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의 모돈(묵특)선우는 고구려의 유리왕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600년이다, 아니다 900년이다. 두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흉노의 초대 왕인 두만선우의 이름이 Tumen이다.
“ 두만 선우(중국어 간체자: 头曼单于, 정체자: 頭曼單于, 터키어: Tumen, Teoman, ? ~ 기원전 209년, 재위: 기원전 220년 경 ~ 기원전 209년)는 흉노의 선우로서 역사에 첫 등장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투멘(만인장)과 관련이 있다. (자료 : 위키백과)
본 블로그에도 펌한 자료 ‘몽고인이 본 고구려 칸의 계보’에서 고구려 태조 추모 (주몽) 왕의 이름이 Tumen Mergen Bogd Khan(재위 : BC 199 - BC 168)이라 한다.
즉 흉노의 두만선우와 고구려 추모(주몽)왕의 이름이 Tumen으로 같은 것이다.
“두만(Tumen)은 투르크어로 만인의 우두머리를 뜻하며, 또다른 호칭으로 탱리고도(?犁孤塗) 선우로도 불리는데 몽골식으로는 텡그리 쿠투라도 부르며, 이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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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만선우 (재위 BC 220 경 - BC 209) 와 추모왕 (대한민국 자료: BC 58 생, 재위 BC 37 - BC 19)의 연대는 한 200년 차이가 난다. 몽고에서 본 고구려칸 계보에서는 추모왕의 재위기간을 BC 199 - BC 168기간으로 본다. 두만선우와 약 20년차이를 보인다. 북한에서는 추모왕의 연대를 BC 298 생, 재위 BC 277 - BC 259로 본다 한다. (자료: 나무위키) 북한에서는 추모왕의 연대가 두만선우보다 오히려 50년가량 앞선다. 그러나 남북한 모두 추모왕이18 년 재위하고 40살쯤의 나이에 서거하는 것은 동일하게 본다.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는 것은 흉노의 두만선우가 고구려의 추모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흉노의 두만선우에 이어 모돈(묵특, 묵돌) 선우가 왕위를 이어 가는데, 그 왕위의 계승이 유리왕의 계승과 다소 닮은 점이 있다.
먼저 모돈(묵특, 묵돌)선우의 경우를 보자.
“두만선우의 맏아들은 묵돌이었는데, 이때 두만에게는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따로 있었다. 두만은 묵돌 대신에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 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의 대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묵돌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반란을 도모하였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이라는 뜻의 명적(鳴鏑)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고 기원전 209년 결국 사냥터에서 두만선우는 묵돌의 공격을 받아 활에 맞아 암살당했다. “ (자료 : 위키백과)
두만 선우에 이어 등장하는 묵특(모돈)선우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으로 나온다. 묵특선우 시절, 흉노에게 크게 당하던 한나라의 사마천이 쓴 사기의 흉노열전 내용이라면 과장되게 나쁘게 서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Eurasia Steppe Belt Huns (free source : Wikipedia)
그러면 고구려의 유리왕의 왕위 계승을 보자.
“유리왕 : 고구려 제2대(재위:BCE.19~18) 왕.)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 또는 누리(累利)라 했고,『위서(魏書)』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 동명왕(東明王)주몽(朱蒙)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아버지 고주몽을 찾아 서기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동부여(東夫餘)에서 고구려로 와서 곧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자료: 김용선 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부여에서 돌아 온 후 태자로 책봉된후 5개월후 추모왕이 40세 나이로 사망한다.
