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BC 57-AD225)의 신라는 파르티마제국이다(I)
<목차>
1. 기원 전후 초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1) Orodes II (BC 57-BC 37) 와 박혁거세
2) 박혁거세와 알영부인과 파르티마제국의 Orodes II와 Laodice부인
3) 신라 초기의 파르티마 - 로마의 전쟁과 신라 상황
(1) 신라 초기 시기의 로마-파르티마 전쟁 상황
(2) Carrhae 전투의 로마 패배
(3) 변한의 항복
(4) Pacorus I 의 전사와 파르티마의 정변
(5) Phraates IV(BC 37-BC2)의 집권과 금성 궁실 건축
(6) 파르티마 - 로마의 협상과 마한에의 사신 및 조문 파견
4) 동옥저의 사신과 신라
5) Phraates V의 정변과 일식현상 (BC 2, AD 1)
6) Orodes III 와 남해차차웅 추대
7) Orodes III의 암살과 일식현상 (AD 6) 및 석탈해의 등장
8)낙랑의 침입과 Phraates IV, V & Vononese I
9) AD 16년의 일식 현상과 백제에서의 반란
10) AD 19년의 예왕 도장의 헌납
11) 진한의 철생산 및 철전 사용과 파르티마의 coinage
12) 로마의 포로와 한나라
상대 (BC 57-AD 225)의 신라는 파르티마제국이라는 검증 작업을 두단계로 나누어 하고자 한다. 즉 기원전후 초기의 박혁거세 시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을 (I)편에서 비교 검증하고, 이은 (II)편에서는 탈해이사금부터 내해 이사금 시기까지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을 비교하며 검증하고자 한다. 본 글에서는 기원전후 초기의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의 비교 검증에 한하고자 한다.
1. 기원 전후 초기의 신라와 파르티마제국
기원전후 신라와 파르티마 제국의 비교는 삼국사기의 박혁거세 시기에 해당한다. 아래 삼국사기의 박혁거세 시기의 연대별 사건을 먼저 제시한다. 향후 분석에서 밝혀지겠지만 놀라울 정도로 파르티마 제국의 사건들과 일치한다. 단지 그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감추려는 김부식의 의도로 그동안의 역사학자들이 모르고 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김부식은 모든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라를 미화하기 위해 역사를 감추어, 후세들이 우리의 역사를 잃어버리게 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삼국사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본기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BC 57)
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BC 54)
五年春一月 알영이 왕비가 되다 (BC 53)
八年 왜인이 침범하려다 물러가다 (BC 50)
九年春三月 살별이 왕량에 나타나다 (BC 49)
十四年夏四月 살별이 삼에 나타나다 (BC 44)
十七年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농사를 권하다 (BC 41)
十九年春一月 변한이 항복하다 (BC 39)
二十一年 금성을 쌓다 (BC 37)
二十四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BC 34)
二十六年春一月 궁실을 조성하다 (BC 32)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BC 28)
三十二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BC 26)
三十八年春二月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BC 20)
三十九年 왕이 마한 왕의 죽음에 조문하다 (BC 19)
四十年 백제의 온조가 즉위하다 (BC 18)
四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BC 15)
五十三年 동옥저가 말을 바치다 (BC 5)
五十四年春二月 살별이 견우성에 나타나다 (BC 4)
五十六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BC 2)
五十九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
六十年秋九月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다 (AD 2)
六十一年春三月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다 (AD 3)"
(자료 : 나무위키, 박혁거세)
1) Orodes II (BC 57-BC 37) 와 박혁거세
박혁거세로 판단되는 Orodes II는 형 Mithridates IV와 함께 정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곧 형과의 왕권 싸움에서 승리한다. 아래 자료에서 보듯이 Mithridates IV는 Orodes II에 밀려 로마의 시리아로 도망친다. 그리고 로마군의 지원을 얻어 유프라테스로 진격한다. 그런데 갑자기 로마의 지원병력은 이집트의 정권회복을 위해 방향을 돌린다. 그런데도 Mithridates IV는 바빌로니아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BC 55년 Orodes II를 밀어내고 BC 54년까지 권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Orodes II는 Suren가문의 지원을 받아 다시 권력을 잡는다. 박혁거세의 년대에서 BC 54년 일식이 있었다는 표현은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박혁거세로 판단되는 Orodes II에 대한 참고 자료
"Orodes II (also spelled Urud II; Parthian: ???? Wērōd), was King of Kings of the Parthian Empire from 57 BC to 37 BC. He was a son of Phraates III, whom he murdered in 57 BC, assisted by his elder brother Mithridates IV. The two brothers quickly fell out and entered into a dynastic struggle, in which Orodes was triumphant."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Orodes was born in the 70s BC, if not earlier. He was a son of Phraates III (r. 69–57 BC), who was a son of Sinatruces (r. 78/7–69 BC), himself presumably a son of the Parthian ruler Mithridates I (r. 171–132 BC). The name of the Arsacid branch established by Sinatruces on the Parthian throne has been coined by the modern historian Marek Jan Olbrycht as the "Sinatrucids", which ruled the Parthian Empire from 78/77 BC until 12 AD."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In 57 BC, Orodes and his elder brother Mithridates IV murdered Phraates III. Mithridates IV was at first supported by Orodes, however, this was short-lived. The two brothers quickly fell out, and Orodes revolted with the support of the Suren clan. They both assumed the title of King of Kings to demonstrate their claims of superiority over each other.
This changed the meaning of the title; originally being used as a symbol of political dominance over other realms, the title became known as a symbol of power and legitimacy for contenders in a royal family. Mithridates IV was forced to flee to Roman Syria. He took refuge with Aulus Gabinius, the Roman proconsul and governor of Syria. Mithridates IV then returned to invade Parthia with Gabinius in support. The Roman proconsul marched with Mithridates IV to the Euphrates, but turned back to restore another ruler, Ptolemy XII Auletes of Egypt, to his throne. Despite losing his Roman support, Mithridates IV advanced into Mesopotamia and managed to conquer Babylonia. He ousted Orodes and briefly restored his reign as king in 55 BC, minting coins in Seleucia until 54 BC.
However, king Mithridates IV was besieged by Orodes' Surenid general, Surena, in Seleucia, and after a prolonged resistance, offered battle to Orodes' forces and was defeated. Mithridates IV was afterwards executed in 54 BC by Orodes. Orodes was crowned by Surena, as was the hereditary right of his clan."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2) 박혁거세와 알영부인과 파르티마제국의 Orodes II와 Laodice부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은 두 사람의 성인으로 존칭되며 공동통치의 비유를 한다. 그만큼 알영부인의 존재를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이다. 파르티마제국에서는 OrodesII의 부인 Laodice는 Commagene 왕국의 공주로 나타난다. BC 53년 로마와의 카르헤 전투를 Suren가문의 Surena 장군의 덕으로 승리한 파르티마 제국의 Orodes II는 같은 해, Commagene 왕국 (금관가야로 추정)의 공주를 부인으로 삼는다. 파르티마 역사에서는 결혼 구체적인 연도가 나타나지 않으나, 박혁거세의 년대에는 BC 53으로 서술된다. 카르헤 전투 승리 이전인지 이후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략적인 결혼으로 보인다.
