료: 위키백과, 로마-파르티마​ (BC 66- AD 217) 전쟁)

 

 

- Artabanus II (AD 12 - 41) 참고 자료

 

Artabanus spent the following years increasing his authority. To the northeast, he was victorious in his efforts to have a new dynasty established in Khwarazm, thus starting a new era in the history of the country. Artabanus most likely operated in western Bactria as well, which had been part of the Parthian domains for centuries.

 

 

In AD 35, he tried a new way to conquer Armenia and to establish his son Arsaces I as King there. A war with Rome seemed inevitable. The faction among the Parthian magnates which was hostile to Artabanus II applied to Tiberius for a king of the race of Phraates IV. Tiberius sent Phraates IV's grandson, Tiridates III, and ordered Lucius Vitellius the Elder (the father of the Roman emperor Vitellius) to restore Roman authority in the East. By very dexterous military and diplomatic operations Vitellius succeeded completely.

 

Artabanus II was deserted by his followers and fled to the East. Tiridates III, who was proclaimed King, could no longer maintain himself, because he appeared to be a vassal of the Romans. Artabanus II returned from Hyrcania with a strong army of Scythian (Dahae) auxiliaries and was again acknowledged by the Parthians.

 

Tiridates III left Seleucia and fled to Syria. Artabanus II wasn’t strong enough for a war with Rome; he therefore concluded a treaty with Vitellius in 37, in which he gave up all further pretensions. A short time afterwards Artabanus II was deposed again, and a certain Cinnamus was proclaimed king. Artabanus II took refuge with his vassal, the King Izates bar Monobaz. Izates, by negotiations and the promise of a complete pardon, induced the Parthians to restore Artabanus II once more to the throne.

 

 

Shortly afterwards Artabanus II died and was succeeded by his son, Vardanes I, whose reign was still more turbulent than that of his father.

 

Artabanus II had four sons: Arsaces I, Orodes, Artabanus, Vardanes I and an adoptive son named Gotarzes II.

 

(source : Artabanus II (AD 12-41), Wikipedia)

 

 

- Vonones I (AD 8-12) 관련 참고자료

 

"His (Volonese I's) death and the now unchallenged dominance of Artabanus II split the Parthian nobility, since not all of them supported a new branch of the Arsacid family taking over the empire. The Parthian satrap of Sakastan, Drangiana and Arachosia, named Gondophares, declared independence from Artabanus II and founded the Indo-Parthian Kingdom. He assumed the titles of "Great King of Kings" and "Autokrator", demonstrating his new-found independence. Nevertheless, Artabanus and Gondophares most likely reached an agreement that the Indo-Parthians would not intervene in the affairs of the Arsacids. Vonones was survived by his son Meherdates, who attempted to take the Parthian throne in 49–51

 

[출처] <펌> Vonones I (AD 8-12)|작성자 죽엽 CG Park

 

Greco Bactrian Kingdom BC 180 (source : Wikipedia)

 

(2) AD 36년 낙랑과의 전쟁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AD 36)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AD 37)

AD 36년 낙랑의 신라 침입이 있었고, AD 37년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낙랑이 망한 후 신라에 유민 5천명이 투항했다고 우리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아래 고구려 대무신왕의 자료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AD 32년부터 낙랑을 공격한 것으로 서술된다. 그래서 낙랑은 남으로 밀려나 신라의 타산성을 함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의 남쪽에 또는 접하여 낙랑이 있고, 낙랑의 남쪽에 신라가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우리는 바로 앞의 글 (I)에서 동예가 코카서스산맥 우측, 카스피해에 접한 지역에 있다고 추정했다.  BC 16년 말갈의 침략을 격퇴한 온조의 백제는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BC 15년 낙랑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BC 11년 말갈의 대대적인 백제 공격이 있었으나, 식량이 떨어져 온조에 의해 격퇴었다. BC 8년, 동예가 말갈과 함께 공격하여 백제의 온조는 동예와의 관계를 끊었다. BC 4년에는 도읍을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옮겼다. BC 1년에 동예가 위례성을 함락했다. 온조는 보복으로 동예를 공격했지만 폭설때문에 포기했다.

 

즉 말갈과 낙랑도 이 주위에 있는 것이다. 말갈은 코카서스산맥 북쪽, 카스피해와 흑해변 북쪽에 있던 흑수말갈, Alans으로 보인다. (말갈, 즉 Alains에 대해서는 다음 편 글 (III)에서 보다 상세히 언급한다.)

 

낙랑의 위치에 대한 아래의 또 하나의 자료를 보면 낙랑이 코카서스산맥 북쪽에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라 걸왕이 단군조선의 군대를 막자, 단군조선은 신지 우량을 보내, 낙랑군, 상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멸망 시키고, 관중의 빈, 기 지역에 관청을 세웠다 했는데, 관중의 빈, 기 지역은 하, 상, 주, 진, 한나라가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포함한 이라크지역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코카서스산맥 위에 있는 낙랑의 군대와 같이 하나라를 멸하지 않았을까 한다. 즉 낙랑이란 지역명은 한무제 이전부터 오래전에 존재 했던 지역이름인 것이다.

 

"하(夏)나라 걸왕이 폭정을 하자 상(商)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니 하(夏)의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니, 단제께서 읍차 말량을 시켜 다른 제후국들(구이九夷, 구환九桓)의 군사로 지원하니 상(商)이 사죄하고 물러났다. 이에 단군조선이 군사를 물리려 하니 걸왕이 군사를 막고 약속을 어기는지라, 단군조선은 몰래 신지 우량을 보내 견이와 낙랑군을 동원해 상(商)과 함께 하(夏)를 멸망시키고, 관중의 '빈', '기(岐)' 지역에 관청을 세웠다." (자료 : 환단고기 단군세기).

 

파르티마제국 역사에서도 Phraates IV (BC 37-BC 2), Phraates V, Vonones I가 스키타이 부족왕의 도움을 받아 왕권다툼에 이겼다고 서술되는데, 이때 마다 낙랑의 침입과 철수 (BC 28, AD 4, AD 14)가 있었다고 전편 (I)에서 우리는 살펴 보았다. 즉 낙랑이 파르티마인 신라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낙랑이 코카서스산맥 북쪽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지난 글 (I)에서 위례성을 코카서스산맥아래 Tbilisi로 추정했다. BC 4년 온조가 수도를 한성으로 옮긴 것은 위례성의 위치가 말갈과 동예 등 북쪽 나라들의 공격에 너무 가깝다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위례성에서 옮긴 한성이 어디일까? 한나라 한자가 들어 가니 한나라가 있던 곳이라는 것이다. 즉 파르티마제국이 지배했던 곳이다.

 

로마사에서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BC 25년, 앙카라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아래 인용글 참조) 혹시 앙카라가 온조가 옮긴 한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지역도 그러면 한나라 시절의 영토였을까?

그러나 아래 Mithridates II (한무제로 추정)의 자료에서 보듯이 앙카라까지 진출하지는 못하고, 시리아 지중해연안, 유프라테스남쪽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서술된다. 

 

반면 코카서스지역은 코카서스산맥 북쪽으로 진출해 코카서스 Iberia, 코카서스 Albani까지 진출한 것으로 서술된다. 즉 Tbilisi보다 북쪽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서술된다. 따라서 Tbilisi가 한성으로 판단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예에 의해 함락된 위례성은 보다 북쪽에 있었던 하북의 위례성을 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위키 자료 첨조). 하남의 위례성은 Tbilisi였을 것이다. 이곳이 온조왕 때, 이전한 한성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수도가 너무 동북쪽에 치우쳐 있어 로마(비잔틴제국)가 백제가 되기에는 위치가 좀 그렇다. 백제의 사비성을 연구할 때, 앙카라 내지 Kayseri, Constantinople을 검토했는데, 그 전까지 백제의 수도가 Tbilisi였다는 추정이 조금 무리하게 보인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이 백제의 위례성을 함락했다고 했는데, 코카서스산맥을 거쳐 내려올 수도 있고, 아리수강(다뉴브강)을 건너 내려와 아나톨리아 지역을 유린할 수도 있으므로,  위례성이 Tbilisi (한강 이남) 또는 Ankara 또는 Constantinople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된다. 보다 백제 시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아 수도이전의 역사가 더 있었는지 연구해 보아야 판단할 수 있을 것같다. 백제와 서로마에 대한 연구는 차후로 미룬다.

 

"The city(Ankara) was subsequently conquered by Augustus in 25 BC and passed under the control of the Roman Empire. Now the capital city of the Roman province of Galatia, Ancyra continued to be a center of great commercial importance....

 

Augustus decided to make Ancyra one of three main administrative centres in central Anatolia. The town was then populated by Phrygians and Celts—the Galatians who spoke a language closely related to Welsh and Gaelic. Ancyra was the center of a tribe known as the Tectosages, and Augustus upgraded it into a major provincial capital for his empire. Two other Galatian tribal centres, Tavium near Yozgat, and Pessinus (Balhisar) to the west, near Sivrihisar, continued to be reasonably important settlements in the Roman period, but it was Ancyra that grew into a grand metropolis."

(source : History of Ankara, Wikipedia)

 

"It was first under Mithridates II that Parthian rule extended into the Caucasus. He noticed the strategic position of Armenia between Asia Minor, the Caucasus, and Iran. In c. 120 BC, Mithridates II invaded Armenia and made its king Artavasdes I acknowledge Parthian suzerainty. Artavasdes I was forced to give the Parthians Tigranes as a hostage, who was either his son or nephew. Control over Armenia would remain one of the most essential objectives in Parthian policy till the end of the dynasty. Other Caucasian kingdoms such as Iberia most likely also became a Parthian vassal state, and possibly also Caucasian Albania. Massive circulation of Parthian coins into Iberia, along with Armenia and Caucasian Albania, indicates that these kingdoms had been swayed by the influence of the Parthians.......

