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당요의 당 지역
2. 당나귀의 분포지
3. 홍당무, 당근의 산지
4. 사자가 있던 당나라
5. 아랍과 당나라
6. 낙양과 장안의 위치
7. 황소의 난의 희생자
결론
서론
그동안 고구려, 신라, 백제를 연구하면서 '수(隋)', '당(唐)'에 대해 그 위치를 고심하여 왔다. 필자는 신라는 페르시아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고, 백제는 비잔틴제국을 포함한 로마로 보고 있다. 고구려는 흑해 북쪽의 훈족세력, 스키타이 세력, 튀르크의 돌궐세력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와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경쟁하고 싸운 또한 어느 때는 동일체의 모습을 보이는 '당(唐)'나라의 위치에 대해 지속적인 의문을 품어 왔다. '당(唐)'의 위치가 알게 되면 '수(隋)'나라는 '당(唐)'과 동일한 위치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사학자들이 '후당(後唐)'이 있다고 판단하는 우즈테키스탄 주위의 중앙아시아가 혹시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으나, 당나라가 이 위치에 있기에는, 백제와 신라, 당나라가 해전을 하기에는 너무 멀고 이집트의 운하를 통과해야 하는 숙제가 있으며, 고구려와 싸우는 과정에도 '수(隋)'나 '당(唐)'의 수군의 필요성이 의문시되고 있었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를 여는 무아위아가 문무왕이라는 판단을 하는 가운데, 아랍의 Rashidun Caliphate가 점하고 있던 이집트, 지중해 동안의 앗시리아 지역이 그 가능성을 보였는데, 그러나 이 지역이 '당(唐)'의 지역이라는 구체적 증거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최근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들을 알게 되어 마침내 펜을 들게 되었다.
본론
1. 당요(唐堯)의 당(唐) 지역
고대사에 언급되는 '요(堯)'임금은 '당요(唐堯)'라 불리운다. 즉 '당(唐)'위치의 '요(堯)'임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당시의 위치를 알아 보면 '당(唐)'지역 즉 '당(唐)'나라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사에서 '요(堯)'임금의 뒤를 이은 '순(舜)'임금이 있었으며, '순(舜)'임금 시절 ‘우(禹)’에 의한 치수사업이 성공하였다고 한다. 후일 ‘우(禹)’는 '하(夏)'나라를 건국했다.
'하(夏)'나라를 이은 '상(商)'나라는 Dacia 지역 및 그리스지역 (미케네문명지역), 이집트지역,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점한 것으로 판단된다. (본 블로그 글, '상(商)나라의 동방행은 어디까지인가?' 참조)
즉 '대하(大夏)(=Daxia)'에 '안읍(安邑)'이라는 수도, 또 '상구(商丘 또는 商邱)'라는 수도를 둔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의 수도 '상구(商邱)', '안왕(安王)'이 수도를 둔 '은(殷)' 등을 감안할 때 두 나라가 일부 겹쳐지는 지역 (Dacia지역, 이집트지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고대사에서 '안(安)'지역은 '흑해'(=Black Sea)지역이다' 참조)
따라서 '당요(唐堯)'의 당(唐)'지역은 Dacia지역, 메소포타미아지역, 이집트지역 등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추정이다. 나라마다 이동할 수 있고 다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추정은 놀랍게도 아래에서 분석되는 당나귀, 당근, 사자의 분포도에서 그 과학적 근거를 보여 준다.
2. 당(唐)나귀의 분포지
당나귀와 홍당무, 당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히 한 블로그의 글에서 보았는데, 홍당무의 당(唐), 당나귀의 당(唐)이 모두 당(唐)나라 당(唐)자이며 실제 당(唐)나라와 연관이 있다는 글에서 비롯되었다. 본 블로그에 공유한 '당나귀, 그리고 당근과 채찍이야기' (작성자 '푸드피아', 카테고리 당나라 참조)에 의한 자료를 잠시 인용한다.
"당나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처음 당나라로 부터 들어왔다고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당시는 당나라, 수나라, 한나라 등 중국의 나라들을 당라, 수라, 한라 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라의 말도 아니고 무슨 귀신 같이 생겼다 하여 당라귀라 불리운 것이 두운법칙에 의해 당나귀가 된 것이다....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 당나라 사신이 '오낙'이라고 말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귀가 큰 게 꼭 귀신같다하였고 급벌찬 현부(現府)가
'당나라에는 저런 귀신이 있단 말이오'라 하여 그때부터 당나귀라 불리었다.』 라고 쓰여있다.