또한 아들인 Pacorus I (박특으로 추정됨)는 Armenia왕국의 공주와 결혼을 한다. 즉 로마와의 사이에 있는 아르메니아, Commagene왕국과 결혼동맹으로 서쪽 지역의 안보를 확보한 느낌이다.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은 Commagene왕국의 왕으로서 부인으로 삼은 허황옥은 인도에서 온 것이 아니라 Cilicia왕국의 공주라는 것을 필자는 본 블로그에서 주장했다.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는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고 필자는 주장했다. Cilicia왕국은 지중해에 접한 소국으로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전략적인 지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만큼 중요한 Commagene왕국의 동맹국이 되었던 것이다.
- 박혁거세의 알영부인에 대한 참고 자료
"혁거세 거서간은 10세 때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고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인 기원전 57년 6월 8일(음력 4월 28일 병진일)에 즉위하고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
(자료 : 나무위키, 박혁거세)
-Orodes II의 부인인 Laodice에 대한 참고 자료
"Laodice (also spelled Laodike; Greek: η Λαοδίκη; died 38 BC) was a princess from the Kingdom of Commagene and a queen of the Parthian Empire by marriage to Orodes II. She was of Greek and Iranian descent.
Laodice was the first daughter born to King Antiochus I Theos of Commagene and Queen Isias Philostorgos.
"She married King Orodes II of Parthia. Through this marriage, she became Queen of the Parthian Empire. In 38 BC Laodice and Orodes with their children, were in a parricidal and fratricidal massacre perpetrated by Phraates IV of Parthia to whom Orodes II handed over the Parthian throne after the death of Orodes’ son Pacorus I of Parthia in battle in 38 BC.
When Laodice died, her brother King Mithridates II of Commagene had her body returned to Commagene. She was buried near her mother Isias, her sister Antiochis of Commagene and her niece Aka I of Commagene. Mithridates in her honour built and dedicated a funeral monument."
[출처] <펌> Laodice of Parthia (-BC 38)|작성자 죽엽 CG Park
3) 신라 초기의 파르티마 - 로마 전쟁과 신라 상황
아래 로마 파르티마 전쟁을 보면 아르메니아 주위 지역은 로마 (마한, 백제)와 파르티마 (신라)의 완충지역(Buffer Zone)인 지중해에 접한 전략적 지역으로, 그 지역을 자신의 편에 두기 위해 로마와 파르티마 제국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 난다. 이것이 백제와 신라의 끊임없는 전쟁인 것이다.
(1) 신라 초기 시기의 로마 - 파르티마 전쟁(BC 66-AD 1) 상항
아래 자료는 영문 위키피디아를 요약한 위키백과 자료이다. 당시 로마와 파르티마 사이의 전체적인 대치 상황을 설명하고자 인용한다. 이는 앞으로의 신라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파르티아의 서방 영토 확장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셀레우코스 영토의 상당부분을 획득한 파르티아는 서방 영토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1세는 서쪽으로의 정복 사업을 시작하여 파르티아의 지배력을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확대하였다. 이 무렵부터 국제적인 강국으로 떠오른 파르티아는 처음으로 공화정 로마와 접촉하게 되었다. 후임 미트리다테스 2세는 기원전 105년 경 술라와 접촉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기원전 90년 이후 왕권 다툼으로 파르티아의 세가 약해졌으나, 같은 시기 로마의 아나톨리아 지역 지배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접촉은 기원전 69년 루쿨루스가 아르메니아 남부를 침공하여 티그라네스 대제를 물리쳤을 때 재개되었으나, 공식적인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공화정 로마 대 파르티아
동방 전쟁의 책임자가 된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6년 경 프라아테스 3세와 재협상을 시도하여 동맹을 맺고 아르메니아에 침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유프라테스지방에서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국경을 정하는 문제로 불화가 발생했다. 폼페이우스는 프라아테스에게 "왕 중의 왕" 이라는 칭호를 공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티그라네스와 파르티아 사이의 골두엔 지역 영토분쟁에 로마가 중재를 서주겠다고 제안했다. 결국에는, 프라아테스는 로마의 속국이 된 오스로에네 서부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였으나, 카레 전투에서 장군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에게 궤멸적 패배를 입었다.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군 최대의 패배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지휘관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사망하였고, 42,000명의 군단병 가운데 절반이 전사하고 1/4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나머지 1/4 만이 시리아 속주로 귀환하였다. 이듬해 파르티아는 시리아를 약탈하였고, 기원전 51년에는 황태자 파코루스와 오사케스 장군이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했으나, 카시우스에 의해 패퇴했다.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파르티아는 로마에 대한 군사행동을 자제하였으나, 폼페이우스와의 우호관계는 유지되었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하여 사망한 후에는 아파메아 계곡에서 농성중이던 폼페이우스의 부하장군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구원하기 위해 파코루스가 군사를 끌고 달려왔다. 내전이 끝난 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에 대한 전쟁계획을 세웠으나 암살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 후 이어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 사이의 내전에서 파르티아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기원전 42년 벌어진 필리피 전투에도 지원병을 보냈다.
서기 1년 당시 파르티아와 속국 및 그 주변국들
필리피 전투의 패전 2년 후인 기원전 40년 파코루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후원자였던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연합하여 로마 영토를 침공하였다. 시리아 속주의 로마 군단을 빠른 속도로 격파한 연합군은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의 모든 해안 도시를 점령하였다. 시리아를 넘어 하스모네아 왕가가 다스리고 있던 유대 속주를 점령한 파코루스는 로마 속국 정부의 왕 히르카누스 2세를 폐위하고 히르카누스의 조카 안티고누스(재위: 기원전 40년-기원전 37년)를 왕좌에 앉혔다. 이때 로마의 동쪽 영토 전체가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한 라비에누스를 상대하기 위해 벤티디우스를 파견했다. 라비에누스는 곧 벤티디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시리아로 후퇴했고, 동맹군 파르티아가 구원병을 보냈으나 패배하여 로마군에게 사형당했다. 파르티아 또한 로마군에게 패배를 맛보고 시리아에서 후퇴하였다. 파코루스는 기원전 38년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벤티디우스에 패하여 전사하였다.
