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통일 전2.2. 통일 과정2.3. 통일 후2.4. 분열과 멸망
1. 개요
중국의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 전국시대의 7웅 중 하나이다. 현대 중국어 발음은 Qin(친).[6]
동주의 낙읍 천도 이후 중원이 여러 개의 제후국으로 갈라져있던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나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으로 유명하다. 춘추 전국 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시대에 공존했던 다른 춘추오패인 진나라나 훗날 중국을 재통일하는 진나라(晉)와는 다른 나라다.
중국 서부에 있던 나라로, 척박한 땅과 야만적인 국가란 이유로 무시당했지만[7] 꾸준히 무력으로 주변국을 강하게 압박하였으며, 진 시황에 이르러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만리장성을 쌓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지만 2세 황제에 이르러 전국은 반란으로 분할되고, 진왕 자영대에 이르러 제후국으로 내려앉아 멸망하고 말았다.
국색은 검은색이었다. 황제의 의복, 관리들의 관복, 군복, 군기의 색을 검은색으로 통일했고 심지어는 백성들도 검수(黔首)라고 불렀다고 한다.[8]
국호 '진'이 서양권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이름인 시나(Sina)[9] → 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10]
2. 상세
2.1. 통일 전
사기에 의하면 진은 상나라 주왕의 시중을 든 간신 오래의 후예라 한다. 오래의 아버지는 비렴인데 비렴에게는 오래 말고도 계승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계승의 후손 중에 조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보는 말을 잘 몰아 서주 목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목왕은 기, 온, 화류, 녹이라는 명마를 얻어 서쪽으로 순수를 떠났는데 너무나 즐거워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서언왕이 난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의 수레를 끌고 하루에 천 리를 달려 주로 돌아와 난을 평정하니 목왕은 조성을 조보에게 주고 조보는 이때부터 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오래의 자손들도 조성에 살며 조씨로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900년 즈음에 서주의 효왕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효왕이 "옛날 백예가 순 임금을 위해 가축을 잘 번식시켜 봉토와 영씨 성을 받았는데 그 후손이 다시 가축을 잘 관리하니 땅을 주고 부용국으로 삼는다."라고 하여 영(嬴)이라는 성, 조(趙)라는 씨를 받아 영씨의 제사를 잇고, 대부가 되어 진(秦)읍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진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후국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로 여겨졌다. 대대로 진나라 제후들은 주로 서융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참고로 훗날 대립하게 되는 삼진의 조 왕실도 영성 조씨로 시조가 조보다. 조보의 장남의 후손이 진나라, 조보의 차남의 후손이 조나라다.[11]
법가 사상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기 전부터도 진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법가 사상가들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12] 순자는 진나라를 방문하고 방문기를 남겼는데, 그 묘사를 보면 개미굴의 느낌을 준다. 순자가 감탄한 점은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률 아래서 각 백성들이 불평없이 각자 맡은 일을 척척 한다는 것인데, 순자는 어디까지나 유자였기 때문에 순자가 든 유일한 진나라의 단점은 유학자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적으로 봐도 진나라의 반은 서융의 이민족이었으며[13] 이렇게 이민족과의 부단한 투쟁 및 사방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나라에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간쑤성 리 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은 주의 평왕을 호위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르고, 융족이 정복해있는 땅을 영지로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견융족을 대거 공격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통일 이전에는 제후국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변방국으로 춘추시대에는 수도가 옹[14]이었으나 전국시대에는 함양[15]이 수도가 되었다. 본디 서융의 변방국이자 소국이었으나 견융의 침략으로 주 왕실이 쇠해졌을 때 진(晉)과 함께 가장 먼저 왕을 도운 공로로 백작위를 제수받고 옹주를 제패함으로써 실질적인 천승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를 서융지패라고 하는데, 옹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진나라 국군(國君)이 몇 명이나 전쟁터에서 사망한다. 결코 그저 거저먹은 게 아닌 것.[16]
목공 시절에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중원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그중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갔고, 서쪽에 치우친 위치 때문에 중원의 제후국들에게는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서융에서 신하로 일하던 유여를 포섭하여 그가 건의한 방법으로 서융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켜 서방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목공은 진(晉)나라의 내전에 두 차례나 개입, 결국 진 문공(晉文公)을 진나라 왕으로 세워 친선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진(晉) 문공은 진(秦) 목공의 연상의 사위다.
그러나 중원 진출을 노리는 진(秦)나라는 중원으로의 길목에 위치한 진(晉)과는 자웅을 가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미 진 문공의 사후, 진(晉)과 진(秦)은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이 대립 관계는 진(晉)이 멸망하고 삼진(三晉)으로 불리는 조, 위, 한이 일어선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진(晉)의 국력이 유지되는 동안 진(秦)나라는 중원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17] 진 목공 시절 얻었던 하서 지방을 다시 빼앗김으로 인해 하동과 하서지방의 영유권, 즉 황하 유역을 진(晉)나라가 꽉 쥐고 있었고 따라서 영토는 위수 지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진 문공 사후 벌어진 효산 전투에서는 전군이 몰살당하는 등 진(秦)나라 입장에서는 대참사를 겪었으며 3년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또 졌고 이후 마지막으로 벌어진 복수전도 배수진을 친 진(秦)의 예기를 피해 진(晉)이 한 발 물러난 듯한 기록의 전투라 사실상 정신승리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 목공도 미개한 관습이었던 순장을 없애지는 못해 진 목공 사후 대규모의 순장으로 인해 인적 인프라를 상당수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훗날 관중이라고 불리는[18] 위수 인근의 비옥한 황토 지대는 어디 가는게 아니었고 외부의 침략도 외부로의 침공도 없이 수백 년 간[19] 진(秦)은 착실히 국력을 쌓아나간다.