즉 유리왕의 왕위계승과정이 일상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찬탈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추모왕이 유리왕을 태자로 삼은 해에 40세 나이로 갑자기 죽은 것이나, 이후 추모왕의 둘째부인인 소서노와 그의 아들 온조와 비류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는 일화를 고려하면 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아래 김용선 글에서도 나타나며 찬탈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관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활동 등 여러 면에서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고 주몽과 대응관계에 있는 인물로 여겨 유리왕과 주몽을 부자관계가 아닌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이런 근거로『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의하면 동명왕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慕本王)까지는 해씨(解氏), 그리고 제6대 태조왕(太祖王) 이후는 다시 고씨로 되어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또한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보기도 한다.” (자료: 김용선 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리왕이 부여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주몽의 탈출 신화와 흡사한 면이 많고, 유리왕이후 모본왕까지의 왕성이 해(解)씨로 나타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유리명왕의 왕위 계승을 찬탈이나 개국의 형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용선, 〈고구려 유리왕 고〉, 《역사학보》” (자료 : 위키백과)
초점은 찬탈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유사한 양상으로 보아서 흉노의 묵특선우가 고구려의 유리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리왕으로 보이는 흉노의 묵특선우는 매우 찬란한 정복사업을 펼치고 성공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우선 위키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묵돌이라는 이름은 투르크어인 "바야투르(Bayatur, 용감한 자)"의 한자 음차로 알려져 있다.아버지인 두만선우(頭曼單于)와 갈등을 빚다가 그를 제거하고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이후 초한전쟁 시기에 동호(東胡) ·월지(月氏) ·정령(丁零) 등을 비롯한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였고,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漢)의 고제(高帝)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서역의 누란(樓蘭) 등 26개의 나라를 평정하여 흉노의 세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지료: 위키백과)
김은한은 “묵특선우의 흉노 전성기”에서 보다 상세히 언급한다.
“ 묵특 선우, 아틸라, 징기스칸, 티무르 이들 4명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흉노의 영웅들이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거대한 초원제국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었다.
….……………..
그 때 동쪽에서는 강성한 동호(東胡)가 있었다(BC 209~BC174).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동호는 곧 사자를 보내 두만이 생전에 타던 천리마를 달라고 하였다. 묵특이 신하들에게 물으니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주지 마십시오”하였다.
묵특은 “어찌 남과 나라를 이웃하여 있으면서 말 한 필을 아끼겠는가?” 동호에게 천리마를 주었다. 얼마 뒤에 동호는 묵특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서 알지(선우의 부인) 중 한 사람을 얻고자 한다는 말을 전했다.
신하들이 “동호가 무도하여 알지를 요구합니다. 청컨대 그를 공격하십시오” 하였다. 묵특은 “어찌 남과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한 사람의 여자를 아끼겠는가.” 드디어 사랑하는 알지를 동호에게 주었다.
동호의 왕은 더욱 교만해져서 동호와 흉노 사이에 천여 리에 걸쳐있는 버려진 땅을 요구하였다. 묵특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사람은 “이것은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으며 또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묵특은 매우 성내어 말하기를 “땅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찌 그것을 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하였다. 동호는 묵특을 경시하여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동호왕은 전사하고 흉노는 그 백성과 가축을 걷어드렸다.
다시 서쪽으로 월지를 쳐서 달아나게 하고 남쪽으로 누번과 하남(河南)의 백양왕(白羊王)울 병합하였다.
북쪽으로 흔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치고 남쪽으로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되찾은 후 연나라와 대(代)나라로 쳐들어갔다.
당시 중국은 항우와 유방이 쟁패 중이어서 흉노가 연,대를 침공한 것을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한고조(漢高祖) 유방이 비로소 중국을 통일하고 한왕(韓王) 한신을 대(代)에 옮겨 마읍(馬邑)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한신은 유방을 도운 대장군 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흉노가 마읍을 포위하니 한신이 항복하고, 흉노는 남쪽으로 태원(太原), 진양(晉陽)에 이르렀다. 한고조가 친히 출병하게 되었는데 때가 마침 겨울이라 몹시 추워 한나라 병사 중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진 자들이 많았다.
묵특이 약졸들만 내보내어 유인하니 한나라는 32만의 병력으로 흉노를 추격하였다. 한고조와 한나라 기병들이 먼저 평성(平城)에 도착했지만 대부분의 보병들은 뒤로 처지게 되었다.
묵특은 40만의 기병으로 백등산(白登山)에 고립된 유방을 7일 동안 포위하였으니 한나라 군사들은 군량이 다하여 흉노의 대군을 상대할 상태가 못되었다. 한고조는 사자를 시켜서 몰래 후한 선물을 알지(閼氏: 왕후)에게 보내었다.
