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신라 백제가 다투던 한강은 코카서스 산맥 아래 Kura River이다.

2019. 9. 13. 16:37과거의 생각

 

 

필자는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신라이다’라는 글에서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 사이에 다툰 지역인 한수지역이 코카서스산맥 아래 있는 Kura River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그때는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이 한수(한강)에 대해 깊게 다루질 못했다. 오늘은 이에 대해서 보다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우선 독자분들은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신라이고, 비잔틴제국이 백제이고, Gorkturks(돌궐)이 고구려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글을 접하기를 바란다. (백제는 본블로그 글, ‘로마는 백제이다’ 참조,  돌궐이 고구려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후 논할 예정임)

 

방법론은 먼저 우리 역사에서 나오는 기록과 위키피디아 등에서 기록된 글을 비교하며 주장하고자 한다. 

 

1. 진흥왕과 성왕의 한강 유역 점령

 

진흥왕과 성왕의 한강 상류 유역 점령애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자료 : 진흥왕, 위키백과)

 

우선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경우를 보자. 그렇지 않으면 신라와 백제가 성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551년 전후를 통해 고구려로 추정되는 돌궐에서 내정이 불안했는지 아래에서 알아 보자. 

 

“The Rouran and the Hephthalites had a falling out and problems within their confederation were encouraged by Chinese agents.

In 508, the Tiele defeated the Rouran in battle.

In 516, the Rouran defeated the Tiele.

In 551, Bumin of the Ashina Göktürks (Chinese:突厥) quelled a Tiele revolt for the Rouran and asked for a Rouran princess for his service. The Rouran refused and in response Bumin declared independence. Bumin entered a marriage alliance with Western Wei, a successor state of Northern Wei, and attacked the Rouran in 552, killing Yujiulü Anagui. Bumin declared himself Illig Khagan of the Turkic Khaganate (돌궐) after conquering Otuken; Bumin died soon after and his son Issik Qaghan succeeded him. Issik continued attacking the Rouran but died a year later in 553. His brother Muqan Qaghan finished the job and annihilated the Rouran in 555.

Some scholars claim that the Rouran then fled west across the steppes and became the Avars,…”

(source : Rouran Khaganate (330-555), wikipedia)

 

위의 글에서 유연 (Rouran)과 철륵(Tiele)이 싸우는 과정에서 돌궐이 독립선언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불안정한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즉 아틸라의 훈제국이 무너지고 서부지역에서 서돌궐이 탄생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는 이들 모두 고구려와 관련 있는 세력으로 판단한다. 유연은 고구려 유리왕이 점령한 동호의 후예이며, 철륵도 유리왕이 점령한 나라이다. (본블로그 글, ‘흉노의 모돈선우는 고구려의 유리왕이다’ 참조) 단지 돌궐자료는 중국사서의 자료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럼 이러한 돌궐의 고구려가 코카서스산맥유역에 있었는가를 아래에서 살펴 보자. 

아래 자료를 보면 고구려로 판단되는 훈족과 Avars족이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위치해 살고 있었다. 

 

“The Khuni, Huni or Chuni were a people of the North Caucasus during late antiquity. They have sometimes been referred to as the North Caucasian Huns and are often assumed to be related to the Huns who later entered Eastern Europe. However, the  ethnolinguistic and geographical origins of the Khuni are unclear. (구이의 일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됨)

The first contemporaneous reference to the Khuni may be by Dionysius Periegetes and Claudius Ptolemy's Geography, in the 2nd century CE, when they are said to be living near the Caspian Sea.

 

Agathangelos claims that there were Huns living among the peoples of the Caucasus in 227 and that they were related to the Iranian Huns.

 

In 535 or 537, an Armenian missionary team headed by the bishop Kardost baptized many of the North Caucasian Huns. The Syriac source reporting this event also indicates that a writing system for Hunnic was developed.

 

Huns are said to have established a  polity in Daghestan in the 6th century CE. This may have incorporated numerous indigenous Caucasian peoples.”