로마는 이듬해 (BC 37) 에돔 왕가 헤로데 1세의 도움으로 유대 속주에서 안티고누스를 몰아내고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시리아와 유대를 회복한 안토니우스는 대군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였으나, 파르티아에 의해 공성병기가 파괴되고 아르메니아의 동맹군 또한 달아났다. 교착상태에 빠진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와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해 메디아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로마 국내의 정치적 사정으로 후퇴하였고,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로마 제국 대 파르티아 불확실한 전쟁
양국 간의 불화가 고조됨에 따라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프라아테스 5세는 서기 1년 양국 간에 대략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다. 합의 내용은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로부터 군사를 물리고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로마의 보호령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수십년간 아르메니아에서 양국의 불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36년 아르메니아의 왕좌가 공석이 되자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2세가 아들 아르사케스를 왕위에 앉히려 시도함으로써 로마와의 전쟁이 촉발되었다. 그러나 아르타바누스는 로마 장군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의 협상 끝에 아르메니아를 파르티아의 세력권에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하였다. 58년에 또다른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 티리다테스를 강제로 아르메니아 왕좌에 앉히자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것이다. 코르불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티리다테스 왕실을 전복시키고 카파도키아 왕자를 왕위에 앉혔고, 아르메니아의 반격으로 양군 사이에 여러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양국의 전쟁은 63년 티리다테스의 왕위 등극을 로마 황제에게 승인받는 것에 로마가 동의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자료: 위키백과, 로마-파르티마 (BC 66- AD 217) 전쟁)
(2) Carrhae 전투(BC 53)의 로마 패배
BC 53년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은 파르티마 군에 의해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Surena 장군의 말탄 궁수들은 배사법의 활쏘기(Parthian Shot)를 했다고 아래 서술된다. 로마군은 2만명이 전사하고, 1만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남은 1만명은 서부로 도망했다고 서술된다. 로마 장군 Crassus도 죽었다.
개선 장군 Surena는 왕권에의 위협으로 간주되어 죽임을 당하고, OrodesII의 아들 Pacorus I는 이어진 전투에서 BC 51년 로마군에 패배한다.
- 카르헤 전투 참고 자료
"Meanwhile, the Roman general and triumvir Marcus Licinius Crassus had made an attempt to extend his share of Roman territory by eastward conquest. This attempt proved disastrous, with Crassus meeting his end in 53 BC, in the Battle of Carrhae, by Orodes' general Surena. Orodes himself had invaded Armenia and forced king Artavasdes II (r. 55–34 BC) to submit and abandon his alliance with the Romans. The victory at Carrhae secured for the Parthians the countries east of the Euphrates."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Around the same time, Marcus Licinius Crassus, one of the Roman triumvirs, who was now proconsul of Syria, had been preparing to invade the Parthian realm in belated support of Mithridates IV. Orodes' emissaries had initially attempted to convince Crassus to abandon his expedition, which the latter replied by saying he would give an answer in Seleucia. The eldest Parthian emissary, Vagises, showed the palm of his hand, stating "Hair will grow here before you see Seleucia." The Artaxiad king of Armenia, Artavasdes II (r. 55–34 BC), who was an ally of Rome, advised Crassus to take a route through Armenia to avoid the desert and offered him reinforcements of a further 10,000 cavalry and 30,000 infantry. His reasoning was that the Parthian cavalry would be less potent in the Armenian highlands. Crassus refused the offer and decided to take the direct route through Mesopotamia.
As Crassus' army marched to Carrhae (modern Harran, southeastern Turkey), Orodes invaded Armenia, cutting off support from Artavasdes. Orodes persuaded Artavasdes to a marriage alliance between the crown prince Pacorus I (d. 38 BC) and Artavasdes' sister.
Orodes also made an alliance with the Commagenian king Antiochus I (r. 70–31 BC), which was cemented with Orodes' marriage to Antiochus' daughter, Laodice.
Surena, with an army entirely on horseback, rode to meet Crassus. Surena's 1,000 cataphracts (armed with lances) and 9,000 horse archers were outnumbered roughly four to one by Crassus' army, comprising seven Roman legions and auxiliaries including mounted Gauls and light infantry.
Using a baggage train of about 1,000 camels, the Parthian army provided the horse archers with a constant supplies of arrows. The horse archers employed the "Parthian shot" tactic: feigning retreat to draw enemy out, then turning and shooting at them when exposed. This tactic, executed with heavy composite bows on the flat plain, devastated Crassus' infantry. With some 20,000 Romans dead, approximately 10,000 captured, and roughly another 10,000 escaping west, Crassus fled into the Armenian countryside. At the head of his army, Surena approached Crassus, offering a parley, which Crassus accepted. However, he was killed when one of his junior officers, suspecting a trap, attempted to stop him from riding into Surena's camp. After his death, the Parthians allegedly poured molten gold down his throat, in a symbolic gesture mocking Crassus' renowned greed.
Crassus' defeat at Carrhae was one of the worst military defeats in Roman history. Parthia's victory cemented its reputation as a formidable if not equal power with Rome. While Orodes and Artavasdes were observing a play of The Bacchae of Euripides (c. 480–406 BC) at the Armenian court in honor of the wedding of Pacorus and Artavasdes' sister, the Parthian commander Silaces announced the news of the victory at Carrhae, and put the head of Crassus at Orodes' feet. The head was given to the producer of the play, who decided to use Crassus' actual severed head in place of the stage-prop head of Pentheus.
With his camp followers, war captives, and precious Roman booty, Surena traveled some 700 km (430 mi) back to Seleucia, where his victory was celebrated. However, fearing his ambitions for the Arsacid throne, Orodes had Surena executed shortly thereafter."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Then, the next year they invaded Syria, but with little success. Surena, whose achievements had made him too dangerous, was killed by Orodes, and Pacorus I, the son and heir of the king was defeated by Cassius in 51 BC."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이후 계속된 전투에서 로마의 브루터스와 카시우스의 후원자인 라비에누스와 연합한 Pacorus I는 시리아의 모든 해안도시를 점령하고, 유대속주의 왕도 자신들의 인물로 교체한다 (BC 40).
"기원전 40년 파코루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후원자였던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연합하여 로마 영토를 침공하였다. 시리아 속주의 로마 군단을 빠른 속도로 격파한 연합군은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의 모든 해안 도시를 점령하였다. 시리아를 넘어 하스모네아 왕가가 다스리고 있던 유대 속주를 점령한 파코루스는 로마 속국 정부의 왕 히르카누스 2세를 폐위하고 히르카누스의 조카 안티고누스(재위: 기원전 40년-기원전 37년)를 왕좌에 앉혔다. 이때 로마의 동쪽 영토 전체가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는 듯 보였다."