사자는 은밀하게 선우가 한나라를 쳐부수면 한나라에 있는 수 많은 미인들이 선우를 모시게 되니 그리 되면 알지의 처지가 딱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알지는 묵특에게 “두 나라의 임금은 서로 곤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곳은 선우가 끝내 살만 한 곳은 아닙니다. 또 한왕에게도 신(神)이 있는 것이니 선우는 살피십시오”라고 진언하자 묵특은 알지의 말을 쫓아 포위의 일각을 풀어주었다.
양쪽 군사들이 철수한 다음에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흉노에게 호된 곤욕을 치른 한고조는 흉노와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으니, 한고조를 이어 혜제, 소제, 문제, 경제는 유언을 충실하게 지켜 흉노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고, 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바쳐 흉노와의 갈등을 피하곤 하였다.
당시 흉노와 한나라가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
1)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2) 한나라는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곡물을 바친다.
3) 한나라와 흉노가 형제 맹약을 맺는다.
4) 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한다.
이 합의는 BC198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이 흉노에 보내는 조공 액수는 매번 늘어났는데 BC192년부터 BC135년까지 60여년 동안 9번에 걸쳐 흉노에 보내는 조공 액수가 증가했으니 실상 전한(前漢)은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
(출처: 보스톤 코리아, 칼럼리스트, 김은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묵특선우의 흉노 전성기”중에서)
즉 묵특선우 시절 유방의 한나라는 흉노의 속국과 같은 것이었다.
난 한나라가 페르시아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을 본 블로그에 올렸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알렉산더제국이었고, 진나라의 수도지역에 한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흉노인 고구려도 페르시아지역에 있는 한나라의 북쪽, 동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본 블로그에 올린 ‘갈석산의 위치 검토’에서 한나라는 동북쪽이 항상 근심거리라며 갈석 사이를 분주히 지나가며 전쟁준비를 했었다는 옛 시가 이를 말해 준다. 후에 묵특선우의 정복지역을 검토해가며 이를 방증하고자 한다.
흉노의 묵특선우와 동일시 되는 고구려의 유리왕시절의 기록을 보자.
“유리왕은 재위 기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고구려왕국의 초석을 다졌다.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3년에 부여(夫餘)가 침범했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
(자료 : 나무위키)
“유리명왕(瑠璃明王,기원전 38년~18년)은 고구려의 제2대 태왕(재위:기원전 19년 나이 20세 - 기원후 18년 나이 56세)으로 휘는 유리(榴璃 또는 類利) 또는 유류(孺留)이다. 동명성왕과 왕후 예씨의 맏아들이다. 기원후 3년에 졸본에서 수도를 위나암 국내성으로 옮겼고…재위 33년인 서기 14년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고, 2만 명의 군대와 오이와 마리장군을 보내 서쪽의 양맥(梁貊)을 치고, 또 현도군의 고구려현(高句麗縣 또는 高句驪縣)을 쳐서 복속시켰다.” (자료 : 위키백과)
유리왕 역시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넒혔다.
따라서 흉노의 묵특선우의 정복전쟁지역과 유리왕의 정복전쟁지역을 비교하면 우리가 그 지역을 보다 잘 알 수 있고 고구려의 위치를 보다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묵특선우와 유리왕의 이야기에서 차이는 탈출국이 월지와 부여라는 차이이다.
만약에 묵특선우와 유리왕이 동일인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리할 수 있다.
1. 월지와 부여는 같은 지역에 있던 나라일 수 있다.
월지국은 마한의 중심국가로서 타림분지에 거주지를 두고 있다가 묵돌선우에게 패하여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나온다. 즉 묵돌이 타림분지에 있는 월지에서 탈출했다는 것이다.
“기원 전 3세기 중반 경 타림분지에 거주지를 두고 동서무역을 독점하여 당시 힘이 약한 흉노를 압박하고 인도에도 진출할 정도로 강세를 유지했다.