이렇게 풍부한 진의 잠재력에 불을 붙인 촉매는 공손앙(혹은 위앙 또는 상앙)의 개혁. 공손앙은 위(衛)나라 사람으로 법가의 선두주자였다. 공손앙이 법치를 이념으로 진나라를 뜯어고쳐 최강대국으로 만들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후에 범수가 원교 근공을 기치로 패도를 쌓아나갔던 것이다.
진이 황하 유역에 진출하는 데 가장 처음 방해가 되던 나라는 위나라였다. 최전선인 하서 지방을 오기가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오기가 없는 위나라는 그때 그 시절의 위나라가 아니었고, 변법 이후의 진나라도 그때 그 시절의 진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위나라는 위문후, 위무후 시절의 팽창 정책이 한계점을 맞이한데다, 중국 한가운데 위치한 영토의 특성상 사방 팔방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 혼란함을 놓칠 진나라가 아니었다. 기원전 342년 마릉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위나라의 동방 정책은 종언을 고했고, 기원전 341년 진나라는 상앙이 위나라 공자를 포로로 잡는 계략을 성공시켜 하서 지방에 상당한 영토를 얻어낸다.
결국 기원전 330년 숙원이었던 하서의 영유권을 공고히 하게 된다. 이후로도 위나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옛 수도인 안읍을 포함한 하동 지방까지 정복하고, 얻어낸 황하 유역과 진령산맥 사이에 설치하게 된 것이 바로 함곡관이다.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기원전 316년의 파촉 정벌이 중국 통일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진(晉)이 분열된 이후 국토와 인구 등을 따져 전국 칠웅 중 양대 강국은 진과 초였는데, 두 강국 중 '천부(天府)의 땅'이라 불릴 정도로 생산력이 높았던 파촉 땅을 먼저 먹는 국가가 중국을 통일할 운명이었다는 것. 초나라가 지도층 간의 내분에 휩싸여 있는 동안 진의 명장 사마착이 파촉을 점령해 초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된다. 파촉 땅의 생산력에 더해 장강의 상류를 점령함으로써 군사적으로도 초나라에 대해 우위를 쥐게 된 것.
이러한 시점에서 이미 진은 전국시대의 최대 강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고, 전국시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진나라의 위력 앞에 감히 대적할 나라가 없어졌다. 남방의 강국 초나라도 단독으로는 진나라에게 대적할 수 없음이 단양 및 남전 전투의 대패로 증명되었고, 다른 국가들은 연합해서 진에게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기원전 296년에 있었던 합종군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했던 이궐전투에서 한-위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면서 사실상 합종이 아니면 진나라를 막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이미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범수를 등용한 소양왕 때는 원교근공책을 채택해 힘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황하 유역의 한나라 영토를 지속적으로 잠식시켜 황하 이남과 이북의 영토를 분단시켜 장평대전을 유발한다. 결국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조(趙)나라의 대장 조괄을 깨부수고 조군 40만을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효문왕과 장양왕 시절에는 조금 주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진왕 정이 등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승상 이사를 발굴하고 한비자의 의견을 중용하는 등의 혁신을 통해 진은 다시금 전국시대의 최강자가 되었다.
진왕 정은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주변국을 차례차례 무너트렸고,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진왕 정은 왕의 지위보다 높은 황제에 올랐으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므로 진시황, 즉 시황제가 되었다.
2.2. 통일 과정
진(통일왕조)/통일 과정 참조.
2.3. 통일 후
진 시황은 외부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각 지방별로 다르던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다.
전국 시대부터 이어진 거대한 궁궐인 함양궁보다도 더 거대한 아방궁을 지었다는 소리도 있다. 다만, 아방궁은 실존 자체는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2.4. 분열과 멸망
시황제가 죽고난 이후 진나라는 2세 황제 호해, 진왕 자영을 끝으로 통일왕조로서 15년 만에 단명한다.[20] 중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임과 동시에 가장 단명한 통일 왕조기도 하다.[21] 진왕(자영)은 황제(칭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진 황제는 2대에 끝나고, 진은 제후국으로 내려앉았다.[22]
시황제가 흉노를 막고자 만리장성의 축조에 들어갔고, 자기 무덤을 짓고, 도로를 만드는 등 거대하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을 잃고 말았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악행을 벌이면서 결국 진승·오광의 난을 필두로 한 대대적인 민란에 휩싸이고 다시 사분오열되었다. 진은 초기에 압도적인 힘으로 반란을 진압했으나, 거록대전에서 초의 항우에게 크게 패배한 후 초나라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규모가 점차 축소되어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관중에 입성한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이듬해에 수도를 불태워 진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이 가장 큰 영웅으로 떠오르면서 결국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이 바로 초한지.
농담으로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나라 이름을 '진'나라라고 지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있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서 유선이 한 대사.
진나라 때의 한 해의 첫 달은 단월(진시황의 정(政)과 겹쳐서 정(正)월이 단월이 되었다)이 아니라 10월이었는데, 진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자영이 항복한 달이 기원전 206년 10월이었다.만약 시황제가 한 해의 첫해를 10월로 바꾸지 않았으면 진나라의 멸망연도가 기원전 207년이 되고 해하전투가 기원전 203년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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