(source : Wikipedia, North Caucasian Huns)

 

즉 다게스탄(Derbent 시가 있는 코커서스산맥아래 카스피해 접한 동쪽끝지역, 철문관이 있음)에 6세기경 훈족의 행정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의 세력이 진흥왕과 성왕 시기에 코카서스산맥 위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관문인 다게스탄지역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The Avars reside in a region known as the North Caucasus between the Black and Caspian Seas. Alongside other ethnic groups in the North Caucasus region, the Caucasian Avars live in ancient villages located approximately 2,000 m above sea level. The Avar language spoken by the Caucasian Avars belongs to the family of Northeast Caucasian languages and is also known as Nakh-Dagestanian. 

……………...

According to the historian Sergey Tolstov, Avarians originated in Khurasan, south-east of the Caspian Sea, and migrated to the Caucasus. 

…………………..

It is not clear whether or in what way the Caucasian Avarians are related to the early "Pseudo-Avars" (or Pannonian Avars) of the Dark Ages, but it is known that with the mediation of Sarosius in 567, the Gokturks requested Byzantium to distinguish the Avars of Pannonia as "Pseudo-Avars" as opposed to the true Avars of the east, who had come under Gokturk hegemony. The modern Arab Encyclopedia states that the Magyars originated in this area. 

…………...

During the Khazar wars against the Caliphate in the 7th century, the Avars sided with Khazaria. Surakat is mentioned as their Khagan around 729-30 AD, …………."

(source ; Wikipedia, Avars(Caucasus)

 

Avars족은 흑해와 카스피해사이의 해발 2천미터의 코카서스산맥에 사는데, 다게스탄인 말을 쓰고 있으며, 이들은 원래 카스피해 동남쪽 호라산지역으로부터 이동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인 돌궐이 이 코커서스산맥지역에 사는 Avars인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하며, 이들은 후에 항가리의 Magyars(말갈)족의 조상이다. 이들은 하자르왕국 (발해)이 칼리프국과 싸우는 7세기에 하자르왕국 편을 들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구려세력이 코카서스산맥 북쪽 주위에 있었다. 그럼 이제 이지역을 놓고 신라와 백제가 치열하게 다투는 것을 확인하자. 

 

비잔틴제국과 사산왕조가 전략적인 이 지역을 놓고 20년동안 치열하게 싸운다. 신라의 진흥왕과 백제의 성왕이 한강유역을 놓고 치열하게 싸운 이유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한다. 결국 진흥왕이 이긴다. 여기서도 사산왕조의 호르스1세가 이기는 것으로 나온다. 이 Lazic War가 이루어지는 곳에 Kura River가 있다. 바로 한강으로 여겨진다. 

 

Lazic War between Sassanid Persia and Byzantine Empire:

 

“The Lazic War, also known as the Colchidian War or in Georgian historiography as the Great War of Egrisi (Georgian: Egrisis Didi Omi), was fought between the East Roman (Byzantine) Empire and the Sasanian Empire for control of the ancient Georgian region of Lazica. The Lazic War lasted for twenty years, from 541 to 562, with varying success and ended in a victory for the Persians, who obtained an annual tribute in exchange for ending the war.

……………...

Lazica, situated on the eastern shore of the Black Sea, and controlling important mountain passes across the Caucasus and to the Caspian Sea, had a key strategic importance for both empires. For Byzantines, it was a barrier against a Persian advance through Iberia to the coasts of the Black Sea. Persians on the other side hoped to gain access to the sea, and control a territory from which Iberia, which was by now under their firm domination, could be threatened. 

……………..

Then, in 557, a truce ended the hostilities between the Byzantines and Persians, and by the "Fifty Years Peace" of Dara of 562, Khosrow I recognized Lazica as a Byzantine vassal state for an annual payment of gold." 

