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와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던 서고트왕국은 북위이며 고구려이다

2021. 5. 22. 01:27과거의 생각

부제 1: 고트족은 훈족이다

부제 2: 서고트왕국은 북위이다. 

 

부제 3: 서고트왕국은 북위이며 고구려이다.

 

그동안 필자는 북위가 프랑스 Gaul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연은 북위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본 블로그의 글, '고구려의 장수왕이 공격(436)한 풍홍의 북연은 프랑스 북부 Gaul지역에 있었다'에서 주장했다. 아울러 이 글에서 아틸라의 Gaul지역 공격 (451)이 장수왕 시기의 고구려가 북연의 풍홍을 구하기 위해 공격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북연이나 북위가 고구려 위성국이 아닌가 추정했다. 또한 아틸라가 453년 죽었다고 한 것은 장수왕이 아닌 다른 장수, '고무'같은 장수왕의 측근 장군이 아닌가 추정했다. 

 

본 글에서는 북위의 위치가 Gaul지역에 있었다면 서양사에서도 그 정황이 나타날 것인 바, 이 당시 서고트족의 활동을 살펴 보고자 한다. 필자는 고트족이 고구려라고 이미 본 블로그의 글, '고트족은 고구려이다(1)'에서 추정한 바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첫째, 고트족과 훈족의 동일성 여부를 간단하나마 검토하고, 둘째, 서고트족의 이베리아반도 및 남프랑스지역에서의 활동이 북위의 그것인지 확인하는 동시에, 셋째, 서고트족은 고구려로 추정한 바, 북위가 고구려인가를 확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1. 고트족과 훈족의 비교

 

먼저 고트족이 훈족의 그것인지 확인하고자 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이들을 별도의 개체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고트족이 고구려이다(1)'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트족이 훈족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간단하나마,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왕계표 비교를 통한 훈족과 고트족의 비교

아래 고트족과 훈족의 왕계표를 비교해 보면, 훈족의 아틸라까지는 고트족의 구분이 별로 없는데, 아틸라 사후 동고트족, 서고트족으로 지역적으로 갈라선 느낌이다. 그러나 고트족은 Theodoric the Great시대에 다시 통합되는 기록을 보인다. 훈족의 기록은 Ernak이후 기록이 없어 비교가 더 이상 불가하다. 

 

그래서 왕계의 직접적인 비교가 아닌 고트족 역사를 통해서 고트족과 훈족의 동일성 여부를 유추하고자 한다. 

 

<고트족과 훈족의 왕계 비교>

 

Cniva, king of Goths, (250-270) : No data in Huns

Ermanaric, king of the Goths (우랄산맥, 흑해, 발트해), (296-376) : 훈족 Balamber (370?-376)

 

Athanaric (369-381, Visg, B/D) : 훈족 Balamber (370?-376)

 

Vinitharius (375-376, king of Goths, A/D)

 

No Data in Goths (381- 395) :  

 

 

Alaric I (395–410, B/D) :  훈족 Uldin (395-409)

                            

Ataulf (410–415, B/D)  : 훈족 Charaton (412 - ?)

Wallia (415–419, B/D)  

Sigeric, king of the Visigoths, 415 (A/D)

Theodoric I (419–451, B/D) (32년) :  훈족 : Octar and Ruga (420-430)

                                                             Ruga (430-435)

                                                             Attila & Bleda (435-445)

                                                             Attila (445-453)

                                              

                                            

Thorismund (451–453, Visg, B/D) (3년)  :   

Theodoric II (453–466, Visg, B/D) (13년) : 훈족 Dengizich & Ernak (453-469, 16년)

 

Valamir (447-465, Ostg, A/D, 19년)

Theodemir, (465-475, Ostg, A/D, 11년)                                           

Euric (466–484, Visg, B/D,18년) :  훈족 Ernak ( 469 - ?)

Theoderic the Great, (475–526, 52년, Ostg, A/D) 

Alaric II (484–507, Visg, B/D, 23년) : 

 

Amalaric (507-511, Visg, B/D, 5년, 재위 507-531 , 25년) : Child King (507-511)

                                 

Gesalec (507–511, Visg, B/D, 5년) :   

     

Amalaric (511-526, Visg, B/D, 16년) : under control of Theoderic the Great, (Ostg, A/D)

                                               

Amalaric (526–531, Visg, B/D, 5년) :  independant king

                                           

Athalaric, (526–534 , 8년: A/D, Ostg)

 

Amalasuntha (534-535, Ostg, A/D)

Theodahad, (535–536, 2년, Ostg, A/D)   

Witiges (536-540)

Ildibad (540-541)

Eraric (541)

Totila (541-552)

Theia (552-553)                                                        

                 

(자료 : Balt Dynasty(=B/D), Amal dynasty (=A/D), Goths, Visgoths, Ostrogoths, Wikipedia)

 

 

2) 역사적 내용을 통한 훈족과 고트족의 동일성 여부 분석

 

우선 훈족은 아틸라시대를 그 정점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아틸라 사후 역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서양역사가들은 묘사한다. 그러나 훈족의 아틸라가 지배한 지역은 그대로 동일체로 남게 된다. 즉 훈족의 지배력을 그대로 이어 받은 고트족은 훈족과 동일체라는 것이 유추된다. 