(자료 : 위키백과, 로마 파르티마 전쟁)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자료 : 위키백과, 박혁거세)
(3) 변한의 항복
BC53 카르헤 전투에서 승리한 Suren 가문의 Surena 장군은 BC 52년 왕권에의 잠재적 도전자로 인식되어 살해 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Pacorus I 는 승승장구하여 BC40년 시리아까지 진출한다. 이러한 상황에 즈음하여, Suren 가문과 가까이 위치한 변한 (후의 가야)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항복해 왔지 않나 판단된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자료 : 위키백과, 박혁거세)
위에서 언급되는 변한의 위치는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 현재 판단으로는 Sakastan, Sistan이 있는 파르티마 동부지역으로 판단된다. Suren도 이 지역 가까이 있다.
신라의 역사에서 이후에도 마두성을 근거로 하여 가야와의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백제와의 서부 전쟁과는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한이 로마지역으로 보이고, 진한은 파르티마 제국, 그리고 변한(변진)은 아르메니아 지역과 인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김수로왕의 금관가야가 아르메니아 지역에 있는 Commagene 왕국이라 추정했다. 가야의 건국설화에 따르면 뇌질 청예(금관가야, 김수로왕)와 뇌질주일(대가야, 이진아시)이 언급되는데, 뇌질청예는 얼굴이 갸름하고 하얗고, 뇌질주일은 얼굴이 둥글고 갈색이었다고 했다. 김수로왕과 연관이 있는 듯한 석탈해도 이 시기의 파르티마제국을 보면 아르메니아지역에서 백제와 주로 전쟁을 한다.
"최치원의 저서 석리정전에서 .....가야의 산신(山神) 정견모주는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와의 사이에서 뇌질주일(대가야왕 이진아시)와 뇌질청예(금관가야왕 수로왕)를 낳았다" (자료: 김수로왕, 나무위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본인의 저서 강역고에서 '가나(駕那)'가 기원이고 이는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유래한 말이고 이를 중국인들이 삼국지를 쓸 때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으로 쓴 것은 그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했다."(자료 : 가야, 나무위키)
고깔모자를 쓰는 모습은 아르메니아지역의 Urartu 지역의 유물로 발견되고, Sakastan 지역인 카자흐스탄에서도 발견된다. 즉 두 곳에 나누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을 고려 할 때, 변한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금관국, 안라국, 반로국 등과 Sakastan, Sistan 지역에서 인도 동부지역 (Bogdh Gaya)까지의 대가야 (반파국)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되는 변한의 항복은 Sakastan지역의 국가들이 아닐까 추정된다.
(4) Pacorus I 의 전사와 파르티마의 정변
박혁거세의 아들 박특으로 추정되는 태자 Pacorus I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Antioch까지 진격했으나 로마군의 반격에 의해 패한다. (BC 51). 그러나 이후 로마의 일부세력과 연합하여 시리아까지 점령한다. 이후 계속된 로마와의 전투에서 BC 38 Antioch 북동쪽 전투에서 Pacorus I는 전사한다.
박혁거세인 OrodesII는 상심하고 PhraatesIV (r BC 37-2 BC, 박민?)에게 양위한다. 그러나 살해 되었다는 설도 있다.
"Emboldened by the victory over Crassus, the Parthians attempted to capture Roman-held territories in Western Asia. Crown prince Pacorus I and his commander Osaces raided Syria, going as far as Antioch in 51 BC, but were repulsed by Gaius Cassius Longinus, who ambushed and killed Osaces. Orodes sided with Pompey in the civil war against Julius Caesar and even sent troops to support the anti-Caesarian forces at the Battle of Philippi in 42 BC. Quintus Labienus, a general loyal to Cassius and Brutus, sided with Parthia against the Second Triumvirate in 40 BC; the following year he invaded Syria alongside Pacorus I. The triumvir Mark Antony was unable to lead the Roman defense against Parthia due to his departure to Italy, where he amassed his forces to confront his rival Octavian and eventually conducted negotiations with him at Brundisium.
After Syria was occupied by Pacorus' army, Labienus split from the main Parthian force to invade Anatolia while Pacorus and his commander Barzapharnes invaded the Roman Levant. They subdued all settlements along the Mediterranean coast as far south as Ptolemais (modern Acre, Israel), with the lone exception of Tyre. In Judea, the pro-Roman Jewish forces of high priest Hyrcanus II, Phasael, and Herod were defeated by the Parthians and their Jewish ally Antigonus II Mattathias (r. 40–37 BC); the latter was made king of Judea while Herod fled to his fort at Masada.
Despite these successes, the Parthians were soon driven out of the Levant by a Roman counteroffensive. Publius Ventidius Bassus, an officer under Mark Antony, defeated and then executed Labienus at the Battle of the Cilician Gates (in modern Mersin Province, Turkey) in 39 BC. Shortly afterward, a Parthian force in Syria led by general Pharnapates was defeated by Ventidius at the Battle of Amanus Pass. As a result, Pacorus I temporarily withdrew from Syria. When he returned in the spring of 38 BC, he faced Ventidius at the Battle of Mount Gindarus, northeast of Antioch. Pacorus was killed during the battle, and his forces retreated across the Euphrates. His death spurred a succession crisis in which Orodes, deeply afflicted by the death of his favourite son, relinquished the throne to his other son Phraates IV (r. c. 37–2 BC) as his new heir."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Orodes' cause of death is uncertain. According to Cassius Dio, he either died of grief due to Pacorus' death or as a result of old age. Plutarch, however, states that Orodes was murdered by Phraates IV. Fearing that his position might become endangered, Phraates IV executed all his half-brothers–the sons of Orodes and Laodice, partially due to their maternal descent being greater than that of his own. Laodice was probably killed as well."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4) Phraates IV(BC 37-BC2)의 집권과 금성의 궁실 건축
Phraates IV는 태자인 Pacorus I의 전사로 왕이 되는데, 전왕인 Orodes II와 Laodice부인, 그리고 주위 형제 등 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것으로 서술된다. 박혁거세의 시신이 하늘에서 4개로 나누어져 떨어졌다고 하며, 뱀이 나타나 합장을 못하게 했다는 설화는 이러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판단한다. 이때 알영부인도 죽었다고 했다. 아마 남해차차웅도 제시장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BC 37년에 수도 금성에 성을 쌓고, BC 32년에 궁실을 지었다고 서술한 것은 이러한 Phraates IV가 새로이 왕이 된 후의 상황으로 보인다.