 

Parthian interests were also directed towards Syria, which had first been demanded by the Parthians after Phraates II (r. 132–127 BC) defeated the Seleucid king (basileus) Antiochus VII Sidetes (r. 138–129 BC) in 129 BC. In 114/113 BC, Mithridates II captured the important Seleucid city of Dura-Europos, which was situated on the Euphrates. The Seleucid realm was at this time frail and entangled in ceaseless internal strifes and struggles for power against the Nabataeans, various local kings, Jews, and Greek cities in Syria and Phoenicia.......

 

Tigranes would remain a Parthian vassal until the end of the 80's BC. Soon after this, Mithridates II attacked Adiabene, Gordyene and Osrhoene and conquered these city states, shifting the western border of the Parthian realm to the Euphrates. "

 

[출처] <> Mithridates II of Parthia|작성자 죽엽 CG Park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 백제의 온조왕 시기와 신라의 유리이사금 시기의 낙랑지역은 코카서스 산맥 위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 고구려 대무신왕 시절의 낙랑국으로 보인다.

 

- 고구려 대무신왕 재위 후반 참고 자료


낙랑 정벌 

32년에는 낙랑(樂浪)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국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왕 최리(崔理)와 만나 사위가 되었다. 호동은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 낙랑 정벌 기록은 현재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복한 기록이 없으며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찾을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한편 낙랑국과 낙랑군이 병존하였던 정치체로서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도 있다.

 

37년에도 낙랑을 정벌하여 병합한 기사가 있는데, 이를 32년 낙랑 정벌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하며, 독립적인 기록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을 정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44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다시 낙랑을 정복하여 살수(薩水) 이남을 한나라(동한) 영토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광무제가 낙랑을 회복하였던 것은 30년의 일로, 이 시기에는 군사 활동이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오기(誤記)이며 살수가 실질적인 경계선으로 확정되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멸망한 낙랑의 유민 5000명은 신라로 투항하였다.

(자료 : 대무신왕, 나무위키)

 

 

"예족

우리 겨레를 가리키는 명칭 중에 예족 이 있다. 주로 부여계 북방족을 일컫는데, 본래 예족과 맥족이 따로 있지만 뭉뚱그려서 예맥족이라고도 한다. 예족은 고대에 인사법이 서로 만나면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지 한전에서 (삼한) 백제를 한예(韓穢) 라고 부르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구려 왕이 "예족"의 군사들을 동원해 신라를 치는 구절이 나온다.

 

옥저는 국명이고 예족은 족명이다. 그들 집단은 고조선 시대에 단군이 통치하는 진조선 중앙 정부에 충성하던 중화 대륙 동북부에 위치한 마조선 소속 거수국(제후국) 이었다. 중화민족 진시황제 정권에게 추방당하였다.

.............

낙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에는 공통적으로 예족이 살고있었다. 이는 낙랑족이 곧 예족과 동일시되었음을 증명한다.
 

맥족 
 

서량지는 우순은 맥족(脈族)이며 맥족은 곧 동이부족을 이루고 있는 한 종족이라 잘라 말한다. 한(韓)은 농경족이었고, 맥족은 수렵족이었며, 예족은 하천지역에 고기잡아 먹고 사는 어로족이다.

(자료 : 예맥족, 신화 위키)

 

(3) AD 40-42 년 맥국과의 우호관계

 

十七年秋九月 맥국과 우호를 맺다 (AD 40)
十九年秋八月 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AD 42)

맥족이 수렵족이라는 것을 AD 42년 윗글은 말해 준다.

맥족은 대수맥, 소수맥, 양맥 등 여럿이 언급된다. 물론 그 위치도 다를 것이다.

고구려의 유리왕 (묵돌선우) 때에 양맥이 언급된다. 흑해 위 좌측으로 추정된다. (본 블로그의 글, '고구려의 유리왕은 묵돌선우이다' 참조)

 

여기서 맥국은 둘 중의 하나이다.  동예, 낙랑, 말갈 등이 있는 코카서스 산맥 북쪽 지역이 한가지 가능성이고, 파미르고원 좌측의 지역이 다른 한가지 가능성일 것이다.

 

두 지역 모두 당시의 신라 (파르티마제국)에 우호적인 관계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동년에 파르티마 제국의 역사에서 동부의 박트리아 지역과 관련 서술이 나온다. 그래서 파르티마 제국의 동부에 있는 맥국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정북방에서 동북쪽으로 맥족이 이동했었다는 아래 기록도 이를 설명한다.

 

아래 서술에서 보듯이 AD 40년 Vardanes I는  Gotarzes와 왕권 다툼중 Bactria로 피신한다.

 

또한 그 즈음 Vardanes I의 소개를 받은 그리스 철학자 Apollonius가 인도 파르티아 수도인 Taxila에서 환대를 받았다. 즉 당시의 파르티마제국은 맥국과 우호적인 관계 및 지원을 받은 것을 나타낸다.

 

- 맥족에 관한 참고 자료

 

"예는 맥보다 동방에 위치하여 은주시대 이전까지 중국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종족(예족)이 주류인 국가는 부여동예 등이다. ....


맥족은 상나라 및 주나라 때부터 간헐적으로나마 그 기록이 등장하며, 해당 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중국의 동북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목축 민족의 성격이 강하게 보이는데, 이는 맹자가 '수확의 2분의 1을 거두면 걸왕과 같고, 수확의 20분의 1을 거두면 맥과 같다(이후 중국 고유의 세제로 10분의 1세를 주장)'고 한 말에서도 정주를 위한 공동체 예산 및 세제의 정착이 미약했으리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맥족의 이러한 유목 문화를 근거로 당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유목 국가이던 흉노와의 연관성을 의심해볼 수도 있다. 물론 동시대 존재했던 숙신도 부분적인 유목 문화가 있기는 했지만 숙신은 대개 유목과 농경, 어로를 병행하는 삼림민족이었다. 순수 유목 민족으로는 흉노로 대표되는 알타이계 민족이 그 당시 유일했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따르면 예족은 호랑이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곽박의 《이아(爾雅)》, 《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맥(貊)'이 곰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로부터 단군신화(檀君神話)에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로 남아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맥계는 후에 고구려 건국 및 확장시에 보다 확실하게 대두된다. 물론 고구려 세력이 유일한 맥계 공동체는 아니었고, 고구려 통합 과정에서 대수맥(大水貊), 소수맥(小水貊), 양맥(梁貊) 등이 편입되어 나간 것이다."

(자료 : 예맥, 나무위키)

 

- Vardanes I (AD 40-46) 참고 자료

 

In c. 40 AD, Vardanes' father and reigning Parthian king Artabanus II (r. 12–40) died, entrusting his realm to Vardanes. However, the throne was seized by Gotarzes II, an adopted son of Artabanus II. Gotarzes had another of his brothers, Artabanus, along with his wife and child, executed shortly after. An uproar against this execution shortly followed, with an appeal being sent to Vardanes, who took Gotarzes by surprise and defeated him, after travelling 375 miles in two days. Vardanes was applauded by the governors of the neighbouring Parthian provinces, and quickly gained control over most of the Parthian realm. The Mesopotamian city of Seleucia, which had been in rebellion since 35, did not acknowledge Vardanes, who soon besieged the city. However, the long siege of Seleucia resulted in Gotarzes gaining the upper hand in the conflict, allowing him to raise a new force and drive off Vardanes, who fled to Bactria in Central Asia.


At the same time, Armenia suffered turmoil, when its Arsacid king Orodes, the brother of Vardanes, was deposed by the Roman emperor Claudius (r. 41–54), who appointed the Pharnavazid prince Mithridates in his stead. Simultaneously, just before Vardanes and Gotarzes clashed in battle, they reached an accord after Gotarzes informed Vardanes of an conspiracy being planned against them by a prominent group. The accord was that Vardanes was to keep his crown, while Gotarzes withdrew to Hyrcania. In June 42, Vardanes forced Seleucia to submit to the Parthians again after a rebellion of seven years. He heavily decreased the autonomy of the city, notably its privilege to mint its own coins, which was removed. Around the same time, the Greek philosopher Apollonius of Tyana visited the court of Vardanes, who provided him with the protection of a caravan as he traveled to the realm of the Indo-Parthians. When Apollonius reached Indo-Parthia's capital Taxila, his caravan leader read Vardanes' official letter, perhaps written in Parthian, to an Indian official who treated Apollonius with great hospitality.

 

Encouraged by his recent triumphs, Vardanes prepared to invade and reconquer Armenia, but ultimately abandoned his plans, due to threats of war from the Roman governor of Syria, Gaius Vibius Marsus, and likewise renewed conflict with Gotarzes, who terminated their accord. Vardanes defeated Gotarzes on the Erindes, as river situated on the Media-Hyrcania border. He then proceeded to conquer the remaining Parthian provinces, reaching as far as Aria. In c. 46 he was assassinated while hunting at the instigation of a party of Parthian nobles, who feared that their status might become endangered.

 

(source : Vardanes I (AD 40-46), Wikipedia)

 

Eastern territories of the Achaemenid Empire, including Aria (around the city of Areia)

(source : Wikipedia)

 

(4) AD 54-57 : 정변의 상황, 왕계 : 박씨 -> 석씨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AD 54)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AD 56)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三十四年秋九月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AD 57)

 

유리이사금 박씨 왕계에서 탈해 이사금 석씨 왕계로 넘어 가는 과정은 상기 기록처럼 순탄하진 않은 것 같다. 살별이 나타나고 용이 나타난다고 하고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고 했다. 모두 정변의 징조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42년부터 54년까지 12년동안 아무 기록이 없다. 그 이전의 정변의 상황을 모두 지워 버린 것으로 보인다.