 

만약 고트족이 훈족의 지배하에 예속된 민족이라면, 아틸라 사후,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여, 독립된 주체를 추구하였을 것이며, 이과정에서 훈족의 아틸라에 지배된 모든 게르만 민족들이 들고 일어나 매우 혼란된 역사를 보였을 것이다. 마치 중국 역사에서 통일된 진시황의 진나라가 진시황 사후 여러 나라가 난립하는 혼란된 사회를 경험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훈족의 아팉라 사후 이러한 현상은 없었다. 오히려 고트족이 지역적으로 반분하여 지배한 역사를 보인다. 즉 이는 훈족의 역사가 고트족의 역사라는 것을 방증한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를 증명하는 몇가지 내용을 아래 인용하고자 한다. 

아래 첫째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틸라가 이미 Gaul지역을 확보한 것으로 기술된다. 아틸라는 동고트족과 같이 싸웠다고 한다. (Battle of Charlons, AD 451). 반달족의 추천에 의해 Gaul지역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이 전쟁에서 져서 후일 453년 아틸라가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서고트족의 Theodoric I 왕도 죽는다고 한다. 서고트족은 로마군과 합세하여 동고트족과 훈족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Gaul지역을 아틸라가 확보한 것으로 짐작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필자의 글 '장수왕이 공격한 풍홍의 북연은 프랑스 북부 Gaul지역에 있었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 당시 아틸라는 장수왕이 북연의 풍홍을 구하기 위해 공격한 것으로서, 아마 아틸라의 전사 운운은 당시 장수왕의 측근인 고구려의 '고구'장군의 죽음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틸라의 Gaul지역 확보의 의미는 451년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에 회의가 가게 한다. Jordanes는 고트족의 승리를 언급했는데, 당시 어느 세력을 지칭한 것인지 모르는 로마 (아마도 북연)에 대한 고트족(아마도 북위)의 승리를 언급하는 것 같다. 당시 Alans족이 로마편을 들어서 로마가 이겼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Alans족은 그동안 로마를 위해 싸운 적이 없다. 항상 훈족 등과 같이 한 부족이다. 그러나 당시 Alans이 북연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훈족과 고트족은 동일체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The settlement formed the nucleus of the future Visigothic kingdom that would eventually expand across the Pyrenees and onto the Iberian peninsula. That Visigothic settlement proved paramount to Europe's future as had it not been for the Visigothic warriors who fought side by side with the Roman troops under general Flavius Aetius, it is perhaps possible that Attila would have seized control of Gaul, rather than the Romans being able to retain dominance.[58]

(source : Visgoths, Wikipedia)

 

그리고 이 당시 싸움을 Jordanes는 고트족내의 왕권다툼으로 보았다. Theodoric I의 죽음이 이에 관련된 것인지 모른다. 아래 글에서 Euric왕은 왕이 되면서, civil war을 거치면서 다른 고트족왕과 장수들을 패배시켰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Theodoric I의 죽음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415년부터의 고트족의 Aquitaine지역 확보를 계승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훈족의 활동, 고트족의 활동의 유업을 계승했다는 의미이다. 광개토태왕 시절의 Alaric I시절, 동고트족은 410년이전에 반달족, Alans, Suebi 등과 함께 Bretagne지역, 스페인지역까지 진출했다고 로마사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위의 아틸라의 Gaul지역 확보 등을 고려하면, 고트족이 훈족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고 있다. 

 

Euric왕 (466-484)은 469-470년에는 영국까지 진출하고, 471년에는 프랑스 남부 Arles지역까지 진출했다고 기술된다. 475-476년에는 로마(백제?)관할 중부 프랑스의 Clermont을 확보하고, 이베리아 반도로 나아가 476년에는 거의 전 이베리아반도 지역을 확보하였다고 기술된다. 

 

Gaul지역의 제일 큰 도시인 프랑스 Clermont지역 확보는 475년부터 507년까지 확보한 것으로 기술되는데, 이 사건으로 로마로부터 독립되었다 아래에서 기술되고 있는데, 이는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이 Clermont지역이 백제의 한성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는데, 보다 확실한 것은 더 연구해 보아야 알 것 같다. 

 

"With his capital at Toulouse, Euric inherited a large portion of the Visigothic possessions in the Aquitaine region of Gaul, an area that had been under Visigothic control since 415. Over the decades the Visigoths had gradually expanded their holdings at the expense of the weak Roman government, including Euric's sieges of Clermont in 475 and 476,[3] as well as advancing well into Hispania in the process.

