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당시 국제 정세 3.2. 내정 안정화 3.3. 백제에 대한 반격
4. 평가 5. 삼국사기 기록 6.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소개
고구려의 제17대 군주.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한다.[2]
백제의 고이왕, 신라의 법흥왕, 통일신라의 신문왕과 함께 나라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개혁 군주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굵직한 업적 덕분에 국사 교육 과정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며 그 때문에 한국사를 공부하는 수능 응시생이나 공시생들에게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군주이기도 하다. 과장을 좀 보태면 이 임금을 빼놓고는 고구려의 정치사를 논할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고국원왕 대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멸망 테크를 밟던 고구려를 단기간에 부흥시킨 명군 중 한 명이다. 특히 고국원왕 당시엔 군주가 직접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한 치양 전투의 예를 보면 당시 고구려군이 원정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만 ~ 2만명 선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데, 소수림왕 - 고국양왕을 거친 후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즉위한지 2달만에 출정한 원정에서 4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영락 10년 대원정 당시에는 5만의 보병과 기병을 신라 구원을 위해 파견[3]하는 모습에서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통치력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대 국가에서는 정치와 지방 제도를 잘 운영해 호구 등록을 제대로 하면 세금과 군사가 늘어나 국력 증대로 직결되기 때문.[4]
2. 태자 시절
삼국사기에는 그에 대해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호평을 내리고 있다. 35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태자가 되고나서 활발하게 정사에 개입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340년에 왕의 명령으로 전연의 태조 모용황을 예방한 것이 그 예. 이러한 움직임 덕에 왕으로서의 정무를 좀 더 일찍 수행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리고 전연의 침입 이후, 고구려의 태자가 사신으로 갔다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소수림왕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고국원왕의 장남이 소수림왕인 것을 보면 소수림왕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당시에 장남이 사신으로 다녀온 경우도 꽤 많았으며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온갖 중국으로 들어오는 학문과 서적을 접하고 그 토대로 고구려의 정치체계를 안정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371년 10월 23일, 아버지가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일각에서는 고국원왕이 부상을 입자 대신 전투를 지휘했을 거라고 의견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다만, 왕이 쓰러졌는데도 평양성이 함락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소수림왕이 있든 없든 간에 결사항전이 심하여 근초고왕이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
3. 왕위에 오르다
등극한 고국원왕의 아들 | |
17대 | 18대 |
소수림왕(少獸林王) | 고국양왕(故國壤王) |
3.1. 당시 국제 정세
370년, 모용씨의 전연은 티베트계 저족의 우두머리 부견이 건국한 전진(前秦)에게 멸망했다. 전진은 세를 키운 끝에 화북 일대를 통일했고 동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배후를 안전하게 해야 된다는 판단으로, 고구려에 온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전진은 원수인 전연을 멸망시킨데다가 일단 자기네 사정도 꽤 나쁜데 화북을 통일한 상태임에도 온건한 자세를 취하니 외교로 일단락 시킬 수 있었다.
백제는 아직까지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이 건재했고, 국력 역시 무척 강력한 탓에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에서 소수림왕이 선택한 건 강력한 중앙 집권 강화와, 불교를 통한 내치의 안정이었다.
3.2. 내정 안정화
二年 夏六月 秦王苻 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大學 敎育子弟。
2년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대학(大學)을 세우고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三年 始頒律令。
3년에 율령(律令)을 처음으로 반포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고등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여 유학 이념에 대한 교육 체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아 훗날 번영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련의 이런 정책들은 이전의 고구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했던 것으로, 법치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중앙 집권 강화를 노렸던 것들이다.[5]
四年 僧阿道來
4년에 중 아도(阿道)가 왔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5년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그곳에)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그곳에)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고구려 제17대 해미류왕(解味留王)【혹은 소수림왕(小獸林王)이라 한다.】 여름 6월에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었다. 이에 임금과 신하들은 예의를 갖추어 성문까지 나가 맞아들였으며, 정성을 다해 믿고 공경하니 감격과 경사가 널리 퍼졌다. (중략) 마등이 후한에 들어온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인데, 그 뒤 4년(374)에 신승(神僧) 아도(阿道)가 위(魏)에서 들어왔으며【옛 글에 있음.】 처음으로 성문사(省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무르게 하였다. 기록에 말하기를 “성문을 절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흥국사가 그것이며, 뒤에는 잘못 기록하여 초문(肖門)이라 하였다. 또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물게 하였으니, 고기(古記)에는 흥복사가 그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해동불교의 시작이다.