실제 파르티마제국의 역사를 보니 이 공백기의 12년동안, 시기가 다소 다르지만 약 10년간 (AD 42-51) 혼란의 상황이다.  Artabanus II (AD 12-41)를 이은 Vardanes I (AD 40-46), 이와 경쟁한 Gotarzes II (AD 40-51), 그리고 탈해 이사금으로 보이는 Vologases I (AD 51-78)의 순이다. 따라서 탈해이사금 전에 Vardanes I와 Gotarzes II와 사이에 왕권 다툼이 심했다 (AD 40-46) (위에서 인용한 Vardanes I 자료 참조). AD 46-51 기간의 GotarzesII에 관한 자료는 위키피디아에 거의 없어 탈해이사금의 등극 전의 상황은 모른다.  다만 아래서 보듯이 Vologases I는 등극후에, 아마도 AD 51-57년 기간동안 Vardanes II와 Hyrcania지방의 반란으로 혼란을 겪었다.

 

"Vologases was a son of Vonones II, a Parthian prince who ruled the northern Iranian kingdom of Media Atropatene, and possibly subsequently the whole Parthian Empire for a few months. Vologases' mother was a Greek concubine of the Parthian harem. The name of the Arsacid branch established by Vologases I has been coined by the modern historian Marek Jan Olbrycht as the "Vologasids" or the "House of Vologases I", which ruled the Parthian Empire from 51 till its fall in 224.....

 

Vologases was unable to aid his brother, due to the rebellion of his son Vardanes II and subsequently a revolt in the eastern Parthian province of Hyrcania.

(source : Vologases I (51-78), Wikipedia)

 

Gotarzes II (Parthian: ????? Gōtarz) wa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intermittently from 40 to 51. He was an adopted son of Artabanus II. When his father died in 38 and his brother Vardanes I succeeded to the throne, Gotarzes II rebelled.

 

The Roman sources are obscure on his background; however, other surviving evidence reveals a lot more about the origins of Gotarzes II. An inscription on a rock relief that was discovered by Rawlinson at Sarpul-I-Zohab on a main road in Iranian Kurdistan introduces him as Gotarzes, son of Gev. From this inscription, it has been surmised that Gotarzes II was the son of a Hyrcanian nobleman called Gev who served as satrap in that region. Later, he was adopted by Artabanus II during his exile in recognition of a debt that his father owed Artabanus II.  When Gotarzes II later took the throne, he referred to himself as a son of Artabanus II, as evidenced by a surviving coin bearing the legend: Arsaces, king of kings, called Gotarzes, son of Artabanos.

 

The Mesopotamian city of Seleucia, which had been in rebellion since 35, did not acknowledge Vardanes, who soon besieged the city. However, the long siege of Seleucia resulted in Gotarzes gaining the upper hand in the conflict, allowing him to raise a new force and drive off Vardanes, who fled to Bactria in Central Asia.

 

At the same time, Armenia suffered turmoil, when its Arsacid king Orodes, the brother of Vardanes, was deposed by the Roman emperor Claudius (r. 41–54), who appointed the Pharnavazid prince Mithridates in his stead. Simultaneously, just before Vardanes and Gotarzes clashed in battle, they reached an accord after Gotarzes informed Vardanes of an conspiracy being planned against them by a prominent group. The accord was that Vardanes was to keep his crown, while Gotarzes withdrew to Hyrcania.

 

Encouraged by his other recent triumphs, Vardanes prepared to invade and reconquer Armenia, but ultimately abandoned his plans, due to threats of war from the Roman governor of Syria, Gaius Vibius Marsus, and likewise renewed conflict with Gotarzes, who terminated their accord. Vardanes defeated Gotarzes on the Erindes, as river situated on the Media-Hyrcania border. He then proceeded to conquer the remaining Parthian provinces, reaching as far as Aria. In c. 46 he was assassinated while hunting at the instigation of a party of Parthian nobles, who feared that their status might become endangered.

 

Soon afterwards Gotarzes II died--according to Tacitus, of an illness, although Josephus says that he was murdered. His last coin is dated from June 51. Gotarzes II was succeeded briefly by his uncle Vonones II and then by the latter's son, Vologases I.

 

(source : Gotarzes II, Wikipedia)

 

2) 탈해이사금 (AD 57-80)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탈해이사금 시기에는 백제에 위협에 대비하여 왜국수교 (AD 59)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하고, 백제와는 AD 58-76기간동안 긴 전쟁을 했고, 73년이후에는 왜(AD 73)와 가야(AD 77)와도 전쟁을 했다.

 

- 탈해 이사금 (AD 57-80)에 관한 참고 자료

 

"즉위 후 백제에 위협에 대비하여 왜국수교하는 등 외교에 힘을 기울였고, 백제가야와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63년 백제의 외교 요청을 거부
  • 64년 백제의 침공을 격퇴
  • 66년 와산성의 함락과 탈환
  • 70년의 백제 침공
  • 73년 왜구의 침략
  • 74년의 백제의 노략질
  • 75년 와산성 함락, 76년 탈환
  • 77년 가야와의 교전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一月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57)
二年春一月 호공을 대보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토함산에 오르다
三年夏五月 왜국과 우호를 맺다 (AD 59)
三年夏六月 살별이 천선에 나타나다
五年秋八月 마한의 장군 맹소가 항복하다 (AD 61)
七年冬十月 백제 왕의 회동 요청을 거부하다 (AD 63)
八年秋八月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다 (AD 64)
八年冬十月 백제의 구양성 공격을 물리치다 (AD 64)
八年冬十二月지진이 일어나고 눈이 오지 않다
九年春三月 알지가 태어나고 국호계림으로 고치다 (AD 65)
十年 백제에게 와산성을 빼앗겼다가 회복하다 (AD 66)
十一年春一月 박씨 귀척을 주주·군주로 삼다 (AD 67)
十一年春二月 순정이벌찬으로 삼다
十四年 백제가 침입하다 (AD 70)
十七年 왜인의 침공을 막다가 우오가 전사하다 (AD 73)
十八年秋八月 백제의 침공을 막다 (AD 74)
十九年秋九月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다
十九年冬十月 백제가 와산성을 함락시키다 (AD 75)
二十年秋九月 백제에게 빼앗겼던 와산성을 회복하다 (AD 76)
二十一年秋八月 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기다 (AD 77)
二十三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AD 79)
二十四年夏四月 강한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二十四年秋八月 왕이 죽다

(자료 : 나무위키, 탈해 이사금) 

 

(1) AD 58-76 : 백제(로마)와의 전쟁

AD 58년 시작한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AD 63년 일차로 마무리 된 것 같다. 그런데 AD 61년에는 마한으로 표시하지만 AD 63년은 백제로 표시했다. AD 63년에는 백제왕의 회동 요청을 탈해 이사금은 거절했다.  아래 파르티마와 로마의 전쟁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인다. 전쟁의 발단은 아르메니아의 왕에 누구편을 왕으로 하느냐로 시작되었다고 했다. 63년에는 파르티마측에서 원하는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하는데 로마 측이 동의하에 전쟁이 종료되었다 했다.  반면 백제측 다루왕 자료에서는 낭자곡성까지 영토를 넓혔고 사신을 보내어 회동을 요청했으나 탈해이사금이 응하지 않았다 했다.

 

파르티마제국의 구체적 자료에서는 아래 지도 2에서 보듯이 초기에는 Media Atropatene지역에서 로마와 전쟁이 있었는데, 후에는 아래 지도 3에서 보듯이 시리아와 파르티마제국 사이에 있는 Osrhoene지역에서 로마와 전쟁이 이루어졌다. 로마의 Nero황제가 파르티마의 Vologases I을 초청했는데, Vologases I은 Nero황제가 오는 것이 더 쉽지 않겠느냐고 답을 하였다는 서술도 있다.

 

三年夏六月 살별이 천선에 나타나다 (AD 59)
五年秋八月 마한의 장군 맹소가 항복하다 (AD 61)
七年冬十月 백제 왕의 회동 요청을 거부하다 (AD 63)

 

로마 제국 대 파르티아

58년에 또다른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 티리다테스를 강제로 아르메니아 왕좌에 앉히자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이다. 코르불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티리다테스 왕실을 전복시키고 카파도키아 왕자를 왕위에 앉혔고, 아르메니아의 반격으로 양군 사이에 여러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양국의 전쟁은 63년 티리다테스의 왕위 등극을 로마 황제에게 승인받는 것에 로마가 동의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자료: 위키백과, 로마-파르티마​ (BC 66- AD 217) 전쟁)

 

이후 재개된 AD 64년 부터 AD 76년까지의 전쟁은 와산성, 구양성을 두고 신라 백제 양국이 일진일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파르티마 제국의 wikipedia기록은 전혀 이러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신라 백제의 AD 64-76년의 전쟁상황은 파르티마-로마의 AD 58-63 전쟁상황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구양성은 Media Atropatene지역,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장이 된 와산성은 Osrhoene지역이라는 느낌이다.  Wikipedia기록은 다음 Pacorus II에서도 일부러 그런 것처럼 내용이 빈약하다.


八年秋八月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다 (AD 64)
八年冬十月 백제의 구양성 공격을 물리치다 (AD 64)

十年 백제에게 와산성을 빼앗겼다가 회복하다 (AD 66)

十四年 백제가 침입하다 (AD 70)


十八年秋八月 백제의 침공을 막다 (AD 74)


十九年冬十月 백제가 와산성을 함락시키다 (AD 75)
二十年秋九月 백제에게 빼앗겼던 와산성을 회복하다 (AD 76) (자료 : 삼국사기)

 

상기 시기의 파르티마제국의 기록은 Vologases I은 로마의 Nero 다음왕 Vespasian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서술하며, 유대인폭동시 궁기병 4만명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코카서스산맥 위의 Alans족 (말갈족)이 아르메니아와 Media Atropatene (아르메니아와 파르티마 접경지역)까지 침략해 내려와 노략질을 하고 곧 물러갔다고 서술된다. 이때(AD72)는 Vologases I의 아들인 Pacorus II가 파르티마 왕이 되기 전에 Media Atropatene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Alans(말갈)의 침략에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Alans이 물러간 후 다시 돌아 왔다고 한다.