 

Upon becoming king, Euric defeated several other Visigothic kings and chieftains in a series of civil wars and soon became the first ruler of a truly unified Visigothic nation. Taking advantage of the Romans' problems, he extended Visigothic power in Hispania, driving the Suevi into the northwest of Iberia. By the time the Western Roman Empire ended in 476 he controlled nearly the entire Iberian peninsula.

 

In 469 or 470 Euric defeated the British king Riothamus at Déols and expanded his kingdom even further north, possibly as far as the Somme River, the march of Frankish territory. During what has become known as the Battle of Arles (471), near Arelate, presently Arles, Euric defeated a Roman army, killing three Roman counts and Anthemiolus, son of the Roman emperor Anthemius.

 

Previous Visigothic kings had officially ruled only as legates of the Roman emperor but Euric was the first to declare his complete independence from the puppet emperors. In 475 he forced the Western Emperor Julius Nepos to recognize his full independence in exchange for the return of the Provence region of Gaul. The Roman citizens of Hispania then pledged their allegiance to Euric, recognizing him as their king. In the same year Clermont(-Ferrand) surrendered to him after a long siege, and its bishop, Sidonius Apollinaris, sued for peace.

 

Euric was one of the more learned of the great Visigothic kings and was the first one to formally codify his people's laws. The Code of Euric probably issued around 476[4] codified the traditional laws that had been entrusted to the memory of designated specialists who had learned each article by heart. He employed many Gallo-Roman nobles in his court such as Leo of Narbonne.

 

At Euric's death of natural causes in 484 the Kingdom of the Visigoths encompassed a third of modern France and almost all of Iberia (i.e. except the region of Galicia then expanding until the Douro river basin in present day Portugal and by then ruled by the Suebi)."

 

(source : Euric, Wikipedia)

 

아래 두 지도를 보면 고트족의 이동경로와 훈족의 이동경로를 보여 주는데, 거의 유사한 경로를 보인다. 이것이 또한 훈족과 고트족이 동일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Migration of Visgoths (source : Wikipedia)

 

 

A suggested path of Huns' westward movement (source : Wikipedia)

 

이상으로 훈족과 고트족의 동일체 여부 분석은 마치고, 서고트족의 활동영역이 북위의 그것인지 검토하고자 한다. 이어서는 북위가 고구려인지 분석을 하고자 한다. 

 

 

2. 고트족의 두 가문 왕위계승과 북위의 왕위 계승 비교

 

우선 고트족왕가는 서고트족왕이 주로 되는 Balt Dynasty와 동고트족왕이 주로 되는 Amal Dynasty가 있다. 두 고트족 왕가의 왕들 재위기간과 고구려, 북위의 왕들의 재위기간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일차로 서양사와 동양사에 나타난 각각의 연대를 직접 비교해 보기로 한다. 

 

1) 서양사와 동양사 각각 연대의 직접 비교에 의한 고트족왕계와 북위 왕계 비교

 

(1) Visgoths : Balt Dynasty : Alaric I (395-410) (광개토태왕) 계열

 

Balt Dynasty List of rulers : (비교대상 추정은 필자의 추정)

(자료 : Balt Dynasty,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Goths)

 

Athanaric (369-381) : 고구려 소수림왕 (371-384)

 

 

No Data (381- 395) :  고구려 고국양왕 (384-391)

                               북위 태조 도무제 (386-409)

 

 

Alaric I (395–410) : 고구려 광개토태왕 (391-412), 북위 태조 도무제 (386-409)

                            

Ataulf (410–415)  : 북위 명원제 (409-423)

Wallia (415–419)  : 북위 명원제 (409-423)

Theodoric I (419–451) (32년) :   북위 태무제 (423-452, 재위 29년)

                                             

                                              고구려 장수왕 <삼국사기 : 413-491, 재위 78년>

 

Thorismund (451–453) (3년)  :   북위 남안은왕 (452)

Theodoric II (453–466) (13년) : 북위 문성제 (452-465, 13년)

 

Euric (466–484, 18년) :   북위 현문제 (465-471,  재위 6년), 북위 효문제 (471-499)

Alaric II (484–507, 23년) : 북위 효문제 (471-499, 재위 28년) 

                                    북위 선무제 (499-515, 17년)

 

                                   고구려 문자왕 <삼국사기 : 491-519, 재위 28년>

 

Amalaric (507-531, 25년)                                

 

Gesalec (507–511, 4년) :   북위 선무제 (499-515, 17년)

 

 

     

511-526 (16년) :Theoderic the Great, king of Ostrogoths, 겸임 (474–526, 재위 52년)

                                               북위 효명제 (515-528, 14년)

 

Amalaric (526–531, 5년) :  북위 효장제 (528-530, 3년)

                                              

                                                            

 

Balt Dynasty인 서고트족왕 계열은 북위의 왕계 재위 기간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2) Ostrogoths : Amal Dynasty : Ermanaric (소수림왕) 계열

