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상(BC69-356)

<펌> 첨해이사금 (247-261)-나무위키

Chung Park 2020. 8. 26. 13:53

1. 개요 2. 왕위 계승 3. 석연찮은 석우로의 죽음 4. 이후 5. 의문의 최후 6.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신라의 제12대 임금으로 칭호는 이사금. 성씨는 석씨로 아버지는 벌휴 이사금의 장남 골정, 어머니는 구도 갈문왕의 딸인 김씨 옥모부인이다. 전왕 조분 이사금의 친동생.

2. 왕위 계승

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왕(助賁王)의 친동생이다.
沾解尼師今立 助賁王同母弟也


원년(서기 247) 가을 7월, 시조묘에 참배하고, 아버지 골정(骨正)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봉하였다.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즉위하고 두 달 만인 247년 7월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에 봉했다. 그런데 신라시호 개념은 진흥왕 때나 들어오는지라 이전까지 모든 갈문왕명은 물론 왕명은 모두 실명+이사금/갈문왕의 형태였다는 점에서 별도의 시호를 부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 만약 세신이 음차가 아닌 훈차라면 세상의 신이라는 뜻이 되는데 사실일 경우 자신을 신격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유례 이사금을 世(누)리지 이사금이라고도 하고, 혁거세 거서간의 이름이 赫(붉)어世(뉘)로 해석되는 걸 보면 세(世)는 음차가 아닌 훈차로 쓰인 것이 맞는 듯 하다.

 

사관이 논평한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었다. “다른 사람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낮추어야 하고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이는 조종(祖宗)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황제의 생부를 친(親)이라 하고 시호를 도(悼)라 하며, 생모를 도후(悼后)라 하여 제후나 왕의 지위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이는 경전의 뜻에 맞는 것으로 만세(萬世)의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은 이를 본받아 그대로 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임금의 친척으로 왕통을 이은 임금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받들어 봉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니, 절대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論曰 漢宣帝卽位 有司奏 爲人後者爲之子也 故降其父母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帝所生父稱親 諡曰悼 母曰悼后 比諸侯王 此合經義 爲萬世法 故後漢光武帝宋英宗 法而行之 新羅自王親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已 封其外舅者亦有之 此 非禮 固不可以爲法也

 

같은 골정의 아들인 조분 이사금은 아버지 골정을 갈문왕에 봉하지 않았다. 이는 조분이 골정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촌 내해 이사금사위로서 왕위를 상속했음을 의미한다. 형 조분은 아버지를 갈문왕에 봉할 필요가 없었고, 동생 첨해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조분의 사후에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사람은 조분의 동생 석첨해, 아들 석유례, 맏사위 석우로, 둘째 사위 김미추였다. 유례, 우로, 미추는 모두 조분보다 한 항렬이 낮지만 첨해는 조분과 항렬이 같았고, 그렇다면 첨해가 유례, 우로, 미추보다 나이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아들들과 사위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왕이 되었다. 그래서 첨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첨해는 왕의 아들도, 왕의 사위도 아니었기에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추증한 것이고, 조분은 이미 내해왕의 사위였기에 그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고려의 관점으로 논평한 것으로, 벌휴 이사금은 즉위한 후 자신의 아버지 구추를 별도로 추봉하지 않았고, 이는 이매의 아들인 나해 이사금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첨해 이사금이 골정을 추봉한 것은 단순히 아버지여서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초대 신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호 개념이 적용된 명칭이라 단순한 추봉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전형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다.