 

"However, Vologases I was still satisfied with this result and honored the memory of Nero, though he stood in good relations with Vespasian also, to whom he offered an army of 40,000 horse archers during the Jewish Revolt. Soon afterwards the Alans, a great nomadic tribe beyond the Caucasus, invaded Atropatene and Armenia; Vologases I applied in vain for help to Vespasian, but did not achieve any decisive result. The Alans quickly withdrew with a lot of booty after plundering Armenia and Media Atropatene. Vologases I later died in 78, and was succeeded by his son Pacorus II." (source : Vologases I, Wikipedia)

 

- 백제 다루왕 (AD 28-77) 참고 자료

 

10년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고 28년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성격이 관대하고 후덕하며 위망(威望)이 있었다고 한다.

 

29년 봄 정월에 시조 동명(東明)의 묘(廟)에 배알하고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고, 

 

33년에는 남부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38년에 흉년으로 백성의 살림이 곤란하자 전국적으로 양주(釀酒)를 금지시키고 지방을 친히 순시하며 빈민을 구호했다. 

여러 차례 말갈(靺鞨)과 싸워 이를 격퇴하고 

 

56년에는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동북지방의 방비를 정비했다.

 

63년 겨울 음력 10월에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영토를 넓히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 탈해 이사금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64년 가을 음력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음력 10월에 또 신라의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신라의 탈해 이사금은 기병 2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3]

 

66년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에게 곧 다시 빼앗겼다.

 

70년에 다시금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4년에 신라의 변방을 노략, 탈해 이사금이 병사를 보내 격퇴당했다.

75년 음력 10월 신라의 와산성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그러나 76년 가을 음력 9월에 신라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을 다시 빼앗고, 백제로부터 와서 살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자료 : 다루왕, 위키백과)



- Vologases I (AD 51-78) 참고 자료

 

"Vologases was a son of Vonones II, a Parthian prince who ruled the northern Iranian kingdom of Media Atropatene, and possibly subsequently the whole Parthian Empire for a few months. Vologases' mother was a Greek concubine of the Parthian harem. The name of the Arsacid branch established by Vologases I has been coined by the modern historian Marek Jan Olbrycht as the "Vologasids" or the "House of Vologases I", which ruled the Parthian Empire from 51 till its fall in 224.

 

Invasion of Armenia

 

Map of Parthian–Roman borders


Vologases became the new Parthian king in 51. He sought to continue the policies of the prominent former Parthian king Artabanus II (r. 12–38/41), and thus, one of his first objectives was to strengthen the bolster the Parthian position in strategically and politically unstable regions which had served for decades as the source of war with the Romans. He gave the kingship of Media Atropatene to his elder brother Pacorus, while the even more politically important kingship of Armenia was given to Vologases' younger brother Tiridates after a Parthian invasion of the country in 53.

Vologases felt his invasion was justified due to the recent usurpation of the Armenian throne by the Iberian prince Rhadamistus, which he saw as a violation of the former settlement made between the Parthians and Romans regarding Armenia. Lack of resources and a winter epidemic forced Vologases to withdraw his troops from Armenia, allowing Rhadamistus to come back and punish locals as traitors; they shortly revolted and helped Tiridates restore his authority. Rhadamistus himself returned to Iberia and was soon put to death by his father Pharasmanes I for having plotted against the royal power in order to prove his loyalty to Rome.

 

War with the Romans

Further information: Roman–Parthian War of 58–63 

 

Operations during the first two years of the war: Corbulo's invasion and conquest of Armenia

 

Unhappy with the Parthian reconquest of Armenia, in 54 the newly ascended Roman emperor Nero sent his general, Corbulo to restore Roman authority in the country. Vologases was unable to aid his brother, due to the rebellion of his son Vardanes II and subsequently a revolt in the eastern Parthian province of Hyrcania. Supported by Vologases, Tiridates sent flying columns to raid the Romans far and wide in 58. Corbulo responded by using the same tactics. He also emboldened the Roman client-kings Antiochus IV of Commagene, Pharasmanes I, and the Moschi tribes to attack outlying areas of Armenia.

 

The loyalty of the Armenian population was split up between the Parthians and Romans, although overall they preferred Parthian rule, due to it being more tolerant, and also due to the similarity between Parthian and Armenian culture. Corbulo conquered the Armenian capital of Artaxata, which he had destroyed. The following year (59) he conquered Tigranocerta in southern Armenia, where he wintered. Tiridates took advantage of this situation to return to northern Armenia from Atropatene. However, by the spring of 60, he was forced to withdraw by the Roman forces once more.


Operations during the final years of the war: the raids of Tigranes into Parthian territory provoked a Parthian counterattack, which culminated in the surrender of the Roman army of Pateus

 

Nero appointed a Cappadocian prince named Tigranes on the Armenian throne. The new ruler, protected by a strong Roman force, became bold and started in 61 attacking the border areas of Adiabene, a vassal kingdom of the Parthians. The Adiabenian king, Monobazos, including Tiridates, protested in front of the entire Parthian court, complaining that Vologases did not do enough to protect his subjects.

 

This situation was important and endangered the relations between Vologases and his subjects. During a public feast, Vologases supported Tiridates' appeals, and placed the royal diadem on his head. He also appointed a certain nobleman named Monaeses as the commander of a Parthian force that included contingents from Adiabene. Monaeses was sent into Armenia, where he besieged Tigranocerta in 62. The city was strongly fortified, and had been further reinforced by two legions. The Parthians attempts to scale the city proved fruitless, with the Adiabenian contingents suffering heavy losses.

 

At this point, Corbulo sent an envoy to Vologases, who had encamped with his court at Nisibis, near Tigranocerta and the Roman–Parthian border. The failed siege and a shortage of fodder for his cavalry forced Vologases to agree to withdraw Monaeses from Armenia. At the same time, however, the Romans also left Armenia, which, according to the contemporary Roman historian Tacitus, raised suspicions as to Corbulo's motives: some whispered that he had reached an agreement of mutual withdrawal with the Parthians, and that he was unwilling to risk his reputation by renewing hostilities against them. At any rate, a truce was arranged and a Parthian embassy was dispatched to Rome. The negotiations failed to reach an agreement, and war was resumed in the spring of 62.

 

The Roman government then sent Lucius Caesennius Paetus, governor of Cappadocia, to settle the question by bringing Armenia under direct Roman administration. Paetus was an incapable commander and suffered a humiliating defeat at the Battle of Rhandeia in 62, losing the legions of XII Fulminata commanded by Calvisius Sabinus and IIII Scythica commanded by Lucius Funisulanus Vettonianus. The command of the troops was returned to Corbulo, who, the following year, led a strong army into Melitene and beyond into Armenia, eliminating all of the regional governors he suspected were pro-Parthian. Finally in Rhandeia, Corbulo and Tiridates I met to make a peace agreement. The location of Rhandeia suited both Tiridates I and Corbulo. It appealed to Tiridates I because that is where his army had beaten the Romans and sent them away under a capitulation; on the other hand, it appealed to Corbulo because he was about to wipe out the ill repute earned before in the same location. When Tiridates I arrived at the Roman camp he took off his royal diadem and placed it on the ground near a statue of Nero, agreeing to receive it back only from Nero in Rome. Tiridates I was recognized as the vassal king of Armenia; a Roman garrison would remain in the country permanently, in Sophene while Artaxata would be reconstructed. Corbulo left his son-in-law Lucius Annius Vinicianus to accompany Tiridates I to Rome in order to attest his own fidelity to Nero.

 

After Tiridates' visit in Rome, Nero summoned Vologases I to Rome several times, but when the invitations became burdensome to Vologases I, he sent back a dispatch to this effect: "It is far easier for you than for me to traverse so great a body of water. Therefore, if you will come to Asia, we can then arrange to meet each other."

 

(source : Wikipedia, Vologases I of Parthia)

 

(2) 왜와의 수교 (AD 59) 및 전쟁 (AD 73)


三年夏五月 왜국과 우호를 맺다 (AD 59)

十七年 왜인의 침공을 막다가 우오가 전사하다 (AD 73)


 73년에는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위키백과)

 

AD 59 당시의 왜는 탈해이사금의 설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 탈해이사금 출생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 

 

가락국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또한, 가야의 역사를 다룬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인 탈해가 가야에 먼저 도래하여 김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자료 : 탈해이사금, 위키백과)

 

석탈해의 출생설화를 보면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용성국에서 왕권다툼이나 태자 지명에서 밀려 떠나게 된다. 가락국에 도달하여 김수로왕과 왕권을 다투다 패배하여 또 떠난다. 그리하여 진한의 아진포로 들어 오게 되었다. 이때가 신라의 박혁거세 시기이다.

필자는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아르메니아지역에 있는 Commagene왕국이라 추정했다. 따라서 파르티마 제국의 서쪽에서 석탈해는 신라에 진입했다는 것이 된다. 그럼 왜의 동북쪽 1천리에 있는 용성국은 지중해 동쪽 어느 해안일 수 있다. 왜는 지중해 동쪽에 있는 섬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광개토태왕시 왜의 임나를 추정할 때, 사이프러스섬이라 추정했다. (본 블로글 참조) 임나는 계림 즉 신라의 남서쪽에 있으며 북쪽이 바다로 되어 있다고 일본서기에서 언급했다.

 

그러므로 AD 59-73 당시의 왜도 지중해 동쪽에 있는 섬의 세력일 수 있다. 왜는 원래 도이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치열한 전쟁중이었다. 특히 59년에는 시리아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로마인 백제와 파르티마인 신라가 싸우고 있었다. 이 지역에 가까운 왜가 위협을 느껴 신라와 수교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석탈해의 출신지역인 용성국이 이들 왜와 가까와 교류를 하고 있어 이미 알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AD 73년 왜의 침입이 있어 전쟁을 했다는 것은 파르티마제국인 신라가 시리아까지 진출하여 지중해 동쪽 해안까지 진출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3) AD 77 : 가야와의 전쟁

 

二十一年秋八月 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기다 (AD 77)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자료 : 위키백과)

 

황산진이란 곳은 바닷가 수군기지란 뜻이다. AD 76년 백제로부터 와산성을 회복했다 했고 그후 가야와 싸워 이겼다 했다. 우리는 앞에서 로마와 파르티마 제국 사이의 치열한 전쟁 AD 58-63 기간중, 후반부는 시리아와 가까운 Osrhoene지역이라 했고, 여기에 와산성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따라서 와산성을 회복한 파르티마는 가까이 있는 Commagene왕국 금관가야와 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전편 글 (I)에서 꼬깔 모자의 이야기를 매개로 가야가 파르티마 제국 서부의 아르메니아 지역과 파르티마제국 동부의 사카스탄지역의 둘로 나누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여기서 가야군은 파르티마제국 서부에 있는 김수로왕의 가야, Commagene왕국으로 판단된다.