게다가 학자들은 그 당시 당나라 사신이 가져온 말이 아프리카 계통의 소말리 당나귀라 추정한다.
그래서 더욱 더 귀신처럼 보였는 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료에는 당나귀의 '귀' 가 '귀신 귀' 가 아닌 눈 코 입 귀, 신체부위의 귀라고도 한다.
그 이후로 당나귀는 신라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신라 경문왕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이때 생겨난 것이다."
(출처자료 : '당나귀', 그리고 '당근과 채찍' 이야기 구근류 / 푸른 채소를 먹자 2014. 5. 30. 10:07
https://blog.naver.com/lhy2842/220015085806)
그리하여 당나귀에 대한 자료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게 되었다. 아래 두산백과 자료에 의하면 당나귀는 아프리카 동북부, 아시아 시리아, 아라비아, 이란, 등이 거론된다. 위키피디아 자료에서도 donkey는 이집트, 소말리아 등의 누비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등이 거론된다. 시리아 지역의 다마스커스는 당나귀의 사육으로 유명하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시리아의 포도주신 디오니수스와 연관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래 자료 참조) 즉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시리아 지역 등으로, 당나귀와 연관이 있는 지역이 아랍역사에서 언급되는 무아위와와 알리가 지배하던 지역과 매우 일치하며, 필자가 추정하는 당나라의 위치와 매우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당요, 하나라, 상나라가 있을 것으로 필자가 추정하는 지역과도 매우 일치하는 것이다. 즉 당나라는 현 중공땅이 아니라 이집트를 포함한 서아시아지역이었음을 강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당나귀의 기원은 가축화된 것과 야생의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야생의 것에는 아프리카 야생당나귀와 아시아 야생당나귀가 있다. 아프리카 야생당나귀는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남부지방에 걸쳐 살고 있다. 몸의 크기는 큰 개 정도이며 좀더 큰 것도 있다. 힘은 세지만 성질은 소심하다. 아시아 야생당나귀는 시리아 ·아라비아·이란·티베트·몽골 등지에 살고 있다. 몸의 크기는 대체로 말과 당나귀의 중간 정도이다. 다윈은 아프리카 야생의 누비아당나귀(E.a.africanus)를 오늘날 당나귀의 선조로 취급하였는데, 켈러는 아시아 야생당나귀를 당나귀의 원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현재는 아프리카 야생당나귀가 가축화된 것이라는 게 정설화되어 있다. 가축화는 유목 유랑민족인 셈족이나, 또는 이들과 관계가 깊은 종족에 의하여 BC 4000년경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 아시아에서 물자 운반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인도·페르시아·아라비아 지방에서도 이것을 가축화했고, 아시아 야생당나귀는 소아시아를 경유하여 그리스·이집트로 옮겨 지중해 연안까지 분포되었다고 한다.
최초에는 운반용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승용·유용(乳用), 일부는 육용(肉用)으로도 이용하게 되었다. 또 오나거(onager) 계통의 것과 소말리당나귀(F.a.somalicus)를 교배시킴으로써 속력이 빨라져서 사람들이 승용에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나귀가 중부 유럽에 수입된 것은 그로부터 상당히 오랜 후의 일이며, 주로 로마사람에 의하여 널리 분포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 와서 당나귀 개량에 가장 힘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나귀 [Ass, Donkey] (두산백과)
"당나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2의 48 경문대왕조(景文大王條)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왕의 귀가 갑자기 자라서 당나귀의 귀와 같아졌는데, 이 사실을 오직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이 알고 있다가 죽기에 이르러 도림사(道林寺) 대나무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그 뒤 바람이 불면 이 소리가 대밭에서 들렸다고 한다. 이 기록은 삼국시대에 이미 당나귀가 사육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나귀는 말보다 덜 빠르고 덜 위험한 동물로 인식되어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유생들은 당나귀를 타기 좋아하며, 조관들도 이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당나귀는 행세하는 사람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도련님은 당나귀가 제격이다.’라는 속담이나 ‘나귀를 구하매 샌님이 없고 샌님을 구하매 나귀가 없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또한, 자기에게 만만히 보이는 사람에게 함부로 할 때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당나귀의 근성에 빗대어 ‘나귀는 샌님만 업신여긴다.’라든가, ‘당나귀 못된 것은 생원님만 업신여긴다.’는 속담을 쓴다. 당나귀는 해학담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자료 : 당나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Asses were first domesticated around 3000 BC, probably in Egypt or Mesopotamia,[6][7] and have spread around the world....
