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활동한 한수(漢水) 유역은 프랑스의 르와르강 유역에 있었다

2023. 1. 3. 12:07과거의 생각

 

'의문의 한 중 일 역사'가 마지막편으로 이어집니다.

 

 

X. 백제가 활동한 한수(漢水)지역은 프랑스의 르와르강 유역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한수(漢水) 이북에서 백성을 징발해 쌍현성을 쌓았다는 기록(무령왕, 523)이 있고 근초고왕시 한수 이남에서 병사들을 사열했다(369)고도 한다. 한수 관련 기록은 구수왕(221), 아신왕(397) 시기에도 있다. 한강 관련 기록 (BC 5, AD 116, AD 187, 455)을 한수로 본다면 백제 초기부터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한성(漢城)도 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백제의 한성, 한수 유역에 대한 지배는 온조왕 시기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삼국사기 자료는 말한다.

 

그런데 중국 남북조 시대의 마지막 남조의 나라인 진(陳)나라는 그전의 남조 나라가 차지했던 한수(漢水) 유역을 빼앗기고 남조의 나라중 제일 영토가 작았다고 기술된다.

 

“한수(漢水) 유역과 사천성은 서위(西魏)를 이은 북주(北周)에 정복 당하고…”

(자료 : 남조 진(陳), 위키백과)

 

그리고 남조의 진(陳)나라는 북제(北齊)가 장강을 건너 (수도) 건강(建康)을 함락하고, 589년 북주를 이은 수(隋)나라에 의해 멸망 당했다.

 

그렇다면, 백제가 중국의 장강이남 남조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한반도 식민사학자들과 중공의 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지 궁금하다. 그것도 백제 초기부터 무령왕 시기(523)까지 한수가 언급되니, 중국의 장강이남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 역사서 만주원류고에서 백제는 요서에 2개현을 두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 현재의 중공지역과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백제는 한반도에도 있었고, 동북쪽의 요하 서쪽에도 있었고, 양자강 이남에도 있었다는 것이 된다. 북위와의 전쟁 기록도 삼국사기에 있으니, 백제는 북위의 위쪽에도 있었고, 북위의 남쪽에도 있었고 한반도 서쪽에도 있었다는 그야말로 우스개 소리가 된다. 즉 백제와 중국의 역사지가 이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담로지역은 동아시아까지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백제의 본거지는 다른 곳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스운 상황은 필자가 추정한 프랑스지역을 중국사와 요서의 백제 지역으로 추정하면 모두가 해결되며, 아구가 맞는다. 필자는 론강이 요수라 했다. 즉 요서라면 프랑스의 동쪽, 론강의 서쪽지역이 된다. 이곳에 남조의 진나라가 있을 수 있다. 장강은 르와르강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 남제가 있었을 것이다. 즉 동성왕이 북위와 전쟁을 할 때, 위치한 곳이다.

 

온조가 남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운 곳은 이 근처와 이태리 북부로 여겨진다. 한산은 이태리 북부 알프스산맥의 어디가 아닐까 한다. 이곳에서 부아악에 올라 보니, 동쪽은 높은 산으로 막혀 있고, 서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남으로는 평야가 있다. 그래서 하남 위례성이 이 근방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세력을 넓혀 프랑스 르와르강 주위 한성을 차지한다. 온조왕 25년 즉 AD 7년, 삼국사기 기록에는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이때 한성을 차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수 주위의 한성은 프랑스 르와르강(=장강) 이남의 Clermont-Ferrand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비류가 남으로 내려와 바닷가에 세운 미추홀은 지중해변의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요수 즉 론강의 지류 Jadron river로 추정되는 주몽의 졸본부여의 졸본천이 있고, 이에서 남하하여 온조와 비류가 백제를 세운 것이다.

 

한수와 한성지역은 론강의 서쪽 즉 요서지역이 된다. 또한 남조의 지역이 된다. 남조 진나라는 동쪽으로 있어 남제 등의 지역과 일치한다. 동성왕시 백제는 발칸반도의 백제와 프랑스의 요서지방의 백제 (즉 남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크 역사에서는 이 지역에 부르군디왕국이 있었는데, 동성왕 시기에, 부르군디왕국에서 형제간 싸움이 있어 동생이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즉 동성왕이 형이 있는 남제에 보낸 서찰내용 즉 행안국 장군 등의 지위 임명을 허락해 달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동성왕은 북위와 3차례에 걸친 전쟁을 한다. 한번은 지고 두번은 이겼다. 즉 남제 지역에서 형을 꺾고 차지한 지역에서 북위와 전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성으로 추정되는 Clermont-Ferrand에서 고구려 문자왕이 507년 말갈과 연합하여 한성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횡악에 머물렀다 했다. 여기서 횡악은 피레네산맥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동고트왕국 (이태리반도와 그 우측)과 서고트왕국(이베리아반도 지역)이 고구려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서고트왕국은 한때 Orleans까지 공격하고 Clermont-Ferrand을 475-507년 기간동안 차지했다고 한다. 즉 한성백제를 멸하고 차지한 지역이다. 그러나 507년 문자왕 시기에 또는 그 전에 한성을 다시 백제 무령왕에 빼앗기지 않았나 한다.

 

백제 비유왕 시기 455년에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나고 비유왕이 죽었다’ (비유왕 29년 9월) 검은 용은 고구려를 의미한다고 본다. 즉 한수유역에서 이미 고구려와 다툼이 있었다는 것이다.