Amal Dynasty Rulers  (비교대상 추정은 필자의 추정)

(자료 : Amal Dynasty,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Goths)

 

Ermanaric, king of the Goths (우랄산맥, 흑해, 발트해), (296-376) : 

                                                                      고구려 미천왕 (300-331)

                                                                      고구려 고국원왕 (331-371)

 

 

Vinitharius (375-376, king of Goths, Amal Dynasty)

Sigeric, king of the Visigoths, 415

                                               고구려 장수왕 <삼국사기 : 413-491, 재위 78년> 

 

Valamir (447-465, Ostg, A/D)  : 고구려 장수왕 <삼국사기 : 413-491, 재위 78년> 

Theodemir, (465-475, Ostg, A/D) : 고구려 장수왕 <삼국사기 : 413-491, 재위 78년>    

 

Theoderic the Great, king of the Ostrogoths, (475–526, 재위 52년)    

                                           고구려 장수왕 <삼국사기 : 413-491, 재위 78년>                                 

                                           고구려 문자왕 <삼국사기 : 491-519, 재위 28년>                      

Athalaric, king of the Ostrogoths, 526–534 , 8년: 

                                           고구려 안장왕 <삼국사기 : 519-531, 재위 12년>

Theodahad, king of the Ostrogoths, 534–536 3년

 

반면 동고트족 왕계는 북위보다는 고구려에 보다 유사한 왕 재위기간을 보인다. 

 

2) 15년 차이를 고려한 서고트왕계와 북위왕계의 비교

 

우리는 장수왕의 풍홍 구출작전(436)과 아틸라의 Gaul지역 공격(451)이 15년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토욕혼의 모용외괴의 확장과 Suebi왕국의 비교에서도 15년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 했다. 따라서 동양사와 서양사의 15년 차이를 고려한 비교표를 대비해 보고자 한다. 

 

Balt Dynasty List of rulers : (비교대상 추정은 필자의 추정)

 

(자료 : Balt Dynasty, Wikipedia, 인용출처 : 필자의 다음블로그, 카테고리, Goths)

 

Alaric I (395–410) <380-395> :  북위 태조 도무제 (386-409)

                            

Ataulf (410–415) <395-400>  : 북위 도무제 (386-409)

Wallia (415–419) <400-404> : 북위 도무제 (386-409)

Theodoric I (419–451) <404-436> (32년) :  북위 명원제 (409-423)

                                                             북위 태무제 (423-436, 452, 재위 29년)

                                             

                                         고구려 장수왕 <삼국사기 : 413-436(24), 491, 재위 78년>

 

Thorismund (451–453) <436-439> (3년)  :   북위 태무제 (423, 436-439, 452)

Theodoric II (453–466) <439-451> (13년) : 북위 태무제 (423, 439-452)

 

Euric (466–484, 18년) <451-469> :   북위 문성제 (452-465,  재위 13년) 

Alaric II (484–507, 23년) <469-492> : 북위 효문제 (471-499, 재위 28년) 

    

 

                                         고구려 장수왕 <삼국사기 : 413, 436-491(56), 재위 78년>

 

 

Amalaric (507-531, 25년) <492-516> : 북위 효문제 (471, 492-499), 선무제 (499-515)                             

                                        고구려 문자왕 <삼국사기 : 491-519, 재위 28년>

 

Gesalec (507–511, 5년) <492-496>:   북위 효문제 (471, 492-496, 499, 28년)

 

 

     

511-526 (16년)<496-511> :Theoderic the Great, Ostg (475–526, 재위 52년) <460-511>

                                                   북위 선무제 (499-515, 17년)

 

Amalaric (526–531, 5년) <511-516> :  북위 선무제 (499, 511-515,17년)

                                              

 

15년 차이를 고려하여 비교하면, 북위의 문성제<452-465,14년>는 Euric왕<451-469,19년>과 대비되며, 북위의 효문제<471-499, 29년>는 Alaric II왕<469-492, 24년>과 대비된다. Amalaric왕<492-516,25년>은 북위의 선무제<499-515, 17년>와 대비된다. 

 

그러면서도 15년 차이를 고려한 비교에서 서고트왕계와 고구려의 왕계와도 대비된다. 즉 Alaric II의 마지막 전사 연도인 492년이 장수왕의 서거연도인 491년과 유사하다. 그리고 서고트왕 Amalaric 왕의 재위기간<492-516,25년>이 문자왕 재위기간<491-519, 28년>과 유사하다. 

​즉 북위의 문성제, 효문제가 팽창한 시기인데, 이것이 역시 서고트족의 팽창시기인 Euric왕과 Alaric II왕시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장수왕 시기에 해당한다. 비록 초기 Alaric I등의 시기는 15년 차이를 고려한 시기와 맞지 않지만, 문성제이후는 오히려 15년 차이를 고려한 시기가 더 부합한다는 것이다. 