(source : Lazic War, Wikipedia)

 

 

 

 

                                   Lazica 지역 지도 (source : Wikipedia)

 

 

 

 

                             Kura River (source : Wikipedia)

 

 

 

 

Caucasus Mountains (source : Wikipedia)

 

 

백제의 한강북쪽 (한북, 漢北)의 독산성은 이 Lazica지역 (백제의 6개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의 10개군지역은 그 오른쪽지역으로 트빌리시를 포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코카서스산맥을 넘는 유일한 실크로드인 철문관이 있는 Derbent시를 포함한 다게스탄지역은 고구려의 관리지역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신라가 점령한 지역은 한강 상류유역이라 했다.  Kura River는 동으로 카스피해로 흐르며, 상류지역이 흑해에 가까운 Lazica 지역이다.  이곳이 흑해에 접하는 더 중요한 지역인 것이다. 지금 한국의 한강은 서쪽으로 흐른다. 따라서 강변인 하류가 중요지역이 되며, 상류가 중요지역이 될 수 없다.  따라서 Kura River가 한강(한수)인 것이다. 

 

 

 

2. 신라와 백제의 한산주에 있는 가잠성 전투

 

신라 진평왕 때에 한산주의 가잠성을 두고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싸운다.

아래에서 보듯이 뺏고 뺏기기를 여러번 반복한다. 한산주, 북한산주는 한강유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가잠성의 치열한 전투가 백제와 신라 모두에게 전략적인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인 것을 의미한다. 

 

Greater Caucasus Mountains (철령) 아래 있는 그러나 Lesser Caucasus Mountains(죽령) 위에 있는 Kura River (한강) 바로 아래의 Tbilisi 시(가잠성)는 또한 매우 전략적인 곳이다. 

 

 

한산주의 가잠성에 대한 신라 백제의 전투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1) 611년 백제의 가잠성 경략

 

“백제 무왕은 신라가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때인 611년 10월 얘기치 않게 신라를 기습하여 가잠성을 점령했다(가잠성 전투).” (자료 : 진평왕, 나무위키)

 

“같은 해(611)에 백제와의 전쟁이 격화되었다. 10월에 백제가 가잠성(?岑城)에 쳐들어와 100여일 간의 공방전 끝에 이를 함락시키고 현령 찬덕(讚德)은 자살하였다.”  (자료: 진평왕, 위키백과)

 

2) 618년 신라의 가잠성 탈환

 

“한편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614년까지 후속전이 치뤄졌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잠잠해지자, 616년 무왕이 모란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평왕은 618년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주를 죽였다(가잠성 전투).”

[출처] <펌> 진평왕 (579-632 재위) – 나무위키|작성자 죽엽

 

"618년, 빼앗긴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북한산주의 군주인 변품(邊品)을 보내 이를 탈환하였으나 전 가잠성 현령 찬덕의 아들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자료 : 진평왕, 위키백과)

 

 

3) 628년 백제의 가잠성 포위공격

 

"628년 2월에는 가잠성을 포위공격하는 백제군을 물리쳤으나,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자녀들을 내다 파는 일이 벌어졌다.” (자료 : 진평왕, 위키백과)

 

 

비잔틴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602-628년 기간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했다. 이중에서 위의 한국사 기록과 상응하는 것은 624-627기간의 비잔틴제국 Heraclius (610-641 재위)원정이다. 물론 코카서스지역이다. 가잠성으로 추정되는 Tbilisi(=Tiflis)를 포위했지만 Heraclius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기술된다.  신라가 물리쳤다는 위의 기록과 일치한다. 아래 4세기에 사산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세워진 Narikala 성곽이 신라의 가잠성으로 추정된다. 

 

"The fortress was established in the 4th century as Shuris-tsikhe (i.e., "Invidious Fort") and it was a Persian citadel. It was considerably expanded by the Umayyads in the 7th century.." (source : Narikala, Wikipedia)

 

 

Panoramic view of Tbilisi from Narikala in 2016. (source : Wikipedia)

 

 

 

              Narikala Fortress in Tbilisi city in Georgia (source : Wikipedia)

 

그러나 이번에는 고구려로 추정되는 서돌궐과 함께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침략했다. 618년 신라가 가잠성을 탈환했으니 이지역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도움을 얻은 것아 아닌가 한다. 물론 서돌궐은 다게스탄의 Derbent 성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이경우 서돌궐인 고구려가 얻은 것이 불명확하다고 기술했다. 그래서 이후 김춘추가 고구려를 찾아가서 원군을 신청할 때 연개소문이 죽령이북 500리 땅을 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On March 25, 624 he again left Constantinople with his wife, Martina, and his two children; after he celebrated Easter in Nicomedia on April 15, he campaigned in the Caucasus, winning a series of victories in Armenia against Khosrow and his generals Shahrbaraz, Shahin, and Shahraplakan.