이후 사기에 따르면,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176년) 말기에 월지는 흉노에 대패하여 중앙 아시아로 쫓겨나면서, 월지 지배하에 있던 서역의 나라들도 흉노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이때 일부가 남아서 서쪽으로 간 세력은 대월지(大月氏)라고 명칭을 변경했다고 하며, 남아 있던 부족들은 소월지(小月氏)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료 : 위키백과)
대월지의 이동 경로 (중국측 자료) (free source : Wikipedia)
Bulgars Subsequent Migration in Europe (free source : Wikipedia)
중국 사서에서는 부여 (부유)는 산동지역에 있다가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여기서 산동지역은 천산산맥 동쪽 타림분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양역사의 Bulgars내용을 보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Another theory linking the Bulgars to a Turkic people of Inner Asia has been put forward by Boris Simeonov, who identified them with the Pugu (僕骨; buk/buok kw?t; Buqut), a Tiele and/or Toquz Oguz tribe. The Pugu were mentioned in Chinese sources from 103 BC up to the 8th century AD, and later were situated among the eastern Tiele tribes, as one of the highest-ranking tribes after the Uyghurs.
According to the Chronicle by Michael the Syrian, which comprises several historical events of different age into one story, three mythical Scythian brothers set out on a journey from the mountain Imaon (Tian Shan) in Asia and reached the river Tanais (Don), the country of the Alans called Barsalia, which would be later inhabited by the Bulgars and the Pugurs (Puguraje)." (source : Wikipedia)
(부여란 명칭은 평야를 뜻하는 벌이란 이름에서 왔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고도 하는데, 상기의 Pugu는 Puhu에서 온 말로 여겨진다. )
유리왕이 동부여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 동부여가 산동지역인 타림분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묵특선우와 유리왕이 있었던 곳이 공히 타림분지 지역으로 나타난다.
즉 월지와 부여는 공히 천산산맥 동쪽 타림분지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했다고 나온다.
월지는 영어로 Yuezhi라 표현되는데 Wikipedia에는 중국자료만 있다. 즉 중앙아시아에 있었으면 서양자료가 있을만 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토하라인과 관계가 있다는 정도이다. 따라서 같은 인도 스키타이족인 월지와 부여가 같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동호는 선비일 수 있다.
“선비라는 이름은 동호가 흉노에게 멸망당한 뒤에 살아남은 동호의 일파 중 선비산으로 들어간 무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료: 나무위키, ‘선비족’)
즉 동호가 선비인 것이다. 따라서 묵특선우가 정복한 동호는 유리왕이 항복 받은 선비와 동일 한 것이다.
3. 서쪽의 월지는 양맥일 수 있다.
서쪽의 월지는 이미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월지가 더 서쪽으로 이동한 월지 또는 Tanais(Don) River로 이동한 Bulgars로 보인다. 이들이 고구려 수도 국내성 서쪽에 있는 양맥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양맥에 대해 알아 보자.
“양맥의 성격과 소재지를 알 수 있는 사료는 두 곳에서 확인된다.
첫째는 14년(유리왕 33) 8월 고구려 유리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명으로써 고구려 수도 서쪽에 소재한 양맥을 공격한 결과 양맥이 세운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팽창정책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고구려에 예속되어 공납(貢納)의 의무를 행하던 양맥의 이탈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246년(동천왕 20) 8월 고구려를 침공한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의 군대를 양맥의 골짜기에서 크게 격파하고 있다. 이 기록에 보이는 양맥의 골짜기는 고구려에 복속된 양맥국의 명칭과 통하는 것으로서 그 위치 추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이곳은 전략적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도학 글)
양맥이 전략적 요지라는 표현이 있다. Tanais River지역은 흑해로 통하는 역사적 전략적 지역이다. 난 본블로그에 올린 글 ‘백이 숙제의 고죽국은 볼가강가에 있었다’라는 글에서 고구려의 발상지인 고죽국이 볼가강가에 있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 고구려가 압록수 근처에 수도인 국내성을 가졌다면, 압록수로 판정되는 우랄강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가 우랄강 근처에 있었다면 서쪽의 Don River에 있는 양맥(Bulgars, 부여)을 친 셈이 된다.
Don River (하류가 Tanais River), 우랄강은 볼가강 우측에 있음
4. 진나라의 몽염장군에게 빼았겼던 남쪽의 흉노의 옛땅은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일 수 있다.