 

AD 77년 가야의 침입이 있었다고 신라 역사에서 최초로 기술된다. 가야와의 전투와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압독국 정벌이 파사이사금 시기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김수로왕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여기서도 가야는 금관가야인 Commagene왕국과의 전쟁으로 판단된다.

 

(4) AD 65-67 : 박씨 가문과 김씨세력의 연합

김알지의 김씨 세력의 등장 (계림지역) (AD 65)과 박씨 세력의 등장 (AD 67)은 박씨 왕이 다시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정변을 거쳐 석씨 왕계에서 박씨 왕계로 바뀌는 것을 설명해 준다. 김알지의 출신지역 계림이 어느 지역인지 연구하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호를 계림으로 고칠 정도이다.

 

九年春三月 알지가 태어나고 국호계림으로 고치다 (AD 65)

十一年春一月 박씨 귀척을 주주·군주로 삼다 (AD 67)

 

이후 파르티마 왕이 되는 Pacorus II의 지원세력을 알면 김씨 세력의 근거인 계림지역을 다소 파악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위키피디아 자료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그러나 파사이사금의 부인이 김씨이므로 왕의 외척세력이 되었다. Pacorus II는 Vologases III 외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두 아들은 아르메니아 왕으로, 다른 아들은 사라센왕으로 지냈다고 서술된다. 따라서 계림지역은 아르메니아 지역이나 사라센지역 (시리아 등 근동 아시아지역)의 둘 중 하나로 추정할 수 있는데 (외척세력, 지원세력 지역의 왕 임명 가정시), 그동안 아르메니아와 관련된 전쟁은 여러 번 있었으나 계림이란 지역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사라센지역은 파르티마제국에게 로마와 싸워 얻은 새로운 지역이다.

 

Pacorus II가 지중해로부터 인도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확보하려 노력했다는 이후의 기술은 지중해 연안까지 확보 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사라센지역이 계림지역이 아닐까 추정된다. 광개토태왕의 임나 정벌시 임나지역은 일본서기에서 계림의 남서쪽에 있다고 했다. 사이프러스섬이 임나지역이라 추정할 때, 계림지역은 사라센지역이 된다. 또한 이후 신라 역사에서 문무왕으로 추정되는 (아랍의) 무아이와 I세는 칼리프가 되기 전 사라센지역과 이집트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김씨왕계가 진골출신인 무열왕부터 다시 시작한 점을 고려하면, 사라센지역이 계림지역으로 판단된다. 

 


"Besides Vologases III, Pacorus had three other sons: Axidares, and Parthamasiris, who successively served as kings of Armenia, and Meredates, who served as king of Characene in the mid-2nd century." (source : Pacorus II, Wikipedia)

 

(5) AD 79-80 : 정변의 혼란  석씨왕계에서 박씨 왕계로

 

二十三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AD 79)
二十四年夏四月 강한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AD 80)
二十四年秋八月 왕이 죽다 (AD 80)

7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였다. (위키백과)

 

파사이사금으로 추정되는 Pacorus II가 왕이 된 후 바로 Artabanus III's revolt (AD 79/80)와 Vologases II's revolt (AD 80)가 파르티마제국에 있었는데, 위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석씨 왕계에서 박씨 왕계로 옮겨 가는 과정의 혼란으로 보인다. 위키자료에는 AD 79년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병합 하였다 했는데, Artabanus III와 Vologases II의 반란지역일 수도 있다.

 

"Pacorus II (also spelled Pakoros II; Parthian: ????) was the King of Kings of the Parthian Empire from 78 to 110. He was the son and successor of Vologases I (r. 51–78).

 

During the latter part of his father's reign, Pacorus ruled the Parthian Empire along with him. After Vologases I's death in 78, Pacorus became the sole ruler, but was quickly met by a revolt by his brother Vologases II, which lasted until the latter's defeat in 80. In 79/80, Pacorus' rule was contended by another Parthian prince—Artabanus III—whom he had defeated by 81.

(source : Pacorus II, Wikipedia)

 

3) 파사이사금 (AD 80-112)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


파사이사금의 파사는 페르시아를 가리킨다. 파사국, 파사산성의 존재는 당시 신라가 페르시아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실제 파사이사금은  AD 87년, 서쪽으로 판단되는 곳에 가소성, 마두성을 쌓았다. AD 94년 8월에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했다고 나온다. 


"87년(파사이사금 8)에 가소성(加召城)·마두성(馬頭城)을 쌓았다. 이것은 경주를 벗어난 맨처음의 축성기록이다. 94년에 가야 군사가 마두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1,000여 명의 기병을 사용하여 이미 기마전투의 양상을 볼 수 있다.

101년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102년에는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 사이의 영토분쟁을 가야의 수로왕에게 부탁해 해결한 뒤에, 다시 음즙벌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러자 실직국과 압독국(押督國)도 항복해왔다고 한다.

108년에는 다벌국(多伐國)과 초팔국(草八國)을 합병하였다.

이러한 파사이사금의 치적에 근거해 이 왕대(王代)를 고대국가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파사이사금)


"6년 봄 정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8년 7월,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15년 봄 2월,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자 아찬 길원을 보냈다. 길원은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퇴하였다.


가을 8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17년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18년 봄 정월,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를 치려 하였으나,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22년 봄 2월, 성을 쌓고, 이를 월성이라 이름지었다.

가을 7월,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

23년 가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우두머리를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은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보제의 종이 도망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돌려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 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

25년 가을 7월, 실직이 배반하자 군사를 보내 토벌 평정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26년 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

27년 봄 정월, 왕이 압독에 행차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3월에 압독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8월, 마두성주에게 명령하여 가야를 정벌토록 하였다.

29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자료 : 파사이사금, 삼국사기)


"일단 파사 이사금의 파사(婆娑)는 범어의 유제(bhasa, 有諦, 진리가 모습을 드러냄)를 뜻하는 단어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금관성파사석탑도 이와 똑같은 한자를 쓴다.

또한 파사 이사금 부인의 성씨로 김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김알지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

(자료 : 나무 위키, 파사이사금)

 

六年春一月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다 (AD 85)
六年春二月 길원을 아찬으로 삼다
六年夏四月 객성이 자미에 들어가다
八年秋七月 성루를 수리하고,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다 (AD 87)
十一年秋七月 공적인 일과 전야 개척에 힘쓰지 않는 주주·군주를 내치다 (AD 90)
十四年春一月 윤량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삼다
十四年春二月 고소부리군에 순행하다

十五年春二月 마두성에서 가야군을 격퇴하다 (AD 94)

十五年秋八月 알천에서 열병을 하다 (AD 94)

十七年秋九月 가야의 습격을 격퇴하다 (AD 96)
十八年春一月 가야를 정벌하려다가 중지하다 (AD 97)

二十二年春二月 월성을 쌓다 (AD 101)
二十二年秋七月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AD 101)
二十三年秋八月 실직곡국압독국이 항복해 오다 (AD 102)

二十五年秋七月 실직의 반란을 평정하다 (AD 104)
二十六年春一月 백제가 화해를 청하다 (AD 105)
二十七年春一月 압독에 행차해 진휼하다 (AD 106)
二十七年春三月 왕이 압독으로부터 돌아오다
二十七年秋八月 마두 성주가 가야를 정벌하다 (AD 106)
二十九年夏五月 각 지를 진휼하고 여러 나라를 병합하다 (AD 108)

(자료 : 삼국사기, 나무위키, 파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신라는 AD 85년 백제의 변경 침략에 이어, 가야와의 싸움 및 정벌 (AD 94-AD 106)을 주로 말하고 있다.   AD 87년, 백제와 가야에 대비해 가소성, 마두성을 쌓았다. AD 102-104기간에는 실직곡국과 압독국을 정벌했다. AD 105년에는 백제가 화해를 요청했다. AD 106년에는 가야를 정벌했다.

AD 94년 8월에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했다고 나온다.

AD 108년에는비지국, 다벌국구, 초팔국을 정벌했다.

 

- 백제 기루왕 (재위 AD 77-128) 시기의 참고 자료 

치세

77년부터 128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77년부터 97년경까지 친정하였고 97년경부터 103년경을 전후한 시기까지 아들 부여개루 왕자(훗날 개루왕)가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03년경부터 128년 붕어할 때까지 다시 친정하였다.

생애

33년(다루왕 6)에 태자로 책봉 되었다. 

다루왕이 죽자 77년에 즉위하였고 

85년에 신라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105년 신라와 평화조약을 맺고 그 이후 신라와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125년 말갈의 침입을 받은 신라에 원병을 보냈다.

 

제2대 다루왕의 맏아들로서 서기 33년 (다루왕 6)에 태자로 책봉되어 77년에 다루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루왕 치세에 대한 기록에는 천문이변 지진 큰 가뭄 태풍 기상이변 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기록의 내용이 흉년 재난 또는 흉조를 뜻하는 것들이 많음은 기루왕 치세의 백제가 큰 시련기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루왕에 대해서는 서자라는 설이 있으며,그 이유는 기루왕 21년(97년)에 두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음에 따라 반란을 은유하며, 기루왕 27년(103년)에 왕이 한산에서 사냥해서 신록을 잡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때 잡은 신록이 개루왕일 것이란 설이 있고 개루왕이 이 반란을 진압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나이 차이가 매우 큼 역시 이를 방증한다. 또한 고이왕이 개루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있으므로, 부여질 역시 확실하게 기루왕의 아들일 수 없다.