BC 34년 일식이 일어나다는 표현은 Phraates IV의 집권에 반대한 Monases (Orodes II의 military leader)와의 갈등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BC 28년 낙랑에서 침입했다가 돌아 간 것은, Phraates IV가 Tridates II의 반란(BC 30)으로 대치할 때 Phraates IV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 설명에서의 내용 참조)
二十一年 금성을 쌓다 (BC 37)
二十四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BC 34)
二十六年春一月 궁실을 조성하다 (BC 32)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BC 28)
三十二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BC 26)
-Phraates IV 집권 역사 참고자료
"In 38 BC, the heir to the Parthian throne, Pacorus I was defeated and killed at the Battle of Mount Gindarus by a Roman force. His death spurred a succession crisis in which Orodes II, deeply afflicted by the death of his favourite son, relinquished the throne to his other son Phraates IV. Orodes II died soon afterwards. His cause of death is uncertain. According to Cassius Dio, he had either died of grief due to Pacorus' death, or of old age. Plutarch, however, states that Orodes was murdered by Phraates IV. Fearing that his position might become endangered, Phraates IV executed all his half-brothers–the sons of Orodes and his Commagenian wife Laodice, partially due to their maternal descent being greater than that of his own. Laodice was probably killed as well.
Coin of Mark Antony
Phraates IV also had supporters of his brothers and his own opponents sent into exile; one of them, Monaeses, a Parthian nobleman who had distinguished himself as a military leader under Orodes II, fled to Syria, where he took refuge with the Roman triumvir Mark Antony. There Monaeses urged him to attack Parthia, and promised him to spearhead the troops and conquer the empire without any difficulties. Antony granted Monaeses three cities—Larissa, Hierapolis and Arethusa, and promised him the Parthian throne. Around the same time, Antony had restored Roman rule in Jerusalem, and executed the Parthian puppet king Antigonus II Mattathias, who was succeeded by Herod the Great. The relations between Parthia and Armenia had also been damaged, due to the death of Pacorus I (who was married into the Armenian royal house) and Phraates IV's treatment of his brothers and some of the nobility, which aroused the Armenians. The Parthians took the defection of Monaeses very serious, and as a result Phraates IV invited Monaeses back to the country and reconciled with him.
[출처] <펌> Phraates IV (BC 37- BC 2)|작성자 죽엽 CG Park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며,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자료 : 위키백과, 박혁거세)
"The following year, when Antony marched to Theodosiopolis, Artavasdes II of Armenia defected to the Roman side by sending Antony additional troops. Antony invaded Media Atropatene, then ruled by Parthia's ally Artavasdes I of Media Atropatene, with the intention of seizing the capital Praaspa, the location of which is now unknown. However, Phraates IV ambushed Antony's rear detachment, destroying a giant battering ram meant for the siege of Praaspa; after this, Artavasdes II abandoned Antony's forces. The Parthians pursued and harassed Antony's army as it fled to Armenia. Eventually, the greatly weakened force reached Syria.
The defeat of Antony, along with that of Crassus at Carrhae in 53 BC, would be remembered by Romans for a long period, and often incited them to invade Parthia in later events. After this, Antony lured Artavasdes II into a trap with the promise of a marriage alliance. He was taken captive in 34 BC, paraded in Antony's mock Roman triumph in Alexandria, Egypt, and eventually executed by Cleopatra VII of the Ptolemaic Kingdom. Antony attempted to strike an alliance with Artavasdes I of Media Atropatene, whose relations with Phraates IV had recently soured. This was abandoned when Antony and his forces withdrew from Armenia in 33 BC; they escaped a Parthian invasion while Antony's rival Octavian attacked his forces to the west. According to Cassius Dio, Phraates IV murdered the Commagenian king Antiochus I in c. 31 BC. Following Antony's suicide in Egypt followed by that of his wife Cleopatra in 30 BC, the Parthian ally Artaxias II reassumed the throne of Armenia."
[출처] <펌> Phraates IV (BC 37- BC 2)|작성자 죽엽 CG Park
(5) 파르티마 - 로마의 협상과 마한에의 사신 및 조문 파견
로마는 BC 37년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 시리아지역 회복후 아제르바이젠을 침공했으나 대패한다 (BC 31). 이후 등장한 아우구스투스 시절 (BC 27 이후), 파르티마제국에서 Tridates II에 의해 일시적인 반역사건이 나나 실패한후 Tridates II는 Phraates IV의 아들을 납치해서 로마로 피신한다. 그래서 로마와 파르티마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고 BC 20년 협상에서 아들의 구출 대신에 카레흐전투에서 포로가 됐던 로마 병사를 되돌려 준다.
그래서 박혁거세 기록에 BC 20년 호공이 마한으로 가서 마한왕과 대화했다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마한왕이 죽어서 조문하는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브루터스측과 연합했던 파르티마제국이 브루터스 사후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로마는 이듬해 (BC 37) 에돔 왕가 헤로데 1세의 도움으로 유대 속주에서 안티고누스를 몰아내고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시리아와 유대를 회복한 안토니우스는 대군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였으나, 파르티아에 의해 공성병기가 파괴되고 아르메니아의 동맹군 또한 달아났다. 교착상태에 빠진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위키백과, 로마 파르티마전쟁)
- 파르티마 제국의 역사 기술
"Following the defeat of Antony and Cleopatra of Ptolemaic Egypt at the Battle of Actium in 31 BC, Octavian consolidated his political power and in 27 BC was named Augustus by the Roman Senate, becoming the first Roman emperor. Around this time, Tiridates II of Parthia briefly overthrew Phraates IV, who was able to quickly reestablish his rule with the aid of Scythian nomads. Tiridates fled to the Romans, taking one of Phraates IV's sons with him. In negotiations conducted in 20 BC, Phraates IV arranged for the release of his kidnapped son. In return, the Romans received the lost legionary standards taken at Carrhae in 53 BC, as well as any surviving prisoners of war. The Parthians viewed this exchange as a small price to pay to regain the prince. Augustus hailed the return of the standards as a political victory over Parthia; this propaganda was celebrated in the minting of new coins, the building of a new temple to house the standards, and even in fine art such as the breastplate scene on his statue Augustus of Prima Porta."
[출처] <펌> Phraates IV (BC 37- BC 2)|작성자 죽엽 CG Park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자,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
(자료 : 위키백과, 박혁거세)
4) 동옥저의 사신과 신라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자료 : 위키백과, 박혁거세)
BC 5년에 동옥저의 사신이 신라에 온 기록이 있는데, 신채호는 신뢰하지 않았다 했다. 한반도의 역사를 가정했다면 위치상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래 옥저의 위치를 살펴 보자. 동옥저는 큰 바다와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예맥에 접해 있다.
예는 남으로 진한, 북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여기서 큰 바다를 카스피해로 생각해 보자. 예는 남으로 진한 (신라), 북으로는 동옥저와 접해 있다.