The ancestors of the modern donkey are the Nubian and Somalian subspecies of African wild ass.[31][32] Remains of domestic donkeys dating to the fourth millennium BC have been found in Ma'adi in Lower Egypt, and it is believed that the domestication of the donkey was accomplished long after the domestication of cattle, sheep and goats in the seventh and eighth millennia BC. Donkeys were probably first domesticated by pastoral people in Nubia, and they supplanted the ox as the chief pack animal of that culture. The domestication of donkeys served to increase the mobility of pastoral cultures, having the advantage over ruminants of not needing time to chew their cud, and were vital in the development of long-distance trade across Egypt. In the Dynasty IV era of Egypt, between 2675 and 2565 BC, wealthy members of society were known to own over 1,000 donkeys, employed in agriculture, as dairy and meat animals and as pack animals.[33] In 2003, the tomb of either King Narmer or King Hor-Aha (two of the first Egyptian pharaohs) was excavated and the skeletons of ten donkeys were found buried in a manner usually used with high ranking humans. These burials show the importance of donkeys to the early Egyptian state and its ruler.[34]........
By the end of the fourth millennium BC, the donkey had spread to Southwest Asia, and the main breeding center had shifted to Mesopotamia by 1800 BC. The breeding of large, white riding asses made Damascus famous, while Syrian breeders developed at least three other breeds, including one preferred by women for its easy gait. The Muscat or Yemen ass was developed in Arabia. By the second millennium BC, the donkey was brought to Europe, possibly at the same time as viticulture was introduced, as the donkey is associated with the Syrian god of wine, Dionysus. Greeks spread both of these to many of their colonies, including those in what are now Italy, France and Spain; Romans dispersed them throughout their empire.[33]"
(source : donkey, Wikipedia)
상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의 당나귀 자료에서 보듯이 당나귀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친숙하게 회자되고 있다. 소아시아 프리기아지방에서 태어난 그리스의 이솝은 이솝우화에서 당나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당나귀는 서아시아, 그리스 등에서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KBS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가 많지만, 한반도나 중공땅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아직도 우리 동요에서는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고추 먹고 맴맴, 담배먹고 맴맴..'으로 나귀를 언급하고 있다.
3. 홍당(紅唐)무, 당근(唐根)의 본포지
당근인 홍당무에서도 당나라 당자가 있다. 당근도 한자말일 것으로 짐작하면 당근(唐根)의 한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홍당무인 carrot에 대해 위키피디아 자료를 아래에서 살펴 보자. 여기 홍당무도 페르시아 지역이 원산지로 기술된다. 8세기에 무어인에 의해 스페인에 소개되고 10세기에 서아시아, 인도, 유럽에 소개되었다. 현 중공땅에는 14세기에 나타났다고 한다. 8세기에 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으로 이동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8세기 무어인에 의해 스페인으로 홍당무가 전달되었다는 것과 일치한다. 필자는 우마이야왕조가 신라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면에서는 신라와 당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중공땅에서는 14세기에 홍당무가 전해졌다고 하는 사실은 당나라가 현 중공땅이 아니라 서아시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Both written history and molecular genetic studies indicate that the domestic carrot has a single origin in Central Asia.[2][3] Its wild ancestors probably originated in Persia (regions of which are now Iran and Afghanistan), which remains the centre of diversity for the wild carrot Daucus carota.....
The plant is depicted and described in the Eastern Roman Juliana Anicia Codex, a 6th-century AD Constantinopolitan copy of the Greek physician Dioscorides' 1st-century pharmacopoeia of herbs and medicines, De Materia Medica. Three different types of carrots are depicted, and the text states that "the root can be cooked and eaten".[15]...