(자료 : 위키백과, 기루왕)

 

다음으로 아래 파르티마제국의 역사 기록을 보자. 파르티마제국에서는 Pacorus II (AD 78-110)왕이 파사이사금(AD 80-112) 시기의 왕이다. 시기도 거의 유사하고, 재위기간도 32년으로 똑같다.

 

- 파사이사금으로 판단되는 Pacorus II에 대한 참고 자료

 

"Pacorus II (also spelled Pakoros II; Parthian: ????) was the King of Kings of the Parthian Empire from 78 to 110. He was the son and successor of Vologases I (r. 51–78).

During the latter part of his father's reign, Pacorus ruled the Parthian Empire along with him. After Vologases I's death in 78, Pacorus became the sole ruler, but was quickly met by a revolt by his brother Vologases II, which lasted until the latter's defeat in 80. In 79/80, Pacorus' rule was contended by another Parthian prince—Artabanus III—whom he had defeated by 81. A third Parthian contender, Osroes I, appeared in 109. The following year, Pacorus was succeeded by his son Vologases III, who continued his father's struggle with Osroes I over the Parthian crown.

 

Like his father, Pacorus sought to accomplish the goal of Artabanus II (r. 12–38/41), by attempting to establish a long and structured trade-route that spanned through East Asia, India and the coast of the Mediterranean Sea. This planned long trade-route would greatly improve the economy of the Parthian Empire.

 

Parthian interest also continued to grow in eastern lands of Khwarazm, Bactria, and the Hindu Kush. The influence of the Parthian Empire is demonstrated by the existence of Parthian aspects in the coinage of numerous political entities in those areas. During his last years of rule, Pacorus co-ruled with his son Vologases III. In 109, a third Parthian contender named Osroes I appeared. In 110, Pacorus sold the Arsacid vassal kingdom of Osroene to Abgar VII. Pacorus died in the same year, and was succeeded by Vologases III, who continued his father's struggle with Osroes I over the Arsacid crown."

 

(source : Wikipedia, Pacorus II (AD 78-110))

파사이사금의 기록은 주로 서쪽 백제와 가야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위키피디아자료를 보면 Pacorus II는 Vologases I (탈해 이사금으로 추정)처럼 서쪽 지중해에서 동부 힌두쿠시까지 상업통로 즉 실크로드의 확보에 노력했다고 간단히 언급된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음이 아쉽다. 중공측의 사가들에 입김에 의해 이란측이나 위키피디아가 소신 껏 자료를 싣지 못한 느낌이다.

 

(1)  AD 87 - 106 : 가야와의 전쟁

 

八年秋七月 성루를 수리하고, 마두성을 쌓다 (AD 87)

十七年秋九月 가야의 습격을 격퇴하다 (AD 96)

十八年春一月 가야를 정벌하려다가 중지하다 (AD 97)

二十七年秋八月 마두 성주가 가야를 정벌하다 (AD 106)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야는 파르티마 서부에 있는 아르메니아지역으로 판단된다. 백제와의 완충지역인 이곳은 백제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가야를 정벌한 것이 아닌가 한다.  Pacorus II가 지중해 연안까지 확보하려는 정책에 가야가 위기를 느껴 공격한 것인지 모른다. 105년 백제와 화해후 106년 가야를 정벌했다. 

 

 

(2) AD 73 - 94 : 반초의 활동과 파르티마제국의 동부 경략

 

十五年秋八月 알천에서 열병을 하다 (AD 94)

 

파사이사금의 기록은 주로 백제와 가야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위키피디아자료를 보면 Pacorus II는 Vologases I (탈해 이사금으로 추정)처럼 서쪽 지중해에서 동부 힌두쿠시까지 상업통로 즉 실크로드의 확보에 노력했다고 간단히 언급된다.  

 

- 파르티마 제국 동부 경략

 
Parthian interest also continued to grow in eastern lands of Khwarazm, Bactria, and the Hindu Kush. 

 

그런데 반초의 활동(파사이사금 시기)은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강거국과 가까운 소륵국, 박트리아지방의 월지국, 그리고 토하라국인 귀차국을 평정했다. 즉 파르티마 제국의 동쪽을 경략했다. 위의 위키피디아 자료에서 파르티마제국의 동부 박트리아, 호라즘, 힌두쿠시를 경략한 내용과 일치한다. (즉 반초는 중국의 장수가 아니라 신라 파사이사금 시절의 신라 장수인 것이다. )

 

반초의 활동기간은 73년 시작해서 94년 언기 등의 평정으로 끝나간다. 그런데 알천에서의 사열이 94년에 있었다. 즉 알천에서의 사열은 반초의 동부 경략의 완성후 있게 되는 것이다.  알천의 한자를 보니 내천자가 들어 있다. 그래서 강이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진덕여왕시 상대등 알천과 한자가 똑같다. 그래서 Alchons Huns (370-670) 지역으로, 아래 지도의 Arachosia지역으로,  파르티마제국 동부에 있는 지역으로 판단된다.

 

Alexander's route in Bactria and India (source : Wikipedia)

 

- 반초의 활동에 대한 참고 자료

 

"- 전성기

 

영평 16년(73년), 봉거도위(奉車都尉) 두고(杜固)가 북쪽의 텐산(天山)에서 흉노를 격퇴하였다. 반초는 가사마(假司馬)로 두고와 동행하였다가 전공을 세우고 신임을 얻어 종사(從事) 곽순(郭恂)과 함께 서역의 사자로 파견되었다.

 

- 선선국 평정

 

반초가 선선국(鄯善國)에 도착했을 때 국왕 광(廣)은 예의를 갖추고 잘 대해주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냉담하게 대하였다. 반초는 수하에게 물었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흉노의 사자가 선선국에 와서 국왕이 누구에게 의탁할지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 반초는 사실을 다 아는 척하며 시중드는 사람에게 호통을 쳤다. 당황한 시종이 사실을 전부 말해버리자, 반고는 그날 밤 같이 온 일행 36명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열어 사람들이 적당하게 취한 틈을 타 말로 고무시켰다.

 

"여러분이 이곳 타향까지 나와 함께 온 것은 큰 공을 세워 부귀영화를 얻기 위함일 것이오. 지금 흉노의 사자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선선국 왕은 우리를 본 체 만 체하고 있소. 만약 저들이 우리를 흉노에게 선물로 내준다면 죽어서도 뼈조차 묻을 수 없을 것이오."

 

그러자 술기운이 올라온 수행원들이 분노를 하면서 반초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반초는 즉시 명령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를 잡겠는냐? 적의 수가 많으니 지금 쓸 수 있는 계책은 화계 뿐이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는 뜻의 '불입호혈, 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 반초는 문관인 곽순이 겁이 많으므로 기밀을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그에게만은 비밀로 하였다. 바람이 불고 날이 어두워지자, 반초 일행은 흉노의 사자가 있는 진영에 가서 불을 지른 뒤 소리를 질러 상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흉노의 사자는 후한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모두 주살되었다. 일을 마친 뒤 반초는 내분을 막기 위해 곽순에게 사실대로 말하며 공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자 곽순은 매우 기뻐했다. 반초는 선선왕에게 흉노 사자의 목을 보여주자, 선선왕은 매우 놀라며 후한에게 귀순했다. 반초는 선선국에서 돌아와 두고에게 상서를 올렸다. 두고는 기뻐하며 반초의 공로를 치하하며 별도로 서역에 사자를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명제가 반초가 있는데 다른 사람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며 반초를 군사마(軍司馬)로 임명하고 서역에 보냈다.

 

- 우전국 평정

 

두고는 반초의 수하가 얼마 되지 않아 걱정하며 사람을 더 내주려 했지만 반초가 거절했다. 당시 우전(于闐)왕이 사차국(莏車國)을 격파하자 흉노도 우전국과 결맹을 맺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반초가 우전에 도착하였을 때 국왕 광덕(廣德)은 막강한 세력을 믿고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우전왕은 무당에게 반초가 준마(駿馬)를 가졌다는 얘기를 듣고 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반초는 그러겠다고 답하고 무당에게 와서 말을 가져가라고 전했다. 그리고 무당의 목을 잘라 광덕에게 보내며 엄하게 질책하였다. 광덕은 반초가 선선국에서 흉노의 사자를 죽인 이야기를 알고있었으므로 직접 만나 반초가 듣던 명성 그대로임을 확인하자, 광덕은 매우 두려워하며 흉노의 사자를 죽이고 후한에 투항하였다.

 

- 소륵국 평정(1)

 

그때, 흉노를 위시한 귀차국은 소륵국(疏勒國)을 공격하여 귀차 사람 두제(兜題)를 소륵왕으로 삼았다. 반초는 수하 전려(田慮)를 소륵국에 보내 투항을 권유하도록 하였다. 두제는 전려가 몇 사람밖에 데리고 오지 않았으므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전려가 이미 예상했던 태도였고, 두제를 불시에 인질로 삼았다. 전려의 뒤를 따라온 반초는 소륵국의 관원들을 불러들인 뒤 귀차국의 죄를 열거하며, 전(前) 소륵국의 왕의 조카 충(忠)을 새 왕으로 세웠다. 소륵국의 백성들은 기뻐하며 후한에 귀순하였다. 충과 소륵의 관원들은 두제를 죽이자고 청했지만 반초는 반대하였다. 그는 특별히 두제를 살려줌으로써 한나라의 위엄과 덕을 과시했다.

 

영평 18년(75년), 명제가 붕어하자 귀차국 등이 그 기회를 틈타 소륵국을 공격했다. 반초와 소륵국 사람들은 미약한 세력이었지만 일심단결하여 1년을 굳게 지켜냈다. 그 결과 소륵국은 후한의 수중에 남을 수 있었다. 장제는 즉위한 뒤 반초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그에게 조서를 내려 귀국을 명했다. 반초 일행의 거취에 한나라의 생존이 달려있었으므로, 그들이 떠나려하자 소륵국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자 도위 여엄(黎揜)이 간청했다.

