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상(BC69-356)

<펌> 미추이사금 (261-284)-나무위키

Chung Park 2020. 8. 26. 13:57

1. 개요 2. 미추 이사금의 치세 3. 전(傳) 미추왕릉  4. 설화 5. 가공의 왕인가? 6. 삼국사기 기록 7. 같이 보기

1. 개요

신라의 13대 이사금이자 기록상 최초로 등장한 김씨 왕.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6세손(=6대손)[2]이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김구도(仇道)의 아들. 미추 외에도 다른 한자 표기로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이칠 갈문왕(伊柒 葛文王)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이다. 왕비는 전전대 왕인 조분 이사금의 둘째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인데, 아무래도 박씨 시대에 석씨인 탈해 이사금남해 차차웅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처럼, 그 역시 석씨 왕실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라 초기는 전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는 사례가 많았고, 신라에서 왕의 성씨가 달라지는 부분들은 대부분 사위 계승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전왕인 첨해 이사금이 정상적인 즉위 과정을 밟고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통해 이러한 혼란상을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즉위 원년에 의 출현과 금성에 큰 불이 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보통은 신라에서 왕이 즉위하자마자 먼저 하는 국조묘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재위 2년째에야 했기도 하고, 아버지 구도를 대원군격인 갈문왕에 봉한 것도 2년차에 했던 것 등이 바로 그것이라 볼 수 있다.

기록에서 미추 이사금의 딸이 두 명 나오는데, 둘 다 실제로는 미추 이사금의 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물 마립간의 왕비 보반부인과 실성 마립간의 왕비 아류부인 둘 다 진짜 미추 이사금의 혈통이라면 시기적으로는 미추 이사금의 딸보다는 손녀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 그러나 이 추정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기록은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보반부인이 장녀, 아류부인이 차녀로 알려져 있다.

여러 금석문에 등장하는 신라의 태조 성한왕을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3] 훗날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5묘제를 실시하면서 김씨 왕계의 시조격으로서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다.[4]

2. 미추 이사금의 치세

미추 이사금은 백성들을 돕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는데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신하들이 궁전을 고치자고 했으나 백성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생계의 근본인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농사에 방해가 되는 다른 일들을 일체 없애버렸으며, 지방 영토를 순방하며 백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 밖에 대내적으로 첨해 이사금 대에 설치한 남당[5]에서 정무를 보았고,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으며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전왕들이 그래왔듯 백제와 여러 번 드잡이질을 했다. 대체로 백제가 먼저 선빵을 날리는 구도였는데 공격이 들어오는 족족 막아냈다고 한다. 다만 정말로 이 시기에 백제와 신라가 직접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었는 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일단 고고학적으로 보면 아직 신라계 유물이 경상도 전역으로 퍼지지 못했고, 미추 이사금 재위 기간과 동시대인 3세기 후반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신라(사로국)은 여전히 진한의 여러 나라 중 하나 정도의 위상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우로 열전에 따르면 석우로가 전왕 첨해 때 왜인들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 후 남겨진 그의 아내와 아들들은 당연히 왜인들에게 복수심을 품었고, 미추 이사금 시기에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던 어느 날 대사를 술에 취하게 만들고 똑같이 불태워 죽여버림으로서 원수를 갚았지만 외교관을 살해한 것에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3. 전(傳) 미추왕릉

 



미추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은 현재 경주시 대릉원에 소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미추왕의 무덤인지에 대해 학계에서는 논란이 있는 상태.

미추왕릉 문서 참조.

4. 설화

 

앞서 말한 것처럼 최초로 왕위에 오른 김씨인 덕분인지 뒤따르는 설화들이 여럿 있다.

미추 이사금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 석씨인 유례 이사금이 즉위하였다.[6] 유례 이사금 재위 14년에 이서국 군사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경주시 금성이 포위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투구에 대나무 잎을 단 군사들이 이서국 군대를 물리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대나무 잎 군사들의 뒤를 밟다가 미추왕릉에 이르렀는데 능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떨어져 있었기에 모두들 "선왕의 은덕이다."라고 칭송했다는 것.[7]

또 다른 설화가 있다. 훗날 통일신라 혜공왕 시대에 김유신의 묘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김유신과 무장한 40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미추왕릉으로 향했다고 한다. 왕의 능에 도착한 김유신은 "제가 삼국통일에 힘 쓰고, 죽어서도 이 나라를 지켜가며 나라에 한 일이 얼만데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 후손들을 죽였습니다.[8] 전 더 이상 이 나라를 지키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허락해주세요 ㅠㅠ"라고 미추 이사금에게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자 미추 이사금이 "나랑 장군이 아니면 누가 저 놈들을 지켜주겠어? 좀 참고 돌아가서 하던 일 계속해줘"라고 달랬다. 김유신이 세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미추 이사금은 계속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로 일관했고 결국 김유신이 돌아갔다는 것. 나중에 혜공왕이 이 얘기를 전해듣고는 두려워서 김경신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흥무대왕릉)에 사과하고 살아남은 후손들을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추 이사금에게도 감사의 의미로 미추왕릉을 대묘(大墓)라고 부르며 오릉보다도 위에 두었다고 한다.[9]

위 두 설화를 통해 신라에서 미추 이사금을 동해이 됐다는 문무왕과 비슷하게 나라를 지키는 호국신적 존재로 여기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5. 가공의 왕인가?