 

즉 왕들의 재위기간을 비교할 때, 서고트왕국은 북위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서고트왕과 북위왕의 상황이나 업적 중에서 유사한 내용을 찾아 보자.  

 

3. 서고트왕국이 북위라는 것을 말해 주는 자료

 

1) 북위 문성제 (458)와 갈석산 및 황산궁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정사인 『북사(北史)』 '고종 문성제(高宗文成帝)' 태안(太安) 4년(458)조는 문성제 탁발준(拓拔濬)이 동쪽으로 순행해 요서(遼西) 황산궁(黃山宮)에서 연회하고 다시 “갈석산에 올라 창해를 바라보고 산 위에서 군신들과 큰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서고트족의 수도는 Toulouse였다. 필자는 황산궁이 적토가 많은 Toulouse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필자는 이미 추정했다. 북위 문성제 시기(452-465)는 서고트족의 Euric왕 시기<451-469, 15년차이 고려한 시기>인데, 서고트족의 Euric왕 시기에는 이베리아반도 전체, 남프랑스, 영국까지 진출한 시기였다. 문성제가 갈석산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은 Euric왕 시기 점령한 Arles등 Narbonne지역이다. 필자는 갈석산이 프랑스 Massif Central의 우측에 있다고 추정했다. (필자의 글, '론강이 요수라면 갈석산은 어디인가?' 참조). 즉 북위가 서고트족왕국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2) 466년 북위가 고구려 (장수왕)에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북위가 고구려에 결혼동맹을 요구한 466년은 Visgoths의 Euric (466-484, <451-469>,19년)왕의 즉위 년도이다. 그러나 15년 차이를 고려하면 466+15=481년으로 Euric왕의 후기에 해당한다. Euric왕 시기의 후기라면 북위가 전 이베리아반도, 남프랑스, 영국까지 팽창한 시기이다. 이후 장수왕은 오히려 북위에 결혼동맹을 제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보면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것을 알 수 있다. 

 

Kingdom of the Visgoths under Alaric II (source : Wikipedia)

(By Chabacano from Image:Visigoth Kingdom.jpg and Image:BlankMap-Europe no boundaries.svg - Image:Visigoth Kingdom.jpg,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296362)

 

 

3) 문성제 시기(452-465)와 Euric왕 시기<451-469>의 civil wars

 

북위의 문성제는 즉위 전 많은 혼란을 겪는다. 종애라는 자가 조부 태무제를 죽이고, 혼란한 상황에서, 종애가 자신이 옹립한 남안왕 탁발여를 다시 살해하고, 이어서 근위단장인 원하가 종애를 살해한 후 왕에 올랐다. (아래 문성제 위키자료 참조)

 

고트족의 Theodoric I의 아들인 Euric왕도 brother인 Theodoric II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초기 civil wars를 겪으며, 다른 서고트족왕과 chieftain을 패배시켰다고 한다. (아래 위키피디아자료 참조)

즉 이런 상황도 북위가 서고트왕국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본다. 

 

한편, 서고트족의 Euric왕(466-484)은 훈족의 Ernak (469-?)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451년 Battle of Charlons에서 죽은 고트족의 Theodoric I은 필자가 추정하다 싶이 453년 죽은 Attila가 되며, 훈족의 Ernak과 Dengzich (453-469)는 Attila의 아들이 된다. Euric에 의해 죽은 Theodoric II는 훈족의 Dengzich가 된다. 즉 훈족과 고트족이 동일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북위 고종 문성황제 탁발준(北魏 高宗 文成皇帝 拓跋濬, 440년 8월 4일 ~ 465년 6월 20일)은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의 제5대 황제(재위:452년 ~ 465년)이다.

선비족 이름은 탁발오뢰(拓跋烏雷)[2]로, 452년, 종애(宗愛)가 문성제의 조부 태무제를 시해하여, 다음에 황후의 명으로, 황족인 동평림왕 탁발한(東平林王 拓跋翰, 탁발황의 이복동생)을 살해했다. 종애는 문성제의 계부(막내 숙부)의 남안왕 탁발여(南安王 拓跋余)를 옹립했다. 하지만, 8개월 후에는 탁발여도 종애에 배신하고, 친정(親政)할 수 있도록, 종애의 주살을 상의하였다. 그것이 민감하게 해, 선수를 친 종애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에 대해서, 서경의 육려 동림낭중(근위 단장) 유니(劉尼) 전중상서 원하(源賀)가 일어서, 종애를 살해해, 황태자 탁발황의 장남 탁발준을 옹립 했다."

 

(자료 : 문성제, 위키백과)

 

"Euric (Gothic*Aiwareiks,[1] see Eric), also known as Evaric, or Eurico in Spanish and Portuguese (c. 420 – 28 December 484), son of Theodoric I, ruled as king (rex) of the Visigothsafter murdering his brother, Theodoric II,[2] from 466 until his death in 484. Sometimes he is called Euric II......