《해동고승전》
또한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내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고구려의 국력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단 5년 만에 흔들리던 나라를 붙잡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하자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게 된 것. 다만 여러 기록들을 통해 불교는 이미 고구려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수림왕은 이를 국가적으로 "공인"한 것으로 보인다.[6]
3.3. 백제에 대한 반격
五年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5년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국력을 서서히 회복하자 재위 5년만인 375년 7월, 소수림왕은 백제와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하고는 군대를 보내 백제의 수곡성을 함락시켰다. 근초고왕은 이를 반격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어 반격하지 못했다고 하니 소수림왕으로썬 통쾌한 복수였을 것이다. 일년 후인 376년, 근구수왕이 즉위 하자 마자 고구려는 백제의 북쪽 변경을 또다시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6년 겨울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이러한 침략이 거듭 발생하자, 근구수왕은 고구려에 대대적인 역공을 가했다.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두 번째로 평양성을 향해 진격한 것.[7]
七年 十一月 南伐百濟。
7년 11월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3년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하지만 소수림왕은 이를 막아내고 그해 11월에 백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또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이처럼 백제와 아웅다웅하며 서로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는 사이, 거란족이 소규모 침공을 해온 기록이 남아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당시 고구려가 또다시 군사를 일으키긴 힘들어 보인다.
이후 별다른 침공 기록이 없다가 재위 14년째인 384년 11월, 왕위를 고국양왕에게 물려준 뒤 승하,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4. 평가
많은 한국사 책과 교과서에서는 고구려의 기틀을 세운 왕으로 무난하게 묘사되지만 자세히 보면 거의 멸망 직전에 다다른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추락했던 국력을 회복해서, 이후 광개토대왕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기반을 닦은, 자신의 재위 중에 체제 재구축과 도약을 동시에 이룩해낸 그야말로 엄청난 명군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군주이다. 스포츠 팀으로 비유하자면 '리빌딩'과 '리그 상위권 도약'을 불과 1~2시즌 중으로 완성해낸 셈.
한국인들은 보통 간단하게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공인한 왕 정도로 알고 있지만 한민족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수성 군주의 정점에 서있는 왕이다.[8] 기존에 뒤쳐진 체제를 완벽하게 정비하고 발전을 모색하는 길을 열어주면서도 본인 세대에서 이미 국력을 회복시켜서 전쟁을 수행할수가 있었다. 대단한 점은 기본적으로 체제가 무너지면 필요한 것이 군사와 자금인데 이 두가지는 결국 인구 수가 뒷받침이되어 인재가 나와주어야 한다. 그러나 소수림왕은 백제나 전진 등 고구려보다도 더욱 인구 수와 자연 조건이 좋은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고구려라는 나라를 개혁하는데 성공했다.[9][10]
고국원왕 시기는 전연에게 털려 수도가 함락되고 왕비가 포로가 되었으며 미천왕의 무덤도 도굴되고 왕마저 전쟁에서 전사하는 등 치욕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시기였고 그대로 나라가 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소수림왕은 단 5년 만에 국가의 기틀을 잡고 백제를 공격하고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나라를 재건해내는 실로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다. 멸망 위기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 할 수 있게 한 소수림왕의 능력은 전세계사에서도 비교 대상이 거의 없을 정도다.[11] 그래서인지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보다 소수림왕을 더 높게 쳐주는 시각도 꽤 보인다.
고국양왕의 형, 광개토대왕의 큰 아버지, 장수왕의 큰 할아버지로 어떻게 보면 6대에 걸쳐 내려온 명군 혈맥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왕복이 꽤나 좋은 나라였는데 이 당시의 라인업이 특히 후덜덜했다. 소수림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12] - 안장왕[13]에 이르기까지 6대 하고 정확히 160년. 이 군주들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전반적으로 내내 상승세를 이어 나가며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개털이 되어 오늘 내일하던 산골짜기 막장 국가에서 동북아의 지역 강국으로 각성하였다. 이 분이 고구려의 기틀을 닦지 않았다면 광개토대왕도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얻어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소수림왕은 그야말로 동생과 함께 조카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초석을 탄탄히 다져놓은 셈이었다. 이 당시 후연과 백제의 침입으로 고구려는 완전히 만주의 동쪽인 산골짜기로 밀려나가고 그 당시 배경상 한반도 북부는 도저히 사람이 살 곳이 안되어 인구도 한반도 내의 백제와 신라의 비해 인구밀도가 적은 데다가 대부분 산지였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소수림왕이라는 명군이 나타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평가가 매우 좋지 않았다. 불교를 최초로 도입했기 때문인데, 숭유억불의 시대 조선시대에서는 신라의 법흥왕,[14] 백제의 침류왕과 함께 불교를 들여와 삼한을 어지럽힌 불교 삼형제로 꼽힌다. 사실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조선시대 당대의 역사 인물 평가는 현대와는 다른 점이 아주 많다.[15]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소수림왕 본기
一年冬十月 소수림왕이 즉위하다 (371)
二年夏六月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 (372)
二年夏六月 태학을 세우다 (372)
三年 율령을 반포하다 (373)