즉 동예나 동옥저가 코카서스산맥의 우측에 카스피해에 접해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다게스탄지역이다. 이 지역이 훈족계통의 지역으로 우리와 연관이 많은 지역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옥저와 주변국에 대한 위치 설명은 다음과 같다.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 夫餘 南與濊貊接
-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으며, 남으로 조선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하였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 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 읍루는 부여 북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와 접하였다. 남쪽으로는 북옥저에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을 알지 못한다.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 예는 남으로 진한, 북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와 접하였다. 지금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자료 : 옥저, 위키백과)
참고로 백제 자료를 보면, 아래 참고자료에서 보듯이 백제 온조왕 시기에 동예와의 갈등이 심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예는 예맥족이므로 고구려 계통이다. 스키타이 계통이라는 것이다.
백제는 기원전 8년에 이미 동예와 관계를 끊었다고 기술된다. 기원전 5년의 동옥저가 동예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당시 아르메니아를 차지한 파르티마 제국인 신라에게 동옥저가 위협을 느껴 사신을 보낼 수 있다고 본다. 말 20필을 바쳤다는 것은 조공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백제와 신라도 말갈과 전투를 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로마가 백제이고 파르티마제국이 신라라면 이들의 접점지역인 아르메니아 지역의 북쪽 지역인 코카서스산맥 지역이 스키타이와 접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 흑수말갈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 근처에 동예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백제 온조왕은 동예를 보복공격 하려다가 폭설때문에 포기했다고 하는데, 높은 산맥지역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래서 더 코카서스 산맥지역으로 판단된다. 이후 역사에서 당나라와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려다가 폭설로 포기 했다는 지역도 이 지역이라고 필자는 주장했다.
이렇게 볼 때, 동옥저가 신라에 사신을 보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온조왕은 BC 15년 말갈에 대항해서 낙랑과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역시 낙랑도 옥저땅을 낙랑의 동부도위부 소속으로 정한 후한서의 내용을 참고하면, 코카서스 산맥 주위의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낙랑은 파르티마의 Phraates IV, V & Vononese I를 도운 scythian tribe로 묘사되며, 신라와도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 할 때 온조왕이 도읍한 하남의 위례성은 코카서스 산맥 아래 Kura River 아래에 있는 Tbilisi 가 아닌가 한다. 하남의 위례성은 동쪽으로 높은 산, 좌측으로 바다, 남쪽으로 기름진 땅이라 했는데, 이러한 모든 조건에 부합한다. Tbilisi는 BC 7500부터 역사가 있는 도시이며, 근처 남쪽 지역의 쌀농사는 BC 2500부터 있었다 한다. 본 블로그에서 필자는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한강유역 싸움은 여기 Kura River를 두고 한 'Lazic war'라고 주장했다.
비류 백제는 해안가인 Abkhazia 지역이 아닌가 한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우리말 같은 지명들이 많이 있다. 백제 성왕이 앞에서 언급한 Lazic War에서 확보한 지역이다.
Tbilisi and Caucasus Mountains (source : Wikipedia)
- 백제 온조왕의 참고 자료
"기원전 17년 음력 3월 족부(族父: 왕의 7촌 종숙) 을음(乙音)을 우보로 삼았다.
기원전 16년 음력 9월에 말갈이 침입해 왔지만, 백제에게 대패해 달아났다.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원전 15년에는 낙랑과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1년에는 말갈의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10일만에 식량이 떨어져 후퇴하다가 온조왕에게 500명이 죽었다.
기원전 8년에는 동예의 국경에 목책을 세웠는데, 동예가 말갈과 함께 목책을 부수고 백제인 100명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후에 백제는 동예와의 관계를 끊고 목책을 세웠다.
그 틈을 노려 동예가 기원전 1년에 위례성을 함락했다.
기원전 1년에는 말갈이 쳐들어왔지만 추장이 생포되었다.
그리고 위례성을 쳐들어간 보복으로 동예를 쳐들어갔지만 폭설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다.
6년 음력 7월에는 남쪽 경계에 목책을 쌓았다. 하지만 마한의 압력으로 목책을 철거했다.
7년 음력 2월에는 왕궁의 우물이 넘쳤고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가 하나고 몸이 2개였다. 온조왕은 그것이 길조라고 생각하여 합병계획에 들어갔고,
9년 음력 2월에는 마한을 기습공격해 패망시켰고 마한은 원산성 등지에서의 최후의 저항을 끝으로 백제에 병합되었다.
단, 마한 전토가 모두 병합된 것은 아니고 일단 백제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한동안 독립을 유지해 침미다례를 형성했다.
생애 후반
서기 10년 음력 2월에는 왕자 다루를 태자로 삼아 군정을 맡겼다.
16년 음력 10월에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1달 만에 진압되고 주근은 자결했다.
18년에 백제는 탕정성, 고사부리성을 쌓았고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했다.
22년 음력 9월과 11월에는 말갈이 술천성, 부현성을 습격하였지만 간신히 적을 퇴치했다.
온조왕은 28년 음력 2월에 생을 마감했다."
(자료 : 위키백과, 온조왕)
5) Phraates V의 정변과 삼국사기의 일식 표현
삼국사기에는 BC 2-AD 2 기간에 일식이 일어나고 용이 금성우물에 나타났다 표현했다. 당시의 정변과 로마와의 싸움에서 진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五十六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BC 2)
五十九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
六十年秋九月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다 (AD 2)"
(자료 : 나무위키, 박혁거세)
BC 2년의 일식 표현은 아래와 같이 Phraates V 에 의한 BC 2년의 정변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AD 1년의 일식현상 표현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침략에 의해 아르메니아를 내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협상에서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Phraates V의 왕위를 로마로부터 인정 받았다. 이후 AD 4년 Phraates V는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 나고 Orodes III (남해 차차웅으로 추정)가 왕으로 추대 된다.
"Phraates V (Parthian: ???? Frahāt), also known by the diminutive version of his name, Phraataces (also spelled Phraatakes), was the King of Kings of the Parthian Empire from 2 BC to 4 AD. He was the younger son of Phraates IV (r. 37 BC – 2 BC) and Musa, who ruled with him.
Under Phraates V, a war threatened to break out between the Parthian and Roman empires over the control of Armenia and Mesopotamia. Although Augustus (r. 27 BC – 14 AD) had sent his adopted son Gaius Caesar to invade Iran, in 1 AD the two sides agreed a peace treaty, by which once again Armenia was recognized as being in the Roman sphere. Phraates V was in return acknowledged as the rightful Parthian king, which was of high importance to him, due to his insecure position in the country. In 4 AD, Phraates V and his mother fled to Rome after being expelled by the Parthian nobility, who crowned Orodes III as king."