 

Upon becoming king, Euric defeated several other Visigothic kings and chieftains in a series of civil wars and soon became the first ruler of a truly unified Visigothic nation. "

 

(source : Euric, Wikipedia)

 

 

4) 북위의 수도(낙양) 이전 <493 (508)>및 서고트왕국의 수도 (Narbonne)이전 

 

북위의 효문제는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효문제는 471-499 재위 기간인데, 고트족 시기로 보면 (486-514)년 기간으로,  Alaric II (484-507)와 Amalaric(507-531)에 걸쳐 있다. 그 중에서 수도이전 시기 493(서양시기:508)년은 Amalaric왕 시기에 해당한다. 즉 이시기에는 Gesalec이 대리통치(507-511) 했는데, 프랑크와 Burgundians에 밀려 수도를 Toulous에서 Narbonne로 옮긴다. 이 Narbonne가 낙양이 아닌가 한다.  이후 계속 밀려 고트족은 Barcelona까지 수도를 옮기는데, Theodric the Great의 군사적 도움으로 Gesalec이 폐위되고 Toulouse지역까지 회복한다. 

북위의 효문제는 풍태후의 섭정을 받다가, 490년 (서양시기 505년) 친정을 시작하여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효문제 시기 풍태후의 섭정 시기는 Alaric II의 재위기간으로 나타난다. 효문제의 친정시기 8년(505-513)은 Gesalec 대리통치시기(507-511)에 해당한다. 

서고트왕계에서도 Amalaric (507-531)시기에 이러한 섭정의 양상을 보였다. Alaric I의 손자인 Alaric II가 Battle of Vouille (프랑스 Poitiers 부근)에서 프랑크 Clovis I에게 패하여 전사하자 (507년), Alaric II의 적통인 Amalaric이 너무 어려 비적통인 Gesalec이 507-511 기간동안 대리 통치했다. 그러나 이후 Gesalec은 프랑크의 Clovis I, 프랑크와 연합한 Burgudians과의 전쟁에서 패해 수도 Toulouse에서Narbonne으로, 다시 Barcelona 등으로 도주를 계속하자, 동고트족왕 Theodoric the Great 는 Gesalec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Gesalec를 폐위하고, 서고트왕국을 511-526 (15년)기간동안 대신 통치했다. 그후 526-531년 기간동안 Amalaric이 성인이 되자 친정했다. 

 

"북위 제5대 황제 헌문제(献文帝)의 맏아들로써 황흥(皇興) 원년(467년) 8월 29일(양력 10월 13일)에 태어났다. 효문제의 생모인 부인 이씨(李氏)는 황흥 3년(469년) 자결을 강요당했는데, 당시 북위는 외척의 전횡을 피하기 위해 황태자가 세워지는 경우 그 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자귀모사子貴母死). 황흥 5년(471년) 아버지 헌문제가 적모(嫡母) 풍태후(馮太后)와 대립하다 패하고 풍태후의 압박으로 8월 20일(양력 9월 20일) 반강제로 양위해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효문제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1] 즉위한 뒤 대대적인 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연흥(延興)이라 고쳤다.

 

풍태후는 헌문제의 치세 때부터 실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펼치고 있었는데, 헌문제를 퇴위시키고 효문제를 즉위시켰을 때는 겨우 다섯 살이었기에, 그녀는 다시금 어린 황제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행한다. 이는 태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풍태후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났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반록제(班禄制)나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 등의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 재정(공조公調)과 지방재정(조외調外)을 분리[2]하는 등 북위의 중앙집권화에 힘써 많은 치적을 쌓았다. 풍태후는 태화(太和) 14년(490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 효문제는 풍태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닷새 동안이나 식사를 들지 않고 넉 달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들어 풍태후가 실제로 효문제의 생모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풍태후가 죽은 뒤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지만, 풍태후의 정책은 그대로 유지 계승되어 북위는 중앙집권과 한화를 추진해 나갔다.

 

우선 태화 17년(493년) 평성(平城)[3]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를 강행하였다. 이때 효문제는 반대를 예상하고 (斉) 원정을 구실로 낙양에 이르렀다가, 그곳에서 여러 장군들의 남정(南征)에 대한 간언을 따르는 조건으로 낙양 천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

 

그는 선비의 성씨를 한풍(중국풍)으로 고치기로 하고 국성(国姓)을 탁발(拓跋)에서 원(元)으로 고쳤으며, 신하들에 대해서도 반강제적으로 한풍 성씨를 하사하였다. 그 밖에도 선비의 말과 복장 비롯한 선비족의 풍습을 금지시키고 선비식 관명을 배제하는 등 선비의 한화정책을 추진해나갔다. 나아가 한족과 마찬가지로 선비족 귀족의 등급을 매기고 선비족과 한인 명족(名族)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선비와 한인의 융화, 한인 사회에서의 선비의 명족으로써의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또한 한족의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부분 채용하여 남조를 본뜬 북조귀족제를 성립시켰다.