 

"한나라 사신이 떠난다면 우리는 귀차국에 함락당할 것입니다. 그러니 한나라 사자가 떠나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베었다. 우전국에 도착했을 때 또 사람들이 반초를 붙잡았다. 그가 탄 말의 머리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반초는 귀국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자신의 원대한 뜻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남기로 결정하고 소륵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갔을 때는 이미 귀차국의 속국이 되어있었다. 결국엔 한 차례의 전쟁끝에 반초는 6백명을 죽이고 소륵국을 되찾았다.

 

- 이읍의 모략

 

건초 3년(78년), 반초는 그 유명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썼다. 그는 소륵국, 우전국 등지에서 병사를 징발해 고묵국(姑墨國) 석성(石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2년 뒤, 반초는 장제에게 서역의 나라를 평정하자는 요청을 하자, 장제는 그의 청을 받아들이고 1천 명이 넘는 사형수들을 지원병으로 보냈다. 당시 사차국은 한나라가 출병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흉노에게 붙은 상태였고, 이어서 소륵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후한 지원군의 도움을 받은 반초는 소륵국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그 후 그는 귀차국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반초는 장제에게 오손국(烏孫國)이 강대하여 함락하기 힘드니, 사자에게 조서를 보내 오손국과 관계를 회복한 뒤에 같이 협력하여 귀차국을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도록 청하였다.

 

건초 8년(83년), 장제는 반초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위후(衛侯) 이읍(李邑)에게 사자를 호송하라고 명하였다. 이읍이 우전국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귀차국이 소륵국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놀라 더이상 전진할 수 없었던 이읍은, 장제에게 상서를 올려 '서역을 평정하는 일은 지나치게 야심찬 일이라 성공하기 어렵고, 반초도 이곳에서 처자식과 지내는 재미에 빠져서 한나라는 잊어버렸다.'고 모략하였다. 반초는 그 사실을 알고 처자식을 한나라로 돌려보내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장제는 반초를 믿고 이읍을 질책하면서 계속 길을 재촉해서 반초의 처분을 기다리라고 명했다. 반초는 이읍을 용서해주고 오손의 인질을 수도까지 호송하라고 명했다.- 소륵국 평정(2)

AD 84년:  반초는 소륵국의 병사를 일으켜 사차국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소륵왕 충이 사차국으로부터 몰래 뇌물을 받고 후한을 배신하고 서쪽의 오즉성(烏卽城)을 지켰다. 반초는 사차국 공격을 멈추고 소륵국을 공격했지만 강거국(康居國)이 정예병으로 지원군을 보내는 바람에 반년이 지나도록 함락할 수 없었다. 반초는 강거국이 월지국(月氏國)과 통혼한 사실을 알고 적들이 썼던 방법을 모방해 발본색원에 나섰다. 월지국 왕에게 보내 후한 선물을 건네며 강거국 왕이 철병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거국이 철병하자 오즉성은 바로 함락되었다.

AD 88년: 소륵왕 충이 귀차 사람과 모의하여 반초에게 거짓 투항서를 보내왔다. 반초는 숨은 계략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충은 뜻밖의 승낙에 기뻐하며 경기병을 데리고 반초에게 갔다. 반초는 병사를 매복시킨 뒤 주연을 베풀면서 충을 죽인 뒤, 그 사이에 출병하여 남은 잔당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관내(關內)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월지국 평정

소륵국을 완전히 평정한 뒤에 반초는 2만 5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사차국을 공격했고, 귀차국은 5만 군사를 지원하였다. 반초는 일부러 허장성세를 부리며 가짜 군사 정보를 누설하며 포로들을 도망치도록 놓아주었다가, 허를 찌르는 공격을 펼쳐 적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사차국은 후한에 투항하였다. 전에 반초를 도와 싸움에서 공로를 세웠던 월지국은 전한 시대 공주 유세군(劉細君)을 오손국으로 시집보낸 이야기를 떠올리며, 반초에게 후한의 공주를 달라고 청하였다가 거절당했다. 월지국왕은 수치스럽고 분하여 7만 군사를 일으켜 반초를 공격해왔다. 당시 병력이 부족했던 반초는 매우 놀랐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대처하면서 말했다.

"월지국의 병력이 많기는 하나 먼 길을 오느라 피로에 지치고 군량도 부족할 터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진영을 굳게 지키기만 한다면 열흘도 되지 않아 적국은 굴복할 것이다."

과연 월지국은 매우 고생을 하면서도 별다른 성과도 없었다. 반초는 월지국이 식량이 다하면 귀차국에 도움을 청할 것이라 예상하고 그들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병사를 매복시켜두었다. 귀차국에 식량을 요청하러 가던 월지국 병사들은 후한군에게 습격당했고, 그들의 수급을 월지국 진영에 보냈다. 월지국은 매우 놀랐고 반초는 그 기세를 타 월지국의 군대를 무찌르고 월지국을 아예 평정해버린다.

- 귀차국 평정

AD 91년:, 그 흉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귀차국도 반초에게 평정되었다. 서역에서는 이제 언기(焉耆, 카라샤르), 위수(危須), 위리(尉犁)만이 평정되지 않은채 남아있었다. 서역을 평정한 공으로 반초는 서역 도호로 봉해졌다.

- 언기, 위리, 위수 평정

AD 94년:  반초는 귀차국 등에서 징집한 7만여 군사를 동원해 언기 토벌에 나섰다. 공격에 앞서 사자를 통해 항복하라는 조서를 보냈다. 언기왕이 사자를 보내왔을 때, 누군가가 반초에게 사자를 없애버리자는 제안을 했다. 반초는 사자를 죽이면 상대방이 의심하고 더욱 경계할 것이라고 여기고 사자에게 상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언기왕은 더이상 의심하지 않고 직접 나와 반초를 맞이하는 척한 후, 요해지의 갈대라리를 불살라가며 한나라 군대가 언기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뒷통수를 쳤다. 상대방이 길을 태워버리자 반초는 양동 작전을 썼다. 급히 군사를 지름길로 보내 언기성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여 위협하라고 명했다. 언기왕은 매우 놀라 사람들을 이끌고 산으로 깊이 들어가 완강히 대항하고자 했으나, 그의 수하가 반초에게 와서 그 사실을 누설했다. 반초는 오히려 그 자를 없애버리고 언기왕의 신임을 얻은 뒤 황제가 후한 상을 내렸다며 와서 상을 받으라고 세 나라 왕을 불러모았다.

언기왕과 위리왕은 약속대로 왔지만 위수왕은 아예 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위리왕 국상(國相)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채고 몰래 도망쳐버렸다. 반초는 그들을 없앨 명분이 없어 고민하고 있던 중에, 그를 핑계로 환영 연회에 온 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린 뒤, 세 나라를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그 후 짧은 기간 동안 명목상이긴 하지만 서역 50여 개국이 후한 조정에 귀의해왔다.

(자료: 나무위키, 반초)

 

(3) AD 101 : 월성으로의 이전

 

二十二年春二月 월성을 쌓다 (AD 101)

二十二年秋七月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AD 101)

   

월성은 크테시폰 (서라벌)에 증축한 성으로 보인다. 이 당시의 파르티마제국 자료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크테시폰 내에 역사적으로 여러 지점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월성이 서울의 성이라는 것은 아래 지마이사금 시기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according to Ammianus Marcellinus he enlarged the Parthian capital Ctesiphon and built its walls." (source : Pacorus II, peoplepill.com)

 

<지마 이사금 시기의 월성과 서울>


九年春二月 큰 별이 월성 서쪽에 떨어지다 (AD 120)
九年春三月 서울에 전염병이 돌다 (AD 120)

 

Map of Seleucia-Ctesiphon in the Sassanid era (source : Wikipedia)

 

(4) AD 102-106 : 음즙벌국, 실직곡국, 압독국 정벌 및 백제와의 평화조약(AD 105)

 

김수로왕 금관가야에 접한 나라들이다. 즉  파르티마 서부 지역 정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 (로마)가 화해 요청을 하여 평화조약을 체결 (AD 105) 하였을 것이다.

 


二十六年春一月 백제가 화해를 청하다 (AD 105) (신라, 파사이사금, 나무위키)

105년 신라와 평화조약을 맺고 그 이후 신라와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백제, 기루왕, 위키백과)

 

"음즙벌국실직국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 두 나라는 먼저 파사 이사금에게 와서 중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일단 파사 이사금은 나이가 많고 지식도 많은 김해 수로왕에게 묻자고 떠넘겼다. 수로왕은 파사 이사금이 맡은 영토 문제를 대신 지혜롭게 해결해 음즙벌국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열린 연회에서 신라 6부 중 한기부의 대접이 시원치 않자 수로왕은 자객을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였는데, 이 자객이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음즙벌국에 숨었고 왕 타추간(陀鄒干)이 그를 보호했다. 이에 파사왕이 102년 음즙벌국에 침공해 왕 타추간이 항복했고, 신라의 실력 행사에 지레 겁을 먹은 실직곡국압독국도 따라 항복했다." (자료 나무위키, 파사이사금)

 

(5) AD 108 :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합병

 

가야제국의 속하는 소국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향후 가야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한 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야제국은 가라로 표시되는 아르메니아 지역의 안라국, 금관국 등의 서가야제국과 가야로 표현되는 인도에 가까운 사카지역의 대가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가야제국이 있다고 필자는 추정하는데, 아르메니아 지역의 소국가들에 대한 연구와 인도, 파키스탄에 접한 사카(색족)지역, 인도 서부해안의 지역, 보드가야가 있는 동부 인도의 벵갈만 지역을 모두 연구한 후에 판단할 수 있다. 아직 이들에 대해 연구하지 못했다. 후일을 기약한다. 

하지만 초팔국이 포상팔국과 연관이 있다면 이들은 서부 아르메니아에 있는 가야제국들로 추정된다.

