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업적 3.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4.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2. 업적
여러모로 대외 전쟁이 활발했는데, 조분 이사금 본인의 업적보다는 이 전쟁을 주도했던 석우로의 일이 많다. 훗날의 이사부나 김유신처럼 일 날 때마다 불려가는 정도.[5] 석우로는 서불한(이벌찬의 별칭)까지 오르고 병마사도 해봤고, 조분 이사금의 큰사위이기 때문에 다음 왕위 계승자로 유력했으나, 결국 조분의 친동생인 첨해(첨해 이사금)가 다음 왕이 되었다.
231년에 석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6]을 정벌하고, 236년에 골벌국[7]을 병합해 마침내 경상북도 일대를 거의 장악하고 내륙 일대까지 신라가 깊숙히 진출하게 된다. 또 232년과 233년에 두 차례 왜의 침입을 막고, 즉위 16년(245년)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으로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다. 여태껏 왜국이나 백제 가야와는 허구헌날 투닥거렸지만 이게 기록에 있는 고구려의 첫 신라 공격 기사인데, 고구려군이 북방에서 침입하자 조분 이사금은 석우로를 보내 막게 했으나,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마두책(馬頭柵)으로 퇴각하여 방어한다. 다행히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는데 석우로는 몸소 나무를 해서 불을 피워 군사들이 장군의 배려에 감격해 사기가 올랐다고 하고, 고구려군도 퇴각한다. 그런데 244년부터 247년 사이 고구려는 위나라의 관구검과 국운을 건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고구려가 이 시기 신라 방면을 공격했는지는 의문이 있다. 고구려는 당시 비류수 전투에서 동천왕이 수도 국내성도 버려가며 문자 그대로 빤스런을 하고 있었는데 위나라에 대항할 군대도 모자란 판국에 과연 신라쪽을 쳐들어갈 여유가 있었는지는 몹시 회의적이다. 244년경 옥저-동예 일대가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의 영향을 받은 것을 보아 신라 측의 이 기록도 비류수 전투와 연관성이 있어보인다.
242년에는 지금의 안동시인 고타군에서 희귀한 벼이삭을 바친 기록이 있어 이 무렵에 안동지역이 신라에 복속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삼국전투기에서는 중국의 위(삼국시대)와 고구려가 맞붙은 비류수 전투를 설명하기 앞서 한반도 정세를 간단히 소개할 때 잠시 등장. 포니테일에 콧수염 조합의 간지캐인데 아마도 모델은 당시 인기드라마였던 선덕여왕(드라마)의 비담인 듯. 위의 감문국과 골벌국 정벌은 '그냥 주변 국가들을 병합했다' 식으로 뭉뚱그려져 기술되었다. 하긴 어차피 써 놓아도 아는 사람은 적을 테니.
4.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三月 조분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30)
一年夏六月 연충을 이찬으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기다 (230)
一年秋七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230)
二年秋七月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다 (AD 231)
三年夏四月 왜인이 금성에 쳐들어오자 왕이 물리치다 (AD 232)
四年夏四月 큰 바람이 불다 (233)
四年夏五月 왜병이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다 (AD 233)
四年秋七月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에서 싸워 이기다(AD 233)
六年春一月 동쪽으로 순행하다 (AD 235)
七年春二月 골벌국왕 아음부가 항복해 오다 (AD 236)
八年秋八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237)
十一年 백제가 서쪽 변방을 침범하다 (AD 240)
十三年 풍년이 크게 들고,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242)
十五年春一月 이찬 우로를 서불한으로 삼다 (AD 244)
十六年冬十月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자 우로가 나가 싸우다 (AD 245)
十七年冬十月 동남쪽에 흰 기운이 일어나다 (AD 246)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AD 246)
十八年夏五月 왕이 죽다 (AD 247)
석우로가 승리한 전쟁이 엄청나다. 그리고 재위 16년(245년)에 신라는 처음으로 북쪽 국경에서 고구려와 접촉하게 된다.
[1] 나중에 동생이 세신 갈문왕으로 추존함.[2] 전대 왕의 자녀들 중에서 남녀간의 성별을 따지지 않고 순서에 의거하여 즉위하고, 왕이 사망하였을 때에 전 왕의 자녀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면 왕의 자녀보다 왕의 다음 순서가 되는 동생이 왕위계승 1순위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승은 신라사 전체에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부분부분에서는 적용해 볼수있다.[3] 비슷한 예로 법흥왕은 자기의 딸을 바로 밑에 동생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다음왕인 진흥왕이다. 이에 따르면 내해 사망 이후 골정(비록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벌휴의 장남으로 동생인 이매보다 더 정통성을 가진 인물)의 아들 조분이 다음 계승 1순위인데, 내해와의 왕통 계승에서 자녀들과의 분쟁이 발생될 소지가 있기에 내해의 딸과 혼인을 하여 이를 방지한 것으로 보인다. 조분 사후 동생 첨해가 내해의 아들이자 조분의 사위인 우로보다 먼저 즉위한 것과 첨해 시기에 우로가 왜군에게 죽는 것을 보면 기록에는 없지만 분쟁의 여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4] 일본서기에 따르면 차후에 석우로가 왜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자 이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과 함께 왜의 대사를 속여서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5] 그래도 조분이 하는 일이 없던 건 아니고, 232년 왜군이 경주에 쳐들어왔을 때 한 번은 왕이 친정해서 기병을 활용해 크게 이기기도 했다.[6]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7]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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