 

Loire river map in France (source : Wikipedia)

 

피레네산맥으로 보이는 횡악에 대해 삼국사기에 백제 다루왕 시기(AD 31)부터 진사왕때(AD 391)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미 백제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 다루왕 4년 9월 (AD 31) : 횡악 아래에서 사슴을 사냥하다

백제 기루왕 17년 8월(AD 93) : 횡악의 큰 바위 다섯개가 땅에

떨어지다

백제 진사왕 7년 8월 (AD 391) : 횡악 서쪽지역에서 사냥하다

 

 

이러한 백제의 장강이남의 역사는 남조 진을 제외하고 중국사의 남조 육조(六朝)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육조는 손오(동오) (229-280), 동진(317-420), 유송(420-479), 남제(479-502), 양(502-557), 진(557-589)에 해당한다.

 

남조의 진(陳)은 진흥왕 시기의 신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한성을 취했다 했다. 진흥왕이 낙랑군공이란 직책을 북제로부터 받은 것이 565년이다. 낙랑군은 필자는 이태리북부라 추정했다. 즉 롬바르디왕국이 진흥왕이 정복한 지역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동남부지역까지 진출하여 남조의 진나라를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남조의 진나라는 557-589년 기간에 존재하는데, 진흥왕 시기에 시작하여 진평왕 시기에 끝난다. 남조의 진나라는 589년 망하는데, 진평왕 10년에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남조의 진나라가 망하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 기록 참조)

 

진평왕 8년 3월 : 천둥과 벼락이 치다 (586)

9년 7월 : 대세와 구칠이 바다로 떠나다 (587)

10년10월 : 상대등인 노리부가 죽다 (588)

11년 3월 : 원광법사가 진에 들어 가다 (589)

 

 

남조의 진나라는 진(陳)이 아니라 진(眞)일 수도 있다.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의 진(眞)자이다. 중국의 사가들이 감추기 위해 글자를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진흥왕은 북한산주를 세운다. 즉 한산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지역은 백제가 고구려와 싸울 때 많이 접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성왕이 과거 백제지역을 회복했는데, 신라 진흥왕에게 다시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북한산주는 알프스산맥의 일부로 보인다. 롬바르디왕국의 지역이다. 조선의 남한산성도 이곳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현재의 한반도와 중공지역을 중국과 한민족의 역사로 가정할 때, 코미디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 같은 모든 의혹들이 필자가 추정한 지역에서는 모두 풀린다.

 

필자는 ‘신라하와 조선하’라는 글에서 스위스 쥬리히에 근접한 Sihl river가 Silaha즉 신라하로 불린다는 것을 wikipedia자료를 통해 밝힌 적이 있다. 그들이 무심코 남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Silaha란 뜻을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태리 북부지역의 바이올린의 원조는 해족이 남긴 해금이라는 글을 썼다. 그리고 해족은 스위스의 Helvetii족이라 추정했다. 해족은 거란과 한민족 사이에 존재한 지역이었다. 필자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 왕험성이 스위스 지역에 있다고 추정했다. 즉 이 지역은 우리의 역사가 존재하는 지역이라는 많은 점을 필자는 발견한 것이다.

 

 

이상의 장황한 설명을 마치고자 한다. 즉 한반도와 중공지역이 우리의 역사, 적어도 삼국시대의 한중일의 역사의 주요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유라시아의 동쪽끝까지 이르렀을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담로가 유라시아 동쪽에까지 이르렀을 수 있다. 발해를 언급한 신당서에 의하면, 머나먼 동쪽 바다까지 발해의 영역이었다고 하니 발해의 영토가 고구려와 같이 유라시아 동쪽끝까지 이르렀을 수 있다. 그러면 신라도 현재의 중공지역까지 그리고 한반도까지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필자는 국뽕주의자가 아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가 유라시아 전대륙에 걸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광대한 영토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당시 비행기도 없이 말로 달리고 배로 이동하는 시기에는 주로 배를 이용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통일 전에는 고구려, 백제, 왜에 비해 수군이 약했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그러나 통일 후 장보고의 해상활동을 보면 통일 신라시대부터 할동 영역이 넓어졌을 수 있다고 본다. 8-9세기에 멕시코로 이동했다는 주장, 캘리포니아의 부상국 존재, 아리조나 주의 그랜드캐년 속의 Kincaid cave속의 거대 석조 불상, 중국사의 상나라가 이동해 왔다는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의 학자의 주장 등을 고려하면 우리의 상상 보다 훨씬 더 찬란한 선조들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한반도 경주의 사적을 보면, 고려시대에 이장을 했거나, 일제가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옮겨 놓았을 수도 있다. 동국조선이라는 자귀를 볼 때 동쪽으로 이동한 뉴앙스를 준다. 고려시대에도 ‘동국이상국집’이란 저서가 있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 몽골의 세력에 눌려 고려가 동쪽으로 더 이동한 지도 모른다. 고려 후기에 썼다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지명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곳이 많다고 했다. 즉 당시 김부식의 고려시대에 선조의 역사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가 우리 조상 동이족이 만든 것을 모른다고 임어당에게 핀잔을 받은 한국의 엘리뜨가 받은 수모와 유사한 것이다. 선조들의 찬란한 역사를 모르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 가는 우리를, 일제의 역사 조작 세력들은 지하에서도 비웃고 있을 것이다.

 

아직 필자는 더 연구해 보아야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잃어버린 역사를 찾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요즘의 한중일 지역은 어쩌면 모두 한민족의 역사 현장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러시아 지역도 대부분 우리의 역사 현장일 수도 있다. 필자는 유라시아 대륙 서쪽끝까지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자가 되었으니, 그런 가정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일본이나 중공이 기를 쓰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초조함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