 

태화 23년(499년) 4월 초하루(양력 4월 26일)、곡당원(谷塘原)의 행궁(行宫)에서 33세로 붕어하였다. 사후 묘호를 고조(高祖),시호를 효문황제(孝文皇帝)라 하였다......

 

효문제에 대한 평가

 

효문제의 치세에 북위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효문제는 풍태후의 개혁을 이어받아서 보다 나아간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북위는 그때까지의 유목민 중심의 국가 체제에서 보편적인 국가 체제로 변모하였고, 훗날의 수 왕조에 의한 중원 왕조의 재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그런 한편으로 급격한 한화정책의 추진으로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일면 지금까지 내려온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상무 정신은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동시에 지배자층이었던 선비족의 불만을 초래하였는데, 496년에 옛 도읍 평성(平城)에서 일어난 반란에는 효문제의 맏아들로 황태자였던 원순(元恂)도 가담했을 정도였다. 반란은 단기간에 진압되었고 효문제는 맏아들 원순을 폐적시키고 처형하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불만은 사그러들지 않았고, 효문제 사후 육진의 난(523년)이라 불리는 반란으로[4] 북위의 동서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자료 : 효문제, 위키백과)

 

 

3. 서고트왕국인 북위가 고구려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자료

 

1) 북위(효문제)와 백제(동성왕)와의 전쟁과 한성

 

백제 역사에서 북위와 484, 488, 490 세번에 걸쳐 전쟁하였다고 역사는 말한다. 

484년에는 북위(효문제)가 백제(동성왕)에 대해 승리했고,  488, 490년에는 북위에 대해 백제가 승리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 전쟁은 북위로 판단되는 서고트왕국과 로마편에 서는 Clovis I의 Frank와 로마제국의 일부로 판단되는 Burgundians (월지국, 백제?)과의 치열한 전쟁으로 사료된다. 

484, 488, 490 년도는 서고트족 시기로는 484+15=499년, 488+15=503년, 490+15=505년이 된다. 이때는 서고트족의 Alaric II (484-507)시기이다.  아래 지도에서 보면, 서고트왕국이 500년이후 프랑크 Clovis I 및 Burgundians과의 전쟁에서 많이 밀리고 있다. Alaric II를 이은 Amalaric왕때에는 더욱 밀려, 동고트왕국의 Theodoric the Great의 도움으로 겨우 Toulouse, Narbonee를 회복할 정도이다. 

 

백제 동성왕이 488, 490년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Burgundians이 프랑크와 합세하여 서고트왕국인 북위에 이겼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백제 동성왕은 482년에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했다고 기술되며, 483년에는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했다고 하였다. 484에는 위가 공격했다고 했다. 484년+15년 = 499년 즉 약 500년의 서고트왕국의 상황을 아래 지도에서 보면, Burgundians왕국이 요서(요수인 론강의 서쪽)에 2현정도로 있다. 즉 한산성은 여기에 있었다는 추정이다. 

 

따라서 장수왕이 475년 한성을 함락했다는 것은 고트족 역사에 나오는 이 근처의 Clermont점령 역사 (475-507)와 일치한다. (아래 자료 참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문자왕은 507년 말갈과 함께 백제 한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횡악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했다. (이 기록에서는 15년 차이가 없다) 즉 서고트왕국이 475년 점령해서 507년에 다시 빼앗긴 Clermont(한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서고트왕국이 북위이면서도 고구려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Between 471 and 475, Auvergne was often the target of Visigothic expansion, and the city was frequently besieged, including data-once by Euric

Although defended by Sidonius Apollinaris, at the head of the diocese from 468 to 486, and the patrician Ecdiciusthe city was ceded to the Visigoths by emperor Julius Nepos in 475 and became part of the Visigothic kingdom until 507."

(source : Clermont Ferrand, Wikipedia)

 

Conquest of Clovis I and Kingdom of Burgundians at AD 500 (source : Wikipedia)

(By Altaileopard - Own work - based on File:Europe relief laea location map.jpg by Alexrk2,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2911450)

 