진나라는 흉노와 시르다리야강을 경계로 하였다. 따라서 시르다리야강 상류 근처의 땅을 몽염장군이 취했을 것이다. 진시황이라 판단되는 알렉산더왕 원정길이 이곳을 거쳐 갔다.(아래 지도 참조, 본 블로그 글 "진시황의 진나라는 알렉산더제국인가?" 참조) 그런데 이곳을 모돈선우가 회복했다. 흉노의 남쪽 땅이다. 또한 천산산맥아래 시르다리야강 상류인 이곳은 한나라의 한무제가 멸망시킨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4군중 하나인 현도군 고구려현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유리왕이 회복한 현도군의 고구려현이 이 지역일 수 있다.
알렉산더 정복 루트 (free source : Wikipedia)
한나라로 추정되는 Parthian Empire
5. 묵특선우는 북쪽으로 흔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쳤다고 했다.
흔유, 굴사, 신려 등은 자료가 없어 다음으로 미루고, 정령, 격곤, 오손에 대해서만 살펴 보고자 한다.
정령은 철륵, Tiele 지역이라 한다. 철륵 (鐵勒) (Tiele)은 고대 중앙아시아에 존재하던 돌궐을 제외한 여러 투르크 계열의 부족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옛 명칭으로는 정령(丁零, 철륵과 비슷한 음차.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정령(민족)이라는 문서로 연결된다.), 고차(高車)로도 불렸고 본래는 흉노 시기 즈음에 미누신스크 분지(알타이 이북)에 있다가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4세기에 해당되는 오호십육국시대에는 적위라는 정권을 세운 적도 있지만 존속 기간이 4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이라서 5호 16국에는 속하지 않았다.
이후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 유연을 점거했다가 유연에게 오히려 패했다가 5세기 말에 유연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서쪽의 에프탈에게 점거되었다가 이후 7세기에는 돌궐에게 점거당했다.
철륵은 15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었고 설연타, 회흘, 도파, 골리간, 다람갈, 동라, 복골, 발야고, 갈라록, 발실밀, 혼, 곡설, 해결, 글필, 백습 등이 있다.” (자료 : 나무위키)
정령은 흉노 시기에 알타이 이북 예니세이강 중상류에 있는 미누신스크분지에 있었다 했다.
격곤에 대한 자료를 보면 키르키스인 지역을 말하는데 역시 예니세이강 상류지역으로 나타난다. 즉 바이칼호 북쪽 방면이다.
“키르기스인들은 기원전부터 예니세이 강 상류, 삼림지대의 수렵민 집단으로 생활해 왔다. 본래는 이란계 유목민, 정확히는 사카계(스키타이계) 유목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자 기록에서는 주로 '견곤(堅昆)' 혹은 '격곤(?昆)'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다.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인데, 기원전 209년에 흉노의 묵특 선우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뒤 주변 유목집단들을 병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북쪽 바이칼 호 방면으로 혼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복속했다는 내용에서 등장한다.
기원전 60년 흉노의 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한 이후 흉노는 동서로 분열하는데, 동흉노의 호한야 선우는 내몽골로 내려가고 외몽골에 남았던 서흉노의 질지골도후 선우는 북방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다녔는데, 오걸의 군대를 동원해서 격곤을 격파했다는 기록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에 선비가 강성해지자 선비에 복속하였고, 남북조시대에는 유연에 복속하였다. 돌궐이 등장한 이후에는 돌궐에 복속되었는데, 돌궐의 3대 무한 카간 때 "서쪽으로 에프탈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패주시켰으며 북쪽으로는 키르기스를 병합하여 새외의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는 《주서》(周書)의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를 전후하여 6세기 무렵부터 일찍이 튀르크화되었다. 돌궐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는, 646년 당에게 '격곤 도독부'라는 이름으로 복속되어 기미지배를 받았다. 이후 돌궐 제 2제국 시기에는 일테리시 카간에 의해 격파당하고 복속되었다. 위구르가 돌궐 제 2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자, 다시 위구르에 복속되었다.
