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상(BC69-356)

<펌> 유례이사금 (284-298)-나무위키

Chung Park 2020. 8. 26. 14:01

1. 개요

2. 생애

2.1. 출생 설화 - 가공의 왕? 2.2. 이서고국과의 전쟁  2.3. 왜국 원정 시도

3. 삼국사기의 기록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함께 도모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295년, 왜의 침략이 늘어나자 한 말. 하지만 물을 건너 멀리 가야 한다는 점과 백제가 배신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포기한다. 단, 왜국측의 사서인 《연대기(年代記)》에서는 유례왕 시절 신라가 일본의 오사카까지 침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 개요

신라의 제14대 왕. 칭호는 이사금.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아들로, 어머니는 나음 갈문왕(奈音葛文王)[1]의 딸 박씨라 한다.

삼국사기》에 "옛 기록(古記)에는 제3대와 제14대 두 임금의 이름을 같이하여 유리(儒理) 또는 유례(儒禮)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니고, 같은 발음을 다르게 음차했을 뿐이다.

2. 생애

2.1. 출생 설화 - 가공의 왕?

출생이 꽤나 기이하다. 《삼국사기》에선 어머니 박씨가 밤길을 가다가 별빛 안에 들어온 뒤 유례 이사금을 임신했고, 아이를 낳은 밤에는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아버지가 없는 셈이다. 예수?? 신라의 왕위는 장자계승으로 이어진 게 아니긴 했지만 왕비가 있었는지 아닌지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없고,[2]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식의 기록까지 있다는 건 정통성을 매우 중요시하는 전근대 왕국의 임금 입장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셈. 더욱이 3대 왕과 이름마저 '유리'로 똑같은데다가 이 부분은 삼국유사가 아니라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아마 출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걸 염두해 두고 미추 이사금을 한 번 살펴보자. 이러한 탄생 설화를 통틀어 감생설화라고 한다. 게다가 아래에 나오는 이서국의 침공 사건도 삼국유사에는 3대 유리왕 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선 유례 이사금의 어머니 박씨가 '○召夫人'[3]로 적혀 있는데, 신라에서 보통 왕비나 왕과 가까운 친족 여성이 가졌던 '부인'의 칭호를 갖고 있었던 것을 의미하므로 일반적으로 유례 이사금의 어머니 박씨는 조분 이사금의 둘째 왕비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경우엔 유례 이사금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이거나 아예 혈연관계가 없다고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무엇보다도 미추 이사금 사후 석씨로 왕위가 복귀되긴 했지만, 여전히 김씨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가운데서 석씨 왕들의 계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의 가계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2.2. 이서고국과의 전쟁

14년(297) 봄 정월...옛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 측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문득 이상한 군사들이 왔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사람들이 모두 대나무 잎을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해 격파하였는데, 후에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했다.


삼국사기》유례 이사금 본기

 


297년에는 경상도 지역 안쪽,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일대의 소국으로 비정되는 이서고국와 전쟁이 일어나고 결국 신라가 승리, 이서고국은 멸망했...는데, 그 과정이 좀 묘하다. 이서고국은 서라벌 근처의 작은 나라였는데 이런 나라를 치는데도 신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서라벌까지 위협받다가 정체불명의 병사들이 나타나서 이서고국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병사들은 모두 머리에 대나무를 꽂고 있었고, 전투가 끝난뒤 홀연히 사라지길래 뒤를 따라가보니 미추 이사금의 능인 '죽장릉'에 대나무들이 수두룩하게 놓여져 있어서 무덤 속에 누워있는 미추 이사금이 보낸 귀신 병사들이었다...라는 게 기록의 내용.

학자들은 이를 미추 이사금의 세력, 즉 김씨들의 사병으로 추측한다. 즉 이서고국과의 전투는 본래 석씨 왕인 유례 이사금의 주도하에 석씨 세력들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신라 전체가 아닌 석씨 세력의 전력으로만 상대하다보니까 의외로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되려 위기에 빠지자 유례 이사금이 결국 김씨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김씨 세력의 사병들이 출동해 이서고국을 멸망시켰다는 해석. 이는 역으로 보면 이때쯤부터는 비록 석씨 세력이 왕위에 있어도 군사력이나 여타 세력이 상당히 약했다는 의미로 볼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전승으로 이서고국이 신라를 침공했을 때 금관국의 왕 거질미왕에게 HELP를 요청했고, 이에 거질미왕이 "너네 신라 땅에서 안 꺼지면 내가 너네 줘 팬다?"라고 이서고국을 협박해서 물러나게 했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실리지 않아 정식 사료로 취급되진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더 이상의 이서국과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결국 이후 신라의 반격으로 이서국은 멸망하고 신라의 세력권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2.3. 왜국 원정 시도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참고하십시오.