Clermont-Ferrand이 한성인가는 궁극적인 깊은 연구가 더 필요하나, 한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래 자료를 참조하면, 백제의 온조로 여겨지는 Augustus와 관련된 기술, 주위에 가까운 고원, 로마 Gaul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성곽의 존재 등을 고려하면 한산성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주요 부분을 번역하면,  Gaul지역의 가장 오래된 도시중의 하나로, Averni 중심지였으며, Julius Caesar가 침범하였으며, 그 도시가 Gergovia고원과 그리 멀지 않으며, 로마의 정복후(1세기)에 아우구스투스와 연관된 이름 Augustonemetum이란 이름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로마 Gaul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으며, 3세기경 성안에 사는 주민들이름을 따서 Arvernis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Clermont ranks among the oldest cities of France. The first known mention was by the Greek geographer Strabo, who called it the "metropolis of the Arverni" (meaning their oppidumcivitas or tribal capital). The city was at that time called Nemessos – a Gaulish word for a sacred forest, and was situated data-on the mound where the cathedral of Clermont-Ferrand stands today. Somewhere in the area around Nemossos the Arverni chieftain Vercingetorix (later to head a unified Gallic resistance to the Roman invasion led by Julius Caesar) was born around 72 BC. Also, Nemossos was situated not far from the plateau of Gergovia, where Vercingetorix repulsed the Roman assault at the Battle of Gergovia in 52 BC. After the Roman conquest, the city became known as Augustonemetum sometime in the 1st century[BC or AD?], a name which combined its original Gallic name with that of the Emperor AugustusIts population was estimated at 15,000–30,000 in the 2nd century, making it data-one of the largest cities of Roman Gaul. It then became Arvernis in the 3rd century, taking its name, like other Gallic cities in this era, from the people who lived within its walls.

(source : Clermont-Ferrand, Wikipedia)

 

즉 한성이 여기라면, 한성을 정복한 고구려 장수왕, 그리고 여기를 정복한 서고트왕국의 Euric왕과 연관되어, 서고트왕국이 고구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서고트왕국의 Balt Dynasty에 속하는 Alaric I은 광개토태왕이다. 

 

우리는 위에서 훈족과 고트족이 동일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훈족의 왕위 승계가 서고트왕국과 매치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광개토태왕으로 판단되는 Alaric I왕이 서고트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Balt Dynasty 출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의 서고트왕국은 당연히 고구려의 일부라는 것이다. 단지 북위가 이러한 서고트왕국의 왕계와 유사한 것을 보일 뿐이다. 서고트, 동고트란 구분도 후일 6세기에 나타났다.

따라서 고트족은 하나로서 단지 고구려, 흉노의 전통인 좌현왕, 우현왕의 개념이 더 강하다고 본다. 특히 동고트왕 Theodoric the Great가 서고트왕국이 프랑크에 몰릴 때, 군사적 지원을 하고, 서고트왕계를 계속 인정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Alaric II는 동고트왕 Theodoric the Great가 이태리에서 Odoacer에 의해 trap에 빠졌을 때, 지원군을 보내 Odoacer를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는 결국 같은 국가로서 지역적 분할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비록 왕권 다툼으로 일부가 이합집산의 형태를 보이긴 했으나, 이러한 형태는 모든 나라에서 일어 나는 공통된 왕권싸움 현상이다. 백제, 신라에서 모두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 신라라는 나라의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서고트왕국과 동고트왕국은 하나의 나라로 볼 수 있으며, 그래서 같은 고구려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고려한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장수왕 시기의 북위와의 잦은 교류가 이해될 수 있다. 조공이 아니라 잦은 교류와 연락인 것이다. 단지 중공사가들이 이를 조공으로 표현한 것 뿐이다. 

 

북위는 선비족의 나라라고 했다. 선비족은 Suebi라 필자는 추정했다. 고트족은 Suebi와 구분된다. 따라서 북위가 선비족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다. 선비족인 Suebi도 동고트족도 모두 그 원류가 북유럽의 스웨덴과 관련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이 몽골족, 돌궐족인지 이는 후에 더 검토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서고트족의 후예인 Basques주민과 한민족과 연관성

 

서고트족은 프랑크왕국에 밀려 711년 멸망할 즈음, 일부 귀족들은 피레네 산맥의 Basques지역, Cantaberian지역으로 피신했다. 필자는 본 블로그 글 '춤으로 살펴 본 조상들의 활동 영역'이란 글에서 Basques지역 춤이 우리 조상들의 춤이 아닌가 했다. 그러면서 Basques지역 음악에서 비롯된 Volero춤도 고구려와 관련된 춤으로 추정했다. 즉 서고트왕국이 고구려가 아닌가라는 간접적인 자료라 필자는 판단한다.  

 

우리는 '광개토태왕 비문을 통한 정벌지역 추정'이란 글에서 이베리아반도의 Sae Jorge Castle이 광개토태왕 비문에 나오는 사조성이 아닌가 했다. 리스본에 있는 이 지역은 토욕혼이 있던 지역이다. 본 블로그 글, '토욕혼은 포루투갈에 있던 Suebi왕국이다' 라는 글에서 토욕혼의 위치를 지금의 포루투갈 지역으로 추정했다. 광개토태왕은 토욕혼을 정벌했다 기록되었다. 사조성은 한의 지역이라 했다. 즉 마한지역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우리는 백제의 일부가 남부 프랑스에 있는 것을 확인 했다. 이곳이 한산성이라면 백제의 건국지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즉 마한이 이 지역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후일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여하튼 이베리아 반도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과 밀접한 지역인지도 모른다. 

 

이상으로 남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서고트왕국은 북위이며 동시에 고구려라는 방대한 주제에 대해 일단락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