위구르 카간국의 알프 빌게 카간이 사망한 뒤 위구르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 와중에, 840년 카사르 테긴 카간과 대립하던 한 수령이 키르기스인들을 불러들였고, 키르기스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들어와 카간을 살해하고 위구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뒤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켰다. 키르기스인들은 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들의 땅(예니세이 강 상류)로 돌아갔다.
1207년 칭기즈 칸의 통일 몽골에 의해 복속되었다. 1260년 몽케 칸의 사망 이후 쿠빌라이 칸 아리크부카의 칸위 계승 전쟁에서 아리크부카가 키르기스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15세기 전반에는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의 위치인 천산 북방으로 언제 이주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러시아 제국의 동양학자인 바실리 바르톨트는 오이라트가 모굴 칸국과 전쟁을 할 때 키르기스도 동참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왔다가 1470년대에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키르기스인들의 유명한 서사시 『마나스』에는 이들이 '칼미크의 에센 칸'의 공격과 학살에 직면하여, 고향을 떠나 천산 지방으로 이주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키르기스인 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1440~50년대 에센 칸 치하 오이라트의 압력을 피해 지금의 위치로 남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나무 위키)
그리고 묵특선우는 서역의 누란 등 26개의 나라를 평정했다고 했다.
누란은 현재 신장 위구르지역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묵특선우가 서쪽의 월지에게 승리하여 얻은 서역 26개국 중의 하나로 말한 것을 보면 돈강보다 서쪽에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누란(樓蘭, Loulan)은 현재 중국령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고대의 작은 도시 국가였다. 그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국가를 누란국이라 하였다. 서역의 남도와 이어져 공작하 하류의 로프누르 호의 서안에 위치하며 비단길 교역의 중요한 도시였다. 약 1,600년 전 누란국은 소실되었고 옛 성터의 유적만 남아 있다.
기원전 77년에 한나라의 영향 아래에 가를 샨샨(?善)으로 개칭하였지만 그 후에도 누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
누란으로 불리는 도시 또는 국가가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옛날 신석기 시대로부터 거주가 시작되었던 것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이른바 「누란의 미녀」로서 알려진 미이라는 입고있던 의복의 탄소연대측정에 의해서 BC 19세기 무렵의 인물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문헌에 '누란'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사기》 '흉노열전'에 수록된 편지 중에서 발견된 최초(기원 전 2세기)이며, 그 사이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 편지는 흉노의 지배자 모돈 선우가 전한의 문제에게 보낸 것으로, 이 편지에서 모돈 선우는 월씨에게 승리해, 누란·오손·호게 및 근처의 26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편지는 문제 4년(BC 176년)에 보내진 것이므로, 누란은 적어도 BC 176년 이전에 형성되어 월씨의 세력권에 있던 것이다. 그리고 BC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한서》 ‘서역전’에 의하면, 서역을 전체를 지배하에 둔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의 사이에 동박도위를 두어 누란을 포함한 서역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고, 하서회랑에 수만의 군세를 두어 그 교역을 지배했다.”
(자료 : 위키백과)
오손 (烏孫)은 천산산맥 북쪽 기슭을 거점으로 한다고 했다. BC 177년경에는 흉노에게 압박되어 시르다리야강 상류 하곡의 이리하로 이주하여 활약했다. 한무제때는 10만의 기병을 통솔하는 서역 최강국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한다.
“기원전 3세기경 등장한것으로 추측된다. 그민족은 이란계의 사카민족과 오늘날 튀르크계열 민족의 선조와의 혼혈로 보인다. 톈산 산맥(天山)의 북쪽 기슭을 거점으로 활약한 유목민이었지만 월지의 서진 과정에서 1차적으로 붕괴되었다.그러나 곤막 엽교미가 흉노의 지원을 받아 오손왕국을 부흥시키고 월지를 다시한번 서천시켰다.
그후 BC 177년경에 흉노(匈奴)에게 압박되어 동부 톈산에서 서북부 톈산으로 이동하고 산간부의 시르 다리야강의 상류 하곡(河谷)의 이리하로 이주하여 활약하였다. 그 왕이 도읍한 곳은 적곡성(赤谷城)이었다고 하는데 후일 국가가 셋으로 분열되었으나 그 둘은 곤막[3]에게 통솔되었다.