미추 이사금을 후대에 김씨가 신라 왕 자리를 완전히 차지한 뒤에 만들어낸 가공의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후대의 김씨 왕들인 내물 이사금법흥왕의 행적들을 투영시켜 만들어냈다는 것이 요지.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인 문경현 선생의 썰이다.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유신의 혼령이 미추왕릉으로 가서 미추 이사금의 혼령에게 한탄하고, 미추 이사금이 그를 달래고 어르는 설화는 정황상 어색하다. 이 상황에서는 미추 이사금보다는 오히려 김유신의 조상들인 옛 금관국의 왕족(구형왕 등)들을 신라로 받아들인 법흥왕이 더 적절하다. 또한 아도비를 인용한 삼국유사 흥법 아도기라조에는 고구려 승려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고 최초로 절을 창건한 것이 미추 이사금의 시대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아도가 신라에서 활동한 것은 법흥왕 대이다. 한편 미추 이사금이 보낸 대나무 잎 군사들이 이서국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한 설화는 내물 마립간 시대에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야와 왜, 백제의 공격을 물리친 사건을 투영시킨 것이다. 즉, 위와 같은 사항들로 미루어보아 미추 이사금은 법흥왕과 내물 마립간을 투영시켜 만들어낸 가공의 시조가 아닐까 한다.[10]

 


물론 정확한 증거에 기한 판단이 아니라 기록 정황에 근거한 추측이므로 판단은 각자 알아서다. 믿거나 말거나...

6.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一月 미추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61)
一年春三月 용이 궁 동쪽 연못에서 나타나다 (AD 261)
一年秋七月 금성 서문의 화재로 민가가 불타다 (AD 261)
二年春一月 이찬 양부를 서불한으로 삼다 (AD 262)
二年春二月 국조묘에 제사지내고 사면한 후 구도를 갈문왕으로 봉하다 (AD 262)
三年春二月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를 보다 (AD 263)
三年春三月 황산에 행차해 나이 많고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다 (AD 263)
五年秋八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 직선이 이를 물리치다 (AD 265)
七年 남당에서 정치와 형벌의 잘잘못을 묻다 (AD 267)
十一年春二月 농사짓는 일에 해가 없도록 영을 내리다 (271)
十一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치다 (271)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다 (AD 271)
十五年春二月 신료들이 궁실을 고쳐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다 (AD 275)
十七年夏四月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AD 277)
十七年冬十月 백제 군사가 괴곡성을 포위하자 파진찬 정원이 이를 막다 (AD 277)
十九年夏四月 가물고 죄수의 정상을 살피다 (AD 280)
二十年春一月 홍권을 이찬으로, 양질을 일길찬으로, 광겸을 사찬으로 삼다 (AD 281)
二十年春二月 시조묘에 배알하다 (AD 281)
二十年秋九月 양산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다 (AD 281)
二十二年秋九月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다 (AD 283)
二十二年冬十月 백제가 괴곡성을 포위하자 일길찬 양질이 막다 (AD 283)
二十三年春二月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위로하다 (AD 284)
二十三年冬十月 왕이 죽다 (AD 284)

7. 같이 보기

 

[1] 삼국유사 아도열전에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내용이 삼국사기 묵호자전에 있으며 눌지 마립간 시기라고 전하고 있다.[2] 알지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3] 김알지나 그의 아들 김세한 등 여러가지 이설이 있다.[4] 진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성씨가 달라 유교식으로 해석이 어렵기 때문에 5묘가 아니라 신라 고유 종교 시설이었던 신궁에서 따로 모신 것으로 보인다.[5] 남당의 존재는 백제에서도 확인된다. 고이왕 대에 남당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보통 남당은 국가 정치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상징하는 정치 기구이기도 하며, 신라와 백제가 각각 진한마한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6] 위에도 설명했지만 일단 미추 이사금은 석씨 왕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음은 다시 석씨로 넘어갈 차례였던 것이다. 박씨 왕조 시절에 왕을 했던 석탈해와 마찬가지 사례.[7] 그리고 이때부터 미추왕릉이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8] 혜공왕 6년에 김유신의 후손인 대아찬 벼슬의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김유신은 이 사건을 말하는 것[9] 오릉이 건국 시조인 혁거세거서간과 그의 왕비 알영부인이 묻힌 곳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엄청나게 파격적인 대우다.[10] 출저는 문경현, 1983년, 『新羅史硏究』, 慶北大學校出版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