The plant was introduced into Spain by the Moors in the 8th century.[16] In the 10th century, roots from West Asia, India and Europe were purple.[17] The modern carrot originated in Afghanistan at about this time.[11] The 11th-century Jewish scholar Simeon Seth describes both red and yellow carrots,[18] as does the 12th-century Arab-Andalusian agriculturist, Ibn al-'Awwam.[19] Cultivated carrots appeared in China in the 14th century, and in Japan in the 18th century.[11]"
(source : Carrot, Wikipedia)
4. 사자가 있던 당나라
사자는 당나라때부터 사자상으로 모셔지며, 당대 궁정에서 사자춤이 있었다고 한다. (본 블로그 공유 자료, 카테고리 당나라, '당사자는 당나라 사자입니까?' by 하심)
그런데 사자의 역사적 분포를 아래 지도에서 보면 아프리카, 아리비아, 서아시아, 발칸반도, 페르시아지역, 인도지역으로 나타난다. 필자가 추정하는 당나라 지역 즉 이집트, 아라비아, 지중해 동해안의 시리아지역, 메소포타미아지역, 이란, 아프카니스탄지역, 힌두스탄지역 등이 포함된다. 어디에도 현 중공땅 지역은 포함되지 않는다. 즉 당나라가 현 중공땅이 아니라 서아시아지역에 있었다는 추론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도 북청사자놀이 등 사자춤을 우리는 곧잘 선보이는데, 이러한 전통은 고대 서아시아지역에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Lion distribution (source : Lion, Wikipedia)
5. 아랍과 당나라
필자는 본 블로그의 글, '백제의 방어 요지 '탄현'은 터어키 아나톨리아 동남부 Cilicia 지역의 Gaziantep이다.'에서 우마이야왕조의 초대 왕이 되는 문무왕의 태자시절로 판단되는 무아이와의 지배지역이 이집트, 지중해 동안의 Levant지역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았다. (아래 지도 참조) 즉 아랍역사에서 주장하는 지역이 그동안 위에서 살펴 본 당나라의 지역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당나라는 신라의 일부 진골세력 (김씨세력)이 세운 나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역사에서 아랍과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지 모른다.
Map of Muawiyah control area (pink area) in 658
Map of the First Fitna. The areas shaded in green and pink respectively represent the territories under Caliph Ali's and Muawiyah's control in 658. (source : Wikipedia)
6.낙양과 장안의 위치
낙동강은 낙양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낙동강이라 했다 한다. 그런데 이 낙동강이 그 흐름의 지형을 고려하면 유프라테스강으로 판단된다고 필자는 주장했다. (본 블로그 글, '김수로의 금관가야는 코카서스 산맥 아래 아르메니아지역에 있었다.' 참조) 즉 낙양(뤄양)은 다마스커스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소리글 '낙양성 십리하에...' 등에서 보듯이 낙양은 우리에게 친숙한 지명이다. 우리 조상들의 활동지역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신라, 백제의 위치를 고려하면 낙양은 우리 역사에 친숙한 지역이 된다.
장안(長安)은 바그다드 근처인 Ctesiphon 또는 이란의 Persepolis로 추정된다. 상(商)나라 (박, 바그다드), 진(秦)나라(Persepolis), 한(漢)나라(Persepolis), 당(唐)나라(Ctesiphon)의 수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당나라의 위치가 현 중공땅이 아닌 서아시아지역이라는 위의 분석과 일치하는 주장인 것이다.
7. 황소의 난의 희생자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이 있었다. 낙양과 장안을 유린 했던 황소의 난이었다. 그런데 위키피디아자료를 보면 황소의 난 때 12만에서 20만명에 이르는 아랍 무슬림, 페르시안 조로아스타교인, 유대인, 기독교 상인들이 광주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즉 이 광주 지역이 서아시아지역이 아니면 이러한 규모의 살상이 있을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즉 당나라가 현 중공땅이 아닌 서아시아 지역에 있었다는 상기의 분석과 일치하는 내용인 것이다.
"In 879 during the Guangzhou massacre, 120,000 to 200,000 Arab Muslim, Persian Zoroastrian, Jewish, and Christian foreign merchants in Guangzhou were massacred by Chinese rebels under Huang Chao." (source : battle of Talas, Wikipedia)
결론
이상의 분석을 고려하면, 당나라는 현 중공땅이 아닌 서아시아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을 가진다고 판단된다. 이는 그동안의 신라, 백제, 고구려의 위치에 대한 필자의 추정이 올바른 방향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제는 당나라의 위치에 대해, 그리고 신라와의 구분과 일체성에 대해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앞으로 분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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