[출처] <펌>Phraates V (BC 2 - AD 4)|작성자 죽엽 CG Park
6) Orodes III 와 남해차차웅 추대
남해차차웅이 즉위 3년차에 박혁거세의 묘를 세웠다는 것으로 박혁거세의 살해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남해 차차웅으로 판단되는 파르티마제국의 Orodes III는 전왕(Phraates V, Phraates IV의 막내아들)이 죽은지 2년후에 귀족들의 추천에 의해 왕에 올랐다고 기술되고 있다. 남해 차차웅은 제사장이라서 권력투쟁에서 죽음을 면한 지도 모른다.
- 남해 차차웅에 대한 참고 자료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차차웅이 앞서 혁거세 거서간의 호칭인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남해 거서간(南解 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고 써 놔서 마찬가지로 둘이 비슷한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에는 삼국사기를 따라 거의 남해 차차웅으로만 쓴다.
서기 4년에 즉위해 재위 3년째(기원후 6년) 봄에 거서간의 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제사지에 따르면 남해왕 3년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여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혁거세 거서간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박혁거세 말년의 기록이 비록 반란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심쩍은 묘사가 있는데, 아버지 박혁거세의 사망과 장례식을 치른 기간이 차이가 나는 사실 또한 반란설에 무게를 두는 대목이라 한다.......
《삼국사기》 남해 차차웅 본기
一年秋七月 낙랑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가 물러가다 (AD 4)
三年春一月 시조 묘를 세우다
三年冬十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6)
五年春一月 왕의 장녀를 탈해의 처로 삼다 (AD 8)
七年秋七月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다 (AD 10)
八年 가뭄이 들다
十一年 낙랑인들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다 (AD 14)
十三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16)
十五年 서울이 가물다
十五年秋七月 창고를 열어 기근을 구제하다
十六年春二月 북명 사람이 예왕의 도장을 바치다 (AD 19)
十九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AD 22)
十九年冬十一月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다
二十年 금성이 태미로 들어가다 (AD 23)
二十一年秋九月 왕이 죽다"
(자료: 남해차차웅, 나무위키)
- 남해차차웅으로 판단되는 Orodes III에 대한 참고 자료
"Orodes III (also spelled Urud III; Parthian: ???? Wērōd) was king of the Parthian Empire from 4 to 6. Albeit he was an Arsacid, his lineage is unknown. He was raised to the throne by the nobility two years after the death of the previous co-rulers, Phraates V and Musa (r. 2 BC – 4 AD). Information regarding the brief reign of Orodes III is lacking. He was killed after a reign of two years. He was succeeded by Vonones I."
[출처] <펌> Orodes III of Parthia (AD 4-6)|작성자 죽엽 CG Park
7) Orodes III의 암살(AD 6)과 일식현상및 석탈해의 등장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AD 6년 남해차차웅인 OrodesIII는 살해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일식이 일어 났다고 서술한다.
三年冬十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AD 6)
五年春一月 왕의 장녀를 탈해의 처로 삼다 (AD 8)
七年秋七月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다 (AD 10)
이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는 Vononese I를 왕으로 보냈다. 그러나 로마에서 교육받은 Vononese I은 파르티마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석탈해로 판단되는 미디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Artabanus II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석탈해를 남해차차웅의 장녀와 결혼시키고 (AD 8) 대보로 임명했다(AD 10)고 서술한다.
권력싸움에서 Vononese I는 밀려 아르메니아로 도망가서 (AD 12) 그곳의 왕이 되었다. Artabanus II는 자신의 아들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하고자 했으나 로마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로마 황제 Tiberius (r 14-37)이 보낸 Germanicus는 Artabanus II와 유프라테스강의 한 섬에서 협상을 하여 (AD 18), Artabanus II 아들인 Artaxias III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하는데 동의하고, Vononese I는 시리아로 보냈다. (Vononese I는 후에 Cilicia로 보내 졌고 탈출하려다 AD 19년 살해 되었다. )
8) 낙랑의 침입과 Phraates IV, V & Vononese I
Phraates IV의 장남인 Vonones I는 Scythian King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서술된다. Phraates IV도 경쟁자 Tridates II가 왕권을 도전할 때 (BC 30), Scythian 부족왕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BC 28) 삼국사기에서는 이때 낙랑이 쳐들어 왔다가 그냥 갔다고 서술한다. (BC 28, AD 4, AD 14)
옥저를 낙랑의 동부 도위에 속하게 했으니 (아래 후한서 자료 참조), 낙랑은 코카서스산맥 근처에 있음이 틀림없다. 옥저는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카스피해 서쪽 해안에 접한 것으로 보인다.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BC 28, PhraatesIV가 왕권 도전 받을 때)
一年秋七月 낙랑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가 물러가다 (AD 4, Phraates V 물러날 때)
十一年 낙랑인들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다(AD 14, Vononese I가 아르메니아로 도망(AD12) 한 후)
《후한서》에서,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라고 하였다.
(자료 : 위키백과, 옥저)
"Vonones was the eldest son of Phraates IV. According to the classical Roman historian Tacitus, Vonones was related to the Scythian king. Phraates IV had previously in his reign been aided by the Scythians to retake his throne from the usurper Tiridates in c. 30 BC, and thus Vonones could possibly be the result of a marriage alliance between Phraates IV and a Scythian tribal chief, who agreed to help him in return."
(source : Vonones I, Wikipedia)
파르티마와 로마의 접경지역 지도 (AD 50) (자료 : 위키피디아)
9) AD 16년의 일식현상과 백제에서의 반란
신라에서는 로마제국 출신 Vonones I의 왕의 등국에 반대하여, Media Atropatene 지역 (아르메니아에 접한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 위의 지도 참조)을 지배하던 Artabanus II가 왕으로 초대되었다. 결국 내란 끝에 Vonones I는 패배하고 추방된다. AD 16년 신라에서의 일식 현상 서술은 이를 의미한다고 본다.
"Another member of the Arsacid house, Artabanus II, who ruled Media Atropatene, was invited to the throne. In a civil war he defeated and expelled Vonones I." ( source : Vonones I, wikipedia)
로마와 파르티마의 Artabanus II는 아르메니아의 왕을 Artaxias III으로 하는데 동의했다. 이에 파르티마에서 아르메니아로 도망가 왕이 된 Vononese I를 지지하던 아르메니아 세력이 반발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백제에서의 반란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16년 음력 10월에는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1달 만에 진압되고 주근은 자결했다." (자료: 온조왕, 나무위키)
일식현상 등 천문을 이용해 신라의 위치를 추정한 박창범 교수의 책을 예전에 구입해 보았었는데, 이렇게 일식이란 표현을 천문 현상인 일식이 아닌 정변을 나타낸 것이라면, 어떤 자료를 이용했는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신라가 중공의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것으로 박교수는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10) AD 19년의 예왕의 도장 헌납
파르티마제국의 Artabanus II 왕의 로마(온조왕 시기의 백재)를 압도하는 세력에, 온조왕과 대립하던 동예(상기 온조왕 자료 참조)는 신라와의 연대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예왕 (동예의 왕)의 도장 헌납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앞에서 동예가 코카서스산맥 우측, 카스피헤에 접한 위치에 있다고 추정했다.