3. 석연찮은 석우로의 죽음

그리고 첨해 이사금 즉위 초기에 있었던 석우로의 죽음에는 매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존재하는데 당시 신라 최고의 왕족인 석우로가 왜국의 사신에게 "너희 왜국의 임금을 붙잡아다 소금 굽는 노비로 삼고, 왕비는 밥짓는 노비로 삼겠다."는 말을 술김에 한 탓에 분노한 왜군이 쳐들어와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피난을 갈 정도로 신라가 패했고 이에 실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왜 진영에 별다른 호위도 없이 털레털레 가서 사과를 하는데 왜에서는 그를 붙잡아다 불에 태워버렸다고 한다. 왜군들이 석우로를 붙잡아다 장작에 올려놓고 태워 죽여서 아주 재로 만들어버렸으니... 이것은 신라의 병권을 책임졌던 장수에다 왕위에 매우 가까웠던 최고 왕족이 왜 진영에 단신으로 갔다가 불에 타 죽고 말았는데도 문제는 첨해가 왜에 대해 따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첨해는 군공 등 업적이 뛰어나고 힘도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크며 왕위 계승권 측면에서도 자기보다 더 정통성이 높은 우로가 왜인이라는 제3자들에 의해 제거되기를 원했다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다른 문제로는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님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데서...(중략)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신라왕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을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 죽은 왕의 처와 신라인이 공모하여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문제는 왜군이 신라를 쳐서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어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간 것을 출거(出居)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군이 패전했거나 상황이 열세에 몰리자 첨해가 우유촌으로 피난을 갔고, 석우로가 개전의 책임을 지고 살해당했을 수 있다. 일본서기 측 기록에선 신라왕이라 적혀 있으나 석우로의 지위 이후[2] 기록의 유사성으로 보아 실제로는 석우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첨해 이사금 때의 일은 아니고 다음 왕 미추 이사금 시대의 일화지만 석우로가 왜인들의 손에 살해당한 후 그의 아내와 아들이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을 때 술에 취하게 만들고 불태워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원수를 갚았지만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가기도 했다.

4. 이후

첨해 이사금의 재위 기간은 14년 정도인데 신라 초기 왕치고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기근이 심해서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 도적이 들끓었다. 그러다 비가 내릴 때는 또 큰 비가 내려 산이 40군데나 무너졌다는 기사도 있다.

외국과의 관계는 우선 전왕 때 최초로 맞붙었던 고구려와는 일단 사신을 보내 화친했다. 그러나 백제와는 여전히 자주 충돌했는데, 즉위 9년(255년) 백제가 변경에 침입했지만 격퇴했으며, 즉위 15년(261년) 달벌(현재의 대구광역시)에 성을 쌓았다. 첨해 이사금 때쯤에는 옛 진한의 모든 지역을 차지했으리라 추정된다.

5. 의문의 최후

冬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겨울 12월 28일, 임금이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 - 《삼국사기

 

보통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사망 기사에서 그냥 '왕이 죽었다[王薨]'라고 끝내는 경우가 다반사지만[3] 첨해는 굳이 '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王暴疾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로 돌연사일 수도 있겠지만 다음 왕이 본인의 사위가 아니라 전왕 조분의 사위인 김미추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석우로가 왜군에게 잡혀 화형당해 죽도록 방치하고 왜국에 별달리 항의나 보복하려고 하지도 않은 첨해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분개한 석씨 왕족과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던 김미추가 힘을 합세해 반정을 일으켜 첨해를 제거했다고 보는게 학계의 유력한 해석이다. 아니면 왜와 백제의 공격이 거세지는 와중에서 첨해 이사금의 책임론이 부각되어 이를 근거로 원래 조분 이사금 사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미추 등의 김씨 계열이 반정을 주도했을 여지도 있다.

6.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첨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47)
一年秋七月 시조묘에 배알하고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하다 (247)
二年春一月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삼다 (AD 248)
二年春二月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다 (AD 248)
三年夏四月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이다 (AD 249)
三年秋七月 궁의 남쪽에 남당을 짓고 양부를 이찬으로 삼다 (AD 249)
五年春一月 남당에서 첫 정무를 보고 부도를 아찬으로 삼다 (AD 251)
七年夏四月 용이 궁의 동쪽 연못에 나타나다 (AD 253)
九年秋九月 일벌찬 익종이 백제와 싸우다가 죽다 (AD 255)
九年冬十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다 (AD 255)
十年春三月 동해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오다 (AD 256)
十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AD 256)
十三年秋七月 가뭄과 흉년으로 도적이 많다 (AD 259)
十四年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다 (AD 260)
十四年秋七月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AD 260)
十五年春二月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삼다 (AD 261)
十五年春三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AD 261)
十五年冬十二月二十八日 왕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다 (AD 261)

[1] 벌휴 이사금의 장남 골정이다.[2] 당시 석우로의 지위는 최고위직인 서불한(이벌찬)에 왕족이자 선왕의 사위다. 왕과 가까운 왕족들이 갈문왕의 칭호를 받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미루어보면 기록에 안 남아있을 뿐 석우로도 왕의 칭호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일본 측에서 왕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3] 그 이후 '왕의 시호를 뭐라 정했고, 어디다가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