그의 재위 연간에 왜국의 신라 공격이 특히 많아졌는데, 287년에는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 1천 명을 잡아서 도망갔고 292년에 사도성, 294년에는 장봉성으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쯤되니 유례 이사금도 빡쳐서 왜에 대한 원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즉위 12년(295년)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하였다.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당시 신라가 백제와 왜, 특히 그 중에서도 왜구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훗날 실성 마립간 때도 비슷하게 일본으로의 예방전쟁을 왕이 제안했지만 그 때도 비슷하게 대신의 만류로 그만뒀다.

그런데 삼국사기 편찬으로부터 수백년 후 조선시대 역사서 동사강목에서 조선통신사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왜국측의 사서(기록)인 《연대기(年代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여, 삼국사기에서는 하려다 말았다는 기록과 달리 신라가 실제로 왜국을 침공했다는 기록을 적었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明石浦)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한다.”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應神) 12년 신해(辛亥)(AD 291년)가 바로 유례왕 8년(AD 291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동사(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즉,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의 사서(기록)인 《연대기(年代記)》의 기록에서는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나서서 대판(오사카) 근교까지 진격하고는 결국 화친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있어서 《연대기(年代記)》[4]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가 침공을 시도한 시기도 295년으로 일본측에서 기록한 291년의 침공 시점과 약 4년 정도의 차이가 보인다. 물론 291년의 침공과 295년의 침공시도를 별개로 본다면 291년에는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실제 침공에 성공하였지만 295년의 침공시도는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포기 했다고도 설명 할 수 있다. 하지만 관련 기록들이 너무 부족하여 정확한 상황은 파악 할 수가 없다.

 

일본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이다.

 


추가로 에도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5]에도 해당 기록이 똑같이 나온다.




만약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면 신라는 어떻게 일본을 공격했을까? 일단 침공 루트는 세가지 경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번째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나, 하관(시모노세키)를 거쳐 명석포를 다다르는 첫번째 방법과 두번째는 주고쿠 지방(규슈 옆에 있는 섬)을 통해 육지를 상륙해서 명석포로 가는 방법, 세번째는 대마도 서남부로 우회해 큐슈 남부를 지나 시코구 지방의 남부 지역을 지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한 방법이지만, 신라는 그 중 세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명석포로 진격해 오사카에서 왜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유례왕 왜국 정벌 당시 추정 지도

이렇듯 신라의 왜국 침공은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 할 경우 신라는 당시 일본의 중심지인 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로인해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엽전(葉田)의 위수궁(葦守宮)에서 머무름 / 어우별(御友別)의 형제자손에게 길비국을 나누어 줌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하다노) [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카시하데)로서 (천황)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하토리베)를 형원(兄媛;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웅신 22년) 291년 9월 10일 원문

 


일본서기에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사는 없지만 응신(應神) 22년[서기 291년] 조에,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왜왕이 여섯현을 떼어주었다는 기록이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3.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유례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月 유례 이사금이 즉위하다 (AD 284)
二年春一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285)
二年春二月 이찬 홍권을 서불한으로 삼다 (AD 285)
三年春一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다 (AD 286)
三年春三月 가뭄이 들다 (286)
四年夏四月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다 (AD 287)
六年夏五月 왜병에 대비해 무기를 손질하다 (AD 289)
七年夏五月 물난리로 월성이 무너지다 (AD 290)
八年春一月 말구를 이벌찬으로 삼다 (AD 291)
九年夏六月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하자 일길찬 대곡에게 구원병을 주어 보내다 (AD 292)
九年秋七月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292)
十年春二月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을 이주시키다 (AD 293)
十一年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다 (AD 294)
十一年秋七月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치다 (294)
十二年 왕이 왜국을 정벌하려다 실행하지 않다 (AD 295)
十四年春一月 옛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미추왕의 음덕으로 물리치다 (AD 297)
十五年春二月 서울에 짙은 안개가 끼다 (298)
十五年冬十二月 왕이 죽다 (AD 298)

[1] 내해 이사금의 큰아들이다.

[2] 벌휴 이사금도 왕비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왕비가 있었다는 건 추정할 수 있다. 골정과 이매라는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례 이사금은 이마저도 없다.

[3] 앞 글자가 진짜 ○로 적혀 있는 건 당연히 아니고, 저 글자가 뭔지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이리 표기하는 것이다. 아마 순우리말 이름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뒤에 있는 召는 아가씨를 이르던 고유어 명칭 조이(召史)를 표기하려던게 아닌가 추측된다. 이 글자는 법흥왕비 보도부인, 입종 갈문왕지소태후, 진흥왕사도태후, 진지왕비 지도부인, 그리고 태종 무열왕의 딸 고타소지소부인,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道, 刀, 炤와 혼용이 가능하다.

[4] ‘임진왜란’ 이후 ‘제2차 조선통신사‘ 오윤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측의 역사서(기록)이다. 서기 1617년 막부(幕府)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 내의 기록을 보고 현장답사까지 확인 한 후에 자신의 저서인 부상록(扶桑錄)에 해당 기록을 인용하였다.

[5] 1688년(겐로쿠 원년)에, 에도시대의 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이다. 상권 3책・중권 8책・하권 4책으로 되어 있다.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계 126종류의 서적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반입되어,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의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