"十六年春二月 북명 사람이 예왕의 도장을 바치다." (AD 19) (자료 : 남해차차웅, 나무위키)
- Vonones I에 대한 참고 자료
"Vonones was the eldest son of Phraates IV. According to the classical Roman historian Tacitus, Vonones was related to the Scythian king. Phraates IV had previously in his reign been aided by the Scythians to retake his throne from the usurper Tiridates in c. 30 BC, and thus Vonones could possibly be the result of a marriage alliance between Phraates IV and a Scythian tribal chief, who agreed to help him in return. Vonones was along with his three of his brothers (Phraates, Seraspandes and Rhodaspes) sent to Rome in 10/9 BC, in order to prevent conflict over the succession of Phraates IV's youngest son, Phraataces. The Roman emperor Augustus used this as propaganda depicting the submission of Parthia to Rome, listing it as a great accomplishment in his Res Gestae Divi Augusti.
After the assassination of Orodes III in about 6 AD, the Parthians applied to Augustus for a new king from the house of Arsaces. Augustus sent them Vonones I, but he could not maintain himself as king; he had been educated as a Roman, and was despised by the Parthian nobility as a Roman stooge. Another member of the Arsacid house, Artabanus II, who ruled Media Atropatene, was invited to the throne. In a civil war he defeated and expelled Vonones I.
Vonones I fled into Armenia and became king there in 12. Artabanus II, now the monarch of the Parthian Empire, attempted to depose Vonones I from the Armenian throne and appoint his own son instead. This was opposed by the Romans, who regarded this as posing a danger to their interests. As a result, the Roman emperor Tiberius (r. 14–37) sent his stepson Germanicus to prevent this from happening. However, the Roman general was met with no resistance by the Parthians, and reached an agreement with Artabanus II to appoint Artaxias III the new king of Armenia and renounce their support of Vonones I. The Romans thus acknowledged Artabanus II as the legitimate Parthian ruler. In order to ratify the friendly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empires, Artabanus and Germanicus met on an island in the Euphrates in 18. The Romans moved Vonones I into Syria, where he was kept in custody, though in a kingly style. Later he was moved to Cilicia, and when he tried to escape in about 19, he was killed by his guards.
His death and the now unchallenged dominance of Artabanus II split the Parthian nobility, since not all of them supported a new branch of the Arsacid family taking over the empire. The Parthian satrap of Sakastan, Drangiana and Arachosia, named Gondophares, declared independence from Artabanus II and founded the Indo-Parthian Kingdom. He assumed the titles of "Great King of Kings" and "Autokrator", demonstrating his new-found independence. Nevertheless, Artabanus and Gondophares most likely reached an agreement that the Indo-Parthians would not intervene in the affairs of the Arsacids. Vonones was survived by his son Meherdates, who attempted to take the Parthian throne in 49–51"
[출처] <펌> Vonones I (AD 8-12)|작성자 죽엽 CG Park
11) 진한의 철생산 및 철전 사용과 파르티마의 coinage
진한은 철이 많이 나서 주위의 가야, 왜, 마한 등이 수입해 갔다 하며, 화폐로 철을 이용했다 했다. 파르티마제국은 철전에 기념적인 내용을 많이 표현해서 유물로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진한의 모습을 보인다고 판단된다. 실제 아제르바이젠 지역에 역사적으로 철이 많이 난다. (본 블로그 글 참조)
"Coinage and titulage
Regular coin of Orodes II with a seated archer on the reverse
Coin of Orodes II with Tyche-Khvarenah on the reverse
Coinage under Orodes remained largely unchanged. The obverse of his coins portrays him with short hair and beard, along with a visible moustache. According to the modern historian Vesta Sarkhosh Curtis, the portrait greatly resembles the Shami statue, discovered in the Bakhtiari mountains in southwestern Iran; it is currently stored in the National Museum of Iran in Tehran. The reverse depict a seated archer wearing a soft cap (bashlyk) and sitting on a throne. Curtis notes its close resemblance to the thrones of the Achaemenid monarchs portrayed on the rock reliefs at Persepolis.
Other reverse of his coins, however, depict an investiture scene, where Orodes is receiving a scepter by the Greek goddess Tyche. In the Parthian era, Iranians used Hellenistic iconography to portray their divine figures, thus the investiture scene can be associated with the Avestan khvarenah, i.e. kingly glory. According to Khodadad Rezakhani, the introduction of this new portrayal may have been due to the enlargement of Orodes' authority after the Battle of Carrhae in 53 BC. Under Orodes and his son Phraates IV, the production of coins reached its zenith, with the only Parthian ruler having similar numbers being Mithridates II (r. 124–88 BC).
Like the rest of the Parthian kings, Orodes used the title of Arsaces on his coinage, which was the name of the first Parthian ruler Arsaces I (r. 247 – 217 BC), which had become a royal honorific among the Parthian monarchs out of admiration for his achievements."
[출처] <펌> Orodes II (BC 57-BC 37)|작성자 죽엽 CG Park
12) 로마의 포로와 한나라
아래 파르티마제국 (Orodes II)과 로마와의 싸움에서 로마 포로 이야기가 나온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 카르헤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는 파르티마제국이 전한시기의 한나라지역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박혁거세 시기의 신라(BC 53)에서 그리고 페르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자신들의 역사라고 말하지못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로마인의 후손들이 전한 시기의 중국에 일부 정착했다는 떡밥이 돌았고, 그 장소가 바로 중국 간쑤성의 융창 현에 있는 리첸이라는 마을이다. 이 리첸 마을의 주민들의 조상이 카르헤 전투 (BC 53) 당시에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인 크라수스의 지휘 하에 파르티아군과 싸웠다가 패배하여 포로가 된 로마인 병사들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이들이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전한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이들을 신기하게 여긴 중국인 노예상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오늘날의 리첸 지역에 정착하도록 했다는데, 막상 주민들의 하플로그룹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리첸 주민들의 하플로그룹의 56%는 한족의 하플로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주민들에게 아쉬움을 선사했다. 게다가 간쑤성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가까운 곳이고, 과거에 토하라인, 에프탈인 등의 인도유럽어족계 주민들이 살던 곳이라서 이곳의 한족들은 그들과 오래 전부터 혼혈이 있었던 지라, 실제로 로마인의 피가 섞였는지를 알기가 어렵다."
(자료 : 나무위키, 로마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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