BC 116∼BC 115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이 나라에 사행(使行)한 이래, 한나라 조정과 흉노와의 관계에 개입하면서 양자간의 이득을 취하면서 흉노를 약탈하고 강거를 견제하는 등 10만의 기병을 통솔하는 서역 최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왕위분쟁에 한이 개입하면서 대오손, 소오손으로 국가가 분열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족 비원치는 강거의 지원을 받아 한의 영향을 베재할려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오손관련 기록은 사실상 끊어지고 전한 말기에 한이 서역에서 철수하면서 기록이 단절되었다. 그후 5세기경 다시 기록에 등장했으나 그 세력은 이미 심각하여 쇠약해져 서역의 평범한 국가로 추락해져있었고 다시 200년후 당(唐)이 서역에 진출했을때는 오손민족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극소수의 후예만이 오늘날 천산 일대에 있다고 한다.” (자료: 나무위키)
유리왕은 도절, 해명, 무휼의 3 왕자 있었다. 그런데 도절, 해명의 죽음은 석연치가 않다.
“왕자 도절(都切)을 태자로 삼았으나 AD 1년에 사망하고, AD 4년에 다시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외국과 분쟁을 일으키자 AD 9년 자결시켰다. 그 뒤 AD 14년 왕자 무휼(無恤)을 태자로 책립, AD 18년에 유리왕이 사망하자 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 즉위하였다.”
왕자 도절은 인질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한다. AD 1년 병사했다는 말도 있으나 석연치 않다.
둘째 해명은 AD 4년에 태자가 되었으나, 황룡국과 분쟁을 일으켰다고, 유리왕이 자결하라고 해서, AD 9년 자결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창을 꺼꾸로 꽂아 놓고 말을 달려 몸을 날려 찔려 자결했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해명태자의 자살방식이,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의 Varus장군의 자살방식과 똑 같다며, 이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하는 한부울님의 글이 있었다.
로마의 바루스 장군은 아래에서 보듯이 아우구스투스와 가깝지만 양자는 아니었다.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라틴어: Publius Quinctilius Varus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와루스[*], 기원전 46년 ~ 기원후 9년)는 로마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아우구스투스의 부관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마르셀라와 결혼하였다. 아그리파와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얻어 기원전 9년 티베리우스와 공동집정관에 취임하고 그 후 아프리카, 시리아 총독을 지냈다. 시리아총독 당시 유대에서 일어난 유대인 반란(유대독립전쟁)을 진압하면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2000여명의 유대인 반란군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시리아에서 로마로 돌아와서 몇 년을 보내다가 기원후 7년 게르마니아로 부임했다.
9년 토이토부르크 숲(현재의 오스나브뤼크 동쪽)에서 벌어진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게르만 헤르스커족의 족장 아르미니우스(Arminius, 독일명 Hermann)가 이끄는 게르만 부족연합군에게 철저히 패하여 그의 지휘하에 있던 로마 군단(제17, 제18, 제19군단)이 모두 괴멸당했다. 바루스는 그 전투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자료 : 위키백과)
그런데 자살방식 뿐 아니라 죽은 년도도 AD 9년으로 동일하다. 즉 해명태자의 자결이 전쟁패배에 대한 책임을 무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리왕의 고구려가 로마까지 진출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시 장수왕시 로마로 진출(본 블로그 글: "고대사에서 '안'지역은 어디인가?" 참조)한 것을 보면 그 전에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인 동로마가 백제로 판단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이미 서로마에 진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묵특선우가 서역 26개국을 평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26개국이 Tanais River 서쪽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 여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죽음과 후계 문제에 대해 아래 인용문을 제시하고, 고구려와 관련성에 대한 검토는 다음으로 미룬다.
“기원전 23년의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후계자 선정이라는 화급한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자료 : 위키백과)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장된 영토. 노란색 부분은 기원전 31년 당시의 로마의 영토이다.
녹색 부분은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얻은 지역이며, 분홍색은 동맹국을 의미한다. (자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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