 

Parthian Empire, Kushan Empire, Alans, Suren, Hyrcania, Sakas in AD 100 (source : Wikipedia)

 

 

4) 파사산성 존재의 의미

 

파사산성이 임진왜란이후에도 존재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이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된다. 파사산성이라면 파사국에 있었을 것이고, 신라의 파사이사금 시절 세운 가소성, 마두성일 수 있다. 이들 성이 당시 가야인 아르메니아 쪽에 있었을 것이므로, 이곳이 임진왜란시 전략적 중요성을 가졌다는 것은, 임진왜란이 한반도나 북미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할 것이다.


또한 당시 이지역은 오스만제국의 영역이므로 오스만제국이 조선의 일부라는 판단도 할 수 있다.

 

"파사산성은 신라 파사왕 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파사성(婆娑城)이라고 불린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고대 파사국(婆娑國)이 위치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

파사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주목받게 된 것은 류성룡에 의해서이다. 류성룡은 경기지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파사성과 수원의 독성(禿城), 양성(陽城)의 무한산성(無限山城) 등을 정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견이 받아들여져 1595년(선조 28) 파사산성 수축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류성룡은 축성을 담당한 의엄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어 독려하고, 산성의 군기(軍器) 역시 확충하도록 하는 등 계속하여 관심을 가졌다.

파사산성을 수축할 때 의엄이 동원한 승군이 5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선조실록』 28년 8월 22일).


이때 수축한 성벽의 길이는 1,100보였다. 산성이 완성된 뒤로는 파사성의 군사는 영서(嶺西) 고을의 군사 중 강릉·삼척 두 진(鎭)으로 들어가는 자들을 파사산성으로 보내어 수직(守直)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6년 10월 23일).


또한 여주·이천·양주·광주의 전세(田稅)를 산성으로 들여보내게 하였으며(『선조실록』 29년 11월 26일), 둔전을 경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로는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의엄이 축성을 끝내고 돌아간 뒤 여주의 관원만으로 관리했을 뿐 별장을 파견하지 않아 성의 군사적 기능은 상실되었다. 그리하여 비변사에서는 죽산산성(竹山山城)을 수축했던 승려 영주(靈珠)를 파사산성에 들여보내 주지(住持)로 삼아 승군으로 하여금 산성을 지키게 하였다(『선조실록』 38년 7월 11일).


그러나 그 이후로도 관리가 되지 않아 1610년(광해군 2)에 이르면 이미 무너진 지 오래되어 왕이 수선을 명령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1월 11일).


그러나 그 후로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영조대의 『여지도서』에는 파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이 허물어져 성첩이 반만 남아 있다고 되어 있고,


고종대의 『대동지지』에도 역시 허물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료: 나무위키, 파사산성)

 

5) 파사국의 존재 및 위치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720년대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살펴 보는 것은 이들 지역이 과거 또는 당시의 신라가 지배했던 지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파사국에서 더 가야 대식국이 나오고 대식국이 당시 파사국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본 블로그에서 대식국도 신라라고 했다. 파사국이 페르시아지역이라는 것도 확인해 준다.

 

테헤란의 유리도자기 박물관에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새머리형 유리병을 닮은 유리병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고,  페르시아에서 가장 많은 중국 도자기도 바로 니샤푸르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설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즉 한나라와 신라가, 아니 좀 더 나아가 상, 하, 주, 진, 한, 당, 송, 원, 명, 청 등 모든 중국 왕조가 페르시아지역, 메소포타미아지역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아래 시에서 당시 당나라가 아닌 한나라를 언급하는 것도 의문을 낳는다. 당나라지역이 아닌 한나라지역이란 의미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자료는 언급되는 나라들이 인접해 있다는 것을 보여줘 어느 정도 위치를 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소륵, 구차, 우전, 언기 등은 반초가 경략한 지역이름이다. 이들이 파르티마제국 동쪽에 있는 나라들이라는 것이다. 강국, 안국이란 나라이름도 보인다.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관련된 나라 이름들이다.

 

"往五天竺國傳

723년부터 727년까지 신라승려 혜초가 다섯 천축국을 답사하고 그들 나라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여행기다.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 그리고 보통 중동으로 분류되는 페르시아(이란)까지 여행하였다.

폐사리(吠舍厘), 구시나(拘屍那), 파라닐사(波羅痆斯), 중천축갈나급(中天竺葛那及), 중천축사대탑(中天竺四大塔), 남천축(南天竺), 서천축(西天竺), 도란달라(闍蘭達羅), 마게타(摩揭陀), 소발나구달라(蘇跋那具怛羅), 탁사(鐸社), 신두고라(新頭故羅), 가섭미라(迦葉彌羅), 가비라(伽毗羅), 대발률(大勃律), 양동(楊同), 사파자(娑播慈), 토번(吐蕃)]], 건다라(建馱羅), 소발률(小勃律), 오장(烏長), 구위(拘衛), 림파(覽波), 계빈(罽賓), 범인(犯引), 토화라(吐火羅), 파사(波斯, 대식(大食)), 대불림(大拂臨), 사율(謝䫻), 조국(曹國), 골돌(骨咄), 강국(康國), 사국(史國), 미국(米國), 안국(安國), 발하나(跋賀那), 돌궐(突厥), 총령진(葱嶺鎮), 호밀(胡密), 식닉(識匿), 소륵(疏勒), 구차(龜茲), 우전(于闐), 안서(安西), 언기(焉耆)

(자료 : 왕오천축국전, 나무위키)


"신라 고승 혜초의 가 쓴 <왕오천축국전>중 파사(지금의 이란)와 대식(아랍)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 오른쪽 밑줄 친 내용을 보면 “다시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 ”와 왼쪽 밑줄 친 “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에 이른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혜초는 불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723년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천축(인도)으로 향한다. 인도양을 건너 동천축에 상륙한 뒤 불교 성지들을 두루 돌아보고 남천축, 서천축을 거쳐 북천축에 이른다. 당시 서역 요충지인 토화라(吐火羅: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얼마간 머물다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파사(波斯: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와 대식(大食: 아랍)까지를 역방한다. 그리고 귀로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파미르 고원을 넘어 727년 구자(龜玆: 쿠처)에 이른다. 장장 4년 동안의 ‘서역기행’이다.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

실제로 혜초 자신이 언급하다시피, 그는 이미 대식의 내침을 받은 서천축, 북천축을 여행했고, 특히 대식의 지배 아래 이슬람화가 상당히 진행된 토화라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따라서 이교 지역이란 이유만으로 여행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약하다. 이런 반론과 더불어 여행기를 문맥과 내용 면에서 세밀히 검토하면 그의 여행 서쪽 끝은 토화라가 아니라, 대식에 예속됐던 페르시아란 결론을 얻게 된다. 우선 문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여행기 전편에 걸쳐 혜초는 직접 다녀간 곳에 대한 기술에는 반드시 ‘어디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 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렀다’(從… 行… 日… 至)라는 식의 시문구(始文句)를 쓰고 있다. 이런 시문구는 모두 23개가 있는데, 직접 방문한 곳들임을 뜻한다.


파사와 대식 여행에 관해 본문에는 “다시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에 이른다 …”, “다시 파사국에서 북쪽으로 열흘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에 이른다 …”고 했다. ‘파사국’은 페르시아를 지칭하는데, 대식국에 병합된 뒤에는 주로 남부 지역에만 한정되었으며, 북부는 대식의 다른 총독부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혜초는 대식이 파사의 북쪽에 있다고 봤다.


보다시피 이 두 문장에는 직접 답사한 곳임을 말해주는 시문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혜초가 페르시아나 대식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또 다른 근거는 두 곳에 관한 기술 내용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점이다. 페르시아가 토화라 서쪽에 있고, 페르시아가 대식에 병합되어 있으며, 대식국 왕이 소불림(시리아)에 가서 산다는 등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또, 이 두 나라는 ‘하느님을 믿고 불법은 모르며’, ‘왕과 백성들 옷은 한가지로 구별이 없고’, 음식을 먹는 데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한 그릇에서 먹으며, ‘무릎 꿇고 절하는 법이 없다’는 등의 구체적 생활상과 풍습을 묘사한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고 정확하다. 이런 정확성은 직접 답사해보지 않고는 얻기 어려운 것으로 파사, 대식에 관한 역사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오천축국전’엔 파사국과 대식국 기록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 직접 답사 흔적 곳곳에


문제는 그가 페르시아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점이다. 여행기에는 토화라에서 진로를 서쪽으로 잡아 한 달 뒤 페르시아에, 다시 북쪽으로 열흘 동안 가서 산속의 대식국, 즉 페르시아에 도착했다고만 했으며 구체적으로 도달한 지점을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역사적 배경과 여행기 문구상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는 유추의 방법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우선, 역사적 배경을 보면, 당시 페르시아를 포함한 카스피해 남쪽과 동쪽은 대식국 치하였으며, 중심지는 호라산 총독부 소재지인 니샤푸르였다. 이곳은 ‘현인과 학자들의 고향’이라고까지 불리는 유명한 도시로서 실크로드 ‘동방통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이미 이슬람화한 상태였다. 우리는 테헤란 ‘이란 유리도자기박물관’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품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니샤푸르에서 출토된 3~11세기 유물들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새머리형 유리병을 닮은 유리병도 여러 점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페르시아에서 가장 많은 중국 도자기도 바로 이곳에서 나온 것이다. 더불어 지리적 방위와 여행 기간, 지세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윤곽이 드러난다. 방위에서 도착지는 토화라의 서북쪽에 있는데, 거기까지 여행 기간은 총 40일이다. 혜초의 선행 여정을 고려할 때, 서행 1개월, 북행 10일이면 대체로 니샤푸르 일대에 도착한다. 지세를 봐도 니샤푸르는 유헤트 산맥의 서남쪽 기슭이어서 주변이 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사실 이 길은 일찍이 알렉산더를 비롯한 수많은 서구 사람들이 동방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자료: 한겨레신문, ‘혜초 1200년전 ‘서역행’ 끝은 어디?’ 등록 :2006-04-17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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