四年 승려 아도가 오다 (374)
五年春二月 초문사와 이불란사 두 사찰을 창건하다 (375)
五年秋七月 백제 수곡성을 공격하다 (375)
六年冬十一月 백제를 침범하다 (376)
七年冬十月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다 (377)
七年冬十一月 백제를 정벌하고 전진에 조공하다 (377)
八年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다 (378)
八年秋九月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다 (378)
十三年秋九月 혜성이 나타나다 (383)
十四年冬十一月 소수림왕이 죽다 (384)
[1] 북한 주장.[2] 이런 이름 때문에 대무신왕의 다른 명칭에서 제기되는 해씨 고구려설이 부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명으로 소수림왕 시기에 고구려 왕계가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고구려인들이 소수림왕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 불렸던 대무신왕과 함께 놓고 보면 단번에 드러난다. 고구려인들은 소수림왕을 '소해주류' 즉 '작은 대무신왕'에 비유한 것이다.[3]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당시 모용희가 이끈 후연군은 고구려를 침공,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트리고 700리에 달하는 고구려 땅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요동에서 후연과 대치중임에도 5만의 병력을 따로 차출해 내려보낼 정도로 병력 규모가 커졌다는 뜻.[4] 한 예로 청나라의 강희제가 지정은제를 시행할때 청나라 인구는 2,462만 명이었는데 지정은제를 도입한 후 80년 후에는 4억명이 되어 있었다. 자연 증가라고 보기 어려운 이 인구 증가율은 백성들이 호적 등록을 기피하지 않아서였다.[5] 일각에서는 고구려 말기인 연개소문이 대막리지 재임 당시에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증진시켰는데, 이를 토대로 삼국시대 때 왕권 강화가 곧 불교의 중흥과 관련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6] 각훈(覺訓)이 기록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의 고승 지둔(支遁)(314년 ~ 366년)이 고구려도인(高句麗道人)에게 축법심(竺法深)이라는 스님의 덕행을 찬양하는 서신을 보낸 기록이 나온다.[7] 백제 역사상 평양성을 직접 본 것이 확실한 왕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뿐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이 남평양을 점령했다는 글귀가 있어서 성왕 역시 평양을 직접 본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평양은 고구려에서 지금의 서울일대를 가리키던 표현이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는 한성과 평양을 구분지어 서술하고 백제, 야마토 연합군이 평양을 치자 고구려왕이 궁의 담을 넘어 도망쳤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8] 물론 한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역사학과 학생정도 된다면 통일신라의 신문왕, 고려의 광종, 조선의 세종대왕 수준으로 이를 갈만한 왕이다. 정비한 제도의 숫자만 본다면 세종대왕과 맞먹는 양인데 세종대왕은 유명하기라도하지 소수림왕은 제대로 배우기 전까지 몰랐던 경우가 부지기수.[9] 이는 정말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림왕 시대의 고구려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고려 말 정도전과 같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은 굉장히 뛰어난 인재들이지만 개혁을 포기하고 나라를 건국하는 것을 선택했다. 기존의 것을 뜯어고치는 개혁은 새로운 것을 세우는 혁명보다도 어렵다는 것이다.[10] 당장 고구려 말고도 동부여도 전연에게 침략당해 5만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소수림왕처럼 나라를 부흥시키질 못하고 서서히 쇠퇴해갔다. 이런 두 나라의 격차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11] 한국사에서 찾는다면 고려의 현종 정도. 현종도 거란의 침공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체제를 정비하고 이후에 이어지는 고려의 전성기를 열었다. 다른 나라 역사 중에서는 중국 춘추시대에 오자서가 이끌던 오나라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곧장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 냈던 월왕 구천의 월나라가 있다.[12] 문자명왕 시기에 영토가 나제동맹에 밀려나가 대접이 안 좋지만, 이는 말기에 해당되므로 문자명왕은 말기 전까지는 고구려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며 전성기의 힘을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안원왕 역시 명군으로 봐야해서 문자명왕을 명군으로 보기엔 애매하지만....[13] 보통 문자명왕까지를 전성기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안장왕의 치세 때까지 전성기가 유지되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부왕 말기에 있었던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패수 전투를 시작으로 혈성, 오곡원에서 백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과거 후연의 수도이기도 했던 북주의 용성을 침공해 약탈하는 등 활발한 확장을 벌였다. 더군다나 양면 외교 정책도 결실을 맺으면서 남북조로부터 동시에 고구려 왕에 임명받기도 했다. 본격적인 쇠퇴기는 안장왕 사후 안원왕, 그것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지는 말엽부터 시작된다.[14]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대신, 묵호자에게 상을 내리고 불교를 최초로 긍정적으로 인정하려 한 눌지 마립간이 대신 불교 삼형제의 일원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불교 같은 간사한 말(邪說)을 끌어들인 만악의 근원, 원흉 취급이므로 좋은 건 절대 아니다.[15]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중대보다 하대 왕들이 대체로 평가가 더 좋다. 물론 어느 역사적 국가든 간에 국교로 정한 종교든 학문이든 후세에 갈수록 타락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기에 이건 조선이 고려를 까기 위해서란 목적이 크다. 근데 모순점은 조선은 말로만 불교를 탄압했지 속으로는 아직도 불교를 믿는 국가이기도 하면서 태조 이성계도 말년에는 불교에 종사했다는 거다. 그 외에도 세종, 세조 등도 모두 말년에는 불자가 되었다. 왜 이런지는 숭유억불을 참고하자.[16] 드라마 픽션 인물로 자신의 여동생(연호개의 엄마)이 오빠가 아파 죽겠는데 계속 자기 아들을 왕으로 앉혀달라고 조른다. 그것도 침상에 누운 상태에서 귀에다 속삭이면서(!)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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