……..

With the Persian war effort disintegrating, Heraclius was able to bring the Gokturks of the Western Turkic Khaganate, under Ziebel, who invaded Persian Transcaucasia.”

(source : Heraclius, Wikipedia)

 

“The Turk-Byzantine alliance was revived in the 620s during the last great Byzantine-Persian war before the Arab conquests. In 627 Tong Yabghu Qaghan sent out his nephew Böri Shad. The Turks stormed the great fortress of Derbent on the Caspian coast, entered Azerbaijan and Georgia, did a good bit of looting and met Heraclius who was besieging Tiflis. When the siege dragged on, the Turks left and Heraclius went south and won a great victory over the Persians. The Turks returned, captured Tiflis and massacred the garrison. on behalf of the Byzantines, a Turk general named Chorpan Tarkhan then conquered most of Armenia.” 

(source : Wikipedia, Western Turkic Khaganate)

 

또한 위 인용글에서 Heraclius는 티블리시 남쪽으로 페르시아지역을 유린했다고 한다. 따라서 신라백성들이 자녀를 내다 파는 정도로 피폐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여름이 더운 지역이지만 단순히 가뭄때문이라는 것은 윤색한 내용으로 보인다. 

 

 

3.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요구한 지역 : 죽령이북 한강유역

 

642년 백제 의자왕의 신라 대야성 함락으로 딸과 사위, 손주들을 잃은 김춘추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서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죽령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김춘추는 죽령이북 한강유역은 신라에게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그것을 돌려주면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할 수 없는 약소국이 되니 거절했다고 했다. 그만큼 신라 방어의 요충지라는 것이다. (아래 자료 참조)

 

“당시 고구려는 보장왕은 큰 실권이 없고 사실상 고구려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직접 김춘추를 대접해 주었다. 김춘추는 고구려 조정에게 양국이 그간의 상쟁을 중지하고 화해하며,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도와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고구려의 보장왕은 "죽령 이북 땅이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돌려준다면 구원병을 보내줄 수 있다"고 답했다. 죽령 이북인 한강 유역은 신라에겐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그걸 다 돌려주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약소국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출처] <펌>태종 무열왕 (654-661 재위) -나무위키|작성자 죽엽

 

“한편 642년 겨울,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딸과 사위, 손주들을 잃은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 조정에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청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의 일이었는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왕명을 받들어 김춘추를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이처럼 신라와의 회담은 처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다음날에 김춘추가 보장왕과 만나 논의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보장왕은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는 조건으로 죽령 서북의 땅을 요구하였다. 죽령은 …., 고구려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영토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는데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이후 신라 진흥왕 때 이를 빼앗았다.”

[출처] <펌> 연개소문 – 나무위키|작성자 죽엽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지 당과의 외교 거점이었던 당항성을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11월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김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品釋) 등을 죽였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선제 조건으로 요구하였지만 김춘추가 거절하였기에 그를 감금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왕이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인평 10년(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인평 11년(644년) 정월에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전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서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의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자료 : 위키백과, 선덕여왕)

 

Lesser Caucasus Mountains를 죽령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 있는 Greater Caucasus Mountains를 철령으로 본다면 이 사이에 있는 Kura River는 죽령이북에 있는 한강이 된다. 그리고 이 지역의 군사적인 전략상 요충지라는 것은 용이하게 이해가 간다. Tbilisi의 중요성도 이해된다. 이러한 전략적인 지역이므로 500리(=200 km)의 땅이지만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철령에 대해서는 본 블로그 글, ‘진시황의 진나라는 알락산더제국인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